2014년 1월 7일 화요일

비아리츠로 향하는 기차 안

비아리츠로 향하는 기차 안. 창밖으로 아침해가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지평선 부근에서 붉은색과 하늘색이 조금씩 섞인 모습. 아름답다. 순간적으로는 하늘이 아니라 바다처럼 보이기도. 검은 부분은 섬, 다른 부분은 해가 아주 조금 물들인 바다. 남태평양에 섬이 드문 드문 펼쳐진 광경을 연상케 하는. 

기차가 조금 더 달려 구름이 제법 낀 지역에 이르니, 그리고 해가 좀더 높이 솟으니, 이번에는 정말 장관이 펼쳐진다. 양떼구름으로 덮인 하늘이 다시 선연히 붉은 햇빛으로 덮인 모습. 

오랜만의 여행이라 긴장이라도 했던 걸까.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이다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잠들었는데, 새벽에는 꿈 때문에 깼다. 피를 토하는 꿈. 아침에 일어나 기침을 했는데 피가 나왔다. 그러자마자 든 두 가지 생각 : 왜 하필 집 떠나는 날 이런 사고가 터진 걸까, 여행지에서 다른 사람 고생시키면 어쩌나, 그렇잖아도 신세지러 가는 건데 ; 카페트에 떨어진 저 핏자국이 안 지워지면 어쩌나. 요사이 내 염려와 강박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 

깨니 맞춰둔 자명종이 울린다. 5시 45분. 7시 28분 몽파르나스역 출발이니 6시에 일어나 6시 20분경 나가면 되겠다는 계산에서 맞춰둔 시각. 아침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후자는 실패. 며칠 전부터 속이 더부룩한데 큰일이다. 예전부터 여행지에서는 늘 화장실 문제로 늘 골치가 아프곤 했다. 골치가 아프다면 사실은 과장이고, 사실 유일한 문제는 안색. 집이 아닌 곳에서 맘이 편치 않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배가 편치 않아 흙빛인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한 지인은 외지에서 처음 봤을 때의 나를 까만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파리에서 보니 하얘서 놀랐다고 할 정도. 

지하철을 타고 가며 랜덤하게 틀어놓은 아이팟에서 <마술피리>의 한 대목이 나온다. 타미노, 파파게노 그리고 3인의 마녀(?)들의 5중창. 그녀들이 타미노와 파파게노가 시험을 받느라 말을 걸어도 묵묵무답이자 포기하고 떠나가는 장면. Auf Wiedersehen. 그래, 안녕이다. 온 세상이, 심지어 아이팟마저도, 내게 떠나라 하고 있잖은가. 그런데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Stephanie Says. 이크, 이건 내가 당시에 자주 들으면서 흥얼거리던 노래인데. 

오랜 만의 홀로운 기차 여행. 예전부터 무언가를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을 때 여행이라는 방법을 이용하곤 했다. 전환의 계기라기보다는 그 결과 중 하나랄까. 정확히는 전환을 위한 다짐의 결과. 그렇다고 그 자체로 실제적 결과를 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상징 차원에 머물렀을 뿐이지만, 오히려 그 역효과-부작용도 상당했지만. 이를테면 리듬 변화로 인한 후유증이나 이후의 경제적 여파 같은 것들 말이다. 어쨌든, 돌이켜 보면, 즉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인생의 전환점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해왔던 셈. 2006년의 생장드뤼즈, 2008년의 스위스, 2010년의 고국... 그리고 올해 2013년의 비아리츠. 여기에 2011년 마지막날 이탈리아 피사로 떠났던 행적을 포함시켜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 이 여행의 경우에는 앞에 열거한 사례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관둔다.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대신에, 기억이 확실하게 나지는 않지만, 99년경 겨울 대천행과 2002년 혹은 2003년 역시 겨울의 춘천행을 포함시켜야 하겠다.
 
이번의 비아리츠행은... 내게는 이미 오래 전에 받은, 그러나 다행히도 유효기간이 끝나지 않은, ㄴ언니의 비아리츠 초대권이 있었다. 비아리츠에 초대해 줄만한 친절하고 여유있는 친구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 에릭 로메르작 <녹색광선>의 주인공 델핀처럼 말이다. <녹색광선>의 델핀은 비아리츠로 갔다 떠나는 날 기차역에서 만난 낯선 이와 생장드뤼즈로 향한다. 200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7년 전, 생장드뤼즈까지 가면서 그보다 파리로부터는 한 정거장 전이고 훨씬 유명세도 높은 비아리츠에는 발조차 디디지 않았던 것은 <녹색광선>의 영향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비아리츠에 가는 중이니 델핀의 행적을 거꾸로 밟고 있는 셈.

 
조금 더 가니 하늘은 어느새 붉은 기색 하나 없이 창백한 안개로 뒤덮여 있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 이번에 녹색광선을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으나. 이 기상현상은 해가 수평선으로 사라지는 순간, 굴절된 끝 부분이 보통보다 파장이 길어지면서 광선이 일시적으로 녹색으로 보이게 된 데에서 비롯됐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안개라면 해가 지는 것조차 볼 수 있을지 의문. 그래도 올해 마지막 해를 비아리츠에서 맞는다 생각하니, 여러 면에서 충동적이고 무리하게 강행한 여행이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2013년 12월 30일
비아리츠행 기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