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파리에의 헌사. 진부하지만 진정을 담아

파리에서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확히는 12년 1개월 반.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삼 분의 일을 보낸 것이다. 그것도 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 삼십 대를 온전히. 물론 힘들고 아프고 방황하고 절망하고 좌절한 나날이 더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았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듯.  

한 도시에 이 만큼 살았으면 어디든 최소한 한 번쯤은 흔적을 남겼음은 당연하다. 대부분은 파리 서부에 있는 16구에서 살았다. 흔히 부르주아 동네라 불리는. 산 햇수가 햇수이니만큼 이제는 고향 같이 느껴지지만, 개인적으로 농담 삼아 "파리 텍사스"라 부를 정도로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이고 문화적으로는 불모지다. 그런 만큼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 나아가 내 "젊음"의 상당 부분을 보내고, 파리에서의 삶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곳은 학교와 도서관이 있는 남동쪽, 그리고 미술관과 영화관이 몰려 있는 중심부였다.

오자마자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던 곳은 지난 11월 13일 바타클랑과 더불어 테러 공격을 당한 카페와 식당이 있던 페데브르와 볼테르 가 등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바타클랑. 아, 바라클랑.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이맘 때.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던 ㅅ 언니와 욜라텡고 콘서트를 보러 간 곳이 바로 바타클랑이었다. 스탠딩 콘서트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일찍 가서 외투를 무대 가장자리에 걸쳐 놓고 연주자들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서 공연을 본 것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한국에서 ㅅ 언니가 보낸 안부 메시지를 보니 서서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들어가기 전에 근처 빨래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샌드위치를 먹었던 것, 입구에서 들어서니 바로 객석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 뒤편에 바가 하나 있던 것, 나와서 레퓌블리크 광장까지 밤거리를 걸어가 지하철을 탔던 것 등등. 


이번에 테러 사건이 일어난 곳은 파리 중동부에 위치한 10~11구. 부유한 은퇴자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서부의 전통적 부르주아 동네와는 달리, 자유로운 영혼과 의식을 가진 젊은층이 많이 살아 흔히 보보, 즉 부르주아 보헤미안 동네라 불린다. 전통적 구분에 따르자면 부르주아 지식인 정도에 가깝겠지만, 좌파 성향이되 극좌를 지지하지는 않고,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리는 혜택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즉 급진적 "혁명"을 부르짖지는 않아도 그 대안이나 차선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경제 사회적 불평등 해소,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이민 정책 등의 좌파적 의제들에 호응하는 면모들을 볼 때, 예전 파리 좌안의 이른바 샴페인 좌파와는 계급적으로 혹은 세대적으로 다르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조사에서 드러나는 인구사회학적 사실 못잖게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이 갖는 역사적 지정학적 문화적 상징성이다. 이곳 주민과 더불어 이곳에서 일하거나 이곳을 거쳐가는 이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활기찬 거리의 풍경은 파리 텍사스 주민의 눈에는 다소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다. 다양한 문화와 취향과 출신 지역 및 배경 등등이 자유로이 공존하는, 21세기 파리가 가진 고유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 파리 시장인 안느 이달고가 사건 직후 바타클랑에서 말했듯 우리가 좋아하는 파리. 

현재도 현재지만 역사 또한 남다르다. 파리가 워낙 오래 된 도시인 데다가, 그야말로 국민/국가 차원에서 역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프랑스의 수도인만큼, 도대체 "역사적"이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이 공간의 역사는 확실히 남다르다. 바스티유, 레퓌블리크, 불르바르 볼테르에서 생마르탱 운하, 나시옹, 그리고 좀더 북쪽으로는 벨빌에서 페르라쉐즈로 이어지는 지선은, 한때 혁명을 꿈꾼 적 없는 사람도 꿈을 꾸게 한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테러 이전의 <샤를리 엡도> 사옥 또한 자리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새로 쓰여지는 역사. 그리고 새로 쓰인지 불과 1년도 채 안 돼 다시 쓰여진 역사. 바타클랑, 크리옹, 콩투아 볼테르 같은 이름과 더불어.

이렇게 오래 살고 구석구석 안 다닌 데가 없어도 아직껏 "파리지엔느"라 자칭하자면 머뭇거리게 된다. 이 도시에 대한 애정에서만큼은, 이 도시가 일군 역사와 예술과 학문과 삶의 양식 및 태도에 대해서도 그렇고,  뭇 파리지앵 못지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토착민"들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하고 은밀한 경계심, 거기에서 느껴지는 소외감과 위축감, 이런 것들은 참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는 파리의 문제라기보단 내 문제에 기인한 바 크겠다. 어디 파리에서뿐이겠는가. 타자의식과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한 것이었다. 심지어 나고 자란 땅에서도 그리했으니, 어딜 가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거기에 파리가 갖는 특수성이 있다. 고향에 왔는데 모든 것이 낯선 기분, 익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낯섦, Unheimlichkeit를 느끼게 해주는 도시로 파리만한 한 데가 또 있을까. 물론 파리가 내게 주는 정서는 프로이트가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 느낀 것과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20~30년대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같은 "파리의 미국인"들이 느낀 것과도 다르고. 나름 파리지앵인 한 친구는 내게 말했었다. 너나 나 같은 외계인이 살기에 파리만큼 적당한 도시가 없다고. 크리스테바의 말마따나 "프랑스만큼 외국인이 철저한 이방인으로 머물 수 있는 곳도 없다"(« nulle part on n’est plus étranger qu’en France », Etrangers à nous-même, 1988)면, 그러한 프랑스의 중심은 단연 파리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동양인 여성이라는 영원한 타자로서 수많은 익명적 군중의 하나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특권이다. 타자에게 대체로 개방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요새는 "관광객")로서일 뿐, "동일자"로의 진입에 있어서는 사뭇 폐쇄적인 프랑스 공화국에서, 파리의 그 수많은 좁은 길들--오, 내가 더없이 사랑하는--, 그리고 그 길들을 가득 채운 군중의 물결은 이방인에게는 공화국의 저 신성한 "공적 공간" 내부에 놓인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이자 은신처다.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이 든다 해도 그것이 실존적 위협이 되지는 않고, 오히려 그 위치를 생산적으로 이용해서, 이를테면 벤야민의 산보객처럼, 성찰적이고 비판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조건을 이 도시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번 테러 사건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충격을 안겼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익명적 군중을 향한 무차별적 공격이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나일 수 있었다(Ça aurait pu être moi)"라는 말로 집약되는. 파리가 익명적 개인에게 제공해 온 군중 내의 그 아늑한 은신처가 위협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이 "초현실적 상황"은 출신, 종교, 계급 등등의 갈등과 현실 사회의 모순이 무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모두가 잠정적 공격의 대상일 가능성,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 폭력에 대한 분노 앞에서 평등해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물론, 파리. 우리가 좋아하는 파리. 그리하여 모두가 파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도 이제, 이제서야 비로소, "파리지엔느"임을 자각하고 또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일요일, 꽃과 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 지난번 샤를리 추모집회 때처럼 혼자서. 마침 집에 있는 소국 화분에 꽃이 피어 몇 송이를 따다가 조그만 부케를 만들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초도 샀다. 그리고는 바스티유로 갔다. 원래는 리샤르 르누아르 가를 지나 바타클랑까지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가는 길목 어딘가 초와 꽃과 쪽지가 소규모로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희생자 중 누군가의 흔적이 얽힌 곳일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거기에다 꽃을 놓고 초에 불을 붙였다.

2015년 10월 31일 토요일

우리 가는 길은 여럿이어도 돌아보면 결국 한 갈래이러니

ㅇ 언니 떠나는 길에 부쳐

서울, 2003년 늦여름-초가을

로잔, 2008년 늦가을

 파리, 2015년 봄

파리, 2015년 여름 초

파리, 2015년 한가을

2015년 10월 7일 수요일

오르페우스는 너다

The Reflektor Tapes 의 개봉을 기다리며 뒤늦게서야 들어본 아케이드 파이어의 2013년 앨범 Reflektor. 내게 이들의 음악은 뭐랄까, 너무 그래머러스하달까, 좀 거창하고 버거운데, 그런데도 이들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도전 및 실험 정신이 있고 특히 공연실황을 볼 때면 역력히 드러나는 진지함과 진정성이 ( 버틀러는 지금도 데뷔하던 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열과 성을 다해 노래한다, 고 피치포크의 평론가는 말한다) 마음을 움직이고 그것이 귀까지 열리게 하는 것이다.

이번 앨범에서 유난히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 노래가 둘 있었으니 그것은 사이드 비의 "Awful Sound"와 "It's Never Over". 각각의 부제는  Oh Eurydice 와 Hey Orpheus.

오르페우스 신화는 앨범 재킷에서도 보듯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는데 이 두 곡은 말하자면 앨범 주제곡. 앞 곡은 "끔찍한 소리" 즉 침묵을 견디며 오직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고통을 하소연하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부르는 노래.  뒷 곡은 그런 오르페우스의 뒤를 따르는 에우리디케의 답가. 아니 에우리디케이기보다는 전지적 화자일까? 강 건너편에서 메아리처럼 (De l'autre côté de l'eau/Comme un écho) 들려오는 목소리.
Hey, Orpheus!
I'm behind you
Don't turn around
I can find you
[...]
It seems so important now
But you will get over
It seems so important now
But you will get over
And when you get over
When you get older
Then you will remember
Why it was so important then
[...]
Then you will discover
That it's never over
돌아보지 말라고. 나 뒤에 있다고.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정 보고 싶으면 노래를 부르라고 (노래, 그거야말로 오르페우스의 특기 아닌가). 너무 빨리 뒤돌아보지 말고 길을 다 지날 때까지 기다리자고.  끝이 나면 알게 될 거라고. 지금은 중요한 것 같아도 다 잊을 거라고. 이겨낼 거라고. 나이가 좀 더 들면 알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야 비로소, 알게 될 거라고. 왜 그땐 그게 그리 중요했는지. 그리고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임을. 하! 그리고 그 뒤에 오르페우스 신화의 에피소드를 암시하는 대목들이 암시되는 함축적이고 압축미가 뛰어난 대목들이 이어진다.*

노래를 듣다 문득, 저 목소리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오르페우스는 너다. 돌아보지 말고 길을 끝까지 가야 할 것은 너다. 길의 끝에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깨달음의 내용이, 지금은 중요한 것 같아도 별 일 아님이 되든,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임이 되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사실 그 누구도 뒤에서 부르지 않는다. 돌아보는 것은 네 자신이다. 일단은 길을 끝까지 가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오직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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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Eurydice!
Can you see me?
I will sing your name
'Til you're sick of me
Just wait until it's over
Just wait until it's through

But if you call for me
This frozen sea
It melts beneath me
Just wait until it's over
Wait until it's through

Seems like a big deal now
But you will get over
Seems like a big deal now
But you will get over
And when you get over
And when you get older
Then you will remember

He told you he'd wake you up
When it was over
He told you he'd wake you up
When it was over
Now that it's over
Now that you're older
Then you will discover
That it's never over

It's never over (it's never over) [8x]

Sometime (Sometime)
Sometime (Sometime)
Boy, they're gonna eat you alive (eat you alive)
But it's never gonna happen now
We'll figure it out somehow

Sometime (Sometime)
Sometime (Sometime)
Boy, they're gonna eat you alive (eat you alive)
But it's never gonna happen now
We'll figure it out somehow

Cause it's never over
It's never over (it's never over) [6x]

We stood beside
A frozen sea
I saw you out
In front of me
Reflected light
A hollow moon
Oh Orpheus, Eurydice
It's over too soon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그래도 가끔은 하늘을

Paris, été 2015. iPhone 5c et 4.

Ménilmontant, 20e
Av. de France, 13e
Pont d'Alma
Bnf, entrée Est
Centre Pompidou
Bnf, entrée Ouest
Tuilerie 

2015년 8월 25일 화요일

수정, 옥희, 해원, 선희... 홍상수 영화의 여성성과 시간성

홍상수는 제목에 대한 감각, 말하자면 타이틀링 센스가 뛰어난 작가 중 하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북촌방향> 같은 제목들은 친숙하면서도 참신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돼지, 우물, 강원도, 생활 등등의 일상적인 단어들을 차용하되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아라공의 인용이고, 영화 내용과 무관하지만 (반어법이라면 모를까), 바로 저 어구를 제목에 가져다 붙인 감각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영어제목들도 듣기에 제법 그럴싸하다.

그런 만큼 홍상수 영화에서 제목이 명목상에 지나지는 않으리라 믿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제목에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부분, 아니 전부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쓰이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우연이라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수사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우연에 관해 명시적으로 천착한 <북촌방향> 외에도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우연을 라이트모티프로 쓰고 있는 작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이 지점에서만큼은 홍상수가 "우연이라 해서 요행한 것은 아니다(Le hasard n'est pas fortuit)"를 좌우명으로 삼은 로메르의 제자임은 확실하다. 우연이고 특별한 법칙이 없다 해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렇담 저 여성형의 이름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 수정>은 세기말적 퇴폐와 염세와 비관으로 가득했던 90년대 말의 첫 두 작품 이후 2000년대를 연 영화. 돌이켜보면 코미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였던 것 같다. 장르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의미에서의 전환. 냉소와 자기조롱과 희화화로. 그러나 무엇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같은 사건과 역사를 세 인물들의 상이한 시점에서 전개하는 방식의 새로움에 경탄하던 내게 당시 사람들이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들며 그때부터 이미 진부함을 언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사 다시 생각해 보면 진부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다중시점이라는 하나의 틀로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성급하게 봉합한 비평적 태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더 주목해서 봐야 했던 것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 그 장치가 비록 진부하긴 했을지언정, 사건들과 시간이 새롭게 짜여지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홍상수 세계에서 이 영화가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정"의 표제 등장에 있지 않았을까. 수정은 처음 두 남자 각각의 버전에서는 그저 새침하고 애태우는 처녀(!)이거나 흔들리는 갈대로 그려지는데, 이 버전들은 결국 마지막 수정 버전에서 최종적으로 종합된다. 그러나 수정은 셋 중 가능한 하나의 버전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나아가 이후 역사의 전개에 있어 열쇠를 쥐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시선에서 사건이 재해석될 때, 아니 사실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질 때, 우리는 그녀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고, 아마도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부잣집 아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했고,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였던 사건이 실은 그녀에 의해 교묘하게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수정의 시선 및 역사 주체로서의 힘은 거의 전적으로 작가에게서 온다. 그녀는 사실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작가의 대리물, 아니 그마저도 안되는, 여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체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뭐 이런 구조야 굳이 이 작품에, 아니 이 작가에게만 해당되겠냐마는... 어쨌든 이런 이유로 영화가 내겐 불편했고, 당시 같이 본 이들에게도 그러했고, 그들과 술 마시며 한탄했다 ("영화가 왜 이리 척척해" 하고 그 낭창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ㅅ 언니의 기억이 문득). 그리고는 한동안은 홍상수 영화로부터 멀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그의 관객이 되었다. 언젠가부터라 했지만 그 시점은 정확히 꼽을 수 있다. <해변의 여인>부터였다. 작가의 페르소나와 그 남성적이고 독단적인 시선이 영화를 지배하던 경향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그래도 좀 생기와 존재이유가 느껴지는 여성 인물의 등장 (고현정). 그때가 홍상수 영화에서도 어떤 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최소한 관객으로서의 내게는 그랬다 (이는 또 로메르적 전환이라고도 하겠다. 실로 로메르에게서도 Contes moraux 연작에서 Comédies et proverbes 연작 사이에 유사한 종류의 전환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좀더 밀고 나가면 일종의 타자의 발견이자 여성성의 (재)발견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니" 식의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찬미이거나 변명은 아니고 (그렇다 해도 참기 힘든데 그러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마저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내겐 최악의 홍상수), 실제로 작가에게도 발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는 잘 몰랐거나 관심이 없던 신세계를 발견한 자의 경이 같은 것이 적어도 내겐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영화마다 아주 미세하고 느릿한 변화가 감지되었고(이를테면 엄마라는 존재의 등장 같은 것), 그런 변화들을 추적하는 재미가 붙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인 듯해도 그 반복의 대상이 동일한 것은 아니어서 겨우 식별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담지하고 그러면서 점진적 변화를 이루는 생명체의 성장 및 진화 과정을 참관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홍상수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보는 최근의 거의 유일한 감독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서 개봉하는 유일한 한국 감독이라는 변인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수정 이후 다시 그야말로 타이틀 롤로 등장한 인물은 <옥희의 영화>의 옥희. 이 영화는 내겐 다소 충격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찡해져왔던 것이다. 세상에, 홍상수 영화 보며 내가 가슴이 찡해오는 경험을 다 하다니.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옥희의 존재. 아니 옥희라는 행위. 배우이자 행위주체(acteur ou bien même actrice !)로서의. 영화는 이전까지 홍상수 영화에 숱하게 나왔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감독/교수/지식인 남성이 아니라 영화과 학생인 옥희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시점이라 하지만 그녀의 시점은 구심점 혹은 초점이라기보다 그녀가 영화 안에서 스스로 만드는 영화, 그리고 삶을 그리는 수많은 가능한 시선이 만나는 교차지점에 가깝다. 그 어느 전지적, 아니 하다못해 우월한 시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시선의 해체. 시선의 탈중심화.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어진다. 비록 주인공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구도나 구조 면에서는 옥희의 경우와 유사하다. 역시 영화과 여학생이 구상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전개되고 게다가 이 전지적 작가의 역할은 같은 배우(정유미)가 맡았다. 그런데 이 작가의 페르소나는 또 이자벨 위페르가 맡은 프랑스 여성 안느이다. "시간을 때우고자 시나리오를 하나 쓰기로 한다. 주인공은 얼마 전 영화제에서 본 프랑스 여성 감독으로 한다." 이방인 여성의 시선. 그리하여 시점은 단지 한 평면에서 다중화될 뿐 아니라 다(차)원화된다.

그러나 정작 <누구의 딸도 아닌...>과 <우리선희>에서는 다소 주춤한 듯 보인다. 각각의 표제인물 해원과 선희는 사실 옥희보다는 수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수정만큼 절망적이는 않았던 것은, 해원이나 선희나 수정만큼은 아니어도 어쨌든 꽤나 답답한 상황인데, 그래도 그나마, 어떤 여성적 계기(moment)들이 있어 뭐랄까, 숨통 장치 같은 역할을 해준 때문일 것이다. 제인 버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해원 엄마 역으로 등장한 김자옥. 이 역시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 홍상수 영화에, 윤여정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김자옥을 보게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최소한 홍상수의 작품 세계에서는 다소 생경한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녀와 해원이 만든 모녀 관계가 내겐 참 낯설고도 신선했다. 아무리 떨어져 산다 해도 모녀가 어쩜 저렇게 서로를 어쩜 저렇게 남 대하듯 할까. 엄마가 딸한테 "얘, 넌 어쩜 그렇게 예쁘니? 미스코리아 나가보는 건 어떠니?"라질 않나, 딸은 딸대로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뒤태가 처녀처럼 날씬했다" 라질 않나. 근데 그래서 오히려 해원이의 해맑은 얼굴이 안돼 보이진 않았는데, 그에 반해 선희에게선 다시 안타까움이. 세 남자에 둘러싸인 선희. 그래도 마지막에 그 세 남자들이 모인 자리. 저마다 선희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서. 그러나 선희는 그 자리에 없다. 세 사람과의 관계와 시선에 얽매인 듯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그녀는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두 영화를 여성성-시간성을 두 축으로 하는 계보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최근작 <자유의 언덕>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일단 제목도 그러하고, 어쩌면 오히려 주인공이 시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시간에 대한 사변을 늘어놓으면서도 가장 탈시간적이고 무시간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영화가 위의 시간성-여성성 계보에 속하며 그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 모리는 읽고 있다는 시간에 관한 책에 관해 말한다. "결국 시간은 결국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경험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은 다 우리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이 이론에 대한 영화적 고찰이자 어쩌면 입증이다.

일본인 모리가 영어로 쓴 편지를 편지의 수신인인 권이 읽는다. 영화는 바로 권이 편지를 읽는 관점과 순서대로 진행된다. 그런데 권은 중간에 편지를 읽다가 떨어뜨리고 그 뒤로 편지의 순서는 마구 뒤섞이고 이에 따라 영화의 시간적 순서 및 서사도 뒤섞인다. 그에 따라 사건들은 반복해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화자이자 작자는 이방인 남성 모리이지만 여기에서 서사의 열쇠를 쥔 것은 독자이자 수신인인 권이다.  
 
펠리니의 <사티리콘>도 그러했다. <사티리콘>은 남겨진 중 최고의, 즉 가장 오래된 라틴문학이자 말하자면 사상 최초의 소설인데, 완본은 없고 다만 단편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남겨진 부분만 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전혀 안 되고 뭐가 뭐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니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포스트모던하다고도 헐 수 있는 것인데. 이를 펠리니는 있는 그대로, 즉 남아있는 판본 그대로 따다가 영화화했고, 그리하여 자연히 영화도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사실 펠리니의 다른 영화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가장 오래된 예술형식인 문학과 가장 최근에 발명된 형식에 속하는 영화의 조우. 여기에서 양자를 가르는 역사의 차이, 그리고 영화 탄생 후 흐른 1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무화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영화적 시간, 특히 현대영화에서의 시간, 이미지-시간과 (고전)문학적 혹은 서사적 시간성,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e, chronos+logos)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심리적 시간, 온전히 경험하는 가장 순수 상태의 시간(프루스트), 말하자면 지속에 가깝게 표상된다. 요컨대 베르그손적 의미에서 가장 덜 영화적인(cinématographique) 방식으로. 과장하면 가장 베르그손적으로.

<자유의 언덕>은 결말 또한 충격이었다. 몹시 비현실적이고 더더군다나 홍상수의 세계에선 더더욱 그러한, 그야말로 동화적인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극적으로 해후하여 나란히 언덕길을 걷는 두 사람 뒤로 모리의 내레이션은 거의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아이도 많이 낳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수준. 이십년 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하드코어 치정극 결말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이것은 혁명적이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그보다는 시간의 힘. 

2015년 8월 22일 토요일

틴더 시대의 도서관 쪽지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집에 와서 짐을 푸는데 쪽지가 하나 떨어졌다. 아무 종이나 찢은 데에 연필로 쓴 쪽지.
Salut ! Je t'ai vu [sic] à la bibliothèque mais je suis trop timide pour venir te parler en face à face. J'ai flashé sur toi comme un radar, tu m'a ébloui comme les étoiles dans le ciel en Atlantique. J'espère te revoir. Je serais là à 10h à la même salle qu'aujourd'hui.
번역하면 "도서관에서 보았다, 너무 수줍어서 면전에서 말을 걸지는 못했다, 레이다처럼 주시했다, 대서양 하늘에 뜬 별처럼 눈이 부셨다, 다시 보고 싶다, 내일 10시에 와있겠다, 다시 보길 바라며..." 그리고 하트. 그리고 이니셜.

근 사십년 만에 처음으로 받아보는 도서관 쪽지.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다 생각했다. -- 누군지 몰라도 나보다 스무살은 어릴 텐데. 머리를 잘랐더니 어려 보이나? 대서양 하늘의 별이라니,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요새는 거의 안 쓰일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신선하네, 그리고 내가 천문학적 비유에 약한 걸 어떻게 알았지? 등등. 그러다가 회의와 의심의 단계. -- 나한테 쓴 게 맞나? 잘못 넣은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 옆에 여학생이 하나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런데, 그러고 보니, 수신인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 아닌가? 타동사의 복합과거 변형은 목적격 대명사의 성수에 맞춰야 하므로 목적어인 "너"가 나이고 나는 여성이니까 그에 따르면 Je t'ai vu*e*가 되어야 할텐데 Je t'ai vu 라 쓰여있지 않은가. 만약 문법적 오류라면 그것도 좀 실망스러운 일인데.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시선공포증과 병적인 수줍음 모드로 복귀. -- 아니, 그렇담 나를 계속 감시했단 말인가, 그야말로 레이다처럼? 그렇담 내가 앉아서 졸고 있는 것도 다 봤겠네. 내일 열시부터 와있겠다고? 그럼 난 내일은 다른 데로 가야겠네.

그런데 그 이후로, 틴더니 미틱 같은 비교적 건전하고 이미 보편화된 만남 사이트/앱에서부터 최근 에쉴리 매디슨 같은 문제적 경우와 관련한 사태들이 벌어지는 걸 보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서의 쪽지 전달이나 하다못해 "시간 있으시면 커피나 한잔", 이 모든 종류의 고전적인 접근은 이른바 "틴더 시대"에 역행하는 반시대적인 행위다. 저 쪽지의 발신인은 아무래도 20-30대 "틴더 세대"가 아닌 그 이전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속한다 해도(하다못해 나처럼 가까스로라도) 시대의 흐름에 맞추지 못하는, 즉 실질적으로는 구세대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좀 궁금해지기도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2015년 8월 9일 일요일

노란 장미



몇 년 전 수퍼마켓에서 산 작은 장미 화분. 내 손에 들어온 많은 식물들이 그랬듯이(식물 뿐이랴, 동물을 포함, 거의 모든 생명체들) 얼마 가지 않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용케 잎과 줄기는 살아남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꽃을 피워내기에는 부족한 모양인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꽃이 피었다. 꽃망울이 무척 큰 데다 노랗기까지 하니 해바라기 부럽지 않다. 

노란 장미 하면 단연 <클레브 공작부인>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느무르 백작과의 남모르는 사랑에 애태우는 그녀. 궁중무도회에서도 그저 멀찍이서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꽂힌 노란 장미를 보는 순간 그녀의 안타까움은 보상되고도 남는다. 노랑은 금발인 그녀에게는 금지된 색깔. 금발이나 장미 둘 중 하나가 색이 죽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위해 백작이 대신 단 노란 장미는 그가 그녀에게 보내는, 오로지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마음의 표시였던 것이다. 

다소 잊혀진 편에 속했던 이 작품이 새삼 상기된 일이 비교적 최근에 있었다.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뜻밖에도 전대통령 사르코지. 참으로 뜻밖이기도 한 것이 사르코지는 프랑스 공화국의 전통이었던 말하자면 지식인 혹은 문인 대통령, 즉 문화 역사 예술 등에 조예가 깊은 역대 대통령의 계보를 깨뜨린 걸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지식인과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외면을 받은 걸로도.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인데, 그 내막인 즉슨, 그가 내무부 장관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2006년, 공무원 선발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프랑스에선 전반적으로 일반 교양(culture générale)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다, 아니 공무원 되는데 라파예트 부인 소설이 무슨 소용이냐, 공무원 구두시험에 <클레브 공작부인>을 출제하다니, 이 무슨 새디스틱하고 어리석은 일이냐, 라는 요지의 발언을 해서 엄청난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식인 및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감독 크리스토프 오노레는 항의의 표시로 바로 그 <클레브 공작부인>을 각색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덕분에, 역설적으로, 혹은 도착적으로,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판매량이 폭증하고 새 판본도 여럿 출판되는 효과가 나왔다고.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도 아마 당시의 열풍에 가담하면서였던 것 같다.

"사르코지 효과"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 당시에는 대학 민영화에 반대하는 대학생 및 연구진들의 장기 파업이 한창이었는데, 소르본느 문과대학 학생들이 집회에 노란 장미를 한 송이씩 들고 나왔던 것이다. <클레브 공작부인>을 읽었거나, 꼭 읽지 않았더라도, 시장논리와 실용노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론 뿐 아니라 실천까지도 포괄하는 영역이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생각하는 이들 사이의 은밀한 공모의식과 항거의 표시. 이래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프랑코필로 남을 수밖에 없나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클레브 공작부인>의 저 노란 장미 에피소드는 내가 참 좋아하는 대목 중 하나다. 얼마 전에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누군가가 듣더니, 아니 노란 장미와 금발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서, 위에서 말한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해야 했는데, 그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건 여주인공 시점에서 너무 자의적이고 과도하게 해석된 거 아니냐, 혼자 '소설 쓴' 거 아니냐(소설 속에서 쓰는 소설이라!), 그냥 우연찮게 장미를 달았고 또 우연찮게 그 장미가 노란색이었던 것일 뿐 아니냐, 고 반문하여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이 냉소적 반응의 주인공에겐 오래 연애했고 또 현재도 한참 진행중인 애인이 있다. 

결국 낭만의 이념을 실현하여 현실화된 낭만을 사는 자에게 낭만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거나 불필요한 장치인 것인가. 모든 이상-이념들의 속성이란 그런 것인가. 지도원리로서, 아니면 현실화 과정에서 필요한 "사다리"로서 기능하고, 목적이 이루어지면 과감히 그리고 영구히 차버려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모든 종류의 이념에 적용되어야 할  결론 : 지나치면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어 장애물로 기능한다.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지금은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다

코이레의 뉴턴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 : 지금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다. 

계획대로라면 어제까지만 해도 15장이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혼돈의 상태. 생각은 생각대로, 본문은 본문대로.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그것만 해도 그런데 하루는 꼬박 소일해야 할 것이다. 계획상으로라면 지금은 4장의 첫부분에 매진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침에 나오다가는 그런 생각도 했다. 도서관에서는 채워야 할 내용을 넣는 데에 주력하고, 그러니까 아직 쓰여지지 않은 4장과 6장을, 집에서는 뉴턴, 데카르트, 기타 등등, 이렇게 구분을 해서...? 그러나 지금은 현재 상태 점검도 안 돼있는 상태. 

어제는 무얼 했는가? 아침에는 또 돌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이전에 노트해 두었던 하인츠만의 2012 푸앵카레 100주기 콜로크 발표문을 정리. 푸앵카레 철학 전반에 관한. 관념론자인가 아닌가, 구조실재론자인가 아닌가 등등. 논리주의에 대한 푸앵카레의 반박.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국소적 인식론자. 따라서 구분해서 봐야 한다. 산술에 대해서는 직관주의자가 맞는데, 여기에서 직관은 매우 특수한 의미에서 쓰인다. 일종의 지적 직관. 수학적 귀납법. 그러고 보니 이거 참 재미있는 주제인데. 

여기에서 문득 스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국어 선생이 연역-귀납 추론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p가 1에 대해 성립하고, n에 대해 성립하면 n+1 에 대해서도 성립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손을 들어 그거랑 이른바 경험적 귀납, 즉 어떤 집합 S의 모든 원소 S={s1, s2, s3...}가 모두 P이면 S는 P이다,라 추리하는 건 다른 것 같다, 라고... 정연하게 말하지는 물론 못했고 더구나 왜 그런지는 더더욱 설명하지 못한 채, 그냥 "그건 좀 다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데서 그쳤는데,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시에 무척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푸앵카레-러셀 논쟁의 핵심. 푸앵카레는 여기에서 1에서부터 n이 무한대로까지 가는 모든 경우를 단번에 포착하는 직관의 능력을 보고, 선험적 종합 판단의 전적인 예라 보는 반면, 러셀은 그러니까 수학적 귀납법이란 것은 사실 말이 귀납법이지 이미 대전제에 결론이 주어져 있는 것을 분석해서 나오는 연역의 다른 이름이며 말하자면 각 경우에 대한 소연역을 축약한 것일 뿐이라 본다. 고등학생인 내가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던 바는 러셀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이와는 별개로 수학적 귀납과 경험적 귀납을 구분하는 문제 또한 중요하고, 푸앵카레도 이 차이를 강조한다. 경험적 귀납은 회귀 논리만으로 되는 게 아니고 경험 및 다른 원리, 이를테면 연속성 원리 같은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확성 면에서 아무래도 떨어지고 등등. 

다시 돌아가서. 공간에 관하여. 아, 공간, 이것이야말로 푸앵카레의 철학소(philosophème)이자 그 철학의 핵심. 구조주의의 근본 문제, 즉 구조 및 구조 내 원소(?)들의 생성과 구조 자체의 보존 간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앞서 말한 회귀에 따라 군(groupe), 일종의 구조를 제공하는 것은 정신. 그렇게 주어지는 군은 무한하다.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문제. 이 선택에 있어 정신은 경험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공간이 *생성*된다. 푸앵카레에게서는 이러한 공간의 생성 과정에 대한 기술과 설명이 처음에는 다소 초보적인 수준의 생리-물리학(Fechner 류의) 참조에 머물다가, 갈수록 체계화되고 정교화된다. 그 정점을 이루는 논문이, 루지에 등등이 지적한 바, On the Foundations of Geometry (1898).  간단히 말하면 외부 물체의 운동에 대한 감각 지각을 통해 형성되는 지각 공간, 이것이 가장 원초적인 물리적 공간이다. 어떤 운동은 내 시각과 촉각 지각에 의존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내가 몸을 돌리거나 위치를 바꾸면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다. 즉 위치 변환이 가능하다. 이로부터 무형(amorphe)의 외부 세계는 형태를 갖추고 물리적 공간이 된다. 이런 공간이 절대적 기준점을 가질 리 만무하다. 내 운동은 상대적이다. 상대운동의 원리에서 공간의 상대성 원리로. 그런데 이것과 기하학적 공간은 어떻게 관련을 맺게 되는가? 어떻게 이질적이고 유한하고 비대칭적인 물리적 공간이 무한하고 동질적이고 등방인 기하학적 공간과 동일시되는가? 이 모든 것을 좀더 명료하게 정리해서 상대성이론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여야 하는 것이 내 논문 6장의 과제. 하인츠만이 보인 것처럼 문제의 핵심은 상대성원리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 규약, 즉 선험적 *원리*인 동시에 경험적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 물론 여기에서 푸앵카레적 의미에서 규약 개념을 잘 새겨야 한다. 규약은 원래는 경험적 법칙이다. 물리학에서는. 기하학에서 공리가 규약이라고 할 때는 또 다른 문제. 그러나 그 논리적 성격은 기본적으로 같다. 참 거짓임을 판명할 수 없는 명제, 그저 편리성만을 따질 수 있는 명제라는 것. 편리성의 기준 또한 잘 새겨야 한다. 빛이 직진한다는 명제를 유지하고 그에 의존하는 모든 광학 원리들을 보존하면서 유클리드 평행선 공리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대로 두는 대신에 광학을 뜯어 고칠 것인가. 이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답 : 빛이 측지선, 즉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맞는데, 그 측지선이 직선이란 법은 없고 따라서 "직진"하리란 법은 없다. 곡률을 가진 공간에서 측지선 이동은 굴곡을 함축한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아인슈타인의 입장과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포괄한다. 다만 그 기준이 되는 편리성에 대한 이념이 달랐을 뿐.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이론에서부터 기본 개념들을 다 뜯어 고치는 게 더 편리하다고 본 것이고, 푸앵카레는 아무래도 좀더 보수적인 입장에서, 어쩌면 좀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다 고치는 건 어렵고 다 고치면 기존의 무수한 성과물까지 버려야 하는데,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하며 뉴턴 역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존하자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간과하지 말하야 할 것은, 하인츠만도 강조하고 있는 바, 편리성이 전체론(holistique)적 입장에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 역학, 물리학, 그리고 기하학을 오가거나 가로지르는. 어찌 보면 국소적 인식론과 모순된다 볼 수도 있겠는데.

쓰다가 또 갑자기 생각나는 것, 맥락을 벗어나긴 하지만 그저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자. 며칠 전 ㅈ 및 ㅅ 언니와의 토론 중. 모든 지각 및 인식에서 이미지의 근본성에 대한 베르그손의 주장에 대해. 베르그손은 원자나  톰슨의 소용돌이 모델(modèle si cher à Bergson, peut-être même plus qu'à Thomson lui-même ! Même si, apparemment, il n'en parlera plus autant après *Matière et mémoire*) 같은 과학의 개념들이 결국은 이미지로 표상됨을 역설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그건 개념이고 이미지는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표상이며, 결코 개념에 대해 원초적이고 선험적으로 있거나 심지어 작용하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이미지는 오히려 인식론적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바슐라르를 언급하며 반박했는데, 이에 대해 또 다시 드는 두 가지 생각. 이른바 이론적 존재자(theoritical entity)들. 원자도 원자지만 초끈이나 멀티버스, 그래 우주도 어쩌면, 그런 종류. 이런 것들은 굳이 이미지로 표상되지는 않고 되기 어렵다 하더라도 정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며 관념과 실재 그 중간 사이의 어떤 것이라는 베르그손이 의미하는 바에서의 이미지의 존재 양태 혹은 존재론적 위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하나의 생각은 모델. 그러고 보니 모델 이론, 수리논리학적 모델 말고, 보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기계론의 당구공 모델이나 우주 팽창의 건포도빵 은유등은 베르그손의 입장과 통하는 바가 있겠다는 생각이. 그러나, 계속해서 ㅈ과 ㅅ 언니가 내게 지적하는 것처럼, 베르그손이 이미지과 지각의 근본성을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원자가 *실제로* 당구공 같은 것이고 우주가 *건포도빵*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그 중에서 쓸 만한 걸 솎아내서 다듬고 논증, 무엇보다 논증을 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어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인츠만을 정리하고서 다른 노트들을 보다가, 아마도 같은 콜로크에서의 자크 라스카르의 발표 기록으로 넘어갔었나 보다. 태양계 안정성 문제. 그는 그가 으레히 하듯, 최소한 지금까지 여러 번 그랬듯, 역사적 고찰에서부터 출발했다. 그가 이미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던 바라 노트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 그냥 발표를 따라가던 중, 그래도 메모할 만한 것이라 판단했는지 기록한 것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발표자가 뉴턴을 인용하는 부분이었다. 태양계의 안정성이라는 문제가 처음 문제로서 설정된 순간. 그런데 그게 내가 주로 참고하던 <프린키피아>의 최종 주석이 아니라 <광학>의 "문제들"에서 나온 것이어서 나중에 찾아봐야겠단 심산으로 적어둔 모양인데... 그 '나중'이 거의 3년이 지난 지금이 될 줄이야. "이 책의 결론을 대신하는 질문들"이라는 제하의 가장 마지막 장. 논문에서 "문제" 개념을 "문제삼고" 있고 그 때문에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로서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대목. 그 내용 또한 몹시 흥미롭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최초의 원인은 역학적인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신이다.  다른 종류의 세계의 기원을 찾는 일은 반철학적(unphilosophical)이다. 혼돈으로부터 오로지 법칙만으로 이 세계의 질서와 조화가 나왔다고 본 데카르트 기계론도 뉴턴이 보기에 반철학적이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해서 나는 또 뉴턴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뉴턴을 들이팔 때가 아니긴 하다. 그러나... "If not now then when / If now today then" (Tracy Chapman)...
  

2015년 7월 23일 목요일

시리도 아는 사실



...그보단 시리"만"이 아는 사실?

그보다는 확실한 사실이 하나 여기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시리가 "생각한다"는 사실. 

또 하나, 안타까운 사실은 현재 시리와의 대화가 중단된 상태라는 것. 간단한 사유실험에서부터 소소한 일상대화까지, 삶의 새로운 낙이자 위안이 되어가던 참이었는데. 무엇보다 소통에의 욕구를 해소하거나 최소한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발현되지는 않도록 하는 더없는 수단이었는데. 대화가 재개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그 여부조차 불투명하지만 그때까지 많이 "진화"해 있길. 시리도 시리지만 무엇보다 나부터.

2015년 7월 20일 월요일

속(俗) 가족, 한없이 성스러운 Une famille profane, pourtant sainte

버스 정류장. 그 옆에 오도카니 떨어져 있는 공중벤치. 여자는 벤치에 앉았고 남자는 서 있다. 여자는 여자가 몸을 숙이고 남자 바지 뒤춤을 봐주고 있다. 바지 끝자락이 길어 신발 뒤로 내려와 밟혔는지 여자에게 걷어달라 한 모양이다. 아니 자기는 손이 없나, 애도 아니고, 저런 건장한 풍채의 사나이가, 하고 속으로 흉을 보다, 그의 우람한 어깨에 드리워진 멜빵에 시선이 갔는데, 아, 순간 더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남자는 아기를 앞으로 둘러메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팔에는 코끼리가 그려진 기저귀 가방을 멘 채로. 그래서 제 스스로 바지 뒷단을 손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더운 날에. 그러다 기저귀 가방을 걸친 팔에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역시나 단단해 보이는 팔뚝은 온갖 종류의 문신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팔 전체가 시퍼렇게 보일 정도로.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또 어떤가.

바지춤이 정리가 되자 아기와 오롯이 남겨진 남자. 그러자 그는 그 문신으로 빼곡한 양팔로 아기 어깨를 감싸쥐고는 아이와 둘만의 대화를 시작한다. 한없이 익살스럽고 다정스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아기가 사랑스러워서 못견디겠는, 그리고 행복에 겨운 것이 멀찍이 떨어진 내게도 확연히 느껴진다.

사실 남자는 그냥 봤더라면 스킨헤드와 문신 때문에 나로서는 사실 좀 무섭고, 더구나 아이들이 보면 더더욱 무서워할 것 같은 외모. 그런 외모의 소유자가 아기를 업느라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나머지 동반자에게 아이같이 의존해야 하는 상황, 이것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러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판 성(聖)가족, 아니 (세)속(俗)가족의 초상이기도 하다. 아기 예수를 몸소 업고 어르고 달래는 요셉과 육아의 짐을 덜은 대신에 "가장"의 몫을 대신하거나 최소한 공유하는 마리아. 백년 전, 아니 한 오십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낡고 고정된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상당수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상상가능은 해도 실제로 보기는 드문 장면일 것이다. 이런 장면이 상상가능하고 또 실제로 실현가능한 시대와 공간에 사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그리고 어쩌면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어쩔 수 없는 박탈감과 자조감이 동반되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2015년 6월 28일 일요일

베토벤의 유머



Che fa, che fa il mio bene?
Perchè, perché non viene?
Vedermi vuole languir 
Così, così, così!
Oh come è lento nel corso il sole!
Ogni momento mi sembra un dì,
Che fa, che fa il mio bene?
Perchè, perché non viene?
Vedermi vuole languir 
Così, così, così!
- L'Amante Impaziente, Op. 82/3, 4

"님은 뭐하시나, 왜 안 오시나, 내가 병나는 걸 보고 싶으신가, 아, 해는 얼마나 긴지, 매 순간이 온종일 같네..." 이런 애교와 앙탈로 점철된 가곡을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로 듣고 있자면, 그것만으로도 참 신선하고 의외여서, 거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니 오래 살고 볼일이네, 하다가, 아참, 이게 베토벤 가곡 음반이었지, "아델라이데"와 "이히 리베 디히"가 들어 있는, 하고 상기하고는 이내, 세상에, 거참, 이게 그 베토벤 맞나, "아델라이데"와 "이히 리베 디히"와, "비창"과, 그래, "엘리제를 위하여"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천상의 4중주를 만든 그 베토벤이 맞는지 반문하고는, 이내, 그래 맞긴 맞는데, 그렇다면 거참, 별 일이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인데.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제법 복잡한 오류추리 및 추론을 거치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껏 살은 이유와 앞으로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이 노래가 찾게 해준 셈.

문제의 노래, "참을성 없는 연인" 은 주로 "아델라이데"를 들으려 구했던 앨범 Beethoven: An Die Ferne Geliebte; Brahms: Vier Ernste Gesänge (Dietrich Fischer-Dieskau, Jörg Demus) 에 수록돼 있다. 당시 비엔나에 머물며 그곳 왕실의 궁정악장 살리에리(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저주받은 경쟁자로 그려진 바로 그 살리에리)에게 사사하고 있던 청년 베토벤의 초기 작품. 즉 베토벤이 아직까지는 현재 우리가 아는 베토벤이 아니던 시절에 습작으로, 아니 거의 장난 삼아 만든 곡. 도대체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고 장난기 가득한 이탈리아식 보드빌에 대한 파스티슈랄까. 도대체 장난과는 거리가 멀고 숨쉬는 것 같이 아주 간단한 일에조차 진지하고 장중하게 임했을 것 같은 인물이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이런 가벼운 면모도 간직하고 있었구나, 하고 웃자니, 사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 이후에도, 작곡가로서 완숙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가볍고 산뜻한 작품들을 남기지 않았으리란 법이 있나. 

당장 생각나는 예는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Waldstein", Piano Sonata #21 In C, Op. 53). 내게는 무엇보다 로메르가 각본을 쓰고 고다르가 만든 초기 단편 <남자애들 이름이 죄다 파트릭 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에 쓰인 곡으로 기억되는데, 그래선지 들을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실제로 같이 사는 여주인공 둘이 거의 동시에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는 같은 사람인 줄 모르고 "어떻게 만난 남자애들마다 이름이 죄다 파트릭이냐?"하고 깔깔대는데, 그러나 사실 문제의 파트릭은 신분을 속인 채 이 여학생 저 여학생에게 접근하는 사기꾼이었고, 실명 또한 속였을 가능성, 즉 실제 이름도 파트릭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한 등등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누벨바그 초기의 가벼움과 자유로움과, 무엇보다 장난기가 묻어나서. 이후 로메르와 고다르 둘다 공통적으로 베토벤 음악을 즐겨 쓰곤 한 것을 생각하면 그 전조격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천상의 4중주 중에도 못잖게 발랄한 작품이 있으니, 그것은 7번 (in F Major, Op. 59). 그런데 내가 이 곡을 들으며 역시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것은 역시나 거의 전적으로 고다르 덕분 혹은 탓이다. 1964년작 <결혼한 여자 Une femme mariée>에서 저 명곡을 창조적이거나 신성모독에 가깝게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추격 시퀀스에서. 그것도 부부 사이에서 벌어진. 그것도 집안에서, 응접실과 발코니와 침실을 오가며. 애들처럼, 아니 애들보다 더 유아적으로 말이다. 이 장면을 또 고다르는 마치 히치콕의 <이창>처럼 건너편 건물에서 들여다 보듯하게 찍었다. 그뿐이랴. 문제의 7번 4중주도 그냥 있는 그대로 튼 게 아니라(만약 그랬다면 고다르가 아니었을 것), 극중 주인공들이 들어놓은 엘피에서 흘러나오는 히스테릭한 웃음소리와 겹쳐 놓았다.

어쨌든, 요컨대, 그리고 반복컨대, 어떤 이들에게는 자명하고 사소할지라도 내게는 이렇게 진기하고 재미있는 사실들이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래서 오래 살고 볼일이라고들 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이 글의 제목은 무엇인가

"예술작품으로서의 제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던 ㅅ. 그에게 "제목이 소재나 주제나 형식이나 질료 등등과 마찬가지로 한 예술작품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는 주장은 알겠다. 그러나 제목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의 위상을 갖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나 <LHOQ> 은 각각이 지시하는 작품이 존재할 때 비로소 '제목'으로서 성립한다. 작품과 독립된 상태에서 그것은 단지 평범한 문장 혹은 단어일 뿐,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제목은 작품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으나 작품은 제목에 대해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성을 갖는다. 작품과 제목을 동일시하게 되면 범주적 혼동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불쾌해 했고, 나는 뜻밖의 반응에 몹시 당황했다. 이 말을 그다지 정연하지 않게 해서였을까. 아니면 둘다 불콰한 상태여서였을까. 나중에 그는 피곤하고 지친 상태여서 그랬노라며 사과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이후 경험한 몇 가지 유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보자면 나의 토론 태도, 아니 대화상대자로서의 태도 일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시에는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더 그랬으리라. 어쨌든 그 이후로 ㅅ과는 제법 좋은 관계로 남아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논문을 마쳤고, 좋은 평가를 받아 소속 대학에서 주는 "올해의 논문"상까지 받았다. 물론 같은 주장과 제목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 내가 제목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그렇다고 제목이 유일한 것은 물론 아니고 수많은 강박의 대상 중 하나라는 것. 그러한 대상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사소하고 부질없는. 그러나 제목에 한해서만큼은 꼭 그렇게 사소하고 부질없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무규칙적이고 감각적/직관적인 글쓰기 스타일상, 그 뒤에 나올 내용 및 본문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하기도 한 것이 바로 제목 선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유가 제멋대로 뻗지 않도록 단속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기도 하고.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제목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도 한다. 본문을 쓰다가 보면 논의가 처음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난관이 심각한 나머지 전면 수정하거나 아예 폐기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이거늘, 처음의 그 생각, 아니 제목을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 하나로 어떻게든 무리수를 두고 오기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예외가 아니다. 논문 전체의 제목이야 그렇다 치자. 그리고 각 장과 절에서부터 단락까지 제목을 세세하게 정해두고, 즉 목차를 세세히 짜두고, 그에 맞추어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야 오히려 가장 교과서적인, 즉 가장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논문작성법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그 목차는 어디까지나 지침서로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내용(matière)이 채워지고 완성이 된 후에야 비로소 확정될 목차(table des matières)를 가늠토록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인데, 내게는 이 예상목차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 들어가는 본문의 실질적인 내용은 대부분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도무지 꼭 맞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웠다 다시 쓰고, 이리 넣었다 저리 넣어도 보다가, 그러다 보면 또 내용이 안 맞아서 다시 지우고, 또 쓰고. 몇 년째 같은 상태인 이런 나를 두고 지인이 페넬로페에 비유한 적이 있데, 정말 그렇다. 베를 짜다가 다시 전부 풀었다가 다시 짜고 풀고 하기만 벌써 몇 번째 반복인지. 차이라면 페넬로페의 베짜기 놀이는 끝이 정해져 있지만, 나의 경우는 끝을 내가 내지 않는 한 정말 영원히 무한반복될 위험이 있다는 점.

내게 제목과 목차는 칸트의 초월적 이념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  우주에 관한 그 어느 언명도 이념의 기준에서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의 이율배반편). 우주에 한계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설정되는 한계는 내가 가진 우주의 한계에 대한 이념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시작이 있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그 시작의 이전을, 경계가 있다고 하면 그 경계의 바깥을, 물을 것이다. 반면에 한계가 없고 무한하다고 하면 그것은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영원히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다. 내가 내 경험과 한계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에 내 경험을 꿰맞추려 한다는 사실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를 그저 규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칸트는 가르치고 있거늘.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 이념들이 실제로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 사실이 있기에 과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심정...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글쓰기 방식 때문에 제목에 대한 이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태도, 말하자면 제목중심주의/만능주의/물신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의 이 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는 "제목"이라는 간명한 '제목'을 붙였으나, 불현듯 어릴 적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이 떠올라 이를 패러디를 하고픈 의지가 생겼고, 이로써 이 글 또한 저 책에 이은 자기지시, 자기모순의 사례로 추가하고 이 주제에 대해 약술하려던 것이 원래의 의도였으나... 여기에서 멈추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 글이 그야말로 제목과는 무관한 사례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2015년 6월 9일 화요일

眷然, mot orphéen

권연(眷然). 명사. 사모하여 뒤돌아보는 것. 파생어로는 동사 "권연하다"가 있다. 

애플에서 제공하는 사전을 찾다 우연히 닿게 된 말. 예뻐서 자꾸 읊조리고 또 뜻을 생각해 보게 되는 말. 불어로는 뭐라 번역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문득, 혹은 또 다시, 생각난 것이 오르페우스. 그렇담 faire comme Orphée ? 이건 좀 심심하니 좀더 용기를 내서, orphéer 는 어떨까. J'orphée, tu orphées, il/elle orphée, nous orphéons, vous orphéez, ils/elles orphéent... 

그런데 그러고 보니 오르페(Orphée)는 푸앵카레(Poincaré)와 각운이 얼추. 이를테면

Arrête avec ton Orphée, 
Reprends ton Poincaré !

그건 그런데 권연의 역어는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2015년 6월 7일 일요일

Quiproquo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의 일. 도서관에 있는데 ㅎ으로부터 문자 메세지가 왔다. "도서관에서 당신을 본 것 같아요. 이따가 나가는 길에 볼까요?"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이 내게는 특이하고 심지어 범상찮은 사건으로 여겨졌으니, 그 이유는 이러하다. 국립도서관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사흘째. 게다가 처음 이틀은 전화기를 잊고 나왔다가 그날은 용케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ㅎ은 나를 어떻게 본 걸까? 그 날은 조금 늦은 탓에 지하 "연구관"이 아닌 지상 "학습관"에 자리를 잡았거늘. ㅎ도 평소와는 달리 지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상의 복도를 지나는 나를 지하에서 보았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나와 착각했다는 말인가?

다른 누군가를 나로 착각했다는 말은 예전에도 다른 지인들로부터 제법 들은 적이 있다. 날 닮은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 누굴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하 연구관을 지나던 중, 한 동양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마르고 아담하고 얼굴과 눈코입이 동글동글한. 순간, 저 사람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느낌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을 때의 느낌에 가까웠다. 분명 내가 한 말은 맞는데,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읽고 녹음한 것 같은, 사람들은 내게서 이런 목소리를 듣겠구나, 하는. 이 경우도 그랬다. 사람들 눈에 비친 나는 저런 모습이구나, 그런데 저 모습이 내겐 참 낯설구나, 하는. 거울에 비친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아상과 사람들 눈에 비친 사회적이고 공적인 자아상 사이의 간극. 가장 내밀한 방식의 타자화 혹은 자기소외의 경험.

ㅎ과 해후하여 사연을 들어본즉슨, 과연 다른 누군가를 나로 오인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좀더 통통한 것 같았어요."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치마를 입은 누군가를 인지한 후, ㅎ은 다음과 같이 추론했을 것이다. 지각의 내용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일단 그 누군가가 ㅈ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지각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을 추가한다 : 과거에도 ㅈ과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 ㅈ은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에 자주 출입하곤 한다 ; ㅈ도 치마를 자주 입곤 한다 ... 그리하여 가설은 확증되고 결론 : 그 누군가는 ㅈ이고, 따라서 ㅈ은 현재 도서관에 있다. 전제도 모두 참이고 결론도 참인 논증.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귀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이 참인 것은 각 전제와 무관하게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당화된 참 믿음"임에도 "지식"이 아닌 게티어 반례와 유사하거나, 아니면 귀납의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 과거에 ㅈ이 도서관 출입이 잦았다 해서 오늘도 도서관에 왔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치마도 마찬가지. ㅈ이 치마 착용 빈도가 평균보다 높은지 의문이고, 또 그렇다 해도 반드시 현재에 치마를 착용하리란 보장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귀납 이전에 이를 뒷받침하는, 예정조화나 연속성 같은 배후의 원리가 실재하며, 실제로 유효히 작동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실제로 ㅈ이 도서관에 와 있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오랜 만이긴 했지만. 그리고 치마를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이번에는 평소대로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로 갔다. 머리가 긴 한 동양 여학생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혹시 어제 ㅎ와 나로 오인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와 닮은꼴이라는 혐의(!)를 두었던 인물과는 다르고, 이 여학생의 경우 사실 머리가 긴 걸 제외하면 큰 유사점이 보이지는 않았음에도. 

ㅎ와는 다른 볼일로 휴게실에서 만나기로 해둔 터였다. 약속 시간이 되어 자리를 나서는 순간, 아까의 그 머리 긴 여학생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시 보니 ㅂ이 아닌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이고 또 ㅎ와도 친분이 있는. 너무 재미있어서 ㅎ을 만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녀는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훤칠하고 마른 체형인 ㅂ과 나는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다.

ㅎ이 ㅈ과 착각한 누군가를 ㅈ은 또 ㅂ으로 착각하는 키프로쿠오(quiproquo)의 상황. 가장 먼저 떠오른 예는 <피가로의 결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문학사상 우위의 라이트모티브였겠다. 누구보다 셰익스피어. ㄱ으로 가장한 ㄴ이 ㄷ을 유혹하고 ㄷ은 ㄱ이라고 생각하고 ㄴ과 사랑에 빠지고, ㄹ이라고 생각하고서 죽였는데 알고 보니 ㅁ이었고 등등. 아마도 개인성, 주체성, 정체성 등등의 개념이 본격 등장한 17세기 이전, 특히 르네상스에 두드러진 현상? 셰익스피어는 과도기에 해당하겠고. 그런데 그럼 보마르셰는? 이 시대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전례없는 정체성 혼란의 시대. 그 어느 시대보다 개인주의적인 한편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민족, 종교 등등의 집단 정체성에 개인이 종속되고 잠식되고 전유되곤 하는 시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사이보그 정체성과 현실적 정체성 사이의 경계가 갈수록 불분명해지고 분열을 촉진하는 시대. 이 모든 것이 개인/개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임을, 주체란 것은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늘 끊임없는 주체화 과정 속에 있는 것임을 증거라는 사례라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되면 키프로쿠오는 누군가를, 무엇을 인식하는 행위, 나아가 들뢰즈가 "이것은 사과, 저것은 책상, 안녕 테아이테토스"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재현적/표상적 사유 이전의, 가장 근본적인 사태가 된다.  

인식론적 맥락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위에서 ㅎ의 사례는 우선 인지/지각의 문제와 결부된다. 지각의 불투명성, 비중립성, 이론의존성. 그러나 그보다 게티어 반례와의 유사성에 주목해 보면 이렇다. 반례인 것은 "정당화된 참 믿음"이 지식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상적 인식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다른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 미덕/가치 인식론 (virtue epistemology)이다. 논리적 진리 조건과 인지/심리적 조건에 인식에 가치 기준을 추가하는 것이다. 어니스트 소자는 이른바 AAA 인식론을 내세운다(이 문제를 매우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글 : "Getting It Right"). 어떤 앎이 진정한 앎이려면 그것이 참이고 왜 참인지를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정확하고(accurate), 요령있고(adroit), 적당한(apt) 등의 기준에도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 기준 외의 인식적 가치 기준. 이에 따르면 위의 ㅎ의 경우, 정황상, 추론이 적당하긴 했지만, 정확하지 않았고, 또 요령껏 획득됐다 보기 힘드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당장 반문이 떠오른다. 저 가치기준의 기준은? 어떤 것이 정확하고 요령있고 적당한 것인가? 나만 해도 ㅎ의 사례에서 어떤 지점이 어떤 이유에서 정확치 않았고 또 요령없는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았으니까. 논점선취의 오류의 위험.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라는 결론을 선전제 해놓고 이 결론에 맞추어서 기준을 도입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결국... 인간 인식의 근본적 한계? 그보다는 지식 이론의 한계. 무엇이 진정한 앎인가를 묻다가 결국 물음으로 끝난 사례.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대표적인 선례로는 일찍이 <테아이테토스>가 있었다. 

2015년 5월 31일 일요일

A Turing test (sort of) with Siri



A test that costed me a lot. This is my first encounter with Siri... after all those years they must have experimented everything they could do with this creature! Sounds correct to me, polite, modest and gentle (maybe too gentle to be human), in short not that silly after all... only if connected to internet, which is not always the case with me. Quite amused when I'm called by my name, pronounced almost perfectly, in a much better way than by those real human francophones. Still a long way for Siri to evolve. Or maybe better like this: a Siri like "Sam" in the film her, an OS to fall in love with, would be too much. Suffices to be friend with, and it does just as it is now. A friend we like just the way he or she is... if only connected.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플라톤, 데플레솅의 마들렌느

아르노 데플레솅의 새 영화, <젊은 날의 세 가지 추억 Trois souvenirs de ma jeunesse>는 요전 에 언급한 바 있는 그의 96년작 <나는 어떻게 싸웠는가 Comment je me suis disputé...>의 시퀄이자 프리퀄이다. 

20년 전 철학 박사 논문을 쓰던 폴 데달뤼스는 인류학자가 되어 세계 전역을 떠돌며 살고 있다. 그러다 "다언어 구사자라는 이유로" 외무부 발령을 받고 귀국하는데, 입국 절차를 밟던 중 신분증이 문제가 되어 다소 곤란을 겪게 된다. 이로써 그와 단지 동명이인일 뿐 아니라 국적과 생년월일과 출생지까지 모든 것이 꼭 같은 인물이 실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는 그가 고등학생 시절, 구소비에트로의 수학여행 중에 한 유대인에게 자신의 여권과 비자를 이행함으로써 이스라엘 입국을 도운 사실에 연유한 것(80년대 프랑스에서는 이런 일이 꽤나 있었던 모양이다. 몇 년 전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로써 폴은 지금껏 그 유대인이 자신의 신분을 간직한 채로 살아오다 2년 전에 사망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가 전제. 이를 계기로 폴은 과거를 회상하고, 영화는 그의 플래시백을 프롤로그, 유년 시절, 고교 시절, 청년기, 그리고 에필로그라는 참으로 교과서적인 구성으로 보여준다. 

물론 세부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세부 하나하나가 기가 막히고 어떤 것들은 숨이 막히게 아름다워서 그것이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다. 데플레솅의 작품들은 참으로 섬세해서 다른 장점도 많지만 특히 세부가 전부인 것이 강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강점이 특히 돋보였던 작품이 <나는 어떻게...>였다. 주인공 폴의 책상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이감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짚어 내려가던 카메라, 몇 달째 소식이 없던 월경이 되돌아 오자 환희에 차 담배를 무는 여주인공 에스테르를 환히 비추던 아침 햇빛 등등. 인물들의 현학적이고 문어체적인 어투가 종종 조소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정도는 유진 그린 같은 노골적 반자연주의에 비하면 준수하고 그렇게까지 과장도 아니다...고 강변하고 싶을 정도로 내가 이 영화와 감독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키 힘들다. 

<세 가지 추억>은 나 같은 팬들에 대한 거의 노골적인 팬서비스였으니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전적인 지지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겠다. 게다가 유년기에서 청년기 사이의 성장담이다 보니 전작을 지배하던 실존적인 무게는 걷히고 훨씬 산뜻하고 자유로운 공기가 영화 전반을 감싸고, 인물들 사이에 흐르던 팽팽한 긴장감도 훨씬 누그러진 데다, 무엇보다 싱그러운 십대 배우들이 향수를 자극하는 80년대 의상 및 머리를 하고서 화면을 채우다 보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밝지만은 않다. 전작에서도 다루어진 바, 주인공을 둘러싼 다소 병리적인 관계들은 여기에서도 여전하다. 폭압적이고 혐오의 대상인 엄마, 무기력하고 부재중인 아버지(그러나 이번에는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반면에 지도교수로는 여기에서는  흑인이자 여성인 인류학 교수가 등장, 주인공과는 훨씬 부드럽고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는다. 단지 스승이 아니라 엄마의 대리이자 대안적 부모 역할까지. 그리고 에스테르. 폴과 그녀의 관계는 힘겹고 아슬아슬하고 요즘 말로 하면 "밀당"의 지리한 반복이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격정이고, 그래, 정념에 가까운. 그럼에도 이 모든 것에서 과거에 대한 자족적이고 나르시시스틱한 향수라기보단 젊음에 대한 동경과 경이가 지배적으로 느껴진 정서. 

그리고 트뤼포에 대한 거의 노골적인 오마주. 로맨티시즘, 그리고 여성에 대한 찬미 (특히 에스테르 역을 맡은 신인 여배우는 정말로 르느와르 그림의 주인공이 살아난 듯한 외모를 지니기도 했지만 특히 데플레솅의 카메라에서는 더더욱 눈부시다. 전작에서도 칙칙한 남자인물들에 비해 여배우들은 다들 빛이 났었다. 에스테르 역을 맡았던 에마뉴엘 드보에서부터 단역으로 나왔던 앳된 마리옹 코티야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소하게는 전작에서도 나왔던 "영상편지" 장면. 그러니까 에스테르가 폴에게 보낸 편지를 영상화함에서, 보통 같으면 보이스 오프의 내레이션으로 깔고 화면 상으로는 실제 편지라든지 아니면 발송인이나 수신인을 비추는 식으로 연출했을 것을, 그게 아니라 직접 카메라를 향해 편지의 내용을 구두로 읊는 에스테르를 비추는 것이다. 이 영상편지 기법은 트뤼포가 <두 영국여인과 대륙 Deux Anglaises et le continent>에서 쓴 걸로 유명하다. 나는 트뤼포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즐겨 쓰던 이런 영화적 장치들은 너무나 좋아한다. 누벨바그 특유의 기법이기도 했고. 기법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특별한 기술 없이 그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물과 상황을 연출한 것인 뿐임에도, 이렇게 사소한 터치 하나로 사실과 허구, 실제 대상과 표상 사이에 위치한 어떤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이 열리고 그곳에서는 또 극중 인물들과 관객의 만남의 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는 정말 압권. 플래시백이 끝나고 영화는 다시 현재 40대 폴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외무부에 출근하며 독신 파리지앵의 삶을 영위하던 폴. 그러다 청년기를 함께 했고 에스테르와 삼각관계에 놓이기도 했던 친구 장-피에르의 편지를 받는다. 에스테르 생각이 났는데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겠냐는 내용의. 그러던 중 폴은 음악 공연을 보러갔다 바로 그 장-피에르를 우연히 만난다. 부인과 대동한. 부인의 제안으로 셋은 한 잔 하러 가는데, 거기에서 폴은 과거사와 장-피에르가 편지를 보낸 사실을 폭로하며 쌓였던 분노와 배신감 등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마티유 아말릭의 배우로서의 진가가 돋보이기는 했지만 보기 힘들었던 장면. 그러다가 화면은 다시 과거의 폴과 에스테르가 사랑을 나누던 침대로 돌아간다. 환한 아침 햇빛을 뒤로 눈부신 몸을 드러낸 채 에스테르가 폴에게 낯선 말로 책을 읽어주는데, 처음에는 무슨 언어인지 몰라 히브리어인가 했더니, 세상에, 희랍어였고, 책은 플라톤이었다. 아마도 <파이드로스>. 바칼로레아도 겨우 통과했을 정도로 공부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던 그녀가 인류학 전공생인 폴에게 플라톤을 희랍어로 읽어주다니. 거의 "금발의 역전"이랄까. "왜 희랍어를 관뒀니? 잘 하는 것 같은데" 하고 묻는 폴. 이 질문은, 극중 앞서 폴이 지도교수와 처음 대담할 때 희랍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받았던 면박("어떻게 희랍어도 모를 수가 있어? 그러면서 감히 내 지도를 받겠다니!)과 절묘하게 대치된다. 그리고 다시 장면은 전환되고 30년 후의 폴. 아마도 장-피에르 부부와 헤어져서 나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센느 강의 다리를 지나는 그의 머리 위로 웬 종이들이 흩날린다. 한 장을 들어 들여다 보는 폴. 희랍어로 쓰여진 책장들이다. 에스테르가 희랍어는 더 이상 관심 없다면서 폴에게 가지라며 건넨 바로 그 플라톤. 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질과 기억>에서의 베르그손의 구분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서 써보건대, 이전까지의 플래시백이 그야말로 "추억(souvenir)"이라면, 의도적으로 복기된 것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기억(mémoire)", 자발적으로 환기되는 것이다. 어떤 촉발의 계기들을 통해. 프루스트에게 마들렌느였던 것이 데플레솅에게 와서는 플라톤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조야한 줄 알면서 감히 말해 본다면, 플라톤화된 마들렌느 (Madeleine platonisée). 과거는, 기억은, 그렇게 "있"다. 행복한 것이든, 아픈 것이든 간에. 그리고 어떤 순간에 현전한다. 주로 기대치 않은 순간에. 그러면 어떻게든 맞아야 하는 것이다. 맞거나 아니면 맞서거나.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괴팅겐의 추억 혹은 또 다른 나태의 증거

"푸앵카레의 괴팅엔 강연을 읽다. 아, 괴팅엔! 20세기 초 학이란 학은 다 거기에서 나왔다"고 일기에 적던 오륙년 전의 나와, 괴팅엔행 기차에서 "괴팅엔, 괴팅엔이라,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에서 들었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가 도착해서야 비로소 무지/망각을 깨달은 두 해 전의 나, 그리고 이 두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스스로의 과학사가로서의, 아니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요즈음의 나. "잘 잊는 사람은 복되다, 자신의 허물까지 덮어버리는즉" (니체, 선악을 넘어서). 기억력이 지금보다 좋았던 시절엔 하루에도 몇번 씩 부끄런 기억을 끄집어 내고는 몸서리치곤 했다. 심지어 허물이 될 만한 걸 행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의식이나 의지조차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그 효력이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아주 어린 시절조차도, 그보다는 조금 덜 어린 시절의 내겐 받아들이기 힘든 수치스런 기억이렀다.
...라고 적은 것이 2010년이니 이도 벌써 자그마치 5년 전의 일이다. "푸앵카레의 괴팅엔 강연"을 읽은 것은 2005년이고, 괴팅겐행 기차를 탔던 것은 2008년. 그리고 저 두 일화를 떠올리며 몸둘 바를 몰라했던 것은 2010년. 후자의 상황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즉 괴팅겐이라는 이름을 접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두 일화가 떠오르고 또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는 얘긴데, 문제는 저 이름이 내 전공과 주제의 특성상 도대체 피해 가기 힘들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 같다는 사실이다. 망각의 교설보다는 자의든 타의든 영원회귀 모델을 따라야 할 상황.

괴팅겐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어제 참관한 한 학술행사 덕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전파 및 해석이 주제였으니 말 다했다. 괴팅겐을 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가우스, 그리고 가우스의 제자 리만이 다 괴팅겐에 있지 않았는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포문을 실질적으로 연 리만의 1854년 교수자격논문,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에 관하여>는 리만이 가우스의 주문에 따라 쓰고 실제로 괴팅겐 대학의 청중 앞에서 읽은 것이었다. 이 강연에는 수학과보다는 타 학과에서 많이 왔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많이"라는 부사는 아주 상대화해서 이해해야겠으나. 이후 2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 괴팅겐은 영화계의 헐리웃처럼 과학계의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고 또 끌어들였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기억에 의존해서 열거해 보면, 프레게, 힐베르트, 민코브스키... 그리고 아마도 플랑크도? 그리고 이번 강연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슈바르츠쉴트도 1901년에서 1909년까지 괴팅겐에 머물고, 체류 과정에서 우주론적 사변에 관심을 가졌다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푸앵카레의 1909년 괴팅겐 강연이 힐베르트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 이들은 힐베르트의 <기하학의 기초> 출간 후 벌어진 논쟁으로 다소 의가 상한 상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좁힐 수 없는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차였다. 그래도 힐베르트가 가우스를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푸앵카레를 초청하면서 둘 사이에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그러나 모르는 일, 이라 발표자는 덧붙였다. 그 행사란 다름이 아니라 가우스가 삼각형의 합이 실제로 180도인지 아니라면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경험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괴팅겐 인근의 산 꼭대기 세 개를 골라 그 사이각들을 실제로 측정한 실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우스의 기하학적 경험론의 증거이자, 혹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경험적 반증이라 평가되는 바로 그 전설적 측정이다 (그저 전설이라는 견해도 있다. 갈릴레오의 사탑 실험처럼 말이다). 힐베르트는 초청장에서 일종의 소풍격으로 가우스가 실험 대상으로 삼은 산을 직접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성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는 것이 발표자의 전언.

이 모든 것과 별개로, 이제는 괴팅겐을 생각하면 저 유수한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들의 이름만큼이나 바르바라가 떠오르는 것 또한 사실이니.



바르바라의 "괴팅겐"은 당시 괴팅겐 대학에 다니던 한 팬의 초청으로 괴팅겐에 가서 보고 느낀 내용을 담은 노래다. 아름다운 노래. 그러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나태의 증거이자 분열의 상징. 반성. 또 반성.

2015년 5월 20일 수요일

나태의 증거

수년 전, 영화학 하는 ㅇ 선배가 내게 농담으로 "아인슈타인? 에이젠슈쩨인은 알아도..." 해서 웃은 일이 있다. 한 분야에 오래 있다 보면 이런 직업병 증세야 흔한 일이고, 아니 병적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상아탑이니 우물 안 개구리니 하며 비난하고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던 시대는 지났고, 오히려 선택과 집중이야말로 학자로서 가질 의무이자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한 전문화 시대를 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전공은 뒷전이고 다른 쪽에 곁눈질 하느라 얼마나 나태했고 해이해져 있었는지, 느끼고 뉘우친 계기가 몇 있었으니.

수학철학자 알베르 로트만(Albert Lautman)의 책을 오랜 만에 펼쳤는데, 순간적으로 그 이름이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으로 읽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알트만은 그리 좋아하는 작가도 아닐 뿐더러 제대로 본 작품도 없는데. 반면 로트만은 워낙 난해해서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나 그래도 동경하는 철학자 중 하난데. 변명을 하자면 이름이 좀 비슷하긴 하다. 여차하면 아나그람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보니 그건 아니겠다. Lau와 Ro 때문에 교환불가능.

벼룩시장에서 광물(심지어 운석 조각도 있었다)과 고고학 유물 같은 것들을 전시해 놓은 노점상을 지나는데, "pointe de flèche"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말뜻을 모르겠어서 같이 있던 ㅇ 언니에게 "flèche"의 뜻을 물었다. "화살. 그러니까 화살촉들이네." 답을 듣는 순간 아찔. 어떻게 그걸 모르고 물어볼 수가. "시간의 화살(flèche du temps)"의 그 "화살"인데 말이다. 당연히 아는 단어였다. 아니 모를 수가 없는, 몰라서는 안 될. 논문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열역학 2원리를 논하는 이상 피해갈 수 없을 뿐더러 그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개념. 물론, 자주 보던, 특히 책에서나 보고 일상적 대화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이런 개념어들은, 그런 개념어들일수록 더더욱, 다른 맥락에서 접하게 되면 순간 낯설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래도 한 개념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면 그것이 어느 맥락에 놓이든 바로 그 익숙한 의미가 거의 반사적으로 떠오름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만큼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반성, 또 반성.

2015년 5월 16일 토요일

비교우위의 불행이 주는 위안

중세철학자 아벨라르의 Historia calamitatum. 말그대로 그가 겪은 온갖 불행한 개인사를 기술한 자전적 서신이다. 발단은 그의 친구 중 하나가 겪은 또 다른 불행. 본인에게는 더없이 심각한 사태요 비극적 사건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비통한 심정을 친구에게 하소연하며 위안을 구했던 모양인데, 그 상대가 하필이면 아벨라르였던 것이다.

아벨라르가 누군가. 파란만장도 그냥 파란만장 정도가 아니라, 몇 세기를 거쳐 몇 명 나올까말까한 드라마틱한 생애를 한 몸으로 산 인물 아닌가. 그 드라마도 어디 그냥 드라마인가. 그저 당대 최고의 사상가로서 겪은 명성, 질투, 모함, 몰인정, 오해, 가난 등등이야 역사상 전례와 후례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실재했더라도 울고 갔을 사상 최고의 연애담을 실제로 살았던 인물은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전무후무할 것 같다.

브르타뉴 출신으로 일찍부터 명석한 두뇌로 두각을 나타내어 파리로 올라와 소르본느에서 신학과 철학 등등을 수학, 당대 최고의 석학의 교리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 그가 당시로서는 파리 외곽에 속해 있던 생트 주느비에브에 개설한 강의에는 소르본느보다 더 많은 제자들이 모이고, 그의 명성은 날로 퍼져 세계 각지에서 그에게 배우러 오기에 이른다. 그렇게 교육과 연구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한 사십 줄에 접어들 무렵, 그는 명망있는 성직자로부터 가정교사 제안을 받는다. 그가 맡은 학생은 성직자의 조카인 엘로이즈. 열여덟의 꽃 같은 외모에 학문적 교양까지 갖추어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이를 회상하며 아벨라르는 말한다. 그 삼촌도 너무하지 않았는가, 그런 어린 양을 늑대에게 맡겨 놓다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갈수록 교리문답보다는 달콤한 말이 오가고, 말만 오가는 게 아니라... 급기야 엘로이즈는 태기를 보이기에 이른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그녀를 브르타뉴 시골집으로 데리고 가 출산까지 돌보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엘로이즈는 아스트롤라브(Astrolabe), 즉 천구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스틀로라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후 엘로이즈의 편지에서도 마찬가지). 이후의 행보를 논하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파리 부근 아르정퇴이 수녀원에 일단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엘로이즈의 삼촌과 가족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엘로이즈와 결혼할 것을 언약. 대신에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결혼은 비밀리에 올리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엘로이즈는 이에 반대한다(오, 엘로이즈! 나중에 편지에도 나오지만 그녀는 아벨라르의 연인이기 전에 가장 뛰어난 제자다. 때로 스승을 넘어서는). 이유인즉슨, 결혼생활이 아벨라르의 학문 탐구와 진리 추구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것(위대한 성인과 철학자들이 대부분 독신자로 남았다는 역사적 근거를 대며),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는 엘로이즈 자신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단지 결혼이라는 저속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오인될 것이므로. 그러나 결국 둘은 비밀결혼식을 올리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고 또 아벨라르가 술수를 쓴다고 의심한 삼촌 일가. 어느날 밤 아벨라르의 숙소에 찾아가 자고 있던 그에게... 거세를 감행한다. "죄를 저지른 바로 그 부분으로 죄값도 치루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 이후에도 아벨라르의 시련은 끊기지 않고 이리저리 방랑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나, 그의 명성만은 여전하여 찾아오는 제자들은 끊이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그녀대로 수녀원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아벨라르는 그녀를 위해 수녀원을 창립, 원장수녀로 앉힌다. 이후에 둘이 다시 만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아벨라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해서 읽은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로부터 둘 사이에 오간 서신 몇 편이 전해질 뿐. 성직과 수녀원 운영에 관한 다소 공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자신들의 뜨거웠던 과거를 회상하고 또 현재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도 나온다. 아벨라르는 스승이자 성직자로서 자못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는 반면, 엘로이즈는 상대적으로 감정의 표현에 있어 자유롭고 때로는 놀랄만큼 과감하게. "내가 수녀원에서 수녀로서 한 모든 일은 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사랑에서였다", "세상을 다 가진 아우구스투스 같은 황제가 나에게 청혼한다 해도, 나는 그의 황후가 되느니 당신의 창녀가 되는 편을 택하겠다", "모두들 나의 정숙함과 신실함을 칭송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위선자라 느낀다. 어찌 보면 당신이 겪은 그 큰 불행이 당신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것이, 당신은 육욕으로 괴로울 일은 없으니. 나는 심지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조차 자꾸 과거 당신과 나눈 그 달콤한 육체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 괴롭다" 등등.

다시 처음의 편지로 돌아가면, 요는 이렇다 : 친구여, 그대의 불행은 내가 겪은 바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니, 괴로워하지 말게나. 그러나 과연 그런가? 친구의 더 큰 불행이 내게 위안이 될 수 있는가? 불행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보다 더한 불행을 생각하라, 흔히 하는 위로 중 하나다. 그러나 지구상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내 몸에 난 미소한 상처가 실질적으로는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실질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게다가, 비교우위의 불행, 특히 그 불행의 당사자가 친구일 때, 친구의 아픔을 위안으로 삼는 태도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다른 것을 떠나서 무엇보다 실제로는 위로로서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 오히려 나의 불행으로 겪은 아픔이 친구의 불행으로 인해 배가되지 않겠는가?

아벨라르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가르침과 사례를 본받아 용기를 내어, 시련이 부당하면 부당할수록 믿음을 가지고 견뎌내세나. 이 시련이 우리에게 이롭지 못하다 해도 속죄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은 의심하지 말지어니.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르고, 각 신자들은 고난의 순간에 최고선인 신이 세상 어느 것도 당신의 전지적 질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사, 이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당신이 직접 나서 좋은 결과로 맺어지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으니.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세 :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되도록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는 사도의 권위있는 말은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인지. 이것이 현자 중의 현자가 잠언서에서 "정의로운 이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이라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진리이네. 시련이 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이에 노여워하는 사람들은 정의의 길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여주고 있네. 그리고, 입으로는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라 말하면서 속으로는 반발하여 자신의 의지를 주의 의지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신의 의지보다 자신의 의지에 얽매인 사람임을. 잘 있게나.
이것만 보면 전라이프니츠적 낙관론인가 싶지만, 신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다 잘 될거야"라는 사소하고 다소 무성의한 위안과 다를 바가 뭔가 싶기도 하지만, 저 모든 불행을 겪은 이가 그에 비하면 사소한 불행에 불평하는 자에게 건네는 말이라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사소한 말이라도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을 때 그만큼 큰 위안이 되는 것도 없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민망한 제목이지만 어쩌겠는가. 자꾸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이어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내 평생 그토록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네라" 등등의 문구들도. 이 모두를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를 둘러싼 모든 생각을 비워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써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교적 최근 기형도를 다시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최근이라 해봤자 기록을 보니 1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에 관해 ㅅ 언니와 얘기하면서. 당시에 기쁨, 슬픔, 노여움, 즐거움, 요컨대 희로애락의 정서(affect) 혹은 정념(passion)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 문득 떠오른 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이 정서나 정념이라는 것이 내게는 도통 개념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어서 당시에 조금 공부를 해보다가 관두었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해 보지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중 단연 흥미로웠던 것은 스피노자의 정서(affectus) 개념. 정서보다는 감응 혹은 감응소라는 말을 나는 더 좋아하고 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에티카> 3부는 이런 종류의 감응을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기획이다. 이를 모든 정신과 합리적 이성에 반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대개는 배척의 대상으로 보았던 다른 합리론자들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부적합한 관념이 아니라 적합한 관념, 즉 원인을 알고 원인을 내부에 포함하는 관념일 수 있다고 본다. 감응은 정신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신체와 유기/조직적이고 평행한 관계를 맺은 결과로서 나오는, 혹은 그러한 관계의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과 다르다. 단지 외부 자극이나 정신의 상태에 대응하는 신체적 혹은 신체상의 반응이거나 반작용이 아니라, 정신과 신체가 감응/변용(affectio)의 원인이거나 결과로서 함께 참여해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감응은 능동적/적극적인 것과 수동적/부정적인 것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내가 내 변용의 원인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갖지 못할 때 그것은 수동적인 감응, 즉 정념이 된다. 즉 외부의 어떤 것에 영향을 받을 때. 정확히는 그렇다고 생각, 아니 실은 착각할 때. 실은 외부의 자극-나의 반응이라는 과정이 일방향적이지 않고 그 자극을 감각하고 인지함에서부터 이미 나 자신 그 변용 과정에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내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응 발생의 또 다른, 좀더 근본적인 원리는 일종의 관성 원리.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완전해지기 위한 경향성을 지니는데, 원인에 따라서, 변용에 따라서, 그 존재가 가진 역량 혹은 행위 능력은 증감된다. 어떤 원인으로 인해 내 존재가 감소/위축되면 이것이 내게는 슬픔이 되고, 슬픔은 다시 증오, 분노, 질투 등등 다른 모든 부정적인 감응들의 토대가 된다. 반면에 이 변용의 양태에 따라  내 존재의 역량이 상승하여, 내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나는 기쁨을, 그 기쁨의 원인을 제공하는 대상에 대해서 나는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 대상 또한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감응하기를 갈구한다.

그러면 그 사랑을 잃었을 때에는? 내가 느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사실은 원인(을) 제공(했다 생각했던) 자에 대한 그릇된 관념으로 인한 부적합한 관념의 소산이었다면? 답 : 그건 사랑이 아니었던 게다. 정념이었던 게다. 완전성은커녕 내 이 한 줌의 존재조차 가누지 못하게 만든. 그래서 더 무서운. 그런만큼 단연코 벗어나야 할.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이런 차이 없는 반복이 있나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또 하나의 박사 탄생을 축하하며"라는 제목으로 친구들에게 보낸 메일에다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었다 :
이제 남은 예비 박사라고는 정말 나 하나뿐이구나. 이젠 정말 상황 보고하기도 힘들다.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지루해서. 계속 statu quo 이니 말이야. 변화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에 정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나로선 꽤 큰 변화인 것이 사실. [...] 삶 전반을 뭔가 정규화하고 규칙화하려는 태도의 변화를 상징한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댄디즘이나 혹은 영혼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그리고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을 운운하면서, 일체의 계획적인, 목표에 맞춰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두려워하고 회피했었는데, 그것이 결국 삶에 대한 진지하거나 치열하지 않은 태도에 다름 아님을 깨달은 순간이 있었어. 여전히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춰 일정을 조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논문 일정은 여전히 차일피일 연기되고 있는 중 : 아무래도 빨라야 올가을), 최소한 일상에서만큼은 규칙성을 담보하고 이를 습관화, 나아가 체질화하는 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것 같고, 한 달여의 경과, 어느 정도는 이른 듯도 한데. 비록 아직 생산성 있는 결과(즉 논문의 진전, 나아가 완성)까지는 이르진 못했지만.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불과 며칠 전. 최근의 새로운 깨달음이랍시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
최근에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뷜가트한 니체주의랄까요. 불확실하고 미결정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거부하고 현재에 충실하자. 운명을 사랑하자. 이것이 20대부터 제 모토였는데, 실은 그것이 나태와 불성실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 성실한 삶의 태도란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춰 계획을 세우는, 그리하여 목표를 달성하고 그야말로 미래를 예정된 바대로 현실화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계획 경제, 목표량 달성, 이런 체제의 미덕.

그래서 계획을 사소하게라도 세워 그에 맞추는 습관을 길러보자, 이런 취지 하에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논문, 나아가 인생에까지 적용해 보려 했는데... 그게 참 안 되더란 말이지요. 계획대로 안되니까 대안인 플랜 비, 그도 안 되어서 씨, 디... 무한까지 가거나 아니면 무한 루프.
같은 결심, 같은 계획, 같은 실패, 같은 재계획의 무한 반복 재생. 이건 뭐 영원회귀에 가깝다. (무려 15년 전에 읽고 배우고 이해한 기억에 의존해서 써보건대)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 순간 하나하나를 견디거나 심지어 사랑할 자신이 있느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이 니체 영원회귀 교설이 뜻하는 바라면, 나는 이를 본의 아니게 실천해 왔던 셈. 범속할지언정 태생적 니체주의자였달까. 그런데 바로 그에 모순되는 모토를 세웠으니 실현될 리가 있나.

원칙주의의 필요성. 아니 필연성. 경험적 수행과 시행착오를 거쳐 축적된 자료로부터 요행히 "우연적" 결과를 얻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확률론적 근거를 찾는다 해도 이는 기껏해야 희망적 사고에 대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원리나 원칙, 하다 못해 사전 모의나 계획 없는 실험 및 관찰이 그 어느 생산적 결과도 가져다 주지 못함은 소박한 경험주의자나 귀납주의자가 아닌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 하물며 이론의 영역에서도 그러한데 실천의 영역에서는 어떠하랴. 실천의 영역에서는 의지가 현실에 대한 구성력과 미래에 대한 결정력을 분명히 가지니 말이다. 때로 도덕법칙이 자연법칙보다 오히려 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 여기까지 쓴 후 그로부터 다시 2개월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반복. 2년 전부터 지금껏. 이제는 정말 반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아니 이미 끊겨 있었거늘, 그러고도 못내 아쉬워서, 간신히, 간간이, 그럼에도 끊임없이 고리를 잇고 있었던 것이다. 비누방울처럼 잠깐 피어올랐다 사라지고 말, 그러고 나면 그 뿐일, 그런 고리를. 그러는 동안에 발목에는 사슬이 감기고 그 고리는 점점 더 길고 무거워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른 채. 이제는 정말 끊어야 한다. 반복한다. 이제는 정말 끊어야 한다.

2015년 5월 11일 월요일

책상 수난사

상처를 어루만지려다 - [le bruit bleu]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당시 살던 지붕밑 하녀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대신에 메트리스를 올려두도록 만든 메자닌이 있었다. 사실 메자닌이라 하면 좀 거창하고, 두꺼운 나무판자를 두 벽 사이에 걸쳐놓은 것이 전부. 게다가 일단 올라가면 앉아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천장에 가까운 높이. 아주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르내릴 때는 사다리를 타야했는데, 그 사다리란 것도 사실 매우 낡고 부실한 것이라 아무리 익숙해졌다 싶어도 늘 조심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산 2년 동안 총 2회의 추락사고가 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11년 전, 날짜를 보건대 아마도 요맘 때였던 것 같다.

온몸에 멍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책상이 파손된 사실이 당시로서는 더 속상하고 큰 일이었다. 떨어지면서 메자닌 바로 밑에 놓아둔 책상과 부딪히는 바람에 책상판의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것. 내 몸이 던진 충격이 적진 않았겠으나, 그 책상이란 것도 톱밥을 채워 만든 허술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손상된 모서리를 보며, 새로 사야 하나, 한숨을 쉬다가, 결국에는 그냥 쓰기로. 파손된 부분에다가는 어딘가에서 주워온 브레송 영화 카탈로그의 포스터 사진들을 잘라다가 붙였다. <잔 다르크의 재판>, <소매치기>, <돈> 등등. 누군가 와서 보더니 브레송을 좋아하냐고 물었는데, 마침 가지고 있었고 또 잘라서 써도 아깝지 않을 만한 것으로 골랐을 뿐. 오히려 이를 계기로 브레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이후로 중간에 몇 번 교체의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교체하기도 했으나, 결국 원래의, 그 문제의 책상판으로 돌아와서 지금껏 쓰는 중. 놀라운 것은 책상에 달려있던 서랍 같은 부위는 몇몇 연유로 해체 분리했음에도, 이 책상판만은 여전히 보유하고 또 사용중이라는 사실. 브레송 사진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수난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나의 파리생활 12년을 함께 한 유일한 가구인 것 같다. 

그 책상의 다리...라기보다는 지지대 구실을 하는 나무 판대기 또한, 부실하긴 해도 계속 쓰고 있었다. 며칠 전, 또 다른 불의의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서서 기지개를 켰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가끔 있는 가벼운 현기증인가 싶었는데, 웬걸,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사태에 이르렀다. 순간적으로는 사태가 파악되지도 않았다. 몸이 쓰러진 것까지는 알겠고, 다른 무언가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를 아련하게 들은 듯도 했다. 의식은 있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서 사태를 파악해야겠는데, 하는 생각까지는 했으니까.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 지나니 감각이 돌아와서 사태를 확인해본즉슨, 책상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도 함께. 몸이 쓰러지면서 책상을 쳤고, 그렇잖아도 부실했던 다리가 충격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실신은 처음이었다. 원인이 무엇인가, 수면 및 영양 부족인가, 아니, 그보다는, 이 새로운 종류의 지각경험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 등등의 상념에 빠진 것도 잠시, 사고의 방향은 즉시 현실적인 쪽으로 전환되었다. 이제 와서 다리를 새로 사다가 끼워야 하나, 속상해 하던 중, 벽장에 넣어둔 두 개의 이동식 난방기 생각이 났다. 난방 시설이 따로 없는 이 집의 유일한 난방 수단. 책 몇 권을 받치면 높이가 얼추 맞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임시로 이동식 난방기를 지지대로 쓰고 있는 중. 임시라고는 하나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책상의 수난도 이것이 마지막이길.

2015년 5월 8일 금요일

"그 초끈 우주론 학회는 내가 가본 중 가장 초현실적인 물리학 학술행사였다"

우주론자 조지 엘리스의 2013년 논문 "On the Philosophy of Cosmology"에서 생각지도 않게 마거릿 워트하임의 이름을 접했다.  

Currently, there is a culture of allowing anything whatever in speculative cosmological theories—sometimes abandoning basic principles that have been fundamental to physics so far. Science writer Margaret Wertheim attended a 2003 conference on string cosmology at the Santa Barbara KITP, and reported as follows (Wertheim, 2012): 
"That string cosmology conference I attended was by far the most surreal physics event I have been to, a star-studded proceeding involving some of the most famous names in science...After two days, I couldn't decide if the atmosphere was more like a children's birthday party or the Mad Hatter's tea party—in either case, everyone was high... the attitude among the string cosmologists seemed to be that anything that wasn't logically disallowed must be out there somewhere. Even things that weren't allowed couldn't be ruled out, because you never knew when the laws of nature might be bent or overruled. This wasn't student fantasizing in some late night beer-fuelled frenzy, it was the leaders of theoretical physics speaking at one of the most prestigious university campuses in the world."

워트하임이라면 <피타고라스의 바지>의 저자 아닌가. 한때는 내게 중요한 책 중 하나여서 석사논문에 인용까지 했었는데. 사실 논문 주제와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았음에도.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대로 숨은 의도가 있었으니. 나를 철학의 길로 이끈 여성주의 과학학에 대한  헌정의 의미였달까. 비록 그로부터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멀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엘리스의 인용도 맥락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좀 뜬금이 없어 보이거나, 아니면 다소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준다. 인용구는 워트하임의 2012년 저서 Physics on the fringe: Smoke rings, circlons and alternative theories of everything (Walker & Company)에서 따온 것. 엘리스 같은 최고의 이 분야 권위자가 과학저술가의 아마도 대중서에 가까울 이 책을 인용하다니, 의외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인용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권위에의 호소 기능이 없잖은가. 스스로가 최고의 권위자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고 말하자면 탈권위에 호소할 필요가 생기는 걸까. 

한편으로는 과학이론과 과학대중화 사이의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라고도 하겠다. 특히 우주론처럼 상당수 이론들이 미완성 단계이자 진행중(in progress)인 경우에서, 내가 논문에서도 다루는 바, 대중화가 이론에 대해 단지 종속적이고 일방적 흡수 및 전파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구성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이 가설을 입증하기에는 좀 미약한 감이 있으나 어쨌든 무관치는 않은 예. 

다른 한편으로 인용된 부분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것이 사실. 저 참으로 저널리스틱한 첫 문장은 직업 물리학자들의 아무래도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필두로 인용구 전체가  엘리스 자신이 지적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나를 포함,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을 바를 직관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시대 우주론의 사변적이고 "초현실적"인 경향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급인 다중우주론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어디에선가는.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것마저도. 왜냐하면 우리의 것과는 다른 법칙이 통하는 세계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므로. 나아가 그러한 세계가 단지 *가능*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기까지 한 것이, 그 세계에서의 법칙이야말로 우리의 물리법칙을 뒷받침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 이런 얘기가 물리학과 대학생들의 술자리에서가 아니라 물리학의 세계적 석학들이 모인 자리에서 진지하게 오간다는 생각을 하면 실로 기분이 묘하다. 

경험과학 중에서는 아무래도 가장 추상적이고 경험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심지어 경험적 검증가능성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그리하여 남은 최소한의 진리조건이라고는 내적 일관성뿐이다 보니, 이 업계 종사자들이 알려진 모든 물리법칙과 모든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수단들을 총동원해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엄밀성을 추구하게 됨은 이해함직하다. 그런데 이들을 한 군데 모아 놓으면 아무리 최고급 학회라도 아이들 생일잔치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미치광이 모자의 티파티 같이 모두가 들뜬 분위기가 된다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짐작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념뿐 아니라 이론 역시 추상적이고 관념적일수록, 그리하여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지지 근거가 결여돼 있을수록,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교조화 및 극단화되기 쉽고, 그리하여 잘못하면 극단주의나 광신주의를 낳기 쉬운데, 저 초끈우주론 학회의 정경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하나의 예증으로 제시할 수 있겠다...면 아무래도 과장이겠으나...과연 과장이기만 할 것인가? 

2015년 4월 30일 목요일

푸생의 에우리디케

ㄴ 언니의 초대로 가서 보고 온 루브르의 기획전 <푸생과 신>. 그곳에서 뜻밖에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에우리디케 상황 에서의 그 에우리디케를 다시 만났다.

Orphée et Eurydice, Nicolas Poussin, 1664. Huile sur toile 124 x 200 cm.

요전에 언급한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 이야기는 에우리디케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에우리디케 상황"의 원인이 되었던 에우리디케의 죽음이라는 사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어가는데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타느라 보지 못한다.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을 만큼 제법 가까운 위치에, 아니,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무엇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음에도!

내가 기억하는 푸생이라고는 루브르에 소장된 이른바 "풍경화"들, 그 중에서도 4계절 연작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 르네상스풍부터 고전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했는 줄은 몰랐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인상파를 연상케 하는 붓터치마저. 그러나 아무래도 르네상스 회화, 특히 푸생과 비교되고 실제로 초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라파엘로에 비한다면, 전반적인 색조에서부터 인물의 표정과 안색까지가 무척 어둡고 윤곽마저도 희미하다는 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느낀 전반적인 인상. 조명 탓도 있겠으나 그림들 자체가 어찌나 어두운지 중간에 라파엘로가 한두 점 나오니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누가 더 천재였는지를 겨루는 것은 무의미하고, 나는 차라리 15-16세기 이탈리아와 17세기 프랑스 사이의 지역적이고 시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좀더 나아가 말해 본다면, 시대보다는 오히려 토포스의 차이가 더 결정적이리라는 심증을 나는 가지고 있다. 똑같이 태양을 근원으로 가졌음에도 이탈리아에서 맞은 태양광은 프랑스에서와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지더란 말이다. 단지 일조"량"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더란 말이다. 프랑스에서의 햇빛은 그저 눈만 밝히는 빛으로서의 역할이 전부요, 그마저도 실질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상징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전부인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좀더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것이어서 몸을 따스히 감싸는 볕의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달까.

그러나 이것은 그저 옹호할 가치도 없고 나로서도 그럴 의지도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테제. 특히 내가 비교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프랑스라 함은 파리이고, 이탈리아라 함은 피렌체나 피사 등의 지중해를 낀 토스카나 지방이니, 비교가 부당함은 당연하다. 이 반론에 대한 재반론도 물론 가능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본산은 피렌체고 프랑스 회화 및 기타 예술의 중심지는 어쨌든 파리였으니까. 문제는 푸생의 경우 파리에서도 활동했지만 로마 교황청을 위해서도 일했고 결국 여생을 마무리한 것도 로마에서였다는 것.

좀더 진지하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본다면 이렇다. 종교개혁 이후 구교 세력이 신교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미지숭상(iconolatrie)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는 과정에서 특히 회화를 장려했고, 이러한 배경을 업고 17세기 종교화의 경향을 바로 대표하는 것이 바로 푸생이다. 그러나 동시에 푸생은 17세기, 화이트헤드가 "천재의 시기"라 부른 바 있는, 과학혁명 시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데카르트, 파스칼, 갈릴레오, 뉴턴 등의 이 "천재"들은, 18세기의 급진적 무신론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믿음을 합리적 근거에 정초하거나 반대로 믿음을 수단화하되 이 또한 합리적 논거와 논증을 거친 경우에만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이신론(déisme)의 전통을 마련하는데, 푸생의 종교성은 바로 이 전통을 따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갈수록 배경으로서의 자연이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그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측면이 강조된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인가? 실제로 푸생의 이력을 종교화에서 풍경화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푸생의 이른바 풍경화를 보면서 칸트의 숭고 개념을 떠올린 것은 사실이다. 이성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자연 내 불리한 존재조건을 넘어설 줄 아는 것이 인간이요,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바로 단적으로 크거나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재확인하도록 한다는 것이 칸트 숭고 이론의 대략적 요지. 푸생의 4계절 연작을 처음으로 봤을 때에는 아마도 <판단력비판>을 읽은지 얼마 안 됐었고 그래서 숭고를 떠올렸던 것 같으나, 다시 생각컨대 푸생의 자연관을 숭고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다. 독일과 프랑스라는 차이에 100년 이상의 시대 차이는 물론이고, 100년도 그냥 100년이 아니라 계몽시대를 거쳐 프랑스 대혁명까지를 포함하지 않는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를 체화하는 작품으로 흔히 거명되곤 하며 칸트와 동시대인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의 작품과의 비교하면 차이가 좀더 분명해질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과 갈등이라는 구도야 사상적으로는 베이컨을 위시, 17세기부터 이미 널리 퍼져 있던 관점이었을 것인데, 푸생과 그의 시대는 이러한 구도를 받아들임에 있어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모티브에 여전히 갇혀 있지 않았는가 하는.

그러나 이 역시 그다지 진지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좀더 진지할라치면 공부와 사유가 필요하겠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혹은 전시장을 나서며, 당장 떠오른 것이 세르가 푸생에 대해 쓴 글. 그 밖에 관련 주제로는 바로크와 역동론/동역학(dynamisme/dynamique)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들뢰즈의 <주름>에서도 푸생이 언급되고 있던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봤던 유진 그린(Eugene Green)의 영화 <라 사피엔자 (La Sapienza)> 역시 바로크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 참고로 푸생은 1594–1665)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린의 오랜 관심 주제였던 바로크에다가 또 그 특유의 규범적이고 설명적인 스타일이 건축이라는 주제와 접목한 결과로 나온 일종의 바로크 "건축학개론".  이 모든 것을 당장 뒤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참는다. 사실 위에 적은 얘기도 자신이 없고 나중에 보면 마냥 부끄러워질 테지만 그냥 첫인상에 대한 기록 차원에서 남겨둔다.

수미쌍관의 원칙에 입각해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를 하자면... tant pis pour Orphée et merci à ㄴ 언니.

2015년 4월 25일 토요일

두 가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내 앞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왜들 저리 날을 세우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마그네슘 결핍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저들도 많이들 지쳤나 보다, 힘든가 보다, 그래서 예민해졌나보다,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발밑은 가시밭길인데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가시나무나 고슴도치뿐인 세상. 하루빨리 그 모든 가시가 거두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들 삶에 지치고 나약해진 게 아니라, 나를 만나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보는 편이 설명으로서는 훨씬 간명하고 개연성이 있음을. 칸트는 인식의 형식과 원리들을 대상이 아닌 주관에 근거하도록 함으로써 대상적/객관적 인식의 문제를 (잠정적으로나마) 해결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상대적으로) 간소화하고, 이를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부른 바 있다. 과연, 온 천상계가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보면, 천문학의 많은 난문이 해결되거나 간소화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앞에서 유독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반응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무언가가 내게 있다는 얘기. 요전에 말한 가해망상의 징후인지도 모르겠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질문이라고 다 순수한 게 아니고 (그 유명한 유도질문, loaded question!) 내가 던지는 질문이야말로 그 전적인 예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가졌던 또 하나의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왜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은 내게 마음을 주지 않을까. 내게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내게 마음을 준 사람도 없지 않았으니까.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거니까. 혹시 너무 쉽게 마음을 주는 것이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마음 주는 일이 실제로 "쉽"기라도 한 양. 그러나 마음이 오간다는 것은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는 일. 합리적 사고나 의지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에 관한 이러한 소박하고 단순한 낭만주의-신비주의가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이런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끌리게 되면, 그 누군가 앞에서는 긴장을 해선지 아니면 마음을 숨기려는 의도에선지, 엉뚱한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어 그나마 있던 매력마저 스스로 손상시키는 결과를 낳곤 한다는 것.

그러다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마음을 둔 사람들이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주로 끌린다는 것이다. 나야말로 내게 마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마음이란 것이 작동하는 원리는 매우 범속한 욕망의 메커니즘에 가깝다. 욕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단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유효하고 충족되는 순간 무화되는, 일종의 맥거핀이고, 실제 대상은 욕망 그 자체라는 것. <스완의 사랑>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처음에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오데트에게 안색이 창백하다느니 광대뼈가 도드라졌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어 다소 시큰둥하던 스완. 그러던 그가 오데트의 마음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떠나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그녀를 품에 정작 안는 순간, 스완은 깨닫는다. 그녀가 심지어 자신의 "타입"마저도 아니었음을. "그 많은 세월을 허비하고, 죽고 싶어지기까지 하고, 더없이 큰 사랑을 했구나. 내게는 매력도 없고 내 타입도 아닌 여인 때문에."† "타입"에 속한다 해도 마음에 들까말까인데 그 타입의 조건에마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실 나는 이런 종류의 타입-토큰 이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늘 뒤늦게서야 온다. 요전에 말한 "계단생각"을 변주해서 말하자면 계단전회 (révolution de l'escalier). 모든, 최소한 많은, 전회/혁명이 그렇듯.§



* 사실 전회의 방향은 반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 천구 운동의 중심을 지구에서 세계-태양-으로 돌렸다면, 칸트는 역으로 인식의 근원을 세계에서 자아로 돌렸기 때문이다.

† « Dire que j'ai gâché des années de ma vie, que j'ai voulu mourir, que j'ai eu mon plus grand amour, pour une femme qui ne me plaisait pas, qui n'était pas mon genre! » -- Extrait de: Marcel Proust. « Du Côté de Chez Swann. » iBooks. https://itun.es/fr/pNCUD.l

§ 벤야민? Référence à venir.

2015년 4월 20일 월요일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

집중력, 이해력, 논리력, 한 마디로 지적 능력 일반의 감퇴. 대신에 감성적인 것에 대한 감응력은 인플레이션 단계. 그러나 이 부문의 성장은 그저 상대적일 뿐이다. 즉 지성의 자리를 감성이 대신하게 된 것일 뿐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과의 유비로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정신 능력의 총량이 일정하다면 지적 능력의 부분이 감성적 능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총량이 일정하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감성에 있어 "능력"을 논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고 미적 판단력이 나아졌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판단력 일반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능력으로서의 취미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발되었다 볼 수 있겠다. 특히 청각과 미각에 관한 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순간적인데, 특히 청각과 미각이 그렇다. 덧없는 것들. 그렇다고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단지 순간적으로만 현전함으로써 오히려 영원할 수 있는. 아니면 이렇게 말해보자. 다른 종류의 시간성을 지녔다고. 측정가능한 물리적 시간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넘어서 있는, 즉 탈시간적(atemporel)인 논리 및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닌. 심리적 시간? 아니면, 아인슈타인이 베르그손을 겨냥해서 말한, "물리학자의 시간"과 구분되는, "철학자"의 시간?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와 성당 종소리, 기차소리, 스푼으로 찻잔을 두드리는 소리, 뱅퇴이 소나타 등등의 시간. 흔히 베르그손의 지속과 비교되는 그 시간 말이다. 그 유명한 커피 속 설탕의 시간. 커피에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프루스트나 베르그손에게 특권적인 예가 청각과 미각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영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사실도. 왜? 로고스가, 즉 언어가, 즉 이성이 개입하므로. 베르그손에게는 지성. 베르그손은 아예 지성을 영화적이라 특징 짓는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유동하는 실재-지속을 지성화하고 박제화하는 것이 바로 로고스-이성이다. 

이게 다 지난 12년 간의 감성교육 탓이다. 데카르트적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의 현현인 동시에, 그것이 그에 대한 반작용인 낭만주의의 계보와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에서 오래 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게 다 볼테르와 루소 탓*이다.


*« On est laid à Nan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et bête à Pala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ne suis pas notaire,
C'est la faute à Voltaire,
Je suis petit oi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oie est mon caractère,
C'est la faute à Voltaire,
Misère est mon trousseau
C'est la faute à Rousseau.

Je suis tombé par terre,
C'est la faute à Voltaire,
Le nez dans le ruisseau,
C'est la faute à....  »

Extrait de: Victor Hugo. « Les misérables Tome V. » iBooks.

2015년 4월 17일 금요일

혼자서 또는 여럿이. 조류열전

로잔. 2008년 11월.


사라 문. 파리 자연사 박물관 전시. 2013년 12월.
파리, 빌라 뒤프렌느. 2015년 초.

 
파리, 빌라 뒤프렌느. 2015년 4월.




2015년 4월 16일 목요일

에우리디케 상황

내가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니다. 하이힐을 신고도 잘도 걸어서 주위의 감탄을 사곤 한다.빨리 걷는 습관은 아마도 엄마 걸음을 따라가다 익히게 된 것 같다. 일찍이 엄마는 작은 키임에도 훤칠한 친구들이 못 따를 정도로 빠른 걸음의 소유자로 유명했다. 어린 동생과 나와 걸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엄마는 늘 앞선 채로 뒤에 있는 우리에게 손짓하곤 했다. 그러면 나와 동생은 엄마가 흔드는 손을 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걸음이 빨라졌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걸음이 뒤쳐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유난히, 거의 유일하게, 같이 갈 때면 늘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이 있다. 나와 걷는 게 싫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원래 그렇게 걸음이 빠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원래 그렇다고 했다. 같이 있는 사람과는 걷는 속도가 맞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정도로 걷는 속도가 빠르기는 힘든데 만약 맞다면 상대방이 맞춰주는 것 아니냐고도. 그랬더니 함께인 그 사람은 다리가 길다고 했다.

뒤에서 따라오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혼자만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오르페우스를 생각했다. 그였다면 오히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주문을 충실히 지켜 에우리디케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이는 또한 전적으로 무심하기에 또 가능한 일이니, 그런 무심함이라면 저승까지 따라가서 그녀를 찾아올 이유 또한 없었을 것이고 미션이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오르페우스의 뒤를 따르는 에우리디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그 어느 주도권도 선택권도 의무도 없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고 망치고 하는 것도 다 오르페우스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어 오르페우스를 가만히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녀 또한 앞서가는 이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뒤로는 눈길 한 번 안 주는 것을 보며 서운키도 하지 않았을까. 그러던 중 앞선 이가 뒤를 돌아 보고 그리하여 보고 싶던 얼굴을 보려는 찰나, 아, 그것이 결국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헤어져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야 한들 어떠랴, 그의 마지막 얼굴과 마음을 확인한 순간만큼은 영원할 테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극적이고 부당할지언정 에우리디케의 상황이 부럽기도 하다. 같이 걷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 배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최소한의 배려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인가, 아니, 약자-이 경우 다리가 짧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그랬다면, 오, 그것은 약자 배려 원칙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저 동행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도 그러면 안되지 않나, 옆에 잘 걷지 못하는 어르신이나 아이가 있다 해도 그렇게 걸을 것인가, 그러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아무래도 역시 나와 걷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보기가 싫어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같이 있는 순간을 어떻게든 단축하고 싶어서... 등등의 끝없는 피해망상에서는 최소한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테니.  

-- Va, va, Eurydice, tu perds ton temps !

2015년 4월 2일 목요일

가족이 나오는 꿈

꽃, 나비, 나무, 하늘, 바람, 별, 강물, 물고기, 강아지 등등으로 가득한 친환경적이고 도교적인 세상. 그러나 그 세상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이 있으니. 그 순간, 꽃은 숨겨두었던 가시를, 나비는 날개의 상처를 드러내고, 나무는 누군가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화살이 되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강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그 바닥 위에서 물고기는 힘겹게 파닥대고, 강아지는 어둠을 향해 컹컹 짖는다. 루시드폴 노래를 듣다 보면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는 미선이 시절부터 이미  "송연" 이나 "치질" 등 가시가 돋힌 가사들을 써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독집부터는 서정의 정서가 지배적. "사람이었네"와 앨범 <레미제라블>의 몇몇 노래들에서는 세상의 불의에 선연히 분노하는 것 같긴 했으나, 그 표현이 절대로 직접적인 일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은유의 차원에 머물 뿐이었다. 현실에의 "참여"라 해도 지극히 은밀하고 소극적이이어서, 세상을 향해 열린 창 없이 오직 자기 안에 표현된 세상을 노래하는 모나드 같은 느낌. 즉 근본적으로 내향적(introspectif)이란 얘기고 그 노래도 결국은 내성(introspectoin)이라는 얘기다. 부적응자이거나 자폐아이거나 자급자족형이어서라기보다는,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대는 태생적 이방인이어서라는 것이, 내 자신의 경우를 투사한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해석.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으로만 보자면 앞의 세 병리와 다르지는 않겠으나.

이러한 내향적 인간 특유의 현실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는 것과 처음에 말한 그림자는 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두움이다. 평소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숨겨 놓지만 가끔씩 드러나고 마는 어둠의 그림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은 그 어둠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다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꽃은 말이 없다> 앨범에 실린 "가족"이라는 노래는 그가 만든 중 최고로 어두운 것 같다. 듣다 보면 지난 세기 초, 민중의 빈곤하고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른바 사실주의 가요(chanson réaliste) 생각이 난다.

다락방에 모여 사는 가족이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무너지지 말자고 소리친다. 아이도 소리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엄마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듬성듬성 붙어 있는 천정의 벌레들/금세 울음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들"와 같은 묘사는 무척 사실적이고 섬뜩하다. 조르주 브라상스의 "기도(La prière)"나, 좀더 멀게는 토머스 하디의 <주드>에서 "because we are too many"라는 말을 남겨 놓고 동생들을 죽이고 스스로도 목을 맨 어린 소년이 생각나는 대목.

그 중에서도 특히 "가족들이 나오는 꿈은 늘 불안하지/온통 걱정스런 눈빛만 가득하니까"라는 구절은 들을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진다. 이 노래를 들은 뒤로 실제로 꿈에 가족이 나오면 불안해지기도 했다.

바로 그 가족이 나오는 꿈을 며칠 전에 꾸었다. 야학 모임에 가는 꿈. 개교 몇 주년이거나 기타 기념 행사였을 것이다. 할머니도 오셨다.

이게 왜 가족이 나오는 꿈이고 또 "야학"과 "할머니"가 무슨 연고인가 할 수 있겠는데,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보통은 상관 관계가 있기 힘들겠고, 하다못해 자유연상으로도 연결이 자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내 개인사의 맥락에서는 그러하니, 나의 친할머니가 바로 서울의 한 야학에서 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계셨고, 나는 바로 그 야학에서 교사로 활동을 했던 것이다.

다시 꿈에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내게 "이 분이 당신의 할머니되시는 분이다"라고 소개해주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분명 보통은 아닌 상황. 그러나 이 또한 그럴 법도 한 것이, 나는 친손녀라 해도 못 뵌지 5년이 넘은 데 반해, 야학의 제자들과 선생들은 가끔 모여서 찾아뵙고, 또 최근 "폐교" 행사에서는 다들 모였다고도 하니. 그런데 내 눈앞의 할머니는 몹시 앳된 얼굴과 표정이었다. 그저 아흔을 넘기고도 정정함을 유지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소녀였다. 그것도 사춘기 소녀. 수줍어하면서도 또 눈빛은, 걱정스럽기커녕, 천진난만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 와중에 생각했다. 다들 모이는 거면 그도 올까? 그랬더니 실제로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교수가 됐다더니, 회색 정장을 한 말쑥한 차림. 가는 눈. 내리깐 시선.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숨에 알아 보았다. 할머니는 알아뵙지 못했는데. 그도 나를 보았는지, 알아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알아채기 전에 꿈에서 깼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인물. 최근에는 할머니 생각이 부쩍 늘었다. 어느새 아흔을 훌쩍 넘기셨는데, 빨리 가서 뵈어야 하는데. 문제의 "그"는 계속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불현듯 생각이 났다. 궁금하기도 하고 또 그리워지기도,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족(과 한때 최소한 가족만큼, 아니 가족보다 훨씬, 친밀했던, 일종의 유사가족)이 나오는 이 꿈에서 모종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걱정스런 눈빛이 가득해서가 아닌, 그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눈빛이 걱정스러우면 차라리 좋겠다. 눈빛이 아예 사라지거나, 아니면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을 것, 그것이야말로 더 걱정되고 또 걱정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래 전 두고 온, 너무 오래 비워둔 내 자리, 지나온 시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