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와 무한 (2) 유한의 무한 도전 : 세계와 정신의 한계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16일)*

 서론 : 역설,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무한 개념의 기원과 분류 : 물리적 무한과 수학적 무한, 가무한과 실무한

역설의 보고(寶庫)로서의 무한

물리적 무한과 그 역설

그리스의 유한 우주와 그 역설

근대 무한 우주의 도입

밤하늘은 왜 검은가? 올베르스의 역설 칸트의 이율배반

수학적 무한과 그 역설

연속과 무한 : 제논의 역설

무한은 얼마나 작은가? 미분의 도입과 무한소 무한을 셀 수 있는가? 힐베르트의 무한 호텔 무한은 얼마나 큰가? 칸토어의 역설

결론 : 무한과 한계, 그리고 역설의 가치


별첨(인용구)

1° 모순율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위배를 거두어야 할 필요가 우리로 하여금 수학적 연속을 발명하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념의 모든 것이 정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또 정신에 이러한 기회를 부여한 것이 경험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앙리 푸앵카레,『과학과 가설』 (1902)

2° 잠재적 존재와 현실적 존재가 있으며, 추가에 의한 무한과 분할에 의한 무한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크기도 현실적으로 무한하지 않고 크기는 분할에 의해 무한하다고 말했다 (분할불가능한 선이 있다는 주장은 쉽게 반박된다). 그러므로 크기는 잠재적으로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크 기가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을, 잠재적인 조각 작품이 언젠가 현실적인 조각 작품이 되는 것처럼 크기가 언젠가 현실적으로 무한해지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여러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무한하다는 말은 특정한 날이나 경기가 있다는 말과 뜻이 같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별할 수 있다. 올림픽 경기는 거행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 거행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도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3° 17세기 혁명에서 비롯된 변화는 코스모스의 해체와 공간의 기하학화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 어졌다. a) 변화와 부패의 영역의 중심인 무겁고 불투명한 지구가 있고, 그 “윗편”에 무게도 없고 부패하지 않으면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위치한 천 상계가 “올라선” 것이 [코스모스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무제한의, 나아가 무한의 우주, 모든 부분 들을 [일괄적으로] 지배하는 법칙들, 그리고 같은 존재론적 수준에 위치한 요소들의 동일성에 의해 서만 통일된 우주가 그것이다. b) 아리스토텔레스 공간관, 즉 세계 안의 장소들의 차등화된 총체였 던 공간이 등질적이고 필연적으로 무한한 연장체 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구조상 우주의 실제 공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될 것이었다. – 알렉상드르 코이레, 『닫힌 세계에 서 무한 우주로 (From Closed World to Infinite Universe)』 (1957)

4° 앞의 것들[무한한 선, 물체의 분할, 별들의 수...] 을 우리는 무한하다고 하기보다는 부정(不定)하다 고했다. 이는 무한이라는 용어를 단지 신에게만 쓰고자 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단지 신에게 있어서만 어떠한 한계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떠한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에 우리는 다른 것들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와 같이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그것들이 한계를 갖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발견할 수는 없고 단지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 데카르트, 『철학원리』 (1644)

5°모든 사물들이 공유하는 성질들이 있고, 그 성질들에 대한 앎은 우리의 정신을 자연의 가장 큰 경이로움으로 이끈다. 그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경이로움은 모든 사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무한, 즉 무한대와 무한소이다. 어떤 공간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큰 공간을 상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것보다 더 큰 공간도 상상할 수 있다. 이 상상은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공간에 도달함 없이 무한히 계속된다. 반대로 어떤 공간이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작은 공간을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은 더 이상 분할불가능한 공간에 도달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된다. 시간도 마찬 가지다. 우리의 한계를 깨닫자. 우리는 한 사물이지 모든 사물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는 무에서 발생하는 최초 원리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우리 존재의 작음은 우리의 눈앞에서 무한을 감춘다. [...] 이 무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6° 무한한 공간 전체에 정말로 태양들이 있다면, 그 태양들이 대략 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분포 하든지 아니면 은하수-시스템들에 속해서 분포하든지 간에, 태양들의 개수는 무한대일 테고, 따라서 온 하늘이 태양에 못지 않게 많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서 뻗어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직선 각각이 반드시 어떤 항성과 만날 것이고, 따라서 하늘의 모든 지점이 우리를 향해 항성의빛,곧태양의빛을보낼것이기때문이다. –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 1832

7° 별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면, 밤하늘의 배경은 은하수처럼균일하게밝을 것이다.왜냐하면밤하 늘의배경전체에별이없는지점이단하나도없 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망원경 들이 무수한 방향에서 포착하는 허공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보이지 않는 배경까지의 거리가 어 마어마하게 멀어서 거기에서 출발한 광선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일 성싶다 – 애드거 앨런 포, 『유레카 : 산문시』 (1848)

8° [모든 사물은] 분할가능하거나 분할가능하지 않 거나 둘 중 하나다. 분할가능한 것은 분할가능하지 않는 것으로 분할되거나 계속해서 분할되거나 둘 중하나다.마지막경우가연속에해당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9° 시간이 어떻게 영혼과 관계하는지, 왜 시간이 땅과 바다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연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만일 영혼이 없다면 시간이 존재할까,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이 셀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어지는 것 혹은 셀 수 있는 것인 수도 명백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는 능력을 가진 영혼이나 영혼 속의 정신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영혼 속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면 시간의 바탕만 존재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0° 사유되지 않는 것은 순전한 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사유만을 사유할 수 있으며, 사물에 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언어란 오직 우리의 사유를 표현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유 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명은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의 짧은 일화에 지나지 않고 –시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이 일화에서조차 의식적 사유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으며 오직 한 순간만 지속할 뿐임을 지질학의 역사는 보여준다. 사유란 기나긴 밤의 한 가운데 내리치는 번개일 뿐이다. 그러나 이 번개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 앙리푸앵카레, 『과학의 가치』 (1905)


참고문헌과 동영상

- 존 D.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 : 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 해나무, 2011
-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전대호 옮김, 『밤을 가로질러 : 밤, 잠, 꿈, 욕망, 어둠에 대하여』, 해나무,  2015
- EBS 지식채널 e “왜 밤하늘은 어두울까”
- 제프 데코프스키 Jeff Dekofsky, “무한 호텔 역설The Infinite Hotel Paradox” on YouTube
- EBS 다큐프라임 “넘버스 2부 – 천국의 사다리,∞”
- 카오스재단, [카오스 술술과학] “도대체 무한이란 무엇일까” 1 & 2 (무한의 신비 & 무한을 세는 법)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6강

무와 무한 (1) 무에서 유로 : 우주와 그 기원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2일)*

서론 : 근본적 물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생성론 (cosmogonie : cosmos+gonos) cf. as- tron+nomos, cosmos+logos, etc.

플라톤 : ‘그럼직한 설명(eikos logos)’으로서의 우 주(생성)론

우주론의 역사와 철학 

우주론의 특수성

우주론의발전단계 : 고대-고전-현대?과학적우 주론은 아인슈타인 이후?

A. 그륀바움 (Adolf Gru ̈nbaum, 1913-2018)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 : 근원적 실존 문제 (Primordial Existential Question)

PEQ의원형:라이프니츠,자연과은총의원리 (1714)

베르그손의 비판 : 잘못 제기된 문제

그륀바움 : PEQ의 두 전제(무의 자발성과 우연성)

에 대한 비판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

어떻게 무에서 유가 나오는가? ‘무로부터의 창조’와 현대우주론

그리스 철학에서 무/허공의 도입 : 원자론의 이론 적 요구

플라톤 : 데미우르고스의 신화 ; 아리스토텔레스 : 영원우주론

사물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물음으로서의 PEQ cf. 사물의 기원적 생성(1697)

빅뱅의 이전 혹은 기원에 대한 물음

결론 : 종교, 과학 그리고 철학 

최근 종교-과학 담론의 경향


별첨(인용구)

1° 반성을 할 줄 아는 모든 인간은 세계의 기원이 라는 문제에 몰두해 왔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묻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 앙리 푸앵카레 (1854-1912), 『우주생성론 강의』, 1911

2° 언제나 있는 반면 생겨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나 생겨나되 결코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성적 설명과 함께 하는 사유를 통해 헌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있는 것인 반면, 비이성적인 감각을 동반하는 판단을 통해 의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일뿐 진짜로는 결코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원인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실로 하늘 전체를 놓고 보자면, – 혹은 그 것이 세계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그렇게 불렀을때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이라면, 우리로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죠. – 어쨌건 그것에 관해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무엇에 관해서든 맨 처음 탐구하도록 제기되는 물음, 즉 그것이 생성의 시초라고는 일절 갖지 않은 채 항상 있어 왔는지, 아니면 어떤 시초에서 출발하여 생겨났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고 만질 수 있으며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요.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감각될 수 있으 니, 감각될 수 있는 것들은 감각을 동반한 의견에 의해 파악되는 것들로서, 생겨나고 태어난 것으로 서 밝혀진 것입니다.

사실상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성에 맞 는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는모상에관해서도,또본에관해서도다음을구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명이란 무엇인가를 해명 하는 것으로서 바로 그 무엇과 동류이니까요. [...] 그러니까 존재가 생성에 관계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리는 믿음에 관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크라테스! 여러 가지 점에서, 또 여러 가지 문제들, 예컨대 신들이라든가 우주의 생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그 자체로 일관되며 완벽하게 엄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놀라지마세요. 오히려 정말 우리가 누구 못지 않게 그럼직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 플라톤, 『티마이오스』, 27d- 29d

3° 1917년과 1925년 사이 불과 몇 년만의 일이었다. 한 천재물리학자, 그리고 한 천문학자에 의해 다루어진 거대한 망원경이 우주에 대한 관념과 시각을 자연철학에 들여왔다. 이 만남에서 현대 우주론이 탄생했다. – 자크 메를로퐁티, 『20세기 우주론』, 1965

4°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한 물리학자로서 논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대(大)원리를 이용해서 형이상학으로 올라서야 한다. 그 원리의 내용은 어느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는생기거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해 충분히 알기만 하면 왜 그것이 저러하지않고 이러한지를 규정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고, 그와 다른 방식으로는[즉 사물이 이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일단 제시되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무엇인가 있는 것보다 단순하고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들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들이 왜 달리 있지 않고 이렇게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1714

5° 도대체 우주가 왜 있는가? [우연적인]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살아 있는 존재도, 별도, 원자도, 심지어 시간과 공간조차도. 이러한 [”전무(Null)”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워 보일 수 있다. – 데릭 파핏(D. Parfit), ”The puzzle of reality. Why does the universe exist?”, 1998

6° 그런데 이 질문은 다음을 전제한다. 실재가 허공(vide)을 채우고 있고, 존재의 기저에는 무가 있으며, 당위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어야 하고, 따라서 왜 사실상으로는 무엇인가가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이 질문은 순전한 환영이다. 왜나하면 절대적 무의 관념은 둥근 사각형과 다를 바 없는 의미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부재는 다른 어떤 것의 현존이다 (다만 이 현존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관심이 있거나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편을 선호할 뿐이다). 그런 만큼 어떤 것의 제거는 다른 것으로의 대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업은 양면적일진대 우리는 어느 한 면만을 보려 한다. 모든 것의 폐기는 자기 파괴적이요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그것은 유사관념이요 표상의 환영이 다. – 베르그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1935

7°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진보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존재에 대한 고려, 그리고 가장 최초의 혹은 초월적 기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이루어졌다. 발전하고 진화하기 위해서 세계는 우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무로부터 존재로 화(化)해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되어야 했다. 본질에 의해 존재하는 최초의 존재에 의해. – 베네딕트16세, 교황청 주관 학술대회 ‘우주와 생명의 진화에 관한 과학적 통찰’ 기조 발언, 2008


참고문헌

- 김혜숙, 『칸트: 경계의 철학, 철학의 경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1.
- 플라톤,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 Adolf Grünbaum (2013) “Science and the im- probability of god” (초판에는 같은 글이 ‘Why is there a universe at all, rather than just nothing’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in C. Meister and P. Co- pan (ed), Routledge Companion to Philosophy of Religion, 2nd edition (New York: Routledge).
- 짐 홀트,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역사를 관통하 고 지식의 근원을 통찰하는 궁극의 수수께끼』, 우 진하 옮김, 21세기북스, 2013.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5강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무(無)와 무한(無限)은 서양철학 고유의 개념으로,  전자가 유대교-기독교의 유산이라면 후자는 그리스 철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양자 모두 오직 신에게만 가능하며 심지어 이해가능하다 여겨져 왔지만 실은 인간 정신의 창조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인간이 창조해서 초월적 존재에 부여한 속성인 것이다. 사실 이 초월적 존재의 개념 역시 인간 스스로 창조한 것이다. 이 존재를 창조주로, 그리고 스스로를 피조물로 규정한 것 역시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무와 무한 개념은 도전에 직면한다. 근대 과학(특히 우주론)이 "무로부터의 창조"에 기반한 창세기의 우주론이나 "어떻게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문제로 집약되는 철학(특히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근대 수학(특히 미적분학과 칸토르의 초한수론)은 무한의 접근불가능성 혹은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들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이 강좌에서는 무와 무한 개념을 둘러싼 철학, 과학, 그리고 수학의 도전과 응전을 다룬다. 

강사 소개

이지선 : 이화여대에서 물리학(전공)과 철학(부전공)을 수학한 뒤,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수학의 적용과 그 존재론적 함축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의 사상과 17~19세기 우주론의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프랑스 파리 디드로 대학 (구 파리 7대학)에서 과학철학 및 과학사 ("과학기술의 인식론과 역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 철학, 그리고 가끔은 예술의 경계에서의 사유를 과업으로 삼고 있다. 논문으로 "철학자의 시간과 물리학자의 시간"(철학, 2019)이 있으며, 과학사 고전인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닫힌 세계에서 열린 우주로>(읻다, 2021년 출간 예정)를 옮기고 있다.

세부 내용

- 우주론의 철학 및 역사 개괄, 그리스의 우주론과 유대-기독교의 우주론, 우주론적 문제와 형이상학의 문제 ("어떻게 무가 아니라 유인가?"), 창조를 둘러싼 개념들 (무로부터의 창조, 연속 창조 등), 고전 및 현대우주론의 도전 등
- 수학의 철학 및 역사 개괄, 그리스 수학에서의 무한 및 관련 개념들 (연속, 악무한과 가무한의 구분 등), 무한소와 미분의 발견, 무한의 역설, 칸토르의 도전과 괴델의 정리 등

참고 문헌

- (생명과 우주에 대한) 과학과 종교 논쟁, 최근 50년 : 빅뱅에서 지적 설계까지 / 래리 위덤 지음 ; 박희주 옮김 (서울 : 혜문서관, 2008)
- 수학의 몽상 : 이진경의 매혹적인 근대 수학사 강의 / 이진경 지음 (서울 : Humanist, 2012)
- 우주, 진화하는 미술관 : 이미지로 보는 우주와 과학의 역사 / 존 D. 배로 지음 ; 노태복 옮김 (파주 : 21세기북스, 2011)
- 옥스퍼드 과학사 : 사진과 함께 보는, 과학이 빚어낸 거의 모든 역사 / 이완 라이스 모루스 외 지음 ; 임지원 옮김 (서울 : 반니, 2019)


*2019년 가을 이화철학연구소 주최 이화인문아카데미 연속강좌  "서양 철학 리부팅_1 신과 인간: 크리에이터 vs 크리쳐", 5, 6강 기획안. 이 꼭지는 내가 기획했지만 꽤 그럴 듯하다. 그에 비해 강의는 준비가 부족해 무척 아쉬웠지만 나중에 이런 구성으로 책을 써보면 좋겠다. 

인생 최고 흑역사, 계단 인사말... 그리고 흑역사는 계속된다?


- 이전 포스트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에 이어진 글. 그렇지만 실은 그 글 앞에 쓰여진 글.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쓴 바로 그날 하루 전에 써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계단 인사말이 되겠다.

3 juil. 2019 à 21:50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책이나 다른 글들로 접했던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또 이렇게 앞에 모시고 발표까지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발표 기회를 주신 학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아울러 발제문을 사전에 준비하지 못하고, 또, 발표 형식 면에서도,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는 (그것도 객석과 공유하지도 않고 혼자서만) 유럽 인문학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점에 대해서도, 양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게는 이 자리가 몇 가지 점에서 감회가 더더욱 새롭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년 전인 2008년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철학자대회가 열렸고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저는 처음으로 모국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계셨던 몇몇 선생님들을 이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분석철학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택한 주제가 바로 아돌프 그륀바움의 유신론적 우주론 비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손을 놓고 있었던 이 주제를 소환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지난해, 논문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륀바움의 별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10년 동안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발전하거나 달라진 논의는 없는지 확인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오늘 발표는 차후 이 주제에 대해 보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시론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제 김상욱 선생님 발표에서 나왔던 "우주는 심심하다"라는 명언, 기억하실 겁니다. 우주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어떤 의도 없이 생겨나 또 운행되고 있다. 또 그 안의 운동도 특정한 의미 없이 진행된다. 우주에 대한 과학자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고 여기 계신 철학자 여러분도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중요한 학회 발표를 앞두고도 준비가 미진한 상황에서 세상이 내일 멸망했으면, 아니 아예 소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혹시 해본 적 없으신지요? (그런 생각 해본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 있는데 누구라고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세상이 소멸해서 없어진 상황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해보게 되는 상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나, 지구나 태양을 포함한 천체들이, 개별적으로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을 포괄하고 포함하는 총체로서의 우주 전체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사실 상상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주가 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가능하다. 우주가 없었거나 앞으로 없어지는 일이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이러한 일들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기독교-유대교의 도그마를 거쳐서, 가능할 뿐 아니라 당위적인 사실이 되었고, 이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로 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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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인사말을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마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하고,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했더라도 발표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에 내리리라고는, 그리하여 이름하여 "서울역 회군"의 역사를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 어제 자정이 마감이라던 그 글은? 아직 못 썼다... 그리고 학회지 담당인 편집이사님께 메일로 슬쩍 마감 연장 여부를 물어봤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회 대표 계정으로 문의했던 것임을 조금 전에야 알았다. 이쯤 되면 이 학회하고는, 아니 이 학계와는 도통 연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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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e la Présidente, Madame et Messieurs les membres du jury

Madame la Présidente, Madame et Messieurs les membres du jury,

Je voudrais d’abord remercier les membres du jury pour avoir accepté de lire ma thèse et de participer à sa soutenance, ainsi que mon directeur de thèse, Monsieur Szczeciniarz, pour son accompagnement et son encouragement qui m’ont permis de mener ce travail à bon terme.

Mes remerciements vont également à ma famille et mes amis pour leur présence aujourd’hui, mais aussi pendant mes années de thèse. Pendant des années bien longues, je dois préciser, puisqu’il m’a fallu un temps bien considérable pour arriver jusqu’ici.

La thèse que j’ai l’honneur de présenter devant vous s’intitule «Du monde mécanique à l’univers physique. Pour une histoire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autour de Leçons sur les hypothèses cosmogoniques de Henri Poincaré (1911)».

Je viens de vous parler du temps. S’il a fallu tant de temps pour terminer cette thèse, ce ne serait pas seulement par l’ampleur et la difficulté du sujet que j’avais choisi, mais aussi par la nature même de ce sujet. Mon sujet, vous l’auriez remarqué, est double, Poincaré et la cosmologie, qui réunit deux thématiques qui ne sont pas très favorables à la gestion du temps. Dans un premier temps, j’avais à faire face au temps astronomique, voire cosmologique, au point d’ignorer un peu le temps à l’échelle humaine. La faute serait aussi, au moins en partie, à Poincaré lui-même, qui ne s’effrayait pas de parler du temps infini, et s’intéressait bien peu au passage du temps à court terme au point d’oublier parfois de dater ses écrits, au dam des historiens.

Le choix de ce sujet tient à des rencontres personnelles ainsi que textuelles. La première rencontre avec la première phrase des Leçons était comme un coup de foudre. «Le problème de l’origine du Monde a de tout temps préoccupé tous les hommes qui réfléchissent ; il est impossible de contempler l’Univers étoilé sans se demander comment il s’est formé.»

Longtemps je me suis intéressée au problème de l’origine du monde. Comme tout le monde peut-être, pas plus, tout simplement parce qu’il est impossible de faire autrement en présence du ciel étoilé devant ses yeux, nous vient de dire Poincaré.

Après avoir fait des études en physique et en philosophie à Séoul, je voulais continuer d’étudier la philosophie des sciences, mais dans une autre direction et dans une autre tradition que le courant analytique ou anglo-saxon dominant à l’époque en Corée. Pour mon mémoire de master en philosophie, je me suis préoccupée de l’analyse du langage utilisé en mathématiques. Mon analyse portait entre autres sur l’argument de l’indispensabilité des mathématiques dans les sciences, conçu et développé par Quine et Putnam en faveur du platonisme à l’égard du statut ontologique des objets mathématiques.

Je crois avoir croisé les livres de Poincaré en traduction coréenne dans mes égarements à la bibliothèque. Mais à ce moment-là son nom ne me disait pas grand-chose, en tout cas beaucoup moins que ceux de Bachelard, Canguilhem ou Foucault. J’avais une admiration profonde pour ces héros de l’épistémologie française ; j’adorais son approche versée en histoire, son intérêt au concret, ainsi que son style littéraire. C’est ce qui m’a amenée à entamer des études en France.

Ce n’était qu’en France que j’ai découvert les Leçons de Poincaré. C’était un pur hasard que j’ai été conduite aux Leçons en version numérisée sur le site Gallica.fr. Pour le mémoire de DEA, je cherchais un peu maladroitement sur le catalogue de la BNF, sans même savoir qu’il existait une «science» qui a pour objet spécialement la naissance du monde et qu’il y avait un mot qui désigne cette science qu’est la cosmogonie. Le livre de Poincaré a retenu mon attention, d’abord par son titre où paraissait le nouveau mot que je venais d’apprendre, et, surtout, par son auteur, que je commençais à connaitre à peine et de qui je ne m’attendais pas à un livre de cosmogonie d’après le peu que je savais de lui

Mon objectif était de contribuer à une histoire de la cosmologie dans la lignée de Koyré (qui a couvert de Copernic jusqu’à Newton) et Merleau-Ponty, Jacques (de Laplace à Eddington en passant par Einstein), en construisant deux objets que j’ai nommés «monde mécanique» et «univers physique». D’un autre côté, j’avais l’intention de montrer que Leçons, assez connu et souvent cité encore aujourd’hui, sans pour autant avoir fait l’objet d’un travail approfondi, mérite une attention pour l’histoire des sciences, plus précisément de la cosmologie, ainsi que pour les études poincaréennes.

Mon travail a procédé en deux temps. Dans un premier temps, l’histoire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de Descartes jusqu’aux cosmogonistes au tournant du vingtième siècle, cités dans les Leçons, en passant par Kant, Laplace, Comte et Cournot. Dans un deuxième temps, une étude systématique sur l’œuvre de Poincaré. Puisque Leçons est l’un de ses derniers ouvrages, il m’a fallu parcourir toute son œuvre. L’immensité de cette œuvre oblige, j’ai dû me borner à une de ses parties. Je me suis concentrée sur la partie philosophique de cette œuvre, écrite à diverses occasions et recueillie par les propres soins de son auteur dans les livres comme La science et l’hypothèse.

Dans ma tentative d’une étude systématique de son œuvre, je crois avoir trouvé une réponse possible à cette question difficile, celle de savoir s’il y a un système philosophique ou une philosophie tout court. C’est une philosophie qui se caractérise par la systématicité qui n’est pas dogmatique ni statique, mais prend en compte la diversité et la dynamique des sciences.

Je voulais montrer également qu’elle ne manquait pas d’éléments cosmologiques. Les pistes, trois thèmes-problèmes récurrents dans ces écrits se trouvent aussi «ouverts», pour ne pas dire «dirigés», vers l’univers : le mécanisme, la loi/le principe et l’espace. Si elle n’aboutit pas à une théorie ou un modèle rationnel de l’univers, elle n’en a pas moins de place dans l’histoire de la cosmologie. Quelque part entre la fin de la cosmologie classique et la veille de la nouvelle cosmologie mise en place par Einstein en 1917.

Au cours du travail, j’ai connu plusieurs changements de problématique et de méthode, dont certains étaient plus ou moins radicaux. Tout au début, j’avais l’intention de rapprocher Poincaré de la cosmologie moderne et de le promouvoir, pour ainsi dire, au rang des «précurseurs» des théories de l’univers telles qu’on les connait aujourd’hui. Pourtant, il m’est arrivé de me persuader progressivement que Poincaré faisait partie de la science de l’univers à l’âge du positivisme, comme le dit le titre de l’ouvrage de Merleau-Ponty de 1983. Cette science, si elle n’a pas abouti à une cosmologie proprement dite, sinon la non ou la quasi cosmologie comme Merleau-Ponty caractérisait, avec un goût de formule qu’il avait, constitue un moment non moins significatif de l’histoire de la cosmologie.

Avec cette nouvelle perspective venait le besoin d’une nouvelle méthode. La méthode me préoccupait tout au long du travail, et le résultat en est les «discours préliminaires» qui précèdent chacune de deux parties principales de la thèse. Après plusieurs expérimentations et inversions du plan de thèse, j’ai fini par choisir l’archéologie comme méthode, faisant référence à Foucault. J’ai essayé de suivre les consignes données par l’auteur de L’archéologie du savoir. Privilégier la contemporanéité et la simultanéité de théories hétérogènes, au lieu de chercher à en établir l’homogénéité et la continuité dans le temps, tout en assumant leur discontinuité voire leur rupture à travers de différentes époques, afin de relever leur condition de possibilité, à la fois a priori et historique.

Ce qui m’a amenée à une sorte d’archives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Ces archives ont été réunies dans la première partie de la thèse et enrichies dans la deuxième partie, avec l’œuvre de Poincaré. Tout ceci revenait à faire les archives des Leçons de Poincaré qui est aussi, d’une certaine manière, une sorte d’archives des hypothèses cosmogoniques, plus démodées que prometteuses, plus «périmées» que «sanctionnées» au sens bachelardien de ces termes.

En somme, ces archives ne nous renseignent pas grand-chose sur l’origine du monde, pas plus qu’elles n’enseignent la science de l’origine du monde. Sur ce point, je dois rectifier ce que j’ai écrit dans la thèse. J’ai dit, à la page 60, que l’intérêt pour l’histoire s’encadrait strictement autour de l’enseignement chez Poincaré. Mais, en fin de compte, ce ne serait pas tout à fait le cas. Son exposé n’est pas tout à fait pédagogique : en le lisant, on n’a pas le sentiment d’être enseigné ou renseigné, on se sent plutôt interrogé et intrigué ; on a un peu du mal à suivre ses idées, parfois plus associées par analogie qu’elles soient enchainées logiquement. Il ne nous apprend pas tant sur l’origine du monde, mais nous incite à réfléchir sur cette question elle-même en tant que problème cosmologique, l’esprit qui l’aborde et la quête à la solution. Bref, c’est une leçon de philosophie que Poincaré nous a laissée dans ses dernières leçons.

Les premières phrases que j’ai citées tout à l’heure et qui me poursuivaient pendant tout ce temps s’accompagnaient d’une autre phrase non moins mémorable dans La valeur de la science : «La pensée n’est qu’un éclair au milieu d’une longue nuit. Mais c’est cet éclair qui est tout.» En fin de compte, les lois de la nature dans le ciel étoilé et les lois des morales dans mon cœur ne sont pas si séparées comme chez Kant, pas plus que la raison et le cœur comme chez Pascal, si c’est le cœur qui touche et incite la raison à réfléchir.

Poincaré terminait ses Leçons par un point d’interrogation. Je pourrais terminer autant, même plus : pas par un point d’interrogation, mais plusieurs, avec quelques pistes de travail à venir. D’abord un travail archivistique autour des Leçons, que ce soit relatif au cours même de 1910–1911 à la Sorbonne ou à l’édition chez Hermann, avec l’ajout des matériaux comme les procès-verbaux du conseil de l’université ou le contrat avec l’éditeur pour ce qui concerne la seconde édition. Une étude comparative plus approfondie serait envisageable aussi, entre Poincaré et d’autres auteurs, notamment Bergson et Mach. La connexion entre Poincaré et Bergson me parait d’autant plus intéressante et significative qu’il y a plus de points communs et comptables qu’on le croit, alors qu’elle est relativement peu étudiée, en tout cas moins que la confrontation entre Bergson et Einstein, ou encore beaucoup moins que le rapport Einstein et Poincaré.

Après bien des années d’études, j’ai fini par apprendre qu’une thèse de doctorat est, de par sa nature même, un travail en cours, toujours en construction, une ébauche du travail à venir. Raison de plus, une seconde édition est prévue pour cette thèse, exactement comme les Leçons de Poincaré d’ailleurs, même si ce n’est pas pour la même raison : elle s’impose, pas par le «succès» dans les librairies comme c’était le cas des Leçons, mais par un second dépôt après la soutenance, désormais obligatoire, d’après les nouveaux règlements du doctorat. J’aurai donc la possibilité de tenter une seconde chance et de donner une deuxième vie à cette thèse, possibilité dont Poincaré ne pouvait pas tirer le profit au maximum. Tous vos commentaires, critiques et suggestions, me seront donc extrêmement utiles.

Je vous remercie de votre attention.


Texte de présentation lu le 7 juillet 2018

다시 시작을 논하기에 앞서 다시, 시작의 노래

«Primordial», Australie, 2017. Tamara Dean. Agence VU
«Commencement», Australie, 2017. Tamara Dean. Agence VU


시작 - 최승자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씨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 ⟪즐거운 日記⟫ (1984)


이 글의 제목은 무엇인가

"예술작품으로서의 제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던 ㅅ. 그에게 "제목이 소재나 주제나 형식이나 질료 등등과 마찬가지로 한 예술작품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는 주장은 알겠다. 그러나 제목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의 위상을 갖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나 <LHOQ> 은 각각이 지시하는 작품이 존재할 때 비로소 '제목'으로서 성립한다. 작품과 독립된 상태에서 그것은 단지 평범한 문장 혹은 단어일 뿐,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제목은 작품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으나 작품은 제목에 대해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성을 갖는다. 작품과 제목을 동일시하게 되면 범주적 혼동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불쾌해 했고, 나는 뜻밖의 반응에 몹시 당황했다. 이 말을 그다지 정연하지 않게 해서였을까. 아니면 둘다 불콰한 상태여서였을까. 나중에 그는 피곤하고 지친 상태여서 그랬노라며 사과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이후 경험한 몇 가지 유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보자면 나의 토론 태도, 아니 대화상대자로서의 태도 일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시에는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더 그랬으리라. 어쨌든 그 이후로 ㅅ과는 제법 좋은 관계로 남아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논문을 마쳤고, 좋은 평가를 받아 소속 대학에서 주는 "올해의 논문"상까지 받았다. 물론 같은 주장과 제목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 내가 제목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그렇다고 제목이 유일한 것은 물론 아니고 수많은 강박의 대상 중 하나라는 것. 그러한 대상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사소하고 부질없는. 그러나 제목에 한해서만큼은 꼭 그렇게 사소하고 부질없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무규칙적이고 감각적/직관적인 글쓰기 스타일상, 그 뒤에 나올 내용 및 본문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하기도 한 것이 바로 제목 선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유가 제멋대로 뻗지 않도록 단속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기도 하고.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제목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도 한다. 본문을 쓰다가 보면 논의가 처음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난관이 심각한 나머지 전면 수정하거나 아예 폐기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이거늘, 처음의 그 생각, 아니 제목을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 하나로 어떻게든 무리수를 두고 오기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예외가 아니다. 논문 전체의 제목이야 그렇다 치자. 그리고 각 장과 절에서부터 단락까지 제목을 세세하게 정해두고, 즉 목차를 세세히 짜두고, 그에 맞추어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야 오히려 가장 교과서적인, 즉 가장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논문작성법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그 목차는 어디까지나 지침서로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내용(matière)이 채워지고 완성이 된 후에야 비로소 확정될 목차(table des matières)를 가늠토록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인데, 내게는 이 예상목차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 들어가는 본문의 실질적인 내용은 대부분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도무지 꼭 맞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웠다 다시 쓰고, 이리 넣었다 저리 넣어도 보다가, 그러다 보면 또 내용이 안 맞아서 다시 지우고, 또 쓰고. 몇 년째 같은 상태인 이런 나를 두고 지인이 페넬로페에 비유한 적이 있데, 정말 그렇다. 베를 짜다가 다시 전부 풀었다가 다시 짜고 풀고 하기만 벌써 몇 번째 반복인지. 차이라면 페넬로페의 베짜기 놀이는 끝이 정해져 있지만, 나의 경우는 끝을 내가 내지 않는 한 정말 영원히 무한반복될 위험이 있다는 점.

내게 제목과 목차는 칸트의 초월적 이념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  우주에 관한 그 어느 언명도 이념의 기준에서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의 이율배반편). 우주에 한계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설정되는 한계는 내가 가진 우주의 한계에 대한 이념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시작이 있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그 시작의 이전을, 경계가 있다고 하면 그 경계의 바깥을, 물을 것이다. 반면에 한계가 없고 무한하다고 하면 그것은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영원히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다. 내가 내 경험과 한계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에 내 경험을 꿰맞추려 한다는 사실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를 그저 규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칸트는 가르치고 있거늘.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 이념들이 실제로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 사실이 있기에 과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심정...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글쓰기 방식 때문에 제목에 대한 이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태도, 말하자면 제목중심주의/만능주의/물신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의 이 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는 "제목"이라는 간명한 '제목'을 붙였으나, 불현듯 어릴 적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이 떠올라 이를 패러디를 하고픈 의지가 생겼고, 이로써 이 글 또한 저 책에 이은 자기지시, 자기모순의 사례로 추가하고 이 주제에 대해 약술하려던 것이 원래의 의도였으나... 여기에서 멈추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 글이 그야말로 제목과는 무관한 사례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그 초끈 우주론 학회는 내가 가본 중 가장 초현실적인 물리학 학술행사였다"

우주론자 조지 엘리스의 2013년 논문 "On the Philosophy of Cosmology"에서 생각지도 않게 마거릿 워트하임의 이름을 접했다.  

Currently, there is a culture of allowing anything whatever in speculative cosmological theories—sometimes abandoning basic principles that have been fundamental to physics so far. Science writer Margaret Wertheim attended a 2003 conference on string cosmology at the Santa Barbara KITP, and reported as follows (Wertheim, 2012): 
"That string cosmology conference I attended was by far the most surreal physics event I have been to, a star-studded proceeding involving some of the most famous names in science...After two days, I couldn't decide if the atmosphere was more like a children's birthday party or the Mad Hatter's tea party—in either case, everyone was high... the attitude among the string cosmologists seemed to be that anything that wasn't logically disallowed must be out there somewhere. Even things that weren't allowed couldn't be ruled out, because you never knew when the laws of nature might be bent or overruled. This wasn't student fantasizing in some late night beer-fuelled frenzy, it was the leaders of theoretical physics speaking at one of the most prestigious university campuses in the world."

워트하임이라면 <피타고라스의 바지>의 저자 아닌가. 한때는 내게 중요한 책 중 하나여서 석사논문에 인용까지 했었는데. 사실 논문 주제와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았음에도.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대로 숨은 의도가 있었으니. 나를 철학의 길로 이끈 여성주의 과학학에 대한  헌정의 의미였달까. 비록 그로부터는,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멀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엘리스의 인용도 맥락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좀 뜬금이 없어 보이거나, 아니면 다소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준다. 인용구는 워트하임의 2012년 저서 Physics on the fringe: Smoke rings, circlons and alternative theories of everything (Walker & Company)에서 따온 것. 엘리스 같은 최고의 이 분야 권위자가 과학저술가의 아마도 대중서에 가까울 이 책을 인용하다니, 의외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인용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권위에의 호소 기능이 없잖은가. 스스로가 최고의 권위자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고 말하자면 탈권위에 호소할 필요가 생기는 걸까. 

한편으로는 과학이론과 과학대중화 사이의 관계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라고도 하겠다. 특히 우주론처럼 상당수 이론들이 미완성 단계이자 진행중(in progress)인 경우에서, 내가 논문에서도 다루는 바, 대중화가 이론에 대해 단지 종속적이고 일방적 흡수 및 전파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구성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인데. 이 가설을 입증하기에는 좀 미약한 감이 있으나 어쨌든 무관치는 않은 예. 

다른 한편으로 인용된 부분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것이 사실. 저 참으로 저널리스틱한 첫 문장은 직업 물리학자들의 아무래도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필두로 인용구 전체가  엘리스 자신이 지적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나를 포함,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을 바를 직관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시대 우주론의 사변적이고 "초현실적"인 경향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급인 다중우주론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어디에선가는.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것마저도. 왜냐하면 우리의 것과는 다른 법칙이 통하는 세계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므로. 나아가 그러한 세계가 단지 *가능*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이기까지 한 것이, 그 세계에서의 법칙이야말로 우리의 물리법칙을 뒷받침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 이런 얘기가 물리학과 대학생들의 술자리에서가 아니라 물리학의 세계적 석학들이 모인 자리에서 진지하게 오간다는 생각을 하면 실로 기분이 묘하다. 

경험과학 중에서는 아무래도 가장 추상적이고 경험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심지어 경험적 검증가능성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그리하여 남은 최소한의 진리조건이라고는 내적 일관성뿐이다 보니, 이 업계 종사자들이 알려진 모든 물리법칙과 모든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수단들을 총동원해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엄밀성을 추구하게 됨은 이해함직하다. 그런데 이들을 한 군데 모아 놓으면 아무리 최고급 학회라도 아이들 생일잔치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미치광이 모자의 티파티 같이 모두가 들뜬 분위기가 된다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짐작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념뿐 아니라 이론 역시 추상적이고 관념적일수록, 그리하여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지지 근거가 결여돼 있을수록,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교조화 및 극단화되기 쉽고, 그리하여 잘못하면 극단주의나 광신주의를 낳기 쉬운데, 저 초끈우주론 학회의 정경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하나의 예증으로 제시할 수 있겠다...면 아무래도 과장이겠으나...과연 과장이기만 할 것인가? 

<인터스텔라>의 "그들"

헐리웃 블록버스터 역사상 보기 드문 하드SF라 하는데... 등장 인물들이 상대성과 양자역학에 대해 상세히 논구하고 두 이론을 결합하는, 다름 아닌 물리학과 우주론의 최대의 난제가 곧 영화의 그것인 것을 제외하면... 그런데 바로 그 난제의 열쇠를 쥔 것이 결국에는... 사랑. 놀란이 한 인터뷰에서 말한 것을 보라 : "이 영화는 사랑의 신비를 찬미한다. 사랑에 기하학적인 토대가 있고, 이 토대로써 보다 높은 차원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전제다."

영화의 이론적 용어와 쟁점들은 나로서도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기본적인 줄거리조차 재구성하기 힘들었을 정도--원래 "스토리텔링"이 내 취약 분야이긴 하나.  imdb의 Did you know?와 Nature에 실린 손의 인터뷰 등 몇 개 문서들을 통해 "복습 및 예습"을 거치고서 두 번째로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대충이나마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서사"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것이었음도. 세 번째로, 그리고 그 전이나 후로 킵 손이 쓴 <인터스텔라의 과학>을 보고 난 뒤에 보면 좀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을 법한데... 그래서 지금 <인터스텔라의 과학>을 띄엄띄엄 읽는 중이긴 한데, 그리고 나서 영화를 다시 보게 될는지는... 

< 그래비티>가 하드하고 드라이하고 사실주의적이고 미니말리스틱한 점에서 <2001>의 계보를 잇는다면, 이 영화는 그보다는 <솔라리스>와 <콘택트>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특히 <콘택트> : 매튜 맥커너히, 외계로부터의 모르스 혹은 바이너리 신호, 아버지와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어떤 신념으로 시공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여류 물리학자. <콘택트>가 칼 세이건 원작이었고 그의 자문을 거친 것처럼 <인터스텔라>는 고 세이건의 친구이기도 한 킵 손의 자문을 거쳤고. 경험과 이론의 한계를 초월하는, 칸트가 말하는 이념의 영역이 있고, 이 초월적 영역은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과는 달리 이론 이성을 진리의 추구로부터 오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의 길로 안내한다는, 일종의 암묵적 전제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인터스텔라>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 이 전제를 더 끝까지 몰아부쳤다 하겠다. 이념--사랑!--이, 그것이 현상계를 재구조화해서든, 아니면 이미,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구성 원리로서 주어져 있었든 간에,  전혀 새로운 진리--궁극의 양자중력 방정식!--로 인간을 인도하여 마침내는 구원(!)의 길로 영도한 것이다. 

사랑 타령도 그렇지만 문제는 "그들"이다. 토성 근처에 웜홀을 만들고, 웜홀도 그냥 웜홀이 아니라 충분히 안정적이어서 시공간 이동을 가능한 종류의 것으로 하고, 웜홀의 다른 구멍 밖으로는 또 바로 블랙홀을 만들고, 그런데 블랙홀도 그냥 블랙홀이 아니라 자전속도가 너무 빠르지는 않아서 그 주위를 도는 행성이 둘 이상 될 정도는 되는 종류의 것으로 하고, 그런데 또 충분히 그 속도가 충분히 빠르기도 해서 그 상대론적 효과로 인한 시간 딜레이가 2시간이 지구상의 28년과 등가가 되도록 하고... 3차원적 시공간 지각 능력을 가진 인간 (및 기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이퍼스페이스를 만들고 이를 통해 중력을 이용해서 블랙홀 내 데이타를 지구로 전송하게끔 하고... 그리하여 머피로 하여금 양자중력 방정식을 풀도록 하고... 이 모든 것이 지구를 구하도록 하기 위한 "그들"의 간지였다는 것이다. 서사 기법으로 볼 때는 고대 그리스 희곡의 기계장치 신(deus ex machina)에 가까워 보일 법도 하다. 물론 여기에서의  "신"는 그보다는 좀더 치밀하고 정교한 전략을 구사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 및 그로 인한 우주의 역사의 전개는 현대 우주론자들이 말하는 "인류 원리"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브랜든 카터, 프랭크 티플러, 마틴 리스 등 이 원리의 주창자 및 옹호자들은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인류라는 지적 생명체의 탄생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 우주가 구조화되어 있고 또 그렇게 진화해 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 가정은 규제적 원리인 동시에 구성적 원리로 사용된다. 인류의 탄생은 단지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궁극적 "목적",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던 "목적인"에 가깝다. 이에 따라 우주의 구조와 역사에 대한 이론은 방법론상으로도 이 "목적"을 중심으로 한 목적론적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인터스텔라>의 경우에도 "머피와 쿠퍼를 매개로 한 지구 구하기"라는 목적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거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 이것이 블랙홀 내부 초공간에서 쿠퍼가 깨달은 바다. 결국 쿠퍼가 과거에 경험했던 사건들, 특히 중력 이상 현상이 사실은 미래의 자신이 초래한 결과였다는, "그들"이 사실은 바로 "우리"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필 그가 경험하는 다양체--테서랙트--의 모든 입면들이 이 머피의 방의 우주선(line of universe)으로 이어져 있는 이유라는 것이다. 일종의 역행 인과(backward causation). 기존의 인과론적 설명 모델의 기준에서 보자면 논점선취의 오류이거나 순환논리이거나 인과율에 위배되는 것 같지만, 목적론적 설명 모델에 따르면 말이 전혀 안 되지는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왜?"에 대한 답이라면, "어떻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그러나, 아무리 사랑의 힘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렇다. 웜홀의 생성에서부터 블랙홀 시스템의 위치 선정, 나아가 테서랙트의 설치 등등은 아무래도 초월적 존재에 호소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들"이 누구인지 영화가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음에도("사랑"의 인격화된 형태가 아니라면. 그런데, 만약에, "사랑"을 인격화한 신이라면... 비너스나 에로스?), 아니,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초월론적으로 혹은 신비주의적으로 해석되기 쉬운데, 물론 그럴 위험이 있고 실제로도 그런 감이 없지 않으나, 그렇게 너무 쉬운 해석은 창작자도 해석자도 피해야 할 것이다 (세이건이 대표적인 반창조론자에 무신론자, 최소한 불가지론자였던 만큼이나 놀란도 또한 그러할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  굳이 그가 다윈의 나라 출신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최소한 작품에서만큼은 세속 원칙을 벗어나고 있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콘택트>의 외계 지적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터스텔라>의 "그들"(<2001>의 모노리트와 <솔라리스>의 초지성체도 있지만 일단 생략)이 보통 "신"이라 이름되는 초월자와 다른 점은 바로... 초재적/초월적(transcendant)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비록 초공간적(hyperspatial)이고 고차원적(hyperdimensional)이긴 해도. 그런 점에서 "그들"은 17세기 데이즘(자연신론)의 이신(理神)에 가깝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법칙을 창조하고 세계를 연속 창조하는 데카르트의 신이나 세계 체계의 안정을 위해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뉴턴의 시계공 신이거나 내재론적 신, 그러니까 스피노자의 자연이거나. 아니 어쩌면 라플라스의 초지성체에 가까울 수도 있다. 3차원 공간+1차원 시간을 넘어서는 5차원의 시공간 구조(벌크)를 지각하는 존재들이야말로 결국 라플라스가 말하던, 우주의 가장 작은 원자에서부터 거대한 물질까지, 과거에서부터 미래에 이르는 모든 상태를 한 눈에 볼 줄 안다던, 초지성체의 다른 이름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라플라스가 "신이라는 가설"을 필요로 하지 않았듯 이 영화도 "신"에 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은 열려 있다. 영화도, 지금의 이 글도.

... 그런데 "열린 결말"이야말로 이 시대의 기계 장치 신이 아닐런지.

미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

혹은, 논문과 건축 II



과학철학 및 과학사 분야 유수 학술지인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Modern Physics 의 올해 두 특집호.  하나는 우주론 특집으로 5월에 나왔고, 푸앵카레 특집인 다른 하나는 8월에 나왔다. 전자는 2011년에 우주론의 철학을 주제로 열린 학술행사에서 발표된 논문들이 출발점이 되었고, 후자는 2012년 100주기에 발표되었으며 푸앵카레 연구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논문들을 선별한 것이다. 이 두 주제가 이렇게 한 호 차이로 이렇게 나란히 다루어졌다는 사실은 하필이면 바로 그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 내게는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일단 당장 논문에 도움이 많이 될 거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거 없이 저기에 실린 논문들로만 레퍼런스를 제한하면 시간과 노력도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거고, 제한의 명분도 그럴 듯하고.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나는 꼭, 고질적인 해석광(délire d'interprétation, exactement comme Jean-Jacques !) 성향 때문에, 거기에서 더 나가서, 거기에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식의 막무가내 목적론까지 덧붙여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저 특집호를 참고하기 위해 나는 지금껏 논문을 미뤄왔던 것이다. 거기에 과대망상과 자아도취적 정취를 곁들이면 이렇게 말하고픈 지경에 이르게 된다 :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를 그것도 두 개씩이나 다룬 이 논문의 완성은 시대적 사명이다 ; 보라,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태가 한 데 어울려(agencer) 내 논문의 완성을 위해 공조(concourir)하고 있지 않는가.

어쨌든 논문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내세우려면 내세울 수도 있을 핑계가 하나 있었던 셈이다. 동시에, 특집호가 출간된 이상, 바로 핑계-이유가 또 하나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문제는 그 이유란 게 사실 무한생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미룰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미룰 수 없는 이유도. 2012년, 그 해 안에 반드시 끝내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푸앵카레 100주기를 기념하자는 취지였다.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자 이 취지는 그 해를 넘겨야 할 이유로 쉽게 전환되었다. 100주기를 기념해서 열린 많은 행사들과 이를 계기로 나온 성과들을 반영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제법 그럴싸한 핑계. 앞서 언급한 SHPMP 편집진도 2012년 이런 공고를 냈던 바 있다.
One hundred years ago, the towering figure of Henri Poincaré passed away. Poincaré workshops and conferences are accordingly being held all over the world, and it is only fitting that we at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Modern Physics also devote attention to Poincaré’s path-breaking work in theoretical physics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 
We therefore plan to publish a special Poincaré issue. Given that the majority of the papers in this special issue will originate from meetings taking place in 2012, however, its publication can only take place in 2013. So as a taste of what is in store, and as a timely homage to Poincaré, we are publishing the first English translation of a 1912 essay by Poincaré about atomism.
결국 출판은 예정된 2013년이 아닌 2014년에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이유들은 많다. 미뤄야 했던 이유만큼이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도. 영구적으로, 그리고 무한정하게 연장가능한 이 합리화의 연쇄를 끊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하나, 꼭 하나만 덧붙이고픈, 실제로 최근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기도 했던,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르 코르뷔지에.


코르뷔지에와는 남다른, 뭐랄까, 가족적인 인연이 있다. 2006년 여름, 남불을 여행하던 엄마와 나. 우리는 다른 프로방스와는 사뭇 다른, 지중해 메트로폴로서의 매력이 없지 않은, 마르세이유의 정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인상은 코르뷔지에의 씨떼 라디외즈-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 절정에 달했다. 눈부신 채광, 알록달록한 타일, 곳곳에 숨은 아기자기한 붙박이 장이나 의자들. 그리고 옥상의 터키색 수조와, 아, 탁 트인 하늘. 내부 거주공간을 볼 수 있었음 더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다음에 들르게 되면 꼭 거기 있는 호텔에 묵어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7년 초. 파리에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있는 코르뷔지에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그가 직접 설계하고 말년을 보낸 아파트다. 동네 근처 또 다른 곳에는 코르뷔지에 재단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공사중이었다. "제가 논문 마칠 무렵엔 재개장해 있을 테니 그때 가시면 되겠네요" 하고 호기있게 장담했었다.

그로부터 다시 1년 후인 2008년 여름.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동생 가족, 그리고 우리를 보러 파리를 재방문한 부모님과 더불어, 디종을 거쳐 샤모니까지 사부아 지방을 자동차로 여행했다. 돌아오는 길에 롱샹에 들러 코르뷔지에의 이 전설적 성당을 방문하려던 계획을 세웠으나, 이런 저런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실패했다. 못내 섭섭해 하시던 아빠께 나는 위로차 "저 논문 마칠 때 다시 오셔서 그때 가요" 하고 또 호기있는 장담을.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코르뷔지에 재단은 공사를 끝내고 재개장했고, 무엇보다 롱샹의 노트르담뒤오 성당 언덕에도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생겼으니,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게이트하우스 및 수녀원이 개장된 것.



우연히 이 소식을 접하고는 당연히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강한 "방문"에의 의지가 생겼다. 나 때문에 가우디의 바르셀로나로의 휴가 계획을 벌써 몇 해씩이나 미루고 계신 두 분. 바르셀로나도 바르셀로나지만 두 분과 더불어 이번에는 꼭 롱샹을 방문해야겠다, 방문하고야 말리라는 강한 열망이 생겼다. 누가 알랴, 훗날, 바로 이 열망이, 거의 꺼져가던 의지의 불씨를 다시 살려 나를 논문 쓰게 했다, 고 술회하게 될지. 아니, 실제로, 이 열망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논문의 완성이라는 "결과"를 생산하게 될지. 인생사에는 일방향적이고 선형적인 인과관계가 전도되는 일이 흔하디 흔하잖은가. 그리하여 예측불가능한 것, 그래서 사는 맛이 나는 것, 그게 또 인생 아닌가.

난삽한 독서

너를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네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네 생각을 떨치려 듣지 않은 음악이 없고 들추지 않은 책이 없다. 그러나 너를 떠올리지 않고는 어느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어느 책도 읽을 수가 없다. 

감성이 철저히 제거된 분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이론 텍스트를 하나 읽기로 한다. 좀 길고 어렵다 싶으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부러 짧은 걸로 고른다. 시아마(Dennis W. Sciama)가 쓴 "전체로서의 우주(The Universe as a Whole)". 1973년 출판된 디락 헌정 논문집, <물리학자의 자연관 (The Physicist's Conception of Nature)>에 실렸다. 

"일부 우주론자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궁극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금 너는 무얼 하고 있을까. 당장 뒤에서 네가 나타날 것만 같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네 품에 안길까? 다짜고짜 네게 입을 맞출까... 이런, 네가 또 떠올라 버렸다. 고개를 흔들어 너를 쫓아내고 다시 문장에 집중한다. 

"...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를 여러 개의 우주 중 하나, 다수의 우주의 집합의 한 원소로서 간주하는 일은 합당하다. 이 우주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의 우주와 다른 구조와 물리법칙을 가질 수 있다...." 

다우주 가설 자체는 과학사적으로나 철학사적으로나 사상사 일반의 관점에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새삼스러울 것 없다. 계보를 따지자면, 가장 멀게는 고대 원자론자들, 17세기에는 가능세계론을 주창한 라이프니츠가 있었고, 19세기 후반 볼츠만이 유사한 우주론적 가설을 제시했고, 20세기에는 양자역학 해석의 "지평" 중 하나로서 에버릿이 제안한 평행우주론이 있었고, 그 전후로 해서 루이스가 라이프니츠 가능세계론을 재해석한 바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년 사이에는 우주론자들 사이에서 제법 진지한 가설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름하여 다중우주(multiverse)론. 그래도 1973년이었으면 허랑한 소리로 들렸을 법한데, 이것이 이 탁월한 현대 우주론자의 입에서 진지하게 나온 이야기라니, 흥미로운 일이다. 현대판 다우주론은 그 자체로는 각 우주 사이, 서로 다른 우주에서의 존재자 사이의 동일성이나 차이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 라이프니츠에게서처럼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에서 아담이 원죄를 지을지의 여부, 원죄를 지은 아담과 그렇지 않은 아담이 동일인물인지의 여부 등등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우주론이 라이프니츠적 의문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사고실험을 자극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에도 나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존재가 있을까? 너도 있을까? 너와 나와 유사한 두 존재를 동시에 포함하는 또 다른 우주가 있을까? 있다면 그 우주에서 또 다른 너와 또 다른 나의 두 존재가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또 너다. 이제는 이 우주의 너로도 모자라 다른 우주의 또 다른 너까지 합세해서 나의 전 우주를 정복할 기세다. 

"... 은하, 별, 행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적 생명체는 각각 해당 우주의 구조와 그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에 의존할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특정한 하나의 이 우주를 관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우주는 여럿의 우주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이 우주가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오직 그 방식으로만, 관찰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간이  팽창중이라든지, 이 팽창속도가 가속하고 있다든지, 137억년 전에 탄생했다든지, 탄생시의 흔적으로 간주되는 배경복사가 현재 공간 전체에 걸쳐 균일하게 퍼져 있다든지 등등의 사실은 우연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accident)이라는 개념을 저자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오직 모든 가능세계에서 성립하는 진리만이 필연적 진리이며, 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진리를 라이프니츠는 우연적 진리라 보았었다. 물리적 사실은 물론이고 실존과 관련된 모든 진리는 단지 일부의 세계에서만 참인 우연적 진리다. 나의 존재도 너의 존재도 다 우연에 불과하다. 물론 '불과한 것'만은 아니다. 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우주에서 너를 만나서 너를 이토록 생각하는 것은 우연일까 아닐까. 왜 하필 널 만난 걸까. 왜 하필... 이런, 하마터면 또 네 생각에 빠질 뻔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네가 뭘 하고 있는지보다는 저자가 어떤 의미에서 우연이 아니라고 하는지가 좀더 궁금하다. 

"... 이 논증은 왜 구조와 법칙이 우리에게 관측되는 바대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공하는데, 이는 다른 우주들에 어떤 의미에서 존재를 부여함으로써다. 이 견해는 그럴 듯해 보이긴 하나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그와 다른 속성들을 가진 다른 가능한 우주의 존재 가능성만으로 우리의 우주가 가진 속성들이 '설명'된다니. 너무 쉬운 설명이 아닌가? 설명이기는 한가?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설명의 개념인데, 이 역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과학철학적으로는 물론이고 과학사적으로도 그렇다. 설명항과 피설명항 각각의 선택 기준, 그 사이의 관계 설정 등등을 포함하는 설명 개념의 변화는 과학사의 전개를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서 왜 물체가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지가 피설명항, 즉 설명의 대상이었다면, 17세기 이후 과학에서 질문은 왜 물체가 하던 운동을 계속하지 않고 변화를 겪는지로 변화한다. 이는 다시, 자명한, 즉 설명을 필요치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실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전자에서 각 물체가 각자 자신의 '장소'에 머무는 정지의 상태가, 그리고 후자에서 물체가 원래의 운동을 지속하는, 이른바 관성운동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나란히 설명항도 변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이 자연현상의 모든 변화에 대한 설명하는 원리들을 제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뉴턴의 운동법칙과 중력법칙은 왜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고 자신의 운행을 지속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또 하나의 차이는 바로 이 설명항에 대한 또 하나의, 그러니까  메타적 설명항을 제시하는지의 여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왜 원인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그 이상도 아닌 넷인가, 왜 넷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다. 반면, 왜 중력법칙이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원격작용'은 아닌지, 고대 및 중세 자연철학에서나 논의되던 비합리적 원리들-사랑, 미움, 신의 숨결 등등-과 어떻게 다른지 등등에 대해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함구한다. 바로 이 맥락에서 그 유명한 "나는 가설을 지어내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이 나온다. 사실 이만큼 반어적인, 심지어 자기모순적인 말도 없는데, 왜냐하면 도대체 일말의 가설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과학 이론도 불가능하므로. 뿐만이랴. 삶도 가능하지 않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러하다. 삶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다가올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이 가설을 현실에 시험하고 적용하고 검토하고 재검토하고 수정하고 재수정한다. 나는 지금도 너에 관한 가설을 세운다. 아니다. 어느 가설도 세울 수 없다. 너에 관한 한은 오직 의문만 떠오른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나는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걸까. 왜 너는 그토록 먼 거리에서도 나를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까. 네가 내가 미치는 작용만큼 너도 나의 작용을 느끼고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해 나는 그 어느 가능한 답도 가정할 수 없다. 어느 가설도 제시할 수 없다. 아니, 그러기가 두렵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너는 어디에나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느 우주에 있든. 그 우주가 무엇이든.*

   
*예전에 썼으나 그냥 내버려 두었었다. 누군가에게 공개했다가 완곡하지만 뜻은 분명한 혹평을 들었던 데다가, 내가 봐도 그럴 만도 했고 볼수록 부끄럽기만 했기에. 그런데 최근, 몇 가지 "마주침" 덕분에 다시 생각이 났고, 이 우연적 어울림이 만들어낸 마주침의 사건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나머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우연한 마주침의 "상대"는 다음의 세 가지였다 : 짐 자무시의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 허수경의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중), 그리고 마종기의 "차고 뜨겁고 어두운 것". 우주론에서 모티프를 가져오되 이를 시적으로 전유하고 있는 것이 셋의 공통점. 언젠가 이에 대해 좀더 얘기할 기회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