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5일 월요일

의식 흐름의 기록

혹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에 대한 모방의 시도. 결과는 물론 모방의 대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나오리라. <마장동>. <한양도 성>. <공원을 읽다>. 현재 바로 눈앞에 들어오는 한글책들. 이런 책들이 눈앞에 두고 하필이면 또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그 책들과는 전혀 무관한, 무척이나 프랑코프랑스적인 논문을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상황. 10년째. 이제 조금 있으면 정말 10년을 꼭 채우게 된다. 이곳은 ㅅ 언니가 다녔고 또 논문 심사까지 마친 곳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7년 전. 그리고 그녀는 나보다 7살 위이니, 당시 그녀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그녀가 힘든 여름을 보낸 끝에 가을에 논문을 제출하고 겨울에 심사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가 그 여름을 얼마나 치열하게 보냈는지도. 역사의 반복. 그런데 역사는 반복되는가? 푸앵카레에게서의 역사성의 의미에 대해 적다가 만 참이다. 그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을 구분한다. 반복되는 사실이 있어 그 사실이 축적되어 자료/소여가 되어야 하고, 그 가운데에서 항상적인 패턴을 발견해야 그로부터 법칙을 수립할 수 있고, 그로부터 예측을 이끌어내는 것이 과학이라면,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 않는가? 그러나 반복이라고 꼭 동일한 것이 재연되는 것이 아니고 그에 우선하고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차이라고 들뢰즈는 설파하지 않았는가? 들뢰즈에 대한 오독/모독. 결국 들뢰즈는 제쳐두기로 했다. 대신에 푸코를. 그렇지만 푸코 독해 역시 오독/모독으로 점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슈발레나 앙젤 등의 전례를 기억하자. 이들은 과학철학/과학사에서 출발, 각각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언어분석철학 및 인지과학의 철학에서 착실한 커리어를 쌓아왔는데 언젠가부터 푸코의 독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앙젤이 <에른느> 시리즈의 푸코 편에 실은 글에서 말하길, 70년대에 보낸 학부 시절부터 충실히 푸코를 따라왔다고. 뱅센느에서 들뢰즈의 강의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의 강의를 듣느라 주중 내내 바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푸코의 강의를 들으려면 두세 시간 전부터 가서 줄을 서야 했다니까. 그러다가 학업을 마친 후 전임강사 시절, 푸코를 초청하여 직접 만나게 되었는데, "예전에 당신 수업을 열심히 들었는데 지금은 논리학자가 되었다"고 하니 푸코가 웃더라고. 앙젤보다는 조금 세대가 앞서지만, 앙젤이 속한 프랑스의 소수파 분석철학 진영의 수장, 자크 부브레스도 최근에 푸코에 관한, 약간 안티푸코 성격을 지닌 저서인 Nietzsche contre Foucault 를 출간했는데, 그 역시 초창기부터 꾸준한 독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다른 일례로 영미권이지만 이 분야의 정통인 해킹은 또 어떤가. 그의 통계학의 역사나 정신분석학 역사 연구는 푸코의 고고학 방법론에 영감을 받은 바 크다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2003-4년 경 푸코 세미나를 열었었다. 그리고 앙젤도 이번 학기에 재직중인 사회고등과학원에서 푸코 세미나를 열었다. 나는 둘 다 가지 않았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독자...라기엔 무척 편파적이요 파편적으로 푸코를 읽긴 하지만, 어쨌든 남몰래 자칭 푸카디엔느가 되어 논문에서 어떻게든 써먹을 요량에 이르게 된 계기는 "고전시대" 때문이었다. 인문학/인간과학의 고고학. 고전시대 광기의 역사. 소위 초기의 인식론자 푸코. 그래서 나는 "지식-권력"이나 생권력 등등으로 환원되는 소위 중기나 <성의 역사> 이후의 후기는 전혀 모른다. 파레지아, 자기 통치, 자기에의 염려 등등의 개념을 양산한 70년대-80년대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도 전혀 모른다 (계속 "소위"라는 말을 붙이는 까닭은 한 사람의 학문적 인생을 시기별로 구분하는 일은 늘 한계를 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 단순한 편리상의 이유나 또 그만큼의 한계를 넘어 그의 사상의 진화를 잘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년 전, 푸코랑 전혀 무관한 한 수학사 세미나에서, 17세기 데카르트 혹은 라이프니츠를 주제로 발표한 한 미국 학자가 그랬다. "고전시대라는 말을 쓰고 싶어요. 푸코의 나라이니까요." 한편 게리 거팅은 A Short Introduction to Foucault 에서 푸코를 소개하는 서너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푸코로 너무 나가 버렸다. 더 길게 잇지 않는 것은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어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재활이다. 논리력과 집중력 재활 훈련.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그 논의를 이어가는 연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논의가 무엇이었더라? 역사. 역사의 반복.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연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역사는 어떠한가? 과학 자체는 우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데 그것의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에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 자체가 우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도 기실은 이미 푸앵카레 시대에 수정되는 중이었다. 우연의 법칙--오늘날 용어로는 통계학 법칙이 물리학에서도 중요한 방법으로 쓰이기 시작하고 또 그 자체 엄밀하고 독립적이고 고유한 방법 중 하나로 인정돼가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역시 이 부문에서도 양가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모든 종류의 "신문물"에 대해 그는 참으로 일관적으로 양가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테면 왜 열역학은 2개의 근본 법칙을 바탕으로 정립되었는가? 왜 2개이고 왜 하필 그것들인지를 연역적으로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푸앵카레는 수립과정을 카르노에서 마이어, 줄, 클라우지우스, 톰슨 등등이 2개 법칙을 어떻게 정립했고 그로부터 어떻게 열역학의 이론들이 구축되었는지 역사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열역학 강의> 서문에서 말한다...

2016년 7월 20일 수요일

고다르, <언어와의 작별>



프롤로그/요약

이야기는 단순하다
(결혼한) 여자와 (혼자인) 남자가 만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다투고, 퍼부어댄다
한 마리 개가 도시와 시골 사이를 방황한다
계절이 지나간다
남자와 여자가 재회한다
그들 사이에 개가 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 안에
다른 사람은 한 사람 안에
이제 그들은 셋이다
이전 남편이 등장, 모든 것을 뒤집는다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된다
처음 영화와 같은
그러면서도 다른
이제 우리는 인류에서 은유로 넘어간다
영화는 개가 짖는 소리
그리고 아기가 우는 소리로 끝난다[1]

고다르의 2014년작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이 영화는 3차원이 아니다. 다차원이다. 그리고 다체계다. 다세계라 해도 좋겠다. 각 차원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어느새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의 고다르 (얼마 전 자크 리베트의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럼 이제 남은 누벨바그 감독은 고다르 뿐인가” 했는데, 그 말을 하니 업계 종사자가 즉시, “바르다도 있다”고. 바르다 역시 최근까지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 귀감이 된 바 있는데, 그녀 역시 최근에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 예전만은 못하다는 것이 또다른 업계 종사자의 전언). 보통 그 나이라면 단지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직접 사용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영국여인과 공작>에서 당시에는 이미 흔했던 컴퓨터그래픽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또 어색해 했던 로메르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고다르의 경우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에 관해서는 판단 기준을 달리 하여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 그저 얼리어답터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데에 그쳤더라면 고다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3차원 기술의 영화적 예술적 가능성을 시험하는 장이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이 기술에 존재이유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예전에 나는, 그것도 이제는 한참 된 일인데, 3차원 기술이 영화의 예술적 혹은 기술적 측면에서 진보를 가져왔는지의 여부에 무척 회의적이었다가 그 회의론을 조금이나마 거두게 된 계기로서 스콜세지의 2011년작 <위고 까브레> 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3차원 회의론자다. 그 이후 삼년이라는 기간동안 쏟아져 나온 3차원 영화들을 일일이 챙겨보진 않았지만 기억에 남은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면 말 다했다. 그나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래비티>. 그래도 어쨌든 기본적으로 원본이 흑백인 영화에 색을 입힌 판본을 볼 때면 원본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채색이라기보단 퇴색이요 또 퇴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꼭 그런 느낌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길고 긴 설명이 필요하겠다. 이 입장이 이치에 어긋난다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은 가시광선 대의 무지개색으로, 또 3차원 공간으로 표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색을 가질수록, 3차원일수록 실재에 가까워져 본연의 목적 달성에 가까운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추론은 물론 사실주의/현실주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즉 영화가 현실 혹은 실재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라 보는 입장에서 전개한 논의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실성과 현실성과 핍진성 등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예술에서 참으로 복잡한 문제인데 영화에서는 더더욱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영화가 “단지” 시각 예술이 아니라 문학 장르, 특히 서사 예술의 계보에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사실에 대한 충실성을 논할 때 극영화인 경우에도 플롯이나 인물의 심리, 나아가 역사적 고증을 통과했는지의 여부 같은 것들이 고려되는 까닭, 할리우드에서 기술 뿐 아니라 각본에도 못잖게 투자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라. 그래서 나는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을 엄격히 이분하고 전자에 우월성과 우선성을 부여하는 태도, 형식(중심)주의와 기술(만능)주의는 영화에 대한 본질적 접근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내용이란 것이 줄거리나 그 유명한 “작가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 한, 형식과 내용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예술의 가능 조건인 것이다. 특히 영화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데 칼라나 3차원 등 영화 고유의 기술들은 실재의 재현이라는 기능과 목적과는 별개로, 아니 어쩜 그에 앞서서, 차라리 지각 현상학의 차원에서 흥미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면이 있다. “지각 현상학의 차원”? 말해놓고도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사실 자신이 없는데. 대강 심미적/감성적 esthétique 측면보다 더 원초적이고 지각적인, 미학보다는 인식론, 인지과학의 입장에서 접근해 보자는 말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우리는 미학/감성학의 정체성, 예술(철)학과 미학의 관계 등에 관한 오랜 논쟁을 피할 수 없게 되는데 일단은 이 정도에서 멈추도록 하자. 내가 여기에서 묻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언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을 실제라고, 실제와 유사하다고 느끼는가? “실감난다”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 “가상현실” 게임, 혹은 아이맥스 영화가 촉발하는 전혀 다른, 이른바 “숭고”에 가까운, 감성적 체험을 떠올려 보면, 3차원 영화가 주는 임팩트는 무척 약하고 덜 직접적인 편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 역시 상대적이다. 처음에 뤼미에르 형제가 역으로 진입하는 기차를 담은 영상을 스크린에 투사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기차가 들어온다고 느끼고 혼비백산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 그런가? 인풋은 같다. 즉 영상이 시신경을 자극하고 또 뇌로 전달되기까지, 전달의 내용도 같고 과정은 같다. 그러나 뇌에서 내리는 해석이 다르고 이것이 전혀 다른 지각 경험을, 즉 아웃풋을 선사하는 것이다. 지각은 기본적으로 해석의존적이다. 그리고 한 시대가 제공하고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는 기술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 등등의 맥락, 그리고 감상자 개인의 해석적 입장과 관점에 의존한다.

칼라보다는 흑백을, 3차원보다는 2차원을 선호하는 고전적이고 보수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옹호하다 보니 두서도 없고 길어졌다. 주장이 무리하면 논증도 그리 되는 법. 퇴색이니 퇴행 운운했던 것은 그저 단순히 인상이고 이에서 나아가 하나의 입장으로 세울 생각은 애초에 없었는데. 그리고 진짜 그런 취향인가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떤 칼라 영화들, 이를테면 루이스 브뤼넬의 경우, 보색 대비나 강렬한 색깔이 주는 시각적 자극에 상당한 쾌감을 느끼곤 하지 않는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핏빛이 선연한 뱀파이어 영화들도 좋아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다. 고다르는 이 기술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3차원 카메라는 초현실주의적(surréaliste) 장치에 가깝다. 아니 차라리 비현실주의(irréaliste?)라고도 하겠다. 위에서 <그래비티>이야기를 했는데 <그래비티>의 3차원 기술 사용은 “성공적”이라기보다는 아주 “저스트”, 즉 “적절”했다. 무중력 공간에서 손에서 놓친 나사가 “떨어지는” 대신에 “날아가는” 장면이라든지. 즉 적재적소에, 딱 적당한 정도로만. 여기에서 “저스트”란 “미니말”에 가깝다. 연출 자체도 무척 미니말했고. 그것이 강점이었고. <언어에의 작별>의 경우 역시 미니말하다. 그러나 기가 막히다. 이를테면 이런 식. 여자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무척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고정샷. 고다르는 여기에 3차원 효과를 입히는데 어떻게 입히는고 하니 앉은 다리를 잡아 늘인다. 그래서 여자의 몸은 기묘하고 우스꽝스레 변형된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회화에서 원근법의 도입 이후 사진, 영화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이어왔던 재현의 이상은 사정없이 무너진다… 아직까지 유효하기라도 했다면! 현실을 수동적으로 재현하는 대신에 그것을 왜곡하고 비틀어서 현실 이상의, 아니 현실과 무관한, 전혀 다른 차원을 고다르는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영상보다는 어쩌면 음악. 아니 차라리 음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음향은 인간의 육성과 음악과 자연적 인공적 음향들이 한 데 어울어져 영상만큼이나 중심적인 질료 혹은 제재(題材)로서 기능한다. 인물들은 마주 보고 대화하는 법이 거의 없다. 허공을 바라보거나 휴대전화나 디븨디를 튼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그나마 있는 대사는 이전 많은 고다르 영화에서 그랬듯 부조리극을 연상시킨다. 때로는 연극적(theatrical)이고 때로는 시적이거나 잠언적이되 그 어느 순간에도 극적(dramatic)이지 않다. 그래서 차라리 대화는 그 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전하는 육성으로 남는다. 책을 읽거나 읊조리는 목소리.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야말로 육성(肉聲), 몸을 가진, 몸의 소리들이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물소리, 발자국 소리에서부터, 무엇보다, 방귀가 나오거나 대변이 배출되면서 나는, 말하자면 배설음(排泄音)들. 

이에 더해 음악은 “배경”을 넘어 전면으로 드러나 그 자체로 고유하며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기존의 음악이 사용되는 대신 절대로 그대로 차용되지 않고 고다르만의 방식으로 전유되고, 어떤 의미에서 변주된다. 이번에는 특히 베토벤의 7번 교향곡 2악장 알레그레토의 주부 선율이 그렇게 쓰였다. 아마도 순수주의 음악애호가들은 불경죄나 배신을 부르짖을 테나 이 역시 고다르가 예전부터 즐겨쓰던 음악 몽타주 기법이다. 기존의 이미지를 가져와서 자유자재로 콜라주하고 몽타주하는, 고다르의 트레이드 마크이며 <영화의 역사(들)>에서 정점을 이룬, 바로 그 방식으로. 그러나 이렇게 왜곡되고 뒤틀린 음악은 영화 안에서 그 자체로 고유한 기능을 하여 그리하여 영상에 하나의 차원을 더한다. 

그리고 고다르 본인의 육성. 그는 초기작들에서부터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레이션이나 더빙으로 "목소리 출연"을 하곤 했다. 예전에는 이 점에서만큼은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다지 미성이 아닌데다 특히 초반에는 스위스 악센트까지 가미되어 더더욱.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의 목소리에 반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세월(과 담배, 그것도 시가)의 영향일까, 다소 가벼운 편이었던 목소리 톤에 무게가 실리고 그에 따라 특유의 냉소적이고 신랄한 스타일이 많이 중화되어 결과적으로 이 노장 감독은 매우 매력적으로 중후한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고다르 본인보다 그의 페르소나인 듯한 중년 배우가 주로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그래도 고다르 본인의 목소리가 간간이, 어쩌면 간신히 들릴 때마다 나는 까닭모를 애수와 경애심에 젖었던 것이다.

영화가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아기 우는 소리로 끝을 맺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개는 영화 내내 줄기차게 등장하는 고다르 본인의 애견. 이 애견이 자녀 없이 동반자 안느-마리 멜빌과 단둘이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2세 혹은 3세의 대리물임을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아기 우는 소리는 직접적 환유인가? 그야말로 언어와의 작별이요, 역사와 문명 이전, 그러니까 자연으로의 회귀인 것인가? 그보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처럼 느껴졌다. “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 프롤로그에 대응하는 에필로그 격의 주석. 이 영화를 본 것이 벌써 2년 전의 일이고 그 즈음에 시작한 글인데 완성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좀 묵혀두었다가 쓴다는 것이 이젠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세 번이나 봤는데도. 볼 때마다 감동으로 전율했는데도. 기억력의 감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비단 영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데.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에 다른 종류의 매체, 특히 책에 대한 감응력이 상대적으로 후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지경인데. 그러면 최소한, 말하자면 “영화적 기억력”, 영화 감상에 요구되는 고유한 기억력과 이해력은 좀 계발이 됐을 성도 싶은데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으니. 그럴 때마다 단편적으로나마 적어두곤 하던 중, 최근, 노트북 내장 하드를 통째로 날릴 뻔한 소동을 겪은 후, 차라리 이런 방식으로나마 공개하는 편이 자료를 보존하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임을 알았다. 그래서 올리기로. 계속해서, 언제까지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한이 있더라도.  
  • 사진과 요약문은 <언어에의 작별> 보도자료에서 따왔다. 고다르가 직접 쓴 손글씨. 그는 <미치광이 피에로>를 비롯한 몇몇 전작들에서도 자신의 유려한 필체를 자랑한 바 있는데, 본문에서 언급한 목소리와는 달리 젊었을 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세월도 많이 지났고 손글씨를 쓰기도 보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라설까. 놀랍고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