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9일 토요일

난삽한 독서

너를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네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네 생각을 떨치려 듣지 않은 음악이 없고 들추지 않은 책이 없다. 그러나 너를 떠올리지 않고는 어느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어느 책도 읽을 수가 없다. 

감성이 철저히 제거된 분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이론 텍스트를 하나 읽기로 한다. 좀 길고 어렵다 싶으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부러 짧은 걸로 고른다. 시아마(Dennis W. Sciama)가 쓴 "전체로서의 우주(The Universe as a Whole)". 1973년 출판된 디락 헌정 논문집, <물리학자의 자연관 (The Physicist's Conception of Nature)>에 실렸다. 

"일부 우주론자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궁극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금 너는 무얼 하고 있을까. 당장 뒤에서 네가 나타날 것만 같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네 품에 안길까? 다짜고짜 네게 입을 맞출까... 이런, 네가 또 떠올라 버렸다. 고개를 흔들어 너를 쫓아내고 다시 문장에 집중한다. 

"...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를 여러 개의 우주 중 하나, 다수의 우주의 집합의 한 원소로서 간주하는 일은 합당하다. 이 우주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의 우주와 다른 구조와 물리법칙을 가질 수 있다...." 

다우주 가설 자체는 과학사적으로나 철학사적으로나 사상사 일반의 관점에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새삼스러울 것 없다. 계보를 따지자면, 가장 멀게는 고대 원자론자들, 17세기에는 가능세계론을 주창한 라이프니츠가 있었고, 19세기 후반 볼츠만이 유사한 우주론적 가설을 제시했고, 20세기에는 양자역학 해석의 "지평" 중 하나로서 에버릿이 제안한 평행우주론이 있었고, 그 전후로 해서 루이스가 라이프니츠 가능세계론을 재해석한 바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년 사이에는 우주론자들 사이에서 제법 진지한 가설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름하여 다중우주(multiverse)론. 그래도 1973년이었으면 허랑한 소리로 들렸을 법한데, 이것이 이 탁월한 현대 우주론자의 입에서 진지하게 나온 이야기라니, 흥미로운 일이다. 현대판 다우주론은 그 자체로는 각 우주 사이, 서로 다른 우주에서의 존재자 사이의 동일성이나 차이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 라이프니츠에게서처럼 이 세계가 아닌 다른 가능세계에서 아담이 원죄를 지을지의 여부, 원죄를 지은 아담과 그렇지 않은 아담이 동일인물인지의 여부 등등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우주론이 라이프니츠적 의문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사고실험을 자극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에도 나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존재가 있을까? 너도 있을까? 너와 나와 유사한 두 존재를 동시에 포함하는 또 다른 우주가 있을까? 있다면 그 우주에서 또 다른 너와 또 다른 나의 두 존재가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또 너다. 이제는 이 우주의 너로도 모자라 다른 우주의 또 다른 너까지 합세해서 나의 전 우주를 정복할 기세다. 

"... 은하, 별, 행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적 생명체는 각각 해당 우주의 구조와 그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에 의존할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특정한 하나의 이 우주를 관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우주는 여럿의 우주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이 우주가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오직 그 방식으로만, 관찰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간이  팽창중이라든지, 이 팽창속도가 가속하고 있다든지, 137억년 전에 탄생했다든지, 탄생시의 흔적으로 간주되는 배경복사가 현재 공간 전체에 걸쳐 균일하게 퍼져 있다든지 등등의 사실은 우연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accident)이라는 개념을 저자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오직 모든 가능세계에서 성립하는 진리만이 필연적 진리이며, 이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진리를 라이프니츠는 우연적 진리라 보았었다. 물리적 사실은 물론이고 실존과 관련된 모든 진리는 단지 일부의 세계에서만 참인 우연적 진리다. 나의 존재도 너의 존재도 다 우연에 불과하다. 물론 '불과한 것'만은 아니다. 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우주에서 너를 만나서 너를 이토록 생각하는 것은 우연일까 아닐까. 왜 하필 널 만난 걸까. 왜 하필... 이런, 하마터면 또 네 생각에 빠질 뻔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네가 뭘 하고 있는지보다는 저자가 어떤 의미에서 우연이 아니라고 하는지가 좀더 궁금하다. 

"... 이 논증은 왜 구조와 법칙이 우리에게 관측되는 바대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공하는데, 이는 다른 우주들에 어떤 의미에서 존재를 부여함으로써다. 이 견해는 그럴 듯해 보이긴 하나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그와 다른 속성들을 가진 다른 가능한 우주의 존재 가능성만으로 우리의 우주가 가진 속성들이 '설명'된다니. 너무 쉬운 설명이 아닌가? 설명이기는 한가?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설명의 개념인데, 이 역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과학철학적으로는 물론이고 과학사적으로도 그렇다. 설명항과 피설명항 각각의 선택 기준, 그 사이의 관계 설정 등등을 포함하는 설명 개념의 변화는 과학사의 전개를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서 왜 물체가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지가 피설명항, 즉 설명의 대상이었다면, 17세기 이후 과학에서 질문은 왜 물체가 하던 운동을 계속하지 않고 변화를 겪는지로 변화한다. 이는 다시, 자명한, 즉 설명을 필요치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실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전자에서 각 물체가 각자 자신의 '장소'에 머무는 정지의 상태가, 그리고 후자에서 물체가 원래의 운동을 지속하는, 이른바 관성운동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나란히 설명항도 변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이 자연현상의 모든 변화에 대한 설명하는 원리들을 제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뉴턴의 운동법칙과 중력법칙은 왜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고 자신의 운행을 지속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또 하나의 차이는 바로 이 설명항에 대한 또 하나의, 그러니까  메타적 설명항을 제시하는지의 여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왜 원인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그 이상도 아닌 넷인가, 왜 넷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다. 반면, 왜 중력법칙이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원격작용'은 아닌지, 고대 및 중세 자연철학에서나 논의되던 비합리적 원리들-사랑, 미움, 신의 숨결 등등-과 어떻게 다른지 등등에 대해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함구한다. 바로 이 맥락에서 그 유명한 "나는 가설을 지어내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이 나온다. 사실 이만큼 반어적인, 심지어 자기모순적인 말도 없는데, 왜냐하면 도대체 일말의 가설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과학 이론도 불가능하므로. 뿐만이랴. 삶도 가능하지 않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러하다. 삶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보편타당한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다가올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이 가설을 현실에 시험하고 적용하고 검토하고 재검토하고 수정하고 재수정한다. 나는 지금도 너에 관한 가설을 세운다. 아니다. 어느 가설도 세울 수 없다. 너에 관한 한은 오직 의문만 떠오른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나는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걸까. 왜 너는 그토록 먼 거리에서도 나를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까. 네가 내가 미치는 작용만큼 너도 나의 작용을 느끼고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해 나는 그 어느 가능한 답도 가정할 수 없다. 어느 가설도 제시할 수 없다. 아니, 그러기가 두렵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너는 어디에나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느 우주에 있든. 그 우주가 무엇이든.*

   
*예전에 썼으나 그냥 내버려 두었었다. 누군가에게 공개했다가 완곡하지만 뜻은 분명한 혹평을 들었던 데다가, 내가 봐도 그럴 만도 했고 볼수록 부끄럽기만 했기에. 그런데 최근, 몇 가지 "마주침" 덕분에 다시 생각이 났고, 이 우연적 어울림이 만들어낸 마주침의 사건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나머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우연한 마주침의 "상대"는 다음의 세 가지였다 : 짐 자무시의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 허수경의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중), 그리고 마종기의 "차고 뜨겁고 어두운 것". 우주론에서 모티프를 가져오되 이를 시적으로 전유하고 있는 것이 셋의 공통점. 언젠가 이에 대해 좀더 얘기할 기회가 있기를.

2014년 3월 3일 월요일

Tombée sur cette phrase : grind out two pages

Tombée sur cette phrase :
He managed to grind out two pages of his essay. (trad. fr.) Il est laborieusement arrivé à pondre deux pages de sa dissertation.
Je cherchais l'expression "grincer des dents". D'abord sur le dictionnaire coréen-anglais, pour tomber sur "grind one's teeth" (mais quel étrange mot, ce verbe "grind" ! Je le connaissais avec les compléments d'objet comme "coffee" ou "coarse", par intermédiaire de "coarse-grinding" comme technique... de la théorie de la probabilité. Bref, je ne savais pas qu'on "grinçait" ses dents comme on "moulait" du café ou de la graine !), avant d'aller vers le dictionnaire anglais-français. Quel chemin ai-je parcouru pour arriver à si peu de choses ! Un autre acte de détournement, intentionné, voulu, pour tarder à faire face aux problèmes... qui sont pourtant très souvent juste en face.

Mais il y a aussi ceci : il se peut que je grince mes dents. C'est qu'il m'arrive de me réveiller en pleine nuit, à la suite d'un rêve tantôt agréable tantôt cauchemardesque, mais pas mémorable dans la plupart des cas... ne serait-ce que parce que j'ai une mauvaise mémoire en la matière. Mais ce qui me réveille, c'est moins le rêve lui-même que la prise en conscience qui lui fait la suite, un appel de la part de ma conscience dirais-je, du fait que je harcèle et torture mes dents. Quelle horreur ! Qu'est-ce que je serais horrible à voir ! La seule chose qui me console, c'est que je n'ai personne à terroriser par cette scène horrible, par à ce côté terrible de moi. 

De quoi tout cela serait-ce un symptôme ? Surement quelque chose de psychologique : plus je suis stressée, plus je grince. Comme si j'avais tellement à aspirer, que je voulais tout dévorer, vider et épuiser, si désespérément, avidement et expressément. Ou bien sont-ce la rancune, la rancoeur, voire la haine que j'éprouve là ? Contre qui ? Contre quoi ? 

Je décide d'étudier ce cas moi-même, sans trop savoir par où commencer. Faute de mieux, j'ouvre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de Laplanche et Pontalis, pour cette simple raison qu'il est le seul qui soit venu à l'esprit pour le moment (et le seul que j'aie chez moi). Le mot "morsure" est renvoyé au "stade oral" avec celui de... "succion". Ces deux comportements, avec lesquels Freud avait caractérisé le premier stade du développement de la sexualité chez l'enfant, sont distingués par Abraham en deux sous-stades : oral-précoce et oral-sadique. Si la succion est liée à l'incorporation avec l'objet --que représente la mamelle--, la morsure, qui arrive après la poussée des dents, à la destruction de ce même objet. Désir qui n'aboutit évidemment pas, détruit par la mère. Ce qui finit par la séparation entre sujet-objet et prépare ainsi le prochain stade, le stade anal. Or, Melanie Klein n'acceptera pas la distinction : pour elle manger et être mangé, c'est à peu près la même chose ou du moins l'un va toujours avec l'autre.   

Mais la morsure est-elle la même chose que le grincement ? La morsure a pour objet quelque chose qui n'est pas de moi, que j'ai envie de posséder ("incorporer"). En revanche, l'objet du grincement, si "objet" il y a, c'est quelque chose de moi, qui m'appartient, ne m'est pas séparé en tout cas -- en l'occurrence mes dents. En les grinçant je les perds plus que je ne les possède ; je risque même de ne pas conserver le peu que je possède. Plus déposséder que posséder, et plus autodétruire que détruire. Idem quand je me gratte (hélas oui, j'ai ça aussi), même si, dans ce cas, c'est plus la physiologie (la notoire "peau à tendance atopique") que la psychologie qui joue... ou bien est-ce ? En tout cas, tout cela c'est plus fort que moi... ou bien est-ce ? Et si j'étais plus forte que je ne pense... ?  

Mais cette fois-ci (comme c'est souvent le cas d'ailleurs), le plus fort, ce n'est pas moi mais le hasard. Ce hasard qui a voulu que je tombe sur cette phrase "grind out two pages"... comme s'il voulait me rappeler ce que j'ai à faire. Qu'ai-je, en effet, sinon des pages à pondre ? 

D'ailleurs, si "grinding out" peut se traduire par "pondre", le grincement ne serait pas aussi détruisant que cela ; il peut être aussi productif. Même s'il n'y a pas de quoi se réjouir dans le résultat ni dans le moyen ("grind something out" : "produce something dull or tedious slowly and laboriously"), qu'importe, si cela produit quelque chose ? D'ailleurs, il est une autre expression relative au verbe "grind" qu'est "grind away/for" : "work or study h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