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발자국




선명하게 찍혔다가도 바로 지워지고 또 다른 이의 것과 뒤섞여 구분되지 않고 그러다 또 새로 나고 그리고 나서 또 새로 지워질진대, 어찌 지나온 것에 매이고 또 새로 만들어갈 것을 두려워 하랴.

-- 서울 종로구, 2018년 11월 첫눈 오던 날






2018년 11월 26일 월요일

보티첼리 비너스와 카카오 어피치


- ㅁ 에게

기억하는지? 2012년 너랑 같이 피렌체에 갔을 때였어. 휴대용 클리넥스를 네가 내게 사주었어.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새겨진. 내가 이걸로 코를 풀지는 못하겠다고 하니 네가 그랬어. 심사 받는 날까지 아껴 두었다가 끝난 후 감격의 눈물을 닦으라고. 그때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6년도 훨씬 넘게 걸릴 줄이야. 

그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번 꺼내 봤어. 그때마다 생각했어. 빨리 감격의 눈물을 그 휴지로 닦을 날이 왔으면 하는 희망, 아니, 단지 왔으면 하는 희망과 기대에 머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도록 해야겠다는 의지를 되새기곤 했지. 그래서 작년 겨울 짐 정리해서 귀국할 때도 잊지 않고 챙겨 왔고, 또 지난 초여름에 파리로 다시 갈 때도 챙겨갔어. 이걸 이번 여름에 쓸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정작 심사장에는 잊고 갔지 뭐야? 고대하던 그 순간을 놓쳤단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얼마나 애석했는지. 

사실 이제 그 휴지는 원래의 기능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커. 이후 이걸 어쩌면 좋을까 볼 때마다 고민했어. 그러다가,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널 보러 춘천에 오면서 가방에 넣어 가지고 왔어. 적절한 활용 방안에 대해 너와 얘기해 보고도 싶었겠지.

그러다가 마지막날인 오늘, 들고 다니던 휴지가 똑 떨어졌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콧물을 자주 흘려서 휴지나 손수건 없이는 외출하지 못하는지라 곤란하던 차, 네가 내어준 방에 놓인 휴대용/여행용 휴지가 눈에 들어왔어. 네 동생이나 조카가 두고 갔겠지, 아마도? 카카오 프렌즈의 어피치가 그려져 있는. 불현듯, 역시 왠지는 모르겠지만,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카카오 어피치 사이의 교환이라, 기발하고 재미있는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 사소한 과거 사실들을 그렇게 잘 기억하느냐고 너는 물었지. 사실 내가 그럴 수 있는 건 결코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 암울한 전망이나 무겁기만 한 현재 상태를 직시하기보다는 안온한 과거로 회귀, 아니 도피하려 하기 때문이야.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었든 아니면 불운 혹은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든 간에, 주어진 매 순간에 충실하게 임하다 보니 지금의 네가 되었더란 네 말이 특히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느 철학자의 말보다도.

이렇게, 피렌체에서 파리, 그리고 춘천까지의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음울한 시기를 보내던 나를 지켜본, 그리고 어쩌면 지켜준, 그 휴지(!)를 네게 남긴다. 지켜보거나 지켜줄 그 어느 존재 없이 혼자서 너무도 많은 걸 잘 해왔던 너란 걸 알지만, 그와는 별개로, 네가 지켜보고 또 지켜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만큼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기억했으면 하는 내 작은 소망을 담아서.

2018년 8월 10일 금요일

홍상수 영화를 보고 코끝이 시큰

거릴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다가 일어난 일이다. 해원이가 엄마랑 서촌 이래저래를 돌아다니다, 사직공원도 가고, 중간에 서점도 들르고, 엄마 모교도 갔다가, 마지막으로 카페에 들어가 나란히 앉아 "엄마 잘 살아요" "너도 잘 살아라" 하다 울음을 툭 터뜨리자, 나도 덩달아 왈칵.

인사동이나 삼청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모녀지간 단촐히 오후 한때를 보내는 일, 나도 엄마와 자주 하던 일이다. 엄마 앞에서 아기처럼 펑펑 우는 일도. 물론 후자는, 전자보다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믿고 싶)지만, 그 정화와 위안의 효과란 이루 말할 수 없는 바였다.

한편으로 갈수록 홍상수 영화가 좋아진단 생각을 이번에도 했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객관적이라 함은 다음의 의미에서다. 갈수록 영화가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는만큼 외려 작가 고유의 세계가 뚜렷해지고 정합성과 형식미와 압축미 등등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각 작품마다 인생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마저 엿보이는 듯하다. 다 똑같게만 보이는 테마("감독님은 왜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하세요? 지겹지 않으세요?" : 그가 귀닳도록 들었을 질문), 대표적으로 지식인/예술인들의 현학적이고 위선적인 언어 및 행태("감독님은 본인도 교수직에 있으면서 교수 지식인 비판하고 풍자하는 영화 만드시면 자기모순을 느끼지 않으세요?" 대충 이런 내용의 대사가 이번 영화에도)만,에서부터 제법 다채로운 변주를 끌어냄으로써, 그러면서 어쩌면 심층적이고 가장 본질적일지 모를 테마들, 이를테면 우연, 관점(주의?), 인간관계에서의 진실, 진심, 진정성 등등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에 이르기까지.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음악의 사용이 갈수록 두드러진단 사실.  <옥희의 영화>에서의 위풍당당 행진곡이나 <해원>의 퍼셀(아마도? <배리 린든>에 나왔던)이나 굳이 의미를 부여하기엔 아직까진 크게 성공적이었던 것 같진 않으나, 잎으로의 진화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주관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홍상수는 초기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 여기저기의 가장 자연스런 모습을 찾아 담아왔다.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대판/영화판 "인간 극장"을 꿈꾼 에릭 로메르처럼. 로메리앙이건 아니건 간에 그가 담아내는 서울 풍경은 나같은 이에게 커다란 안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좋아진 데에는, 타향살이가 길어진 탓보단 나이 탓이 크지 않은가 한다.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작가도 그만큼 나이가 든 게고.

- Circa 2013

2018년 8월 7일 화요일

블루 자스민, 혹은 우디 앨런의 미소

 최근 몇년 새 우디 앨런이 유럽과 영국을 방랑하며 찍은 작품들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매치 포인트>와 <미드나잇 인 패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매치 포인트>가 뛰어난 스릴러 감각에 영국 계급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이라면, <패리스>는, 작가로서의 욕심과 역량을 드러내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 취향을 여과없이 담는 데에 주력, 비슷한 취향을 소유한 나같은 관객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어느 작품도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진 않았다.

내가 앨런에게서 기대하는 바란 이런 것이다. 불평불만 가득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인간과 관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 그런 가운데 자아와 세계를 성찰하고 나아가 새로운 자아상 및 세계관을 확립할 가능성. 인간주의적 냉소랄까, 냉소적 인간주의랄까. 영화 내내 곤두서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리며 아주 잠깐, 아주 살짝 미소짓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맨해튼>의 마지막 컷이 엘런 세계의 이러한 근본 이념을 집약해서 보여준 바 있다.

뉴욕은 단순한 로케이션을 넘어 그러한 이념을, 더불어 그 이념을 말하자면 극복할 계기를 보여주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 그리고 앨런의 작품들은 뉴요커로서의 존재 증명이었다. 뉴욕에서 찍지 않은 작품들마저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가 뉴욕만 벗어나면 힘을 잃는다고 단언하는 한편, 어서 외유를 접고 그만의 도시로 돌아가길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루 자스민> (2013)의 배경은, 애석케도, 뉴욕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다. 주인공은 부유층에서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로 전락한 중년 여성. 영화는 뉴욕에서 최상류층의 삶을 구가하던 그녀의 과거와, 샌프란의 동생네 집에 얹혀 살며 새 인생을 시작하려 애쓰는 현재를 교차하면서 보여준다. 플래시백에서 등장하는 뉴욕은 이전까지 앨런이 그려왔던 뉴욕과는 다르다. 허위와 과시욕과 위선으로 가득한 부자들의 삶. 샌프란의 프롤레타리아 "루저"들의 그것과 대비되지만 둘다 공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같고도 다른 사회에 대한 시선에서 계급 사회 및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풍자를 읽을 수 없는 바는 아니나, 전반적으로는 희화화와 진지한 비판이 무질서하게 섞여 블랙유머도 아니고 페이소스도 없는 어정쩡한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특히 주인공 케이트 블랜챗은 배우 개인으로서나 앨런 영화의 여주인공으로서나 낯설었다. 정확히는 불편했다.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하락"한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치과병원 접수원이라는 "모욕적"인 직장에서 피곤한 환자들을 상대하는 걸로도 모자라 의사의 성희롱까지 겪는다든지. 그러나 그저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일 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는 결여돼 보인다. 계속해서 과거를 복기하며 바로 그 과거로 복귀하길 꿈꿀 뿐이다. 그것도, 과거와 꼭 같이,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여기까진 클리셰다. 얼마든지 풍자하고 조롱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런 그녀의 내면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울분을 터뜨리고 마스카라가 범벅된 눈물을 시도때도 없이 흘리거나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하는 등, 그녀의 행태는 희화화 대상으로 삼기엔 심각한 수준의 병리적 상태로 보인다. 이러한 묘사와 관점이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을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해당 분야 전문가의 몫이겠다. 나는 그저, 인물에 대한 타자화 혹은 소외 혹은 몰이해 혹은 공감부족으로 점철된 시선이 영화의 내적 완성도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앨런은 이전에도 말많고 신경쇠약 직전에 항우울제를 달고 사는 여자들을 즐겨 그려왔다. 그녀들은 대상화되었다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투사, 말하자면 여성적 페르소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들에 대한 묘사는 특별히 친여성적이거나 여성주의적이지는 않았다 해도 적어도 반여성적이진 않았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작가의 대상과의 동일시와 공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로서의 앨런이 단순히 여성관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펠리니의 이탈리아나나 누벨바그 감독들의 파리지엔느처럼 여성 이미지의 창조는 앨런의 작가적 스타일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였다.

다이앤 키튼으로 대표되는 앨런 영화의 뉴욕 여성들은 거개가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 계급에 속한다. 거기에 자스민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자스민은 엑스 뉴요커이긴 해도 신흥 부르주아에 가깝다.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투자 사업으로 쌓았고, 그마저도 사기 행각으로 점철된 부다. 내가 아는 한 이 시대 최고의 스노브이자 모랄리스트 중 하나인 앨런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부류인 것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편의 재산에 의존해 안일한 삶을 구가한 원죄가 있고 따라서 인텔리 여성 동지들이 혐오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앨런으로서는 대상을 얼마든지 대상화하고 타자화할 안전 거리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획득된 관점이 내 눈엔 의뭉스럽게 보인다. 한 부르주아의 경제적이고 도덕적인 몰락에 안도하는... 또 다른 부르주아의 타락한 도덕과 허위의식을 보는 것만 같다. 

샤워를 마친 뒤 거리에 나와서는 젖은 머리 그대로에 화장기가 전혀 없이 늙고 지친 모습으로 공중 벤치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대는 자스민의 얼굴을 화면 가득 비추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다시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맨해튼>의 그 마지막 미소가 더욱 그리워진다.

- 2013년 10월 작성한 글을
2018년 8월 복원하여 게재하다

2018년 7월 27일 금요일

Madame la Présidente, Madame et Messieurs les membres du jury

Madame la Présidente, Madame et Messieurs les membres du jury,

Je voudrais d’abord remercier les membres du jury pour avoir accepté de lire ma thèse et de participer à sa soutenance, ainsi que mon directeur de thèse, Monsieur Szczeciniarz, pour son accompagnement et son encouragement qui m’ont permis de mener ce travail à bon terme.

Mes remerciements vont également à ma famille et mes amis pour leur présence aujourd’hui, mais aussi pendant mes années de thèse. Pendant des années bien longues, je dois préciser, puisqu’il m’a fallu un temps bien considérable pour arriver jusqu’ici.

La thèse que j’ai l’honneur de présenter devant vous s’intitule «Du monde mécanique à l’univers physique. Pour une histoire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autour de Leçons sur les hypothèses cosmogoniques de Henri Poincaré (1911)».

Je viens de vous parler du temps. S’il a fallu tant de temps pour terminer cette thèse, ce ne serait pas seulement par l’ampleur et la difficulté du sujet que j’avais choisi, mais aussi par la nature même de ce sujet. Mon sujet, vous l’auriez remarqué, est double, Poincaré et la cosmologie, qui réunit deux thématiques qui ne sont pas très favorables à la gestion du temps. Dans un premier temps, j’avais à faire face au temps astronomique, voire cosmologique, au point d’ignorer un peu le temps à l’échelle humaine. La faute serait aussi, au moins en partie, à Poincaré lui-même, qui ne s’effrayait pas de parler du temps infini, et s’intéressait bien peu au passage du temps à court terme au point d’oublier parfois de dater ses écrits, au dam des historiens.

Le choix de ce sujet tient à des rencontres personnelles ainsi que textuelles. La première rencontre avec la première phrase des Leçons était comme un coup de foudre. «Le problème de l’origine du Monde a de tout temps préoccupé tous les hommes qui réfléchissent ; il est impossible de contempler l’Univers étoilé sans se demander comment il s’est formé.»

Longtemps je me suis intéressée au problème de l’origine du monde. Comme tout le monde peut-être, pas plus, tout simplement parce qu’il est impossible de faire autrement en présence du ciel étoilé devant ses yeux, nous vient de dire Poincaré.

Après avoir fait des études en physique et en philosophie à Séoul, je voulais continuer d’étudier la philosophie des sciences, mais dans une autre direction et dans une autre tradition que le courant analytique ou anglo-saxon dominant à l’époque en Corée. Pour mon mémoire de master en philosophie, je me suis préoccupée de l’analyse du langage utilisé en mathématiques. Mon analyse portait entre autres sur l’argument de l’indispensabilité des mathématiques dans les sciences, conçu et développé par Quine et Putnam en faveur du platonisme à l’égard du statut ontologique des objets mathématiques.

Je crois avoir croisé les livres de Poincaré en traduction coréenne dans mes égarements à la bibliothèque. Mais à ce moment-là son nom ne me disait pas grand-chose, en tout cas beaucoup moins que ceux de Bachelard, Canguilhem ou Foucault. J’avais une admiration profonde pour ces héros de l’épistémologie française ; j’adorais son approche versée en histoire, son intérêt au concret, ainsi que son style littéraire. C’est ce qui m’a amenée à entamer des études en France.

Ce n’était qu’en France que j’ai découvert les Leçons de Poincaré. C’était un pur hasard que j’ai été conduite aux Leçons en version numérisée sur le site Gallica.fr. Pour le mémoire de DEA, je cherchais un peu maladroitement sur le catalogue de la BNF, sans même savoir qu’il existait une «science» qui a pour objet spécialement la naissance du monde et qu’il y avait un mot qui désigne cette science qu’est la cosmogonie. Le livre de Poincaré a retenu mon attention, d’abord par son titre où paraissait le nouveau mot que je venais d’apprendre, et, surtout, par son auteur, que je commençais à connaitre à peine et de qui je ne m’attendais pas à un livre de cosmogonie d’après le peu que je savais de lui

Mon objectif était de contribuer à une histoire de la cosmologie dans la lignée de Koyré (qui a couvert de Copernic jusqu’à Newton) et Merleau-Ponty, Jacques (de Laplace à Eddington en passant par Einstein), en construisant deux objets que j’ai nommés «monde mécanique» et «univers physique». D’un autre côté, j’avais l’intention de montrer que Leçons, assez connu et souvent cité encore aujourd’hui, sans pour autant avoir fait l’objet d’un travail approfondi, mérite une attention pour l’histoire des sciences, plus précisément de la cosmologie, ainsi que pour les études poincaréennes.

Mon travail a procédé en deux temps. Dans un premier temps, l’histoire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de Descartes jusqu’aux cosmogonistes au tournant du vingtième siècle, cités dans les Leçons, en passant par Kant, Laplace, Comte et Cournot. Dans un deuxième temps, une étude systématique sur l’œuvre de Poincaré. Puisque Leçons est l’un de ses derniers ouvrages, il m’a fallu parcourir toute son œuvre. L’immensité de cette œuvre oblige, j’ai dû me borner à une de ses parties. Je me suis concentrée sur la partie philosophique de cette œuvre, écrite à diverses occasions et recueillie par les propres soins de son auteur dans les livres comme La science et l’hypothèse.

Dans ma tentative d’une étude systématique de son œuvre, je crois avoir trouvé une réponse possible à cette question difficile, celle de savoir s’il y a un système philosophique ou une philosophie tout court. C’est une philosophie qui se caractérise par la systématicité qui n’est pas dogmatique ni statique, mais prend en compte la diversité et la dynamique des sciences.

Je voulais montrer également qu’elle ne manquait pas d’éléments cosmologiques. Les pistes, trois thèmes-problèmes récurrents dans ces écrits se trouvent aussi «ouverts», pour ne pas dire «dirigés», vers l’univers : le mécanisme, la loi/le principe et l’espace. Si elle n’aboutit pas à une théorie ou un modèle rationnel de l’univers, elle n’en a pas moins de place dans l’histoire de la cosmologie. Quelque part entre la fin de la cosmologie classique et la veille de la nouvelle cosmologie mise en place par Einstein en 1917.

Au cours du travail, j’ai connu plusieurs changements de problématique et de méthode, dont certains étaient plus ou moins radicaux. Tout au début, j’avais l’intention de rapprocher Poincaré de la cosmologie moderne et de le promouvoir, pour ainsi dire, au rang des «précurseurs» des théories de l’univers telles qu’on les connait aujourd’hui. Pourtant, il m’est arrivé de me persuader progressivement que Poincaré faisait partie de la science de l’univers à l’âge du positivisme, comme le dit le titre de l’ouvrage de Merleau-Ponty de 1983. Cette science, si elle n’a pas abouti à une cosmologie proprement dite, sinon la non ou la quasi cosmologie comme Merleau-Ponty caractérisait, avec un goût de formule qu’il avait, constitue un moment non moins significatif de l’histoire de la cosmologie.

Avec cette nouvelle perspective venait le besoin d’une nouvelle méthode. La méthode me préoccupait tout au long du travail, et le résultat en est les «discours préliminaires» qui précèdent chacune de deux parties principales de la thèse. Après plusieurs expérimentations et inversions du plan de thèse, j’ai fini par choisir l’archéologie comme méthode, faisant référence à Foucault. J’ai essayé de suivre les consignes données par l’auteur de L’archéologie du savoir. Privilégier la contemporanéité et la simultanéité de théories hétérogènes, au lieu de chercher à en établir l’homogénéité et la continuité dans le temps, tout en assumant leur discontinuité voire leur rupture à travers de différentes époques, afin de relever leur condition de possibilité, à la fois a priori et historique.

Ce qui m’a amenée à une sorte d’archives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Ces archives ont été réunies dans la première partie de la thèse et enrichies dans la deuxième partie, avec l’œuvre de Poincaré. Tout ceci revenait à faire les archives des Leçons de Poincaré qui est aussi, d’une certaine manière, une sorte d’archives des hypothèses cosmogoniques, plus démodées que prometteuses, plus «périmées» que «sanctionnées» au sens bachelardien de ces termes.

En somme, ces archives ne nous renseignent pas grand-chose sur l’origine du monde, pas plus qu’elles n’enseignent la science de l’origine du monde. Sur ce point, je dois rectifier ce que j’ai écrit dans la thèse. J’ai dit, à la page 60, que l’intérêt pour l’histoire s’encadrait strictement autour de l’enseignement chez Poincaré. Mais, en fin de compte, ce ne serait pas tout à fait le cas. Son exposé n’est pas tout à fait pédagogique : en le lisant, on n’a pas le sentiment d’être enseigné ou renseigné, on se sent plutôt interrogé et intrigué ; on a un peu du mal à suivre ses idées, parfois plus associées par analogie qu’elles soient enchainées logiquement. Il ne nous apprend pas tant sur l’origine du monde, mais nous incite à réfléchir sur cette question elle-même en tant que problème cosmologique, l’esprit qui l’aborde et la quête à la solution. Bref, c’est une leçon de philosophie que Poincaré nous a laissée dans ses dernières leçons.

Les premières phrases que j’ai citées tout à l’heure et qui me poursuivaient pendant tout ce temps s’accompagnaient d’une autre phrase non moins mémorable dans La valeur de la science : «La pensée n’est qu’un éclair au milieu d’une longue nuit. Mais c’est cet éclair qui est tout.» En fin de compte, les lois de la nature dans le ciel étoilé et les lois des morales dans mon cœur ne sont pas si séparées comme chez Kant, pas plus que la raison et le cœur comme chez Pascal, si c’est le cœur qui touche et incite la raison à réfléchir.

Poincaré terminait ses Leçons par un point d’interrogation. Je pourrais terminer autant, même plus : pas par un point d’interrogation, mais plusieurs, avec quelques pistes de travail à venir. D’abord un travail archivistique autour des Leçons, que ce soit relatif au cours même de 1910–1911 à la Sorbonne ou à l’édition chez Hermann, avec l’ajout des matériaux comme les procès-verbaux du conseil de l’université ou le contrat avec l’éditeur pour ce qui concerne la seconde édition. Une étude comparative plus approfondie serait envisageable aussi, entre Poincaré et d’autres auteurs, notamment Bergson et Mach. La connexion entre Poincaré et Bergson me parait d’autant plus intéressante et significative qu’il y a plus de points communs et comptables qu’on le croit, alors qu’elle est relativement peu étudiée, en tout cas moins que la confrontation entre Bergson et Einstein, ou encore beaucoup moins que le rapport Einstein et Poincaré.

Après bien des années d’études, j’ai fini par apprendre qu’une thèse de doctorat est, de par sa nature même, un travail en cours, toujours en construction, une ébauche du travail à venir. Raison de plus, une seconde édition est prévue pour cette thèse, exactement comme les Leçons de Poincaré d’ailleurs, même si ce n’est pas pour la même raison : elle s’impose, pas par le «succès» dans les librairies comme c’était le cas des Leçons, mais par un second dépôt après la soutenance, désormais obligatoire, d’après les nouveaux règlements du doctorat. J’aurai donc la possibilité de tenter une seconde chance et de donner une deuxième vie à cette thèse, possibilité dont Poincaré ne pouvait pas tirer le profit au maximum. Tous vos commentaires, critiques et suggestions, me seront donc extrêmement utiles.

Je vous remercie de votre attention.


Texte de présentation lu le 7 juillet 2018

2018년 3월 22일 목요일

사사롭고도 호사로운 일상

춘삼월이 무색하게 쌀쌀한 저녁에 치과 치료를 받고 온 엄마의 부탁으로 구립도서관에 들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빌려 오려다 눈이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책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다른 심부름을 하러 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전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꽃집이 눈에 마침 띄길래 들어가서 파스칼 페랑의 <채털리 부인>을 본 뒤로 이른 봄이면 으레 생각나곤 하던 노란 수선화를 사려다가 이내 망설여져 둘러 보다 예전에 살던 집 창가에 놓고 키우던 생각이 나서 하얀 스윗윌리암스가 연분홍 장미와 안개꽃과 프리지어와 섞인 꽃다발을 사 들고 나와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치과 치료를 받고 온 엄마가 책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빌려 오다가 책이 눈에 젖으면 안될 것 같아서 대신에 택한 것이 꽃이었노라고 말했다면 꽃집 주인이 좋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꽃은 꽃대로 책 대신에 눈에 젖은 채로 반찬가게에 가서 꽃이 예쁜데 다 젖어서 어쩌냐는 가게 주인에게 백김치를 주문하고 값을 치르려니 꽃을 사는 바람에 돈이 모자라 집에 가서 가져오겠다고 말하고 시장 어귀까지 나와서야 비로소 백김치가 아니라 동치미나 물김치가 엄마의 주문이었음을 알고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가게로 가서 물김치를 사 들고서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꽃다발과 같이 안기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은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으며 앞으로도 얼마 간은 언감생심일 사사롭고도 호사로운 일상이었던 것이다.

  

2018년 2월 13일 화요일

Lutte des classes & #MeToo

1.

Je lutte des classes. 프랑스에서 언젠가부터 집회에 심심찮게 등장하곤 하는 구호다. 볼 때 마다 낯설었다. Lutte des classes 하면 계급투쟁이고 이는 맑스가 역사 진보/발전의 기본 원리로 삼았던 개념 아닌가. 즉 역사적 사실이지 지향할 가치나 이념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계급 투쟁을 한다? 등록금 투쟁이나 임금 투쟁을 하듯이?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ㅇ 언니는 계급 타파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호, 그렇다면, 과연, "투쟁" 구호로서 의미가 있다. 심지어 갈수록 의미심장해지고 있다. 계급 제도는 타파는커녕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고? 신분제가 폐지된 지가 언제고, 왕족과 귀족을 다 갈아엎는 혁명을 겪은 지 250년이 다 돼가는 21세기에?

지금으로부터 어언 이십 년 전, 한국. 나는 이른바 계몽에 대한 <상록수> 식의 몹시 낭만적(! 이름하여 낭만적 계몽주의!)이고 소박한 이상을 품고 야학에 뛰어든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그 시대 특유의 근거 없고 근시안적인(아이엠에프 1년 전) 낙관론에, 그 나이 고유의 치기에, 짝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진 첫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그 와중에 제국주의의 볼모인 영어 과목 담당으로 겪는 온갖 모순과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한편, 치열하게 읽고 토론하며 고민하던 시절.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과 계급 재생산>이라는 책이 기억에 남는다. 같이 세미나를 하던 선배는 이 책의 주요 논제가 원제에 가장 쉽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했다 : 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s, 어떻게 노동 계급의 자녀들이 노동 계급으로 재진입하는가. 특히 근대 국가의 최고의 성과물 중 하나이자 불평등 완화의 수단이라 여겨져 온 공교육 제도가 여기에 어떻게 기능해 왔는가를 다룬다. 답은, 기대와는 전혀 달리, 오히려 그 반대로, 계급 재생산 및 계급 제도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것. 이는 사실 이제는 거의 고전적인 논제이자 역사적 법칙이 되었고 점점 더 고착돼 가고 있는 듯하다.

프랑스에서 이 문제의 권위자는 단연 피에르 부르디외. 재미있는 것은 부르디외 자신이 교육의 계급 재생산 기능에 관한 자신의 논제에 대한 반례라는 사실. 달리 말하면 그 반대급부인 계급 초월(transclasse)의 사례라는 것. 그러나 일단 역전을 이룬 후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2세들을 통해 계급 재생산 법칙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제공했다. 그의 아들인 에마뉘엘 부르디외는 부친의 뒤를 이어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파리 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영화 각본가 및 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그가 쓰거나 만든 영화들은 매우 현학적이고 제법 난해한 것이 특징으로, 부르주아 그리고/혹은  지식인 계급의 취향에 최적화돼 있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2.

가히 제4의 페미니즘 물결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시대. #MeToo 로 대변되는 반 성폭력 운동은 시발점이 아니라 이미 전개되어 온 거대한 물결의 한 단면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 확실하다. 
과거 여성주의가 소수 엘리트 여성 중심이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계급을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 혹은 대중추수적이고, 전략에 있어서도 다양성과 대중성을 추구하며, 그런 만큼 효과가 강력하고 파급이 빠르다. 

기존의 여성주의가 참정권 획득이나 호주제 폐지 등 제도적 차원에서 성과를 일구어냈다면, 이제는 심성 및 의식의 차원을 개혁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말이 의식 개혁이지 사실 문화적 사회적 측면뿐 아니라 인간의 인류학적 혹은  생물학적 근원과도 관련이 없지 않아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제도 또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리 어렵기만 한 일도 아니다. 제도적 차원과 심성의 차원은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관계라기보다는 동전의 양면 관계에 가깝다. 이 경우 대대적이고 전면적이면서도, 뭐랄까, 투지보다는 기지로 승부하는 기민한 투쟁이 효과적이고 또 이 시대의 요구에도 부합한다. 미투 운동은 이러한 이념 및 시대의 요청에 적합한 응답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새삼스럽게도 낡디낡은 계급론을 환기한다. 바로 일부 (진보) 지식인 남성들의 반발에서. 그리고 다름 아닌 내 자산의 미묘하고 복잡한 반응에서.

내가 보기에 소위 진보 남성들의 여성주의에 대한 거부감의 기저에는 계급적 편견 및 허위 의식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마초 남성 집단과 구별짓기 위한 전략으로서 친여성주의적 면모를 부각시켜 왔다. 마초 남성은 미국으로 따지면 남부의 레드넥, 트럼프 지지자이고, 프랑스로 따지면 무슬림, 방리유 출신들, 아니면 반이민 정서를 가진 하위 계층 노동자들, 아니면 아예 구세대 카톨릭. 이에 반해 지식인 남성들은 여성의 사회 진출에 위협받을 일 없고 따라서 여성을 경쟁 상대나 혐오의 대상으로 삼거나 아예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고소득에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혹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가장 기초적인 상식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여성 일반을 대리물이자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따른, 어떤 면에서는 정당할 수 있는 분노를, 부당하고 엇나간 방식으로 투사하고 혐오 정서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일군의 남성들과 동일시되기를 이들은 거부한다. 한마디로 "나를 저런 낙오자들과 한통속으로 몰지 말라"라는 절규인 것이다. 

저들이 #MeToo 운동에 반감을 느낀다면, 나는 어떤 소외감을 느낀다. 소외감까지는 아니고 불편함이라 해두자. 아니 불편함도 아니고 섭섭함에 가깝다. 일단은 먹물 특유의 허위의식과 스노비즘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성주의의 보편화를 반기는 한편으로 상업화와 대중화에 대한 저항감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계급론보다는 세대론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일 것 같다. 2010년대 이후 여성주의를 주도하는 세력은 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다. 한국에서는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된다. 70년대 후반 태생인 내가 그들과 세대 차이를 논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나이는, 이 나이야말로,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여성주의자라 규정하는 데에 늘 주저해 왔다. 학부 시절 여성학 수업을 듣고서 의식화되었고 또 그렇게 해서 갖게 된 여성주의적 관점이 내 진로를 바꾸었음에도, 정통 여성학 이론과 운동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고 또 본격적으로 실천가로 활동한 바도 없다는 이유에서. 내게 여성주의는 여전히 관념이고 이념이었다. 특별한 차별을 몸소 겪지 않고 오히려 남동생 이상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 자랐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남동생은 또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사실과 다른 이야기일 수 있으나 어쨌든 나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대라는 특수한, 그야말로 이상화된 환경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이념이 먼저고, 차별과 불평등의 경험적 사례는 그야말로 아 포스테리오리 하게 축적되는 형국이었다. 모든 의식화 과정이 어느 정도는 그러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겠지만서도. 세계관/관점의 변화에 따라 경험세계도 변화하는 것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등 여성적 조건이 가진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계기들을 전혀 겪지 않은 데다가, 이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여성이라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간접적으로나 혹은 대리로 경험하게 마련인 30대라는 시기를 온전히 외국에서 보냈다는 특수성이 나에게는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그 동안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이래저래 피해왔고, 그런 만큼 문제의식을 함양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젊은 여성주의자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이감, 거리감, 낭패감, 우수와 향수 같은 정서가 복합적으로 환기된다. 저 친구들은 어쩜 저리도 쉽게,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여성주의를 말하고 여성주의자임을 선언하는가.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한 강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향성 비판에도 주눅 들지 않고서 여성주의 입장을 표명하는가.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 제3세대 여성주의의 세례를 받은 나는 아직도 백인 부르주아 여성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데, 저 친구들은 그렇게 고민하느라 주저할 시간에 당장 트윗을 날리고 페북을 공유하는 등 행동에 나선다. 에스엔에스로 행동 및 실천 자체가 상대적으로 용이해지고 접근성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겠다. 내가 한편으로는 성적 주체화와 성적 해방의 추구,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및 남성 중심의 성문화에 대한 거부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실상은 비자발적(!) 금욕 실천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저들은 당당히 가슴을 드러내고 구호를 외치는 한편으로 욕망을 표현함에 있어 훨씬 적극적이고 또 자유롭고 풍요로운 성생활을 영위한다. 성적 억압 및 대상화에 저항하되 스스로 성적 매력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주저함이 없으며 성적 주체화를 실천한다. 패러다임 전환기 늙은 과학자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3.

1. 에서 2. 까지의 윗글은 지난 1월 말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추행 피해 사실을 밝히고, 이어 최영미 시인이 동참함으로써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던 시점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글의 역사는 사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급 문제를 다룬 서두는 아주 오래 전에 쓰기 시작했다. 중반부는 말하자면 여성주의의 누벨바그, 즉 새로운 물결을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은 메갈리아나 강남역 살인사건 논쟁이나 미국 대선 등 일련의 사건들과 이에 대한 젊은 여성주의자들의 반응과 행동에서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 이 두 문제를 같은 시기에,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재론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최근 미투 운동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2주 전 포스팅을 하던 때만 해도 그때의 들불이 횃불이 되고 이 정도로 번져서 세상을 발칵 뒤집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 위 2.에서 전개한 논리(...랄 것이 있었다면!)를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김지영" 세대가 아니라 그 윗세대인 386을 포함하는 이른바 4050 세대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는 이미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운동 사회와 문단과 학계의 성폭력을 지적하고 폭로했으나 은폐와 침묵을 강요당하며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 그랬던 그들이 용기를 낸 데에는, 지난해부터 세계적으로 미투의 반향이 컸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김지영"들의 자극과 지지와 연대의식 또한 한몫 하지 않았을까.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플랑크의 악명 높은 냉소적 발언을 인용하며 쿤은 정상과학 패러다임 하에서 평생을 보낸 늙은 과학자들이 혁명 과학에 전도되기를 기다리기란 힘들고 이들이 별세나 은퇴 등등의 이유로 전선에서 물러날 때서야 비로소 혁명이 완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의 경우는 과학과 달라서 기성 세대가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나아가 선봉장에 서거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좁은 의미에서의 패러다임, 즉 범례가 넓은 의미에서의 패러다임, 즉 문법 체계와 세계관 등등을, 나아가 세계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2018년 2월 11일 일요일

다시 시작을 논하기에 앞서 다시, 시작의 노래

«Primordial», Australie, 2017. Tamara Dean. Agence VU
«Commencement», Australie, 2017. Tamara Dean. Agence VU


시작 - 최승자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씨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 ⟪즐거운 日記⟫ (1984)


2018년 1월 12일 금요일

좋아요

그는 자꾸만 물었다. "좋아요?" 그럴 때마다 에스엔에스가 언어 현상, 나아가 의식 전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실명을 건다고는 하지만 워낙 규모가 크고 다중이 참여하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가상 공간의 언어가 이렇게 가장 내밀한 대화에까지 파고드는 순간. 

거기에 아니라 답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나는 마치 그런 법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답하곤 했다. "좋아요." 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저 상대방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거나 메아리로 되돌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좋아요? 좋아요. 질문도 바보 같지만, 답은 더 바보 같은데,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답이라 생각하면 더더욱 맥이 빠지곤 했다. 질문을 던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건대 그것은 딱히 다른 한 말이 없으니 유일하게 가능한 질문, 아니 말이었겠고, 일단 그런 생각이 든 상태에서 답을 하자니 더더욱 맥이 빠졌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나 역시 상대방에게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또다시 의미 없는 "좋아요"의 연쇄로 그 바보 같고 맥 빠진 질문과 답변이 이어질 것이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진짜로 답에 조금만 관심이 있고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최소한 이렇게 되묻지 않았겠는가. 어디가 어떻게 무엇이 왜 얼마나 좋은가 하고.

이 정도면 별점 체제는 양반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 판단과 미적 평가가 이토록 단순한 좋다/싫다는 이분법적 잣대로 귀결된다. 단순하기도 하고 원초적이기도 하다.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우는 신생아의 감정 표현. 가장 근본에 가까운 정서라고도 하겠다. 스피노자의 감응론도 결국은 이에 가깝다. 제법 복잡미묘해 보이는 정서들도 결국은 내 존재 역량을 상승시키는 정서와 하강시키는 정서, 이 둘의 변용에 불과하다. 거꾸로는 온갖 종류의 복잡다단하고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오욕칠정은 물론이요 그를 넘어 화, 울화, 분노, 한, 원한 등등 세밀화하자면 정말이지 무한히 가능할 모든 인간의 정서가 고도로 농축된 표현이 바로 "좋아요" 혹은 "싫어요"라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나도 요새는 이모티콘과 초성체를 자주 쓴다. ㅎㅎ ㅋㅋ ㅇㅇ ㅜㅜ 등등. 그런데 ㅎㅎ와 ㅎㅎㅎ 사이에 또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는 까닭에 늘 ㅎㅎ와 ㅎㅎㅎ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 고민하곤 한다. 이모티콘 또한. 씨익 하는 웃음인 😏 이나 유쾌하고 화통한 웃음인 😁, 그리고 약간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힌 웃음인 ☺️ 의 차이. 어쩌면 감정에 관한 한 이모티콘이야말로 그 어느 언어보다 더 직접적이고 확실하며 무엇보다 접근 가능하며 심지어 보편적인 표현을 가능케 하는지도 모르겠다. 괜히 emotion+icon 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좋아요"와 "I like"와 "J'aime" 가 치켜든 엄지손가락 형상의 기호인  👍 아래에 통일되는, 이것이야말로 보편 언어 이념의 실현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지 않는가. 여전히 모국어와 제2 언어 양쪽과의 불화와 소외, 그로 인한 분열로부터 헤어날 길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러한 원초적 언어의 부흥은 해방구이자 편법의 수단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남용은 해로울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