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다가 일어난 일이다. 해원이가 엄마랑 서촌 이래저래를 돌아다니다, 사직공원도 가고, 중간에 서점도 들르고, 엄마 모교도 갔다가, 마지막으로 카페에 들어가 나란히 앉아 "엄마 잘 살아요" "너도 잘 살아라" 하다 울음을 툭 터뜨리자, 나도 덩달아 왈칵.
인사동이나 삼청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모녀지간 단촐히 오후 한때를 보내는 일, 나도 엄마와 자주 하던 일이다. 엄마 앞에서 아기처럼 펑펑 우는 일도. 물론 후자는, 전자보다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믿고 싶)지만, 그 정화와 위안의 효과란 이루 말할 수 없는 바였다.
한편으로 갈수록 홍상수 영화가 좋아진단 생각을 이번에도 했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객관적이라 함은 다음의 의미에서다. 갈수록 영화가 가벼워지고, 가벼워지는만큼 외려 작가 고유의 세계가 뚜렷해지고 정합성과 형식미와 압축미 등등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각 작품마다 인생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마저 엿보이는 듯하다. 다 똑같게만 보이는 테마("감독님은 왜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하세요? 지겹지 않으세요?" : 그가 귀닳도록 들었을 질문), 대표적으로 지식인/예술인들의 현학적이고 위선적인 언어 및 행태("감독님은 본인도 교수직에 있으면서 교수 지식인 비판하고 풍자하는 영화 만드시면 자기모순을 느끼지 않으세요?" 대충 이런 내용의 대사가 이번 영화에도)만,에서부터 제법 다채로운 변주를 끌어냄으로써, 그러면서 어쩌면 심층적이고 가장 본질적일지 모를 테마들, 이를테면 우연, 관점(주의?), 인간관계에서의 진실, 진심, 진정성 등등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에 이르기까지.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음악의 사용이 갈수록 두드러진단 사실. <옥희의 영화>에서의 위풍당당 행진곡이나 <해원>의 퍼셀(아마도? <배리 린든>에 나왔던)이나 굳이 의미를 부여하기엔 아직까진 크게 성공적이었던 것 같진 않으나, 잎으로의 진화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주관적인 이유는 이것이다. 홍상수는 초기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 여기저기의 가장 자연스런 모습을 찾아 담아왔다.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대판/영화판 "인간 극장"을 꿈꾼 에릭 로메르처럼. 로메리앙이건 아니건 간에 그가 담아내는 서울 풍경은 나같은 이에게 커다란 안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좋아진 데에는, 타향살이가 길어진 탓보단 나이 탓이 크지 않은가 한다.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작가도 그만큼 나이가 든 게고.
- Circa 2013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