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3일 화요일

Lutte des classes & #MeToo

1.

Je lutte des classes. 프랑스에서 언젠가부터 집회에 심심찮게 등장하곤 하는 구호다. 볼 때 마다 낯설었다. Lutte des classes 하면 계급투쟁이고 이는 맑스가 역사 진보/발전의 기본 원리로 삼았던 개념 아닌가. 즉 역사적 사실이지 지향할 가치나 이념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계급 투쟁을 한다? 등록금 투쟁이나 임금 투쟁을 하듯이?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ㅇ 언니는 계급 타파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호, 그렇다면, 과연, "투쟁" 구호로서 의미가 있다. 심지어 갈수록 의미심장해지고 있다. 계급 제도는 타파는커녕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고? 신분제가 폐지된 지가 언제고, 왕족과 귀족을 다 갈아엎는 혁명을 겪은 지 250년이 다 돼가는 21세기에?

지금으로부터 어언 이십 년 전, 한국. 나는 이른바 계몽에 대한 <상록수> 식의 몹시 낭만적(! 이름하여 낭만적 계몽주의!)이고 소박한 이상을 품고 야학에 뛰어든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그 시대 특유의 근거 없고 근시안적인(아이엠에프 1년 전) 낙관론에, 그 나이 고유의 치기에, 짝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이어진 첫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그 와중에 제국주의의 볼모인 영어 과목 담당으로 겪는 온갖 모순과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한편, 치열하게 읽고 토론하며 고민하던 시절.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과 계급 재생산>이라는 책이 기억에 남는다. 같이 세미나를 하던 선배는 이 책의 주요 논제가 원제에 가장 쉽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했다 : 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s, 어떻게 노동 계급의 자녀들이 노동 계급으로 재진입하는가. 특히 근대 국가의 최고의 성과물 중 하나이자 불평등 완화의 수단이라 여겨져 온 공교육 제도가 여기에 어떻게 기능해 왔는가를 다룬다. 답은, 기대와는 전혀 달리, 오히려 그 반대로, 계급 재생산 및 계급 제도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것. 이는 사실 이제는 거의 고전적인 논제이자 역사적 법칙이 되었고 점점 더 고착돼 가고 있는 듯하다.

프랑스에서 이 문제의 권위자는 단연 피에르 부르디외. 재미있는 것은 부르디외 자신이 교육의 계급 재생산 기능에 관한 자신의 논제에 대한 반례라는 사실. 달리 말하면 그 반대급부인 계급 초월(transclasse)의 사례라는 것. 그러나 일단 역전을 이룬 후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2세들을 통해 계급 재생산 법칙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제공했다. 그의 아들인 에마뉘엘 부르디외는 부친의 뒤를 이어 고등사범을 졸업하고 파리 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영화 각본가 및 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그가 쓰거나 만든 영화들은 매우 현학적이고 제법 난해한 것이 특징으로, 부르주아 그리고/혹은  지식인 계급의 취향에 최적화돼 있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2.

가히 제4의 페미니즘 물결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시대. #MeToo 로 대변되는 반 성폭력 운동은 시발점이 아니라 이미 전개되어 온 거대한 물결의 한 단면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 확실하다. 
과거 여성주의가 소수 엘리트 여성 중심이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계급을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 혹은 대중추수적이고, 전략에 있어서도 다양성과 대중성을 추구하며, 그런 만큼 효과가 강력하고 파급이 빠르다. 

기존의 여성주의가 참정권 획득이나 호주제 폐지 등 제도적 차원에서 성과를 일구어냈다면, 이제는 심성 및 의식의 차원을 개혁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말이 의식 개혁이지 사실 문화적 사회적 측면뿐 아니라 인간의 인류학적 혹은  생물학적 근원과도 관련이 없지 않아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제도 또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리 어렵기만 한 일도 아니다. 제도적 차원과 심성의 차원은 상부 구조와 하부 구조의 관계라기보다는 동전의 양면 관계에 가깝다. 이 경우 대대적이고 전면적이면서도, 뭐랄까, 투지보다는 기지로 승부하는 기민한 투쟁이 효과적이고 또 이 시대의 요구에도 부합한다. 미투 운동은 이러한 이념 및 시대의 요청에 적합한 응답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새삼스럽게도 낡디낡은 계급론을 환기한다. 바로 일부 (진보) 지식인 남성들의 반발에서. 그리고 다름 아닌 내 자산의 미묘하고 복잡한 반응에서.

내가 보기에 소위 진보 남성들의 여성주의에 대한 거부감의 기저에는 계급적 편견 및 허위 의식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마초 남성 집단과 구별짓기 위한 전략으로서 친여성주의적 면모를 부각시켜 왔다. 마초 남성은 미국으로 따지면 남부의 레드넥, 트럼프 지지자이고, 프랑스로 따지면 무슬림, 방리유 출신들, 아니면 반이민 정서를 가진 하위 계층 노동자들, 아니면 아예 구세대 카톨릭. 이에 반해 지식인 남성들은 여성의 사회 진출에 위협받을 일 없고 따라서 여성을 경쟁 상대나 혐오의 대상으로 삼거나 아예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고소득에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혹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가장 기초적인 상식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여성 일반을 대리물이자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따른, 어떤 면에서는 정당할 수 있는 분노를, 부당하고 엇나간 방식으로 투사하고 혐오 정서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일군의 남성들과 동일시되기를 이들은 거부한다. 한마디로 "나를 저런 낙오자들과 한통속으로 몰지 말라"라는 절규인 것이다. 

저들이 #MeToo 운동에 반감을 느낀다면, 나는 어떤 소외감을 느낀다. 소외감까지는 아니고 불편함이라 해두자. 아니 불편함도 아니고 섭섭함에 가깝다. 일단은 먹물 특유의 허위의식과 스노비즘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성주의의 보편화를 반기는 한편으로 상업화와 대중화에 대한 저항감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계급론보다는 세대론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일 것 같다. 2010년대 이후 여성주의를 주도하는 세력은 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다. 한국에서는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된다. 70년대 후반 태생인 내가 그들과 세대 차이를 논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나이는, 이 나이야말로,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여성주의자라 규정하는 데에 늘 주저해 왔다. 학부 시절 여성학 수업을 듣고서 의식화되었고 또 그렇게 해서 갖게 된 여성주의적 관점이 내 진로를 바꾸었음에도, 정통 여성학 이론과 운동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고 또 본격적으로 실천가로 활동한 바도 없다는 이유에서. 내게 여성주의는 여전히 관념이고 이념이었다. 특별한 차별을 몸소 겪지 않고 오히려 남동생 이상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 자랐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남동생은 또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사실과 다른 이야기일 수 있으나 어쨌든 나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대라는 특수한, 그야말로 이상화된 환경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주의라는 이념이 먼저고, 차별과 불평등의 경험적 사례는 그야말로 아 포스테리오리 하게 축적되는 형국이었다. 모든 의식화 과정이 어느 정도는 그러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겠지만서도. 세계관/관점의 변화에 따라 경험세계도 변화하는 것이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등 여성적 조건이 가진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계기들을 전혀 겪지 않은 데다가, 이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여성이라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간접적으로나 혹은 대리로 경험하게 마련인 30대라는 시기를 온전히 외국에서 보냈다는 특수성이 나에게는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그 동안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이래저래 피해왔고, 그런 만큼 문제의식을 함양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젊은 여성주의자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이감, 거리감, 낭패감, 우수와 향수 같은 정서가 복합적으로 환기된다. 저 친구들은 어쩜 저리도 쉽게,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여성주의를 말하고 여성주의자임을 선언하는가.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한 강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향성 비판에도 주눅 들지 않고서 여성주의 입장을 표명하는가.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 제3세대 여성주의의 세례를 받은 나는 아직도 백인 부르주아 여성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데, 저 친구들은 그렇게 고민하느라 주저할 시간에 당장 트윗을 날리고 페북을 공유하는 등 행동에 나선다. 에스엔에스로 행동 및 실천 자체가 상대적으로 용이해지고 접근성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겠다. 내가 한편으로는 성적 주체화와 성적 해방의 추구,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및 남성 중심의 성문화에 대한 거부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실상은 비자발적(!) 금욕 실천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저들은 당당히 가슴을 드러내고 구호를 외치는 한편으로 욕망을 표현함에 있어 훨씬 적극적이고 또 자유롭고 풍요로운 성생활을 영위한다. 성적 억압 및 대상화에 저항하되 스스로 성적 매력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주저함이 없으며 성적 주체화를 실천한다. 패러다임 전환기 늙은 과학자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3.

1. 에서 2. 까지의 윗글은 지난 1월 말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추행 피해 사실을 밝히고, 이어 최영미 시인이 동참함으로써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던 시점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글의 역사는 사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급 문제를 다룬 서두는 아주 오래 전에 쓰기 시작했다. 중반부는 말하자면 여성주의의 누벨바그, 즉 새로운 물결을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은 메갈리아나 강남역 살인사건 논쟁이나 미국 대선 등 일련의 사건들과 이에 대한 젊은 여성주의자들의 반응과 행동에서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 이 두 문제를 같은 시기에,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재론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최근 미투 운동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인데, 2주 전 포스팅을 하던 때만 해도 그때의 들불이 횃불이 되고 이 정도로 번져서 세상을 발칵 뒤집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 위 2.에서 전개한 논리(...랄 것이 있었다면!)를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김지영" 세대가 아니라 그 윗세대인 386을 포함하는 이른바 4050 세대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는 이미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운동 사회와 문단과 학계의 성폭력을 지적하고 폭로했으나 은폐와 침묵을 강요당하며 좌절했던 경험이 있다. 그랬던 그들이 용기를 낸 데에는, 지난해부터 세계적으로 미투의 반향이 컸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김지영"들의 자극과 지지와 연대의식 또한 한몫 하지 않았을까.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플랑크의 악명 높은 냉소적 발언을 인용하며 쿤은 정상과학 패러다임 하에서 평생을 보낸 늙은 과학자들이 혁명 과학에 전도되기를 기다리기란 힘들고 이들이 별세나 은퇴 등등의 이유로 전선에서 물러날 때서야 비로소 혁명이 완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의 경우는 과학과 달라서 기성 세대가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나아가 선봉장에 서거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좁은 의미에서의 패러다임, 즉 범례가 넓은 의미에서의 패러다임, 즉 문법 체계와 세계관 등등을, 나아가 세계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2018년 2월 11일 일요일

다시 시작을 논하기에 앞서 다시, 시작의 노래

«Primordial», Australie, 2017. Tamara Dean. Agence VU
«Commencement», Australie, 2017. Tamara Dean. Agence VU


시작 - 최승자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씨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 ⟪즐거운 日記⟫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