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rden State, The Shins, New Slang...

blogin.com · 200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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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브래프의 이 영화, 그리고 더 쉰즈의 이 노래를 나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무심코. 그리고 다소 부당한 방식으로.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뒤늦게 유튜브를 찾아서 다시 본 단 몇 장면만으로 완전히 매혹되었다. 내 인생을 바꿨을지 모를, 이제라도 바꾸어 주었음 싶은, 이 영화 그리고 이 노래.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스토리, 음악, 캐릭터 등등을 종합해서 봤을 때 기존의 청춘영화 코드를 답습하고 있다"고 평했었다. 그때는 정녕 이 재기 넘치는, 내가 좋아하는 공드리식 미장센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도, 내성적이고 멜랑콜릭한 캐릭터에, 그 캐릭터의, 복잡미묘하지만 또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유아론적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대체로 이런 스타일의 영화에 약한 편이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남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 영화가 내 검열관--일종의 초자아쯤 되겠다-- 고유의 심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던 듯하다. 이 부분에 관해서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여성 작가들이 만들었거나 여성 인물들이 적어도 살아 움직이는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이를테면 내 방이나 이 블로그를 장식하고 있는 재현물들의 주체나 주제/객체는 대부분이 여성이다), 이 기준이 그간 꽤 많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요즘에는 남자 작가들이 여성과 여성성에 찬사를 보내는 걸 지켜보는 일이 즐겁다. 티치아노나 보티첼리에서 시작해서 펠리니에 이르는, 풍요나 생산성/창조성이나 건강한 미를 숭앙하는, (이렇게 명명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이탈리아적 방식이건, 보들레르, 마네에서 트뤼포에 이르는, 여성의 영원한 아우라나 낯설음(Unheimlichkeit)--둘 다 가까이 있음에도 멀리 있는 듯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을 상정하는 프랑스식이건 간에.

어쨌든, 지금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하고 있는 중.  

사소하디 사소한 미학적 단상



아무래도 나의 (심)미적 평가 기준은 미보다는 쾌적함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난 내 미적 판단에 자신이 없다. 심미적인 것뿐이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 심지어 철학이나 과학과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이쪽 얘기를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저쪽 얘기는 또 그런대로 그럴싸하게 들린다 (괜히 아호를 '박쥐'로 지었겠는가). 논리적이거나 경험적인 근거로 진위 여부가 판가름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럴진대, 미에 관해서는 오죽하랴.

미적 가치의 판단이란 게, 주관의 취미 능력에 따라 판단의 신빙성이 결정된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 주관성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주관들이 타인들로부터 자신의 판단에 대한 보편적 동의를 얻기를 바란다는 데에 있다. 이것이 미적 판단에 대한 칸트의 진단이다. (그의 상당수의 논제들이 그러하듯이) 생각보다 낡지 않은. 나는 요즘도 사람들과 예술에 관해 얘기할 때마다, 한 작품을 둘러싼 여러 담론이나 논쟁을 접할 때마다, 이 진단을 떠올리곤 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 동의에 대한 끝없는 갈망.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혐오하는) 태생적 한계 또는 (90년대 말 포스트모더니즘이 횡행하던 시절 철학에 눈을 떴다는) 환경적 조건 때문에, (오늘날 철학의 반상대주의 노선이 그 어느 시대보다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자의 천형에서 벗어날 길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사실 꼭 이해하기 힘든 것만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이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 바람만큼 소박하고 인간적인 욕망이 또 있겠는가. 나도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고, 또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가진 적도 있다. 한편으로 나에게는 덜 소박하고 덜 인간적인 욕망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권위있는 비평가나 아니면 세련된 미적 감각의 소유자가 함께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 바람이 그것이다. 내가 높이 산 영화가 카이에 뒤 시네마나 imdb 에서 높은 별점을 받을 때 느끼는 우쭐함이나 안도감은 그 영화가 내게 준 카타르시스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런 내밀한 바람을 겉으로 표출하여 심지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까지 이르려는 의도가 없다. 용기나 능력도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누군가의 설득하려는 노력이 특히 나같은 사람에게는 잘 먹힌다는 것이다. 누구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심리적 상태에서 봤느냐에 따라, 그리고 누구의 어떤 평을 이미 들어 알고 있거나 나중에라도 들었는가에 따라서 한 작품에 대한 감상이 180도 달라진다. 마치, 작가의 비오그래피나 주고받은 영향들, 그리고 미술사적 맥락 또는 도상학적 해석 등등에 대한 지식을 소지하고 회화를 감상할 경우, 그 작품에 어떤 후광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말하자면, 단토가 말하는 "변이(metamorphosis)" 같은 것이, 예술계(art world)이 (객관적) 지위를 수여하는 메커니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한 명의 평범한 관객이 그 작품과 만나는 지극히 내밀하고 주관적인 방식에 있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 너무 멀리 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냐면... 영화고 회화고 건축물이고 음악이고 한 번 보거나 들어선 모른다는 것. 절대적인/무사심적 주관성을 본성으로 갖는 예술의 세계가, 객관성을 표방하는 과학이나 다른 이론의 세계만큼 넓고 깊다는 것. 덧붙여, 세상의 모든, 그 중에서도 특히 내가 무심코, 그리고 부당한 방식으로 폄하했던 창작품들과 창조물들에게 경배를 표하고프다는 것.

—박쥐

여행, 새로/다시 태어나기 위한

blogin.com · 2009-09-17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재도약을 위한 최후의 심호흡을 해야 할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여행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니.  

이번 여름에는 뜻하지 않게 이곳저곳을 다녀왔다. 8월에는 독일, 9월에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근대적 의미에서의 대학 시스템이 정립된 괴팅엔, 그리고 오랜 대학도시 하이델베르그로부터 시작해서 종교 개혁 및 계몽 사상의 주춧돌이 된 칼뱅과 루소를 배출한 주네브, 그리고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를 돌아 다시 "19세기의 수도" 파리로.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었다. "시간여행"에 관한 한, 현재까지 알려진 물리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 거시적이고 공식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내 개인의 사소하고 내밀하며 사적인 기억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번 여행이 더욱 재미있었던 것은 오랜 친구들, 그리고 그보다는 덜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혼자였더라면, "철학자의 길"을 걷거나 헤겔 생가를 찾아가는 일도 길고 험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피렌체 우피지 갤러리의 그림들을 보면서도 엄숙한 태도로 그 상징적인 의미나 미술사적 의의를 찾느라 머리가 깨졌을 것이다. 혼자 여행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이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깨달음만으로도 이미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피렌체

다른 곳들도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피렌체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보티첼리나 티치아노의 작품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거리를 걷고 또 그들을 감싸 안았을 햇살, 하늘,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곳. 

이곳에서 우리 모두 다시 태어났/나기(re-naissance)를. 그리하여 함께 깨달음(con-naissance)을 얻(었)기를. 다시 태어나도 서로를 인정할/알아볼(re-connaissance) 수 있도록. 또 새로운 깨달음(re-connaissance)을 얻을 수 있도록.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