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2일 목요일

사사롭고도 호사로운 일상

춘삼월이 무색하게 쌀쌀한 저녁에 치과 치료를 받고 온 엄마의 부탁으로 구립도서관에 들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빌려 오려다 눈이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책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다른 심부름을 하러 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전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꽃집이 눈에 마침 띄길래 들어가서 파스칼 페랑의 <채털리 부인>을 본 뒤로 이른 봄이면 으레 생각나곤 하던 노란 수선화를 사려다가 이내 망설여져 둘러 보다 예전에 살던 집 창가에 놓고 키우던 생각이 나서 하얀 스윗윌리암스가 연분홍 장미와 안개꽃과 프리지어와 섞인 꽃다발을 사 들고 나와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치과 치료를 받고 온 엄마가 책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빌려 오다가 책이 눈에 젖으면 안될 것 같아서 대신에 택한 것이 꽃이었노라고 말했다면 꽃집 주인이 좋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꽃은 꽃대로 책 대신에 눈에 젖은 채로 반찬가게에 가서 꽃이 예쁜데 다 젖어서 어쩌냐는 가게 주인에게 백김치를 주문하고 값을 치르려니 꽃을 사는 바람에 돈이 모자라 집에 가서 가져오겠다고 말하고 시장 어귀까지 나와서야 비로소 백김치가 아니라 동치미나 물김치가 엄마의 주문이었음을 알고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가게로 가서 물김치를 사 들고서 집에 들어가 엄마에게 꽃다발과 같이 안기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은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으며 앞으로도 얼마 간은 언감생심일 사사롭고도 호사로운 일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