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9일 목요일

JLG forever




고다르의 최근 인터뷰를 듣고 그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다. <비브르 사 비>와, 오, 무엇보다, <미치광이 피에로>를 다시 보고 싶었는데, 현재로서 내게 접근 가능한 그의 작품은 <알파빌>과 <영화의 역사(들)>이 고작(!). 보면서 새롭게 깨달은 몇 가지 사실 중 하나는 내가 본 고다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수년 전 퐁피두에서 고다르 특별전이 열렸을 때 그래도 꽤 부지런히 그곳 상영관을 들락거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비브르 사 비>와 <미치광이 피에로>처럼 그 이후 수차례 반복해서 본 경우를 제외하면 당시에 봤던 상당수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녀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오른편을 돌봐라>,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같은 영화들도 분명히 봤는데. 언어의 문제가 컸겠으나 무엇보다 관객으로서의 경력 및 안목의 부족으로 놓친 게 많았기 때문인 듯. 오,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내가 좋아하는 고다르는 아무래도 60년대 카리나 시절의 그다. 비교적 서사도 있고 고전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으면서 무엇보다 로맨틱하고 유머러스한 정서가 완연했던 시기. «고전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완곡한, 어쩌면 사실을 왜곡하는 표현이다. <네멋대로 해라>에서부터 이미 그는 영화사를 새로 쓰지 않았는가. 한편으로 «카리나 시절의 고다르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더 정확하게는 «카리나 시절 이후는 잘 모른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68을 전후로 급격히 정치화된 70년대, 그리고 80년대 이후, 영상, 음성—배경음악과 내레이션과 등장인물의 대사 모두를 포함—, 문자 등 영화의 매체, 매체로서의 영화에 대한 실험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시기. 요컨대 다소 치기어린 천재에서 완숙하고 성찰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게 시절의 고다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변명 혹은 해명을 하자면, 후기의 그를 «전혀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스타일과 영화철학과 세계관을 총집약하고 있는 <영화의 역사(들)>을 본 이상… 물론 «제대로» 보았다는 가정 하에서!

그리하여 <영화의 역사(들)>과 <알파빌>을 다시 보면서 그의 최신작이자 칸느 영화제 출품작인 <언어와의 작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지난 주에 개봉했으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을 연기한 상태였어서. 그러던 중 뒤늦게, 결과가 발표된 지 4일이나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고다르가 다름 아닌 이 작품으로 칸느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경쟁작 선정 이후 영화제 안팎에서 수많은 잡음과 파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감독 데뷔 후 무려 반세기 만에 칸느에서는 처음으로! 그것도 고다르의 데뷔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대의 수퍼 루키 자비에 돌란과 함께! 칸느에서 이런 극적인 심사 내역은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제인 캠피온 이하 전도연, 소피아 고폴라, 랑베르 윌슨 등등의 심사위원들에게 존경심이 들었을 정도… 고다르에게 쏟고서 남은 존경심이 있다면! 에릭 로메르에 이어 알랭 레네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아직 자크 리베트가 있고 또 이들 누벨바그의 후예를 표방하는 이들이 남아 있지만, 어찌 고다르 만하랴. 그가 여전히 있고 또 여전한 시대에 살고 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행복이 좀더 오래 유지되었으면.

위의 동영상은 Arte 의 영화전문방송 Blow-up 에서 따왔다. 고다르 영화 세계를 상당히 잘 요약하고 있는 데다가 그 표현 및 편집의 방식 또한 몽타주 이론가인 고다르에 충실하다. 

2014년 5월 23일 금요일

칸느의 기억




비현실적 공간에서 깨달은 현실
칸은 내가 다녀 프랑스의 어떤 도시보다 이국적인, 그러니까 프랑스 같지 않은 도시다. 여러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도시, L.A. 닮았다. 바다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다른 도시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야자수 하며, 해변을 따라 늘어선 고급 상점까지. 칸에 L.A. 요소를 불어넣는 것은 무엇보다 영화제일 것이다. 스크린으로만 보던 스타들이 바로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거리는 밤낮을 가릴 없이 파티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로 넘쳐 난다. 이렇듯 칸은, 영화와 축제라는 가장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지구상 어느 곳에서보다도 꿈에 가까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영화제 개막을 달가량 앞둔 지난 4 , 취재계획서란 것을 써서 겨우 영화제 참가 티켓을 따냈을 때까지만 해도, 칸에 가기만 하면 바로 스타들을 만나고 영화를 실컷 있을 거라는 소박한 기대에 마냥 들떠 있었다. 계획서에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경쟁작들이나 다른 메인 선정작들보다는, '주목할 만한 시선'이나 '감독 주간' 미디어의 관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부문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역시 '경쟁 부문'에는 제외되어 있지만, 영화제를 만들어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영관 관객들의 분위기에도 주목하려 합니다." 이렇듯 나는, 상영작들 맘에 드는 작품들을 느긋하게 선택해서 감상할 여유가 모든 참여자들에게 무제한으로 허여되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화제의 존재 이유이자 가치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칸에 도착해서 산더미 같은 자료집과 산뜻한 가방을 받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잔뜩 신이 있었던 나는, 지중해의 뙤약볕 밑에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만석"이라는 통고를 받고 허망하게 발걸음을 돌리기를 번씩 반복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냉엄한 현실을 깨달을 있었다. 기자들이나 영화 관계자들에게 미리 배부되는 배지가 없으면 영화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배지가 있더라도 워낙 사람이 많은 나머지 원하는 영화를 없는 경우가 허다하며, 경쟁작들은 물론이고 사람이 몰릴 알았던 영화들 역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기는커녕 관객들로 넘쳐나는 , 그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인스턴트 감상, 인스턴트 비평
크루아제트의 드뷔시관. 주로 '주목할 만한 시선' 출품작들이 상영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롤라 두아이용(참고로 자크 두아이용 감독의 딸이다) 〈넌 누구랑 사귀니? Et toi, t'es sur qui?(영제는 Just About Love) 보고 나오는 . 누군가가 동료에게 "가볍네. 그래도 만들었어.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나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들으며 '첫경험' 둘러싼 고등학생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갈등을 아기자기하게 그려낸 영화에 대한 완벽한 '20자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저렇게 즉각적인 반응과 순간적인 판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실로 칸에서 이른바 '프로' 관객들-주로 기자들과 평론가들로 구성된- 반응하는 방식에는 놀라운 데가 있었다. 마켓 상영까지 합하면 정말이지 수없이 많은 영화들 가운데에서 아마추어인 내가 잃은 어린양마냥 헤매는 동안, 그들은 마치 맥도날드에서 음식을 골라 먹듯, 단숨에 영화를 골라서 곧바로 감상을 쏟아내고 있었다. 평소에 ' 영화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 보기도 전에 함부로 판단을 내려서는 되고, 판단을 내렸다 해서 그것을 개의 소박한 평가 술어로 단순화시켜서는 되며, 별점 개로 수량화해서는 더더욱 된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해할 없거나 심지어 용납할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랬던 내가, 칸에서 며칠을 보낸 뒤에는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데일리에 실린 별점 평가부터 찾아보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영화들을 20자나 별점으로 재단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넌 누구랑 사귀니?〉는 귀여웠고, 줄리앙 슈나벨의 〈잠수부와 나비〉는 '장애인의 인간 승리'라는 클리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거스 산트의 〈패러노이드 공원〉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니콜라 필베르의〈노르망디로의 귀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메타적 성찰이었으며, 그렉 아라키의 〈스마일리 페이스〉는 〈런던에서 남자〉 같은 지루한 영화들 때문에 쌓인 피로를 단숨에 날려준 아주 유쾌한 코미디였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칸은, 영화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마주하는 경험을 무한하게 제공하는 '시네마 천국'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루에 서너 편씩을 연이어 보다 보니 각각의 작품들이 갖는 아우라는 줄어들었고, 심지어 영화가 지루해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졸게 되는 경우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나머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영화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어떤 것들은 아마도 따로 보고 제대로 되새김질 했더라면 분명히 달리 보였을 것임을.

그렇게 아쉬운 영화 하나가 60주년 기념 특별 상영작이었던 제인 버킨의 〈박스〉다. 칸에 도착하자마자 제인 버킨을 비롯, 미셸 피콜리, 제랄딘 채플린, 두아이용(참고로 제인 버킨이 자크 두아이용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영화 속에서 버킨의 역할을 맡았다) 등의 무대 인사를 구경하고는 좋아했던 것도 잠시, 영화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데다가 여독을 풀지 못했던 나는 결국 조느라 많은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버킨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서전적인 작품은, 영화제가 끝나고 프랑스 개봉을 즈음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건대, 여성적 영상 작업의 범례라 만한 수작이다.

칸이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말고도) 남긴 것
지도 교수가 "칸에서 한국 여배우가 주연상을 탔다고 들었다. 한국 영화에 대해 모르긴 하지만 왠지 기뻤다. 축하한다"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걸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칸에서 〈밀양〉을 보던 생각이 나서였다. 교수는 알까,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과 치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치밀하고 냉정하게 묘사한 〈밀양〉을 보면서, 내가 숨통이 조여 오는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여러 참아야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옆에 앉은 프랑스 기자가 "너희 나라는 정말 저러니?" 하고 물을까봐 자꾸 숨고 싶었다는 사실도? 한국에서 왔다 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숨〉과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보통인 상황에서, 나는 영화와 국적 혹은 민족적 정체성 간의 관계에 대해 재고하지 않을 없었다.

칸으로 떠나기 , 누구는 영화 보기도 모자란 판에 읽을 시간이 있겠느냐며 어떤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는 나를 말렸고(그가 옳았다. 영화도 영화지만, 영화를 보지 않는 동안에는 영화제 프로그램을 보며 스케줄을 짜고 넘쳐나는 보도 자료와 데일리만 읽기에도 벅찼다), 다른 누군가는 선글라스와 드레스는 필수품이라며 챙겨 가라고도 했었다(그도 옳았다. 물론 불행인지 다행인지 드레스를 입을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칸행 소식을 전했을 주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영화제가 끝난 지금, 어땠느냐고 묻는 그들에게 무슨 답을 해줄 있을까? 적어도 내게 있어 쉽게 해볼 없는 경험이었음은 분명하다. 칸에서 닷새를 지내고 돌아온 다시 일상에 적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 작렬하는 햇볕, 레드 카펫, 바다, 성장한 거리를 활보하는 선남선녀들 '칸스러운' 장면들이 영화들의 컷들과 더불어 만들어 잔상들이 자꾸 눈앞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다. 선정작들이 하나 둘씩 개봉하는 것을 때마다 나는 다시 천국이라 하기엔 낯선, 천국보다 낯선 공간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계속 후유증에 시달릴 같다.[*]


[*] 67 칸느영화제를 기념(!)하여 공개(!)하는 기록물. 2007 60 칸트 영화제에 참가하고 써서 지금은 폐간된 영화지 <스크린> (아마도) 7월호에 실었던

2007,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으로 칸느에 다녀온 , 해마다 즈음이면 당시 생각이 나곤 한다. 눈부신 햇살을 등에 지고 어둑한 극장으로 들어가 영화만 줄창 보다 합숙 장소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던 기억이 아무래도 지배적. 같이 묵던 동포 기자들 중에는 그 중에는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 인사였던 허모 기자도 있었다. 워낙 단체 생활을 힘들어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저런 종류의 합숙이라 무척 괴로웠는데… 상당수가 영화제 내내 그렇게 지냈고 또 여전히 지내고 있는 모양이더라. 최근 한 인터뷰에서 첫 칸느의 기억을 묻는 기자에게 마티유 아말릭 왈, «마침 칸느에 사는 친척이 있었다. 당시 같은 영화에 출연했고 동반자이기도 했던 잔느 발리바르와 그 친척네 집 거실에서 침낭을 펴고 잤다. 그녀는 수만 프랑짜리 유명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빌렸었다. 레드 카펫 위의 화려한 드레스와 침낭, 이것이 칸느다». 과연 그렇다. 

그런데 당시에 쓴 글을 다시 들추다 보니 참 새삼스럽다. 영화제 스태프로부터 취재 티켓을 받고 또 <스크린> 편집장으로부터 취재비를 타내기까지, 나로서는 꽤나 버거운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 곤란하고 또 피곤하게 만들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밖에 문득 떠오르는 사소한 기억들. «아니, 마스트로이아니를 몰라요? 펠리니 영화에 수차례 나왔던?»이라며 황당해 하던 한 한국 기자. 마침 2014년 올해 칸느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바로 그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아니. 당시엔 정말 그를 몰랐다. 펠리니를 제대로 접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으니까. 그제서야 그 기자의 반응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았다. 펠리니도 펠리니지만, 펠리니 뿐인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에토레 스콜라, 비토리오 데 시카 등등과 작업했다. 그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탈리아에 그 만큼 훤칠한 남자배우가 부족한 탓이 크다고들 하지만... 어쨌든 마스트로이아니를 빼놓고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텍사스 대디

Zoom Japon 이라는 프랑코자포네 월간 소식지가 있다. 한국 혹은 일본 식료품점에 갈 때마다 들고와서 보곤 한다. 프랑스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본문화를 불어로 소개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고, 비교하자면 비행기 회사에서 만든 사보 혹은 홍보지와 유사하다. 그래도 기획, 편집, 기사의 수준이 상당하여 볼 때마다 감탄한다. 가끔 제법 진지한 주제도 다루어진다.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를 다룬 이번 5월호가 그 예다.

거기에서 다소 충격적이고 희극적인 사실을 발견. "텍사스 대디"라는 미국의 정치평론가. "정치평론가"라기보다 논객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릴 법한 인물. 은퇴 후 정치 및 시사 문제에 대한 지극히 보수적인 논평을 실은 유튭 개인채널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던 중 2008년, 어업권을 둘러싸고 국제적 분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 고래잡이 어부들을 옹호해서 일부 일본 네티즌들의 호감을 샀고, 이후 "친일파" 성향이 다분한 논평들로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많은 팬을 거느리기에 이른다. 일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정치와 역사와 사회와 문화 등등을 학습하기 시작한지 불과 몇 년만에 전문가 못잖은 입지를 차지, 식민지 과거사 같은 외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에 관해 그가 피력한 견해를 도리어 일본의 극보수 네티즌들이 인용할 정도.

내가 본 건 프랑스 기자와의 아주 짧은 인터뷰 하나지만, 인터뷰 하나로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인터뷰가 아주 가관이다. 예를 들어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은 이러하다 : 1965년 한일협정에서 과거사 문제 종결 짓기로 해놓고 남한 정부는 왜 자꾸 번복하느냐,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 배상금을 지급했는데 박정희가 이를 받아 남한의 경제 발전을 위해 썼다, 설사 일본군이 강제 연행했다 해도 전쟁중 민간인 성폭행을 방지하기 위해 군부대 옆에 공창을 두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강제성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실제로 강제적이었다면 아녀자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동안 한국 남자들은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사실은 자원이었는데 전쟁 이후 후환이 두려워서 강제되었다고 거짓 증언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2차대전 후 독일군과 관계를 맺었던 프랑스 여성들이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 정도 가관이면 다른 글을 본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다.

이처럼 근거없는 사실들을 끌어들이거나 사실과 가치 판단을 혼동하는 일이야 흔하지만, 이 경우는, 중립성과 객관성을 표방하거나 하다못해 가장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어느 정도의 반성과 문제 자각의 과정이 선행해야 할 것인데, 이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상대방은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이것이 상대의 전략이고 따라서 거기에 넘어가거나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 해도, 안 된다 한들, 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란 말인가, 이렇게 대책없고 대화불가능한 경우에는. 아무리 사료와 증언을 제시해도 음모이론이나 역사조작을 운운하며 믿지 못하겠다는데.

어딜 가나 이런 "*통"은 있게 마련이고, 그 존재가 심정적으로는 한탄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어쩌겠는가, 이들에게도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을. 그래서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면 굳이 막지는 않되 그저 귀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작 텍사스 대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한 외국인의 자국에 대한 시선에 열광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다. 그가 자국 문제에 관한 전문가인 것도 아니니 한국에서 브루스 커밍스에 주목하는 것과도 다른 양상이다. 외부, 특히 서구 언론의 시선에 대한 관심과 갈증을 사대주의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환원적이다. 설사 그런 측면이 없지 않을지라도 어쨌든 설명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전히 쉽고 거칠기는 마찬가지만 일단 떠오르는 설명적 요인들을 열거해 보면 이러하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인터넷이 등장한 20세기 후반에서 지금의 세기에 고유하게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미디어의 세계화 및 상대화, 개인화(혹은 민주화?), 그리고/또는 소셜네트워크 환경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등등. 천하의 노암 촘스키도 트위터 없이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또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상이니. (사회)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외부의 시선을 통한 자기 정체성 확인에의 욕구이고, 이는 결국 허약한 자아상의 반영이자 반향이겠다. 아무리 나르시시스트라도, 아니 어쩌면 나르시시스트일수록 더더욱,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타자의 개입은 나의 나에 대한 애정을 중화시키기도 한편으로 객관화하기도 한다.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됐든 조국이 됐든 간에. 

물론 자기애와 조국애라는 두 심적 상태 사이에 필연적 상관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가장 비근하고 극단적인(!) 예가 있다. 바로 나다. 나는 자기애 성향이 무척 강한 사람인 반면, 이른바 "애국심"이라는 개념이 표상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갖는 전체주의적 위험을 경계한다... 고 예전에는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고국을 떠나 유목적 삶을 지속하다 보니 생각을 달리하게 된 모양이다. 관념상으로는 여전히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지향하려 애쓰는데도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불안정한 이주상태가 주는 불안에서 벗어난 토착민의 삶을 꿈꾸다 보니, 토착민 혹은 원주민(autochtone) 특유의 정서, 이를테면 타자에 대한 공포와 경계, 그리고 전통과 소유에 대한 집착 같은 것도 이해가 간다. 우연히 한 세기 이전의 Le temps 이나 Revue scientifique  같은 잡지를 뒤적이다, "동방의 아침 나라" 탐방기를 접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마다 그 관찰의 소박함에 조소를 금치 못하는 동시에 바로 거기에서 내게 모종의 "민족적 자존심"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나도 조만간 광신적 민족주의자로 변모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족적 자존심이란 얼마나 가볍고 알량한가. 저 탐방기가 갖는 하나의 역사적 증언으로서 갖는 무게를 생각하면. 비록 온갖 무지와 몰이해와 턱없는 환상, 요컨대 오리엔탈리즘으로 점철된 시선이었을지언정, 바로 그 시선으로 남겨진 선조들의 삶. 나와 같은 공간을 점유했으되 시간대를 달리했던 그들을, 그들과 공간을 달리 했으되 시간을 공유한 한 이방인을 통해 만난 것이다. 바로 그 이방인의 공간에서, 나 자신 한 이방인으로서. 이것은 얼마나 생생한 역사 교육이고 얼마나 경이로운 시공간적 체험인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후 텍사스 대디의 인터뷰를 우연히 접할 누군가를 생각한다. 역사의 진보가능성 논제를 최소치만 받아들여 이렇게 말해보자. 그가 사는 시대에는 최소한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비상식이라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길. 내가 그래도 최소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은 가능한 시대에 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