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6일 목요일

수녀원에 계신 당신께 보내는 세속의 편지

- ㄴ 언니에게

무심히 보낸 짧은 메세지가 이렇게 세심하게 쓰인 장문의 편지로 돌아오다니. 제가 있는 지금의 여기와 차원이 다른 우주 어딘가로부터 날아온 편지 같아요. 수녀원이라는 공간, 그곳에서 당신이 지내신 일주일 남짓한, 아니 이제 이주가 넘어가는 시간, 그 세계와 이 속세는 질서도 논리도 이렇게 다르군요. 

논문을 쓰기 위해선 오롯이 혼자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당신. 재미있는 것이 마침 저는 그와 전혀 반대인 깨달음을 얻고 그에 따라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거든요. 너무도 오랜동안 혼자서 살고 쓰고 사유해 왔고, 이것이야말로 지체 및 퇴보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거죠. 사실 이 깨달음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에요. 외부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물체는 자기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이 근대역학의 근간이 된 관성원리. 이 원리는 제가 논문에서도 조금 다루는데 볼 때마다 제 경우에 비춰보곤 했죠 (실제로 데카르트와 갈릴레오에 의해 정립된 이 원리에서 인간학과 윤리의 기본 원리를 유추한 경우가 제법 있었죠. 스피노자, 루소 등. 덧붙이면 속도가 변치 않은 상태로 제 운동을 지속하는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말하자면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은 멈춰있고 다른 물체들이 움직이는 것으로 인지한다는 것이 갈릴레오 상대성원리). 너무도 오래 관성 운동을 지속해 오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웬만한 외부 자극에는 꿈쩍도 않게 되었던 것인데. 그러다 얼마 전,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새삼스런 자각에, 바닥에 남은 마지막 용기와 의지를 끌어모아 외부 세계를 향한 창을 다시 열게 된 것이죠. 

십수 년만에 안과에 가서 검사를 받고 안경을 맞춰서 쓰기 시작했어요. 써보니 그 동안 얼마나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살아왔는지 알겠더라고요. 작년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하면서 파리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는데, 이번에는 그 이상이에요.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그야말로 계몽, 즉 미몽의 상태에서 깨어난, 나아가 새로 태어난 기분. 

지난 주에는 오랜만에, 실로 너무나도 오래만에, 콜로크 하나에 참석했어요. "사상사"가 주제였는데 푸코에 대한 언급이 많았죠. 딱히 푸코를 전공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재직했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린 만큼, 그리고 그가 해당 혹은 유사 분야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니만큼. 덕분에 지적인 자극과 자신감을 동시에 얻었어요. 푸코의 고고학을 방법론적으로 차용해서 고전시대 우주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제 논문 1부의 목표거든요. 꼭 푸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만 푸카디앙임을 천명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내 주장과 주관이 확실하고 그 안에 나만의 고유한 해석을 녹여내면 그것만으로도 의의를 찾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푸코나 사상사와는 무관하게 얻은 것이지만 사후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면 푸코랑은 전혀 무관하지는 않겠네요. 다 그가 다룬 주제들) : 순수한 앎에의 의지, 지적 욕망보다, 일정한 지적 수준을 인정받고 싶은, 그야말로 인정욕, 그리하여 결국에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고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지가 앞서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이것이 그동안 내 논문에, 나아가 삶에서 얼마나 큰 장애물로 작용해 왔는가.

근처에 간 김에 오랜 만에 푸앵카레 연구원 도서관에, 그리고 저녁에는 주느비에브 도서관에 갔는데, 주느비에브에선 아,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주느비에브는 제가 이곳에 온 직후 자주 드나들었던 도서관. 당시 수업이 주로 근처 쥐시유에서 있었고, 또 당시만 해도 저녁 늦게까지 개관하는 도서관이 퐁피두 말고는 유일했던 까닭에. 처음에는 도서 대출 및 출입 시스템을 몰라 입구를 마비시킨 일도 있었고, 그밖에도 당시에는 수치심으로 죽을 듯 괴로웠지만 이제사 다시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기억들로 가득한 곳. 높은 천장, 철제 궁륭, 넓은 열람실, 낡고 삐걱대는 책상과 의자, 청록빛 유리갓을 쓴 책상램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복제한 벽화, 모든 것이 그대로인 걸로 보였어요. 지난해 테러 이후 등록 및 재등록시 신분증을 요구하는 걸 빼면. 아, 무선인터넷이 가능해진 것도 있네요. 그리고 이는 무척 큰 변화.

그리고 무언가 일을 하나 도모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도를 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정도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심각한 무기력증에 시달려 왔는지 짐작할 만하죠. 과감하고 무모해진 김에 지도교수에게도 메일을 보냈어요. 얼마 전 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없어 불안해 하던 차였거든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답장이 왔는데 건강에 문제가 있어 답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기다리라는 내용이었어요. 순간 걱정이 많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불경하다고도 할 안도감이. 내가 잊혀지거나 아주 많이 밉보인 것은 아니구나, 그래도 희망이 없지 않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불행한 소식이고 가슴은 아프긴 해도 어쨌든 그로 인해 내겐 시간이 좀더 주어지게 된 셈이구나, 하는 생각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 기회겠구나, 하는 경각심이.

이제 당신이 돌아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돌아온 당신에겐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거고요. 나도 또 다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주인공이면 좋겠지만, 이번엔 힘들겠네요. "혹시 알아? 돌아와 보니 그 동안에 다 썼다고 할지?"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당신을 놀라게 해주고도 싶었는데. 그래도 다음에는, 조만간에는 꼭.

2016년 5월 19일 목요일

해밀토니안 상념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의 일. 한 선배의 논문심사가 끝난 후 사람들과 카페에 갔다. 아는 사이도 있었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불문학을 전공하는 한 분이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내심 반가웠다. 더구나 지금은,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18세기 여류 시인을 공부한다니, 더더욱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역시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철학을 하는 ㅌ 선배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분은 모른다고, 학부는 다른 학교에서 했다고 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야말로 다른 학교이고 심지어 대학원도 다른데, 내가 "선배"라고 해서 그 학교 후배인 줄 안 모양인데... 이 말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당연히 그 학교 출신일 거라고 짐작한 것은 내가 먼저인데, 그래서 그분도 똑같이 짐작했나 본데, 이런 선판단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그 판단을 전달하는 것은 또 어떻고, 정치적 올바름까진 아니더라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가, 문제의 그 학교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특권적 위치가 아니었다면 또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정정할 기회를 놓쳤다.

또 그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를 새로 만났는데 그 사람이 학부에서 밴드 활동을 했다길래 무슨 밴드냐고 물었는데, 어디 어디 라고 답을 하는데, 아무래도 학내에서는 유명했나 본지, 말을 하면 내 쪽에서 알리라 짐작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자신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전제하에. 그런데 여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나중에서야 계단생각으로 떠오른 답 : "그렇게 유명한 밴드는 아니었나 보네요. 다른 학교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또 다른 예. "전에는 어디에서 공부하셨나?"라는 한국에서 오신 교수님의 질문에, 출신 대학에 관한 질문임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서 "물리학과에서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때는 옆에 있던 사람이 정정 혹은 보충 답변을 해주었다.

사실 나는 내 출신 학교가 부끄럽지 않다. 그곳에서 보낸 7여 년은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기였으며 -- 물론 이때가 20대 초반의 꽃다운 시절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와 같은 기회를 누린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사상적이고 정서적 토양의 상당 부분은 그곳에서 나왔고, 그것이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만큼, 나의 이 "출신 성분"은, 굳이 사회적 코드가 아니더라도, 나를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뺄 필요도 없고 심지어 빠져서는 안 되는 사항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졸업 후, 특히 외지에 나와 살면서부터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의 이 전기적 사실을 밝혀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차라리 프랑스나 다른 외국 사람 앞에서는 오히려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짐짓 자랑스럽게 덧붙일 때도 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여자대학이라고.

처음에는 내가 나온 학교가 가부장 사회의 편견, 게다가 요새는 여성혐오 정서까지 가세, 표적이 되는 경우가 워낙 많아 이에 따라 발생할지 모를 불필요한 갈등과 불이익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인가 했는데, 꼭 그건 아닌 것 같고 (다행히 그런 문제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다. 같은 학교 출신, 그러니까 나에게는 동문이 되는 이와의 소개팅 담을 늘어놓는 경우는 더러 있었어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모종의 특권의식을 경계하는 태도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굳이 학벌 사회에 대한 저항의 표시인 것 같지도 않다. 그보다는, 내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 자체(이건 내가 그 학교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가 나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그리 많지는 않고, 더욱이 그 학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관념이 나에 대한 그릇된 인상(그 유명한 "ㅇ대 나온 여자"!)을 심지 않을까, 혹은 나 스스로가 그 인상을 재확인하는 사례로 추가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 해두자. 어느 쪽이든 나와 큰 상관은 없지만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정체성 확인 및 구별 짓기 전략, 그리고 너무 안일하고 상투적인 유형학적이고 분류학적 사유에 대한 저항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류학적 사유의 경우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그러한 사유에 사용되는 범주에서의 상상력의 부족이 문제다. 이러한 나의 정서 태도는 이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끊임없이 국적/출신을 환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더구나 여기에서 "출신"은 곧 근본(origine)이 아닌가. 사실 국적에 대한 정보가 나에 대한 편견으로 직결되기에는 내 출신 국가라는 것이 이네들에게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대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차피 편견은 국적에 대한 정보 습득 이전에 이미, 그리고 히잡이나 키파 같은 종교적 상징으로 애써 가시화 수단을 쓰지 않더라도, 외양이나 이름을 통해 동양인, 게다가 여성, 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이미 결정되는 사태. 나는 그렇게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판단 기제, 그 속에서 작동하는 상징 권력의 기제가 거북한 것이다. 물론 그런 모든 부문에서 판단중지를 하고 순수히 개별자 대 개별자로 만나기란 쉽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한 일. 그 개별자란 것도 결국 결코 단적으로 독립된 존재일 수 없고, 어느 종류든 집단의 구성원이거늘.

물론 그런 인상비평 하나하나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나아가 상호 피상적 인식을 벗어나 나를 알리고 너를 알고 어슴푸레한 너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서로의 편견을 교정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내가 그럴 만한 의지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된 데에 있다. 단순히 (그러잖아도 부족했던) 사교능력의 퇴화 때문만은 아니고, 그 기저에는 사실 자존감 상실이 있을진대. 스스로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각. 겉으로 드러나는 바 이상의 심오하고 본질적인 이면, 말하자면 나의 본질--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사르트르는 그런 것 없다고 했다--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졌고, 그래서 더더욱 나를 알리는 게 두려워졌단 얘기다.  

"물리학과 나왔으면 해밀토니안이랑 라그랑지안 알겠네." 이것이 물리학과 출신 불문학도가 내게 한 말이다. 덕분에 나는, 처음에 던진 미숙하고 무례하고 어찌 보면 불온한 첫 질문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중에, 어느 정도나마 긴장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의도했고 심지어 의식했는지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그분은 사소한 듯 던진 한마디로 선행을 베푼 것이다. 내가 어찌 반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척 고맙고 미안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그래서 해밀토니안이 나오면 그분 생각이 나곤 한다.

그런데 해밀토니안과 라그랑지안? 라그랑주는 라그랑주 방정식의 바로 그 라그랑주다. 뉴턴역학을 해석(解析)적으로 해석(解釋)한 해석역학을 정립, 고전역학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인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동등한 또 하나의 해석역학 체계를 마련한 것이 해밀턴. 이들이 만든 연산자, 해밀토니안과 라그랑지안은 각각 운동에너지와 포텐셜에너지의 합(H=T+V)과 차이(L=T-V)으로 정의된다. 일종의 보존량. 한 역학계가 시간에 따라 어떤 변화를 갖든지 간에 이 양은 보존된다. 고전역학계에서 해밀토니안은 계의 에너지 총량과 일치하고, 따라서 우리가 중학교 때 배웠던바,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과 등가가 된다.

일반역학 강의에서 배운 기억은 난다. 내가 물리학과에서 배운 것은 대개 그런 식이다.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현재 전혀 무관하지 않은 주제로 공부하는 까닭에 직간적접으로 도움이 되는 바 없지 않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파편화되어 있고 무엇보다 이해가 수반되지 않아 무용한 것들이 대부분. 그래서 실질적 도움보다는 오히려 주로 학부 때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회한이라는 부수 효과 혹은 역효과만 양산할 뿐. 그래도, 당시 부족했던 이해를 보완하고 "아,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 인가, 과연? 어째 모든 일에서 이렇게 일관적으로 뒤늦단 말인가. 계단 이해. 계단 답변. 계단 논문. 계단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