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9일 일요일

역사가를 향한 고다르 옹의 일침

blogin.com · 2012-09-09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texte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mot dans un texte
Nous n'avions que du livre, à mettre dans du livre
Que serait-ce, quand il faut, dans un livre, dans du livre, mettre de la réalité ?
Et, au deuxième degré, quand il faut, dans la réalité, mettre de la réalité ?

Qu'arrive-t-il toujours, mon ami ?
Le soir tombe, les vacances finissent
Il me faut une jour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seconde
Il me faut une an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minute
Il me faut une vie pour faire l'histoire d'une heure
Il me faut une éternité pour faire l'histoire d'un jour
On peut tout faire excepté l'histoire de ce que l'on fait

한 편의 글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한 편의 글 안의 한 마디 말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우리에겐 단지 책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책 안의 책, 책들의 책들, 책 안에 담을 책들만이
한 권의 책에, 책들 안에 실재를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 번째 단계로서, 실재를 실재 안에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친구여, 반드시 일어나고 마는 일은 무엇인가?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나게 마련이다
1초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하루가
1분의 역사는 1년이 필요하며
한 시간의 역사에는 한 생애가
단 하루의 역사를 위해서는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역사를 쓰는 일을 제외한다면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일침이라기보단...

사실, 자기 반성에 가깝다 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직접 하나의 역사 서술을 시도(아니, 차라리 기도?)한 경험을 토대로 한 통찰이기도 하고. 이 시도란 물론 영화의 역사(들)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가리킨다. 영국에서 출시된 디븨디를 구해서 가끔 들여다 보는데 (고도의 소장가치를 지닌 대표적인 경우다. 전에도 얘기했듯, 보부르에서 연속상영 할 때 몇 번 가서 보고, 축소판으로도 봤으며, 심지어 나중에 고다르가 책으로 편집해서 낸 판본도 봤지만, 디븨디 버전으로 봤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 작품의 진가를 확인하고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원래 극장이 아니라 텔레비전 상영을 위해 6부작인가로 만들어지기도 했었고. 근데, 그러고 보니 하품이 생각나네. 잘 살고 있나? 다음에 보면 이 디븨디를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볼 때마다 찬탄하고 또 숙연해진다. 그런 한편으로, 참으로, 불경하고 발칙하게도, 모종의 동병상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직업 역사가가 아니면서 역사를 쓰겠다고 애쓴 흔적이 보이는 듯해서. 영화는 또 얼마나 돌려봤고, 음악은 또 얼마나 찾아 들었으며, 그림들은 또 얼마나 들여다 봤을까. 그 방대한 "사료"들을 놓고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대해 또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까. 그 고민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만큼은 전문 역사가 못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책까지. 워낙 박학다식하고 굉장한 독서가인 거야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지만, 영화의 역사(들)에서는, 직업 영화사가나 영화학자들의 기존의 영화사 서술, 나아가 역사학 일반에 뭔가 경종을 울리기라도 하듯, 역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출간한 책에 실린 비블리오그래피에 의하면 수학사까지 읽었다 (작품 중, 고다르는 매체로서의 영화의 선구자-개척자에 속하는 인물로 고다르는 기하학자 가스파르 몽주를 꼽으며 그에게 르네상스 원근법의 창시자들에 걸맞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몽주가 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투옥 상태에서 발명한 사영기하학 géométrie projective, 이것이 현실-실재의 투영projection을 본질로 하는 영화의 기원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요지였던 듯. 다시 보고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이 결과물을 또 자신의 고유한 몽타주 이론에 걸맞게 드러러내도록 또 얼마나 오리고 붙이기는 또 얼만큼 반복했을 것인가 (내가 요새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과물은 물론 몽타주의 거장의 이름값에 전혀 손색이 없다 (위의 두 샷은 절묘한 몽타주 기법의 실례를 보여준다. 앞의 것은 한 만화에서 따온 장면인 듯한데, 이것을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겹쳐놓을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그리고 장대하다. 말이 영화사지 사실 인류보편사라 해도 좋을.

그런데 그러고서 내린 결론이, 결국, 역사 서술의 불가능성이다. 최소한 "우리가 하는 일"에 한에서는.

역사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 역사가뿐이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그것이 고다르에게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영화-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이었겠다)에 대해서 시간과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런데 그 한계를 가장 잘 알고 또 뼈저리 느끼면서도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게 또 인간의 숙명 아닌가 (칸트, 순수이성비판 서문). 역사가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완벽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다. 그래도 가능한 모든 방법과 능력과 사고를 총동원해서 끝까지 가본 뒤, 그 뒤에는, 오직 그 뒤에만 비로소, 깨끗이 한계를 인정하고 체념해야 한다 (블로크, 역사가를 위한 변명). 고다르는 어쩜 바로 그 체념의 단계에서 말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쉽게 다다른 단계는 아닐 것이다.

요 사이,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난다"라는 구절이 자꾸 귓가를 맴돈다. 작중 이 대목을 낭송하는, 나직하고 침착한 여배우 (누굴까? 나는 베르나데트 라퐁을 의심하고 있다)의 바로 그 목소리로. 이건 전적으로 현재의 내 특수한 상황 때문이겠다. 저녁이 오고, 바캉스에서 사람들이 돌아오는 중, 어느새 여름을 훌쩍 보낸 시간이 원망스럽기만 한. 그런데, 바로, 그 상황 때문에, 역사 재현의 불가능성 테제에 복무하려는, 그러니까 너무도 쉽게 체념의 단계로 넘어가려는 유혹도 생긴다. 그러고보니 일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역사가도 아닌 주제에.

—박쥐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Mary Cassatt au Louvre

blogin.com · 2012-08-29

... par Edgar Degas (ca. 1880)



난 이 버전이 더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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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페레(Féret)라는 프랑스 감독의 마담 솔라리오를 보고는 문득, 그때 그 시절, 벨에포크 생각이 나서.
그런데 실은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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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베르트 모리조, 정확하게는 마네가 1872년에 그린 모리조였다. 여배우가 모리조를 너무 닮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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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렁치렁한 갈색머리에, 새하얀 얼굴에, 깊은 눈동자에, 호리호리하면서도 적당히 육감적인 몸매에.. 그렇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벨에포크적인 외모라 생각했다. 부족한 연기력-거의 국어책 읽는 수준-을 보완한, 아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연기라고 봐도 좋았던, 배경과 역할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미모. "그녀는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라는 문장에 완벽히 어울리는.

그런데, 아뿔싸, 감독의 딸래미였다지. 그래도, 최소한 외양 면에서는, 그다지 편파적인 선택은 아니었다고 해주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극중 마담 솔라리오는, 비록 친아비는 아니긴 하나, 어쨌든 의붓아버지인 사람의 폭력에 희생되고, 그로 인해 온갖 가족사적 개인사적 비극을 겪지 않는가. 게다가 친동생과... 코폴라 부녀는 건설적이기라도 하지, 이 부녀관계는 좀 걱정된다. 작가-여배우도 참 복잡한 관계도식이거늘.

—박쥐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Hommage, quand même

blogin.com · 2012-07-17



과학사, 철학사, 아니 한 사상가와 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연구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각각을 내재론과 외재론으로 부르자. 내재론은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유일한 것은 오직 그가 남긴 텍스트 뿐이며, 전기적 요소는 불필요하거나 기껏해야 부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강의의 초두를 "옛날에 아리스토텔레스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인물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그가 남긴 텍스트에 집중하자"라는 말로 연 바 있다.

전혀 맥락은 다르지만, 지금의 이 구분법을 따른다면, 구조주의나 바슐라르의 비평이나 푸코의 고고학 기획도 이에 속한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로트레아몽 에서, 로트레아몽이 한때 수학에 취미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소한 전기적 사실을 작품 분석에 반영하려는 일부 주석가들을 거의 조롱조로 비판한 바 있다. 이는, "작품"이 됐든 "책"이 됐든 텍스트가 담은 모든 의미의 담지체이나 수렴점으로서 하나의 "저자"를 상정하고, 모든 의미 분석을 저자의 "의도"와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에 대한 그것으로 환원하는, 전기적 비평에서부터 정신분석 비평에 이르는 방법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분석의 대상이자 수단으로 남는 것은 텍스트 뿐이요, 진정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각각, 구조주의와 바슐라르의 경우,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여 나타난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어떤 공통의 지반(구조 혹은 근원적 이미지)이, 푸코의 경우, 특정한 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 나타난 텍스트들이 구성하는 "담론의 장", 그리고 그로부터 하나의 지식의 구축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된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중에서 "누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

외재론은 바로 그 "누구"를 묻는다. 그 어느 텍스트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남긴 것인만큼 그 저자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고, 또 어느 저자고 그의 개인사에서부터 역사적이고 시대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에서야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입장. 저자가 누구이고, 어느 시대에 나서 어떻게 살았고, 누구에게 배웠고, 누구를 가르쳤고,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묻자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를 좀더 철학사적으로, 혹은 사상사적으로 연구하려면, 그의 사상적 배경(이를테면 당시의 지적 환경, 보다 직접적으로는 스승 플라톤의 영향)이나 심지어 개인의 출신 배경과 사회경제적 입지, 나아가 아테네 사회의 물적 토대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사를 철학사로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존재망각의 역사"로 보는 등의 독창적인 해석,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을 정립하거나 그 수단으로 삼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

여기까지 쓰고 보니 벌써부터 자신이 없다. 특히 구조주의나 바슐라르 문예이론,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 저렇게 써놔도 되나 싶고. 외재론과 내재론이 적절한 명명인지도 의심스럽고. 과학을 순수하고 무사심한 지적 활동으로 보는 내재론과, 과학 역시 인간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활동으로 보는 외재론으로 나누는 과학사에서의 일반적 구분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 일단 나부터 헷갈린다.

그래도 일단은 용기를 내어 말해 보자. 그 동안 너무 말을 안 하고 살았다. 이제는 말할 때도 되었다. 아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시인의 말을 빌어, 아니 시인을 인용한 철학자의 말을 빌어서라도 : "말하라, 그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을지니. 일단 가 닿아라. 다가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러니." (앙리 미쇼. 바슐라르의 응용 합리론 에서 재인용)

원래 이 글은...


푸앵카레 기일에 쓴 글이다. 더 정확하게는,

쥘 앙리 푸앵카레 (Jules Henri Poincaré).
프랑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854년 4월 29일 낭시에서 태어나 1912년 7월 17일 파리에서 죽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그의 텍스트에 집중하는 일 뿐...


이라는 말을 일종의 석문(아니, 차라리 비문?)으로 삼아, "내재론"의 입장을 취한 뒤 그 입장에 의거한 분석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담기 위해 썼던 글. 그런데 그 이후 1개월도 더 넘은 지금-8월 말-의 시점에서 보건대 아직까지도 외재론적 접근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글을 보다 보면 글쓴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인지상정이겠고, 그리고 외재론이라 해서 내재론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적합한 맥락들이 제대로 참조되는 경우 텍스트에 대한 이해에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날 자꾸 붙잡는 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사실들. 잘만 하면 긴즈부르그식 미시사를 과학사에 응용한 꽤 참신한 사례로 기록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오, 너무 부족하다.

그렇게 미소한 단서들의 늪에서 헤매고 헤매다가 지쳐 텍스트로 돌아갔을 때의 그 익숙함과 안도감. 그리하여 한동안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그러다가는 또 이내 지겨워지고, 다시 텍스트 바깥 세상이 궁금해지고, 그 세상에서 새로운 사실을 이래저래 조합해 가설을 세우는 탐정놀이가 그리워지고, 그래서 다시 한 눈 팔고. 그러기를 벌써... 몇 년째. 이제는 멈춰야 한다.

—박쥐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blogin.com ·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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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소쿠로프였는데, 보는 내내 아찔하고 중간 중간에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작품 자체가 원작도 그렇지만 뭔가 걸출하고 거창한 것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고, 스타일도 그의 스승 타르코프스키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광했던 기억이 없는데, 모든 취미와 맥락과 무지한 관객 특유의 치기와 자격지심 등등을 넘어, 대가란, 대작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심지어 무릎 꿇게 만드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 있더란 말이다.   

영화 속 장면들을 찾아보다 건진 포스터들 (프랑스판은 제외했다. 요샌 어째 프랑스 배급사들이 포스터에 예전만큼 공들이지 않는 것 같다. Encore un effort, distributeurs français !). 결말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면 (영화가 선형적이거나 인과 관계 분명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구사하는 것도 아닌 만큼 더더욱),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메세지를 원작 파우스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에서 찾는 것도 가능하다 :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후반부 무렵에 등장하는 마르게레테의 클로즈업이다. 위의 맨 마지막 포스터가 바로 이 샷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클로즈업으로 기록되어도 좋을 이 샷의 공은, 물론 감독과 촬영감독에게도 있지만, 무엇보다 베르메르 그림에서 뚝 떼다놓은 듯한 외모의 저 여배우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 생각이다.

포스터 열전의 기세를 몰아, 또 하나의 인상적인 최근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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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걸린 커다란 포스터를 보는데 참 예쁘더라. 송선미도 예쁘고. 초점이 김상중에게 맞추어진 버전도 지나가다 언뜻 본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두 인물 다 큰 비중이 있지 않고, 또, 뭐랄까, 겉돌거나 소외된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 포스터가 보상하는 듯해서 또 좋았다.

—박쥐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오랜 만에, 책읽는 여인상

blogin.com · 2012-06-10


조엘 피터 위트킨의 2011년 作. 이 사람의 회고전이 파리 국립도서관의 리슐리외 분관에서 3월부터 열리고 있다. 7월까지. 국립도서관 소식지에 실린 이 작품이 맘에 꽤나 들어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 중. 그렇게 생각만 하다 놓친 전시가 올해 들어서만 벌써 몇 개째 되지만. 그리고 짧고 부족하게나마 감상도 써보리라. 하이브리드를 키워드로 해서. 이렇게 생각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않은 계획이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면 화질이 좀더 좋은 사본을 다시 올려 보리라던 약속은 그래도 어떻게 지켰네. 사진은 위트킨의 또 다른 전시가 열린 ' target='_son'>http://www.baudoin-lebon.co ... 7/joel-peter-witkin> 갈레리 보두앙 르봉 에서.

' target='_son'>http://estampe.hypotheses.org/387> 여기 에 가면 더 좋은 사진 열람 가능. 판화 전문 블로그라 그런지 웹에 올린 사진인데도 확실히 질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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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제목은 Interrupted Reading. 1999년 작.

흠. 요샌 어째 노쇠한 육체에 자꾸 눈이 가고,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돈다.

문득 든 생각 (어휘 및 개념 사용에 문제가 있으나 양해를). 위트킨의 작품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한다 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사진이나 판화임을 감안하면 의외다. 그의 작업이 사진이든 판화든 단순히 "찍어내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판화는, 시대가 기술적 복제를 허용하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복제를 본성, 최소한 매체/매질 차원의 본질적 요소로 가져 오지 않았는가. 장르를 막론하고, 기술 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작품, 그러니까 "원본" 제작에 있어서 복제 기술에 대한 의존도마저도 나날이 높아져 가는 이 시대에, 오로지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하는 판화. 하이브리드보다 이 지점을 좀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듯.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