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moiselle la Presidente

blogin.com · 2012-12-21

어제, 박근혜가 한국의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몇 주 전, 마야 달력에 따라 실제로 21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면, 그 서막(혹은 그 원인 중 하나?)은 박근혜의 당선이 되리라는 얘길 들었는데, 일단 후자는 실현됐고, 전자가 실현될 지는 두고 볼 일. 그래봤자 하루 남았지만. 문제는, 세계가 내일 종말하지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 앞으로의 5년, 그리고 그 이후다.

나는 정당 정치와 선거 중심 정치에 반감이 있다. 모든 정치적 활동과 의식과 관심이 선거에 집중되는 데에 반대한다. 그것이 좀더 직접적이고 국소적인 영역으로 분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수많은 전제가 따를 것이다. 일단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가 확립되어야 하고, 나아가 대통령과 중앙 정부의 권력이 축소되고, 다른 군소 정치체들, 이를테면 지방 자치 단체나 노조나 NGO 등등으로 분배될 필요가 있겠다. 왕정제나 1인 독재나 그 밖의 권위주의 체제에서 직접 민주주의로의 이행에는 반드시, 최소한 역사적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역사적 필연), "혁명"이 따라야 했지만, 일단 형식적 민주주의가 갖춰진 다음에는, 변화는 급진적이지 않고 점진적으로, 대대적이지 않고 소소하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정치적 신념이라면 신념이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투표란 걸 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 추이를 지켜봤다. 이왕 신념을 저버리고(!) 투표를 할 바에야 좀더 의미 있는 권리 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지 후보는 일찌감치 정해 놓긴 했지만,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책만 놓고 본다면, 군사나 대북 정책 등등을 제외한다면,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실질적 차이는 후보의 인물과 소속 정당과 선본에 있는 듯했다. 내가 지지한 후보는 개개인만 놓고 보면 훌륭한 듯했다. 특히, 나로서는, 권력가형 리더보다는 행정관료 스타일이란 점이 맘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선본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이는 지난 총선 때부터 어느 정도 감지되던 바였다. 한 이주자 여성을 비례 대표 후보로 내세운 것은 내게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쪽에서, 비록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그 "진정성"은 의심해 볼만할 지언정, 최소한 변화하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동안, 이쪽에서는, 진보당 사태에서도 보듯, 구태의연한 진영 논리와 패권 다툼에 여념이 없지 않았는가. 이번 대선에서는 또 어땠는가. 현정권이 실정도 많이 하고 때로는 반민주적 행태까지 보인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타당하며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는 이쪽으로의 "정권 교체"에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 저쪽이 아닌 이쪽으로 교체돼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는 왜 이쪽이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저쪽이면 안 되는지를 주장하기에 급급했다. 저쪽이면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 또한 불충분했다.

그 근거 중 하나는 그녀가 독재자, 게다가 친일파 혐의까지 있는 자의 딸이라는 것. 나는 이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출신 배경과 전적이 그(녀)의 현재, 나아가 미래에 관해 설명해 주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가 전자에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게 부모가 행한 과거사의 책임을 묻는 것은 과거 독재 시대의 연좌제 논리가 아니었던가? 언젠가 유시민이 말했듯, 그녀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독재 시대에 대한 향수에 호소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이용했음을 지적했어야 했다. 전자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후자는 그녀의 정치적 선택이고, 잘못된 선택이며, 그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함을. 나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재로의 회귀를 꿈꾸며 박근혜를 지지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만약 그것이 실제로 지지 근거로 작용했다면, 이에 대한 반박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백 번 양보해서 경제 성장이 박정희의 "업적"이라 한다면, 이 업적은 박근혜의 것이 아니다, 부전녀전은 유비 추리의 오류다, 등등.

어쨌든 박근혜에게는 분명 프로필상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반면 문재인은 전력으로는 박근혜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위에 있었다. 민주화 투사, 인권 변호사 등등. 그러나 약점을 보상할 만한 무언가가 박근혜에겐 있었다면, 바로 그 무언가가 문재인에게는 결핍되어 있었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승패를 가른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한다.

그 무언가란 우선 반성과 변화에의 의지다. 보수 진영이 이 지점에서 일정한 진화를 보여주었다면, 오히려 진보 진영에서는 관성적이고 반성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저쪽에서는 하다 못해 반북 논리를 펴더라도 예의 색깔론이 아니라 북한의 인권을 문제 삼는 식으로 세련화하고 정교화해 가고 있는 마당에, 이쪽에서는 과거 독재와 냉전 시대의 투쟁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현실은 분명 변했는데, 저쪽에서는 변화를 인정하고 그에 맞게 전략을 수정 변경했는데, 80년대까지의 민주화 운동으로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장본인인 이쪽에서는 정작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원한 감정(ressentiment : 예전 니체 한역판에서는 "복수심"이라 번역)에 호소하는 등 과거에 갇혀 있는 모양새다. 이는 진정성(사실 진정성의 여부는 사실상 관념성과 추상성을 벗어나기 힘들거나 잘못된 문제 제기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상의 문제다. 상대방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의식 부족과 권력형 비리를 지적하고, 또 필요한 경우, 관권의 선거 개입 의혹을 제기하는 일은 물론 필요하지만, 전략의 무게 중심이 여기에 실리면 곤란하다. 이는 진정성이나 윤리적 정당성을 넘어 전략으로서 더 이상 효율적이지도, 심지어 유효하지도 않다.

패인 분석도 분석이지만, 원인보다는 결과에 대한 좀더 생산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나아가 앞으로 박근혜 정부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좀더 적극적으로, 박근혜 정부하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녀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주의적, 하다못해 여성친화적 정책을 추진할 거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독재자 딸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갖는 상징성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더구나 진영을 막론하고 여성의 대표성이 지극히 미미한 정치계에서, 마드모아젤 라 프레지덩트, 미스 프레지던트로 불릴 인물이 배출된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그녀는 퍼스트 레이디에서 대통령으로 지위를 변경함으로써 확실히 정치(인)의 표상 체계에 균열을 냈다.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러한 변화가 이미 감지되긴 했다. 대통령 후보의 여성 비율이 전례없이 높았던 것에서부터, 막판 3자 토론에서는 오히려 남성:여성의 비율이 역전되기까지. 이어 박근혜의 당선은, 그녀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성향을 떠나서, 최소한, 표상 체계의 변화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상징적 효과에서만큼은 오바마의 당선과 견줄 법하다.

"군미필자"인데다가 독신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프로필상의 또 하나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을, 그 수많은 "네거티브" 공방 속에서 이 점이 부각되지 않은 것은, 꽤나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출신 배경의 "휘광"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성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이것이 어쩌면 오히려 당선 요인 중 하나일 수도), 전형적 여성상과도, 전여옥이나 나경원 등 기존 여성 정치인과도 차별화된 그녀 고유의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무성적이거나 혹은 양성적인 이미지. 그녀는 성적 매력이라는 잣대로 판단될 범주에서 아예 제외된 할머니급 "아줌마"인 동시에, 아버지의 권위와 모성애를 한 몸에 지녔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이미지를 구축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엘리자베스 1세나 심지어 블러디 메리 같은 "여왕" 이미지로 갈 우려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나, 그녀로 말미암아 어쨌든 "대통령의 몸"이라는 표상이 더 이상 예전 같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비가 내린다. 내리는 비를 보며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을 상기하던 알튀세를 떠올린다. 평행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빗줄기 가운데 미세하게나마 엇나가는 줄기들이 있고, 거기에서 만남이 생겨난다. 역사의 변화는 거기에서 온다. 박근혜의 당선도 그렇게 줄기가 빗겨나면서 생긴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설사 그것이 역사를 "후퇴"하게 하는 "반동"적인 것이라 해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유일한 엇나감의 사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무수한 사건들을 통해 이 사건도 달리 해석되고 또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남은 일은 바로 그 무수한 미소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일.

—박쥐

9월 13일 맞이

blogin.com · 2012-09-13

비 내리는 새벽
오늘 생일을 맞는 너를 생각한다

비가 이렇게 내리고
새벽이 오는 동안
아직 거기에 그대로 있다면
이미 맞았겠고
마지막으로 본 그곳에 있다면
아직이겠지
내 마음 속의 너는
이제 겨우 맞았고
여전히 맞고 있지만

너는 생일을 맞고
나는 너를 맞는다

빗줄기를 타고
멀리 이곳까지 온 너를
반가이 맞는다
흠뻑 맞는다

—박쥐

역사가를 향한 고다르 옹의 일침

blogin.com · 2012-09-09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texte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mot dans un texte
Nous n'avions que du livre, à mettre dans du livre
Que serait-ce, quand il faut, dans un livre, dans du livre, mettre de la réalité ?
Et, au deuxième degré, quand il faut, dans la réalité, mettre de la réalité ?

Qu'arrive-t-il toujours, mon ami ?
Le soir tombe, les vacances finissent
Il me faut une jour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seconde
Il me faut une an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minute
Il me faut une vie pour faire l'histoire d'une heure
Il me faut une éternité pour faire l'histoire d'un jour
On peut tout faire excepté l'histoire de ce que l'on fait

한 편의 글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한 편의 글 안의 한 마디 말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우리에겐 단지 책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책 안의 책, 책들의 책들, 책 안에 담을 책들만이
한 권의 책에, 책들 안에 실재를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 번째 단계로서, 실재를 실재 안에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친구여, 반드시 일어나고 마는 일은 무엇인가?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나게 마련이다
1초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하루가
1분의 역사는 1년이 필요하며
한 시간의 역사에는 한 생애가
단 하루의 역사를 위해서는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역사를 쓰는 일을 제외한다면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일침이라기보단...

사실, 자기 반성에 가깝다 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직접 하나의 역사 서술을 시도(아니, 차라리 기도?)한 경험을 토대로 한 통찰이기도 하고. 이 시도란 물론 영화의 역사(들)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가리킨다. 영국에서 출시된 디븨디를 구해서 가끔 들여다 보는데 (고도의 소장가치를 지닌 대표적인 경우다. 전에도 얘기했듯, 보부르에서 연속상영 할 때 몇 번 가서 보고, 축소판으로도 봤으며, 심지어 나중에 고다르가 책으로 편집해서 낸 판본도 봤지만, 디븨디 버전으로 봤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 작품의 진가를 확인하고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원래 극장이 아니라 텔레비전 상영을 위해 6부작인가로 만들어지기도 했었고. 근데, 그러고 보니 하품이 생각나네. 잘 살고 있나? 다음에 보면 이 디븨디를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볼 때마다 찬탄하고 또 숙연해진다. 그런 한편으로, 참으로, 불경하고 발칙하게도, 모종의 동병상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직업 역사가가 아니면서 역사를 쓰겠다고 애쓴 흔적이 보이는 듯해서. 영화는 또 얼마나 돌려봤고, 음악은 또 얼마나 찾아 들었으며, 그림들은 또 얼마나 들여다 봤을까. 그 방대한 "사료"들을 놓고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대해 또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까. 그 고민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만큼은 전문 역사가 못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책까지. 워낙 박학다식하고 굉장한 독서가인 거야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지만, 영화의 역사(들)에서는, 직업 영화사가나 영화학자들의 기존의 영화사 서술, 나아가 역사학 일반에 뭔가 경종을 울리기라도 하듯, 역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출간한 책에 실린 비블리오그래피에 의하면 수학사까지 읽었다 (작품 중, 고다르는 매체로서의 영화의 선구자-개척자에 속하는 인물로 고다르는 기하학자 가스파르 몽주를 꼽으며 그에게 르네상스 원근법의 창시자들에 걸맞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몽주가 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투옥 상태에서 발명한 사영기하학 géométrie projective, 이것이 현실-실재의 투영projection을 본질로 하는 영화의 기원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요지였던 듯. 다시 보고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이 결과물을 또 자신의 고유한 몽타주 이론에 걸맞게 드러러내도록 또 얼마나 오리고 붙이기는 또 얼만큼 반복했을 것인가 (내가 요새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과물은 물론 몽타주의 거장의 이름값에 전혀 손색이 없다 (위의 두 샷은 절묘한 몽타주 기법의 실례를 보여준다. 앞의 것은 한 만화에서 따온 장면인 듯한데, 이것을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겹쳐놓을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그리고 장대하다. 말이 영화사지 사실 인류보편사라 해도 좋을.

그런데 그러고서 내린 결론이, 결국, 역사 서술의 불가능성이다. 최소한 "우리가 하는 일"에 한에서는.

역사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 역사가뿐이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그것이 고다르에게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영화-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이었겠다)에 대해서 시간과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런데 그 한계를 가장 잘 알고 또 뼈저리 느끼면서도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게 또 인간의 숙명 아닌가 (칸트, 순수이성비판 서문). 역사가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완벽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다. 그래도 가능한 모든 방법과 능력과 사고를 총동원해서 끝까지 가본 뒤, 그 뒤에는, 오직 그 뒤에만 비로소, 깨끗이 한계를 인정하고 체념해야 한다 (블로크, 역사가를 위한 변명). 고다르는 어쩜 바로 그 체념의 단계에서 말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쉽게 다다른 단계는 아닐 것이다.

요 사이,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난다"라는 구절이 자꾸 귓가를 맴돈다. 작중 이 대목을 낭송하는, 나직하고 침착한 여배우 (누굴까? 나는 베르나데트 라퐁을 의심하고 있다)의 바로 그 목소리로. 이건 전적으로 현재의 내 특수한 상황 때문이겠다. 저녁이 오고, 바캉스에서 사람들이 돌아오는 중, 어느새 여름을 훌쩍 보낸 시간이 원망스럽기만 한. 그런데, 바로, 그 상황 때문에, 역사 재현의 불가능성 테제에 복무하려는, 그러니까 너무도 쉽게 체념의 단계로 넘어가려는 유혹도 생긴다. 그러고보니 일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역사가도 아닌 주제에.

—박쥐

Mary Cassatt au Louvre

blogin.com · 2012-08-29

... par Edgar Degas (ca. 1880)



난 이 버전이 더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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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페레(Féret)라는 프랑스 감독의 마담 솔라리오를 보고는 문득, 그때 그 시절, 벨에포크 생각이 나서.
그런데 실은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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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베르트 모리조, 정확하게는 마네가 1872년에 그린 모리조였다. 여배우가 모리조를 너무 닮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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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렁치렁한 갈색머리에, 새하얀 얼굴에, 깊은 눈동자에, 호리호리하면서도 적당히 육감적인 몸매에.. 그렇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벨에포크적인 외모라 생각했다. 부족한 연기력-거의 국어책 읽는 수준-을 보완한, 아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연기라고 봐도 좋았던, 배경과 역할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미모. "그녀는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라는 문장에 완벽히 어울리는.

그런데, 아뿔싸, 감독의 딸래미였다지. 그래도, 최소한 외양 면에서는, 그다지 편파적인 선택은 아니었다고 해주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극중 마담 솔라리오는, 비록 친아비는 아니긴 하나, 어쨌든 의붓아버지인 사람의 폭력에 희생되고, 그로 인해 온갖 가족사적 개인사적 비극을 겪지 않는가. 게다가 친동생과... 코폴라 부녀는 건설적이기라도 하지, 이 부녀관계는 좀 걱정된다. 작가-여배우도 참 복잡한 관계도식이거늘.

—박쥐

Hommage, quand même

blogin.com · 2012-07-17



과학사, 철학사, 아니 한 사상가와 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연구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각각을 내재론과 외재론으로 부르자. 내재론은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유일한 것은 오직 그가 남긴 텍스트 뿐이며, 전기적 요소는 불필요하거나 기껏해야 부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강의의 초두를 "옛날에 아리스토텔레스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인물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그가 남긴 텍스트에 집중하자"라는 말로 연 바 있다.

전혀 맥락은 다르지만, 지금의 이 구분법을 따른다면, 구조주의나 바슐라르의 비평이나 푸코의 고고학 기획도 이에 속한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슐라르는 로트레아몽 에서, 로트레아몽이 한때 수학에 취미를 가진 적이 있다는 사소한 전기적 사실을 작품 분석에 반영하려는 일부 주석가들을 거의 조롱조로 비판한 바 있다. 이는, "작품"이 됐든 "책"이 됐든 텍스트가 담은 모든 의미의 담지체이나 수렴점으로서 하나의 "저자"를 상정하고, 모든 의미 분석을 저자의 "의도"와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에 대한 그것으로 환원하는, 전기적 비평에서부터 정신분석 비평에 이르는 방법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분석의 대상이자 수단으로 남는 것은 텍스트 뿐이요, 진정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각각, 구조주의와 바슐라르의 경우,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여 나타난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어떤 공통의 지반(구조 혹은 근원적 이미지)이, 푸코의 경우, 특정한 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 나타난 텍스트들이 구성하는 "담론의 장", 그리고 그로부터 하나의 지식의 구축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된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중에서 "누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

외재론은 바로 그 "누구"를 묻는다. 그 어느 텍스트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남긴 것인만큼 그 저자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고, 또 어느 저자고 그의 개인사에서부터 역사적이고 시대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에서야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입장. 저자가 누구이고, 어느 시대에 나서 어떻게 살았고, 누구에게 배웠고, 누구를 가르쳤고,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묻자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를 좀더 철학사적으로, 혹은 사상사적으로 연구하려면, 그의 사상적 배경(이를테면 당시의 지적 환경, 보다 직접적으로는 스승 플라톤의 영향)이나 심지어 개인의 출신 배경과 사회경제적 입지, 나아가 아테네 사회의 물적 토대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사를 철학사로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존재망각의 역사"로 보는 등의 독창적인 해석,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을 정립하거나 그 수단으로 삼지 않는 한에서는 말이다.

...

여기까지 쓰고 보니 벌써부터 자신이 없다. 특히 구조주의나 바슐라르 문예이론,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 저렇게 써놔도 되나 싶고. 외재론과 내재론이 적절한 명명인지도 의심스럽고. 과학을 순수하고 무사심한 지적 활동으로 보는 내재론과, 과학 역시 인간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활동으로 보는 외재론으로 나누는 과학사에서의 일반적 구분법을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 일단 나부터 헷갈린다.

그래도 일단은 용기를 내어 말해 보자. 그 동안 너무 말을 안 하고 살았다. 이제는 말할 때도 되었다. 아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시인의 말을 빌어, 아니 시인을 인용한 철학자의 말을 빌어서라도 : "말하라, 그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무지하지 않을지니. 일단 가 닿아라. 다가가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러니." (앙리 미쇼. 바슐라르의 응용 합리론 에서 재인용)

원래 이 글은...


푸앵카레 기일에 쓴 글이다. 더 정확하게는,

쥘 앙리 푸앵카레 (Jules Henri Poincaré).
프랑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854년 4월 29일 낭시에서 태어나 1912년 7월 17일 파리에서 죽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그의 텍스트에 집중하는 일 뿐...


이라는 말을 일종의 석문(아니, 차라리 비문?)으로 삼아, "내재론"의 입장을 취한 뒤 그 입장에 의거한 분석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담기 위해 썼던 글. 그런데 그 이후 1개월도 더 넘은 지금-8월 말-의 시점에서 보건대 아직까지도 외재론적 접근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글을 보다 보면 글쓴 사람이 누군지가 궁금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인지상정이겠고, 그리고 외재론이라 해서 내재론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적합한 맥락들이 제대로 참조되는 경우 텍스트에 대한 이해에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으나... 날 자꾸 붙잡는 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사실들. 잘만 하면 긴즈부르그식 미시사를 과학사에 응용한 꽤 참신한 사례로 기록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오, 너무 부족하다.

그렇게 미소한 단서들의 늪에서 헤매고 헤매다가 지쳐 텍스트로 돌아갔을 때의 그 익숙함과 안도감. 그리하여 한동안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행복감에 젖어 있다가, 그러다가는 또 이내 지겨워지고, 다시 텍스트 바깥 세상이 궁금해지고, 그 세상에서 새로운 사실을 이래저래 조합해 가설을 세우는 탐정놀이가 그리워지고, 그래서 다시 한 눈 팔고. 그러기를 벌써... 몇 년째. 이제는 멈춰야 한다.

—박쥐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blogin.com · 201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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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ilmofilia.com/w ... 2/Faust_poster_5.jpg width="450" height="640"/>

나의 첫 소쿠로프였는데, 보는 내내 아찔하고 중간 중간에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작품 자체가 원작도 그렇지만 뭔가 걸출하고 거창한 것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고, 스타일도 그의 스승 타르코프스키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광했던 기억이 없는데, 모든 취미와 맥락과 무지한 관객 특유의 치기와 자격지심 등등을 넘어, 대가란, 대작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심지어 무릎 꿇게 만드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 있더란 말이다.   

영화 속 장면들을 찾아보다 건진 포스터들 (프랑스판은 제외했다. 요샌 어째 프랑스 배급사들이 포스터에 예전만큼 공들이지 않는 것 같다. Encore un effort, distributeurs français !). 결말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면 (영화가 선형적이거나 인과 관계 분명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구사하는 것도 아닌 만큼 더더욱),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메세지를 원작 파우스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에서 찾는 것도 가능하다 :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후반부 무렵에 등장하는 마르게레테의 클로즈업이다. 위의 맨 마지막 포스터가 바로 이 샷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클로즈업으로 기록되어도 좋을 이 샷의 공은, 물론 감독과 촬영감독에게도 있지만, 무엇보다 베르메르 그림에서 뚝 떼다놓은 듯한 외모의 저 여배우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 생각이다.

포스터 열전의 기세를 몰아, 또 하나의 인상적인 최근작 포스터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 target='_son'>http://images.allocine.fr/r ... 20/53/20089569.jpg/>

영화관에 걸린 커다란 포스터를 보는데 참 예쁘더라. 송선미도 예쁘고. 초점이 김상중에게 맞추어진 버전도 지나가다 언뜻 본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두 인물 다 큰 비중이 있지 않고, 또, 뭐랄까, 겉돌거나 소외된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 포스터가 보상하는 듯해서 또 좋았다.

—박쥐

오랜 만에, 책읽는 여인상

blogin.com · 2012-06-10


조엘 피터 위트킨의 2011년 作. 이 사람의 회고전이 파리 국립도서관의 리슐리외 분관에서 3월부터 열리고 있다. 7월까지. 국립도서관 소식지에 실린 이 작품이 맘에 꽤나 들어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 중. 그렇게 생각만 하다 놓친 전시가 올해 들어서만 벌써 몇 개째 되지만. 그리고 짧고 부족하게나마 감상도 써보리라. 하이브리드를 키워드로 해서. 이렇게 생각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않은 계획이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면 화질이 좀더 좋은 사본을 다시 올려 보리라던 약속은 그래도 어떻게 지켰네. 사진은 위트킨의 또 다른 전시가 열린 ' target='_son'>http://www.baudoin-lebon.co ... 7/joel-peter-witkin> 갈레리 보두앙 르봉 에서.

' target='_son'>http://estampe.hypotheses.org/387> 여기 에 가면 더 좋은 사진 열람 가능. 판화 전문 블로그라 그런지 웹에 올린 사진인데도 확실히 질이 다르다.

more...

이 작품의 제목은 Interrupted Reading. 1999년 작.

흠. 요샌 어째 노쇠한 육체에 자꾸 눈이 가고,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돈다.

문득 든 생각 (어휘 및 개념 사용에 문제가 있으나 양해를). 위트킨의 작품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한다 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사진이나 판화임을 감안하면 의외다. 그의 작업이 사진이든 판화든 단순히 "찍어내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판화는, 시대가 기술적 복제를 허용하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복제를 본성, 최소한 매체/매질 차원의 본질적 요소로 가져 오지 않았는가. 장르를 막론하고, 기술 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작품, 그러니까 "원본" 제작에 있어서 복제 기술에 대한 의존도마저도 나날이 높아져 가는 이 시대에, 오로지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하는 판화. 하이브리드보다 이 지점을 좀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듯.

—박쥐

신발 몇 켤레

blogin.com · 2012-03-18

처음으로 올려보는 스마트폰 사진. 볕 좋았던 지난 3월 14일, 윌름 가 근처.

그러고 보니, 그날 푸앵카레 콜로크에서 다음과 같은 예가 언급됐다 :

"신발이 정수의 숫자에 해당하는 만큼의 켤레로 있다고 하자. 그리고 한 켤레에 하나씩, 1에서 무한대까지의 번호를 붙인다고 하자. 그럼 신발짝의 수는 몇 개가 되겠는가? 켤레의 수는 신발짝의 수와 같다고 봐야 하는가? 그렇다. 각 켤레에서 오른 짝과 왼 짝이 구별된다면. 이 경우, n 번째 켤레 중 오른 짝에는 번호 2n -1 을, n 번째 켤레의 왼 짝에는 번호 2n 을 붙이면 된다. 아니다. 오른 짝과 왼 짝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위의 방법이 불가능해지므로. 그러나 체르멜로의 [선택] 공리를 받아들이면 위와 같이 할 수 있다. 임의의 한 켤레에서 한 짝을 택하고 그것이 오른 짝이라고 간주하면 된다."

콜로크에서 발표자는 푸앵카레가 일상적이고 친근한 예시를 즐겨 썼음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했는데, 알고 보니 러셀이 체르멜로 공리의 난점을 지적하기 위해 든 예를 푸앵카레가 인용한 것이었다. 구글링해 보면 약간씩 다른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러셀 : 주인공으로 신발 수집 취미를 가진 백만장자가 등장, 신발에 맞춰 양말을 같은 개수로 구입하는데, 양말의 경우는 오른 짝과 왼 짝 구별이 없어... ;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 : 별난 취미를 가진 주인이 신발과 양말을 무한 개로 사들인 뒤 집사에게 각각의 개수를 세어 놓으라 명령...), 각각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을 듯.  

사실 이 예가 잘 이해가 안 되어서 몇 시간 째 계속 궁리하는 중.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문이겠다. 한편으로는 푸앵카레가 이를 이해하고 다시 전달하는 과정에서 뭔가 착각을 했던 것 같다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2n (신발 짝의 수)= n (켤레의 수) → 2∞ = ∞ 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박쥐

헐리웃 엔딩이 불가능한 시대

blogin.com · 2012-02-23

이른바 "로맨스 영화"(로맨틱 코미디, 멜로드라마, etc.)들이 가족 및 사랑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거나 (재)생산하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 이성애 중심의 가족 및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이 짝을 얻고 안정과 평화를 (되)찾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결말로 가는 플롯 구성이 기존 이 부류 영화들의 규칙 중 하나였다면, 요새 영화들은 관계에 대한 근본적 회의론을 전제하고 있다. 

편의상 "이 부류의 영화들"을 로맨스로 통칭하자. 로맨스는 부부의 생리학이든 연애론이든 간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고 앞으로도 뭔가 새로운 게 나올까 싶고, 새롭건 진부하건 간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을, 보편적이고 영원한 테마틱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장르"를 넘어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들에 어떤 하나의 범주와 그에 준하는 속성을 부여하기란 어렵고, 이런 범주화가 과연 유의미한지 또는 유효한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에스에프나 호러 같은 대표적인 "장르물"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이 장르야 이미 존재 이유에서부터 내적 기준에 이르기까지 그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고, 장르의 하위 개념으로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장르라는 개념 자체가 거기에서부터 나왔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로맨스" 부류는 같은 하나의 장르로 규정되기에는 너무 보편적이며 또 그 변주 또한 너무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어드저스트먼트 뷰로]나 [소스 코드] 같은 버젓한 에스에프 영화들도 로맨스 코드를 버젓하게 갖추고 있는 바, 이런 영화들까지 로맨스로 치자면 도대체 로맨스가 아닌 것이 있겠느냔 말이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크로넨버그의 [플라이]를 상영하는 극장 매표소 앞에서 너무 무섭지 않느냐며 주저하는 한 관객에게 직원이 '사랑 이야기'라며 안심시키는 것도 봤다.

이런 위험과 부담을 무릅쓰고, 대신 이러한 시도의 한계를 숙지한 채로, 일반화 논의를 밀고 나가보자. 

로맨스의 상당수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서 "그들은 아이를 많이 많이 낳고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 좀 더 나간다면 셰익스피어 희극이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기원을 둔, 소위 "로맨틱 코미디"이거나, 아니면, 두 주인공이 둘 다 죽거나 아니면 한 사람만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남겨진 채로 불행한 여생을 보내는 걸로 끝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혹은 [폭풍의 언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장미 혹은 신파가 넘치는 멜로 드라마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이 모든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 나아가 본질은, 두 영혼의 조합 혹은 합일 여부에 있었을 터다. 나머지는, 매우 거칠게 말해서, 부차적 요소나 극적인 장치에 불과했고.  



이 구도가 복잡해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아마도, 이른바 "근대적 주체"가 등장하고, 근대 산업화 및 도시화 이후로 이 주체가 더욱더 개인화되고 분자화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두 영혼의 합일 여부에 앞 각 영혼의 개별성과 특이성이 부각되고, 이들 앞에는 이제 "주체"로 거듭나고 자아(정체성)을 실현해야 할 과제가 놓이게 된다. "또 다른 반쪽"이나 "영혼의 쌍둥이", 즉 타자와의 조화나 합일은 더 이상 당위이거나 목표가 아니고, 기껏해야 이 과제를 실현키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러면서, 역으로, 타자와의 조화나 합일의 당위성을 지적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일이 지배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식 가족 및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다. 이제, (악인을 제외한)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안정과 평화와 행복을 찾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일정하고 규격화된 메세지-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신성하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등등-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2004년작인 [500일의 섬머]까지만 해도 그랬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는 "탐이 그 동안의 연애사에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우연들에 전 우주적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하고 끝을 맺으려다 "그러나..."를 덧붙인다. 탐이 또 다시, 저 보편적이고 냉엄한 진리를 거스르고,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소한 우연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 내레이터는 말을 잇지 못하고, 탐은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보낸다. 관객에게 자신이 받은 큐피드/우연의 여신의 가호를 관객에게 전수라도 할 기세다. 이렇듯, "사람은 결국 혼자다. 혼자인 것 맞는데..."하고 말꼬리를 흘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덧붙이고, 거기에 뭔가 더불어 사는 삶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이것이 로맨스의 논리 구조였다. 그 중 어떤 논증들은 진부하거나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어떤 결론들은 기만적이기까지 했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로맨스들은 이러한 전통 서사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인다. 특히, [블루 발렌타인], [벨빌 도쿄], [비기너스] 등, 2010년을 전후로 해서 나온 30대 이성애 커플들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그렇다.  



[블루 발렌타인]은, 아이, 강아지, 일 등등에 치여 살던 30대 부부가 마침내 파경을 맞게 되는 약 48시간의 일과가 이야기의 주축이다. 두 사람 모두 가족에 관한 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남편은 엄마 없이 자랐고, 아내는 애정이 식은 부모(아빠는 가부장) 밑에서 자랐다. 처음에 그들이 꾸린 가정은 이에 대한 보상 기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48시간 동안, 몇몇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이 벌어지고, 이 갈등은 그때까지 쌓인 앙금을 표면화하여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이에겐 부모가 필요하다"는 남편에게 부인은 "원수지간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만큼 아이에게 비극적인 건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뒤돌아 혼자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춘다. 



이 영화에서는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의 과거, 그리고 맞벌이 부부로 사는 현재, 이 두 시간대가 별다른 구분 없이 맞물린 채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라고는 하지만 그 시간차는 겨우 5-6년 정도.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들의 외모상의 변화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근과거"의 재현은 배우를 바꾸거나 배우에게 코스튬을 입히거나 시대를 반영한 세트를 꾸미는 사극/역사물과는 다른 테크닉을 요한다. 이를테면, 딱히 플래시백임을 보여주는 장치 없이 과거 시퀀스들이 현재의 곳곳에 랜덤하게 끼어들면, 보는 사람은 뭐가 현재고 뭐가 과거인지 혼동하게 되고, 플롯을 시간 순서대로 그리고/또는 인과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애를 먹게 될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경우가 그러했고, 최근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그러했다. 후자는 로맨스와 거리가 멀지만. 멀어도 한참 멀지만. 그런데, 또, 그렇게 먼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본격 첩보물 영화에도 로맨스 코드는 당연히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별다른 장치 없이도 그런 혼란의 소지를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젊고, 첫 만남에 설레고, 임신이나 결혼이라는 변화가 마냥 두렵기만 한 20대의 그들과, 30대로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강아지를 키우고 일터에 나가는 등등의 일상에 치인 현재의 그들, 이 둘 사이의 간극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테제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벨빌 도쿄]의 주인공은 영화평론가와 영화관 프로그래머인 파리지엥 부부. "벨빌 도쿄"라는 제목은, 극 중 남편이 도쿄 영화제 출장이라는 핑계를 대고 파리에 사는 애인의 집에 며칠 묶던 중에 동양 사람들 (주로 중국인들)이 많은 파리 북동쪽 벨빌의 한 가게에 들어가 아내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신 중인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내는 황당해 하다가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돌아온다. 아내는 또 괴로워하다가 또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남편이 (생각보다 훨씬) 이중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도쿄에 있는 줄 알았던 남편을 파리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 뒤를 쫓다가 애인에 집까지 당도...) 먼저 스스로 떠난다 . 이 영화 역시 주인공이 혼자 뒤돌아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비기너스]는 30대 후반의 미혼 남성인 주인공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웃음을 잃었다가 파티에서 만난 발랄한 프랑스 아가씨를 만나 애도를 끝낸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두 영화는 다르다 하겠다. 우선, 굳이 하위장르를 따져 세분하자면, 내가 개인적으로 "연애입문 및 성장담"이라 부르는 장르(플로베르의 [감성교육]과 발자크의 [골짜기 백합]에서부터 트뤼포의 두아넬 연작이 이에 속한다. 베르테르도?)에 속한다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희극과 비극의 이분법 구도에서는 희극에 가깝다. 감독도 일러스트레이터 출신이고, 또 주인공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인 만큼, 발랄한 일러스트 컷도 많고 아기자기한 데코도 많고. 그럼에도 영화는 별로 밝지 않다. 주인공이 어둡기 때문이다. 단지 부친상을 당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의 현재를 장식하는 주변 인물들이 밝을수록, 주인공의 회상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70이 넘어 커밍아웃을 하고 젊은 게이들과 정력적인 정치 및 사교 활동을 펼칠수록, 그의 어두운 면모는 더더욱 부각되며, 이는 프랑스 아가씨가 짐을 싸들고 집으로 같이 살러 왔을 때 이 아가씨가 지닌 어둠의 포스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위의 영화들이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셋 다 열린 결말이라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결말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일 게고, 관객은 자신의 인생관이나 연애관이나 현재의 심리 상태에 비추어 결말에 대해 각자 다른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블루 발렌타인]과 [도쿄 벨빌]의 경우, 영화가 이혼 법정에서 끝나지 않은 이상, '언해피'하지는 않은 엔딩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 주인공이 뒤돌아서는 마지막 장면들은, 오, 쓸쓸하기 짝이 없다. [비기너스] 같은 경우, 아가씨는 떠나고 주인공은 아가씨를 찾아 뉴욕까지 가서 결국 두 사람이 재상봉하고 있는 만큼, 남녀 주인공 둘이 벽을 깨고 서로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행복한 미래를 암시하는 여지를 비교적 충분히 남겨놓고 있는데, 그럼에도, 관점의 주관성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열린 결말"은, 이 결말이야말로,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시인의 명제는 유효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바로 서로의 사이에 놓인 "그 섬에 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사람들의 그러한 욕구를 반영, 자기애 가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유아론적인 인물이 점차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아 가고 마침내 결말에 가서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에 당도하는 과정을 그려왔다. 그런데 위의 세 영화들은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첫 명제를 반복하고 거기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는 데에 그친다. 관계에 대해 희망이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회의론을 재고할 최소한의 계기조차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섬"에 가고픈 열망이 집단의식 차원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아니면 영화가 재현하거나 생산하려는 가족 및 사랑 이데올로기가 변했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아님 둘 다이거나...

···
라는 것이 작년 가을 무렵 이 글을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비슷한 주제--30대 이성애 커플의 삶과 사랑--의 영화들을 보며 "어떤 경향"을 읽어내려는 의도에서. 이런 성격의 글이 시기를 놓치면 아무 소용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냥 버리지는 못하고 어쩌지도 못하고 그렇게 방치한 채로 몇 달을 보내던 중, 아니, 보내는 내내, 그 사이에 나온 다른 영화들을 보며, 관계 불가능성 가설을 검증하고 보완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이 가설을 철회하거나 대대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관계의 원천적 불가능성보다는 관계의 재개념화를 포착했어야 했다.

—박쥐

학문 발전에 기여하는 사소한 방법

blogin.com · 2012-01-12

혹은, 서가 숲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짤막한) 가이드...는 좀 진부하고,
혹은, 어느 도서관 유랑객의 일기...도 진부하네. 자타가 공인하던 타이틀링 센스도 이젠 다 옛날 얘기. 흑.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줄기차게 드나들던 지난 해 말, 그곳의 전자 카탈로그를 검색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Enrico Castelli Gattinara 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출신 저자의 Les inquiétudes de la raison 이란 책을 찾고 있었는데, ' target='_son'>http://catalogue.bnf.fr/ark ... /cb37033779w/PUBLIC> 카탈로그 상 에는 이 책이 가티나라가 아닌 Enrico Castelli (1900--1977)으로 표기돼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저자가 1990년대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 제출한 박사논문을 출판한 거라고 알고 있었던 나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도서관의 서지사항에 오류가 있거나 아니면 내가 박사 심사 년도를 잘못 기억했거나, 둘 중 하나일 터. 두 가설 중 유력한 것은 그간의 경험에 근거할 때 당연히 후자였다. 프랑스 최고이며 아마도 세계에서도 내로라 할 국립도서관의 데이터 베이스와, 지극히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며 최근에는 기형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내 기억력을 비교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다시 보니, 문제의 책의 저자명에 "가티나라" 라는 성이 아니라 "엔리코 카스텔리"라는 이름만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엔리코(이름) 카스텔리(성) 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아니 1900년부터 1977년까지 존재했고, 이 인물은 가티나라보다 인지도가 높으며 또 여러 권을 남긴 저자라는 사실이었다. 마치 "이지선"이라는 저자명을 검색했는데 지선 스님과 동일인으로 처리되어, 무명에 가까운 전자가 하루아침에 벌써 몇 권의 책을 낸 후자로 둔갑해 버린 형국.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참으로 미묘하게 동명인 사례.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내 기억이 맞았고, 국립도서관측의 착오였던 것이다.

몇 번 확인을 거듭한 끝에 오류의 사실에서부터 오류의 원인에까지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책을 반납하면서 도서관 사서에게 잘못을 지적했다. "여기 오류가 있어요. (책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랑 (서지 사항 기록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랑 다른 사람이에요. 엔리코 카스텔리란 사람도 있긴 한데. 이름 때문에 혼동이 있었나 봐요." 그리고는 매우 흡족했다. 다음에 이 책을 볼 사람의 수고를 덜지 않았는가. 그 뿐인가. 만일 저자가 자신의 이름이 오기되어 있었단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을 터. 문헌학이나 고문서학 및 서지학(!) 등등에 밝고 또 그런만큼 이러한 종류의 오류에 민감한 이탈리아 학자인만큼 더더욱 (움베르토 에코도 그렇지만, 예전에 카를로 진즈부르그가 파리 강연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료들을 찾는데 완전히 재앙이었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저 정도가 엉망이면 이탈리아는 어떻길래, 하며 놀란 적이 있다). 그로 인한 사소한 개인적 마찰에서부터 나아가 국제적 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을 사태를 내가 사전에 방지한 것이다.

그런데 내 논증이 그다지 설득력 있지 않아서였을까? 몇 달 후에 다시 검색을 했는데도 여전히 그대로다. 아니면 사서간의 위계 혹은 분업체계, 좀더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공공기관 특유의 관료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몇 달은 더 걸릴 일일지도. 하긴, 하루에 들어오는 신간이며 처리해야 할 정보만 해도 엄청날 텐데. 

그래도, 여전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이긴 하지만, 카탈로그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가티나라는 이탈리아 철학자요 로마 대학교 교수로, 출생연도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현재에도 활동중입니다. 처음에 오류를 보고 놀랐어요. 그 동안에는 이런 일이 잘 없었고 귀관의 정보를 신용하고 있었으니까요. 혹시 저자가 놀라는 일이 없도록 신속한 교정을 바랍니다."  

나로서는 꽤 수고를 요하는 일이었음에도 이 정도까지 한 것은, 책과 저자에 대한 경의 때문이기도 했다. 이성의 우려 (' target='_son'>http://www.vrin.fr/html/mai ... ook&isbn=2711613194> 출판사 브랭의 책 소개 와 ' target='_son'>http://books.google.fr/book ... v=onepage&q&f=false> 구글 북스 페이지 )는 부제가 시사하는대로 간전기, 즉 양차대전 사이의 시기인 1920-30년대 프랑스의 역사학과 인식론의 흐름과 그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을 되짚는 책이다. 그 흐름과 인물이라 함은, 당대 과학 지식에의 천착 및 반성을 바탕으로 20세기초 프랑스 인문학 특유의 합리론 전통을 만든 브룅슈빅, 베르그손, 메예르손에서부터, (어떤 의미에서 이들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아날 학파와 프랑스 역사적 인식론, 그리고 이를 주도한 블로크, 르페브르, 바슐라르, 코이레를 일컫는다.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합리적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고, 과학은 이 믿음의 증거인 동시에 징표였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을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비판적이고 (칸트적 의미에서) 초월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과학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닌, 친과학주의랄까? 1차대전의 상흔 속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반감, 나아가 적대감이 생겼을 법도 하지만 2차대전의 핵공포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고 (물론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의 참상이었겠으나), 당대의 과학 또한 격변을 겪고 있었는데 (상대성이론에 이어 양자역학), 이들은 오히려 그 지점을, 즉 과학이 가져온 사유의 변화를 높이 사고 그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다...는 것이 내 평소의 지론이고, 책을 훑으며 이를 재확인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날과 역사적 인식론의 계보를 엮다니, 흥미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인인 저자가 외부자로서 신선한 시선을 제공한 사례. (오류 수정에 몰두하느라) 책을 대출해 놓고도 꼼꼼하게 읽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나도 언젠가 이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결과가 어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꽤 즐거운 모험이었다. 이런 모험을 너무 즐기는 게 탈이긴 하지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도서관에서의 모험 중 최고는...


  위고 카브레에서의 저 소년 소녀들처럼, 책들을 이리저리 뒤지며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일.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 중 하나인데, 아마도 내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서관 중 하나인 주느비에브가 배경이 된 때문이리라. 영화 속 20세기초의 풍경과는 달리 지금은 개가식 도서 진열은 층 하나로 한정돼 있고, 열람석은 시험 공부하거나 숙제하는 어린 학생들로 북적대지만.

—박쥐

Hugo Cabret 와 시네필리의 기원

blogin.com · 2012-01-05

『카이에 뒤 시네마』 2011년 12월호에서 한 저자는 이 해 영화들의 한 경향으로 '빈티지'를 꼽았다 ("Cinéma vintage", par Emiliano Morreale). 복고나 향수와는 좀 다른. 비루한 지금/여기의 현실의 인식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상대적으로 긍정되고 미화된 과거도 아니고, 프루스트의 마들렌느가 환기 혹은 촉발하는 순수 과거--베르그손적 시간, 혹은 시간의 가장 순수한 상태--도 아닌. 돌아온 유행이나 복고풍 패션으로든 골동품 가게에 진열된 상품으로든 유튭의 클립으로든 복각 음반으로든, 그야말로 공간화되어 현재의 공간에 현재로서 공존하는.

저자 모레알레는 「드라이브」 (영화가 특별한 시대를 지칭하고 있진 않지만, 음악이나 패션 등등으로 배경이 80년대임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다), 「사랑받는 사람들 Les bien-aimés」(이 영화는 5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에 걸친 한 모녀의 인생을 십년 단위로 나눠 그리고 있다), 「아티스트」 (무성에서 유성 영화가 도입되던 30년대가 그 배경) 등을 예를 들고 있다. 이 영화들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재구성하는 역사물들이 아니다. 때문에 시대착오의 우를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나 엄밀한 고증에 대한 강박도 없다. 이 영화들이 재현하는 것은 정확히 동시대에 현존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미디어의 역할이다. 이것은 미디어의 권력지향성이나 대중추수주의나 여론 조작 등등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와는 차원을 달리 한다. 그에 따르면, 현재 대중 예술의 주된 창작 및 수용 계층을 구성하고 있는 20-40대들을 그 이전 세대와 구분하는 가장 튼 특징은, 이들이 7-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내면서 철저히 미디어에 의존하는 오직 그것에 의해 구성된 집단 기억을 보유하고 있고, 그들의 세대적 정체성이 바로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내 생각에 이는 세대론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시네필리 현상의 단면으로서 봐야할 문제인 것 같다. 앞서 말한 미디어를 영화로 대체하면 이해하기 쉽다. 대표적인 예가 「수퍼 8」이다. 이 영화는 일차적으로 스타워즈 같은 헐리웃 영화, 좀더 구체적으로는 구니스나 이티 같은 스필버그 영화들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의 향수를 자극하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하게, 첫째,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메타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둘째, 감독 에이브럼스를 포함, 시네필을 거쳐 작가의 전당에 입성한 이들의 자전적 성격을 갖는 동시에 오늘의 그들을 만든 이전 작가들 (특히 스필버그와 로메로)에 경의를 표한다.

같은 목적과 형식을 가진 전례는 물론 많지만, 이 영화의 독특성은, 이 지점들이 (나같은) 아마추어 관객과 시네필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그럼으로써 양쪽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사실에 있다. 즉, 트뤼포가 말한 3단계, 즉 좋아하는 영화를 수없이 반복해서 보고, 그에 대해 평을 쓰고, 스스로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착실히 거쳐서 명실공히 시네필의 경지에 올랐건, (나같이)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영화를 제한적으로 보거나 아주 가끔씩 방학이나 생일 기념으로 영화관에 간 것이 전부였건 간에, 동일한 집단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바로 이 기억을 촉발시킴으로써. 그리고, 바로 이 집단기억이 사실은 영화적 경험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보임으로써.

이제는 시네필을 넘어 오늘의 시네필들이 경애해마지 않는 거장의 반열에 선 작가들의 경우는 조금 다른 듯도 하다. 올해로 103살을 맞을 포르투갈의 마누엘 데 올리비에라가 만든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위 사진 : critikat.com 에서). 주인공은 젊은 남자 사진사다. 그는, 기계를 쓰지 않고 여전히 낫과 소로 밭을 가는 농부들처럼, 조금 있으면 사라질 옛 것들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데, 어느 늦은 밤, 죽은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남겨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망자는 안젤리카라는 이름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 숨을 거둔 상태이나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카메라 렌즈에 담기는 순간 미소를 짓고, 사진사는 사랑에 빠진다. 현상한 그녀의 사진을 농부들 사진 옆에 나란히 걸어놓고는 상사병을 앓던 그에게, 마침내 안젤리카가 "현현"하고,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 하늘로 날아오른다.

여기에서 사진과 영화라는 미디어는 특정 시공간에 한정된 세대를 넘어 아예 시공간을 초월하는 메디엄-영매(medium : media 와 어원도 같고 심지어 동일한 말이다. medium의 복수형이 media)의 역할을 한다. 사진이 사라지거나 이미 사라진 것들을 붙든다면, 영화는 그것들을 되살린다. 매체로서의 사진, 그리고 이 사진들을 포섭하는 것으로서의 영화. 단순히 수단이나 매체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화된 과거를 생산하는 주체인 동시에, 그 자신 재현의 대상이자 재료/질료가 된. 자기충족적이며 자기지시적이며 자급자족하며 자기복제적인. 무리와 과장을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데미우르고스라는 창작자-장인이 이데아-지성계를 모방하여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던 감성계가 원본의 세계와 창작자를 넘어서서 심지어 집어 삼키고 일체가 된 형국.

반면 우디 앨런은 「미드나잇 인 패리스」에서 영화 이전, 영화의 기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시대에 경의를 표한다. 2-30년대 파리를 풍미한 외국인 예술가들(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브뉘엘)과 그 이전, 벨 에포크를 장식한 인상파 화가들. 브뉘엘을 제외하면 특별히 영화 작가라 할 만한 인물은 없고, 그나마 브뉘엘도 그야말로 단역 수준으로 나올 뿐. 심지어 감독의 페르소나인 주인공은, 헐리웃의 돈 잘 버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에 싫증을 느끼고 소설가가 되고파 하는 인물. 앨런의 전작「카이로의 자줏빛 장미」가 영화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던 걸 생각하면, 「미드나잇 인 패리스」에서 영화가 문학 및 회화에 비해 부각되지 않고 있는 사실은 다소 놀랍게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이었냐며는...

바로 마틴 스콜세지의 「위고 카브레」. 그가 이른바 "아동용" 영화로는 처음 만들었다는 「위고 카브레」는 앞서 논한 어떤 "경향성"들을 종합하는 동시에 그 이상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겐 2011년을 마무리하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 근거를 다소 무질서하게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사, 특히 초기 무성영화 역사의 기술. 무엇보다도 멜리에스지만 뤼미에르부터 표현주의 및 초현실주의 영화들이 직접 혹은 간접 인용된다. 그러니까 멜리에스나 뤼미에르에서 딴 장면들이 삽입되거나, 이를테면 꿈 시퀀스에서 초현실주의의 형식이나 기법이 참조되거나, 시계 태엽이나 자동인형 (automate) 등 소재를 따르는 방식.

위 사진의 장면이 전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주인공 소년은 소녀와 같이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는데, 이들이 보는 것이 해롤드 로이드의 1923년작 중 시계에 매달리는 장면이다. 나중에 소년은 경찰에게 쫓기다가 똑같은 장면을 말그대로 "연출"하게 된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스콜세지는 로이드의 시퀀스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에 중간에 자신이 고안한 컷들을 집어 넣는다. 위의 컷이 그 중 하나다. 화면 왼쪽으로는 시계 위에 매달린 소년이, 오른쪽으로는 땅위 도시의 야경이 경사진 채로 펼쳐진다. 특별히 3D 효과가 쓰였던 것 같진 않은데, 저 구도만으로도 이미 아찔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칼리가리 박사의 침실」이나 「메트로폴리스」 같은 표현주의 영화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시네필리의 기원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스콜세지 개인에 국한한다면, 영화도 영화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올리버 트위스트」나 「400번의 구타」 류의 소년 모험담 혹은 성장담을 보던 유년 시절이 그 시작일 거다. 좀더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한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 책을 쓰고, 사장된 작품들을 발굴하고, 마침내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능케 한 한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시네필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시네필로서의 시네필리 실천. 그 자신 시네필로서의 근본을 잃지 않고 영화와 작가—무엇보다도 멜리에스지만 다른 영화사 초기 작가들도 포함—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영화를 매개로 삼아서. 과연 시네필 출신 거장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그답다.

한편으로 「위고 카브레」는 매체로서의 영화와 또 영화가 표현 수단으로 삼는 매체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기도 하다. 시네필 출신이 만든 "아동용 영화"라고는 하나 「수퍼8」보다는 차라리 「안젤리카의 신비한 사건」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백컨대,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3차원 도입이 기술로서나 예술로서의 영화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뭐가 있느냐'며 불평 불만을 일삼던 무지몽매한 일반 관객 중 하나였다. 「위고 카브레」는 내가 지금까지 본 중 3차원 기술을 가장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활용한 영화였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멜리에스의 일대기는 무성 영화 작가들이 영화 매체와 기술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그리고 스콜세지 자신 또한 이 고민을 이어가려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위고 카브레」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서의 영화사 작업인 동시에 기술 및 예술로서의 영화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이 두 가지는 물론 맞물려 있다. 스콜세지는 옛날 영화들의 복원 작업에 남다른 열의를 보이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이 영화를 통해 과거를 간직하고 보존하는 작업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이는 그의 신조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그의 시네필로서의 열정과 역사가—적어도 역사를 쓸 수 있을 만한 경험과 안목과 결합되는 순간, "프로파간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세지"로서의 설득력과 호소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이 이와 같은 경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들을 도외시하면서 영화를 무조건적으로 혹은 편협하게 예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그는 문학-책에 영화못지 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점이 내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해보기로 한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