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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9일 일요일

역사가를 향한 고다르 옹의 일침

blogin.com · 2012-09-09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texte
Rien n'est aussi commode qu'un mot dans un texte
Nous n'avions que du livre, à mettre dans du livre
Que serait-ce, quand il faut, dans un livre, dans du livre, mettre de la réalité ?
Et, au deuxième degré, quand il faut, dans la réalité, mettre de la réalité ?

Qu'arrive-t-il toujours, mon ami ?
Le soir tombe, les vacances finissent
Il me faut une jour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seconde
Il me faut une année pour faire l'histoire d'une minute
Il me faut une vie pour faire l'histoire d'une heure
Il me faut une éternité pour faire l'histoire d'un jour
On peut tout faire excepté l'histoire de ce que l'on fait

한 편의 글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한 편의 글 안의 한 마디 말보다 편리한 것은 없다
우리에겐 단지 책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책 안의 책, 책들의 책들, 책 안에 담을 책들만이
한 권의 책에, 책들 안에 실재를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 번째 단계로서, 실재를 실재 안에 담는다면, 그래야 한다면?

친구여, 반드시 일어나고 마는 일은 무엇인가?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나게 마련이다
1초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하루가
1분의 역사는 1년이 필요하며
한 시간의 역사에는 한 생애가
단 하루의 역사를 위해서는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역사를 쓰는 일을 제외한다면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일침이라기보단...

사실, 자기 반성에 가깝다 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직접 하나의 역사 서술을 시도(아니, 차라리 기도?)한 경험을 토대로 한 통찰이기도 하고. 이 시도란 물론 영화의 역사(들)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가리킨다. 영국에서 출시된 디븨디를 구해서 가끔 들여다 보는데 (고도의 소장가치를 지닌 대표적인 경우다. 전에도 얘기했듯, 보부르에서 연속상영 할 때 몇 번 가서 보고, 축소판으로도 봤으며, 심지어 나중에 고다르가 책으로 편집해서 낸 판본도 봤지만, 디븨디 버전으로 봤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 작품의 진가를 확인하고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원래 극장이 아니라 텔레비전 상영을 위해 6부작인가로 만들어지기도 했었고. 근데, 그러고 보니 하품이 생각나네. 잘 살고 있나? 다음에 보면 이 디븨디를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볼 때마다 찬탄하고 또 숙연해진다. 그런 한편으로, 참으로, 불경하고 발칙하게도, 모종의 동병상련이 느껴지기도 한다. 직업 역사가가 아니면서 역사를 쓰겠다고 애쓴 흔적이 보이는 듯해서. 영화는 또 얼마나 돌려봤고, 음악은 또 얼마나 찾아 들었으며, 그림들은 또 얼마나 들여다 봤을까. 그 방대한 "사료"들을 놓고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에 대해 또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까. 그 고민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만큼은 전문 역사가 못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책까지. 워낙 박학다식하고 굉장한 독서가인 거야 다른 작품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지만, 영화의 역사(들)에서는, 직업 영화사가나 영화학자들의 기존의 영화사 서술, 나아가 역사학 일반에 뭔가 경종을 울리기라도 하듯, 역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출간한 책에 실린 비블리오그래피에 의하면 수학사까지 읽었다 (작품 중, 고다르는 매체로서의 영화의 선구자-개척자에 속하는 인물로 고다르는 기하학자 가스파르 몽주를 꼽으며 그에게 르네상스 원근법의 창시자들에 걸맞는 타이틀을 부여한다. 몽주가 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투옥 상태에서 발명한 사영기하학 géométrie projective, 이것이 현실-실재의 투영projection을 본질로 하는 영화의 기원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요지였던 듯. 다시 보고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이 결과물을 또 자신의 고유한 몽타주 이론에 걸맞게 드러러내도록 또 얼마나 오리고 붙이기는 또 얼만큼 반복했을 것인가 (내가 요새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과물은 물론 몽타주의 거장의 이름값에 전혀 손색이 없다 (위의 두 샷은 절묘한 몽타주 기법의 실례를 보여준다. 앞의 것은 한 만화에서 따온 장면인 듯한데, 이것을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겹쳐놓을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그리고 장대하다. 말이 영화사지 사실 인류보편사라 해도 좋을.

그런데 그러고서 내린 결론이, 결국, 역사 서술의 불가능성이다. 최소한 "우리가 하는 일"에 한에서는.

역사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 역사가뿐이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그것이 고다르에게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영화-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이었겠다)에 대해서 시간과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런데 그 한계를 가장 잘 알고 또 뼈저리 느끼면서도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게 또 인간의 숙명 아닌가 (칸트, 순수이성비판 서문). 역사가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완벽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다. 그래도 가능한 모든 방법과 능력과 사고를 총동원해서 끝까지 가본 뒤, 그 뒤에는, 오직 그 뒤에만 비로소, 깨끗이 한계를 인정하고 체념해야 한다 (블로크, 역사가를 위한 변명). 고다르는 어쩜 바로 그 체념의 단계에서 말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쉽게 다다른 단계는 아닐 것이다.

요 사이, "저녁은 오고 휴가는 끝난다"라는 구절이 자꾸 귓가를 맴돈다. 작중 이 대목을 낭송하는, 나직하고 침착한 여배우 (누굴까? 나는 베르나데트 라퐁을 의심하고 있다)의 바로 그 목소리로. 이건 전적으로 현재의 내 특수한 상황 때문이겠다. 저녁이 오고, 바캉스에서 사람들이 돌아오는 중, 어느새 여름을 훌쩍 보낸 시간이 원망스럽기만 한. 그런데, 바로, 그 상황 때문에, 역사 재현의 불가능성 테제에 복무하려는, 그러니까 너무도 쉽게 체념의 단계로 넘어가려는 유혹도 생긴다. 그러고보니 일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역사가도 아닌 주제에.

—박쥐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blogin.com · 2012-06-26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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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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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소쿠로프였는데, 보는 내내 아찔하고 중간 중간에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작품 자체가 원작도 그렇지만 뭔가 걸출하고 거창한 것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고, 스타일도 그의 스승 타르코프스키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광했던 기억이 없는데, 모든 취미와 맥락과 무지한 관객 특유의 치기와 자격지심 등등을 넘어, 대가란, 대작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심지어 무릎 꿇게 만드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 있더란 말이다.   

영화 속 장면들을 찾아보다 건진 포스터들 (프랑스판은 제외했다. 요샌 어째 프랑스 배급사들이 포스터에 예전만큼 공들이지 않는 것 같다. Encore un effort, distributeurs français !). 결말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면 (영화가 선형적이거나 인과 관계 분명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구사하는 것도 아닌 만큼 더더욱),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메세지를 원작 파우스트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에서 찾는 것도 가능하다 :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후반부 무렵에 등장하는 마르게레테의 클로즈업이다. 위의 맨 마지막 포스터가 바로 이 샷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클로즈업으로 기록되어도 좋을 이 샷의 공은, 물론 감독과 촬영감독에게도 있지만, 무엇보다 베르메르 그림에서 뚝 떼다놓은 듯한 외모의 저 여배우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 생각이다.

포스터 열전의 기세를 몰아, 또 하나의 인상적인 최근작 포스터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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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걸린 커다란 포스터를 보는데 참 예쁘더라. 송선미도 예쁘고. 초점이 김상중에게 맞추어진 버전도 지나가다 언뜻 본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두 인물 다 큰 비중이 있지 않고, 또, 뭐랄까, 겉돌거나 소외된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 포스터가 보상하는 듯해서 또 좋았다.

—박쥐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로메르, 여름, 그리고 그의 여자들

blogin.com · 2010-08-29



바야흐로 여름. 바캉스를 맞은 파리는, 원래는 '공백'을 뜻했던 '바캉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하철, 버스, 백화점, 거리, 까페, 그 어디고 할 것 없이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을 보면서,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의 틈 안에서 또는 그들과 시선을 나란히 하면서 (그들에 대해 뭇 파리지엥들마냥 철저히 "관찰자 시점"을 취하기란 내게 언제까지나 불가능한, 또는 경계해야 할 일이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이곳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이상 완전히 외지인인 그들과는 그래도 좀 다르리라는, 야릇하고 알량한 우월감이 내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가끔 로메르를 떠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

이 모든 것이 아마도 로메르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여름의 파리는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거나 동행을 찾지 못해 휴가를 떠나지 못한 한심한 사람들이나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처음에 세웠던 휴가 계획이 좌절되자 망연자실해 하던 [녹색광선 Le rayon vert]의 델핀을 생각해 보라). 파리지엥이 아니라 해도 여름을 파리에서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해도 잘 들지 않는 데다가 툭하면 비가 오기 일쑤고, 바다나 그 밖의 "자연"을 만끽할 만한 공간이 거의 없거나 한없이 부족하고, 아무래도 도시적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메르가 여름을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녹색광선] 외에도 [남자 수집가(?) La collectionneuse], [클레르의 무릎 Le genou de Claire], [해변의 폴린 Pauline à la plage], [여름 이야기 Conte d'été] 등이 "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그리고 있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친구의 친구 L'ami de mon amie]나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도 빼놓을 수 없겠다.

왜 휴가지인가? 로메르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각자 고유한 삶의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이를 완강히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답답해 할 정도로. [겨울 이야기]의 펠리시는 소식이 끊겼으며 재회 가능성이 그야말로 백만 분의 1인 옛 애인--이자 딸아이의 아빠--을 5년 째 기다리고 있고, [해변의 폴린]의 폴린은 주변 어른들의 애정 행각(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녹색광선]의 델핀은 자신이 바라는 "꿈의 휴가"를 위해 계속해서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 그것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그들이 적어도 휴가지에서만큼은, 아니 오직 휴가지에서만, 운명(destin)의 힘이 아닌 우연(hasard)의 힘에 이끌린다. 평상시 그들의 삶에 우연의 여신이 개입할 여지는 극히 적다. 여신으로서는 그들이 낯선 곳에 떨어져서 잠시 긴장을 늦춘 사이, 바로 그 틈을 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잡은 이상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쉽지 않게 잡은 만큼 더더욱.

우연의 여신은 녹색광선으로 짠 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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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voyé par herve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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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이 우연의 여신들이 대부분 선하며 늘 친절만을 베푼다는 사실이다. 펠리시는 옛 애인을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델핀은 마침내 '우연'히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 최고의 휴가를 만끽한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냐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작위성은 적어도 로메르 세계 안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가 독실한 천주교도인 동시에 파스칼의 충실한 독자였다는 사실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사실 이 둘은 차치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그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특히 파스칼은 영화에서 두 번, 희곡에서 한 번 총 세 번씩이나 직접 인용된다), 나는 이것이 작가의 자의식이 근본적으로 허구라는 속성을 지닌 영화라는 장치 안에서 여러 겹에 걸쳐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로메르 특집호)의 한 필자가 지적했듯, 작가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인물로는 [겨울 이야기]의 로익을 꼽을 수 있다. 로익은 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사서로 근무 중인, 펠리시의 표현에 따르면 너무 "앵텔로"한, 즉 먹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이다. 게다가 카톨릭.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나 영혼의 불멸/부활 등의 카톨릭 교리들을 "신화"로 치부하면서 믿지 않는다. 반면 펠리시는 기존의 종교가 아닌,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확고한 "믿음"(펠리시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내밀한 확신conviction intime")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로익은 말한다. "내가 신이라면 너를 특별히 귀애할 거야. 왜냐하면 너는 부당하게 [옛 애인의 소식두절이라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바로 이거다. 그(로익-로메르)는 천주교도이나 그저 소박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회의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런 그에게, 비현실적으로 비칠지언정, 그 어느 종교적 또는 지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그녀(펠리시-다른 수많은 로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들은 경이의 대상이다. 만약 실재했더라면 그녀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부당하게 고통을 당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그녀들에게, 그는 작품 내에서의 창조주라는 위치를 이용해 축복을 베푼다.

초기를 제외하고, 특히 여성이 로메르 세계의 중심에 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주체/주관으로서의 '그'와 객체/대상으로서의 '그녀'의 분리가 두드러진다. 첫 장편 [사자 자리 Signe de lion]에서부터 [오후의 사랑 L'amour, l'après-midi] 까지) 까지의 '그'들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이념/이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녀'들 못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감독이 '그'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그'녀'들에 대한 것만큼 애정에 넘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몹시 자조적이고 냉소적이다. 이들에 대한 우연의 여신의 역할 또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반면에 '그녀'들은 그런 '그'들에게서 속물의 탈을 걷어내고 남은, '순수'한 관념론자/이상주의자들의 현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로메르가 되고 싶어했던 그 무엇이다.

위의 클립, "춤추는 로메르"에서 우리는 이상주의자로서의 그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릴 수 있다(비단 이상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로메르가 가시화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카메라에 자신을 노출하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 남아있는 그의 인터뷰는 서면이나 라디오 녹화가 대부분이다). [녹색광선]에서 그는 진짜 '녹색광선'을 찍고 싶어했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 드문 현상을 카메라에 담는 데에 성공하지만, 필름에 찍혀 나온 결과를 보고 적잖이 실망한다. 그가 쓰던 "원시적"인 장비들과 좋지 않은 필름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일. 결국 그는 최종 편집본에 초록색을 덧칠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 샷에서 다소 작위적인 초록빛 선을 보게 된 이유다.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로메르는 10년 후 [여름 이야기]를 찍으면서 다시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며칠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최후의 시도를 마친 후, 포기를 선언한 날, 마침 있었던 나이트 클럽에서의 촬영을 마친 그는 무대에 올라 미친듯이 춤을 춘다. 젊은이들 틈에서, 젊은이들이 듣는 댄스 음악에 맞춰서. 그의 면면--지극히 고전적인 예술 취향, 수줍고 조심스러운 태도 등--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가늠해 보리라. 그에게 녹색광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위의 [녹색광선] 포스터는 http://ia.media-imdb.com/im ... 1._SX354_SY500_.jpg> imdb 에서.

—박쥐

2005년 11월 25일 금요일

69년, 68의 그들은 젊었다

blogin.com · 2005-11-25



필립 가렐(Philippe Garrel)의 Les amants réguliers (영어로 하면 Regular Lovers 쯤 될까? 우리말로는 뭐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는 68세대의, 68세대에 대한, 68세대에 의한 영화다. 68에 대해, 그때/거기에 있었던 이들에 대해 지금/여기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은 지난 40년 동안 끊임없이 이런 의문을 던져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산 젊은이였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감독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젊디 젊은 아들(루이 가렐, 〈몽상가들〉에 나온 그 미소년)과 그 또래 친구들의 입을 빌려 '그' 시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시대란, ''혁명''의 빛나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이 끝난 후 다시 돌아온 남루한 일상, 이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삶까지를 포함한다. 사실 혁명의 현장, 그러니까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이라 해서 대단할 것은 없다. 물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비장한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언제 끝날 지 모를 대치 상태는 아직 어린 그들에게 긴장뿐 아니라 지루함의 연속이기도 했으리라. 경찰에 쫓겨 숨이 턱에 닿도록 달아나고, 모르는 사람 집의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서 '전사'로서의 면모보다는 한 나약한 인간, 아니, 겁에 질린 어린 아이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혁명'이 끝난 후, 그들에게는 채 이루지 못한 신념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다른 위안 거리를 찾는다. 아편이라든지, 애인이라든지.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이 위안이 될 리 만무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혁명에 가담했다가, 혁명 후에는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서 유산 상속자로 친구들을 먹여 살리다시피하는 앙투안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서 살다가, 그러면서 아편과 여자 친구인 릴리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다가, 릴리가 미국으로 떠난 뒤 쓸쓸히 죽는다(사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68에 대한 감독 자신의 자기 고백인 한편으로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젊음'에 대한 예찬으로 읽혔다. 그가 아들과 아들 또래들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확실히 경이감이 어려 있다. 두려울 것이 없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한 젊음.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젊음의 특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나 끝없는 방황 같은 것들은 젊음의 천형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가렐에게는, 젊음의 그 천형마저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쩌면 이 68세대 감독은 그러한 '젊음'을 통해 실패한, 혹은 미완의 혁명에 대한 하나의 해명을 제공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스스로 진 책임을 버거워 하는 것 역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는 죄를 덮어 씌우거나 면하거나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그래도 당시에 너무 어렸거나 철이 없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그 때 가졌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땐 그랬지"라는 후렴구를 포함하는,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후일담"으로 일관하는 이들에 비하면 가렐은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한가. 그의 변명은 고귀하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보너스 혹은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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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는 내내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떠올렸다. 전자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외모가 후자의 주인공과 너무 닮아서였다. 두 사람이 동일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모두 각각 3시간, 4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는 점도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겠다. 아,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2003년 여름인가, 당시 아트선재에서 열렸던 으스타슈&가렐 특별전에서 두 감독의 영화를 마구 섞어서 본 후로, 아직까지도 두 사람을 헷갈려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가렐의 베니스 영화제 기자 회견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감독 본인이 〈엄마와 창녀〉를 "본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두 영화 사이에 다른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 사실 내가 〈엄마와 창녀〉를 연상했던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시놉이나 배우, 특히 루이 가렐만으로 충분히 〈몽상가들〉을 연상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거늘. 감독 자신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베르톨루치의 작년작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는 얘기까지 한 만큼. 실제로 영화 안에서 여자 주인공이 69년 당시에 나온 베르톨루치의 영화 하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68 시위를 재현하기 위해 경찰 제복이나 경찰차 등등의 도구들도 〈몽상가들〉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하니, 말 다했다.

- 영화를 보고 난 뒤 예고편을 접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에서의 주연과 조연의 관계와 비중이 완전히 역전된 예고편이라니. 위의 동영상을 보면 카메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젊은 남자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저 4분짜리 예고편은,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긴 하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있다고, 다시 말해 예고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관객을 동원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저런 불친절한 예고편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평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썩 괜찮은 뮤직 비디오 한 편을 덤으로 얻게 된 셈이니까. 리듬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즐거워 하고 있는 저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입으로는 한숨이 나오는데 어깨가 절로 들썩인달까. 이런 식의 "작가적 고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 이 영화에는 "시의성" 있는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경찰에게 쫓기다 한 건물로 들어가 어떤 집의 현관문을 두드린 프랑수아. 집주인은 프랑수아에게 자동차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과 한패냐고 묻는다. 프랑수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집주인이 말한다. "숨겨 달라고 할 것 같았으면 불은 지르지 말았어야지요."

그렇긴 해도 68년 당시에는 "긴급 사태"가 선포되는 일은 없었는데, 40년 전도 아닌 50년 전의 "전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감각이라니.

—박쥐

2005년 10월 21일 금요일

Me and you and...

blogin.com · 2005-10-21

난 포스팅을 할 때마다 글자 색깔을 고르는 일에 꽤 신경을 쓰곤 한다. 사진이나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색을 선별한답시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는 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워낙 감각이 없는 터라서 결과에 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 포스트에서만큼은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자신도 있다 : 분홍이 아닌 다른 색깔로 이 영화,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Miranda July, 2004)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감독 자신이 분한 주인공 크리스틴은 비디오/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요양원 노인들을 위해 운전 봉사를 하기도 하는데, 그곳서 사귄 할아버지와 함께 백화점 구두 매장에 갔다가 매장 직원인 리처드를 만난다. 리처드는 한달 전부터 부인과 별거에 들어간 뒤 아들 둘과 살고 있는데,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부인과의 "이별"을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왼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던 탓이다. 그것도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크리스틴은 "발에 맞지 않는 구두 때문에 고생하기에 당신은 너무 고귀한 사람"이라며 혹하게 만들어 결국 예정에 없던 신발을 구매하게 만든 리처드에게 호감을 느껴 그 이후에도 계속 그가 있는 매장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겠다시피, 해피엔드.

물론 두 주인공 간의 우연한 만남-갈등-갈등 해소가 전부는 아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리처드의 두 아들들, 리처드의 직장 동료, 리처드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10대 소녀들, 이웃집 소녀, 크리스틴의 친구인 할아버지와 그의 애인 등등. 심지어 이웃집 소녀가 어항 가게에서 산 금붕어까지. 크리스틴을 별 볼일 없는 풋내기 작가로 생각하고 냉대했던 미술관 큐레이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주인공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웃집 소녀와 더불어 내면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를 포함, 이 모든 조연들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발한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외롭고 섬세하고 상처입기 쉬운 영혼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상처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도록 면역력을 키우는 것. 그렇지만 그들은 항체를 만들만한 힘조차 없이 한없이 약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입은 상처는 서로서로 보듬는 것이다. ))〈〉((, 이렇게 말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 거창한 인류애나 쓸데없는 동정이나 연민, 혹은 가족주의/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말끔하게 싹 걷어낸,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런데 그 시선은 무턱대고 따뜻하지 않다. 감독 역시 그런 그들을 냉정하거나 우월감 혹은 동정심에 젖어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큰 매력이다. 그래서 소박하게 착하기만 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이 착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내 미적 감각을 신뢰할 수 없긴 하지만. 어여쁜 감독 언니로 인해 호감도가 상승했음을 부인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74년생(!)인 그녀는 팔방미인, 이 단어의 모든 내포/외연을 스스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정받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단편집 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한 소설가인가 하면, 영화는 또 영화대로, 이 첫 작품으로 꺈느, 선댄스를 비롯, 상도 여러 개 받았으니. 그 뿐인가? 그녀와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틴 사이에는 한 치의 거리도 없을 것임에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녀는 성격마저 좋은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니, 세상이 불공평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인물 리스트에 그녀를 추가할 수밖에.

))<>((
forever



1. 음악도 좋다. 특히 코디 체스트넛의 노래. http://elginpark.com/meandy ... usite1.html>여기 에 가면 들을 수 있다.

2. 위의 그림은 영화 홈피에 소개된 공식 포스터 중 하난데, 최종적으로는 선택되지 않은 것 같다. 난 시중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이게 맘에 든다. 샛분홍에 딱 저 이모티콘과 "포에버"만 찍혀 있는 영화 포스터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3. 줄라이의 http://meandyou.typepad.com/>블로그 에 가니 그녀가 시사회를 위해 파리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난 그 사진에서 배경으로 쓰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다른 극장에서 볼까 하다가 그곳으로 간 거였는데. 그렇다. 이것은 자랑이다. 그 누구도 자랑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4. 줄라이가 시나리오를 쓴 다음 영화의 제목은 "Are You the Favorite Person of Anybody ?"란다. 긴 제목을 좋아하나 보다. 어쨌든 제목 예쁘다. 이번 것도 그랬고.

—박쥐

2005년 2월 23일 수요일

왜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blogin.com · 2005-02-23


오늘따라 이곳 바람이 유난히 매섭다 했습니다. 아침부터 눈발이 제법 오랫동안 흩날리길래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살얼음을 조심스레 밟아가며 힘겹게 집에 와서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미뤄둔 숙제를 마친 뒤에 열겠다고 다짐했었던 포도주 한 병을 따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배우로서 좋아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팬이었다면 그 절망감과 안타까움을 어찌 달랠 수 있었겠습니까. 팬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데.

당신이 재능있고 촉망받는 여배우였다는 사실보다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참 아프게 합니다. 당신이 유서에 남긴 말들, 일에 대한 열정과 욕심,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 하나 하나가 가슴 곳곳을 마구 후벼댑니다.

왜냐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부디 지금 계신 그곳에선 행복하시길.

—박쥐

2005년 2월 14일 월요일

우박

blogin.com · 2005-02-14



또도독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린 우박 알갱이들이 지붕 위를 또르르 굴러내려 쌓이니 저리 되더라. 저 위를 걸으면 자갈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날까? 내 흙투성이 발밑에 자갈들이 제 몸을 부비댈 때 내는, 그 뽀득뽀득 하는 소리가?

—박쥐

2004년 11월 11일 목요일

ㄱ나니?

blogin.com · 2004-11-11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POPE" Alexander. Eloisa to Abelard (extrait)

의 찰리 카우프만이 시나리오를 쓰고 CF 및 M/V 감독 출신인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말해서, 기억에 관한 영화다. 따지고 보면 기억을 다루지 않는 영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운다든지 집어 넣는다든지 뒤섞는다든지 해봤댔자 요즘에 와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로 들릴 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말 많고 탈 많은 인간 관계, 자아, 정체성, 유년 시절의 경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치"에 대한 최초의 경험) 등의 문제를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는 솜씨가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다. 공드리의 감각적 영상 속에서 카우프만식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이 만났다 해도 저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전작 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도 최고였다. 특히 미국식 액센트를 소화하기 위해 발성까지 바꿨음에 분명한 케이트 윈슬렛은 정말 놀랍다. 난 그녀에게 새파랗거나 새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이나 주홍색 추리닝이나 90년대식 히피 복장 같은 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주연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대신해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짐 캐리도 우수어리고 간절한 눈빛을 케이지 못지 않게 잘 소화해 냈다. 어느새 몰라보게 커버린 프로도의 모습도 새로웠다. 비록 시리즈는 1편, 그 중에서도 1/3만 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형용사는 "나이스"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가 제목에 사용되고 또 영화 안에서 직접 인용됐는데, 영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구절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보다는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 "ㄱ나니"는 서태지와아이들의 4집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다. 그 노래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ㄱ나지 않는다.

—박쥐

2004년 10월 31일 일요일

주네, 당신은 멋쟁이!

blogin.com · 2004-10-31

장 피에르 주네와 오드리 토투 콤비의 신작 긴 일요일의 약혼식 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 을 봤다. 추리 소설 작가(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인지 이야기 구조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그래도 프랑스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 그렇지만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만으로 승부하는 헐리웃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통찰력과 세계관은 여전했다. 1차대전 당시의 전장과 20년대를 전후로 한 파리가, 그때 그곳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이렇게 말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재현됐다. 듣자하니 감독이 헐리웃 자본으로 만들면서도 프랑스의 방식과 배우를 고집했다던데, 그저 놀라울 뿐.

이 영화에서 가장 새로운 발견은 조디 포스터였다. 그녀가 어떻게 카메오로 출연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불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20년대 초반의 프랑스 아낙 그 자체였다!), 어떻게 몇 분 안 되는 출연 분량 중 상당 부분을 그렇게 강도 높은 노출신에 할애했는지,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어쨌든 극중에서 나온 대사대로 "웃을 때마다 양볼에 가로가 생기는" 그녀는 참 멋졌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역시 기억, 그러니까 전쟁에 관한 기억, 더 넓게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네크는 전사했다"라는 역사적 사실이 마틸드의 역추적을 통해 재구성되면서 해체되다가 결국에는 거짓으로 판명된다. 마네크와 같은 참호에 있었던 다른 참전 군인들의 구술이나 편지와 같은 사적인 기록물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구성된다. 역사가의 임무는 끝이 없다는 교훈.

—박쥐

2004년 10월 29일 금요일

Before Sunset 을 기다리며

blogin.com · 2004-10-29


http://www.audrey1.com/vide ... lips20/moonriver.ram width=286 height=210 type=audio/x-pn-realaudio-plugin controls="ImageWindow" backgroundcolor="black" center="true" console="cons">
http://www.audrey1.com/vide ... lips20/moonriver.ram width=286 height=30 type=audio/x-pn-realaudio-plugin controls="ControlPanel" console="cons" autostart="false" prefecht="true">



이곳서 비포 선셋 은 언제 개봉할까? 하품의 포스트를 보고 보고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졌다.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 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이 세상에 전쟁이란 게 존재한다는 게 참을 수 없이 싫다"는 셀린의 단 한 마디에 감화되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이 쿨하디 쿨한 헤어짐의 방식을 언젠가 써먹은 적이 있고 앞으로도 한 번쯤은 써먹을 용의가 있다. 말 때문에 고생할 때마다 6개월동안 미국에서 어학 연수를 한 것이 고작인데도 너무나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던 셀린을 떠올리면서 한층 더 깊이 좌절하곤 했다. 
 
이제 그만. 말은 아껴 둬야지. 영화를 본 다음으로 미뤄 둬야지. 실은 그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뭐, 개의치 않으련다. 9년 만에 영화 속에서 만난 그들이 되짚어 가는 기억들이 그에 대한 나의 9년 전의 기억들 역시 되살려 줄 것이므로.

그런데 왜 갑자기 오드리 햅번이냐고? 줄리 델피와 오드리 햅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렇지만 비포 선셋 에서의 저 줄리 델피를 보면서 오드리 햅번을, 그녀의 "문리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보니 창가에서 다리를 벌린 채 노래를 부르는 저 모습, 꽤나 도발적이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직접 노래를 부른 경우는 수없이 많을 터.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매력적인 여배우들이 저렇게 나직한 목소리로 반주가 없거나 거의 없이 부른 장면들이다. 머잖아 비포 선셋 을 보게 된다면, 그때부터 줄리 델피는 아마도 그렇게 내 기억에 남은 세 번째 배우가 될 것이다.
 
오드리 햅번에 이은 두 번째 배우는 잔느 모로. 쥘과 짐 에서 그녀가 새침하게 부르던 그 노래는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어쩜 그렇게 딱 자기 생긴대로 부를 수가 있을까. 이번에 찾아 보니 이 노래의 제목은 Le Tourbillon de la vie (삶의 소용돌이).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를 때의 표정이 정말로 압권이었는데, 아쉽게도 동영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대로, 음성으로나마.


http://pgoh.free.fr/tourbillon.ram width=286 height=45 type=audio/x-pn-realaudio-plugin NOLABELS="false" AUTOSTART="false" CONTROLS="all">
출처 : Chansons' target='_son'>http://pgoh.free.fr/french_songs.php>Chansons françaises (French Songs)
 


—박쥐

2004년 9월 10일 금요일

응시 - 연습 혹은 모방

blogin.com · 2004-09-10


드디어 디카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된 것을 기념해서. 재미삼아 찍었는데 찍고 나니 벨라스케스의 <메니나>가 생각나서.


오른쪽 그림은 artlex.com 의
"응시(gaze)" 항목 중에서. 

—박쥐

2004년 8월 22일 일요일

비블리오필이 되는 방법

blogin.com · 2004-08-22

증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저께 시내 프낙 (Fnac이라고, 한국으로 치면 위치상으로나 규모상으로나 성격으로 보나 딱 교보문고인 서점이라고 보면 된다. 파리에만도 여러 매장을 두고 있는데, 내가 주로 가는 시내 한복판의 프낙은 올 여름에 확장 공사를 해서 예전보다 훨씬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말 나온 김에 거기에서 감동받은 얘기 하나. 사실 예전까지 프낙의 서적 코너에서 볼 만한 것이라고는 만화나 잘 나가는 소설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인문학 코너를 아주 크게 늘렸다. 이를테면 철학 서적의 경우 예전에 고작해야 서가 두어 개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열 개에 달하는 서가를 꽉 채운 코너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게 됐다) 에서 발견한 책이 어제 하루종일 아른거렸고, 오늘은 끝내 손에 넣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에밀 부트루의 해설이 실린 라이프니츠의 <모나돌로지>가 그것이다. 뒤에는 앙리 푸앵카레가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를 비교해서 쓴 아티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1880년에 출판된 책인데, 내가 구한 건 축소판으로 1998년에 나온 판본이다. 분명히 절판됐을 터인데, 1만원이 안 되는 가격에 손에 넣다니!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끔가다 어떤 책들이 나를 "부르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됐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책과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판단,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고야 마는 습성이 생겼다. 이곳에 온 뒤에는 더더욱 심해졌다. 적어도 4~5 군데의 헌책방과 철학 서점과 헌책+새책을 나란히 꽂아 놓은 책방이 한 데 모여 있는 생미셸街에 다녀오는 날이면 그 후로 몇 끼를 굶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얼마 전 헌책+새책을 같이 파는 질베르-조제프의 인문사회과학 분점도 개장되고 프낙에도 볼 만한 책들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사실 조심해야 할 곳이 그 곳뿐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길거리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헌책방이 최소한 다섯 블럭마다 하나씩은 꼭 있으니.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 시장들 (파리에는 이런 종류의 생 방브, 클리냥쿠르, 몽뢰이유 등 유명한 비상설 벼룩 시장들이 몇 개 있는데, 그곳을 지나다 보면 가끔 서적상을 발견할 수 있다. 중고 서적만을 취급하는 벼룩 시장도 있다. 이 시장은 주말마다 조르주 브라상스 공원에서 열린다) 은 또 어떻고. 최근에는 애써 출입을 자제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몽뢰이유의 벼룩 시장에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초판을 구했을 때의 환희는 잊을 수 없다. 글쎄 그 책의 전주인이 70년 출간 당시 나온 <르몽드>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서평 기사를 사이에 꽂아두었지 뭔가. 더구나 그 서평은 각각 프랑수아 다고녜와 에드가 모랭이 쓴 것이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같은 시기에 출간된 프랑수아 자콥의 <생명의 논리>에 대한 미셸 푸코의 서평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비블리오필입네 하고 자처하다니, 진짜 비블리오필들이 들으면 비웃을 것이다. 사실 나는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정말 보잘 것 없다. 그치만 책수집에의 욕구나 의지에 있어서는 "고수"들 못잖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 처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아니, 어쩌면 그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점이 책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더 유리한 조건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책을 사더라도 (1) 헌책으로 더 싸게 나온 게 있나 알아 보려 몇 군데나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아내고 (2) 차비나 밥값을 아껴서 구입했다면, 어찌 그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에는 이 식을 줄 모를 수집욕을 채워줄 또 다른 방법을 발견해서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전자 정보 서비스 갈리카가' target='_son'>http://gallica.bnf.fr/>갈리카가 그것.예전에는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최근에 들어서 구석구석을 뒤져보게 됐는데, 세상에, 보물 창고가 따로 없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저작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영어나 독어로 된 책들도 눈에 띈다. 거기에서 찾은 것이 우주생성론적 가설에 대한 앙리 푸앵카레의 소르본느 강의록. 1911년에 출판됐었고 지금은 당연히 절판된. 인터넷으로 구할 수는 있으나 구하려면 10만원 정도를 들여야 하는데, 그걸 이렇게 책상 머리에서 pdf 파일로 볼 수 있다니. 아마도 나의 논문 주제가 될 듯하다. 그걸 다운로드 받고 나니 정말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물론 내 노트북 안에 들어 있는 푸앵카레의 책과 그 책의 1911년판 원본이 갖는 가치는 다르겠지만, 나는 전자를 소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런 면에서 "지적 소유권"의 문제는 갈수록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mp3보다는 CD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사실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는 플라톤이 직시했던 것처럼 존재론적으로도 아주 복잡한 문제다. 책이란 것도 그렇다. 앞서 언급한 푸앵카레의 강의록은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의 노트를 근간으로 출판된 것이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가 그러했듯이. 하긴, 설령 푸앵카레나 소쉬르 자신이 직접 썼다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관념을 물화/물질화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100%로 완성될 수는 없는 기획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수단이 문자였든, 문자 이전의 언어였든, 문자 외의 언어였든 간에) .

물론 이 인터넷 시대가 나같이 가난한 사이비 비블리오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http://www.chapitre.com>샤피트르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면 아주 비싸고 귀한 책들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책을 찾으려면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녀야 했을 텐데 말이다. 아, 물론 그런 사이트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여전히 유용하다. 저렴한 중고책들 역시 취급되고 있으므로.
 
어쨌든 그렇게 해서 책들이 정신없이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머잖아 책들을 베고 자야 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를 일.

—박쥐

2004년 8월 11일 수요일

잭슨 폴락 따라하기 놀이

blogin.com · 2004-08-11

왜 그럴 때 있잖아.

텅빈 모니터 화면이 망망대해처럼 보일 때.
저걸 언제 다 채우나 하면서 한숨을 짓고 있는데
커서가 깜빡거리면서 마구 약을 올릴 때.
간신히 손을 자판 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손에서 한 문장도, 아니 한 단어도 흘러나오지 않을 때.
녹슨 머리를 삐걱거리며 굴리고
말 안 듣는 손을 토닥거리며 움직여서
애써 써놓은 글이 그만 사라져 버렸을 때.
너무 화가 나거나 아니면 한없이 무기력해져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플 때.
아니, 말이 되든 되지 않든 고민하지 않고
그저 소리나 한 번 시원하게 내질렀으면 싶을 때.

그럴 때 가서 놀기 좋은 곳, jacksonpollak.org' target='_son'>http://www.jacksonpollock.o ... g/>jacksonpollak.org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잭슨 폴락도 이런 기분으로 캔버스 위를 뛰어다니며 물감을 흩뿌린 게 아니었을까? 한 마흔 번 중에 한 번 쯤은.

—박쥐

2004년 7월 6일 화요일

이 여자 감독을 아세요?

blogin.com · 2004-07-06

카트린 코르시니(Catherine Corsini). 그녀와 배우 카린 비아르(Karin Viard)를 <새로운 이브(La nouvelle Eve>(1998년)에서 만났던 날, 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행복감은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서 훨씬 더해졌어요. 세상에, 그녀가 <리허설(La répétition)>(2000년)의 감독이었다니. 그 영화를 본 뒤 전체의 10%밖에 이해하지 못한 주제에 "역시, 여자들이 만들면 뭔가 달라도 달라" 하고 마냥 들떴던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일인데. 세상에.

혹자는 <새로운 이브>를 일컬어 "프랑스판 앨리 맥빌"이라고도 하더군요. 사실 그래요. 30대 여성의 사랑. 아니, 어쩌면 더 심해요. 카미유는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인 "할리퀸 로맨스"의 주인공에 엘리보다도 더 가깝지요. 심지어 카미유는 앨리만큼 멋진 전문 직업 여성도 아녜요.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수영장 코치로 일하죠. 그러면서도 유부남 알렉시의 사랑을 얻기 위해 정치적 관심사와는 절대적으로 무관한 사회당 일을 시작하고, 알렉시가 지방으로 전당 대회를 가면 직장 다 팽개치고 따라 나서지요(거기에 호텔에 "마담 엥겔스"라는 이름으로 예약을 하는 센스까지!). 그래서 어떻게 되냐구요? 결국 카미유는 알렉시와 사랑을 이뤄요. 앨리는 빌리와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도, 본조비와도 연결되지 않았는데 말예요. 알다시피 "연결이 되는" 쪽이 "연결이 되지 않는" 쪽보다 훨씬 더 "할리퀸"스럽잖아요.

그런데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게 전부가 아녜요, 결코. 내가 그 감독이랑 그 배우가 나란히 서 있는 걸 직접 봐서인지는 몰라도, 코르시니가 그 누구보다 여자 배우들을 "잘 다루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의미에서 잘 다루는 거냐면요, 배우에게 감독 자신의 얘기를 하게 하면서도 그 배우를 영화 안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생기 있는 존재로 만들거든요. <리허설>에서도 그랬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상생"의 모습이 아닐 수 없어요, 정말. 감독과 배우 사이에서 그렇게 "주고 받는" 관계, 참 찾기 힘들잖아요. 저 위에다가 붙여놓은 감독과 배우 엠마뉴엘 베아르의 사진을 보세요. 정말 다정해 보이지요?

그녀의 또 다른 미덕은 레즈비어니즘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룰 줄 안다는 데 있어요. 카미유의 가장 절친한 여자 친구 두 명은 레즈비언 커플인데,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 중 가장 "이성적"이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요. 카미유는 알렉시와의 사랑이 뜻대로 잘 안 되자 그 친구들과 바에 가서 낯선 여자에게 눈길을 보내고 진한 키스를 나눠요. 그러다가 그 여자의 애인인 또 다른 낯선 여자에게 얻어맞고, 카미유의 친구들이 "복수"를 하고, 그러면서 바 안에서 소동이 일어나게 되지요. <리허설>에서도 그랬어요. 둘도 없는 친구들인 두 여자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지요. 물론 나중에는 거의 원수지간이 되지만. 그렇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의 두 사람의 감정 변화, 아, 그건 정말 아무나 묘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어요. 나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으면서도 세속적 입맛을 채 버리지 못한 촌스런 사람한테 코르시니의 접근법은 정말 끝내주는 것이 아닐 수 없어요.

이 영화를 보고 박찬옥이 여자들 얘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어요. 일상이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재능을 좀더 잘 살릴 수 있을 텐데. 홍상수도 결국은 자기 얘기니까 그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었던 거 아니었겠어요?

그리고 내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고 100%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채 20대가 되지 않았거나 스무살을 갓 넘긴 "소녀들"에게 자신을 투영시키기 힘든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요. 뭐, 사실, 카미유가 나이 빼고는 나와 그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만큼은 마냥 우러러 보거나 아래로 내려다볼 일 없이 눈높이를 맞출 수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사진 출처 : 카트린' target='_son'>http://ccorsini.online.fr/>카트린 코르시니가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

—박쥐

2004년 7월 2일 금요일

알렝 레네의 판타지, 그 진정성

blogin.com · 2004-07-02

알렝 레네(Alain Resnais) 감독의 1968년작 를 2004년에 본다는 것은 제법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웬갖 최첨단 기술을 앞세운 특수 효과와 웬만한 일상적 경험과 보통의 상상력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 스토리로 무장한 영화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아무런 장식이나 효과도 가미되지 않은 건조한 화면들--심지어 에 등장했던 조악한 시간 여행용 가속 장치같은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을 통해 마주 대하기란, 이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분명 고문일 것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클로드 리데(Claude Ridder)는 가슴에 총을 쏘는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다. 퇴원하려는 그 앞에 낯선 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클로드를 크레스펠(Crespel)이라는,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밀 연구소로 데려간다. 크레스펠에서는 "시간"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클로드의 동의를 구한 후 그의 전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1분의 순간으로 "되돌려" 보낸다. 1분 후에는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피실험자를 안심시키면서. 그런데 실험은 순탄치 않게 전개된다. 클로드가 목표했던 때--클로드가 연인 카트린과 바닷가에서 함께 했던 순간--에 도달하자마자, 시간은 클로드를 그 이전과 이후의 여러 다른 순간들로 데려간다.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클로드와 카트린이 처음 만난 자리, 카트린이 죽은 글래스고의 한 호텔,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던 세느 강의 다리나 파리의 거리, 카트린을 잃고 방황하는 클로드가 "시간이 참 안 간다"며 푸념한채 앉아 있는 사무실... 실험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실험실 밖으로 나온 과학자들은 가슴에 총을 맞은 클로드를 발견한다.

나 역시 이 시대를 겨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관객 중 한 명에 불과한지라 이 영화를 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지루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법을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내 독해력 및 불어 실력이 부족했음을 십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 영화가 수십 년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문법이 낯설다는 사실을 부인킨 힘들 것 같다. 헐리웃식의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객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듯한 반복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클로드와 카트린의 바닷가에서의 즐거웠던 한 때를 담은 컷은 열댓번 정도 반복된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난해한 문법이 "판타지"를 위한 가장 탁월한 장치가 되고, 이 영화를 진정한 판타지로 만든다. 사실 판타지의 진정성을 말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진정한 판타지"는 형용 모순일 것이다. "진정성(authenticity)"을, 어떤 종류든 기존의 "정격"이나 "규범"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판가름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판타지"를, 아주 미흡하게나마,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기존의 모든 것을 넘어서거나 뒤섞어나 갈아엎는 장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두 가지 조건을 아주 잘 만족하는 동시에 그 조건들을 뛰어넘는다. "판타지"를 단순히 "장르적"으로가 아니라 좀더 넓고도 깊은 의미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제아무리 "판타스틱"한 아이디어도 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탄력적 시간"이라는 개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과거를 (내 의지대로) 떠올리거나 과거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잔뜩 뭉뚱그려지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는 곳에서 판타지가 생성된다. 이렇게 볼 때(라기보다는 아주 심하게 비약하자면), "시간 여행"의 모티브는 가장 태고적이고 원시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에서 시간 여행에 대한 반론으로서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것이 "모친 살해 패러독스"라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시간 여행 장치로 쓰인 기구가 자궁(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갖는 형태와 질감을 연상하면 된다)을 닮아 있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 같다.

흠. 이렇게 얘기해 놓고 나니 이나 팬들에게 면박을 당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으나. 나는 그보다는 살짝 어설픈, 즉 CG를 쓰더라도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판타스틱"한 나 가 좋단 말이지. 뭐 거기에 내 반미 정서가 개입돼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는 무척 보고 싶단 말이지.

—박쥐

2004년 7월 1일 목요일

오노 요코 특집

blogin.com · 2004-07-01


이교도이자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그러나 마녀로 찍혔던,
 그리하여 돌에 두들겨 맞거나 물에 빠지거나
 묶인 채 불에 타서 죽은
 500만 명 이상의 여성들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공포입니다.
 지혜로움의 반대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혼란스러움입니다.
여성들의 힘, 지혜와 사랑의 힘을 되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구와 우주를 끔찍한 파괴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 오노 요코, 2003년 11월 11일.


오노 요코, From My Window, 2003, 부분
Galerie Point d'ironie 소장

*중세 마녀 재판 그림과 작가의 어린 시절 및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합성한 작품.
뉴욕의 자기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모습과 "마녀"들의 그림이 중첩되는 경험을 하고는
이 작품을 구상했단다.


♬보너스 음악
 
http://www.gaseum.co.kr/300 ... 5&Form.y=3> face=바탕>yoko ono & yo la tango, "hedwigs lament + exquisite corpse" 
*영화 Hedwig and the Angry Inch에 실린 두 곡을 오노 요코가 다시 부른 곡. 아네스 바르다의 "할머니 랩"에 이은 멋진 "할머니 rock"이라고나 할까.

—박쥐

2004년 6월 20일 일요일

... 그러나 이성이 전부는 아니다

blogin.com · 2004-06-20

오는 6월 25일은 푸코가 죽은 지 꼭 20년이 되는 날. 오늘자 <리베라시옹>은 푸코를 기념하는 특별판을 냈다. 이걸 보고 나는 지난 번의 <리베라시옹> 및 이미지에 대한 폄하 발언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12면에 달하는 특집면 중 한 면 전체를 장식한 저 위의 사진 때문이다.

사진은 80년대 초 푸코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사진 작가이자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고 또 푸코의 애인이었으며 푸코와 같은 병으로 죽은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의 작품이다. 이 사진에서의 푸코는 지금껏 내가 보아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저 엉거주춤한 포즈와 어색한 미소라니. 세상의 모든 권력에 대항해 평생을 바쳐 싸웠던 이 투쟁가-철학자도 자신이 가장 귀애했던 사람의 카메라 앞에서는 저렇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나 보다.
 
푸코가 폐부를 찌를 듯한 시선뿐 아니라 저렇게 따뜻하고 애틋한 눈빛의 소유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저 사진은, 내게는 무척이나 값진 소득이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거리 시위, 강연, 토론 등의 자리에서의, 즉 대중 앞에서의 푸코는 그 얼마나 젊고 아름답고 빛나고 강한 존재였던가. 그런 존재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보는 일은 늘 야릇한 쾌감을 안겨주게 마련이지만, 이 사진에는 단순히 관음증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박쥐

2004년 5월 22일 토요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blogin.com · 2004-05-22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신현림, "나의 싸움"






생산은 고사하고 재생산도 힘에 겨워 이렇게 며칠째 복제만 반복하고 있는 걸 보니, 무기력증이 정점에 달한 모양이다. 이미 뇌세포들에는 이끼가 내려앉은지 오래. 기분 전환도 하고 마음도 다잡고 그 와중에 언어 실력도 연마할 요량으로 집었던 소설들도 내팽개쳐진지 너무도 오래. 전공책들과 각종 복사물들은 어느새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이렇게 넋나간 채로 몇 날을 그냥 흘려보내놓고 나니, 며칠 다니러 오겠다던 몽실에게 퇴짜를 놓은 것이 몹시 후회스럽다. 몽실과 신나게 놀았더라면, 그리고 난 뒤  맘을 다지고 새롭게 6월을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주어진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한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골몰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의지는 있었던 게 아닌가. 그 의지가 무얼 향한 것이었든지 간에.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지금 내 안팎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것은 오직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뿐.

방안에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베르메르나 렘브란트를 볼 수 있는 이 수퍼울트라급 기술복제시대를 살았더라면, 벤야민은 분명히 땅을 쳤으리라. 분명한 건 그 천인공노할 기술 덕분에 작품이 물리적(또는 시공간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등의 제약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저 위에다가 "복제"해 놓은 시만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시인의 이름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마지막 구절뿐이었는데도, 구글에서 "지겨운 고통 신현림"이라는 검색어만으로 바로 그 전문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복제품" X'는 결코 "원본"  X 의 "붕어빵"이 아니다. X'는 X 이상의 다양한 의미들을 생성해낸다. 물론 시의 존재론을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다. 시의 "원본"이라니? <세기말 블루스>의 96년 초판에 찍혀 있는 활자들? 시인이 직접 이 시를 낭독하면, 그게 이 시의 "원본"이 되는 겐가? 아니, 구체화되기 전의, 시인의 머릿속에서 "영감"의 형태로 떠돌고 있던 그 상태가 "원본"이라고 해야하잖는가? 그렇지만 시는 소설과는 달리 물리적인 것의 영향을 꽤 많이 받는다. 똑같은 시라 하더라도 문자들을 종이 위에 어떻게 배열하느냐, 누구의 목소리로 어떤 세팅에서 낭독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시를 처음 본 건 학부 3~4학년 무렵, 교지에 실린, 그 나이 즈음에 다들 한 번씩은 해봤음직한, 그 누구로도,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고만고만한 고민에 관한 글이었다.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 저 시에서 말하고 있는, 그 모든 20대 초반의 정서들을 가득 담은. 그 친구는 시인의 입을 빌어 그것들더러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꺼지라"는, 그 투박하기 짝이 없는 시어가 주는 해방감이란! 그렇지만 그것은 맘놓고 만끽할 수 있는 종류의 해방감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훈장이자 사랑스러운 보물이기도 했다. 늘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들에 시달리다가도, 그것들이 잠시라도 내 안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5년이 흐른 지금, "꺼지라"는 말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삶은~"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에는 눈길을 두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워라.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하라. 남아있는 나날을 위해. 고통은, 지겨운 고통은, 꺼지란다고 얌전히 꺼져주지 않는다. "꺼지라"는 말은 그렇게 텅빈 구호로 남거나 아니면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가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시귀를 떠올리고 전문을 찾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시학과 재미없는 시론을 주절거리다니. 사실인즉슨, 고통의 주변을 우회하고 또 우회하는 것, 이것이 내가 얼마 전에 발견해서 써먹고 있는 고통 퇴치법이다. 그런데 그새 내성이 생겨버렸는지 별 효과가 없다. 좀더 강력한 뭔가가 필요하다.

—박쥐

2004년 5월 20일 목요일

22시 30분 : 일몰 30초전, 월출 30초후

blogin.com · 2004-05-20

내가 생리중에 모기에게 왕창 물어 뜯기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은

밤이 밤 열시를 훨씬 넘긴 다음에야 겨우 해를 밀어내고 빼꼼이 고개를 들이밀던 어느 다 늦은 봄날이었다

복도는 이미 옆집 콧수염 신사와 그의 애인의 살섞는 냄새로 가득차 있었고

복도 끝 화장실의 좁은 창문틈으로는 실종됐던 달이 8개월만에 둥 둥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박쥐

2004년 5월 19일 수요일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중국? 일본?

blogin.com · 2004-05-19

……, 낯선 한 이방의 도시에서 또 낯선 한 이방에 속한 도시로 내가 떠났을 때 나는 낯선 풍경들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정한 당신……, 유정한 나를……, 나를 용서하세요……, 나……, 유정해서……, 서러웠더랬지요……, 불편은 저의……, 이대도록 기나긴 꽃이었구요, 늦은 저의 창으로……, 설분분합니다, 설분분……, 합니다,

[...]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이미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느릿느릿 걸어서, 헤이, 보 콤스트 두 헤어? 히나? 야판? 헤이, 바룸, 하스트 두 니히츠 게작트? 비스트 두 베트룽케? 페어뤽트?http://fadel.namoa.net/suky ... ng/loneliness.html#3 name=(3)>(3) 나는 천천히 기차 중간문을 연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화장실 문을 연다, 나는 힘껏 문을 연다, 나는 머리 끝에 식은 땀이 나는 것처럼, 눈을 감고, 다시 문을……, 그래, 나에게는, 이런 힘이, 힘이 필요했어, 왜냐하면, 나는 살아야 했거든, 나는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거든……,왜냐하면, 나는 마음이 언제나 너무 젖어 있어서, 젖은 마음은 언제나 그렇게 길바닥에 누워……, 나는 거울을 본다, 이 얼굴을 들고 그렇게 먼 길을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세상에서 쉽게 묻어온, 저런 저런, 저건, 세상을 한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탓일까……,

3) 헤이,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중국? 일본? 헤이, 너, 왜, 아무 말도 안하니? 너, 술 취했니? 미쳤니? (Hey, wo kommst du her? China? Japan? Hey, warum hast du nichts gesagt? Bist du betrunken? verrckt?)


- 허수경, "어떤 쓸쓸함에 대하여"
(『문예중앙』 94년 여름호 )에서 발췌
 from fadels' target='_son'>http://fadel.namoa.net/suky ... g/index2.html>fadels fan page dedicated to the poet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