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2일 금요일

카우프만과 니체

blogin.com · 2004-11-12

* Eternal Sunshine... 에서 커스틴 던스트가 맡은 메리는 바트렛 명언집의 구절들을 외우고 다니는데, 그녀가 인용한 것이 포프의 시와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다. 다음은 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 에 가보세요.

근데 이 영화, 생각해 보면 볼수록 재밌군요. 특히 철학하는 사람들은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재밌는 요소들을 한 바가지 찾아낼 것 같습니다 (뭐, 문학하는 분들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전설적 로맨스에 대한 영화적 해석이라고 좋아하실 수도). 우선 기억이나 정체성과 같은 고전적인 철학 주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구요. "나는 너다", "그가 나의 아이덴티티를 훔치고 있다"와 같은 대사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철학 수업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만큼이나 자주 인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밖에도, 예를 들어 니체의 이 구절은 영화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되는데요, 전 그걸 보면서 영문판 니체전집의 편집자인 카우프만과 시나리오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어떤 관계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더랬지요. 뭐 그건 사소한 부분이고, 굳이 니체가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핵심어인 "망각"이 니체 전공자들의 흥미를 끌지 않았을까 해요. 한 영화 포럼을 봤더니, 실제로 니체로 논문을 쓰는 철학 강사가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가지고 니체에게 있어서의 "망각"을 설명했다고 해요. 초인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의 능동적 망각,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범인/일상인(니체가 현대인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요?)의 전유물인, 과거의 향수에 갇힌, 의지가 결여돼 있는 수동적 망각. 이 강사는 후자의 예로 아멜리를 들었다네요. 헉.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어요.

—박쥐

2004년 11월 11일 목요일

ㄱ나니?

blogin.com · 2004-11-11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POPE" Alexander. Eloisa to Abelard (extrait)

의 찰리 카우프만이 시나리오를 쓰고 CF 및 M/V 감독 출신인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말해서, 기억에 관한 영화다. 따지고 보면 기억을 다루지 않는 영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운다든지 집어 넣는다든지 뒤섞는다든지 해봤댔자 요즘에 와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로 들릴 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말 많고 탈 많은 인간 관계, 자아, 정체성, 유년 시절의 경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치"에 대한 최초의 경험) 등의 문제를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는 솜씨가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다. 공드리의 감각적 영상 속에서 카우프만식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이 만났다 해도 저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전작 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도 최고였다. 특히 미국식 액센트를 소화하기 위해 발성까지 바꿨음에 분명한 케이트 윈슬렛은 정말 놀랍다. 난 그녀에게 새파랗거나 새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이나 주홍색 추리닝이나 90년대식 히피 복장 같은 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주연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대신해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짐 캐리도 우수어리고 간절한 눈빛을 케이지 못지 않게 잘 소화해 냈다. 어느새 몰라보게 커버린 프로도의 모습도 새로웠다. 비록 시리즈는 1편, 그 중에서도 1/3만 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형용사는 "나이스"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가 제목에 사용되고 또 영화 안에서 직접 인용됐는데, 영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구절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보다는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 "ㄱ나니"는 서태지와아이들의 4집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다. 그 노래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ㄱ나지 않는다.

—박쥐

2004년 11월 10일 수요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blogin.com · 2004-11-10

발표 잘 들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후에 벌어진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오신 걸 환영해요.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상화, 근사, 모델에 관한 논문을 쓰셨더군요. 사실 제가 그 문제를 석사 논문에서 다뤘습니다만,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다 잊었긴 합니다만, 논문 쓰던 당시에는 그 셋이 개념적으로 당최 구분이 안돼서 혼났어요. 이상화(idealization)와 모델도 결국은 근사(approximation)의 한 종류 아닌가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개념적 구분이란 게 저한텐 상당히 쥐약입니다만. 특히 요즘 들어선 더 그래요. 난 파르메니데스가 맞았음 좋겠어요.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고. 그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가지가 뻗으면 도대체 구분이 되질 않는다구요. 얘기가 딴 데로 샜습니다만. 어쨌든. 그런가 하면, 질점도 근사고, 뉴턴적 세계관도 근사고, 한국 국민의 평균 키나 평균 몸무게도 근사인데, 뭐 그렇게 넓게 개념화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근데 왜 그렇게 진리값을 부여하지 못해 안달입니까? 루이스의 가능세계론은 상당히 매력적인 도구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진리론에 꿰맞추기 위해 그렇게 도입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쿤도 그래서 자기 입장 설득하느라 고생했잖아요. 인식론적 아나키즘이 뭐 그리 나쁩니까? 사람들이 아나키즘 하면 상대주의에 대해 보이는 것과 비슷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난 아나키즘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반응을 보면 기분이 나빠요. 아나키즘은 "무엇이든 다 좋다"가 아니라구요.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세요? 그들이야말로 신념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먼저 목숨까지 내걸 사람들이라구요. 흑. 그래요. 내가 이래서 요즘 아무말도 못합니다. 도대체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아요. 도대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한 마디도. 이래봬도 옛날에는 논리학을 꽤 좋아했다구요. 뇌세포 하나 하나를 총가동해서 모든 사고의 과정을 스크리닝한 다음에 답을 얻었을 때 찾아오는, 두뇌가 새하얗게 세탁되는 느낌. 나한텐 그게 정말 지상 최고의 쾌락이었다구요. 한때는. 근데 요즘엔 세계가 정지해 버렸어요. 세상은 미친 속도로 휙휙 돌아가고. 그래서 정말 있을 데가 없어요. 못 찾겠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더 드리지요. 당신에게도 이럴 때가 있었나요? 난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졌어요. 어쩌면 좋죠? 그렇잖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요. 이게 정신분열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 지하철에서 갑자기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날 선로로 밀어넣을지도 모르니 그때를 대비한 행동 수칙을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과 비슷한 빈도로.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웃기죠? 이 블로그, 아무래도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의 전속이었던 이발사가 갔던 그 대나무숲이 돼가나 봐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박쥐 머리는 새대가리.

—박쥐

2004년 10월 31일 일요일

주네, 당신은 멋쟁이!

blogin.com · 2004-10-31

장 피에르 주네와 오드리 토투 콤비의 신작 긴 일요일의 약혼식 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 을 봤다. 추리 소설 작가(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인지 이야기 구조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그래도 프랑스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 그렇지만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만으로 승부하는 헐리웃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통찰력과 세계관은 여전했다. 1차대전 당시의 전장과 20년대를 전후로 한 파리가, 그때 그곳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이렇게 말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재현됐다. 듣자하니 감독이 헐리웃 자본으로 만들면서도 프랑스의 방식과 배우를 고집했다던데, 그저 놀라울 뿐.

이 영화에서 가장 새로운 발견은 조디 포스터였다. 그녀가 어떻게 카메오로 출연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불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20년대 초반의 프랑스 아낙 그 자체였다!), 어떻게 몇 분 안 되는 출연 분량 중 상당 부분을 그렇게 강도 높은 노출신에 할애했는지,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어쨌든 극중에서 나온 대사대로 "웃을 때마다 양볼에 가로가 생기는" 그녀는 참 멋졌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역시 기억, 그러니까 전쟁에 관한 기억, 더 넓게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네크는 전사했다"라는 역사적 사실이 마틸드의 역추적을 통해 재구성되면서 해체되다가 결국에는 거짓으로 판명된다. 마네크와 같은 참호에 있었던 다른 참전 군인들의 구술이나 편지와 같은 사적인 기록물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구성된다. 역사가의 임무는 끝이 없다는 교훈.

—박쥐

2004년 10월 29일 금요일

Before Sunset 을 기다리며

blogin.com · 200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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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서 비포 선셋 은 언제 개봉할까? 하품의 포스트를 보고 보고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졌다.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 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이 세상에 전쟁이란 게 존재한다는 게 참을 수 없이 싫다"는 셀린의 단 한 마디에 감화되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이 쿨하디 쿨한 헤어짐의 방식을 언젠가 써먹은 적이 있고 앞으로도 한 번쯤은 써먹을 용의가 있다. 말 때문에 고생할 때마다 6개월동안 미국에서 어학 연수를 한 것이 고작인데도 너무나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던 셀린을 떠올리면서 한층 더 깊이 좌절하곤 했다. 
 
이제 그만. 말은 아껴 둬야지. 영화를 본 다음으로 미뤄 둬야지. 실은 그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뭐, 개의치 않으련다. 9년 만에 영화 속에서 만난 그들이 되짚어 가는 기억들이 그에 대한 나의 9년 전의 기억들 역시 되살려 줄 것이므로.

그런데 왜 갑자기 오드리 햅번이냐고? 줄리 델피와 오드리 햅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렇지만 비포 선셋 에서의 저 줄리 델피를 보면서 오드리 햅번을, 그녀의 "문리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보니 창가에서 다리를 벌린 채 노래를 부르는 저 모습, 꽤나 도발적이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직접 노래를 부른 경우는 수없이 많을 터.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매력적인 여배우들이 저렇게 나직한 목소리로 반주가 없거나 거의 없이 부른 장면들이다. 머잖아 비포 선셋 을 보게 된다면, 그때부터 줄리 델피는 아마도 그렇게 내 기억에 남은 세 번째 배우가 될 것이다.
 
오드리 햅번에 이은 두 번째 배우는 잔느 모로. 쥘과 짐 에서 그녀가 새침하게 부르던 그 노래는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어쩜 그렇게 딱 자기 생긴대로 부를 수가 있을까. 이번에 찾아 보니 이 노래의 제목은 Le Tourbillon de la vie (삶의 소용돌이).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를 때의 표정이 정말로 압권이었는데, 아쉽게도 동영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대로, 음성으로나마.


http://pgoh.free.fr/tourbillon.ram width=286 height=45 type=audio/x-pn-realaudio-plugin NOLABELS="false" AUTOSTART="false" CONTROLS="all">
출처 : Chansons' target='_son'>http://pgoh.free.fr/french_songs.php>Chansons françaises (French Songs)
 


—박쥐

2004년 9월 19일 일요일

불로뉴 숲 산책

blogin.com · 2004-09-19


<사진 설명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 이걸 찍는 동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큰 소리로 "쟤는 뭘 찍는 거지?" 하고 말했다. 그 말 뒤에는 아마도 "뭐 찍을 게 있다고..."가 생략돼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그가 옳았다. 피사체들은 그다지 포토제닉하지 않았다. 가을이 깊으려면 아직 멀었다.  

2. 마르셀 프루스트는 3살 때 이 숲을 산책하다가 돌아오던 길에 처음으로 천식 발작을 일으켰다.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 올여름 바다 한 번 가보지 못한 설움을 달래기에 호수는 역부족이었다.

4. 열매를 찍고 싶었는데, 찍힌 것은 바람이었다.

—박쥐

2004년 9월 12일 일요일

또 하나의 세대론 : 요약

blogin.com · 2004-09-12

대학생들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도덕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았으면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이고 순수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분방하면서도 확신에 찬 거대한 동맹의식이었다. 그들이 순수하고 도덕적인 것만큼 그들에게는 가차없는 비판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 학내 이기주의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이였고 대학생이었으니까. 유감이지만 그들은 대다수가 이십 년 후에는 자신의 부모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리라는 것을,--최소한 오직 욕망에 천착하리라는 점에서-- 내면으로는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젊은이고 대학생이므로, 적어도 지금은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무죄이며, 나아가서는 미래지향적이고 혁명적이며 도덕적이고 순수한 것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무지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어린아이는 도덕을 위해서 어떠한 노정도 밟지 않았고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위한 조그만 고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부도덕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오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다. 편리하게도 그들의 이 (일시적인) 행위에 명분을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존재는 언제나 그들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신문이 그들을 '신인류'라고 부르고 그런 이름에 으쓱해지지만, 실상은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지 그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그들의 새로움이란 것이 부모세대의 경제적 성과를 너무나 당연한 선물인 것처럼 꼭 움켜쥐고 소비문화에 충실한 결과 자연스럽게 발생한 취미의 다양성이나 욕구분출의 자유로움에 따른 정신적 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진화의 덕택으로 좀더 창의적인 두뇌를 타고났기 때문이며, 게다가 그들은 뭔가 운명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이 우월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풍요한 문물이 넘치는 80년대에 젊은이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기껏 68세대 혹은 4.19 세대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더구나 젊고 신선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호칭을 부여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 좋아할 뿐이다. 대학의 상부가 독재적인 정부와 마찬가지로 권위로 가득 찬 관료의 세계라면, 대학의 학생들 또한 거기에 충분히 걸맞게 충실한 군중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온갖 명분을 획득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매달려 호흡하고 양분을 빨아먹고 있으며 오직 그것의 명령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군중의 맹종이라는 것의 실체를 볼 줄도 모르고 믿지도 않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이 '군중'에 속해 있다고는 감히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쿨!


--배수아, <독학자>, 31~33쪽 (열림원, 2004)


이번에 떠나오기 전 선물로 받은 소설.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바가, 그리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압축적인 방법으로 나타나 있다. 

—박쥐

2004년 9월 10일 금요일

응시 - 연습 혹은 모방

blogin.com · 2004-09-10


드디어 디카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된 것을 기념해서. 재미삼아 찍었는데 찍고 나니 벨라스케스의 <메니나>가 생각나서.


오른쪽 그림은 artlex.com 의
"응시(gaze)" 항목 중에서. 

—박쥐

2004년 9월 5일 일요일

꿈인지 현실인지

blogin.com · 2004-09-05

꼬박 나흘 동안,

<데이 에프터 투마로우>, <브리짓 존스의 일기>, <스텐 바이 미>, <슈렉2>, <엘리펀트>, <브링 잇 온>, <거미숲>, <러브 엑추얼리>, <로스트 인 트렌스레이션>, <팻 걸>,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의 영화와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를 보다 보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이 뭐고 꿈이 뭔지 모르게 되더란 말이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엘리펀트>를 보면서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품은 <러브 엑추얼리>와 같은 실현 불가능한(!) 꿈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살다보면, 비행기를 놓쳐 예상치 못했던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를 내 집 TV로 보게 되거나, 대한민국 대통령 입에서 "국보법은 잘못됐으니 폐지돼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일도 생기니까.

—박쥐

2004년 8월 26일 목요일

오늘의 일기

blogin.com · 2004-08-26

하늘이 파랗길래 늘색 바지에 하늘색 윗도리를 걸치고 내친 김에 속옷까지 하늘색으로 바꿔 입고는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짙은 구름이 깔리고 장대비가 내리치는 바람에 하늘빛 우산을 집어 들고 망설이다가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린 오늘은 파리 해방 60주년 기념일.

—박쥐

2004년 8월 22일 일요일

비블리오필이 되는 방법

blogin.com · 2004-08-22

증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저께 시내 프낙 (Fnac이라고, 한국으로 치면 위치상으로나 규모상으로나 성격으로 보나 딱 교보문고인 서점이라고 보면 된다. 파리에만도 여러 매장을 두고 있는데, 내가 주로 가는 시내 한복판의 프낙은 올 여름에 확장 공사를 해서 예전보다 훨씬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말 나온 김에 거기에서 감동받은 얘기 하나. 사실 예전까지 프낙의 서적 코너에서 볼 만한 것이라고는 만화나 잘 나가는 소설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인문학 코너를 아주 크게 늘렸다. 이를테면 철학 서적의 경우 예전에 고작해야 서가 두어 개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열 개에 달하는 서가를 꽉 채운 코너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게 됐다) 에서 발견한 책이 어제 하루종일 아른거렸고, 오늘은 끝내 손에 넣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에밀 부트루의 해설이 실린 라이프니츠의 <모나돌로지>가 그것이다. 뒤에는 앙리 푸앵카레가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를 비교해서 쓴 아티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1880년에 출판된 책인데, 내가 구한 건 축소판으로 1998년에 나온 판본이다. 분명히 절판됐을 터인데, 1만원이 안 되는 가격에 손에 넣다니!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끔가다 어떤 책들이 나를 "부르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됐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책과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판단,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고야 마는 습성이 생겼다. 이곳에 온 뒤에는 더더욱 심해졌다. 적어도 4~5 군데의 헌책방과 철학 서점과 헌책+새책을 나란히 꽂아 놓은 책방이 한 데 모여 있는 생미셸街에 다녀오는 날이면 그 후로 몇 끼를 굶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얼마 전 헌책+새책을 같이 파는 질베르-조제프의 인문사회과학 분점도 개장되고 프낙에도 볼 만한 책들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사실 조심해야 할 곳이 그 곳뿐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길거리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헌책방이 최소한 다섯 블럭마다 하나씩은 꼭 있으니.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 시장들 (파리에는 이런 종류의 생 방브, 클리냥쿠르, 몽뢰이유 등 유명한 비상설 벼룩 시장들이 몇 개 있는데, 그곳을 지나다 보면 가끔 서적상을 발견할 수 있다. 중고 서적만을 취급하는 벼룩 시장도 있다. 이 시장은 주말마다 조르주 브라상스 공원에서 열린다) 은 또 어떻고. 최근에는 애써 출입을 자제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몽뢰이유의 벼룩 시장에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초판을 구했을 때의 환희는 잊을 수 없다. 글쎄 그 책의 전주인이 70년 출간 당시 나온 <르몽드>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서평 기사를 사이에 꽂아두었지 뭔가. 더구나 그 서평은 각각 프랑수아 다고녜와 에드가 모랭이 쓴 것이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같은 시기에 출간된 프랑수아 자콥의 <생명의 논리>에 대한 미셸 푸코의 서평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비블리오필입네 하고 자처하다니, 진짜 비블리오필들이 들으면 비웃을 것이다. 사실 나는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정말 보잘 것 없다. 그치만 책수집에의 욕구나 의지에 있어서는 "고수"들 못잖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 처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아니, 어쩌면 그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점이 책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더 유리한 조건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책을 사더라도 (1) 헌책으로 더 싸게 나온 게 있나 알아 보려 몇 군데나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아내고 (2) 차비나 밥값을 아껴서 구입했다면, 어찌 그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에는 이 식을 줄 모를 수집욕을 채워줄 또 다른 방법을 발견해서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전자 정보 서비스 갈리카가' target='_son'>http://gallica.bnf.fr/>갈리카가 그것.예전에는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최근에 들어서 구석구석을 뒤져보게 됐는데, 세상에, 보물 창고가 따로 없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저작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영어나 독어로 된 책들도 눈에 띈다. 거기에서 찾은 것이 우주생성론적 가설에 대한 앙리 푸앵카레의 소르본느 강의록. 1911년에 출판됐었고 지금은 당연히 절판된. 인터넷으로 구할 수는 있으나 구하려면 10만원 정도를 들여야 하는데, 그걸 이렇게 책상 머리에서 pdf 파일로 볼 수 있다니. 아마도 나의 논문 주제가 될 듯하다. 그걸 다운로드 받고 나니 정말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물론 내 노트북 안에 들어 있는 푸앵카레의 책과 그 책의 1911년판 원본이 갖는 가치는 다르겠지만, 나는 전자를 소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런 면에서 "지적 소유권"의 문제는 갈수록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mp3보다는 CD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사실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는 플라톤이 직시했던 것처럼 존재론적으로도 아주 복잡한 문제다. 책이란 것도 그렇다. 앞서 언급한 푸앵카레의 강의록은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의 노트를 근간으로 출판된 것이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가 그러했듯이. 하긴, 설령 푸앵카레나 소쉬르 자신이 직접 썼다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관념을 물화/물질화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100%로 완성될 수는 없는 기획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수단이 문자였든, 문자 이전의 언어였든, 문자 외의 언어였든 간에) .

물론 이 인터넷 시대가 나같이 가난한 사이비 비블리오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http://www.chapitre.com>샤피트르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면 아주 비싸고 귀한 책들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책을 찾으려면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녀야 했을 텐데 말이다. 아, 물론 그런 사이트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여전히 유용하다. 저렴한 중고책들 역시 취급되고 있으므로.
 
어쨌든 그렇게 해서 책들이 정신없이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머잖아 책들을 베고 자야 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를 일.

—박쥐

2004년 8월 20일 금요일

또 하나의 세대론을 위한 시론

blogin.com · 2004-08-20

그냥 문득 떠오른, 아직까지 희미하디 희미하기만 한 생각.

사실 아주 뜬금없지는 않지, 거의 모든 "그냥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얼마 전에 한 선배와 송경아 얘기를 하다가 놀란 적이 있었거든. 난 그녀가 당연히 90년대 이후 학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89학번인 그 선배의 동기라지 뭐야? 읽은지 오래 돼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송경아 소설을 읽으면서 최루탄과 땀이 뒤범벅된 티셔츠와 청바지를 연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구나. 알라딘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최근에 소설집으로 나온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조금 읽었거든. 극히 일부만을 읽었지만, 딱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 또래들 얘기가 드디어 나왔구나, 내 또래들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구나 하는. 물론 반가웠다는 얘긴 절대로 아냐. 거기에 비춰진 '나'는 더없이 세속적이고 자본의 논리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인 데다가 거기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저항감을 느끼지 못하거든.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이야. 어느 정도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제 그게 진짜 '사실'이 돼가는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2002년쯤이었나. 91학번들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 "강경대", "이한열"이나 "박종철"이라는 이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여러 번 들은 탓에 어느 정도 귀에 익은 그 "열사"의 이름을 그냥 "경대"라고 부르던 그들에 대한 얘기를. 뭐, 그다지 많은 얘기를 하진 못했지, 당연히. 근데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그래도 자기들이 몸소 살아낸 이야기들을 "역사화"하려는 그들의 몸짓을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는 있었어.

"그들" 이후의 "우리"에 대해서도 맘만 먹으면 꽤 재밌는 얘길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물론 맘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우선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여야만 하겠지. 그치만 지금의 딱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얘기들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딱 지금의 이 상태에서밖에 하지 못할, 다른 때나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얘기들도 있지 않을까?

그냥 떠오르는대로 말해 볼게.
 
변희재. 알고 보니 이 사람 아주 새파랗게 젊더군. 94학번이더라구. 그가 <내사랑 콩깍지>라는 드라마 얘길 쓴 걸 본 적이 있어. 지금의 (인터넷, 휴대폰)의 자리를 (PC 통신, 삐삐)가 차지하던 "그때 그 시절"의 얘기였다지. 사실 둘은 단절돼 있지 않아. 그보다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토익+토플, 어학 연수, 영화, 하루키, 학점, 취업 준비 등등이 그러하듯이.

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네. 역시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근데 시간이 해결해 줄까? 시간이 지난 뒤에도 뭐라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개성"들을 지닌 세대라고들 하잖아. 근데 진짜 그런가?

—박쥐

2004년 8월 18일 수요일

빗소리를 듣는 밤

blogin.com · 2004-08-18

후훗. 웬 센티멘탈리즘? 어울리지도 않는데. 거 봐, 안 어울리는 짓 하니까 비도 그쳤잖아.

그래도, 이맘 때면, 특히 이렇게 비오는 여름밤이면 여지 없이 생각나는 노래를 듣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 노래라도 듣지 않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정처없이 헤맬 것만 같은 밤.


조국과' target='_son'>mms://211.215.17.148/song/ ... ng_5_usan.asf>조국과 청춘, 우산 (조국과 청춘 5집, 1996)
출처: 노동의' target='_son'>http://www.nodong.com>노동의 소리

—박쥐

2004년 8월 14일 토요일

웹 안으로 들어온 백과전서

blogin.com · 2004-08-14

계몽 시대, 달랑베르와 디드로와 같은 백과전서파들은 지식의 대중화를 꿈꿨다. 그런데 이들의 지식/非지식 혹은 지식을 가진 자(지식인)/갖지 못한 자(대중)이라는 이분법은 이제 유효 기간을 상실한 듯하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대중들이 자신들의 지식에 "지식"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지식"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으므로.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 위키피디아가' target='_son'>http://news.empas.com/show. ... p;e=339>위키피디아가 접속 건수에서 온라인 브리태니커를 앞질렀다는 내용의 기사 가 실렸다. 전자가 무료로 서비스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후자의 오랜 명성과 탄탄한 기반 등을 고려하면 꽤 놀라운 소식이다. 개인적 감상을 덧붙인다면 아주 반가운 일이기도 하고.

위키피디아(Wikipedia) 는' target='_son'>http://en.wikipedia.org/wik ... kipedia) 는 다국어로 서비스되는 온라인 오픈 컨텐트 백과 사전이다. 2001년 카피레프트 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리처드 스톨만을 주축으로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32만 5천여 개의 아티클(영어판 기준)을 구축하는 등 단 3년 만에 웹에서 무료로 접근할 수 있는 것치고는 꽤 쓸 만한 백과사전으로서의 구색을 갖추게 됐다. 불행히도 한국어 버전은 아주아주 미약한 수준이지만 (사실 "버전"이라는 말은 적당치 못한 것이, 위키피디아는 각 언어권별로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위키피디아 불어판이 영어판의 불역본인 것만은 아니다. 영어나 미국식 문화의 독점을 경계하고 각 언어권별로 그 문화의 독자성을 존중하려 한 노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한국어판같이 아직까지 인프라가 채 확보되지 못했을 경우에는 문제가 좀 심각해지지만).

위키피디아가 이렇게 놀랍도록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네티즌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운영 체제 덕이다. 기존 백과사전의 경우 각 항목에 해당하는 글을 그 분야에 관한 전문가에게 의탁하는 것이 보통인데, 위키피디아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필진으로 참여할 수 있다. 아티클에 대한 편집권 역시 모두에게 열려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필자를 충원하는 방식에서는 요즘 각 포털 사이트에서 운영되고 있는 "지식 검색"과 비슷하되(누구나 저자/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티클이 작성되거나 참조되는 방식에서는 전통적인 "백과사전"에 좀더 가까운 형태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물론 그게 전부였다면 굳이 얘길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하이퍼 텍스트 형식이 아주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기존 백과사전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각 항목과 관련된 인터넷 링크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사전에 실릴 만한 항목이 어느 소수의 편찬 위원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원하는 항목이 없을 경우 그 항목을 신설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정말 참신한 항목들이 많다. 사전 치고는 거의 "실시간 업데이트"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문학 카테고리의 경우, 시대별 구분에 21세기의 문학까지 소개돼 있다든가, 만화도 포함돼 있다든가. 정말 기대되고 흥분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전/백과사전에 실릴 항목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일인지를 생각하면, "정보 민주주의"란 게 말처럼 쉽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문제는 각 내용들이 어느 정도의 신뢰도를 갖췄느냐 하는 것일 텐데, 정 의심스러우면 운영진이 각 아티클들 중 질적으로 훌륭하다고 뽑아놓은 것만 참조하면 되긴 하는데, 내가 찾아본 것들의 경우 나쁘지 않았다. 뭐, 논문에다가 직접 인용하기에는 뭣하겠지만 논문 주제랑 관련된 항목을 쉬엄쉬엄 읽어 내려가다가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을 듯. 단,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링크들을 하나 하나 다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이 빠져든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박쥐

2004년 8월 11일 수요일

잭슨 폴락 따라하기 놀이

blogin.com · 2004-08-11

왜 그럴 때 있잖아.

텅빈 모니터 화면이 망망대해처럼 보일 때.
저걸 언제 다 채우나 하면서 한숨을 짓고 있는데
커서가 깜빡거리면서 마구 약을 올릴 때.
간신히 손을 자판 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손에서 한 문장도, 아니 한 단어도 흘러나오지 않을 때.
녹슨 머리를 삐걱거리며 굴리고
말 안 듣는 손을 토닥거리며 움직여서
애써 써놓은 글이 그만 사라져 버렸을 때.
너무 화가 나거나 아니면 한없이 무기력해져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플 때.
아니, 말이 되든 되지 않든 고민하지 않고
그저 소리나 한 번 시원하게 내질렀으면 싶을 때.

그럴 때 가서 놀기 좋은 곳, jacksonpollak.org' target='_son'>http://www.jacksonpollock.o ... g/>jacksonpollak.org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잭슨 폴락도 이런 기분으로 캔버스 위를 뛰어다니며 물감을 흩뿌린 게 아니었을까? 한 마흔 번 중에 한 번 쯤은.

—박쥐

2004년 8월 8일 일요일

술 마시고 맑은 기운이 돌 때

blogin.com · 2004-08-08

게다가 잠까지 안 올 때,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했을 혹은 일부러 하지 않았을 일을 하는 게 좋겠지.

1. 시를 쓴다 →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시한테, 시인들에게,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2. 산더미같이 쌓인 읽거리를 해치운다 → 하, 참 읽기도 하겠다.
3. 옛 애인에게 국제 전화를 한다 → 근데 전화 번호도 모르잖아.
4. 지하철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전화를 한다 → 아, 그가 그렇게 끈적끈적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5. 청소를 한다 → 그렇지만 청소는 이미 했는걸. 청소하느라 오후 한나절을 고스란히 날려 버렸단 말이지.
6. 설거지를 한다 → 그런데 그러다 또 그릇 깨면 어쩌려고?
7. 블로깅을 한다 → 이것이 정답일세. 지금 하고 있잖아.
8. 잠을 부르기 위해 한 잔 더 한다 → 그런데 술이 없는걸. 그리고 정답이 이미 나왔는데 왜 계속 이러고 있는 거니?
9. 읽어야 할 것들 말고, 읽고 싶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읽지 못했던 것들을 읽는다. 이를테면 스포츠신문 연재 소설이나 아나이스 닌의 準포르노급 로맨스 소설 같은 것들 → 근데 스포츠신문 읽으려면 로그인을 해야 하잖아. 아이디도 기억 못하면서.
10. 지금 하고 있는 이 짓을,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고 세듯이, 잠 올 때까지 한다 → 그러다 날 새겠다. 그리고 지금 이 답안은 7. 이랑 중복되는데?
11. 지금까지 이 블로그에 털어놓지 못한 얘기를 한다. 이를테면, 이제 만으로도 스물 일곱 살이 돼버렸다는 얘기라든지, 아니면 바보같은 짓--서연 언니의 말마따나 "철학도가 아니라면 하지 못했을"--을 하는 바람에 9월에 한국에 또 갈 수밖에 없는 바보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얘기라든지 → 이런! 벌써 몇 번째 중복 답안인 거야?

—박쥐

2004년 8월 2일 월요일

프랜시스 크릭이 죽었다

blogin.com · 2004-08-02

이 말을 하려는데 왜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서의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카미유가 동생 폴에게 랭보를 발견한 기쁨을 전하기 위해 직접 학교로 찾아가던. 그 날은 공교롭게도 빅토르 위고가 죽은 날이었지. 학생들이 "빅토르 위고가 죽었다"고 외치면서 거리로 우르르 몰려가고, 폴 클로델은 그렇게 쏠려 나가는 학생들 틈에서 "깊고 반짝이고 푸른 눈"을 가진 누나 카미유를 발견하고, 그녀를 본 폴의 친구는 그에게 "네 누나니? 네 말대로 정말 깊고 반짝이고 푸른 눈을 가졌구나" 하고 속삭이고, 그 얘기를 들은 폴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고, 랭보를 발견했다며 그렇잖아도 반짝이는 눈을 한층 빛내며 말하는 카미유에게 폴은 "빅토르 위고가 죽었어" 하고 냉정하게 말하고.

제임스 왓슨과 공동으로 DNA 구조를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이 7월 29일에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한다( <가디언>의' target='_son'>http://www.guardian.co.uk/l ... tml><가디언>의 기사 ). 나야 "프랜시스 크릭이 죽었다"라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별 느낌 없지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생물학과 연이 닿아있는 사람들에게 그 소식은 아마도 클로델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에게 위고의 죽음이 가져왔던 것만큼의 효과를 가져왔으리라. 1953년에' target='_son'>http://www.nature.com/genom ... tson-crick/>1953년에 <네이처>에 실린 이들의 2페이지짜리 논문이 이후 50년 간의 생물학, 그리고 그 인접 학문들을 뒤집어 놓았음은 분명하므로.

DNA 구조의 발견은 아마도 과학사에 기록된 유명한 발명/발견들 중 가장 최근의 것에 속할 터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과학적 발견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서사--"한 명 혹은 소수의 천재에 의해", "우연히", "각종 이해 관계나 여타의 맥락들과는 무관하게, 오직 '진리'의 탐구에 대한 열정으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이 잘, 그리고 널리 팔리긴 한 모양이다. 그에 비해 크릭의 책이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퍽 유감스럽다. 왓슨이 다소 쇼비니스트인 데가 있어 주변 인물들을 묘사함에 있어 너무나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데 반해(특히 발견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결정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에 대한 왓슨의 악의적인 서술은 악명이 높다), 크릭은 확실히 훨씬 관대하면서도 겸손하며 차분한 자세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이 그 역사적' target='_son'>http://www.nature.com/genom ... watson-crick/>역사적 논문"을 쓸 때만큼은, 내 추측이지만, 크릭의 입김이 상당 부분 작용했던 것 같다. "아마도", "~라고 믿는다", "~인 것으로 보인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든지, 논문의 상당 부분이 선배 혹은 스승 혹은 동료들의 연구 성과를 언급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다든지 하는 사실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컨대. 그들이 "세기적 커플"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 크릭의 인내심이 한몫했음에는 틀림없다. 오죽하면 크릭이 한 학회장에서 처음 만난 생물학자로부터 "아,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었어요? 저는 크릭 씨의 이름이 왓슨인 줄 알았었는데" 하는 말까지 들었을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쥐

2004년 7월 30일 금요일

2004년, 프랑스 인식론의 해

blogin.com · 2004-07-30

가스통 바슐라르는 1884년에 태어났다. 올해로 120년이다.
조르주 캉길렘은 1904년에 태어났다. 올해로 100년이다.
미셸 푸코는 1984년에 죽었다. 올해로 20년이다.



지도교수님이 "그래, 그 동안 뭘 배웠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프랑스 인식론이 어떤 점에서 영미 과학사/과학철학과 다른지에 대해 배웠노라고 답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래, 어떻게 다르다니?"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나는 숨돌릴 틈도 없이 잽싸게 말했다. "그게요, 수업 시간마다 다들 제각각으로 얘기해서 말이지요."

아마도 이제는 보다 제대로 된 답변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답변에는 아마도 이런 말들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 역사주의, 이성(중심)주의 그리고/또는 합리주의, 과학주의,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의 변증법.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 도미니크 르쿠르가 자신의 석사 논문을 위해 창안한 이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역사적 인식론(l'épistémologie historique)"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통"을 세운 이는 단연 가스통 바슐라르다. 나는 그에 관해 말함에 있어 과학사가냐 과학철학자냐 인식론자냐 하는 "직업"상의 구별은 온당치 못하거나 적어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과학에 관해, 그리고 좀더 넓게는 인간의 인식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느냐다. 바슐라르가 그의 동시대 과학이 갖는 인식론적 의미에 대한 성찰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식론적 장애물"이라고 표현했던 그 이전 시대 과학의 발굴에 "역사가적 자세"로 몰두했던 것도 오로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과학사는 과학을 둘러싼 담론들의 총체가 변화해 온 궤적을 일컫는다. 그 궤적은 결코 단선적이지도, 일방향적이지도 않다. 인류의 다른 정신적/물질적 활동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호흡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라는 뉴턴의 말은 옳았다. 그 말은 천재의 겸손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사실인 것이다. 이 때의 "거인"이 뉴턴 이전의 다른 "천재"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이해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는 바슐라르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인식론자"들의 과학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비과학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들의 논의는 일견 과학/비과학 구획에 대한 포퍼의 기획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퍼가 프로이트나 맑스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명단"에서 제외해 버린 반면에, 바슐라르는 "일상적 인식"이 "과학적 인식"과 이루는 긴장에 주목하고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결국에는 의도와는 달리 인간 정신의 가장 내밀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그 "장애물들"을 복원하는/복권시키는 "일"을 내고 말았다. 그것들이야말로 과학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긴장 상태에 있게 하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수정을 가하게 하는, 그리하여 쉼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임이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직속 제자인 조르주 캉길렘에게, 그리고 그 이후의 미셸 푸코에까지 이어진다. 이들에게 "병리적인 것"이나 "광기"는 "정상적인 것"이나 "정상성"에 준하는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먼지가 수북히 쌓인 사고를 뒤져가면서까지 공인된 과학사 속에 묻혀 있던 사료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리라.



내가 그들로부터 배운, 아니 이미 다 배웠다기보다는 앞으로 한참은 더 배워야 할, 그런 태도는, 멈추지 않는 "탐구"의 정신이다. "'나'란 단지 '공부하다'라는 동사의 주어에 다름 아니다"라는 바슐라르의 말은 상아탑 속에 안주하는, 안락 의자에 파묻힌 모든 철학, 아니 모든 학을 경계하라는 말로 읽혀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인식론은 자신의 선조인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를 계승하는 동시에 넘어선다. 프랑스 인식론자들의 "과학"에 대한 경이/애착은 데카르트가 당대의 과학과 수학에 대해 보여줬던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 "합리성", "이성"에 대한 태도도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나'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변화' 혹은 '생성'의 이유들을 찾아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공부하는 나'다.


※ 미뤄뒀던 숙제를 이렇게 부족하게나마
  완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France Culture 에서
 바슐라르 탄생 12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집' target='_son'>http://www.radiofrance.fr/c ... resentation.php>특집 방송 의 힘이 컸다.
8월 한 달 동안은
 그로 인하여 행복할 것 같다.
이 방송들을 컴으로 녹음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 혹시 ram이나 rm으로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 녹음하는 방법을 아시는 분 계세요?
가르쳐 주시면... 안 잡아먹을 뿐 아니라
선물까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박쥐

2004년 7월 25일 일요일

Liseuse 4

blogin.com · 2004-07-25

Pablo Picasso, 1920
Oil on canvas, 1,02 m x 1,66 m
Centre Pompidou,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 "독서녀"들을 그린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 target='_son'>http://www.boekgrrls.nl>http://www.boekgrrls.nl 내의 사이트를 보려면 이곳을' target='_son'>http://www.boekgrrls.nl/BgD ... tm>이곳을 클릭~!

—박쥐

Liseuse 2

blogin.com · 2004-07-25

Jean-Honoré' target='_son'>http://www.nga.gov/cgi-bin/ ... 850>Jean-Honoré Fragonard, 1776
oil on canvas, 81.1 x 64.8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박쥐

Liseuse 1

blogin.com · 2004-07-25

Johannes Vermeer, 1657
Oil on canvas, 83 x 64.5 cm
Dresden, Staatliche Kunstsammlungen,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박쥐

Liseuse 3

blogin.com · 2004-07-25

Camille Corot, 1845-1850
Oil on canvas. 42.5 x 32.5 cm
E. G. Buhrle Collection, Zurich

—박쥐

2004년 7월 24일 토요일

이 정도면 선정적인가?

blogin.com · 2004-07-24

과학자들은 내기를 좋아해

지난 7월 21일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픈 호킹 박사가 더블린에서 열린 학회에서 자신의 블랙홀 이론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동료 물리학자와의 야구 백과사전 내기에서 졌음을 고백, 화제가 되고 있다. 호킹 박사는 이 외에도 아원자 입자인 힉스 보존의 존재에 대해 100달러를 걸고 美 미시건 주립대의 고든 케인 박사와 내기를 걸었던 바 있다. 다음은 영국의 가디언지가 소개한 과학적 내기들.


◈ 아이다호 대학의 스티븐 오스탯과 시카고 대학의 제이 올션스키는 지난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해 둘 중에서 지적 능력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2150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의 자손에게 500달러를 물려주기로 했다.

◈ 2002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중역 크레이그 먼디는 구글사의 간부 에릭 슈미트에게 2030년까지 조종사 없이 승객을 태우는 비행기가 상용화된다는 데에 2000달러를 걸었다. 이긴 사람은 내기에서 딴 돈을 암 연구에 기부하기로 했다.

◈ 1870년 엘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지구가 평평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올드베드포드항에서 지구의 곡률을 측정했다. 존 햄든은 월리스가 틀렸을 것이라는 데에 500파운드를 걸었으나 월리스의 측정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월리스의 부인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 남편이란 작자를 보고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까? 그의 머릿속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소.”


< 가디언 2004/7/22 >

—박쥐

2004년 7월 21일 수요일

몽실에게

blogin.com · 2004-07-21

그래, 걱정해 준 덕분에 잘 왔다. 비행기도 안 놓치고 말이야. 전날 짐을 싸느라 한숨도 못 잔 탓에 오는 내내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긴 했지만. 꿈속에서 미소를 지었는데 실제로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고 또 그런 나를 바라보는 옆사람의 시선이 피부로 느껴지는 상태. 아마도 그 상태에서 헛소리까지 해대지 않았나 싶어. 옆사람들과 승무원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더군. 

도착해서는 온 시내가 무섭도록 조용해서 좀 놀랐다. 다들 휴가를 간 모양이야. 택시 기사에게 철학을 공부한다고 했더니 그가 택시와 철학을 같이 언급하면서 무슨 농담--아마도 고급한, 철학적인 것이었을--을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프랑스에서는 택시 기사도 플라톤을 논한다고 내나라 사람들은 말한다"고 응수할까 했지만 관뒀어. '도'라는 조사를 표현하기 위해 가져다 붙여야 할 부사 même(even에 해당하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므로. 내릴 땐 그에게 15%에 달하는 팁을 주었어. 내 한끼 식사값에 해당하는. 그가 "남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알량한 복수심/자존심에서였던 듯.

집에 와보니 냉장고 속에 곰팡이가 피었더군. 그리고 디카와 노트북을 연결할 잭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기대했던 한 과목마저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역사 하나만 턱걸이로 붙은 셈이야.

근데 무슨 일인 게냐? 혹시 이번에 만났을 적에 너도 명랑한 척 했던 게냐? 옛 애인에게 결혼할 새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는 일이 네게 일어났을 리는 없고. 그래. 사실 우리(함부로 "우리"란 말 썼다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길)같은 사람들에게 "왜 우울하냐?"는 물음만큼 우문이 어딨겠냐. 차라리 "오늘은 웬일로 우울해 보이지 않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지.

혹시 요즘 비트겐슈타인이랑 니체를 한꺼번에 공부 하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

"하고 싶은 말은 혀끝을 맴돌뿐
튀어나오지 않는다.



하고 픈 말도
사실은 그림자다.



무형의 것을 가지겠노라...
뒤섞여 가는 문자들"



사실 맞는 말이다. 그치만 그 "하고 싶은 말"이, 비록 네말처럼 "혀끝을 맴돌뿐 튀어나오지 않"을지라도, 설령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맘에서 맘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밥 잘 먹고, 멍들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네 말, 그게 곧 내가 네게 하고픈 말이다.

—박쥐

2004년 7월 20일 화요일

시내 서점 유람기

blogin.com · 2004-07-20

이 짧은 여정의 마지막을 서점 나들이로 장식했던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비록 구하려던 책을 하나도 못 찾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계간지들이 여전히 계절이 변하는 속도와는 무관한 발간 행태(!)를 보이고 있다든지(7월 중순이 다 돼가는 마당에 여름호 찾기가 그렇게 힘들다니!!) 여러가지 반가운 번역서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는 등등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날 기쁘게 했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김선우의 새 시집이었다.

그 밖에 책에 관한한 유난히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는 나를 열광시키는 것들이 몇몇 있었다. 우선 창비시선의 북커버 디자인이 바뀌었다. 몹시도 깔끔하다. 경쟁사(?)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째 같은 디자인을 고수해 오고 있었던 데 반해, 창비의 <시선>은 그만하면 꽤나 자주 갈린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문지의 시집들에 그려진 시인들의 인물컷과 뒷표지에 실리는 시인의 말을 좋아하지만.

<살림지식총서>도 무척 반가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으려는 것이 이 총서의 기획 의도라는데, 거기에서의 "지식"이 얕거나 편협한 수준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UFO에서부터 마피아나 조폭 등 참신한 주제들도 많고. 저자들이 모두 국내 학자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비슷한 컨셉을 갖춘 책세상의 <우리시대문고>에 비하면 분량도 짧고 가격도 싸다.

사실 오늘의 나들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보와 영풍 두 "문고"들의 "변신"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영풍의 약진과 교보의 몰락이었다. 교보의 분류 체계는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이번에 보니 "남성소설"이라는 코너가 생겼다. "인터넷소설" 코너 옆이다. 시집을 위한 진열장과 진열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영풍은 예전에 비해 형편이 아주 많이 나아진 듯했다. 한결 차분해진 느낌. 심지어 교보보다 넓어 보였다. 다갈색 목조 서가들도 눈에 들었다. 

추가 사항. 생각나는 대로.

1.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린 박남철의 시는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다. 젠장. 난 <세계의 문학>을 좋아했었다구.

2. 오늘 드디어 수중에 넣은 김광석 <다시부르기2> 중 "불행아. 그리고' target='_son'>http://www.gaseum.co.kr/300 ... 宣�. 그리고 작곡자 김의철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불행아.' target='_son'>mms://wm-001.cafe24.com/ba ... _kec.wma>불행아. 말하자면 이 노래의 오리지널 버전인데, 1974년 "저 하늘의 구름따라"라는 제목으로 발표됐었단다. 그리고 결국 코스모스의 앨범은 구하지 못했다.

3. 오늘 대학로에서 청계천을 거쳐 을지로로 진입하려다가 그만... 시장이 바뀌거나 시장의 에코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바뀌기 전까지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4.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이기상 선생의 <이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약간 실망이다. 선생 특유의 언어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제외하면. 물론 동양의 고전들에 뒤늦게 눈을 떠 새삼스레 "우리 철학"을 강조하는 서양철학 전공자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들의 그러한 고충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서양은 이러한데 동양은 저러하며, 현대의 모든 병리 현상은 서양의 이러함 때문이니 동양의 저러함에 호소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이분화나 단순화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게다.

5. 서광사의 플라톤 전집 출간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못 본 새에 <크리톤...>도 나왔다. 근데 계속 하드 커버로만 낼 셈인가? 박종현 선생의 역주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6. 계간 <문화과학>의 표지도 바뀌었다. 근데 제호의 글씨체가 좀 이상하다. 안 어울린다.

—박쥐

2004년 7월 17일 토요일

내 남동생의 결혼식

blogin.com · 2004-07-17

1. 비오는 날의 결혼식,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빗소리--겁나게 세찬--와 성가와 희뿌옇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비에 젖은 연미복. 난 이런 식의 조화를 좋아한다. 

2. 앞으로 얄미운 시누이 대신 무서운 누나의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올케가 너무 예쁜지라.
3. 결혼과 관련한 이런 저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인상 찌푸리지 않고 "쿨"하게 응대하는 내 자신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아예 내쪽에서 먼저 저들의 방식대로 말한 적도 있다. "오늘의 컨셉이 '귀여움'이냐?"라는 질문에 "신랑의 누나가 아니라 신랑의 여동생처럼 보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젠장.

4. "따까리" 노릇을 계속 해서인지, 몹시 피곤하다. 동생 부부(아, 이 두 단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쓰일 수 있는 말이었다니!)는 별로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좋을까?

—박쥐

2004년 7월 13일 화요일

돌아온 탕아

blogin.com · 2004-07-13

늙은 농부가 자신의 곁에서 부지런히 일했던 작은 아들보다 몇 년 동안 집을 비우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만 축냈던 큰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을 반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난 나의 9개월 간의 부재를 증명할 변화의 징후/증거를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의 속도는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내 눈이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않았다는 얘기.

옛 애인을 만나보고 싶은 열망은 이 땅에 발을 다시금 내딛은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산에는 가고 싶었는데. 팔공산. 그런데 북한산, 아니 남산조차 오르기 힘들 것 같다. 즐겨 다니던 집앞 한강변에 나가볼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그곳에 가끔씩 들러 휴식을 취하던 백로 역시 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하다. 사진으로 만족해야겠지.

—박쥐

2004년 7월 9일 금요일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blogin.com · 2004-07-09

변한 게 있다면 할머니가 많이 늙으셨다는 것과 우리집 현관문에 <스타워즈>에 나오는 것 같은 출입 통제 장치가 설치됐다는 것과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아니 이미 생겼다는  것.

변치 않은 게 있다면 내 방이 여전히 읽(었)어야 할, 그러나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하다는 것.

—박쥐

2004년 7월 6일 화요일

이 여자 감독을 아세요?

blogin.com · 2004-07-06

카트린 코르시니(Catherine Corsini). 그녀와 배우 카린 비아르(Karin Viard)를 <새로운 이브(La nouvelle Eve>(1998년)에서 만났던 날, 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행복감은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서 훨씬 더해졌어요. 세상에, 그녀가 <리허설(La répétition)>(2000년)의 감독이었다니. 그 영화를 본 뒤 전체의 10%밖에 이해하지 못한 주제에 "역시, 여자들이 만들면 뭔가 달라도 달라" 하고 마냥 들떴던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일인데. 세상에.

혹자는 <새로운 이브>를 일컬어 "프랑스판 앨리 맥빌"이라고도 하더군요. 사실 그래요. 30대 여성의 사랑. 아니, 어쩌면 더 심해요. 카미유는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인 "할리퀸 로맨스"의 주인공에 엘리보다도 더 가깝지요. 심지어 카미유는 앨리만큼 멋진 전문 직업 여성도 아녜요.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수영장 코치로 일하죠. 그러면서도 유부남 알렉시의 사랑을 얻기 위해 정치적 관심사와는 절대적으로 무관한 사회당 일을 시작하고, 알렉시가 지방으로 전당 대회를 가면 직장 다 팽개치고 따라 나서지요(거기에 호텔에 "마담 엥겔스"라는 이름으로 예약을 하는 센스까지!). 그래서 어떻게 되냐구요? 결국 카미유는 알렉시와 사랑을 이뤄요. 앨리는 빌리와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도, 본조비와도 연결되지 않았는데 말예요. 알다시피 "연결이 되는" 쪽이 "연결이 되지 않는" 쪽보다 훨씬 더 "할리퀸"스럽잖아요.

그런데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게 전부가 아녜요, 결코. 내가 그 감독이랑 그 배우가 나란히 서 있는 걸 직접 봐서인지는 몰라도, 코르시니가 그 누구보다 여자 배우들을 "잘 다루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의미에서 잘 다루는 거냐면요, 배우에게 감독 자신의 얘기를 하게 하면서도 그 배우를 영화 안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생기 있는 존재로 만들거든요. <리허설>에서도 그랬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상생"의 모습이 아닐 수 없어요, 정말. 감독과 배우 사이에서 그렇게 "주고 받는" 관계, 참 찾기 힘들잖아요. 저 위에다가 붙여놓은 감독과 배우 엠마뉴엘 베아르의 사진을 보세요. 정말 다정해 보이지요?

그녀의 또 다른 미덕은 레즈비어니즘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룰 줄 안다는 데 있어요. 카미유의 가장 절친한 여자 친구 두 명은 레즈비언 커플인데,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 중 가장 "이성적"이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요. 카미유는 알렉시와의 사랑이 뜻대로 잘 안 되자 그 친구들과 바에 가서 낯선 여자에게 눈길을 보내고 진한 키스를 나눠요. 그러다가 그 여자의 애인인 또 다른 낯선 여자에게 얻어맞고, 카미유의 친구들이 "복수"를 하고, 그러면서 바 안에서 소동이 일어나게 되지요. <리허설>에서도 그랬어요. 둘도 없는 친구들인 두 여자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지요. 물론 나중에는 거의 원수지간이 되지만. 그렇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의 두 사람의 감정 변화, 아, 그건 정말 아무나 묘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어요. 나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으면서도 세속적 입맛을 채 버리지 못한 촌스런 사람한테 코르시니의 접근법은 정말 끝내주는 것이 아닐 수 없어요.

이 영화를 보고 박찬옥이 여자들 얘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어요. 일상이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재능을 좀더 잘 살릴 수 있을 텐데. 홍상수도 결국은 자기 얘기니까 그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었던 거 아니었겠어요?

그리고 내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고 100%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채 20대가 되지 않았거나 스무살을 갓 넘긴 "소녀들"에게 자신을 투영시키기 힘든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요. 뭐, 사실, 카미유가 나이 빼고는 나와 그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만큼은 마냥 우러러 보거나 아래로 내려다볼 일 없이 눈높이를 맞출 수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사진 출처 : 카트린' target='_son'>http://ccorsini.online.fr/>카트린 코르시니가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

—박쥐

2004년 7월 5일 월요일

Tu me manques

blogin.com · 2004-07-05

... 방금 위에 쓴 글을 읽고는 깜짝 놀랐더랬어, 내가 세 달 전에 저랬나, 저게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어서. 다시 읽어보니 참 틀린 곳도 많구나. 웬만한 것들은 읽으면서 고쳐놓았는데, manquer에 관한 부분은 고치지 못했어. 이 동사의 정확한 쓰임새를 알게 된 건 글을 쓰고 난 이후의 일인데, 용법을 제대로 알고 나니까 오히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불어로 옮길 자신이 없어지더라구. 아마 불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도 그럴걸?
 
불어는 참 이상한 언어야. 의인화형 동사가 참 많이 쓰여. 하다못해 “나 피곤해”고 말하려고 해도, 피곤한 당사자가 아니라 피곤하게 만드는 어떤 것--사물이나 사람--이 주어가 되거든. 영어에서는 수동형이 쓰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피곤함을 느끼는 당사자의 주격으로서의 위치는 유지되는데 말이지. “그리워하다”도 그런 면에서 불어를 배우는 많은 외국인들이 아주 많이 낯설어 하는 표현 중 하난데, 내 나름대로 그 이유를 생각해 봤어(이곳 불어 선생들이 자기네들의 불규칙적인 문법에 규칙이나 이유를 갖다 붙여서 설명하려는 자세(!)가 참 인상적이었거든. 라깡의 l'explétif ne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돼). 내가 널 그리워 하는 건, 내게 있어야 할 네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알다시피 manquer의 또 다른 뜻은 '누락되다', '생략되다'니까). 내 안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 네가 날 빠져 나갔다는 것. 어쩌면 이네들의 방식이, "I miss you" 나 "난 네가 그리워"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리워하다”를 가장 절절하게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지도 모르겠어.


- 아마도 부치지 못할 편지(2003~2004) 중에서 발췌






내가 계속해서 빌빌대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몇 주 전에 내린 결론은 향수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낯선 자"로 살아왔던 내게는 그저 낯설기만 한. 아니,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내게는 향수병이 현대 의학으로든 미래의 의학으로든 고칠 수 없을 뿐더러 평생동안 달고 살아야 할 무서운 병일수도. 그래. 그리움의 대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한없이 "모호"한 채로 영원히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주체"의 그리워 하는 "상태"만이 있을 뿐.

아, 하룻밤만 자면 이곳과도 잠시나마 안녕이다.

—박쥐

2004년 7월 2일 금요일

알렝 레네의 판타지, 그 진정성

blogin.com · 2004-07-02

알렝 레네(Alain Resnais) 감독의 1968년작 를 2004년에 본다는 것은 제법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웬갖 최첨단 기술을 앞세운 특수 효과와 웬만한 일상적 경험과 보통의 상상력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 스토리로 무장한 영화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아무런 장식이나 효과도 가미되지 않은 건조한 화면들--심지어 에 등장했던 조악한 시간 여행용 가속 장치같은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을 통해 마주 대하기란, 이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분명 고문일 것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클로드 리데(Claude Ridder)는 가슴에 총을 쏘는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다. 퇴원하려는 그 앞에 낯선 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클로드를 크레스펠(Crespel)이라는,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밀 연구소로 데려간다. 크레스펠에서는 "시간"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클로드의 동의를 구한 후 그의 전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1분의 순간으로 "되돌려" 보낸다. 1분 후에는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피실험자를 안심시키면서. 그런데 실험은 순탄치 않게 전개된다. 클로드가 목표했던 때--클로드가 연인 카트린과 바닷가에서 함께 했던 순간--에 도달하자마자, 시간은 클로드를 그 이전과 이후의 여러 다른 순간들로 데려간다.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클로드와 카트린이 처음 만난 자리, 카트린이 죽은 글래스고의 한 호텔,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던 세느 강의 다리나 파리의 거리, 카트린을 잃고 방황하는 클로드가 "시간이 참 안 간다"며 푸념한채 앉아 있는 사무실... 실험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실험실 밖으로 나온 과학자들은 가슴에 총을 맞은 클로드를 발견한다.

나 역시 이 시대를 겨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관객 중 한 명에 불과한지라 이 영화를 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지루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법을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내 독해력 및 불어 실력이 부족했음을 십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 영화가 수십 년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문법이 낯설다는 사실을 부인킨 힘들 것 같다. 헐리웃식의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객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듯한 반복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클로드와 카트린의 바닷가에서의 즐거웠던 한 때를 담은 컷은 열댓번 정도 반복된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난해한 문법이 "판타지"를 위한 가장 탁월한 장치가 되고, 이 영화를 진정한 판타지로 만든다. 사실 판타지의 진정성을 말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진정한 판타지"는 형용 모순일 것이다. "진정성(authenticity)"을, 어떤 종류든 기존의 "정격"이나 "규범"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판가름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판타지"를, 아주 미흡하게나마,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기존의 모든 것을 넘어서거나 뒤섞어나 갈아엎는 장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두 가지 조건을 아주 잘 만족하는 동시에 그 조건들을 뛰어넘는다. "판타지"를 단순히 "장르적"으로가 아니라 좀더 넓고도 깊은 의미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제아무리 "판타스틱"한 아이디어도 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탄력적 시간"이라는 개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과거를 (내 의지대로) 떠올리거나 과거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잔뜩 뭉뚱그려지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는 곳에서 판타지가 생성된다. 이렇게 볼 때(라기보다는 아주 심하게 비약하자면), "시간 여행"의 모티브는 가장 태고적이고 원시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에서 시간 여행에 대한 반론으로서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것이 "모친 살해 패러독스"라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시간 여행 장치로 쓰인 기구가 자궁(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갖는 형태와 질감을 연상하면 된다)을 닮아 있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 같다.

흠. 이렇게 얘기해 놓고 나니 이나 팬들에게 면박을 당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으나. 나는 그보다는 살짝 어설픈, 즉 CG를 쓰더라도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판타스틱"한 나 가 좋단 말이지. 뭐 거기에 내 반미 정서가 개입돼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는 무척 보고 싶단 말이지.

—박쥐

2004년 7월 1일 목요일

오노 요코 특집

blogin.com · 2004-07-01


이교도이자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그러나 마녀로 찍혔던,
 그리하여 돌에 두들겨 맞거나 물에 빠지거나
 묶인 채 불에 타서 죽은
 500만 명 이상의 여성들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공포입니다.
 지혜로움의 반대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혼란스러움입니다.
여성들의 힘, 지혜와 사랑의 힘을 되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구와 우주를 끔찍한 파괴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 오노 요코, 2003년 11월 11일.


오노 요코, From My Window, 2003, 부분
Galerie Point d'ironie 소장

*중세 마녀 재판 그림과 작가의 어린 시절 및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합성한 작품.
뉴욕의 자기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모습과 "마녀"들의 그림이 중첩되는 경험을 하고는
이 작품을 구상했단다.


♬보너스 음악
 
http://www.gaseum.co.kr/300 ... 5&Form.y=3> face=바탕>yoko ono & yo la tango, "hedwigs lament + exquisite corpse" 
*영화 Hedwig and the Angry Inch에 실린 두 곡을 오노 요코가 다시 부른 곡. 아네스 바르다의 "할머니 랩"에 이은 멋진 "할머니 rock"이라고나 할까.

—박쥐

2004년 6월 29일 화요일

벼랑

blogin.com · 2004-06-29

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서 있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탓이었다. 어깨 너머로 오싹하게 전해오는 싸늘한 공기를 모른척, 자꾸만 모른척 했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다 틀렸다.

—박쥐

2004년 6월 22일 화요일

논리만큼 좋은 세상

blogin.com · 2004-06-22

니체는 "모든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던 갈릴레오가 있었기에 근대 과학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참정권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세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아주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연결사는 논리와는 무관하다. 내가 아는 한 그에 해당하는 논리 기호는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대개 그 말이 딛고 있는 체계 내에 설 자리가 없는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체계 내의 다른 문장들과 모순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체제전복적"이다. 그 효과는 "그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집합론에 대해 갖는 것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래서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문장이 기성의 체계 혹은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는 걸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 결정이 철회돼서는 안 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은 감행되어야 한다.


그래. 어차피 이 모든 게 논리와는 무관하다. 혹은 ("다수"와 "국익"의 논리에 입각할 때) 논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저 전제와 저 결론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정치역학적 전제들이 숨어 있다. 혹은 내 논리 체계와 그들의 논리 체계는 다르다. 혹은 세상이 논리로 다 되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적 부적합성을 지적한다면 분명 그건 자기 모순이 될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만큼은 제발 논리대로 됐으면 좋겠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러므로 파병 결정은 철회돼야 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파병이 감행되어서는 안 된다.

—박쥐

2004년 6월 20일 일요일

... 그러나 이성이 전부는 아니다

blogin.com · 2004-06-20

오는 6월 25일은 푸코가 죽은 지 꼭 20년이 되는 날. 오늘자 <리베라시옹>은 푸코를 기념하는 특별판을 냈다. 이걸 보고 나는 지난 번의 <리베라시옹> 및 이미지에 대한 폄하 발언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12면에 달하는 특집면 중 한 면 전체를 장식한 저 위의 사진 때문이다.

사진은 80년대 초 푸코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사진 작가이자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고 또 푸코의 애인이었으며 푸코와 같은 병으로 죽은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의 작품이다. 이 사진에서의 푸코는 지금껏 내가 보아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저 엉거주춤한 포즈와 어색한 미소라니. 세상의 모든 권력에 대항해 평생을 바쳐 싸웠던 이 투쟁가-철학자도 자신이 가장 귀애했던 사람의 카메라 앞에서는 저렇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나 보다.
 
푸코가 폐부를 찌를 듯한 시선뿐 아니라 저렇게 따뜻하고 애틋한 눈빛의 소유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저 사진은, 내게는 무척이나 값진 소득이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거리 시위, 강연, 토론 등의 자리에서의, 즉 대중 앞에서의 푸코는 그 얼마나 젊고 아름답고 빛나고 강한 존재였던가. 그런 존재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보는 일은 늘 야릇한 쾌감을 안겨주게 마련이지만, 이 사진에는 단순히 관음증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박쥐

2004년 6월 12일 토요일

사람은 아름답지 않지만 세상은 아름답다

blogin.com · 2004-06-12

인간적 욕망(Désir)은 동물적 욕망과 다르다. 동물적 욕망은 생명 활동을 하고 생명에 대한 감성만을 지닌 자연적 존재를 이룬다. 반면에 인간적 욕망은 실제의, "구체적인(positif)", 주어진 대상이 아니라 다른 욕망을 향해 있다.
 
예를 들어 남녀 사이의 욕망은, 육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할 때, 욕망을 욕망으로서, 즉 욕망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바로 그 욕망을 "소유"하거나 그 욕망에 "동화"되고자 할 때, 달리 말해 "욕망"되거나 "사랑"받고자 할 때, 또는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서 갖는 자신의 인간적 가치에 따라 "인정"받고자 할 때, 오직 그 때에만 인간적이다.
 
물론 인간적 욕망이 자연의 대상을 향할 수도 있다. 단 이 때의 욕망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가 욕망하는 것과 동일한 대상을 욕망할 때, 그리하여 바로 그/그녀의 욕망에 의해 "매개"될 때, 오직 그 때에만 인간적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욕망하고 있는 것을, 단지 그들이 욕망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다.

이렇듯,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무용한 대상도 욕망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오직 인간적 욕망일 수 있을 뿐이며, 동물의 세계(réalité)와는 다른 것으로서의 인간의 현실(réalité)이 탄생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이러한 욕망들을 충족시키는 작용에 의해서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욕망된 욕망들(Désirs désirés)의 역사인 것이다.


- 알렉상드르 코제브, <헤겔철학입문> 서문 중에서



프레시안 : 지난 목요일(5월20일)에 방송된 <TV, 책을 말하다>에서 고 선생은 "나는 한번도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적이 없었다"고 얘기했다. 덧붙여 고 선생은 "인간이 선천적 측면이 더 지배적이냐, 후천적 측면이 더 지배적이냐. 선천적인 게 더 큰 것 같은데 이렇게 얘기하면 위험하니까 후천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인상 깊게 들었다.

홍세화 : 사실 맞는 말이지.

프레시안 : 최근 한 강연에서 홍세화 선생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다. "인간이 끊임없이 이성을 통한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기와 다른 존재를 배제하고 억누르려는 '저급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고 선생도 방금 언급한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제 인간은 '희망의 원리'보다는 '책임의 원리'를 강조해야 할 때"라며 "인간은 언제든지 추악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어떻게 하면 덜 추악해질 수 있을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얘기는 사회생물학자나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고종석 : 나는 사회생물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우익 인종주의자들의 논리 체계의 유사성을 부각시켜 비난하지 않으면, 약육강식을 합리화하게 된다.
 
프레시안 :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진화심리학자들의 상당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그들도 홍 선생이나 고 선생의 주장처럼 '이성의 자기 성찰'을 중요하게 여긴다. 인간은 가만히 두면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어 언제든 동물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성의 자기 성찰'과 제도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종석 : 물론 그런 식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딱 그 논리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언제든지 우익 인종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그 점을 우려해야 한다.

- <프레시안>' target='_son'>http://www.pressian.com/scr ... �화><프레시안> 기획 연재 "대화" :
 고종석과 홍세화의 대담 (2003.6.5)에서

—박쥐

2004년 6월 10일 목요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다

blogin.com · 2004-06-10

1.

지난 6월 6일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지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덕분에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는 해방을 맞았다.

시라크는 때맞춰 방문한 부시 앞에서 이라크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과 미국의 연합군 가담이 등가라는 데에 별 무리 없이 합의했다. 각 언론들도 60년전 그날의 이미지를 살포하느라 바쁘다. 전쟁 이미지는 이렇게 해서 또 (재)생산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연합군이라는 거대한 군사 집합체가 해방을 안겨준 일등 공신으로 등극한다(레지스탕의 이미지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 이러한 전쟁은 전쟁으로 갚아야 한다; 전쟁은 전쟁으로 막아야 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필요악이거나 심지어 善이기까지 하다.

2.

"이성이 세상을 다스린다"라는 큰 제목 하에 다섯 개의 연극이 연이어 공연된단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평화>, 셰익스피어의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하이네 뮐러의 <미션> 등. 전쟁, 평화, 권력이 그 주제다. 이 작품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무엇보다 전체 주제와 제목이 시선을 확 잡아끈다. 이성이 세상을 다스린단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란다.

3.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다", 참으로 헤겔적인 명제다. 경험적으로는 분명 거짓이다. 반례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터. 아우슈비츠를 보고도, 9.11을 경험하고도, 이라크전을 지켜 보고도 그런 소릴 할 수가 있나. 지금이 날카로운 지성을 지니고서도 나폴레옹의 진군을 바라보며 역사가 완성됐음을 선언할 수 있었던 19세기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반박하고 폐기해버릴 만한 것은 아니다. 쉴새없이 "감성"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전쟁의 잔혹성보다는 그 잔혹성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또 다른 전쟁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는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저 소박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따르고 싶어졌다 : 세상을 다스릴 것은, 다스려야 할 것은 이성이다.

4.

바슐라르는 독일 점령기에 죽은 사상가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점령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훌륭한 사상들이 싹트고 꽃필 수 있었겠냐면서.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니다. 수학철학자인 장 까바이예스, 그리고 아날 학파를 창시한 것으로 유명한 마르크 블로흐, 이들은 모두 레지스탕으로 일하다가 체포되었고, 해방이 되기 전에 감옥에서 죽었다. 흔히 프랑스 수학철학이 까바이예스를 잃음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게됐다고들 한다. 블로흐의 경우, 감옥에서 쓴 저작들이 그들 사후에 출간돼서 이후 역사학계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가 그렇게 죽지만 않았더라면..." 으로 시작되는 조건문을 입에 올리곤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트라우마가 프랑스의 합리주의를 또 다른 방식으로 뿌리내리게끔 했고, 그것이 오늘의 프랑스 사상을 태동케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철학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방식 중에는 양립 불가능한 것도 포함된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로 하여금 아우슈비츠 이후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하고 "이성"이 몰락하게 된 원인을 이성의 내부 혹은 이성 자신에서 찾게 했다. 한편으로 1차대전 직후 빈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위기"를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 이성을 세상에 더욱 공고하게 뿌리내리게 하려는 기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이성은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1789년의 혁명으로부터 오늘의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쟁취한 자유와 평등과 인류애는 모두 그들에게 이성이라는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성을 구제하는 쪽을 택했고, 그러다가 68년 즈음에 일부는 다른 쪽으로 돌아섰다.

현재 프랑스 내 과학철학/인식론 진영은 대부분 그때 그렇게 돌아서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에게 "이성"은 곧 "과학"이고, 따라서 과학 역시 이성과 마찬가지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과학, 기술, 사회(STS)"를 강의하던 교수는 프랑스 내에서 GMO나 에너지 등에 대한 논의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정도로 "과학주의(scientisme)"가 공고히 자리를 잡고 있고, 이 과학주의의 뒤에는 계몽주의의 역사와 그 뒤로 쭉 이어져내려온 "이성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라투르도 비슷한 푸념을 늘어놓았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제로 나는 라투르가 프랑스 내에서는 거의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의 이성에 대한 신념이 결코 프랑스 혁명 당시의 그것처럼 특정 계급이나 성별에 편향된 인간중심주의는 아니라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과학 정신"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장애물"들에, 깡길렘은 인간의 괴물성(monstruosité)에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몰두했다. 물론 각각이 이 "반이성적인" 것들에 부여한 의미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둘다 그것들을 "이성"의 역사에 포함시키거나 아니면 전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성의 또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즉 역사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그네들의 과학주의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들의 이성(Raison)에 대한 믿음에 그럴 만한 이유(raison)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5.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다스려야 할 것은 이성이다. 사실 여기에서의 이성은 참으로 추상적이기 그지 없는 개념이다.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아무도 이성을 제대로 정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점은 분명하다. 이성은 어느 누구 한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소수의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닌, 모두에게, 각자의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속해 있는 어떤 것이다.

각각의 이성들을 촉발시키기 위해 굳이 새삼스레 참혹한 전쟁 이미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2차 대전 이후, 베트남전 이후, 9.11 이후, 이성은 이미 질릴대로 질려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 폭격에 놀라 도망가는 어린 베트남 여자 아이를 찍은 사진 한 장이 반전 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사실이다. 미선이/효순이의 시신을 담은 사진들이 촛불 시위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성이, 우리 모두의 이성이, 이미 그 전부터 베트남전이나 미군의 주둔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이미지가 단순히 아이디어나 다른 텍스트보다 못한 재현의 매개체를 넘어 그것들과 분리되기 힘든 엄연한 하나의 독립된 그 어떤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논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성의 임무다.

6.

나는 슬프다. "HAPPY D-DAY"라는 큼지막한 제호를 단 6월 6일자 <리베라시옹> 특별판을 삼으로써 전쟁 이미지를 소비해 버렸기에. 거기에 내가 기대했던 것은 없었고, 도리어 내 이성이 상처를 입었다. 나는 또 슬프다. <이성이 세계를 다스린다>라는 공연에 가지 못할 것 같기에. 내가 기대하는, 내 이성이 흡족해 할만한 것이 거기에 있을진대.

—박쥐

2004년 6월 4일 금요일

푸코에게 바치는 유쾌한 헌사

blogin.com · 2004-06-04

시험 공부를 하던 중, 올해가 푸코가 죽은 지 20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내가 공부하는 방식은 왜 이다지도 하이퍼텍스트적이란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깡길렘 → 깡길렘에 관한 푸코의 글 → 푸코 → 푸코에 관한 글들과 웹사이트들. 그러다가 급기야는 푸코에게서 영감을 받은 노래를 발견하는 데에 이르렀다. 미국의 대학 교수들이 모여 만든 아마추어 밴드 The Professors(이름도 참...) 가 부른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 (low-fi version) "가 그것이다.

사운드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인간은 언젠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지워질 것이다"와 같은 푸코의 명구를 그런 방식으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다 유쾌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 ABC song 내지는 선전가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고 말하면 혼나거나 비웃음 당하겠지? 그들은 "예술"을 단지 사상을 선전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걸 계몽적이고 (전)근대적이라며, 달리 말해 촌스럽다며 비웃을 테니까.

한편으로 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심미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를 최소화해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같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노래 가사에 "discourse"나 "foundation"이나 "민중"이나 "해방"이 들어가는 노래가 사람 맘을 움직이는 방식과 그 효과는 완곡한 어법으로 표현한 노래의 그것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존 레논의 "Imagine"과 "Power to the People"의 차이 혹은 "아침 이슬"과 "님을 위한 행진곡"의 차이. 전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 맥락을 고려했을 때 또 다른 미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경우. 후자는 "美"의 범주 하에서라기보다는 그 외의 맥락 안에서 감상하는 편이 보다 적절한 경우.

어쨌든(아, 하이퍼텍스추얼리티는 내 블로깅의 주된 특성이기도 하다. "어쨌든"이 유난히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 노래는 맥락과 가사를 고려하고 들을 때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종류에 속한다.

I can't find no foundations
There aint no truth anymore
I can't find no foundations
There aint no truth anymore
I'm caught in multiple perspectives
I can't think straight anymore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Like a face drawn in sand
At the edge of the sea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I am not the only one
Who writes to have no fac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In discourse you have no survival
You only establish your death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난 여러 개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어
난 이제 똑바로 사고할 수 없어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바닷가 모래 위의 그림처럼

내가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내게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얼굴을 지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단지 나뿐은 아니니까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단지 죽음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야


The Professors,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full version)
Lyrics by Gary Radford,  Marie Radford,
 and Michel Foucault
Music by Stephen Cooper and Gary Radford


◈ 출처와 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클릭하면'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lt.html>클릭하면 됨.
◈ 번역은 내가 했는데, "토대"나 "담론" 같은 학적 용어/번역어들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게 해당 용어에 관해 원문이 주는 묘미를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래도 부족하게나마 시적 완성도를 살려보고 싶은 마음에 약간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의역했음. 그러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원문의 내용이나 푸코의 사상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큼. 특히 <지식의 고고학>을 모티브로 한 네 번째 연의 경우가 그러함. "삶"이라고 할지 "생명"이라고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삶"이 더 시적인 것 같아서 그걸로 택했음.
◈ 사진 출처 :  http://www.nexo.org/revisiones06.htm target=_top>www.nexo.org/ revisiones06.htm.

—박쥐

2004년 6월 2일 수요일

술먹고 하는 얘기

blogin.com · 2004-06-02

이럴 땐 만화를 그릴 수 있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역동적인 구성이 가능하거든. 이렇게 글만 쫘악 늘어놓으려다 보니까 쓸데없이 일관성이나 문법 같은 것들을 의식하게 되는 거라구. 어쨌든 눈앞에 둔 참이슬이랑 김치전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오늘만큼은 그런 것들로부터 좀 자유로워져 보자구.

술 먹으면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하고 돌이켜 보니까, 대개 이런 식이더군
:

1. 술이나 안주나 술집에 대한 품평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김치전을 부칠 땐 말야, 두껍게 풀면 안돼. 겉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도 속은 안 익게 되거든. "

"아, 참이슬 팩소주는 맹숭맹숭하네. 배타고 오는 동안 알콜 성분이 날아가기라도 했나? 지리산에서 먹던 것과도 달라. 기압이나 지리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 게 틀림 없어. 똑같은 참이슬이라도 술집마다 농도가 다르듯이 말이야. 다들 그럴 리가 있냐고 날 구박했지만, 진짜야. 어떤 데서는 얼음처럼 차갑게 해서 주고, 어떤 데서는 뜨뜨미지근하게 해서 준다구."

2. 사는 얘기

"요즘 왜 이리 공부가 하기 싫은지 모르겠어. 다들 내가 공부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공부를 더 안하고 있는 것 같아. 아, 내가 대학원 들어가서는 공부를 좀 하긴 했지. 그땐 학과 공부가 되게 재밌었거든. 학생회 일도 재밌었구. 나는 말야, 원래 주어진 일보다는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일을 더 잘하고 그런 일에 열심이거든. 근데 철학을 시작하니까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본업을 부업같이 하고 부업을 본업같이 해도 that works! 였던 거야. 물론 요즘도 그렇지. 소설을 읽거나 웹 서핑을 하거나 심지어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그게 다 불어 공부를 위한 게 되니까. 근데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졌어."

"아, 이러면 정말 뭐가 되는 거지? 부모님들은 딸이 노벨 물리학상을 탈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접긴 했어도 그래도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데 말야 (그들에겐 내가 '철학' 중에서도 '과학철학'을 한다는 게 중요해. 왜냐고?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대학다닐 때 철학과 사람이 엄마를 쫓아다녔던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엄마가 '철학하는 인간들은 죄다 한여름에 바바리 코트 입고 여대 앞에 나타나서 인생이 뭐냐고 묻는다'고 악의적으로 일반화했겠어?). 나한테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준 친구들은 또 어떻고?" 

"왜 선생들은 이메일을 받은 뒤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답장을 하는 걸까. 어제 숙제 제출 기한을 연장해 달라는 멜을 보냈거든. 근데 답이 없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그래도 여기 선생들은 그런 면에서는 너그러운 편이긴 하지만..."

"난 큰 시험에 약해. 지금까지 줄곧 그랬어. 왜, 모의고사는 기차게 잘 보면서 내신에 반영되는 중간/기말 고사나 수능은 못 보는 애들 있잖아. 그게 나였다구. 6월 시험이 불안한 것도 그래서야. 사실 시험 방식은 여러 면에서 나한테 꽤나 유리한데도 말이야."

3. 과거 얘기

"걔 있잖아, 내 옛 애인. 걔가 이번 여름에 떠난대. 애인은 있을까? 있다면 남겨두고 가는 걸까? 같이 가는 건 아닐까?"

"난 그 친구가 그렇게 된 이후로 한동안은 신촌 거리를 다니기가 무서워졌더랬어. 그 친구가 그렇게 떠나고 가을이 찾아와서 그 친구가 다니던 학교 애들이 축제를 하면서 거리를 점령하고 온갖 깽판을 부리는데, 그게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더라구. 야! 너네는 너네 학교 친구가 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추태를 부리는 거야, 하고 악을 쓰고 싶었어. 난 겨우 그 정도로 그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생색을 냈던 걸까. 야학을 다시 해야, 아니 죽을 때까지 해야 이 미안함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4.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토론

"난 2년 전에 사람들이 김규항 때문에 치를 떨 때 사실 무덤덤했어. 왜, 철학하는 사람들의 병 있잖아. '객관성'에 대한 집착이나 편향되지 않은 관점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갈망. 아, 물론 내게 여성운동 하는/했던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쪽에 밝다고 할 수도 없긴 하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은 확실히 정말 다른가봐. 내 눈에는 김규항이 '주류'라고 일컫는 그 '중산층 브루주아 여성 운동'이 그가 얘기하는 식의 '주류'처럼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고작 인터넷 통해서 한국을 들여다 보고 있는 주제에 뭘 아냐고? 에이, 누구나 자기한테 보이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는 거 알면서, 뭘 그런 질문을 하고 그래?"

"전여옥에 대해 아직까지도 말이 많더군. 조금 전에 컬티즌의 한 독자가 그녀에 대해 라깡의 온갖 이론을 끌어다가 패러디해놓은 걸 봤는데, 열이 확 받았어. 전여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야. 그녀가 여성이 아닌, 그것도 남자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대 출신이 아니었더라도, 아니 최소한 남자들이 좋아하는 외모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얘기했을까. 걔들은 전여옥이 토론에 임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만큼이나 '이쁘지도 않은 게 깝쭉대는' 걸 가지고 걸고 넘어지려 하는 것 같아."

5. 영화나 문학 등등에 대한 얘기

"며칠 전에 A ton image 라는 영화를 봤어. 음. 뭐라고 번역하면 좋을까. 저런 preposition 은 번역하기 힘들다구. 한국에 개봉된다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네 얼굴에 비친 나"라고 의역하면 좋을 듯 싶은데. 어쨌든 인간 복제에 관한 영화였어. 뤽 베송 감독 밑에서 시나리오 쓰던 여자의 감독 데뷔작이고. 전 남편이 정신 병원에 가 있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잃고서 아이를 낳을 수 없게된 한 여자와 다른 어떤 남자가 만나고, 그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서 그녀의 세포를 복제해서 그녀에게 임신시켜서 여자 아이를 낳고, 그 여자 아이가 자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행복한 가정을 파탄내고, 끝내는 저를 낳은 어미이자 제 자신인 엄마를 죽이고 아빠를 차지하려다가 제가 죽고 마는, 뭐 그런 얘기였어.
복제 인간을 다룬 영화나 소설은 꽤 많지. 복제 기술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를 다룬 SF류의. 그런 면에서 '복제'는 어느새 보통내기가 아니면 상투성을 벗어나기 힘든 소재가 돼버렸지. 근데 감독이 그러더군. 복제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먼 미래가 아닌, 아주 가까운 현재의 시점에서,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뤄보고 싶었다구. 전적으로 동의해. 훌륭한 영화였다구. 근데 왜 잡지들마다 평이 그 모양인거야. 죄다 스릴러물치고는 소재도 진부하고 플롯도 엉성하며 다루는 형식도 어디서 많이 베낀 것 같다는 투야. 감독 자신은 자기 영화를 스릴러물이라고 규정하지도 않았는데 말야. 그녀는 과학 기술을 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맥락에서 바라보려고 했을 뿐.
뜬금없이 <4인용 식탁>이 생각났어. 여자 감독들을 보면, 참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그걸 한 영화에다가 다 쏟아부으려고 하니까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안 맞고 이야기 구성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만큼 그녀들의 영화는 아주 찬찬히 보고 보고 난 뒤에도 며칠이고 곱씹어 보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구."

6. 술자리를 파할 시간과 집에 돌아갈 수단에 관한 확인 절차

"집에서 술마시니까 집에 갈 걱정 안해도 되고, 좋다. 여긴 있잖아, 지하철이 새벽 1시까지 다녀. 서울도 그랬던가? 며칠 전에 선배 집에 다녀오다가 그 지하철을 타봤는데, 다들 술에 취해서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그러더라구. 그런가 하면 얼굴이 벌개진 채로 책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구. 나도 후자에 끼어들려고 책을 펼쳤지."

"생각해 보니 나, 택시에다가 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찌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는지 몰라. 근데, 있잖아,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을 떠올려도 예전만큼 괴롭진 않게 됐어. 예전같으면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쿵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가라앉곤 했었는데 말야. 그리고 지금 얼굴이 불콰해질만큼 마셨는데도,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아. 나, 많이 컸지?"

어쨌든, 다 술먹고 하는 얘기들이라구.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그렇다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겠지만 말야.

—박쥐

2004년 6월 1일 화요일

Requiem for insomnia

blogin.com · 2004-06-01

1.

난 밤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곤 해
그는 늘 말하지, 사실은 날 쭉 좋아했노라고
나는 늘 묻지, 진심이냐고, 믿을 수 없다고
그리고는 숨을 가다듬는 그를 바라보면서 다음 대사를 기다리지 

그런데 그 순간만 되면 꼭 무슨 일이 나고야 마는 거야
열 두시 종이 땡 쳐서 마법이 풀리거나
땅이 쩍 갈라지고 우윳빛 바다가 솟아나거나
악어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나타거나

2.

자명종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 때문에 깨어본 적이 있니?

내 자명종은 더이상 제가 울어야 할 시간에 울지 않아
제게 주어진 대로 삐리리릭 삐리리릭 하고 울지도 않고
녀석에게 남은 건 째깍째깍 하는 숨소리뿐

그런데 녀석의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다가 깨달았어
그게 사실은 폭탄이 타들어가는 소리였던 거야
녀석은 제 몸에다가 시한 폭탄 하나를 달아놓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녀석을 노려보니까
녀석도 머쓱했는지 스스로 뇌관을 끊어버리더군

그리고 그때 닭이 울었어
아직 세 번째의 거짓 고백이 남아 있는데도
아니구나, 아마도 마지막 고백은 이거였겠지
"나, 밥도 잘 먹고 다니고, 잠도 푹 잘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해요"

3.

알고 보니 녀석이 절망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어
단지 제게 주어진 삐리리릭 삐리리릭 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거야

자폭 시도에 실패한 뒤로 녀석은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어
녀석은 뭐든 닥치는대로 집어삼키고는
그것들의 소리를 제 것으로 만들기로 한 게지

한 번은 쥐 한 마리를 삶아 먹은 다음에 찍찍 하고 울더니
그저께는 모기 한 마리를 잘못 먹고 체했는지 밤새 왱왱 거리는거야

어제는 쪽쪽 소리가 나길래 눈을 떠보니
글쎄 녀석이 내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거야
제게 주어진 소리를 바꾸는 대신에
더 이상 제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세상을 만들기로 작정했던 게지

난 씩씩거리면서 녀석을 노려본 뒤
녀석이 방심한 사이에 재빨리 짓이겨버렸어
그러자 찍소리를 마지막으로 주위가 적막해지고
종이에는 녀석이 빨아들인 내 피와 녀석의 주검의 뒤범벅이
베이컨의 그림마냥 흐물거리고 있었지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두컴컴했어
나는 고백을 마저 들으려 다시 눈을 감았어

4.

눈을 떠보니
빗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더군

아, 거짓 고백 없는 달콤한 잠,
오늘 새벽은 정말 행복한 하룻밤이었어

—박쥐

돌아와줘, 장 아제베도!

blogin.com · 2004-06-01

그래. 내가 그 친구를 이렇게까지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어. 난 네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 친구 핑계를 댔던 거야. 눈물이 나면 죽은 그 친구에 대한 부채감이라는 말도 안되는 구실을 갖다 붙이고 말야. 사실은 네 생각 때문에 운 거였는데도.

장 아제베도, 널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네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간 사람은 전혜린 하나로 족하다구. 아, 물론 지금 이 말은 순전히 날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한편으로는 속절없이 이 줄글을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져 있을 독자들을 위해서기도 하고. 물론 그들을 위해서라면 네게 이런 웃기는 형식의 공개 편지를 쓰면 안된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어. 그치만 이제 겨우 깨지기 시작한 껍질을 도로 붙여서 원래 상태로 돌려놓긴 싫었어. 깨진 틈을 헐겁게 잇거나 어줍잖게 가리기도 싫었고. 표정 관리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구.

알아, 널 사랑하는 게 지금 네가 내 곁에 없기 때문이라는 거. 근데 어쩌란 말야. 기어코 네 글을 보고 말았고, 지금 밖에 비가 오고 있고, 이미 취해버렸는걸. 아, 물론, 이렇게 되리라는 것쯤은 지난 주부터 예상하고 있었어. 사실은 그 친구의 기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어. 예년처럼, 6월 5일을 며칠 앞두고, 그 친구를 아꼈던 네가 예년처럼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계산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던 거지. 젠장.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사악할 줄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죽은 그 친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내가 갔어야 했던 길을 대신해서 가버린, 그것도 무척이나 허망하게 떨어져버린, 몇 번 만나보지도 않은 내게조차 눈이랑 입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인상을 또렷하게 남긴 친구한테 말이야.

그래. 장 아제베도, 내가 널 갑자기 미친듯이 그리워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내가 모르는 날 나 아닌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 난 내가 자면서 아주 서슬퍼런 잠꼬대를 한다는 걸 민박집에서 같이 묵었던 여행객들한테서 들었어. 그 다음부터 난 엠티를 가더라도 절대로 자지 않으려 애썼지. 비록 성공한 적은 없지만. 내가 잘 때 머리를 무서운 기세로 긁어댄다는 것도 술먹고 친구 집에 가서 잔 다음날에서야 알았어. 무섭지 않니? 내가 자면서 공포 영화를 찍는다는 거 말고. 그 사실을 내가 모르는데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거.

오늘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스트레스성 안면 발진"이라는 단어를 보게 됐어. 순간 아차 싶었어. 이곳에 와서 종종 두피 세포 하나하나가 융숭하고 뺨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었거든. 내게 그게 느껴질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내 얼굴이 빨간 두드러기로 뒤덮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정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라구. 그래, 생각해 보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화장실에 들러서 거울을 보고 기겁한 일이 한 번 있었구나. 그땐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날 슬금슬금 피해갔을 거고, 나는 하루종일 모르고 지냈겠지.

장 아제베도, 넌 내가 모르고 있는 날 얼만큼이나 알고 있니?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거니? 내가 방심한 사이에 풀어놓은 또 다른 나를 네가 재빨리 낚아채서 네 안의 어딘가에다가 나 몰래 꽁꽁 숨겨뒀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널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어. 그게 어떤 거였는지 꼭 봐야겠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너의 폭로쯤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도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뭣보다 내 그 추악한 모습을 참아낸 비법을 전수받아야겠거든.
 
넌 내가 겉으로만 순수하고 순진하는 척할 뿐 사실은 더없이 냉혹하고 퇴락한 애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도 너의 조소와 동정을 섞은 그 시선을 생각하면 발진이 일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시선쯤이야 감내할 수 있어, 널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박쥐

2004년 5월 31일 월요일

딴짓, 에필로그

blogin.com · 2004-05-31

연 한 달째 계속되는 딴짓. 이젠 지겨워서라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수업도 끝났겠다, 시험까지는 한 달 남았겠다, 계절은 후덥지근하지도 않고 오싹하지도 않은 게 딱 초여름이겠다, 며칠 정도 "자학하지 않으면서 놀"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내일까지는 (지금까지 포스트로 올린 이런 비슷한 내용의 각서만 해도 벌써 몇 갠지, 원).

어제 선배 언니집에 저녁 먹으러 갔다가 몸과 맘의 양식을 얻어왔다. 선배가 직접 담근 김치, 팔도비빔면, 말린 미역, 그리고 전경린, 은희경, 권지예의 소설들. 덕분에, 거의 퇴화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혀의 돌기들이 되살아나고, 상당 기간 녹슬어 있었던 뇌에서 문학 텍스트 독해(혹은 해독)를 관장하는 영역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이기는 했지만 어쨌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혀가 맛의 자극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동안 맛을 너무 잊고 살았던 게다. 매운맛이건, 소설 속에서 재현되는 "인생의 쓴맛"이건 간에.

점심으로 비빔면을 먹고서 미역냉국을 만들기 위해 다시마 국물이 우러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권지예의 소설집 <꿈꾸는 마리오네뜨>를 읽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파리의 풍경들이나 그와 비슷한 정도로 체화된 유학 생활의 경험들이 여기 저기에서 튀어나오니 꽤나 반갑다. 개중에는 쓸만한 정도들도 더러 있어서, 가히 재불 유학생용 <론리 플래닛>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이국, 그것도 파리라는, 세계인이 하나되어 동경해 마지 않는 도시, 그곳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직접 산 체험이 "소재 발굴"의 측면에서 작가를 유리한 곳에 위치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참신한" 소재를 구하기 위해 새벽 우시장에 몇 달을 들락거리거나 도서관에서 먼지 뒤집어쓴 자료들과 씨름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냥 여기서 유학생이라는 지극히 불안정한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겪은 고단하고 지난한 일들을 그대로 풀어내면, 그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의 이국에 대한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니까. "옥시덴탈리즘"에 호소한다고나 할까.

사실 제일 맘에 안 들었던 건 문체였다. 너무 성글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들을 엮어가는 방식도 어딘지 모르게 서툴러 보인다. 내가 너무 순수주의자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은 작가가 사실은 했을지도 모를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의 가시적인 깊이를 한층 낮추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기준은 매우 상대적이다. 이를테면 허수경--모국어를 쓰지 않는 생활을 권지예보다 오래했으면 오래했을-- 의 단편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조각난 문장들은 결코 불완전하지 않다). 

반면에 은희경의 문장들은 뻔한 소재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다. 문제는 그런 문장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만큼 너무 뻔한 얘기들이 전부라는 데 있다. 어느 정도까지냐면,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몇몇 기시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예전에 그 소설들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내 기억력 탓이겠으나, 달리 말하면 그만큼 얘기들이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뜻도 되겠다.

어쨌든, 저 두 소설집은,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딴짓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난독증 치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행스럽고도 고맙게도, 만사 제쳐두고 몰두하게 만들만큼 재미있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남아있는 전경린의 소설 두 권과 또 하나의 권지예 장편 소설을 시험 이후로 미루고 딴짓을 이쯤에서 잠시 멈춰두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이다.

—박쥐

2004년 5월 29일 토요일

우울할 땐 소리에 기대어 보아요

blogin.com · 2004-05-29

♥ 우울해 하는 그대를 위해 ♥

i love you more than i should so much more than is good for me more than is good oh the timing is cruel oh i need and don't want to need more than i should. i am falling say my name and i'll lie in the sound what is love but whatever my heart needs around. oh my sheet is so thin so i say i can't sleep because it's so very cold but i know what i need and if you were just near to me would you go.... i am falling say my name and i'll lie in the sound what is love but whatever my heart needs around i am falling say my name and i'll lie in the sound what is love but whatever my heart needs around and it needs you too much now


Trespassers William, "Lie in the Sound", Different Stars, 2002
♬1 ' target='_son'>http://www.cdbaby.com/mp3lo ... 4441199e1f>♬1  2분짜리 맛보기용 파일 
♬2 ' target='_son'>http://www.trespasserswilli ... _Sound.mp3>♬2  full and download-friendly version
from ' target='_son'>http://www.trespasserswilliam.com>http://www.trespasserswilli ... om
 

—박쥐

2004년 5월 26일 수요일

새의 선물

blogin.com · 2004-05-26

When, in disgrace with fortune and men’s eyes,

I all alone beweep my outcast state,

And trouble deaf heaven with by bootless cries,

And look upon myself, and curse my fate,

Wishing me like to one more rich in hope,

Featured like him, like him with friends possessed,

Desiring this man’s art and that man’s scope,

With what I most enjoy contented least;

Yet in these thoughts myself almost despising,

Haply I think one thee, and then my state,

Like to the lark at break of day arising

From sullen earth, sings hymns at heaven’s gate;

For thy sweet love remembered such wealth brings

That then I scorn to change my state with kings.


William Shakespeare, Sonnet 29




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나, 종달새가 되어 날아갈 것 같아. 금방이라도 이 어둑한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아. 진짜 그 어느 왕도 부럽지 않아. 정확히 30분 전까지만 해도, 진짜로, 내 꼴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네가 직접 쓴 네 주소와 내 주소를 단 채로, 먼 길 달려오느라 닳을대로 닳고 헤질대로 헤진 소포 상자, 내가 끔찍이도 아끼는 레종 네 보루, 아마도 내가 이곳으로 떠나와 있는 동안에 새로 출시됐을 그린 버전 레종 두 갑, 새우깡, <네멋>의 전경이 빨대를 꽂아 즐겨 마시곤 했던, 그리고 지리산에 갔을 때 별을 보면서 너와 나눠 마셨던 참이슬 팩소주 여섯 개, 술 먹은 다음에 "술 깨는 약"이라고 우겨가면서 먹고 또 네게도 먹이곤 했던 멘토스, 그리고 늘 덜렁대면서도 어쩔 땐 혀를 내두를만큼 꼼꼼한 네 성격이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한 눈에 보여주는 하드 커버 논문, 그 번잡한 우체국에서 글씨 쓰는 법을 잊어버린 손을 애써 움직여가면서 겨우 썼을 네 편지.

그뿐이니? 이 멋진 블로그 템플릿을 선사한 것도, "광명"을 찾아준다는 미명 하에 소주를 한 박스 씩이나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너잖아. 단 하루 동안 이렇게나 많은 선물을 받다니, 산타가 두 가지 착각을 한꺼번에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야. 하나는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가 진짜로 있을 거라는 착각, 다른 하나는 내가 한 해 동안 착한일을 아주아주 많이 했을 거라는 착각.

정말 고마워. 네 말대로, 나, 건강하고, 밥 잘 먹고, 공부 잘 할게.
 

# 선물상자를 보내준 시바, 선경, 라영, 벼리, 그리고 토리, 템플릿을 선물해 주신 스파이크님, "광명을 찾아달라"는 반쯤 농담 섞인  요구에 역시 반쯤 농담을 섞긴 했지만 그래도 듣기만 해도 힘이 되는 말씀을 해주신 을님, 모두 정말 고맙습니다. 

—박쥐

2004년 5월 23일 일요일

프랑스 과학철학에 대한 일갈

blogin.com · 2004-05-23

정말 잘 읽었습니다. 한국 프랑스 철학 연구의 뿌리가 거기에 있었군요. 그런데 프랑스의 메타과학적 전통이 베르그송 이후로 "죽었다"는 말씀은 프랑스 인식론을 공부하고 있는 제겐 다소 생경하게 들립니다. 바슐라르-깡길렘-푸코로 이어지는 과학철학/인식론 연구는 여전히 유효하거든요. 베르그송이 실증과학을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의 전통에 마침표를 찍었다면 모를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마침표는 아니겠지요. 들뢰즈도 있고 세르도 있으니). 분자생물학의 등장 역시 메타과학으로서의 프랑스 철학에 타격을 입혔다기보다는 일종의 탄력 혹은 자극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크 모노-프랑수아 자콥에서 이어진 생물철학이 (대개 생물학자 출신인) 신진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거든요.

이런 역동적 흐름들이 멈춘 것처럼 보이게 된 건, 아무래도 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특히 영미 분석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프랑스 철학 전공자들이 대학 내에 자리를 잡지 못한 탓도 크겠습니다만. 어쨌든 이건 비단 한국의 현상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곳 사람들도 프랑스 철학이 예전만큼 대접받지 못한다며 불평을 늘어놓곤 하는 걸 보면 말이지요.
 
혹시 소칼 논쟁에 대한 부산대 이지훈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98~99년쯤에 "소칼 논쟁 독후기"라는 제목으로 한 계간지에 실렸었는데,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하여간 제가 그 논쟁과 관련해서 읽어본 중 가장 균형잡힌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었습니다.



박홍규 선생의 <형이상학 강의> 2권이 얼마 전에 출간됐다는 얘길 들었다. 이 글은 그 책에 대한 노정태님의' target='_son'>http://www.mediamob.co.kr/r ... ?no=21682>노정태님의 평--아주 훌륭한 평이었다--에다가 내가 달아놓은 답글인데, 다시 보니 뻔하디 뻔한 얘기지만, 그래도 프랑스 과학철학에 대해 대강이나마 정리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워밍업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리 옮긴다. 이렇게 공언이라도 해놔야 부끄러워서라도 뭔가 시작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박쥐

하리우스 포테르 : 죽은 언어를 위한 찬가

blogin.com · 2004-05-23

서점에서 우연히 해리 포터 라틴어판(trad. Peter Needham, Bloomsbury Publishers, 2003)을 발견했다. "해리"라는 이름이 "하리우스"로 바뀌어 있다.

사어의 대명사인 라틴어가 아직까지 죽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많은 서양말들이 거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근대까지의 문헌들 중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들 중 상당수가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만도 아니다. 카톨릭 미사에서든, 일상 대화에서든, 판타지 소설로든,  어떻게든 지금/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옮기기 때문이다. 요컨대 라틴어의 "현재"는, 그것이 대과거형으로서도 과거형으로서도 과거완료형으로서도 아닌, 현재진행형으로서 미약하게나마 살아 숨쉬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세사를 전공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중세 불어를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보다는 라틴어를 해야 한단다. 당시 문헌들은 주로 라틴어로 쓰여졌었기 때문에 (그때 친구로부터 들은 한 중세 불어 전공자 얘기가 생각났다. 현대문학 전공자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렵게 공부했는데, 막상 귀국하고 보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는 것. 사실 당시 사람들이 썼던 말에 더 가까웠고, 지금 쓰이는 말과도 생각보다 그리 다르지는 않다. 같은 어휘이되 표기 방식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정도?). 그렇지만 그것이 현재 라틴어의 유일한 효용 가치는 아니다. 고전 문헌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라틴어 수요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가 학부를 마칠 무렵에 교양 강좌로 라틴어 수업이 개설됐었는데, 사람이 꽤 많았었다고 들었다. 그 수업을 신청했던 동기는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들었고 또 재미있었다고 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 언어를 공부하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꽤 빨리 배우고 썩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재능이 외국어 습득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외국어 배우는 게 "재미"가  아닌 "필요"/"필수"가 되어버렸고, 그때부터 실력도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아마도 언어에 대한 나의 순수한 열정이 "취업"이나 "미국 대학 진학"을 위한 일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오인되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어쨌든, 라틴어건, 중세불어건, 수메르어건, 오늘날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말들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외를! 단지 재미에서든, 아니면 필요에 의해서든 간에, 이들은 언어가 획일화, 특히 특정한 하나의 언어로 흡수되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는, 그리하여 죽은 언어를 살려내고 죽어가는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박쥐

2004년 5월 22일 토요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blogin.com · 2004-05-22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 신현림, "나의 싸움"






생산은 고사하고 재생산도 힘에 겨워 이렇게 며칠째 복제만 반복하고 있는 걸 보니, 무기력증이 정점에 달한 모양이다. 이미 뇌세포들에는 이끼가 내려앉은지 오래. 기분 전환도 하고 마음도 다잡고 그 와중에 언어 실력도 연마할 요량으로 집었던 소설들도 내팽개쳐진지 너무도 오래. 전공책들과 각종 복사물들은 어느새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이렇게 넋나간 채로 몇 날을 그냥 흘려보내놓고 나니, 며칠 다니러 오겠다던 몽실에게 퇴짜를 놓은 것이 몹시 후회스럽다. 몽실과 신나게 놀았더라면, 그리고 난 뒤  맘을 다지고 새롭게 6월을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주어진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한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골몰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의지는 있었던 게 아닌가. 그 의지가 무얼 향한 것이었든지 간에.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지금 내 안팎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것은 오직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뿐.

방안에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베르메르나 렘브란트를 볼 수 있는 이 수퍼울트라급 기술복제시대를 살았더라면, 벤야민은 분명히 땅을 쳤으리라. 분명한 건 그 천인공노할 기술 덕분에 작품이 물리적(또는 시공간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등의 제약을 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저 위에다가 "복제"해 놓은 시만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오로지 시인의 이름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마지막 구절뿐이었는데도, 구글에서 "지겨운 고통 신현림"이라는 검색어만으로 바로 그 전문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복제품" X'는 결코 "원본"  X 의 "붕어빵"이 아니다. X'는 X 이상의 다양한 의미들을 생성해낸다. 물론 시의 존재론을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다. 시의 "원본"이라니? <세기말 블루스>의 96년 초판에 찍혀 있는 활자들? 시인이 직접 이 시를 낭독하면, 그게 이 시의 "원본"이 되는 겐가? 아니, 구체화되기 전의, 시인의 머릿속에서 "영감"의 형태로 떠돌고 있던 그 상태가 "원본"이라고 해야하잖는가? 그렇지만 시는 소설과는 달리 물리적인 것의 영향을 꽤 많이 받는다. 똑같은 시라 하더라도 문자들을 종이 위에 어떻게 배열하느냐, 누구의 목소리로 어떤 세팅에서 낭독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시를 처음 본 건 학부 3~4학년 무렵, 교지에 실린, 그 나이 즈음에 다들 한 번씩은 해봤음직한, 그 누구로도, 그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고만고만한 고민에 관한 글이었다.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 저 시에서 말하고 있는, 그 모든 20대 초반의 정서들을 가득 담은. 그 친구는 시인의 입을 빌어 그것들더러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꺼지라"는, 그 투박하기 짝이 없는 시어가 주는 해방감이란! 그렇지만 그것은 맘놓고 만끽할 수 있는 종류의 해방감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훈장이자 사랑스러운 보물이기도 했다. 늘 우울, 불안, 쓸쓸함, 치욕, 슬픔들에 시달리다가도, 그것들이 잠시라도 내 안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5년이 흐른 지금, "꺼지라"는 말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삶은~"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에는 눈길을 두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워라.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하라. 남아있는 나날을 위해. 고통은, 지겨운 고통은, 꺼지란다고 얌전히 꺼져주지 않는다. "꺼지라"는 말은 그렇게 텅빈 구호로 남거나 아니면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가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라는 시귀를 떠올리고 전문을 찾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조악하기 짝이 없는 시학과 재미없는 시론을 주절거리다니. 사실인즉슨, 고통의 주변을 우회하고 또 우회하는 것, 이것이 내가 얼마 전에 발견해서 써먹고 있는 고통 퇴치법이다. 그런데 그새 내성이 생겨버렸는지 별 효과가 없다. 좀더 강력한 뭔가가 필요하다.

—박쥐

2004년 5월 20일 목요일

22시 30분 : 일몰 30초전, 월출 30초후

blogin.com · 2004-05-20

내가 생리중에 모기에게 왕창 물어 뜯기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것은

밤이 밤 열시를 훨씬 넘긴 다음에야 겨우 해를 밀어내고 빼꼼이 고개를 들이밀던 어느 다 늦은 봄날이었다

복도는 이미 옆집 콧수염 신사와 그의 애인의 살섞는 냄새로 가득차 있었고

복도 끝 화장실의 좁은 창문틈으로는 실종됐던 달이 8개월만에 둥 둥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박쥐

2004년 5월 19일 수요일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중국? 일본?

blogin.com · 2004-05-19

……, 낯선 한 이방의 도시에서 또 낯선 한 이방에 속한 도시로 내가 떠났을 때 나는 낯선 풍경들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정한 당신……, 유정한 나를……, 나를 용서하세요……, 나……, 유정해서……, 서러웠더랬지요……, 불편은 저의……, 이대도록 기나긴 꽃이었구요, 늦은 저의 창으로……, 설분분합니다, 설분분……, 합니다,

[...]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이미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느릿느릿 걸어서, 헤이, 보 콤스트 두 헤어? 히나? 야판? 헤이, 바룸, 하스트 두 니히츠 게작트? 비스트 두 베트룽케? 페어뤽트?http://fadel.namoa.net/suky ... ng/loneliness.html#3 name=(3)>(3) 나는 천천히 기차 중간문을 연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화장실 문을 연다, 나는 힘껏 문을 연다, 나는 머리 끝에 식은 땀이 나는 것처럼, 눈을 감고, 다시 문을……, 그래, 나에게는, 이런 힘이, 힘이 필요했어, 왜냐하면, 나는 살아야 했거든, 나는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거든……,왜냐하면, 나는 마음이 언제나 너무 젖어 있어서, 젖은 마음은 언제나 그렇게 길바닥에 누워……, 나는 거울을 본다, 이 얼굴을 들고 그렇게 먼 길을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세상에서 쉽게 묻어온, 저런 저런, 저건, 세상을 한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탓일까……,

3) 헤이,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중국? 일본? 헤이, 너, 왜, 아무 말도 안하니? 너, 술 취했니? 미쳤니? (Hey, wo kommst du her? China? Japan? Hey, warum hast du nichts gesagt? Bist du betrunken? verrckt?)


- 허수경, "어떤 쓸쓸함에 대하여"
(『문예중앙』 94년 여름호 )에서 발췌
 from fadels' target='_son'>http://fadel.namoa.net/suky ... g/index2.html>fadels fan page dedicated to the poet

—박쥐

2004년 5월 17일 월요일

PCism : 종교의 경우

blogin.com · 2004-05-17


Passion: Regular or Decaf?






Those who virulently criticized Mel Gibson’s The Passion even before its release seem unassailable: Are they not justified to worry that the film, made by a fanatic Catholic known for occasional anti-Semitic outbursts, may ignite anti-Semitic sentiments?

More generally, is The Passion not a manifesto of our own (Western, Christian) fundamentalists? Is it then not the duty of every Western secularist to reject it, to make it clear that we are not covert racists attacking only the fundamentalism of other (Muslim) cultures?


The Pope’s ambiguous reaction to the film is well known: Upon seeing it, deeply moved, he muttered “It is as it was”—a statement quickly withdrawn by the official Vatican speakers. The Pope’s spontaneous reaction was thus replaced by an “official” neutrality, corrected so as not to hurt anyone. This shift, with its politically correct fear that anyone’s specific religious sensibility may be hurt, exemplifies what is wrong with liberal tolerance: Even if the Bible says that the Jewish mob demanded the death of Christ, one should not stage this scene directly but play it down and contextualize it to make it clear that Jews are collectively not to be blamed for the Crucifixion. The problem of such a stance is that it merely represses aggressive religious passion, which remains smoldering beneath the surface and, finding no release, gets stronger and stronger.


This prohibition against embracing a belief with full passion may explain why, today, religion is only permitted as a particular “culture,” or lifestyle phenomenon, not as a substantial way of life. We no longer “really believe,” we just follow (some of) the religious rituals and mores out of respect for the “lifestyle” of the community to which we belong. Indeed, what is a “cultural lifestyle” if not that every December in every house there is a Christmas tree—although none of us believes in Santa Claus? Perhaps, then, “culture” is the name for all those things we practice without really believing in them, without “taking them seriously.” Isn’t this why we dismiss fundamentalist believers as “barbarians,” as a threat to culture—they dare to take seriously their beliefs? Today, ultimately, we perceive as a threat to culture those who immediately live their culture, those who lack a distance toward it.


Jacques Lacan’s definition of love is “giving something one doesn’t have.” What one often forgets is to add the other half: “… to someone who doesn’t want it.” This is confirmed by our most elementary experience when somebody unexpectedly declares passionate love to us: Isn’t the reaction, preceding the possible affirmative reply, that something obscene and intrusive is being forced upon us? This is why, ultimately, passion is politically incorrect; although everything seems permitted in our culture, one kind of prohibition is merely displaced by another.


Consider the deadlock that is sexuality or art today. Is there anything more dull and sterile than the incessant invention of new artistic transgressions—the performance artist masturbating on stage, the sculptor displaying human excrement? Some radical circles in the United States recently proposed that we rethink the rights of necrophiliacs. In the same way that people sign permission for their organs to be used for medical purposes, shouldn’t they also be allowed to permit their bodies to be enjoyed by necrophiliacs? This proposal is the perfect example of how the PC stance realizes Kierkegaard’s insight that the only good neighbor is a dead neighbor. A corpse is the ideal sexual partner of a tolerant subject trying to avoid any passionate interaction.


On today’s market, we find a series of products deprived of their malignant property: coffee without caffeine, cream without fat, beer without alcohol. The list goes on: virtual sex as sex without sex, the Colin Powell doctrine of war with no casualties (on our side, of course) as war without war, the redefinition of politics as expert administration as politics without politics. Today’s tolerant liberal multiculturalism wishes to experience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featur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Along the same lines, what this tolerance gives us is a decaffeinated belief, a belief that does not hurt anyone and never requires us to commit ourselves.


Today’s hedonism combines pleasure with constraint. It is no longer “Drink coffee, but in moderation!” but rather “Drink all the coffee you want because it is already decaffeinated.” The ultimate example is chocolate laxative, with its paradoxical injunction “Do you have constipation? Eat more of this chocolate!”—the very thing that causes constipation.


The structure of the “chocolate laxative,” of a product containing the agent of its own containment, can be discerned throughout today’s ideological landscape. Consider how we relate to capitalist profiteering: It is fine IF it is counteracted with charitable activities—first you amass billions, then you return (part of) them to the needy. The same goes for war, for the emerging logic of humanitarian militarism: War is OK insofar as it brings about peace and democracy, or creates the conditions to distribute humanitarian aid. And does the same not hold true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It is OK to “rethink” human rights to include torture and a permanent emergency state, if democracy is cleansed of its populist “excesses.”


Does this mean that, against the false tolerance of liberal multiculturalism, we should return to religious fundamentalism? The very absurdity of Gibson’s vision makes clear the impossibility of such a solution. Gibson first wanted to shoot the film in Latin and Aramaic and show it without subtitles. Under pressure, he allowed subtitles, but this compromise was not just a concession to commercial demands. Sticking to the original plan would have displayed the self-refuting nature of Gibson’s project: That is to say, the film without subtitles shown in large suburban malls would turn its intended fidelity into the opposite, an incomprehensible exotic spectacle.


But there is a third position, beyond religious fundamentalism and liberal tolerance. One should not put forth the distinction between Islamic fundamentalism and Islam, a la Bush and Blair, who never forget to praise Islam as a great religion of love and tolerance that has nothing to do with disgusting terrorist acts. Instead, one should gather the courage to recognize the obvious fact that there is a deep strain of violence and intolerance in Islam—that, to put it bluntly, something in Islam resists the liberal-capitalist world order. By transposing this tension into the core of Islam, one can conceive such resistance as an opportunity: It need not necessarily lead to “Islamo-Fascism,” but rather could be articulated into a Socialist project. The traditional European Fascism was a misdirected act of resistance against the deadlocks of capitalist modernization. What was wrong with Fascism was NOT (as liberals keep telling us) its dream of a people’s community that overcomes capitalist competition through a spirit of collective discipline and sacrifice, but how these motives were deformed by a specific political twist. Fascism, in a way, took the best and turned it into the worst.


Instead of trying to extract the pure ethical core of a religion from its political manipulations, one should ruthlessly criticize that very core—in ALL religions. Today, when religions themselves (from New Age spirituality to the cheap spiritualist hedonism of the Dalai Lama) are more than ready to serve postmodern pleasure-seeking, it is consequently, and paradoxically, only a thorough materialism that is able to sustain a truly ascetic, militant and ethical stance.


Slavoj Žižek, a philosopher and psychoanalyst, is a senior researcher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n the Humanities, in Essen, Germany. Among other books, he is the author of The Fragile Absolute and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지젝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해 쓰고 In These Times에 실은 글. (특정 종교의) 근본주의, 원리주의, 반유대주의, 나아가 문화 현상/라이프스타일로서의 종교에 대한 예리한 통찰. (아마도 개봉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영화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었을) 지난 2월에 쓰여진 거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의 상황도 그렇거니와, 이곳에서도 얼마 전 재경부 장관인 사르코지(차기 대권 주자로 유력한 좌파 인물)가 국회에서 정부의 반유대주의 성향이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뒤로 반유대주의/유대주의 논쟁이 한창이다(어제는 대규모 반유대주의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뭣보다 돋보이는 건 "정치적 올바름"을 하나의 새로운 주의/이즘(PCism)으로 볼 줄 아는 지젝의 앞서가는(?) 감각이다. 다양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똘레랑스의 정신, 분명히 아주 중요한 미덕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순결무구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이 관용의 정신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자기모순적이다. 이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관용의 정신을 유지할 것인가 말것인가? 게다가 이 정신이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관용을 베푸는 자와 그 시혜를 입는 자 혹은 베풀 것을 강요받는 자가 있다. 뿐만 아니라, 특히 "베푸는 자"의 것일 경우, 관용은 뿌리깊은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자신의 "쿨함"을 과시하기 위한 혹은 그저 허울뿐인 말에 불과하거나 때로는 가장 편향된 태도를 정당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고, 또 가진 자가 내세우는 논리의 수많은 버전 중 가장 세련된 형태일 수 있다("우린 우리와 다른 너희를 존중해. 그런데 너희는 왜 너희와 다른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니? 좀 맞고 정신 차리면 우릴 인정할 수 있게 될거야"). 

아, 사실 지젝의 현란한 논리 전개를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좀더 곱씹어봐야겠다.

—박쥐

늑대, 양의 수용소에 가다

blogin.com · 2004-05-17

여기는 집 잃은 어린 양들의 임시 수용소
양치기는 선의의 거짓말에 능하다
양들은 온순한 데다 쾌활하기까지 하다

오늘은 그들이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날
어느새 제의는 희극으로 치닫는다
상쾌한 바람이 숨막히던 수용소를 감싸고
양들은 바람 때문에 간지러워 죽겠다며 깔깔대고
그 틈을 타 세속의 냄새가 들어와 제사 향을 밀어내고
양치기의 입에는 벌써부터 침이 고여 있다

간신히 뒤집어쓴 탈이 오늘따라 버겁다
배에서는 꾸르륵 꾸르륵 소리가 그치지 않고
코는 제멋대로 킁킁거린다
뾰족한 발톱과 뻣뻣한 털을 숨긴답시고
너무 두꺼운 가죽을 걸쳐서인지
온몸이 박박 긁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어느덧 의식이 끝나고 기다리던 성찬의 시간
한껏 들뜬 양들이 이번에는 풍악을 울린다
낯선 땅에서 듣는 꽹과리 소리에
양들은 둥실둥실 춤을 춘다
수용소의 좁다란 마당이 출렁인다

어느새 모든 것이 넘실댄다
몸뚱아리가 꿈틀대고 가죽이 흘러내린다
고개가 흔들리고 탈이 덜컹댄다
입맛은 어느새 싹 달아나 있고
굶주려 벌겋게 갈라졌던 눈이 물기를 머금는다

조용히 물가로 내려와 발길을 돌린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중얼거린다,
어차피 맛도 없었을 거라고,
맛있었다 해도 소화가 잘 안 됐을 거라고.


- 파리 한인 성당 창립 50주년 기념일에.
그들 누구도 쫓아내지 않았으나,
 쫓긴 듯 돌아오다.

—박쥐

2004년 5월 16일 일요일

자연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

blogin.com · 2004-05-16

한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언제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던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길가에 연탄재가 뿌려져 있다면 그걸 밟거나 차지 않고 지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연탄재를 차게 되는 게 연탄재를 경시하거나 모독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연탄재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바라봄에 있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란 무엇일까? 이 쿠바 출신의 미국 여성작가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 1948~1985)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멀게는 자연을 사회의 진보를 위해 아낌없이 착취하고 이용해야 할 도구로 본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가깝게는 베이컨의 자연관을 변형하여 일종의 놀이개로 전락시킨 남성 환경미술가들보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이 무엇이건 간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멘디에타는 자신을 아폴론에게 쫓기다가 나무로 변해버린 다프네와 동일시한다. 그녀는 "찍는" 쪽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찍히는" 쪽에 가깝다. 다시 말해 그녀 자신이 자연이거나 혹은 자연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때 자연은 분명히 일개 피사체를 넘어서는 무엇이 되고,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사라진다.
 
그런데 멘디에타가 나무나 풀밭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녀가 자신의 피사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그토록 그것들과의 합일을 꿈꿨던 것일 게다. 문제는 그 사랑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사랑의 본질이 어느 정도는 바로 그 이루어질 수 없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넘어서려고 했으나 결국 넘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애초에 원했던 바가 결과로서 넘어서는 것이었다기보다는 과정으로서 넘어서려는 노력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게다.

사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그 대상이 누구/무엇이건 간에, 그 대상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사랑에 빠지는 것. 나르시시즘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자연을 사랑하자"는 표어가 아주 가끔씩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게 들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멋대로 이용하고 착취해먹고 이제 쓸만큼 썼으니 도로 놓아주자고?

여성, 자연, 동양 등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지만, 그 감수성이 자기 반성의 결과로 체득된 것이라기보다 어떤 당위로서 머물 경우에는 주체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고착화시킬 수도 있다. 이 경우 감수성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결국에는 타자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로 편향된,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포장된 자기애가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환경 운동에 반기를 들려는 건 아니다. 그저 갑자기 "어머니 자연"이 인간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져서 해본 말이다. 어머니 자연은 새삼스레 자신을 위한답시고 친환경적 제품들을 비싼 돈 주고 사는 자식들을 예뻐해 줄까? 돈 벌려고 산 깎아놓고서 그리 해서 번 돈으로 유기농 야채 사먹는 사람보다는 담배 한모금 빤 후에 대기 오염에 일조했다는 사실에 살짝 가슴 아파하는 사람을 더 어여삐 여기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자연에 남긴 작은 흔적/상흔을 담은 멘디에타의 실루엣 연작이 이룰 수 없는 자연과의 합일을 형상화한 다른 작품들보다 애착이 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연탄재 함부로 찬다고 너무 뭐라 하지 말라. 연탄재를 차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할 일 다했다고 자만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어쩌면 연탄재는 발길에 채여서라도 바람따라 날아가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잖는가.

—박쥐

2004년 5월 15일 토요일

비상전야

blogin.com · 2004-05-15

picture by Young



떠나올 때의 그 마음으로 되돌아가기에 아직 그리 늦은 건 아니겠지.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겠지. 그래도 날개가 다시 돋힐 옆구리는 남아 있으니.

réécrit le 7 juillet 2004
Je n'avais jamais dit que c'était un poème, mais je m'en étais toujours inquiétée depuis que je l'ai écrit. Comment distinguer un poème des autres formes de l'écriture ? Plus de, sinon trop de, l'espace ? Soit franche. Tu n'es pas Simone WEIL. Même si tu laisses des mots aphoristiques, personne n'en tiendra compte.

—박쥐

노화현상

blogin.com · 2004-05-15

나이가 드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필요 이상으로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내다보게 되니까. 갈수록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더더욱 힘들어지니까.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 "행복"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온 신경과 모든 에너지를 쏟느라 행복을 느낄 틈도 없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는 것"이라고. 행복이나 평화나 진리나 정의와 같은 가치들에 대한 질문은 대개 그러한 가치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게 마련이고, 그러한 욕구는 그것의 결핍에서 나오는 법. 행복을, 평화를, 진리를, 정의를 이미 획득하여 그것들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로운 삶인가" 등등의 질문은 무가치하다. 앎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가 가장 빈곤하고도 기만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형식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스물 일곱 살때까지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온 셈이다. 바로 내 눈 앞에 놓인 책을 읽고, 그 순간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됐었으니까. 물론 어릴 적 "이다음에 커서 ~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린 시절의 꿈이 대부분의 경우 시간에 비례해서 대통령에서 시작해서 점점 평범한 샐러리맨/우먼으로 축소되는 반면에,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내 꿈과 시간 사이에는 함수 관계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사 돌이켜보건대, 어쩌면 그것이 이제껏 아주 심히 불행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해도 될 만큼 살아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행복한 줄 알아야 해. 유학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는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긴 하다. 내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바를 조금씩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한편으로는 예의 그 행복의 정의에 따른다면 결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꿈의 실현 정도"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한다 해도, 이제는 그 '꿈'이 뭔지를 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유학"이라는 딱지 때문에 내가 앞으로 할 수 있을 일의 범위가 줄어들 거라는 사실. 가뜩이나 지금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학위"도 버거워 죽겠는데. 지나온 세월 때문에 더 이상의 변화를 꿈꾸지 못할 날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두렵다. 더구나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걸 깡그리 접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만큼 쿨한 인간도 못 되지 않는가. 
 
아, 난 너무 늙어버렸다. 서른도 되기 전에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기분이다.

—박쥐

2004년 5월 13일 목요일

55 jours jusqu'au Jour J

blogin.com · 2004-05-13

한국 갈 날까지 55일 남았다. 왜 5월은 31일까지 있는 걸까. 그나마 6월은 30일까지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지, 다행인 것도 아니다. 28일까지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지금 이런 날짜를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웃긴다.
 
첫째, 이곳으로 떠나올 적에 나는 나를 아는 모두에게 앞으로 2~3년 간은 못 볼 거라고 겁을 단단히 줬었다. 그리고 돌아올 기약없는 뱃길을 떠나기라도 할 것처럼 굴며 거한 환송회를 몇 번씩이나 치루었다. 그런데 채 1년도 안돼서 그들 앞에 얼굴을 들이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달아오른다.

둘째, 정작 내가 달력 날짜를 일일이 짚어가면서 계산했어야 할 날짜는 따로 있었다. 당장 2주 후면 시험 하나가 있고,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험까지는 1+1/2 개월이 남아 있다. 소논문을 가을까지 제출하는 걸로 미룬다 해도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려면 대강의 안을 잡아 놔야 한다. 논문도 지도 교수와 얘기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구상해 놔야 한다.

그렇게 떠나고만 떠나고만 싶었던 그 땅을 이렇게 미치도록 그리워하다니. 물론 난 윤이상 선생처럼 마당에 대한민국 땅덩어리를 형상화해 놓은 연못을 만들어 놓고 볼때마다 눈물지을 정도의 애국심도 돈도 없다. 흔히들 "나라를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그 "애국자"라서 귀국 날짜를 손으로 꼽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국가"나 "민족" 같이 거창하고 추상적인 가상체가 아니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 여럿이서 침 섞어가면서 먹던 오뎅 국물, 도서관 옆 계단에서 뿜던 담배 연기, 학교 앞 가게의 샌드위치, 비온 뒤 여름의 교정 가득히 번지던 풀빛 안개, 신촌의 술집을 채우던 알코올향과 안주에서 나던 기름 냄새, 뭐 그런, 지극히 감각적인 것들. 아니면 내 방 침대, 집앞 조깅 코스, 아침이면 엄마와 두런두런 얘길 나누며 들던 오믈렛이랑 커피, 외할머니의 백김치, 뭐 그런, 아주 구체적이고 사소한 것들. 하긴, 윤이상의 통영도 그런 것으로 남아 있었던 거겠지. 타향살이 하는 이들이 고향이나 모국을 그리워하는 것도 다 그런 것들 때문일 거고.

기다려지는 것일수록 더디게 온다. 그러니 기다리지 말자. 그러면 7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칠 거다.

—박쥐

은하계 소식

blogin.com · 2004-05-13

이모씨가 잉태한 아기 우주들, 계속해서 팽창중
온도도 상승 - 자색의 분포가 눈에 띄게 늘어나

지난 5월 12일 새벽 폭발적으로 생성된 새로운 아기 우주들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APA(Association for Pseudo-Astronomy)의 관측에 따르면, 각 우주들이 차지하는 면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그 색깔은 갈수록 자색으로 변화, 우주들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기 우주들은 이모씨(여, 만 26세)와 항성들의 충돌로 인해 잉태된 것으로, 현재 이모씨는 원치 않았던 임신의 충격에서 벗어나 우주들이 맘놓고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몸을 아끼지 않고 있다. 가명을 요구한 APA의 한 관계자는 "눈에 띌 정도는 아니나, 각 우주들이 자체적으로 충돌하거나 쌍성계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들의 이러한 자생성을 생각해볼 때, 이모씨는 더이상 자기 몸을 학대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모씨는 사다리와 책상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내고 둘 중 하나에게 양육비를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쥐

2004년 5월 12일 수요일

상처를 어루만지려다

blogin.com · 2004-05-12

새벽에 사다리를 타고 침대로 올라가려는데 밤마다 사다리를 타고 침대로 오를 때마다 상상하던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짜릿한 추락 그토록 꿈꾸었던 마지막 순간 그러나 눈앞을 스친 건 백합 꽃더미에 파묻힌 창백한 얼굴이 아녔다 뒤께로 말라붙은 피와 파리떼로 범벅된 시커먼 머리통 

넘어진 사다리를 일으켜 세우고 이리저리 튄 나무 조각들을 주워담으려다가 문득 피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달고 다니던 어린 시절   다리가 알록달록 물드는 게 좋아 딱지가 앉을 무렵이면 나는 또 넘어지고 넘어졌던 거였다 

하늘하늘한 하늘색 잠옷을 걷어올리니 과연 기다렸던 상처들이 하얗게 굵은 내 종아리를 예쁘게 장식하고 있었다 발목에는 피가 고여든 자그마한 웅덩이 하나 그 옆에는 허옇게 벗겨진 살갗들이 일어나 바람결따라 춤을 추고 무릎에는 어느새 아기 우주 하나가 태어나 보랏빛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어루만지려던 상처가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하고 그 손길에 통증이 가라 앉아갈 무렵에 20유로 주고 산 중고 책상이 한모퉁이가 떨어져 나간 채 흉칙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다시 푹푹 쑤시기 시작한 삭신 어느새 웅덩이랑 우주는 간데 없고 A/S 가능 조건과 영수증 따위가 어지러이 떠돌고 아아 나는 이미 추락해버린 나머지 백합 속의 죽음을 꿈꾸기에는 너무 까맣게 타들어버렸던 거였다

—박쥐

2004년 5월 11일 화요일

맑스씨의 기술사 수업을 듣는 시간

blogin.com · 2004-05-11

몇 주 전부터 기술史를 배우고 있다. 사실 기술의 역사는 별로 재미가 없다. 공학도나 엔지니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기술 쪽은 한없이 "단무지"스럽게만 보인다. 워낙 내가 기어다닌 바닥이 극도로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기술이 갖는 즉물성은 그저 낯설다. 거참, 사실 부끄러운 얘기다. 속해 있는 학문에 대해서는 틈만 나면 그 관념성과 추상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곤 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측면들을 물질적으로/구체적으로 체화/체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흉보고 깔보다니. "박쥐"라는 내 아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것들이 전혀 만만하게 볼 게 아니라는 걸 (이제서야 비로소) 깨달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수업이 인상적인 건, 전혀 몰랐던 분야에 눈떠가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무엇보다 담당 교수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68세대이자 맑시스트라는 혐의(!)를 두고 있다. 기술사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시조를 맑스로 두더니, 그 이후에도 툭하면 맑시스트 퍼스펙티브를 들이댄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모든 기술 개발과 관련 정책이 거의 전적으로 시장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식이다.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핵발전소나 유전자 변형 식품이 허가되느냐 마느냐의 차이도, 결국은 돈이 많이 드느냐, 혹은 돈이 되느냐에 대한 정부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고, 찬반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질 때는 그러한 결정이 이미 내려진 이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미국에 대한 시각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의외로 재밌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의 모든 분야를 선도하게 된 비결은 단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 (1) 땅덩어리는 넓고 할 일은 많다 (2) 일할 사람이 없다 (3) 사람을 대신할 기계가 필요하다 (4) 기계를 개발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요컨대 인력의 부족이 기술 개발에 대한 절대절명의 요구를 낳았고, 그것이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거 내가 단순화시킨 거 아니다. 교수가 몇 번이고 강조한 얘기다. 이 단순한 얘길 그토록 진지하게 하는 그에게서 어쩐지 "늙은 유럽"의 자존심과 자조감이 느껴졌다.

—박쥐

2004년 5월 9일 일요일

이공계 위기론, 인식론적 고찰을 위한 구상

blogin.com · 2004-05-09

이라크전의 참혹한 실상이 공개되면서 온 국제 사회가 미국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고 있는 걸 보면, 미국의 패권적 주도 현상이 이제 좀 수그러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온세계에 퍼져있는 맥도널드, 리바이스, 말보로, 그리고 세계인이 함께 보는 미국 시트콤과 헐리웃 영화 등등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순미국산 상품뿐 아니라, 그에 전염된 "유사" 미제들이다. 말보로를 피우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부시를 욕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욕하면서 배우게 되는" 미국식 영어나 문화가 다양한 언어나 관습을 획일화시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이 독식하는 여러 가지 분야 중 하나였던 과학에 "이상 신호"가 생겼다는 소식( 뉴욕타임스,U.S.' target='_son'>http://www.nytimes.com/2004 ... ed=1>뉴욕타임스,U.S. Is Losing Its Dominance in the Sciences," 2004년 5월 3일자 기사 )은 내심 반갑다. Physical Review 에 게재된 논문 중 그 저자가 미국 출신인 비율은 1983년 61%였던 데 반해 작년인 2003년에는 29%로 줄었다. 서유럽 20개국과 그 외의 국가들이 이 비율을 앞섰다. 미국은 특허 출원 비율에 있어서도 80년대에 비해 10% 가까이 줄었다. 대신 대만, 일본, 한국 등 동북아 국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냉전 시대에 비해 국가의 연구비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국방 예산은 오히려 냉전 시대보다 늘어나 작년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다른 이들은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과학자들의 경쟁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단다. 특히 유럽의 경우, 미국을 경쟁 상대로 상정하고 입자물리 등의 분야에서 미국의 산학연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는 동시에 유럽연합이라는 지리적/정치적 여건을 이용해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국은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러한 원인 분석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다. 인력 부족 혹은 유출이 그것이다. "외국 아이들 데려다가 기껏 길러놨더니, 우리가 가르쳐준 것 가지고 자기네들 나라로 돌아가는 바람에 결국 남의 나라 좋은 일만 하고 우리는 손해만 봤다"는 게 그들 얘기다 (외국인 박사 학위자가 자국으로 돌아가는 비율은 9.11 이후 美정부에서 비자 취득 요건을 강화하는 바람에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거기에 또 한마디가 따라 붙는다. 미국인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바람에 그 빈자리를 외국인 유학생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고, 그 유학생들은 배운 다음에 다시 자국으로 돌아가니, 결국 쓸 만한 인력들은 하나도 남지 않더라는 것.

그런데 이를 미국의 이공계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좀 문제가 있다. 그 동안의 지나친 독점이 이제 겨우 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더욱이, 이는 어쩌면, 미국의 영향력이 전방위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기사에서 한 인터뷰이는 이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표현했다!). 그네들이 세워놓은 '과학'과 '과학성'과 '과학적 실천'의 기준이라는 그물망에 보다 많은 국가와 보다 넓은 문화권이 포섭됐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특히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네들이 논문 게재수가 증가했다는 것은 실제 논문 편찬수가 증가했기 때문일뿐 아니라 편찬된 논문을 유럽 내에서가 아니라 (미국식) 영어로 옮긴 후에 미국에 본거지를 둔 저널에다가 출판하는 경우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다.

또 하나, 일련의 현상을 그 현상에 대한 몇몇 지표들을 통해 "위기"로 인식하는 근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논문의 국적을 따진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촌스럽게 느껴진다.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요즘 누가 조국의 발전을 위해 연구를 하나? 한국 대학의 교수가 미국에 있는 입자 가속기로 실험하고 논문을 내면, 그 논문의 소속을 어디라고 해야 하나? 이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국가별로 과학하는 스타일이 다른 것도 아니고. 또, SCI 지수나 노벨상 수상 인원수를 가지고 그 나라 과학의 발전 정도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조건인 인프라의 구축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좀더 그럴듯한 팩터들을 제시할 수 없나? 이를테면 과학의 대중화나 과학기술의 민주화 정도라든지.

이공계 위기론은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인 현상인 듯이 보인다. 한국에서 누누이 들어왔던 얘기를 프랑스에서도 똑같이 듣고 있고 미국으로부터도 간접적으로 듣고 있다. 위기에 대한 체감 지수가 분야에 따라 달라지긴 한다. 대체로 돈 안 되는 분야에서는 돈 되는 분야에서보다, 실험 전공에서보다 이론 전공에서, 더 큰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난 이런 얘길 들을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과학이 지금의 위치에 이른 건 아주 최근의 현상이다. 과학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훨씬 더 가까운 과거다. 같은 과학이라고 해도, 그 주도권의 임자는 아주 빠른 주기로 교체된다 (20세기만 해도, 물리학 -> 화학 -> 생물학의 순으로 "권력"이 교체됐다). "위기"일수록 보다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고 또 필요하다면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과학이 자본의 논리에 휘둘린다는 건 분명 심각한 문젠데, 예산 부족이 가장 큰 위기의 원인이라는 판단이 든다면, 왜, 언제부터, 어떻게 돈이 모자르게 된 건지, 나아가 어째서 돈이 과학의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됐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과학학 하는 사람들은 결코 과학하는 사람들의 적이 아니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