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end of/new year

blogin.com · 2004-12-31

 

...and auld acquaintance should never be forgot,
 as they're always brought to mind...

—박쥐

고다르의 영화사 수업

blogin.com · 2004-12-27



-- 아아, 무슈 고다르, 그러니까 당신에게 영화란 그런 것이었군요. "그런 것이었다"는 말밖엔 다른 말을 찾지 못하겠어요. 당신도 이해하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 영화를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로 끝맺었던 거겠지요.

퐁피두 시네마에서 장 뤽 고다르의《영화의 역사(들)》을 보다. 원제는 Moments choisis des Histoire(s) du cinema. 1998년작. 이 영화는, 감독이 직접 말한대로, 그가 쓴 또 다른 영화사적 작업인 동명 영화의 축소판이기도 하고 축소판이 아니기도 하다. 난 전작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이 대목에서 하품에게 미안하다는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다. 몇년 전 서울에서 고다르 영화제를 할 때 그 영화를 보러 가겠다는 하품을 술먹자고 꼬시면서 "나중에 퐁피두에서 봐. 거기 현대 미술 전시관에서 하루 종일 틀어주니까" 라는 말을 했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 그곳서 상영하는 영화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 아닌가. 50년대 이후의 동시대 작품들의 경우 전시 목록이 계속 바뀐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었던 것. 그렇지만 예쁘고 착한 하품은 날 너그러이 용서해 줄 거고, 뿐만 아니라 예쁘고 착한 데다가 똘망똘망하기까지 하니까 어떻게 해서든 봤거나 앞으로 볼 수 있겠지 ^^), 어쨌든 상영 시간면에서 축소판으로 취급될 수는 있어도 그 외의 모든 면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얘기.
 

모든 걸 떠나서, 가장 먼저 피부에 와닿은 것은 고다르의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오직 영화만이(SEUL LE CINEMA)"라는 말. 작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씨네필로서 영화에 대해 바칠 수 있는 온갖 찬사들을 아낌없이 바치고 있는 저 거장 감독의 모습이라니.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거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열정과 재능을 쏟아붓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뿐인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러하다. "영화는 영화 자신이 원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고, 또 영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아아, 정말이지,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랴. 그리고 이 말을 하기 위해 다른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영화가 아니라면. 그러니, 이 교조적인, 그러니까 영화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의 한 교주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와도 같은 이 영화를 보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그의 이 모든 애정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물론, 내 생각엔, 애정이 먼저고 애정에 대한 (합리적) 이유/근거는 나중에 가져다 붙이는 것들에 불과하지만. 모든 종류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 "기술 복제 시대"에 예술이 예술로서 온전히 남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구현할 수 있는 장이란 오직 영화 속에 있다는 것이 고다르의 생각인 듯. 그리고 그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듯, 고다르는 1시간 반동안 쉴새없이 온갖 감각 기관을 자극한다. 문학, 미술, 사진, 연극, 음악을 넘나드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향연.

예전에 《만화의 역사》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다. 작가는 말했다, 만화사를 말하는/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 대한 만화를 그리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 만화를 그리게 됐노라고. 그래도 만화는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사진의 역사를 사진만으로 말하기/쓰기란 힘들고, 이는 미술이나 그 밖의 다른 예술 장르들은 물론이고, 다른 과학들도 마찬가지다. 철학의 경우, 철학에 대한 역사 혹은 사관이 철학 자체와 무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일치한다고 보기란 어렵다. 헤겔의 경우가 예외가 되겠지만.
 

그러니 영화쟁이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들은 자신의 작업을 역사화함에 있어서, 자신의 작업을 메타적으로 성찰함에 있어서 최상의 수단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메타 언어와 하위 언어가 일치하는 저 경이로운 광경이라니. 비록 고다르는 영화에서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역사화하는 데에는 영원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역사를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라고 말했지만, 그 정도가 어딘가. 그리고 그 이상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 target='_son'>http://www.centrepompidou.f ... ainementCategorie>이 영화의 공식홈으로는 유일한 퐁피두 센터의 영화 소개 페이지 바로 가기

영화' target='_son'>http://www.centrepompidou.f ... ;Arg3=Godard.rm>영화 부분 동영상 바로 보기(리얼 미디어 플레이어용 rm 파일)

* 그냥 넘어가자니 도저히 안되겠어서 덧붙임. Moments choisis (1998) 가 Les histoire(s) du cinéma (1989)의 축소판인가의 여부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양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감독이 후자를 1/4 분량으로 새로 편집해서 만든 것이 전자라고 해야 가장 정확할 듯. 그러니까 후자를 본/볼 사람은 굳이 전자를 볼 필요가 없다는 말.

*  Les histoire(s) du cinéma (1989) 전편이 오는 2월 27일 씨네마떼끄에서 상영될 예정.

—박쥐

크리스마스 선물

blogin.com · 2004-12-26

그러고 보니 올해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참 많이도 받았네요. Eglise
d'Auteuil 의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시작해서, 엄마가 보내준, 먹거리가 잔뜩 든 소포에다가, 수오기 언니의 '커피와 담배', 눈크 언니의
문어-양 책꽂이(요 옆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분명히 오리-토끼 그림의 또 다른 버전임에 분명해요), 라디오 프랑스에서 받은 브리지의
씨디, 그리고 E 언니의 초대, 그 자리에서 받은 무수한 하트 세례,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저녁의 몽마르트르
거리.

그러니까 조금은 행복해 해도 되는 거였겠지요? 크리스마스였으니까요.
 

* 트랙백
기능이 또 먹통인 관계로, 눈크,' target='_son'>http://nuncblog.egloos.com/850558>눈크, S, E 와 함께 한 크리스마스
저녁에 대한 눈크의 멋지구레한 포스트 를 직접 링크합니다. 눈크' target='_son'>http://nuncblog.egloos.com/>눈크
언니의 블로그 는 지금 크리스마스날 저녁의 몽마르트르 거리를 찍은 아주 멋진 사진들로 가득해요.

—박쥐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blogin.com · 2004-12-21


수오기 언니가 빌려주고 간 에미코 야치의 《공주님의 요람》을 읽자마자 내게도 이런 일이! 수오기와 눈크, 두 사람이 내 '행운의 보석'이었나 봐요. ^___^ 

—박쥐

이빨을 뽑다

blogin.com · 2004-12-16

1.

그저께, 오랜만에 꿈을 꿨다. 뭐, 사실, 꿈이야 매일 꾸지만, 꿈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심지어 꿈을 꾸기는 한 건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에 꾼 꿈은 그 지각적 생생함 때문에 또렷이 기억난다.

엄마였던 것 같다. 엄마가 옆에 있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말을 하려는데 입 안에 뭔가 물리기 시작했다. 이빨이었다. 이빨들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고, 아니 뭔가에 쓸려 나가고 있었다. 도미노처럼. 바람 따라 누운 갈대처럼. 옥수수가 자신의 알갱이들이 하나씩 뜯겨 나갈 때 딱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 속의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태를 현실 속에서 내가 겪은 일들에 비추어 판단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에도 꿈 속의 나는 생각했다. 요즘 들어 담배 때문인지 치통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빨이 모조리 빠져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하곤 하는데, 드디어 일이 터졌구나.

그렇지만 나는 엄마에게 하려던 말을 해야 했다. "왜 말을 못하니?", "이빨이 모조리 빠져서", "이빨이 왜 그렇게 됐어?", "담배 때문인가봐", 모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 이것은, 어떻게 하면 "여자애가 어떻게 담배를 피우니?" 하는 말을 하지 않고도 딸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는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런데 다행히 말이 나왔다. 꿈 속의 나는, 이빨이 다 빠졌는데도, 아무 문제 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2.

꿈만 꾸면 해몽을 검색해 본다는 스노우캣의 말이 생각났다. 네이버 지식인에 들어가 "이빨이 빠지는 꿈"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하고 있는 일에 큰 변화가 생긴단다.

불안해졌다. 내 하고 있는 일이란 게 뻔하지 않은가. 지도 교수에게 그나마 좀 제대로 된 논문 계획서를 보내놓은 것이 엊그제의 일. 그는 아직까지 답장을 주지 않았다. 어제 수업에서 한 다른 교수가 학교 전체의 메일 서버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길 듣고 안심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지도 교수가 나를 거부할 것이라는 말인가.

그런 저런 생각 속에, 그리고 오늘 있었던 불어 시험 때문에,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시험도 보느니 마느니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찌라시 기사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 재빨리 끝낸 뒤에 잠이나 푹 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3. 
 
와보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찌라시" 뉴스 편집장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당분간 일을 맡기지 못하겠다는 전갈이었다.

허무해졌다. 짤리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과외를 하다가 짤렸던 적은 있지만, 사실은 제법 되지만,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라 그 기분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의 가치가 떨어졌음을 확인하는 일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 이유가 경기 불황이든, 학생의 성적 저하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러다가 꿈 생각이 났다. 그렇담 이것이, 바로 그, 그 큰 변화였다는 말인가? 갑자기 유쾌해졌다. 그래, 큰 변화이긴 하지. 한 달 생활비가 들어오던 창구가 막혀버린 셈이니. 그래도 그 정도의 변화라면 감당할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변화가 아니라는 게 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4.

비가 내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눈을 내려줄 것처럼 굴다가 속절없이 빗방울만 추적추적 뿌리고 말아버리는 파리의 하늘이라니. 그래도, 이 무너질 듯 무거운 하늘 아래에도, 솟아날 구멍이 없진 않겠지.
 
어쩌면 이번에 뽑은 이들은 내가 오래 전부터 앓고 있었던 것들인지도 모른다. 이빨이 뽑혔다면 새 이가 나기를 기다리거나 다른 것을 박아 넣으면 될 일이다. 그도 안되면 잇몸으로 씹으면 된다. 어쨌든 그렇게 해도 살아지지 않더냐. 어쨌든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않느냐.

—박쥐

좋은 주말!

blogin.com · 2004-12-12


http://www.ezoo.or.kr/music ... zoovideo/rm/db505.rm width=286 height=45 type=audio/x-pn-realaudio-plugin CONTROLS="all" AUTOSTART="false" NOLABELS="false">

주말 보내기. 김창기 작사+작곡. 동물원 5-2집.
출처는 동물원' target='_son'>http://www.ezoo.or.kr>동물원 공식 홈페이지 .


동물원의 노래를 듣다 보면 가끔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보라, 이 30대 화이트 칼라 남성들이 어떻게 자신들만의 정서를 공통의 것으로 전유해 내고 있는지. 
 
그들은 알까? 이런 회한이나 비애 같은 것들도 자신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을. 그들이 9 to 5 의 삶에서 느끼는 공허함조차 그들만큼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사치스럽기만 한 감정이라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그들의 노래에서 위안을 찾는 나는 또 뭔지. 심지어 주말만 되면 이 노래를 찾아 듣는 버릇을 들여놓기까지 했으니. 

어쨌든 좋은 주말이 되길 바라며. 당신에게도. 내게도.

—박쥐

빛 한 줄기

blogin.com · 2004-12-09



2004년 가을의 어느날, 몽파르나스,
어느 이름 모를 가족의 무덤에서.

내가요, 이래서, 비록 사이비이긴 하지만, 카톨릭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얘길 못한다니깐요. 그/그녀가 누군지, 그/그녀가 존재하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그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다 그/그녀가 자신의 정체나 존재 여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그/그녀를 위해서 혹은 그/그녀의 이름으로(그저 이름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라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 그런 것들 때문에 그/그녀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깐요.

—박쥐

blogin.com · 2004-12-03

1.
문득, 사람들이 나를 수, 라고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절대로 그 때문이 아니야, 하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 때문인 것만은 아니야, 하고 말한다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다. jEeSUn 가지고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되고, 그가 테리 이글턴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소설 여주인공 중에서는 최초의 (의식적) 페미니스트라는 Sue가 나 역시 좋았고, 그녀를 닮고 싶었고, 가끔씩 그녀와 비슷한 행동을 하거나 하려는 날 보며 놀랄 때도 있고, sur 보다는 sous 가 나랑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내 사는 꼴도 euro 보다는  sou를 연상시키는 맛이 없지 않아 있으니까. 무엇보다, '수'는 그 어느 나라 말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음운학적/음성학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까 (그런 면에서 하품이 무척 부러웠다). 아니, 그보다는, '썬'이 주는 기만적인 어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빠는 나를 가끔, 아니 꽤 자주 '써니'라고 부르곤 했다). 
 
2.
그래서 앞으로 누가 넌 널 어떻게 부르니, 하고 물으면 난 나를 수라고 불러, 라고 답해야지, 하고 결심했다.

3.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네 이름이 뭐니, 하고 물었다. 차마 내 이름은 수야, 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난 나를 수라고 부른다, 는 거짓이 아니지만, 내 이름은 수다, 는 명백한 거짓이고, 불행히도 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은 잘 하지 못하게끔 길들여졌으니까.

4.
그래서 난 아직까지 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L여사가 수오기, 가 되었다. 사실은, 어쩌면, 아주 간단한 일일 지도 모르는데, 내 이름 발음하기 어려우면 나를 수라고 불러도 좋아, 라는 말을 난 왜 죽어도 못하겠는 걸까.

—박쥐

위대한 철학의 기준

blogin.com · 2004-11-28

"과학적 인식이 아닌 인식은 인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참인 인식이 아닌 인식은 인식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과학적 인식', '참인 인식'은 중복된 표현입니다."
 
깡길렘이 말을 이었다.

"철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따라서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

장내가 술렁였다. 방송국 스튜디오에는 장 이폴리트, 폴 리쾨르, 알랭 바디우, 미셸 푸코가 앉아 있었다. 이폴리트가 물었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철학은 學의 총체(totalité)를 추구합니다. 당대의 과학이 찾아낸 혹은 만들어낸'진리'를 다른 미학적 혹은 윤리적 가치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철학의 임무입니다."

-- 깡길렘, 리쾨르, 이폴리트, 푸코, 드레퓌스, 바디우의 1965년 라디오 대담 중에서 일부 발췌. 실은, 극적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발췌한 이가 상당 부분 재구성한 것. 심지어 "당대의 과학이 찾아낸 혹은 만들어낸 '진리'"라는 표현같은 경우, 발췌한 이가 자신의 관점을 얼마나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하게 녹여냈는지 잘 보여준다. 대담의 전문은 푸코의 <<말과 글 Dits et écrits>> Vol 1, Edn. Gallimard, 1994 에 실렸다. 참고로 이 대담에서 푸코는, 아직 새파랗게 젊은 철학자로서 대가들 앞에서 말하기를 어려워해서였는지는 몰라도, 겨우 한 마디만 했다.



깡길렘은 여기에서 "위대한 철학"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기준을 제공한다. 위대한 철학자일수록 그 이름이 명사화 혹은 형용사화되어 일상 속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된다는 것. 이 기준에 따른다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위대한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이나 "플라토닉"이라는 형용사가 일상 언어에서 쓰이는 빈도를 생각하면 그러하다. 데카르트 역시. 물론 데카르트의 경우 이 기준으로 따지자면 위대한 철학자라기보다 위대한 수학자라고 해야 하겠지만. '코기토'와 '카테지언 좌표계' 중에서 후자가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고 또 자주 쓰이니 말이다.

어쨌든 이건 결과론적 기준이고, 깡길렘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위대한 철학의 기준은 그것이 당대의 모든 학에 대한 총체화/전체화된 관점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는가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위대한 철학"이라고 할 만한 철학을 발견하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그 누가, 저 위대한 칸트나 헤겔처럼, 동시대의 모든 학문들을 섭렵할 수 있겠는가, 과학이 이처럼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그렇지만, 위험이 있는 곳에, 그러나 구원은 자라나니.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능한 해결책들이란? 첫째, 학제간/다학문적 연구만이 살 길이다. 혼자서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는 환상, 모든 걸 다 해야만 한다는 욕심을 버려라. 둘째,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재차 삼차 물을 수 있다. 왜 꼭 위대한 철학을 해야 하는데? 왜 위대한 철학의 기준이 그거여야만 하는데? 왜 꼭 이름을 남겨야 하는데? 셋째, 진리/지식에 대한 담론의 (재)구성으로서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리~지식~과학~인식~합리성~이성' 이라는 도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가 가능할 조건에 대해 물어야 한다. 각 '~' 사이에는 무궁무진한 역사/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것들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는 일, 거기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박쥐

월동준비

blogin.com · 2004-11-22



김치가 생겼다. 그것도 절반은 내가 만든 김치. 배추 한 포기를 3시간 정도 소금물에 절여 숨을 죽인 다음에 먹기에 알맞은 크기로 썰고 고춧가루, 파, 멸치 및 까나리 액젖, 깨소금, 설탕, 뜨거운 물을 넣고 버무려 용기에 꾹꾹 눌러 담아서 제대로 만든, 내 생애 최초의 김치. 라면도 듬뿍 있고, 쌀도 제법 넉넉하다. 그러고 보니 쟁여놓은 김도 꽤 된다. 가슴 속엔 오랜만에 만난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 모두가 나로 하여금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해 줄 것들이다. 집에 오는 길에 비를 맞으며 행복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이다.

—박쥐

카우프만과 니체

blogin.com · 2004-11-12

* Eternal Sunshine... 에서 커스틴 던스트가 맡은 메리는 바트렛 명언집의 구절들을 외우고 다니는데, 그녀가 인용한 것이 포프의 시와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다. 다음은 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 에 가보세요.

근데 이 영화, 생각해 보면 볼수록 재밌군요. 특히 철학하는 사람들은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재밌는 요소들을 한 바가지 찾아낼 것 같습니다 (뭐, 문학하는 분들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전설적 로맨스에 대한 영화적 해석이라고 좋아하실 수도). 우선 기억이나 정체성과 같은 고전적인 철학 주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구요. "나는 너다", "그가 나의 아이덴티티를 훔치고 있다"와 같은 대사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철학 수업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만큼이나 자주 인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밖에도, 예를 들어 니체의 이 구절은 영화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되는데요, 전 그걸 보면서 영문판 니체전집의 편집자인 카우프만과 시나리오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어떤 관계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더랬지요. 뭐 그건 사소한 부분이고, 굳이 니체가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핵심어인 "망각"이 니체 전공자들의 흥미를 끌지 않았을까 해요. 한 영화 포럼을 봤더니, 실제로 니체로 논문을 쓰는 철학 강사가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가지고 니체에게 있어서의 "망각"을 설명했다고 해요. 초인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의 능동적 망각,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범인/일상인(니체가 현대인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요?)의 전유물인, 과거의 향수에 갇힌, 의지가 결여돼 있는 수동적 망각. 이 강사는 후자의 예로 아멜리를 들었다네요. 헉.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어요.

—박쥐

ㄱ나니?

blogin.com · 2004-11-11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POPE" Alexander. Eloisa to Abelard (extrait)

의 찰리 카우프만이 시나리오를 쓰고 CF 및 M/V 감독 출신인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말해서, 기억에 관한 영화다. 따지고 보면 기억을 다루지 않는 영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운다든지 집어 넣는다든지 뒤섞는다든지 해봤댔자 요즘에 와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로 들릴 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말 많고 탈 많은 인간 관계, 자아, 정체성, 유년 시절의 경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치"에 대한 최초의 경험) 등의 문제를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는 솜씨가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다. 공드리의 감각적 영상 속에서 카우프만식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이 만났다 해도 저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전작 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도 최고였다. 특히 미국식 액센트를 소화하기 위해 발성까지 바꿨음에 분명한 케이트 윈슬렛은 정말 놀랍다. 난 그녀에게 새파랗거나 새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이나 주홍색 추리닝이나 90년대식 히피 복장 같은 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주연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대신해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짐 캐리도 우수어리고 간절한 눈빛을 케이지 못지 않게 잘 소화해 냈다. 어느새 몰라보게 커버린 프로도의 모습도 새로웠다. 비록 시리즈는 1편, 그 중에서도 1/3만 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형용사는 "나이스"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가 제목에 사용되고 또 영화 안에서 직접 인용됐는데, 영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구절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보다는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 "ㄱ나니"는 서태지와아이들의 4집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다. 그 노래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ㄱ나지 않는다.

—박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blogin.com · 2004-11-10

발표 잘 들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후에 벌어진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오신 걸 환영해요.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상화, 근사, 모델에 관한 논문을 쓰셨더군요. 사실 제가 그 문제를 석사 논문에서 다뤘습니다만,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다 잊었긴 합니다만, 논문 쓰던 당시에는 그 셋이 개념적으로 당최 구분이 안돼서 혼났어요. 이상화(idealization)와 모델도 결국은 근사(approximation)의 한 종류 아닌가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개념적 구분이란 게 저한텐 상당히 쥐약입니다만. 특히 요즘 들어선 더 그래요. 난 파르메니데스가 맞았음 좋겠어요.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고. 그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가지가 뻗으면 도대체 구분이 되질 않는다구요. 얘기가 딴 데로 샜습니다만. 어쨌든. 그런가 하면, 질점도 근사고, 뉴턴적 세계관도 근사고, 한국 국민의 평균 키나 평균 몸무게도 근사인데, 뭐 그렇게 넓게 개념화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근데 왜 그렇게 진리값을 부여하지 못해 안달입니까? 루이스의 가능세계론은 상당히 매력적인 도구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진리론에 꿰맞추기 위해 그렇게 도입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쿤도 그래서 자기 입장 설득하느라 고생했잖아요. 인식론적 아나키즘이 뭐 그리 나쁩니까? 사람들이 아나키즘 하면 상대주의에 대해 보이는 것과 비슷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난 아나키즘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반응을 보면 기분이 나빠요. 아나키즘은 "무엇이든 다 좋다"가 아니라구요.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세요? 그들이야말로 신념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먼저 목숨까지 내걸 사람들이라구요. 흑. 그래요. 내가 이래서 요즘 아무말도 못합니다. 도대체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아요. 도대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한 마디도. 이래봬도 옛날에는 논리학을 꽤 좋아했다구요. 뇌세포 하나 하나를 총가동해서 모든 사고의 과정을 스크리닝한 다음에 답을 얻었을 때 찾아오는, 두뇌가 새하얗게 세탁되는 느낌. 나한텐 그게 정말 지상 최고의 쾌락이었다구요. 한때는. 근데 요즘엔 세계가 정지해 버렸어요. 세상은 미친 속도로 휙휙 돌아가고. 그래서 정말 있을 데가 없어요. 못 찾겠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더 드리지요. 당신에게도 이럴 때가 있었나요? 난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졌어요. 어쩌면 좋죠? 그렇잖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요. 이게 정신분열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 지하철에서 갑자기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날 선로로 밀어넣을지도 모르니 그때를 대비한 행동 수칙을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과 비슷한 빈도로.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웃기죠? 이 블로그, 아무래도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의 전속이었던 이발사가 갔던 그 대나무숲이 돼가나 봐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박쥐 머리는 새대가리.

—박쥐

주네, 당신은 멋쟁이!

blogin.com · 2004-10-31

장 피에르 주네와 오드리 토투 콤비의 신작 긴 일요일의 약혼식 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 을 봤다. 추리 소설 작가(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인지 이야기 구조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그래도 프랑스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 그렇지만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만으로 승부하는 헐리웃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통찰력과 세계관은 여전했다. 1차대전 당시의 전장과 20년대를 전후로 한 파리가, 그때 그곳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이렇게 말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재현됐다. 듣자하니 감독이 헐리웃 자본으로 만들면서도 프랑스의 방식과 배우를 고집했다던데, 그저 놀라울 뿐.

이 영화에서 가장 새로운 발견은 조디 포스터였다. 그녀가 어떻게 카메오로 출연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불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20년대 초반의 프랑스 아낙 그 자체였다!), 어떻게 몇 분 안 되는 출연 분량 중 상당 부분을 그렇게 강도 높은 노출신에 할애했는지,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어쨌든 극중에서 나온 대사대로 "웃을 때마다 양볼에 가로가 생기는" 그녀는 참 멋졌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역시 기억, 그러니까 전쟁에 관한 기억, 더 넓게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네크는 전사했다"라는 역사적 사실이 마틸드의 역추적을 통해 재구성되면서 해체되다가 결국에는 거짓으로 판명된다. 마네크와 같은 참호에 있었던 다른 참전 군인들의 구술이나 편지와 같은 사적인 기록물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구성된다. 역사가의 임무는 끝이 없다는 교훈.

—박쥐

Before Sunset 을 기다리며

blogin.com · 200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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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서 비포 선셋 은 언제 개봉할까? 하품의 포스트를 보고 보고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졌다.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 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이 세상에 전쟁이란 게 존재한다는 게 참을 수 없이 싫다"는 셀린의 단 한 마디에 감화되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이 쿨하디 쿨한 헤어짐의 방식을 언젠가 써먹은 적이 있고 앞으로도 한 번쯤은 써먹을 용의가 있다. 말 때문에 고생할 때마다 6개월동안 미국에서 어학 연수를 한 것이 고작인데도 너무나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던 셀린을 떠올리면서 한층 더 깊이 좌절하곤 했다. 
 
이제 그만. 말은 아껴 둬야지. 영화를 본 다음으로 미뤄 둬야지. 실은 그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뭐, 개의치 않으련다. 9년 만에 영화 속에서 만난 그들이 되짚어 가는 기억들이 그에 대한 나의 9년 전의 기억들 역시 되살려 줄 것이므로.

그런데 왜 갑자기 오드리 햅번이냐고? 줄리 델피와 오드리 햅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렇지만 비포 선셋 에서의 저 줄리 델피를 보면서 오드리 햅번을, 그녀의 "문리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보니 창가에서 다리를 벌린 채 노래를 부르는 저 모습, 꽤나 도발적이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직접 노래를 부른 경우는 수없이 많을 터.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매력적인 여배우들이 저렇게 나직한 목소리로 반주가 없거나 거의 없이 부른 장면들이다. 머잖아 비포 선셋 을 보게 된다면, 그때부터 줄리 델피는 아마도 그렇게 내 기억에 남은 세 번째 배우가 될 것이다.
 
오드리 햅번에 이은 두 번째 배우는 잔느 모로. 쥘과 짐 에서 그녀가 새침하게 부르던 그 노래는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어쩜 그렇게 딱 자기 생긴대로 부를 수가 있을까. 이번에 찾아 보니 이 노래의 제목은 Le Tourbillon de la vie (삶의 소용돌이).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를 때의 표정이 정말로 압권이었는데, 아쉽게도 동영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대로, 음성으로나마.


http://pgoh.free.fr/tourbillon.ram width=286 height=45 type=audio/x-pn-realaudio-plugin NOLABELS="false" AUTOSTART="false" CONTROLS="all">
출처 : Chansons' target='_son'>http://pgoh.free.fr/french_songs.php>Chansons françaises (French Songs)
 


—박쥐

2046

blogin.com · 2004-10-24

<2046>을 보다...


1.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건

1.1 관련 기사나 비평들은 고사하고 시놉시스도 읽지 않은 채로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김모' target='_son'>http://www.film2.co.kr/movi ... .asp?mkey=34260>김모 기자(^^)가 <필름2.0>에 쓴 것 을 비롯한 몇 개의 아티클들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적어도 넷 이상의) 스토리 라인들을 대강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다.

1.2 왕가위의 스타일에 익숙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는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가 전부다. 그것들 말고도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봤어야 했다. 내가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이 맡았던 역의 이름이 "수리첸"이었고 그 이름이 이번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는가.

1.3 오랜만에 "정상적인" 관람 환경에서 영화를 보게 됐다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4 불어 자막을 해독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5 페이 왕(내겐 왕정문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의 미모 때문이다. 병원에 들어갔다는 얘길 들을 때 또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2046 열차 안에서 펑키 스타일의 머리와 복장을 한 안드로이드가 되어 우주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별과 별 사이를 떠다니고 있는 사슴 같은 눈빛과 몸짓을 보여줄 때 난 정신을 잃을 뻔했다.

1.6 엔딩 크레딧의 "LG" 마크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영화가 남긴 잔상의 한 10%가 날아갔다. 그 마크가 조금만 덜 선명하고 조금만 덜 길게 나왔더라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이나마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매트릭스 리로리드>팀이 제작했다는 CG는 안들어가느니만 못했다고 생각한다. 세트로 만든 열차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첫 화면에선 그래도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리며 즐거워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혹시 <블레이드 러너> 패러디/오마주? 그렇게 생각하니깐 LG는 또 코카콜라랑 오버랩되네).

1.7 감독의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아님 내가 그의 심중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머리가 나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든가. 홍콩 반환 50주년이 되는 해라는 시간과 <화양연화>에서 두 주인공이 만난 방이라는 공간에서 출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서 좀 너무 멀리 나갔거나 아니면 가지를 너무 많이 친 것 같다. 보는 도중에 '이거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과 '이렇게 해놓고 어떻게 끝내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치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

2. 그래도 이 영화가 나쁘지 않았다면, 그건

2.1 호텔 옥상 때문이다. <여고괴담, 그 두 번째 이야기 : 메멘토 모리>의 학교 옥상이 생각났다.

2.2 왕가위 특유의 수려한 미장센들 때문이다. 하나씩 잘라서 스틸 컷으로 놓고 봐도 그대로 그림이 될 만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난 그가 카메라 가지고 노는 방식도 좋아한다.

2.3 음악 때문이다. 살리에리에게 천형과도 같았던 "들을 수 있는 귀"는 왕가위에게로 와서 모짜르트의 재능 부럽지 않은 축복이 되었다.

2.4 "기억"을, 그 "기억"이란 것의 속성에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프랑스 언론의 프루스트를 운운한 영화평 기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기억이나 기억의 재현물에 깔쌈하게 정리된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감독이나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관객이나 서로에게 보다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박쥐

"아일랜드로의 힘든 여행"을 마치며

blogin.com · 2004-10-23

물론 "그" 아일랜드로의 여행은 끝났지만 "이" 아일랜드로의 여행, 아니, 그보다 "이" 아일랜드에서의 유랑 생활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유랑 생활은 그 "아일랜드로의 여행"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달플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이제는, 정말로, 그 여행을 뒤로 해야 할 때. 이제는, 정말로, 그 여행을 하는 동안 발길이 닿았던 섬들 하나 하나가 판타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 이제는, 정말로, 그 섬들 사이를 한가로이 그리고 자유로이 유영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벗어나야 할 때. 이제는, 정말로, 현실 속에서는 철저히 고립된 섬 안에 처박혀 그저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

<아일랜드>를 보면서 <네멋>을 볼 때만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네멋>을 볼 때는 <아일랜드>를 볼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처럼, <네멋>의 섬은 사람들 사이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섬은 사람들 자체였다. 체인으로 간신히 연결돼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것, 그 섬에 간다는 것은 판타지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가 섬이라는 것, 그 섬들이 서로 가까이 닿기란 불가능하며 기껏해야 체인을 통해서나 연결할 수 있되 그 연결조차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네멋>은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그려진 판타지고, <아일랜드>는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을 통해 리얼리티를 지독할 만큼 생생히 그려낸 드라마다. 

그렇게 이 지구는 수십 억개의 섬들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각 섬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체인들은 각각의 섬들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비록 그것들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심지어 오로지 상상 속에서 빚어내어 이어붙인 사슬에 다름 아닐지라도.
 
저 그림 (장해라님의 작품. MBC' target='_son'>http://mmsmo.imbc.com/BbsRe ... mp;WH=&MODE=>MBC <아일랜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속의 손들. 내 섬과 당신의 섬을 연결하는 체인들. 섬 하나가 가라앉기 시작할 때 비로소 손-체인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내 섬이 아직까지 가라앉지 않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일랜드를 여행하는 내내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처음으로 또 다시(again for the first time!) 시작될 "이" 아일랜드에서의/로의 여행에서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아니, 울지 않을 거다.

—박쥐

절망

blogin.com · 2004-10-20

북관(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북관에 계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
검정치마에 받쳐입은 것은/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 아침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퍼러운 언덕길을/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 백석, "절망" 전문


제일 중요한 전공 수업이랑 세미나가 연달아 있는 화요일은 일주일 중 제일 힘든 날이다. 그만큼 "절망의 도가니탕(<아일랜드> 중 재복의 표현)"에 빠질 확률이 높은 날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랬다. 잠도 안 자고 텍스트를 읽어 갔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영어였는데도. 심지어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였고 중간에는 천문학 얘기까지 나왔는데도. 세미나도 그랬다. 내 석사 논문 주제랑 80% 맞아들어간 얘기였는데, 아마도 논문 쓰다가 한 번쯤 스쳤을 것임에 분명한 저자의 발표였는데, 영어였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끝나고 나서도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교수 앞에서 엉뚱한 얘기를 해버렸다. 사실 난 "다음에..."라는 짧디 짧은 문장을 말했던 건데, 그게 "오늘 저녁은 바빠서 안되지만 다음 주 세미나 끝나고서는 같이 식사하러 가자"는 얘기로 해석돼 버린 것. 발표자랑 연구원/교수들이 가는 자리에 도대체 네가 왜 끼어드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내가 안고 있는, 에펠탑 높이만큼 산적해 있는 문제들--그 중 꼭대기에 있는 건, 오늘 아프게 깨달은 사실인데, 불어가 아니라 물리학/철학에 대한 턱없이 부족한 전공 지식과 부끄럼을 심히 타는 성격과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기억력과 점점 더 둔탁해지고 있는 사고력이다--을 떠올리던 중, 불현듯 백석의 "절망"이 생각났다. 스무살 무렵, 문득 세상의 절망이란 절망을 혼자 다 짊어지고 있다는 게 너무나 절망스러워진 나머지, 후자의 절망만이라도 해소해 보고자 "절망"이라는 말이 붙은 온갖 것들을 찾아다녔었다. 그때 찾았던 것 중 기억나는 게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끝에서>와 백석의 "절망"이란 시다.

도대체 왜 "절망"이라는 제목을 단 걸까? 어쩌면 이 시의 포인트는 바로 거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절망"이라는 단어에 혹해서 그 단어에서 연상되는 정서들을 준비한 채로 본문에 들어갔다가 대뜸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어린 것의 손을 잡은 튼튼하고 아름다운 북관의 계집을 마주치게 되면, 마주치는 순간, 딱 고 순간만큼은 "절망"이고 뭐고 사라진다. 고 순간에는 절망할 틈이 없다. 턱 하니 숨이 놓인다. 그녀가 숨이 차서 가퍼로운 언덕길을 올라가고 그걸 바라본 후에 하루종일 서러운 건 그 다음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식민지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의 화자가 왜 서러워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에 어떤 개인사적/정치적/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숨어 있는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절망"의 정서와 그녀 사이에 놓여 있는 텅 빈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서로 자기들 멋대로 떠돈다. 춤을 춘다. 그 춤을 황홀하게 바라 보면서, 기호에서 소외돼 있던 나는 위로를 받는다.

내일은 철학 수업이 있는 날. 그래도 오늘보다는 괜찮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게다. 그렇지만 "절망"과 "북관의 계집" 사이의 시/공간 역시 거기에, 그때에, 그렇게 남아 있을 게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거기에, 그때에, 그렇게 찾아 올 게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 앞의 생에 남아 있는 나머지 화요일들을 넘기게 될 게다. 그리고, 그리고 나서 서러워 해도 늦지 않을 게다. 그럴 게다. 그리고, 그럴 거다.

사족

시 전문을 찾아 검색하다가
http://book-shop.daum.net/b ... eview_media> face=돋움 color=#000066>유종호 선생이 2001년 민음사판으로 낸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의 서평 기사 가 나오길래 훑어 봤는데, 책도 안 읽은 주제에 이런 리플을 달고 싶어졌더랬다 :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 저 시에서 북방 정서(김재홍)니 모던한 허무주의(김윤식)를 읽어내는 것도 웃기지만, 시인이 한 여인을 보고 반했는데 그 여인에게 애가 딸려 있길래 서러워 했고 그게 절망한 이유의 전부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선생님의 단순/간단/명료/명쾌한 해석이 더 웃긴 것 같은데요. 그렇게 따지자면 보들레르의 "지나가는 여인에게"도 너무 싱거운 시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로맨티시스트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셨다구요.

—박쥐

수첩을 정리하다 발견한 메모들

blogin.com · 2004-10-18

시의 지적인 갑옷은 연을 분리하는 공간 속에 그리고 종이의 여백 가운데 숨어 있고 거기에 남아 있다 -- 그 속에서 생겨난다. 시 자체를 구성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그 의미심장한 침묵.
--- 스테판 말라르메, "E. A. 포우에 관하여".<

br>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고, 어슴푸레한 너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 푸쉬킨, "어느 날 잠 못 이루는 밤에 쓴 시"(1830). 바흐친의 라블레론 중 한 챕터의 서두를 장식한 구절. 이 짧은 문장 하나에 홀

딱 반한 나머지 석사 논문의 서문에다가 재인용하기까지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지만.

<

FONT color=#663300>즐겁게 저항하자.
치열하게, 신나게 살자.
--- 서태지가 언젠가, 어디에선가 한 말.


<

FONT color=#666633>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쳐서 물고기 잡으러
--- 체리필터가 부른 "낭만고양이"라는 노래의 한 소절.


<

FONT color=#996633>For among these winters
There is one so endlessly winter
That only by wintering through it
Will your heart survive
--- 릴케의 시 중 한 구절이고, 수전 브라이슨의

Aftermath --번역서의 제목은 차마 내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겠다--에 인용됐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출처는 모른다.

That is how I know you. You are what I know.
--- Winterson, Written on the Body 중에서. 분명히 무슨 여성학 관련 논문을 읽다가 발견한 걸 텐데, 그게 뭐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박쥐

돌아와 보는 밤

blogin.com · 2004-10-16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 윤동주가 1941년에 쓴 시 "돌아와 보는 밤"의 전문.
햇살이 보내온 새 정본집 (홍장학 엮음,
<정본 윤동주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4) 에서 옮겨 쓰다.
햇살, 고마워~!!

- 사진은 어느날  저녁 내 좁은 창 사이로 들여다 본 하늘.
초승달 하나만으로 "피로롭은" 낮을 살짝이나마 묻을 수 있는 것은
하늘과 가까운 다락방 하나 차지하고 겨우 살아가는 이의 특권이다.

—박쥐

모리스 윌킨스가 죽었다

blogin.com · 2004-10-10

1.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가 지난 5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가디언>의' target='_son'>http://www.guardian.co.uk/l ... ><가디언>의 기사 ). 윌킨스는 로절린드 프랭클린과 더불어 DNA의 X선 결정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발견에 지대한 공로를 한 결정학자.

"모리스 윌킨스가 죽었다"라는 말은 "프랜시스 크릭이 죽었다"라는 말만큼 반향을 갖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과 죽음을 통해 비로소 죽은 그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의 차이.

나는 아마도 왓슨의 글을 통해 그의 이름을 접했을 것이다. 방금 다시 보니 예전' target='_son'>http://www.blogin.com/blog/ ... eyY=00218542>예전 포스트서 소개한 바 있는 왓슨과 크릭의 53년 네이처지 논문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Acknowledgements에,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이름과 나란히.

물론 그는 요절한 프랭클린과는 달리 뒤늦게나마(62년)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 있어서는, 프랭클린보다도 오히려 더 "잊혀진 인물"이다. 프랭클린의 경우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상당히 아이러니컬하고 어쩌면 정치적으로도 그다지 올바르지 못하긴 하지만, 어쨌든 과학사에 이름을 남기긴 했으니까 (내가 이렇게 얼버무리는 것은 아직까지도 어떤 것이 여성주의적으로 과학사를 서술하는 괜찮은 방법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가디언> 기사에는 윌킨스의 동료 과학자가 한 말이 인용돼 있다 : "윌킨스는 매우 중요한 과학자였지만, 과학에 혁명을 일으킨 발견에 있어 그 자신이 담당한 몫에 걸맞는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는 분자생물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현재의 분자생물학도 없었을 것이다."

저 인용문의 주어에 로절린드 프랭클린을 대입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주어로 대치될 수 있는 인물 명사를 프랭클린 외에 적어도 한 대여섯은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도대체 과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혁명적 발견에 있어 자신이 담당한 몫에 걸맞는 명성을 누리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는가, 수많은 그/그녀들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없었더라면 현재의 과학이 성립할 수 있었겠는가, 도대체 과학자들 묘사하는 술어들은 왜 늘상 다 거기서 거기인가 하고 심술을 부리려다가, 참았다. 그렇담 도대체 뭘 어떻게 쓰자는 얘기냐 하는 반문에 답할 자신이 없어서. 가련키 짝이 없다.

3.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이런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려는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 보니, 문득 피천득 선생과 그의 딸 서영의 일화가 떠오른다. 피선생이 영국 대사관의 파티에 초대받아 갔다오던 날, 마중나온 서영이 아버지의 손을 꼭 잡는다. 왜 그러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서영은 "아버지는 영국 대사와 악수를 했을 것이고, 영국 대사는 언젠가 엘리자베스 여왕과 악수를 했을 것이니, 내가 지금 아버지 손을 잡으면 엘리자베스 여왕과 간접적으로 악수를 한 것이 된다"라고 했다나.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젊은 시절 파리의 ENS에서 포닥 생활을 했었다. 나는 지난 학기에 ENS에서 하는 수업을 듣느라 그곳 물리학과 건물에 들락거린 적이 있다. 프랭클린과 나는 한 곳을 밟았을 것이고, 프랭클린이 밟았던 곳을 그의 동료였던 윌킨스도 분명히 밟았을 것이다. 나와 그 사이에는 고만큼의 인연이 있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고만큼의 인연.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어쩌다가 이렇게 희미하디 희미한, 아니 억지에 가까울 인연을 만들어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죽음들을 내가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기억하고 싶을 뿐. 다른 뜻은 없다.

—박쥐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blogin.com · 2004-10-08

문을 두드린다. -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없어도 상관 없어요. 뭐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단, 있으려면 제대로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없느니만 못해. 근데 그러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나라도 못 그럴 거니까. 그러니까 그냥 없는 듯 있는 걸로 칩시다. 

-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요. 이 모든 건 다 꿈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꿈 속에서 나한테 "이건 꿈이야!" 하고 말해 주어야 해요. 그렇게 해야 비로소 이 꿈이 끝날 테니까. 그건 꿈을 깨는 마법의 주문이라구요. 그리고 그게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거구요. 필요하다면 뒤통수를 쳐줘도 좋아요. 그것까진 허락하기로 하죠. 

답이 없다. 역시 아무도 없었던 게다. 결국 이 꿈을 깰/깨뜨릴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던 게다. 아님 그 꿈이 정말로 깨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거나. 
 

* <소피의 세계>를 지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또다른 책 제목. 서점에서 이 책을 찾는데 "대략 난감"했던 기억. "저기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없어요?" 그런 방식으로 이 책을 찾기란 <이 책의 제목은 무엇입니까?>와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요>를 찾는 것만큼 어렵다.

—박쥐

날씨가 쌀쌀해졌다

blogin.com · 2004-10-02

1.
날씨가 쌀쌀해졌다. 바람도 차가워졌다. 방이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찼다. 나는 차디 차게 식은 방에서 떨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잔뜩 웅크리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렇게 바깥 세상과의 온도차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오롯한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다. 웅크리고 웅크려서 이 세상에서의 점유 공간의 면적을 줄일수록 '내 세상'은 커진다.

2.
여전히 오일러와 싸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싸움은 포기했다. 쓸데없이 첫머리에 알렉산더 포프의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라는 싯귀를 인용해 놓고는 그 "빛"의 메타포를 써먹기 위해 한 문단 전체를 본문 내용과 별 상관 없는 뉴턴에 관한 딴소리로 채웠다. 그래서인지 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3.
사실 지난 2주 정도를 고스란히 날려 보냈다. <아일랜드> 때문에. 보고, 보고, 또 보고, 본 뒤에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그러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다 참지 못해 또 보고, 그랬다. 유학생 주제에.

좋은 건 아니다. 물론 좋은 것도 있다. 퀴어 코드를 그렇게 위트있고 귀엽게 집어넣을 줄 아는 드라마 작가는 인정옥밖에 없을 거다. 가족 이데올로기나 몇몇 유명 감독들의 '작가주의(와 그것을 빙자한 같잖은 행태)'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웃을 수 있는 사람 역시. 그 어느 인물, 그 어느 대사, 그 어느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PC하지 않은 게 없다. 정신 질환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너무 심각하지 않게 다루는 점도 맘에 들고. 그런데 그것들 빼고는, 너무 아프다. 볼 때마다 아프고 보면 볼수록 아프다. 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각자 자신의 공간을 찾으려는, 혹은 새로 만들어 나가려는 그 모습들이. 보고 있다 보면 내 '섬'도 보인다. 그런데 그들과 달리 내겐 섬을 연결할 '체인'이 안 보인다.

4.
"측정"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다. 모든 물리량 측정 단위는 규약의 산물인데, 그 규약이라는 게 충분히 객관적이라는 것, 적어도 간주관적이라는 것. 이제 남은 건 이걸 10장 분량으로 늘려 쓰는 일이다. 그러면 헬름홀츠와 카시러와 프레게와의 악연도 당분간은 끝이다. 물론 프레게의 경우 그 인연을 좀더 빨리 끝낼 가능성이 높다.

—박쥐

taKe mE oUt

blogin.com · 2004-09-28


  


Franz Ferdinand, Take Me Out
Take Me Out (2004)

-- 대중음악지 Les Inrockuptibles (lesinrocks.com)' target='_son'>http://www.lesinrocks.com>< ... inrocks.com
) 에서 가져오다. 한때 이 잡지를 그저 그렇고 그런 대중음악 주간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큰 코 다칠 뻔했다. 이들은 지난 6월 푸코 20주기 때 특집 기사를 실었으며, 그보다 좀 전인 4월경 이곳서 과학자들이 정부의 기초 학문에 대한 예산 삭감에 항의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을 때 이들을 옹호하는 지식인들의 선언문을 단독 게재한 바 있다. 서명에 참가한 지식인 명단에는 자크 데리다도 포함돼 있었다.

-- 올해 영국 머큐리상을 수상하기도 한 밴드 프란츠 페르디난드(혹은 퍼디넌드?)의 이 뮤직 비디오는 실로 경이롭다. 키리코, 레제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들을 너무나 잘 버무려 놨다. 언뜻 에셔도 생각난다. 진정으로 창조적인 모방이란 이런 것!

-- 하라는 숙제는 안 하고 이제 겨우 독학하기 시작한 html tag에 재미를 붙여 가고 있는 중. 음악 포스트가 갑자기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다.

—박쥐

스노캣의 "아일랜드" 오마주

blogin.com · 2004-09-22



Eric Clapton - Danny Boy
http://www.snowcat.co.kr/fi ... /music/danny_boy.wma width=286 height=45 type="text/plain; charset=EUC-KR" autostart="false" AllowScriptAccess="never">

September. 21. 2004
copyright (c) snowcat | www.snowcat.co.kr



스노우캣, 당신이 <아일랜드>를 좋아할 줄 알았어!

그나저나 어서 빨리 이걸 끝내야 내일 <아일랜드> 7회를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텐데.

—박쥐

또 군대 얘기

blogin.com · 2004-09-22

남자들이 군대 얘기, 축구 얘기,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떠들 때 소외되는 것은 여자들만이 아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남자 역시 적어도 세 번 중 두 번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군가산점제나 양병거 논쟁이 한창일 때, 나는 왜 군대에 갔다오지 않았거나 갔다 왔더라도 현재의 군대 제도에 대해 그 근본에서부터 진지하게 반성할 줄 아는 남자들이 침묵하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정말로 침묵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소리가 묻혔던 것일 수도 있다. 비단 그들의 소리뿐 아니라 "군필자"들의 격앙된 목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들을 듣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어쨌든 나는 그들이 입을 열면 이 논쟁이 소모적인 성대결--"여자도 군대 가라"나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느냐" 등의 논점 일탈로 이어지게 마련인--이 아니라 반폭력/폭력, 반군사/군사의 구도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최근 http://www.cultizen.co.kr/home/> color=#000066><컬티즌>에 이 웹진 편집장인 이영재씨의
http://www.cultizen.co.kr/c ... t/?cid=1765> color=#000066>"군면제자가 병역 비리에 대해 말하다" 라는 글이 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또 군대를 비판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교적 점잖지만 여전히 그다지 듣기 좋지 않은 소리가 나왔다. 아래는 그 리플에 대해 내가 달아놓은 리플이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말에 대해서든 그것이 나오게 된 맥락을 고려해서 판단을 내려야 하겠지요. 비록 그 말이 결국은 같은 뜻이나 가치를 지닌다손 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 만큼, 똑같이 "군대는 멀쩡한 사람을 화석화시키는 곳이다" 하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 말을 한 사람이 여성, 군필자, 군면제자 중 어떤 정체성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비록 내린 결론은 똑같지만 각각이 그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거친 추론의 과정과 내용 하나 하나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잣집만 골라 털다 잡힌 도둑이 "유전무죄 무전유죄" 하고 말하는 것과 대기업 회장이 "유전무죄 무전유죄" 하고 말하는 것의 차이, 한 대학생이 "386세대는 자기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말을 조갑제가 한 것의 차이가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화의 발화자의 맥락에 대한 의존성을 그 발화에 대한 비판에 적용하게 되면 으레 문제가 생깁니다. 발화된 내용 자체에 대한 논리적 비판보다는 발화자에 대한 인신 공격으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군대에 대해 비판을 하더라도 "손에 구정물 한 번 묻혀보지 않은 여대생"이 하면 그저 철없고 몰염치한 짓이 됩니다. 왜냐구요? 손에 구정물 한 번 묻혀보지 않았으니까요. 대꾸해줄 가치가 1g도 없습니다.


반면 비교적 '정당한' 사유로 면제된 사람들--여기에는 위의 여대생들뿐 아니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도 제외되겠지요--은 그대로 '철'이나 '염치' 면에서 그래도 카운트될 만한 존재로 인정되고, 따라서 그들의 군대에 대한 비판--불행히도 이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만--은 '대꾸해줄 가치'를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논쟁이 시작됩니다. 


저는 단연코, 결국 여대생들이나 군면제자나 다 같은 말을 했는데 왜 달리 대접하느냐고 반문하려는 게 아닙니다. 반대 의견을 가진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즉 상대방의 주장을 그/녀가 가진 맥락 안에 재위치시키려는 최소한의 노력 정도는 해달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 예의에 있어서만큼은 중립성을 지켜달라는 겁니다. (만약 이대총학이 군필자 전체를 싸잡아서 "꼴통마초"로 몰았다면, 그것도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한 이대총학은 그런 적 없습니다. 이대총학을 그런 "꼴통"으로 몰고 간 것은 다름 아닌 진짜 "꼴통마초"들이겠지요).


여성들이 군대를 비판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군대를 둘러싼 그 수많은 비리나 아니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등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부터 군대 때문에 진로를 고민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꼈던 개인사적 경험이나 반군사주의/평화주의에 대한 신념에 이르기까지. 그치만 결코 염치가 없어서라든지 구정물에 손을 담근 적이 없어서는 아닙니다 (바라는 게 겨우 "최소한의 염치"라뇨. 그걸로 보상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왜 여성들에게 바랍니까, 그걸? 국가에 요구해야지요). 그리고 그 비판의 화살은 궁극적으로 전쟁을 비롯해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군필자들이 아니라.


—박쥐

불로뉴 숲 산책

blogin.com · 2004-09-19


<사진 설명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 이걸 찍는 동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큰 소리로 "쟤는 뭘 찍는 거지?" 하고 말했다. 그 말 뒤에는 아마도 "뭐 찍을 게 있다고..."가 생략돼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그가 옳았다. 피사체들은 그다지 포토제닉하지 않았다. 가을이 깊으려면 아직 멀었다.  

2. 마르셀 프루스트는 3살 때 이 숲을 산책하다가 돌아오던 길에 처음으로 천식 발작을 일으켰다.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 올여름 바다 한 번 가보지 못한 설움을 달래기에 호수는 역부족이었다.

4. 열매를 찍고 싶었는데, 찍힌 것은 바람이었다.

—박쥐

또 하나의 세대론 : 요약

blogin.com · 2004-09-12

대학생들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도덕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았으면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이고 순수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분방하면서도 확신에 찬 거대한 동맹의식이었다. 그들이 순수하고 도덕적인 것만큼 그들에게는 가차없는 비판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 학내 이기주의자들에 대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이였고 대학생이었으니까. 유감이지만 그들은 대다수가 이십 년 후에는 자신의 부모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리라는 것을,--최소한 오직 욕망에 천착하리라는 점에서-- 내면으로는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젊은이고 대학생이므로, 적어도 지금은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무죄이며, 나아가서는 미래지향적이고 혁명적이며 도덕적이고 순수한 것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무지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어린아이는 도덕을 위해서 어떠한 노정도 밟지 않았고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위한 조그만 고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단지 부도덕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오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다. 편리하게도 그들의 이 (일시적인) 행위에 명분을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존재는 언제나 그들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신문이 그들을 '신인류'라고 부르고 그런 이름에 으쓱해지지만, 실상은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지 그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그들의 새로움이란 것이 부모세대의 경제적 성과를 너무나 당연한 선물인 것처럼 꼭 움켜쥐고 소비문화에 충실한 결과 자연스럽게 발생한 취미의 다양성이나 욕구분출의 자유로움에 따른 정신적 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진화의 덕택으로 좀더 창의적인 두뇌를 타고났기 때문이며, 게다가 그들은 뭔가 운명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이 우월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풍요한 문물이 넘치는 80년대에 젊은이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기껏 68세대 혹은 4.19 세대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더구나 젊고 신선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호칭을 부여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 좋아할 뿐이다. 대학의 상부가 독재적인 정부와 마찬가지로 권위로 가득 찬 관료의 세계라면, 대학의 학생들 또한 거기에 충분히 걸맞게 충실한 군중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온갖 명분을 획득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매달려 호흡하고 양분을 빨아먹고 있으며 오직 그것의 명령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군중의 맹종이라는 것의 실체를 볼 줄도 모르고 믿지도 않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이 '군중'에 속해 있다고는 감히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쿨!


--배수아, <독학자>, 31~33쪽 (열림원, 2004)


이번에 떠나오기 전 선물로 받은 소설.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바가, 그리 정확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압축적인 방법으로 나타나 있다. 

—박쥐

응시 - 연습 혹은 모방

blogin.com · 2004-09-10


드디어 디카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된 것을 기념해서. 재미삼아 찍었는데 찍고 나니 벨라스케스의 <메니나>가 생각나서.


오른쪽 그림은 artlex.com 의
"응시(gaze)" 항목 중에서. 

—박쥐

꿈인지 현실인지

blogin.com · 2004-09-05

꼬박 나흘 동안,

<데이 에프터 투마로우>, <브리짓 존스의 일기>, <스텐 바이 미>, <슈렉2>, <엘리펀트>, <브링 잇 온>, <거미숲>, <러브 엑추얼리>, <로스트 인 트렌스레이션>, <팻 걸>,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의 영화와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를 보다 보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이 뭐고 꿈이 뭔지 모르게 되더란 말이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엘리펀트>를 보면서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품은 <러브 엑추얼리>와 같은 실현 불가능한(!) 꿈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살다보면, 비행기를 놓쳐 예상치 못했던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를 내 집 TV로 보게 되거나, 대한민국 대통령 입에서 "국보법은 잘못됐으니 폐지돼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일도 생기니까.

—박쥐

오늘의 일기

blogin.com · 2004-08-26

하늘이 파랗길래 늘색 바지에 하늘색 윗도리를 걸치고 내친 김에 속옷까지 하늘색으로 바꿔 입고는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짙은 구름이 깔리고 장대비가 내리치는 바람에 하늘빛 우산을 집어 들고 망설이다가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린 오늘은 파리 해방 60주년 기념일.

—박쥐

비블리오필이 되는 방법

blogin.com · 2004-08-22

증세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저께 시내 프낙 (Fnac이라고, 한국으로 치면 위치상으로나 규모상으로나 성격으로 보나 딱 교보문고인 서점이라고 보면 된다. 파리에만도 여러 매장을 두고 있는데, 내가 주로 가는 시내 한복판의 프낙은 올 여름에 확장 공사를 해서 예전보다 훨씬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말 나온 김에 거기에서 감동받은 얘기 하나. 사실 예전까지 프낙의 서적 코너에서 볼 만한 것이라고는 만화나 잘 나가는 소설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인문학 코너를 아주 크게 늘렸다. 이를테면 철학 서적의 경우 예전에 고작해야 서가 두어 개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아예 열 개에 달하는 서가를 꽉 채운 코너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게 됐다) 에서 발견한 책이 어제 하루종일 아른거렸고, 오늘은 끝내 손에 넣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에밀 부트루의 해설이 실린 라이프니츠의 <모나돌로지>가 그것이다. 뒤에는 앙리 푸앵카레가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를 비교해서 쓴 아티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1880년에 출판된 책인데, 내가 구한 건 축소판으로 1998년에 나온 판본이다. 분명히 절판됐을 터인데, 1만원이 안 되는 가격에 손에 넣다니!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끔가다 어떤 책들이 나를 "부르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됐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책과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판단,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고야 마는 습성이 생겼다. 이곳에 온 뒤에는 더더욱 심해졌다. 적어도 4~5 군데의 헌책방과 철학 서점과 헌책+새책을 나란히 꽂아 놓은 책방이 한 데 모여 있는 생미셸街에 다녀오는 날이면 그 후로 몇 끼를 굶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얼마 전 헌책+새책을 같이 파는 질베르-조제프의 인문사회과학 분점도 개장되고 프낙에도 볼 만한 책들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사실 조심해야 할 곳이 그 곳뿐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길거리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헌책방이 최소한 다섯 블럭마다 하나씩은 꼭 있으니.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 시장들 (파리에는 이런 종류의 생 방브, 클리냥쿠르, 몽뢰이유 등 유명한 비상설 벼룩 시장들이 몇 개 있는데, 그곳을 지나다 보면 가끔 서적상을 발견할 수 있다. 중고 서적만을 취급하는 벼룩 시장도 있다. 이 시장은 주말마다 조르주 브라상스 공원에서 열린다) 은 또 어떻고. 최근에는 애써 출입을 자제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몽뢰이유의 벼룩 시장에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초판을 구했을 때의 환희는 잊을 수 없다. 글쎄 그 책의 전주인이 70년 출간 당시 나온 <르몽드>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서평 기사를 사이에 꽂아두었지 뭔가. 더구나 그 서평은 각각 프랑수아 다고녜와 에드가 모랭이 쓴 것이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같은 시기에 출간된 프랑수아 자콥의 <생명의 논리>에 대한 미셸 푸코의 서평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비블리오필입네 하고 자처하다니, 진짜 비블리오필들이 들으면 비웃을 것이다. 사실 나는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정말 보잘 것 없다. 그치만 책수집에의 욕구나 의지에 있어서는 "고수"들 못잖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 처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아니, 어쩌면 그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점이 책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더 유리한 조건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책을 사더라도 (1) 헌책으로 더 싸게 나온 게 있나 알아 보려 몇 군데나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아내고 (2) 차비나 밥값을 아껴서 구입했다면, 어찌 그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에는 이 식을 줄 모를 수집욕을 채워줄 또 다른 방법을 발견해서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전자 정보 서비스 갈리카가' target='_son'>http://gallica.bnf.fr/>갈리카가 그것.예전에는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최근에 들어서 구석구석을 뒤져보게 됐는데, 세상에, 보물 창고가 따로 없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저작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영어나 독어로 된 책들도 눈에 띈다. 거기에서 찾은 것이 우주생성론적 가설에 대한 앙리 푸앵카레의 소르본느 강의록. 1911년에 출판됐었고 지금은 당연히 절판된. 인터넷으로 구할 수는 있으나 구하려면 10만원 정도를 들여야 하는데, 그걸 이렇게 책상 머리에서 pdf 파일로 볼 수 있다니. 아마도 나의 논문 주제가 될 듯하다. 그걸 다운로드 받고 나니 정말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이었다. 물론 내 노트북 안에 들어 있는 푸앵카레의 책과 그 책의 1911년판 원본이 갖는 가치는 다르겠지만, 나는 전자를 소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런 면에서 "지적 소유권"의 문제는 갈수록 복잡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mp3보다는 CD를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사실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는 플라톤이 직시했던 것처럼 존재론적으로도 아주 복잡한 문제다. 책이란 것도 그렇다. 앞서 언급한 푸앵카레의 강의록은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의 노트를 근간으로 출판된 것이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가 그러했듯이. 하긴, 설령 푸앵카레나 소쉬르 자신이 직접 썼다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관념을 물화/물질화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100%로 완성될 수는 없는 기획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수단이 문자였든, 문자 이전의 언어였든, 문자 외의 언어였든 간에) .

물론 이 인터넷 시대가 나같이 가난한 사이비 비블리오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http://www.chapitre.com>샤피트르 같은 사이트를 이용하면 아주 비싸고 귀한 책들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책을 찾으려면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녀야 했을 텐데 말이다. 아, 물론 그런 사이트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여전히 유용하다. 저렴한 중고책들 역시 취급되고 있으므로.
 
어쨌든 그렇게 해서 책들이 정신없이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머잖아 책들을 베고 자야 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를 일.

—박쥐

또 하나의 세대론을 위한 시론

blogin.com · 2004-08-20

그냥 문득 떠오른, 아직까지 희미하디 희미하기만 한 생각.

사실 아주 뜬금없지는 않지, 거의 모든 "그냥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얼마 전에 한 선배와 송경아 얘기를 하다가 놀란 적이 있었거든. 난 그녀가 당연히 90년대 이후 학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89학번인 그 선배의 동기라지 뭐야? 읽은지 오래 돼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송경아 소설을 읽으면서 최루탄과 땀이 뒤범벅된 티셔츠와 청바지를 연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구나. 알라딘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최근에 소설집으로 나온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조금 읽었거든. 극히 일부만을 읽었지만, 딱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 또래들 얘기가 드디어 나왔구나, 내 또래들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구나 하는. 물론 반가웠다는 얘긴 절대로 아냐. 거기에 비춰진 '나'는 더없이 세속적이고 자본의 논리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인 데다가 거기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저항감을 느끼지 못하거든.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이야. 어느 정도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제 그게 진짜 '사실'이 돼가는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2002년쯤이었나. 91학번들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 "강경대", "이한열"이나 "박종철"이라는 이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여러 번 들은 탓에 어느 정도 귀에 익은 그 "열사"의 이름을 그냥 "경대"라고 부르던 그들에 대한 얘기를. 뭐, 그다지 많은 얘기를 하진 못했지, 당연히. 근데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그래도 자기들이 몸소 살아낸 이야기들을 "역사화"하려는 그들의 몸짓을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는 있었어.

"그들" 이후의 "우리"에 대해서도 맘만 먹으면 꽤 재밌는 얘길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물론 맘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우선은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여야만 하겠지. 그치만 지금의 딱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얘기들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딱 지금의 이 상태에서밖에 하지 못할, 다른 때나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얘기들도 있지 않을까?

그냥 떠오르는대로 말해 볼게.
 
변희재. 알고 보니 이 사람 아주 새파랗게 젊더군. 94학번이더라구. 그가 <내사랑 콩깍지>라는 드라마 얘길 쓴 걸 본 적이 있어. 지금의 (인터넷, 휴대폰)의 자리를 (PC 통신, 삐삐)가 차지하던 "그때 그 시절"의 얘기였다지. 사실 둘은 단절돼 있지 않아. 그보다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토익+토플, 어학 연수, 영화, 하루키, 학점, 취업 준비 등등이 그러하듯이.

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네. 역시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근데 시간이 해결해 줄까? 시간이 지난 뒤에도 뭐라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개성"들을 지닌 세대라고들 하잖아. 근데 진짜 그런가?

—박쥐

빗소리를 듣는 밤

blogin.com · 2004-08-18

후훗. 웬 센티멘탈리즘? 어울리지도 않는데. 거 봐, 안 어울리는 짓 하니까 비도 그쳤잖아.

그래도, 이맘 때면, 특히 이렇게 비오는 여름밤이면 여지 없이 생각나는 노래를 듣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 노래라도 듣지 않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정처없이 헤맬 것만 같은 밤.


조국과' target='_son'>mms://211.215.17.148/song/ ... ng_5_usan.asf>조국과 청춘, 우산 (조국과 청춘 5집, 1996)
출처: 노동의' target='_son'>http://www.nodong.com>노동의 소리

—박쥐

웹 안으로 들어온 백과전서

blogin.com · 2004-08-14

계몽 시대, 달랑베르와 디드로와 같은 백과전서파들은 지식의 대중화를 꿈꿨다. 그런데 이들의 지식/非지식 혹은 지식을 가진 자(지식인)/갖지 못한 자(대중)이라는 이분법은 이제 유효 기간을 상실한 듯하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대중들이 자신들의 지식에 "지식"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지식"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으므로.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 위키피디아가' target='_son'>http://news.empas.com/show. ... p;e=339>위키피디아가 접속 건수에서 온라인 브리태니커를 앞질렀다는 내용의 기사 가 실렸다. 전자가 무료로 서비스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후자의 오랜 명성과 탄탄한 기반 등을 고려하면 꽤 놀라운 소식이다. 개인적 감상을 덧붙인다면 아주 반가운 일이기도 하고.

위키피디아(Wikipedia) 는' target='_son'>http://en.wikipedia.org/wik ... kipedia) 는 다국어로 서비스되는 온라인 오픈 컨텐트 백과 사전이다. 2001년 카피레프트 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리처드 스톨만을 주축으로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32만 5천여 개의 아티클(영어판 기준)을 구축하는 등 단 3년 만에 웹에서 무료로 접근할 수 있는 것치고는 꽤 쓸 만한 백과사전으로서의 구색을 갖추게 됐다. 불행히도 한국어 버전은 아주아주 미약한 수준이지만 (사실 "버전"이라는 말은 적당치 못한 것이, 위키피디아는 각 언어권별로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위키피디아 불어판이 영어판의 불역본인 것만은 아니다. 영어나 미국식 문화의 독점을 경계하고 각 언어권별로 그 문화의 독자성을 존중하려 한 노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한국어판같이 아직까지 인프라가 채 확보되지 못했을 경우에는 문제가 좀 심각해지지만).

위키피디아가 이렇게 놀랍도록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네티즌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운영 체제 덕이다. 기존 백과사전의 경우 각 항목에 해당하는 글을 그 분야에 관한 전문가에게 의탁하는 것이 보통인데, 위키피디아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필진으로 참여할 수 있다. 아티클에 대한 편집권 역시 모두에게 열려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필자를 충원하는 방식에서는 요즘 각 포털 사이트에서 운영되고 있는 "지식 검색"과 비슷하되(누구나 저자/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티클이 작성되거나 참조되는 방식에서는 전통적인 "백과사전"에 좀더 가까운 형태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물론 그게 전부였다면 굳이 얘길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하이퍼 텍스트 형식이 아주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기존 백과사전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각 항목과 관련된 인터넷 링크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사전에 실릴 만한 항목이 어느 소수의 편찬 위원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원하는 항목이 없을 경우 그 항목을 신설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정말 참신한 항목들이 많다. 사전 치고는 거의 "실시간 업데이트"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문학 카테고리의 경우, 시대별 구분에 21세기의 문학까지 소개돼 있다든가, 만화도 포함돼 있다든가. 정말 기대되고 흥분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전/백과사전에 실릴 항목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일인지를 생각하면, "정보 민주주의"란 게 말처럼 쉽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문제는 각 내용들이 어느 정도의 신뢰도를 갖췄느냐 하는 것일 텐데, 정 의심스러우면 운영진이 각 아티클들 중 질적으로 훌륭하다고 뽑아놓은 것만 참조하면 되긴 하는데, 내가 찾아본 것들의 경우 나쁘지 않았다. 뭐, 논문에다가 직접 인용하기에는 뭣하겠지만 논문 주제랑 관련된 항목을 쉬엄쉬엄 읽어 내려가다가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을 듯. 단,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링크들을 하나 하나 다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이 빠져든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박쥐

잭슨 폴락 따라하기 놀이

blogin.com · 2004-08-11

왜 그럴 때 있잖아.

텅빈 모니터 화면이 망망대해처럼 보일 때.
저걸 언제 다 채우나 하면서 한숨을 짓고 있는데
커서가 깜빡거리면서 마구 약을 올릴 때.
간신히 손을 자판 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손에서 한 문장도, 아니 한 단어도 흘러나오지 않을 때.
녹슨 머리를 삐걱거리며 굴리고
말 안 듣는 손을 토닥거리며 움직여서
애써 써놓은 글이 그만 사라져 버렸을 때.
너무 화가 나거나 아니면 한없이 무기력해져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플 때.
아니, 말이 되든 되지 않든 고민하지 않고
그저 소리나 한 번 시원하게 내질렀으면 싶을 때.

그럴 때 가서 놀기 좋은 곳, jacksonpollak.org' target='_son'>http://www.jacksonpollock.o ... g/>jacksonpollak.org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잭슨 폴락도 이런 기분으로 캔버스 위를 뛰어다니며 물감을 흩뿌린 게 아니었을까? 한 마흔 번 중에 한 번 쯤은.

—박쥐

술 마시고 맑은 기운이 돌 때

blogin.com · 2004-08-08

게다가 잠까지 안 올 때,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까?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했을 혹은 일부러 하지 않았을 일을 하는 게 좋겠지.

1. 시를 쓴다 →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시한테, 시인들에게,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2. 산더미같이 쌓인 읽거리를 해치운다 → 하, 참 읽기도 하겠다.
3. 옛 애인에게 국제 전화를 한다 → 근데 전화 번호도 모르잖아.
4. 지하철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전화를 한다 → 아, 그가 그렇게 끈적끈적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5. 청소를 한다 → 그렇지만 청소는 이미 했는걸. 청소하느라 오후 한나절을 고스란히 날려 버렸단 말이지.
6. 설거지를 한다 → 그런데 그러다 또 그릇 깨면 어쩌려고?
7. 블로깅을 한다 → 이것이 정답일세. 지금 하고 있잖아.
8. 잠을 부르기 위해 한 잔 더 한다 → 그런데 술이 없는걸. 그리고 정답이 이미 나왔는데 왜 계속 이러고 있는 거니?
9. 읽어야 할 것들 말고, 읽고 싶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읽지 못했던 것들을 읽는다. 이를테면 스포츠신문 연재 소설이나 아나이스 닌의 準포르노급 로맨스 소설 같은 것들 → 근데 스포츠신문 읽으려면 로그인을 해야 하잖아. 아이디도 기억 못하면서.
10. 지금 하고 있는 이 짓을,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고 세듯이, 잠 올 때까지 한다 → 그러다 날 새겠다. 그리고 지금 이 답안은 7. 이랑 중복되는데?
11. 지금까지 이 블로그에 털어놓지 못한 얘기를 한다. 이를테면, 이제 만으로도 스물 일곱 살이 돼버렸다는 얘기라든지, 아니면 바보같은 짓--서연 언니의 말마따나 "철학도가 아니라면 하지 못했을"--을 하는 바람에 9월에 한국에 또 갈 수밖에 없는 바보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얘기라든지 → 이런! 벌써 몇 번째 중복 답안인 거야?

—박쥐

프랜시스 크릭이 죽었다

blogin.com · 2004-08-02

이 말을 하려는데 왜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서의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카미유가 동생 폴에게 랭보를 발견한 기쁨을 전하기 위해 직접 학교로 찾아가던. 그 날은 공교롭게도 빅토르 위고가 죽은 날이었지. 학생들이 "빅토르 위고가 죽었다"고 외치면서 거리로 우르르 몰려가고, 폴 클로델은 그렇게 쏠려 나가는 학생들 틈에서 "깊고 반짝이고 푸른 눈"을 가진 누나 카미유를 발견하고, 그녀를 본 폴의 친구는 그에게 "네 누나니? 네 말대로 정말 깊고 반짝이고 푸른 눈을 가졌구나" 하고 속삭이고, 그 얘기를 들은 폴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고, 랭보를 발견했다며 그렇잖아도 반짝이는 눈을 한층 빛내며 말하는 카미유에게 폴은 "빅토르 위고가 죽었어" 하고 냉정하게 말하고.

제임스 왓슨과 공동으로 DNA 구조를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이 7월 29일에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한다( <가디언>의' target='_son'>http://www.guardian.co.uk/l ... tml><가디언>의 기사 ). 나야 "프랜시스 크릭이 죽었다"라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별 느낌 없지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생물학과 연이 닿아있는 사람들에게 그 소식은 아마도 클로델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에게 위고의 죽음이 가져왔던 것만큼의 효과를 가져왔으리라. 1953년에' target='_son'>http://www.nature.com/genom ... tson-crick/>1953년에 <네이처>에 실린 이들의 2페이지짜리 논문이 이후 50년 간의 생물학, 그리고 그 인접 학문들을 뒤집어 놓았음은 분명하므로.

DNA 구조의 발견은 아마도 과학사에 기록된 유명한 발명/발견들 중 가장 최근의 것에 속할 터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과학적 발견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서사--"한 명 혹은 소수의 천재에 의해", "우연히", "각종 이해 관계나 여타의 맥락들과는 무관하게, 오직 '진리'의 탐구에 대한 열정으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이 잘, 그리고 널리 팔리긴 한 모양이다. 그에 비해 크릭의 책이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퍽 유감스럽다. 왓슨이 다소 쇼비니스트인 데가 있어 주변 인물들을 묘사함에 있어 너무나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데 반해(특히 발견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결정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에 대한 왓슨의 악의적인 서술은 악명이 높다), 크릭은 확실히 훨씬 관대하면서도 겸손하며 차분한 자세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이 그 역사적' target='_son'>http://www.nature.com/genom ... watson-crick/>역사적 논문"을 쓸 때만큼은, 내 추측이지만, 크릭의 입김이 상당 부분 작용했던 것 같다. "아마도", "~라고 믿는다", "~인 것으로 보인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든지, 논문의 상당 부분이 선배 혹은 스승 혹은 동료들의 연구 성과를 언급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다든지 하는 사실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컨대. 그들이 "세기적 커플"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 크릭의 인내심이 한몫했음에는 틀림없다. 오죽하면 크릭이 한 학회장에서 처음 만난 생물학자로부터 "아,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었어요? 저는 크릭 씨의 이름이 왓슨인 줄 알았었는데" 하는 말까지 들었을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쥐

2004년, 프랑스 인식론의 해

blogin.com · 2004-07-30

가스통 바슐라르는 1884년에 태어났다. 올해로 120년이다.
조르주 캉길렘은 1904년에 태어났다. 올해로 100년이다.
미셸 푸코는 1984년에 죽었다. 올해로 20년이다.



지도교수님이 "그래, 그 동안 뭘 배웠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프랑스 인식론이 어떤 점에서 영미 과학사/과학철학과 다른지에 대해 배웠노라고 답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래, 어떻게 다르다니?"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나는 숨돌릴 틈도 없이 잽싸게 말했다. "그게요, 수업 시간마다 다들 제각각으로 얘기해서 말이지요."

아마도 이제는 보다 제대로 된 답변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답변에는 아마도 이런 말들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 역사주의, 이성(중심)주의 그리고/또는 합리주의, 과학주의,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의 변증법. 이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 도미니크 르쿠르가 자신의 석사 논문을 위해 창안한 이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역사적 인식론(l'épistémologie historique)"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전통"을 세운 이는 단연 가스통 바슐라르다. 나는 그에 관해 말함에 있어 과학사가냐 과학철학자냐 인식론자냐 하는 "직업"상의 구별은 온당치 못하거나 적어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과학에 관해, 그리고 좀더 넓게는 인간의 인식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느냐다. 바슐라르가 그의 동시대 과학이 갖는 인식론적 의미에 대한 성찰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식론적 장애물"이라고 표현했던 그 이전 시대 과학의 발굴에 "역사가적 자세"로 몰두했던 것도 오로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과학사는 과학을 둘러싼 담론들의 총체가 변화해 온 궤적을 일컫는다. 그 궤적은 결코 단선적이지도, 일방향적이지도 않다. 인류의 다른 정신적/물질적 활동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호흡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라는 뉴턴의 말은 옳았다. 그 말은 천재의 겸손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사실인 것이다. 이 때의 "거인"이 뉴턴 이전의 다른 "천재"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게 이해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는 바슐라르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인식론자"들의 과학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비과학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들의 논의는 일견 과학/비과학 구획에 대한 포퍼의 기획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퍼가 프로이트나 맑스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명단"에서 제외해 버린 반면에, 바슐라르는 "일상적 인식"이 "과학적 인식"과 이루는 긴장에 주목하고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결국에는 의도와는 달리 인간 정신의 가장 내밀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그 "장애물들"을 복원하는/복권시키는 "일"을 내고 말았다. 그것들이야말로 과학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긴장 상태에 있게 하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수정을 가하게 하는, 그리하여 쉼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임이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그의 직속 제자인 조르주 캉길렘에게, 그리고 그 이후의 미셸 푸코에까지 이어진다. 이들에게 "병리적인 것"이나 "광기"는 "정상적인 것"이나 "정상성"에 준하는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먼지가 수북히 쌓인 사고를 뒤져가면서까지 공인된 과학사 속에 묻혀 있던 사료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리라.



내가 그들로부터 배운, 아니 이미 다 배웠다기보다는 앞으로 한참은 더 배워야 할, 그런 태도는, 멈추지 않는 "탐구"의 정신이다. "'나'란 단지 '공부하다'라는 동사의 주어에 다름 아니다"라는 바슐라르의 말은 상아탑 속에 안주하는, 안락 의자에 파묻힌 모든 철학, 아니 모든 학을 경계하라는 말로 읽혀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인식론은 자신의 선조인 데카르트적 합리주의를 계승하는 동시에 넘어선다. 프랑스 인식론자들의 "과학"에 대한 경이/애착은 데카르트가 당대의 과학과 수학에 대해 보여줬던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 "합리성", "이성"에 대한 태도도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나'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변화' 혹은 '생성'의 이유들을 찾아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공부하는 나'다.


※ 미뤄뒀던 숙제를 이렇게 부족하게나마
  완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France Culture 에서
 바슐라르 탄생 12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집' target='_son'>http://www.radiofrance.fr/c ... resentation.php>특집 방송 의 힘이 컸다.
8월 한 달 동안은
 그로 인하여 행복할 것 같다.
이 방송들을 컴으로 녹음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 혹시 ram이나 rm으로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 녹음하는 방법을 아시는 분 계세요?
가르쳐 주시면... 안 잡아먹을 뿐 아니라
선물까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박쥐

Liseuse 4

blogin.com · 2004-07-25

Pablo Picasso, 1920
Oil on canvas, 1,02 m x 1,66 m
Centre Pompidou,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 "독서녀"들을 그린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 target='_son'>http://www.boekgrrls.nl>http://www.boekgrrls.nl 내의 사이트를 보려면 이곳을' target='_son'>http://www.boekgrrls.nl/BgD ... tm>이곳을 클릭~!

—박쥐

Liseuse 3

blogin.com · 2004-07-25

Camille Corot, 1845-1850
Oil on canvas. 42.5 x 32.5 cm
E. G. Buhrle Collection, Zurich

—박쥐

Liseuse 2

blogin.com · 2004-07-25

Jean-Honoré' target='_son'>http://www.nga.gov/cgi-bin/ ... 850>Jean-Honoré Fragonard, 1776
oil on canvas, 81.1 x 64.8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박쥐

Liseuse 1

blogin.com · 2004-07-25

Johannes Vermeer, 1657
Oil on canvas, 83 x 64.5 cm
Dresden, Staatliche Kunstsammlungen,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박쥐

이 정도면 선정적인가?

blogin.com · 2004-07-24

과학자들은 내기를 좋아해

지난 7월 21일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픈 호킹 박사가 더블린에서 열린 학회에서 자신의 블랙홀 이론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동료 물리학자와의 야구 백과사전 내기에서 졌음을 고백, 화제가 되고 있다. 호킹 박사는 이 외에도 아원자 입자인 힉스 보존의 존재에 대해 100달러를 걸고 美 미시건 주립대의 고든 케인 박사와 내기를 걸었던 바 있다. 다음은 영국의 가디언지가 소개한 과학적 내기들.


◈ 아이다호 대학의 스티븐 오스탯과 시카고 대학의 제이 올션스키는 지난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해 둘 중에서 지적 능력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2150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의 자손에게 500달러를 물려주기로 했다.

◈ 2002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중역 크레이그 먼디는 구글사의 간부 에릭 슈미트에게 2030년까지 조종사 없이 승객을 태우는 비행기가 상용화된다는 데에 2000달러를 걸었다. 이긴 사람은 내기에서 딴 돈을 암 연구에 기부하기로 했다.

◈ 1870년 엘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지구가 평평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올드베드포드항에서 지구의 곡률을 측정했다. 존 햄든은 월리스가 틀렸을 것이라는 데에 500파운드를 걸었으나 월리스의 측정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월리스의 부인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 남편이란 작자를 보고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까? 그의 머릿속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소.”


< 가디언 2004/7/22 >

—박쥐

몽실에게

blogin.com · 2004-07-21

그래, 걱정해 준 덕분에 잘 왔다. 비행기도 안 놓치고 말이야. 전날 짐을 싸느라 한숨도 못 잔 탓에 오는 내내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긴 했지만. 꿈속에서 미소를 지었는데 실제로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고 또 그런 나를 바라보는 옆사람의 시선이 피부로 느껴지는 상태. 아마도 그 상태에서 헛소리까지 해대지 않았나 싶어. 옆사람들과 승무원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더군. 

도착해서는 온 시내가 무섭도록 조용해서 좀 놀랐다. 다들 휴가를 간 모양이야. 택시 기사에게 철학을 공부한다고 했더니 그가 택시와 철학을 같이 언급하면서 무슨 농담--아마도 고급한, 철학적인 것이었을--을 했는데 못 알아들었다. "프랑스에서는 택시 기사도 플라톤을 논한다고 내나라 사람들은 말한다"고 응수할까 했지만 관뒀어. '도'라는 조사를 표현하기 위해 가져다 붙여야 할 부사 même(even에 해당하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므로. 내릴 땐 그에게 15%에 달하는 팁을 주었어. 내 한끼 식사값에 해당하는. 그가 "남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한 알량한 복수심/자존심에서였던 듯.

집에 와보니 냉장고 속에 곰팡이가 피었더군. 그리고 디카와 노트북을 연결할 잭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 기대했던 한 과목마저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역사 하나만 턱걸이로 붙은 셈이야.

근데 무슨 일인 게냐? 혹시 이번에 만났을 적에 너도 명랑한 척 했던 게냐? 옛 애인에게 결혼할 새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는 일이 네게 일어났을 리는 없고. 그래. 사실 우리(함부로 "우리"란 말 썼다고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길)같은 사람들에게 "왜 우울하냐?"는 물음만큼 우문이 어딨겠냐. 차라리 "오늘은 웬일로 우울해 보이지 않네"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지.

혹시 요즘 비트겐슈타인이랑 니체를 한꺼번에 공부 하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

"하고 싶은 말은 혀끝을 맴돌뿐
튀어나오지 않는다.



하고 픈 말도
사실은 그림자다.



무형의 것을 가지겠노라...
뒤섞여 가는 문자들"



사실 맞는 말이다. 그치만 그 "하고 싶은 말"이, 비록 네말처럼 "혀끝을 맴돌뿐 튀어나오지 않"을지라도, 설령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맘에서 맘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밥 잘 먹고, 멍들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네 말, 그게 곧 내가 네게 하고픈 말이다.

—박쥐

시내 서점 유람기

blogin.com · 2004-07-20

이 짧은 여정의 마지막을 서점 나들이로 장식했던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비록 구하려던 책을 하나도 못 찾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계간지들이 여전히 계절이 변하는 속도와는 무관한 발간 행태(!)를 보이고 있다든지(7월 중순이 다 돼가는 마당에 여름호 찾기가 그렇게 힘들다니!!) 여러가지 반가운 번역서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는 등등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날 기쁘게 했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김선우의 새 시집이었다.

그 밖에 책에 관한한 유난히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는 나를 열광시키는 것들이 몇몇 있었다. 우선 창비시선의 북커버 디자인이 바뀌었다. 몹시도 깔끔하다. 경쟁사(?)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째 같은 디자인을 고수해 오고 있었던 데 반해, 창비의 <시선>은 그만하면 꽤나 자주 갈린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문지의 시집들에 그려진 시인들의 인물컷과 뒷표지에 실리는 시인의 말을 좋아하지만.

<살림지식총서>도 무척 반가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으려는 것이 이 총서의 기획 의도라는데, 거기에서의 "지식"이 얕거나 편협한 수준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UFO에서부터 마피아나 조폭 등 참신한 주제들도 많고. 저자들이 모두 국내 학자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비슷한 컨셉을 갖춘 책세상의 <우리시대문고>에 비하면 분량도 짧고 가격도 싸다.

사실 오늘의 나들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보와 영풍 두 "문고"들의 "변신"이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영풍의 약진과 교보의 몰락이었다. 교보의 분류 체계는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이번에 보니 "남성소설"이라는 코너가 생겼다. "인터넷소설" 코너 옆이다. 시집을 위한 진열장과 진열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영풍은 예전에 비해 형편이 아주 많이 나아진 듯했다. 한결 차분해진 느낌. 심지어 교보보다 넓어 보였다. 다갈색 목조 서가들도 눈에 들었다. 

추가 사항. 생각나는 대로.

1.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린 박남철의 시는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다. 젠장. 난 <세계의 문학>을 좋아했었다구.

2. 오늘 드디어 수중에 넣은 김광석 <다시부르기2> 중 "불행아. 그리고' target='_son'>http://www.gaseum.co.kr/300 ... 宣�. 그리고 작곡자 김의철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불행아.' target='_son'>mms://wm-001.cafe24.com/ba ... _kec.wma>불행아. 말하자면 이 노래의 오리지널 버전인데, 1974년 "저 하늘의 구름따라"라는 제목으로 발표됐었단다. 그리고 결국 코스모스의 앨범은 구하지 못했다.

3. 오늘 대학로에서 청계천을 거쳐 을지로로 진입하려다가 그만... 시장이 바뀌거나 시장의 에코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바뀌기 전까지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4.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이기상 선생의 <이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약간 실망이다. 선생 특유의 언어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제외하면. 물론 동양의 고전들에 뒤늦게 눈을 떠 새삼스레 "우리 철학"을 강조하는 서양철학 전공자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들의 그러한 고충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서양은 이러한데 동양은 저러하며, 현대의 모든 병리 현상은 서양의 이러함 때문이니 동양의 저러함에 호소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이분화나 단순화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게다.

5. 서광사의 플라톤 전집 출간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못 본 새에 <크리톤...>도 나왔다. 근데 계속 하드 커버로만 낼 셈인가? 박종현 선생의 역주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6. 계간 <문화과학>의 표지도 바뀌었다. 근데 제호의 글씨체가 좀 이상하다. 안 어울린다.

—박쥐

내 남동생의 결혼식

blogin.com · 2004-07-17

1. 비오는 날의 결혼식,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빗소리--겁나게 세찬--와 성가와 희뿌옇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비에 젖은 연미복. 난 이런 식의 조화를 좋아한다. 

2. 앞으로 얄미운 시누이 대신 무서운 누나의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올케가 너무 예쁜지라.
3. 결혼과 관련한 이런 저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인상 찌푸리지 않고 "쿨"하게 응대하는 내 자신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아예 내쪽에서 먼저 저들의 방식대로 말한 적도 있다. "오늘의 컨셉이 '귀여움'이냐?"라는 질문에 "신랑의 누나가 아니라 신랑의 여동생처럼 보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젠장.

4. "따까리" 노릇을 계속 해서인지, 몹시 피곤하다. 동생 부부(아, 이 두 단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쓰일 수 있는 말이었다니!)는 별로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좋을까?

—박쥐

돌아온 탕아

blogin.com · 2004-07-13

늙은 농부가 자신의 곁에서 부지런히 일했던 작은 아들보다 몇 년 동안 집을 비우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만 축냈던 큰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을 반겼던 까닭은 무엇일까?

난 나의 9개월 간의 부재를 증명할 변화의 징후/증거를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의 속도는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내 눈이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않았다는 얘기.

옛 애인을 만나보고 싶은 열망은 이 땅에 발을 다시금 내딛은 순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산에는 가고 싶었는데. 팔공산. 그런데 북한산, 아니 남산조차 오르기 힘들 것 같다. 즐겨 다니던 집앞 한강변에 나가볼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그곳에 가끔씩 들러 휴식을 취하던 백로 역시 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하다. 사진으로 만족해야겠지.

—박쥐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blogin.com · 2004-07-09

변한 게 있다면 할머니가 많이 늙으셨다는 것과 우리집 현관문에 <스타워즈>에 나오는 것 같은 출입 통제 장치가 설치됐다는 것과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아니 이미 생겼다는  것.

변치 않은 게 있다면 내 방이 여전히 읽(었)어야 할, 그러나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하다는 것.

—박쥐

이 여자 감독을 아세요?

blogin.com · 2004-07-06

카트린 코르시니(Catherine Corsini). 그녀와 배우 카린 비아르(Karin Viard)를 <새로운 이브(La nouvelle Eve>(1998년)에서 만났던 날, 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행복감은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서 훨씬 더해졌어요. 세상에, 그녀가 <리허설(La répétition)>(2000년)의 감독이었다니. 그 영화를 본 뒤 전체의 10%밖에 이해하지 못한 주제에 "역시, 여자들이 만들면 뭔가 달라도 달라" 하고 마냥 들떴던 게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일인데. 세상에.

혹자는 <새로운 이브>를 일컬어 "프랑스판 앨리 맥빌"이라고도 하더군요. 사실 그래요. 30대 여성의 사랑. 아니, 어쩌면 더 심해요. 카미유는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인 "할리퀸 로맨스"의 주인공에 엘리보다도 더 가깝지요. 심지어 카미유는 앨리만큼 멋진 전문 직업 여성도 아녜요.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수영장 코치로 일하죠. 그러면서도 유부남 알렉시의 사랑을 얻기 위해 정치적 관심사와는 절대적으로 무관한 사회당 일을 시작하고, 알렉시가 지방으로 전당 대회를 가면 직장 다 팽개치고 따라 나서지요(거기에 호텔에 "마담 엥겔스"라는 이름으로 예약을 하는 센스까지!). 그래서 어떻게 되냐구요? 결국 카미유는 알렉시와 사랑을 이뤄요. 앨리는 빌리와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도, 본조비와도 연결되지 않았는데 말예요. 알다시피 "연결이 되는" 쪽이 "연결이 되지 않는" 쪽보다 훨씬 더 "할리퀸"스럽잖아요.

그런데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게 전부가 아녜요, 결코. 내가 그 감독이랑 그 배우가 나란히 서 있는 걸 직접 봐서인지는 몰라도, 코르시니가 그 누구보다 여자 배우들을 "잘 다루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의미에서 잘 다루는 거냐면요, 배우에게 감독 자신의 얘기를 하게 하면서도 그 배우를 영화 안에서 그 누구보다 빛나고 생기 있는 존재로 만들거든요. <리허설>에서도 그랬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상생"의 모습이 아닐 수 없어요, 정말. 감독과 배우 사이에서 그렇게 "주고 받는" 관계, 참 찾기 힘들잖아요. 저 위에다가 붙여놓은 감독과 배우 엠마뉴엘 베아르의 사진을 보세요. 정말 다정해 보이지요?

그녀의 또 다른 미덕은 레즈비어니즘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룰 줄 안다는 데 있어요. 카미유의 가장 절친한 여자 친구 두 명은 레즈비언 커플인데,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 중 가장 "이성적"이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요. 카미유는 알렉시와의 사랑이 뜻대로 잘 안 되자 그 친구들과 바에 가서 낯선 여자에게 눈길을 보내고 진한 키스를 나눠요. 그러다가 그 여자의 애인인 또 다른 낯선 여자에게 얻어맞고, 카미유의 친구들이 "복수"를 하고, 그러면서 바 안에서 소동이 일어나게 되지요. <리허설>에서도 그랬어요. 둘도 없는 친구들인 두 여자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지요. 물론 나중에는 거의 원수지간이 되지만. 그렇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의 두 사람의 감정 변화, 아, 그건 정말 아무나 묘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어요. 나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으면서도 세속적 입맛을 채 버리지 못한 촌스런 사람한테 코르시니의 접근법은 정말 끝내주는 것이 아닐 수 없어요.

이 영화를 보고 박찬옥이 여자들 얘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어요. 일상이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재능을 좀더 잘 살릴 수 있을 텐데. 홍상수도 결국은 자기 얘기니까 그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었던 거 아니었겠어요?

그리고 내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고 100%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채 20대가 되지 않았거나 스무살을 갓 넘긴 "소녀들"에게 자신을 투영시키기 힘든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요. 뭐, 사실, 카미유가 나이 빼고는 나와 그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만큼은 마냥 우러러 보거나 아래로 내려다볼 일 없이 눈높이를 맞출 수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사진 출처 : 카트린' target='_son'>http://ccorsini.online.fr/>카트린 코르시니가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

—박쥐

Tu me manques

blogin.com · 2004-07-05

... 방금 위에 쓴 글을 읽고는 깜짝 놀랐더랬어, 내가 세 달 전에 저랬나, 저게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어서. 다시 읽어보니 참 틀린 곳도 많구나. 웬만한 것들은 읽으면서 고쳐놓았는데, manquer에 관한 부분은 고치지 못했어. 이 동사의 정확한 쓰임새를 알게 된 건 글을 쓰고 난 이후의 일인데, 용법을 제대로 알고 나니까 오히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불어로 옮길 자신이 없어지더라구. 아마 불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도 그럴걸?
 
불어는 참 이상한 언어야. 의인화형 동사가 참 많이 쓰여. 하다못해 “나 피곤해”고 말하려고 해도, 피곤한 당사자가 아니라 피곤하게 만드는 어떤 것--사물이나 사람--이 주어가 되거든. 영어에서는 수동형이 쓰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피곤함을 느끼는 당사자의 주격으로서의 위치는 유지되는데 말이지. “그리워하다”도 그런 면에서 불어를 배우는 많은 외국인들이 아주 많이 낯설어 하는 표현 중 하난데, 내 나름대로 그 이유를 생각해 봤어(이곳 불어 선생들이 자기네들의 불규칙적인 문법에 규칙이나 이유를 갖다 붙여서 설명하려는 자세(!)가 참 인상적이었거든. 라깡의 l'explétif ne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돼). 내가 널 그리워 하는 건, 내게 있어야 할 네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알다시피 manquer의 또 다른 뜻은 '누락되다', '생략되다'니까). 내 안에서 네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 네가 날 빠져 나갔다는 것. 어쩌면 이네들의 방식이, "I miss you" 나 "난 네가 그리워"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리워하다”를 가장 절절하게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지도 모르겠어.


- 아마도 부치지 못할 편지(2003~2004) 중에서 발췌






내가 계속해서 빌빌대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몇 주 전에 내린 결론은 향수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낯선 자"로 살아왔던 내게는 그저 낯설기만 한. 아니,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내게는 향수병이 현대 의학으로든 미래의 의학으로든 고칠 수 없을 뿐더러 평생동안 달고 살아야 할 무서운 병일수도. 그래. 그리움의 대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한없이 "모호"한 채로 영원히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주체"의 그리워 하는 "상태"만이 있을 뿐.

아, 하룻밤만 자면 이곳과도 잠시나마 안녕이다.

—박쥐

알렝 레네의 판타지, 그 진정성

blogin.com · 2004-07-02

알렝 레네(Alain Resnais) 감독의 1968년작 를 2004년에 본다는 것은 제법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웬갖 최첨단 기술을 앞세운 특수 효과와 웬만한 일상적 경험과 보통의 상상력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 스토리로 무장한 영화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아무런 장식이나 효과도 가미되지 않은 건조한 화면들--심지어 에 등장했던 조악한 시간 여행용 가속 장치같은 것조차 등장하지 않는다--을 통해 마주 대하기란, 이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분명 고문일 것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클로드 리데(Claude Ridder)는 가슴에 총을 쏘는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다. 퇴원하려는 그 앞에 낯선 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클로드를 크레스펠(Crespel)이라는,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밀 연구소로 데려간다. 크레스펠에서는 "시간"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클로드의 동의를 구한 후 그의 전 생애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1분의 순간으로 "되돌려" 보낸다. 1분 후에는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피실험자를 안심시키면서. 그런데 실험은 순탄치 않게 전개된다. 클로드가 목표했던 때--클로드가 연인 카트린과 바닷가에서 함께 했던 순간--에 도달하자마자, 시간은 클로드를 그 이전과 이후의 여러 다른 순간들로 데려간다.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클로드와 카트린이 처음 만난 자리, 카트린이 죽은 글래스고의 한 호텔,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던 세느 강의 다리나 파리의 거리, 카트린을 잃고 방황하는 클로드가 "시간이 참 안 간다"며 푸념한채 앉아 있는 사무실... 실험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실험실 밖으로 나온 과학자들은 가슴에 총을 맞은 클로드를 발견한다.

나 역시 이 시대를 겨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관객 중 한 명에 불과한지라 이 영화를 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지루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법을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내 독해력 및 불어 실력이 부족했음을 십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 영화가 수십 년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문법이 낯설다는 사실을 부인킨 힘들 것 같다. 헐리웃식의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객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듯한 반복이 무자비하게 자행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클로드와 카트린의 바닷가에서의 즐거웠던 한 때를 담은 컷은 열댓번 정도 반복된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난해한 문법이 "판타지"를 위한 가장 탁월한 장치가 되고, 이 영화를 진정한 판타지로 만든다. 사실 판타지의 진정성을 말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진정한 판타지"는 형용 모순일 것이다. "진정성(authenticity)"을, 어떤 종류든 기존의 "정격"이나 "규범"으로부터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판가름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판타지"를, 아주 미흡하게나마,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기존의 모든 것을 넘어서거나 뒤섞어나 갈아엎는 장르라고 이해한다면 말이다.

이 영화는 그 두 가지 조건을 아주 잘 만족하는 동시에 그 조건들을 뛰어넘는다. "판타지"를 단순히 "장르적"으로가 아니라 좀더 넓고도 깊은 의미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제아무리 "판타스틱"한 아이디어도 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탄력적 시간"이라는 개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경우는 과거를 (내 의지대로) 떠올리거나 과거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무의식적으로) 떠오를 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잔뜩 뭉뚱그려지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는 곳에서 판타지가 생성된다. 이렇게 볼 때(라기보다는 아주 심하게 비약하자면), "시간 여행"의 모티브는 가장 태고적이고 원시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에서 시간 여행에 대한 반론으로서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것이 "모친 살해 패러독스"라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시간 여행 장치로 쓰인 기구가 자궁(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갖는 형태와 질감을 연상하면 된다)을 닮아 있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 같다.

흠. 이렇게 얘기해 놓고 나니 이나 팬들에게 면박을 당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으나. 나는 그보다는 살짝 어설픈, 즉 CG를 쓰더라도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더더욱  "판타스틱"한 나 가 좋단 말이지. 뭐 거기에 내 반미 정서가 개입돼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는 무척 보고 싶단 말이지.

—박쥐

오노 요코 특집

blogin.com · 2004-07-01


이교도이자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그러나 마녀로 찍혔던,
 그리하여 돌에 두들겨 맞거나 물에 빠지거나
 묶인 채 불에 타서 죽은
 500만 명 이상의 여성들에게 이 작품을 바칩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공포입니다.
 지혜로움의 반대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혼란스러움입니다.
여성들의 힘, 지혜와 사랑의 힘을 되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구와 우주를 끔찍한 파괴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 오노 요코, 2003년 11월 11일.


오노 요코, From My Window, 2003, 부분
Galerie Point d'ironie 소장

*중세 마녀 재판 그림과 작가의 어린 시절 및 젊은 시절의 모습을 합성한 작품.
뉴욕의 자기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모습과 "마녀"들의 그림이 중첩되는 경험을 하고는
이 작품을 구상했단다.


♬보너스 음악
 
http://www.gaseum.co.kr/300 ... 5&Form.y=3> face=바탕>yoko ono & yo la tango, "hedwigs lament + exquisite corpse" 
*영화 Hedwig and the Angry Inch에 실린 두 곡을 오노 요코가 다시 부른 곡. 아네스 바르다의 "할머니 랩"에 이은 멋진 "할머니 rock"이라고나 할까.

—박쥐

벼랑

blogin.com · 2004-06-29

왜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서 있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탓이었다. 어깨 너머로 오싹하게 전해오는 싸늘한 공기를 모른척, 자꾸만 모른척 했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다 틀렸다.

—박쥐

논리만큼 좋은 세상

blogin.com · 2004-06-22

니체는 "모든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했던 갈릴레오가 있었기에 근대 과학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성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참정권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세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아주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연결사는 논리와는 무관하다. 내가 아는 한 그에 해당하는 논리 기호는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대개 그 말이 딛고 있는 체계 내에 설 자리가 없는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체계 내의 다른 문장들과 모순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체제전복적"이다. 그 효과는 "그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집합론에 대해 갖는 것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래서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문장이 기성의 체계 혹은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는 걸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 결정이 철회돼서는 안 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은 감행되어야 한다.


그래. 어차피 이 모든 게 논리와는 무관하다. 혹은 ("다수"와 "국익"의 논리에 입각할 때) 논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저 전제와 저 결론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정치역학적 전제들이 숨어 있다. 혹은 내 논리 체계와 그들의 논리 체계는 다르다. 혹은 세상이 논리로 다 되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적 부적합성을 지적한다면 분명 그건 자기 모순이 될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만큼은 제발 논리대로 됐으면 좋겠다.


이라크전은 잘못된 전쟁이다.
 그러므로 파병 결정은 철회돼야 한다.

한국인이 인질로 잡혔다는 사실은 무척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파병이 감행되어서는 안 된다.

—박쥐

... 그러나 이성이 전부는 아니다

blogin.com · 2004-06-20

오는 6월 25일은 푸코가 죽은 지 꼭 20년이 되는 날. 오늘자 <리베라시옹>은 푸코를 기념하는 특별판을 냈다. 이걸 보고 나는 지난 번의 <리베라시옹> 및 이미지에 대한 폄하 발언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12면에 달하는 특집면 중 한 면 전체를 장식한 저 위의 사진 때문이다.

사진은 80년대 초 푸코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사진 작가이자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고 또 푸코의 애인이었으며 푸코와 같은 병으로 죽은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의 작품이다. 이 사진에서의 푸코는 지금껏 내가 보아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저 엉거주춤한 포즈와 어색한 미소라니. 세상의 모든 권력에 대항해 평생을 바쳐 싸웠던 이 투쟁가-철학자도 자신이 가장 귀애했던 사람의 카메라 앞에서는 저렇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나 보다.
 
푸코가 폐부를 찌를 듯한 시선뿐 아니라 저렇게 따뜻하고 애틋한 눈빛의 소유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저 사진은, 내게는 무척이나 값진 소득이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거리 시위, 강연, 토론 등의 자리에서의, 즉 대중 앞에서의 푸코는 그 얼마나 젊고 아름답고 빛나고 강한 존재였던가. 그런 존재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보는 일은 늘 야릇한 쾌감을 안겨주게 마련이지만, 이 사진에는 단순히 관음증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박쥐

사람은 아름답지 않지만 세상은 아름답다

blogin.com · 2004-06-12

인간적 욕망(Désir)은 동물적 욕망과 다르다. 동물적 욕망은 생명 활동을 하고 생명에 대한 감성만을 지닌 자연적 존재를 이룬다. 반면에 인간적 욕망은 실제의, "구체적인(positif)", 주어진 대상이 아니라 다른 욕망을 향해 있다.
 
예를 들어 남녀 사이의 욕망은, 육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할 때, 욕망을 욕망으로서, 즉 욕망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바로 그 욕망을 "소유"하거나 그 욕망에 "동화"되고자 할 때, 달리 말해 "욕망"되거나 "사랑"받고자 할 때, 또는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서 갖는 자신의 인간적 가치에 따라 "인정"받고자 할 때, 오직 그 때에만 인간적이다.
 
물론 인간적 욕망이 자연의 대상을 향할 수도 있다. 단 이 때의 욕망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가 욕망하는 것과 동일한 대상을 욕망할 때, 그리하여 바로 그/그녀의 욕망에 의해 "매개"될 때, 오직 그 때에만 인간적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욕망하고 있는 것을, 단지 그들이 욕망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이다.

이렇듯,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무용한 대상도 욕망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욕망의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은 오직 인간적 욕망일 수 있을 뿐이며, 동물의 세계(réalité)와는 다른 것으로서의 인간의 현실(réalité)이 탄생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이러한 욕망들을 충족시키는 작용에 의해서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욕망된 욕망들(Désirs désirés)의 역사인 것이다.


- 알렉상드르 코제브, <헤겔철학입문> 서문 중에서



프레시안 : 지난 목요일(5월20일)에 방송된 <TV, 책을 말하다>에서 고 선생은 "나는 한번도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적이 없었다"고 얘기했다. 덧붙여 고 선생은 "인간이 선천적 측면이 더 지배적이냐, 후천적 측면이 더 지배적이냐. 선천적인 게 더 큰 것 같은데 이렇게 얘기하면 위험하니까 후천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인상 깊게 들었다.

홍세화 : 사실 맞는 말이지.

프레시안 : 최근 한 강연에서 홍세화 선생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했다. "인간이 끊임없이 이성을 통한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기와 다른 존재를 배제하고 억누르려는 '저급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고 선생도 방금 언급한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제 인간은 '희망의 원리'보다는 '책임의 원리'를 강조해야 할 때"라며 "인간은 언제든지 추악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어떻게 하면 덜 추악해질 수 있을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얘기는 사회생물학자나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고종석 : 나는 사회생물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우익 인종주의자들의 논리 체계의 유사성을 부각시켜 비난하지 않으면, 약육강식을 합리화하게 된다.
 
프레시안 :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진화심리학자들의 상당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그들도 홍 선생이나 고 선생의 주장처럼 '이성의 자기 성찰'을 중요하게 여긴다. 인간은 가만히 두면 '진화의 흔적'이 남아 있어 언제든 동물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성의 자기 성찰'과 제도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종석 : 물론 그런 식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딱 그 논리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언제든지 우익 인종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그 점을 우려해야 한다.

- <프레시안>' target='_son'>http://www.pressian.com/scr ... �화><프레시안> 기획 연재 "대화" :
 고종석과 홍세화의 대담 (2003.6.5)에서

—박쥐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다

blogin.com · 2004-06-10

1.

지난 6월 6일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지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덕분에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는 해방을 맞았다.

시라크는 때맞춰 방문한 부시 앞에서 이라크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의 미국 독립 전쟁 참전과 미국의 연합군 가담이 등가라는 데에 별 무리 없이 합의했다. 각 언론들도 60년전 그날의 이미지를 살포하느라 바쁘다. 전쟁 이미지는 이렇게 해서 또 (재)생산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연합군이라는 거대한 군사 집합체가 해방을 안겨준 일등 공신으로 등극한다(레지스탕의 이미지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 이러한 전쟁은 전쟁으로 갚아야 한다; 전쟁은 전쟁으로 막아야 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필요악이거나 심지어 善이기까지 하다.

2.

"이성이 세상을 다스린다"라는 큰 제목 하에 다섯 개의 연극이 연이어 공연된단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평화>, 셰익스피어의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하이네 뮐러의 <미션> 등. 전쟁, 평화, 권력이 그 주제다. 이 작품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무엇보다 전체 주제와 제목이 시선을 확 잡아끈다. 이성이 세상을 다스린단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란다.

3.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이성이다", 참으로 헤겔적인 명제다. 경험적으로는 분명 거짓이다. 반례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을 터. 아우슈비츠를 보고도, 9.11을 경험하고도, 이라크전을 지켜 보고도 그런 소릴 할 수가 있나. 지금이 날카로운 지성을 지니고서도 나폴레옹의 진군을 바라보며 역사가 완성됐음을 선언할 수 있었던 19세기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반박하고 폐기해버릴 만한 것은 아니다. 쉴새없이 "감성"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전쟁의 잔혹성보다는 그 잔혹성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또 다른 전쟁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는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저 소박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따르고 싶어졌다 : 세상을 다스릴 것은, 다스려야 할 것은 이성이다.

4.

바슐라르는 독일 점령기에 죽은 사상가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점령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훌륭한 사상들이 싹트고 꽃필 수 있었겠냐면서.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니다. 수학철학자인 장 까바이예스, 그리고 아날 학파를 창시한 것으로 유명한 마르크 블로흐, 이들은 모두 레지스탕으로 일하다가 체포되었고, 해방이 되기 전에 감옥에서 죽었다. 흔히 프랑스 수학철학이 까바이예스를 잃음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게됐다고들 한다. 블로흐의 경우, 감옥에서 쓴 저작들이 그들 사후에 출간돼서 이후 역사학계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가 그렇게 죽지만 않았더라면..." 으로 시작되는 조건문을 입에 올리곤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트라우마가 프랑스의 합리주의를 또 다른 방식으로 뿌리내리게끔 했고, 그것이 오늘의 프랑스 사상을 태동케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철학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방식 중에는 양립 불가능한 것도 포함된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로 하여금 아우슈비츠 이후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하고 "이성"이 몰락하게 된 원인을 이성의 내부 혹은 이성 자신에서 찾게 했다. 한편으로 1차대전 직후 빈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이 "위기"를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 이성을 세상에 더욱 공고하게 뿌리내리게 하려는 기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이성은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1789년의 혁명으로부터 오늘의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쟁취한 자유와 평등과 인류애는 모두 그들에게 이성이라는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성을 구제하는 쪽을 택했고, 그러다가 68년 즈음에 일부는 다른 쪽으로 돌아섰다.

현재 프랑스 내 과학철학/인식론 진영은 대부분 그때 그렇게 돌아서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에게 "이성"은 곧 "과학"이고, 따라서 과학 역시 이성과 마찬가지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과학, 기술, 사회(STS)"를 강의하던 교수는 프랑스 내에서 GMO나 에너지 등에 대한 논의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정도로 "과학주의(scientisme)"가 공고히 자리를 잡고 있고, 이 과학주의의 뒤에는 계몽주의의 역사와 그 뒤로 쭉 이어져내려온 "이성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라투르도 비슷한 푸념을 늘어놓았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제로 나는 라투르가 프랑스 내에서는 거의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의 이성에 대한 신념이 결코 프랑스 혁명 당시의 그것처럼 특정 계급이나 성별에 편향된 인간중심주의는 아니라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과학 정신"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장애물"들에, 깡길렘은 인간의 괴물성(monstruosité)에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몰두했다. 물론 각각이 이 "반이성적인" 것들에 부여한 의미나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둘다 그것들을 "이성"의 역사에 포함시키거나 아니면 전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성의 또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즉 역사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그네들의 과학주의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들의 이성(Raison)에 대한 믿음에 그럴 만한 이유(raison)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5.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다스려야 할 것은 이성이다. 사실 여기에서의 이성은 참으로 추상적이기 그지 없는 개념이다.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아무도 이성을 제대로 정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점은 분명하다. 이성은 어느 누구 한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소수의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닌, 모두에게, 각자의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속해 있는 어떤 것이다.

각각의 이성들을 촉발시키기 위해 굳이 새삼스레 참혹한 전쟁 이미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2차 대전 이후, 베트남전 이후, 9.11 이후, 이성은 이미 질릴대로 질려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때 폭격에 놀라 도망가는 어린 베트남 여자 아이를 찍은 사진 한 장이 반전 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사실이다. 미선이/효순이의 시신을 담은 사진들이 촛불 시위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성이, 우리 모두의 이성이, 이미 그 전부터 베트남전이나 미군의 주둔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이미지가 단순히 아이디어나 다른 텍스트보다 못한 재현의 매개체를 넘어 그것들과 분리되기 힘든 엄연한 하나의 독립된 그 어떤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논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성의 임무다.

6.

나는 슬프다. "HAPPY D-DAY"라는 큼지막한 제호를 단 6월 6일자 <리베라시옹> 특별판을 삼으로써 전쟁 이미지를 소비해 버렸기에. 거기에 내가 기대했던 것은 없었고, 도리어 내 이성이 상처를 입었다. 나는 또 슬프다. <이성이 세계를 다스린다>라는 공연에 가지 못할 것 같기에. 내가 기대하는, 내 이성이 흡족해 할만한 것이 거기에 있을진대.

—박쥐

푸코에게 바치는 유쾌한 헌사

blogin.com · 2004-06-04

시험 공부를 하던 중, 올해가 푸코가 죽은 지 20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내가 공부하는 방식은 왜 이다지도 하이퍼텍스트적이란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깡길렘 → 깡길렘에 관한 푸코의 글 → 푸코 → 푸코에 관한 글들과 웹사이트들. 그러다가 급기야는 푸코에게서 영감을 받은 노래를 발견하는 데에 이르렀다. 미국의 대학 교수들이 모여 만든 아마추어 밴드 The Professors(이름도 참...) 가 부른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 (low-fi version) "가 그것이다.

사운드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인간은 언젠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지워질 것이다"와 같은 푸코의 명구를 그런 방식으로 듣고 있자니 기분이 다 유쾌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 ABC song 내지는 선전가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고 말하면 혼나거나 비웃음 당하겠지? 그들은 "예술"을 단지 사상을 선전하거나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걸 계몽적이고 (전)근대적이라며, 달리 말해 촌스럽다며 비웃을 테니까.

한편으로 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심미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를 최소화해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같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노래 가사에 "discourse"나 "foundation"이나 "민중"이나 "해방"이 들어가는 노래가 사람 맘을 움직이는 방식과 그 효과는 완곡한 어법으로 표현한 노래의 그것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존 레논의 "Imagine"과 "Power to the People"의 차이 혹은 "아침 이슬"과 "님을 위한 행진곡"의 차이. 전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 맥락을 고려했을 때 또 다른 미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경우. 후자는 "美"의 범주 하에서라기보다는 그 외의 맥락 안에서 감상하는 편이 보다 적절한 경우.

어쨌든(아, 하이퍼텍스추얼리티는 내 블로깅의 주된 특성이기도 하다. "어쨌든"이 유난히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 노래는 맥락과 가사를 고려하고 들을 때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종류에 속한다.

I can't find no foundations
There aint no truth anymore
I can't find no foundations
There aint no truth anymore
I'm caught in multiple perspectives
I can't think straight anymore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Man will be erased
Like a face drawn in sand
Like a face drawn in sand
At the edge of the sea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Do not ask me who I am
Do not ask me to remain the same
I am not the only one
Who writes to have no fac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Discourse is not life
Its time is not your time
In discourse you have no survival
You only establish your death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바탕을 찾을 수 없어
진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어
난 여러 개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어
난 이제 똑바로 사고할 수 없어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인간은 지워질 거야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바닷가 모래 위의 그림처럼

내가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내게 누구냐고 묻지마
내게 늘 그대로 있으라 하지도 마
얼굴을 지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단지 나뿐은 아니니까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은 삶이 아니야
말에 주어진 시간은 네 것이 아니야
말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단지 죽음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야


The Professors, "Foucault'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ult-low.mp3>Foucault Funk: The Michel
 Foucault Postmodern Blues"(full version)
Lyrics by Gary Radford,  Marie Radford,
 and Michel Foucault
Music by Stephen Cooper and Gary Radford


◈ 출처와 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클릭하면' target='_son'>http://acjournal.org/holdin ... lt.html>클릭하면 됨.
◈ 번역은 내가 했는데, "토대"나 "담론" 같은 학적 용어/번역어들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게 해당 용어에 관해 원문이 주는 묘미를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래도 부족하게나마 시적 완성도를 살려보고 싶은 마음에 약간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의역했음. 그러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원문의 내용이나 푸코의 사상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큼. 특히 <지식의 고고학>을 모티브로 한 네 번째 연의 경우가 그러함. "삶"이라고 할지 "생명"이라고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삶"이 더 시적인 것 같아서 그걸로 택했음.
◈ 사진 출처 :  http://www.nexo.org/revisiones06.htm target=_top>www.nexo.org/ revisiones06.htm.

—박쥐

술먹고 하는 얘기

blogin.com · 2004-06-02

이럴 땐 만화를 그릴 수 있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역동적인 구성이 가능하거든. 이렇게 글만 쫘악 늘어놓으려다 보니까 쓸데없이 일관성이나 문법 같은 것들을 의식하게 되는 거라구. 어쨌든 눈앞에 둔 참이슬이랑 김치전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오늘만큼은 그런 것들로부터 좀 자유로워져 보자구.

술 먹으면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하고 돌이켜 보니까, 대개 이런 식이더군
:

1. 술이나 안주나 술집에 대한 품평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김치전을 부칠 땐 말야, 두껍게 풀면 안돼. 겉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도 속은 안 익게 되거든. "

"아, 참이슬 팩소주는 맹숭맹숭하네. 배타고 오는 동안 알콜 성분이 날아가기라도 했나? 지리산에서 먹던 것과도 달라. 기압이나 지리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 게 틀림 없어. 똑같은 참이슬이라도 술집마다 농도가 다르듯이 말이야. 다들 그럴 리가 있냐고 날 구박했지만, 진짜야. 어떤 데서는 얼음처럼 차갑게 해서 주고, 어떤 데서는 뜨뜨미지근하게 해서 준다구."

2. 사는 얘기

"요즘 왜 이리 공부가 하기 싫은지 모르겠어. 다들 내가 공부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공부를 더 안하고 있는 것 같아. 아, 내가 대학원 들어가서는 공부를 좀 하긴 했지. 그땐 학과 공부가 되게 재밌었거든. 학생회 일도 재밌었구. 나는 말야, 원래 주어진 일보다는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일을 더 잘하고 그런 일에 열심이거든. 근데 철학을 시작하니까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본업을 부업같이 하고 부업을 본업같이 해도 that works! 였던 거야. 물론 요즘도 그렇지. 소설을 읽거나 웹 서핑을 하거나 심지어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그게 다 불어 공부를 위한 게 되니까. 근데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졌어."

"아, 이러면 정말 뭐가 되는 거지? 부모님들은 딸이 노벨 물리학상을 탈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접긴 했어도 그래도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데 말야 (그들에겐 내가 '철학' 중에서도 '과학철학'을 한다는 게 중요해. 왜냐고?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대학다닐 때 철학과 사람이 엄마를 쫓아다녔던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엄마가 '철학하는 인간들은 죄다 한여름에 바바리 코트 입고 여대 앞에 나타나서 인생이 뭐냐고 묻는다'고 악의적으로 일반화했겠어?). 나한테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준 친구들은 또 어떻고?" 

"왜 선생들은 이메일을 받은 뒤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답장을 하는 걸까. 어제 숙제 제출 기한을 연장해 달라는 멜을 보냈거든. 근데 답이 없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그래도 여기 선생들은 그런 면에서는 너그러운 편이긴 하지만..."

"난 큰 시험에 약해. 지금까지 줄곧 그랬어. 왜, 모의고사는 기차게 잘 보면서 내신에 반영되는 중간/기말 고사나 수능은 못 보는 애들 있잖아. 그게 나였다구. 6월 시험이 불안한 것도 그래서야. 사실 시험 방식은 여러 면에서 나한테 꽤나 유리한데도 말이야."

3. 과거 얘기

"걔 있잖아, 내 옛 애인. 걔가 이번 여름에 떠난대. 애인은 있을까? 있다면 남겨두고 가는 걸까? 같이 가는 건 아닐까?"

"난 그 친구가 그렇게 된 이후로 한동안은 신촌 거리를 다니기가 무서워졌더랬어. 그 친구가 그렇게 떠나고 가을이 찾아와서 그 친구가 다니던 학교 애들이 축제를 하면서 거리를 점령하고 온갖 깽판을 부리는데, 그게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더라구. 야! 너네는 너네 학교 친구가 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추태를 부리는 거야, 하고 악을 쓰고 싶었어. 난 겨우 그 정도로 그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생색을 냈던 걸까. 야학을 다시 해야, 아니 죽을 때까지 해야 이 미안함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4.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토론

"난 2년 전에 사람들이 김규항 때문에 치를 떨 때 사실 무덤덤했어. 왜, 철학하는 사람들의 병 있잖아. '객관성'에 대한 집착이나 편향되지 않은 관점에 대한 이룰 수 없는 갈망. 아, 물론 내게 여성운동 하는/했던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쪽에 밝다고 할 수도 없긴 하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은 확실히 정말 다른가봐. 내 눈에는 김규항이 '주류'라고 일컫는 그 '중산층 브루주아 여성 운동'이 그가 얘기하는 식의 '주류'처럼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고작 인터넷 통해서 한국을 들여다 보고 있는 주제에 뭘 아냐고? 에이, 누구나 자기한테 보이는 만큼밖에 볼 수 없다는 거 알면서, 뭘 그런 질문을 하고 그래?"

"전여옥에 대해 아직까지도 말이 많더군. 조금 전에 컬티즌의 한 독자가 그녀에 대해 라깡의 온갖 이론을 끌어다가 패러디해놓은 걸 봤는데, 열이 확 받았어. 전여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야. 그녀가 여성이 아닌, 그것도 남자애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이대 출신이 아니었더라도, 아니 최소한 남자들이 좋아하는 외모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얘기했을까. 걔들은 전여옥이 토론에 임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만큼이나 '이쁘지도 않은 게 깝쭉대는' 걸 가지고 걸고 넘어지려 하는 것 같아."

5. 영화나 문학 등등에 대한 얘기

"며칠 전에 A ton image 라는 영화를 봤어. 음. 뭐라고 번역하면 좋을까. 저런 preposition 은 번역하기 힘들다구. 한국에 개봉된다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네 얼굴에 비친 나"라고 의역하면 좋을 듯 싶은데. 어쨌든 인간 복제에 관한 영화였어. 뤽 베송 감독 밑에서 시나리오 쓰던 여자의 감독 데뷔작이고. 전 남편이 정신 병원에 가 있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잃고서 아이를 낳을 수 없게된 한 여자와 다른 어떤 남자가 만나고, 그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서 그녀의 세포를 복제해서 그녀에게 임신시켜서 여자 아이를 낳고, 그 여자 아이가 자라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행복한 가정을 파탄내고, 끝내는 저를 낳은 어미이자 제 자신인 엄마를 죽이고 아빠를 차지하려다가 제가 죽고 마는, 뭐 그런 얘기였어.
복제 인간을 다룬 영화나 소설은 꽤 많지. 복제 기술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를 다룬 SF류의. 그런 면에서 '복제'는 어느새 보통내기가 아니면 상투성을 벗어나기 힘든 소재가 돼버렸지. 근데 감독이 그러더군. 복제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먼 미래가 아닌, 아주 가까운 현재의 시점에서,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뤄보고 싶었다구. 전적으로 동의해. 훌륭한 영화였다구. 근데 왜 잡지들마다 평이 그 모양인거야. 죄다 스릴러물치고는 소재도 진부하고 플롯도 엉성하며 다루는 형식도 어디서 많이 베낀 것 같다는 투야. 감독 자신은 자기 영화를 스릴러물이라고 규정하지도 않았는데 말야. 그녀는 과학 기술을 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삶의 맥락에서 바라보려고 했을 뿐.
뜬금없이 <4인용 식탁>이 생각났어. 여자 감독들을 보면, 참 하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그걸 한 영화에다가 다 쏟아부으려고 하니까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안 맞고 이야기 구성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만큼 그녀들의 영화는 아주 찬찬히 보고 보고 난 뒤에도 며칠이고 곱씹어 보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구."

6. 술자리를 파할 시간과 집에 돌아갈 수단에 관한 확인 절차

"집에서 술마시니까 집에 갈 걱정 안해도 되고, 좋다. 여긴 있잖아, 지하철이 새벽 1시까지 다녀. 서울도 그랬던가? 며칠 전에 선배 집에 다녀오다가 그 지하철을 타봤는데, 다들 술에 취해서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그러더라구. 그런가 하면 얼굴이 벌개진 채로 책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구. 나도 후자에 끼어들려고 책을 펼쳤지."

"생각해 보니 나, 택시에다가 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찌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는지 몰라. 근데, 있잖아,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을 떠올려도 예전만큼 괴롭진 않게 됐어. 예전같으면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쿵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가라앉곤 했었는데 말야. 그리고 지금 얼굴이 불콰해질만큼 마셨는데도,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아. 나, 많이 컸지?"

어쨌든, 다 술먹고 하는 얘기들이라구.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그렇다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곤란하겠지만 말야.

—박쥐

Requiem for insomnia

blogin.com · 2004-06-01

1.

난 밤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곤 해
그는 늘 말하지, 사실은 날 쭉 좋아했노라고
나는 늘 묻지, 진심이냐고, 믿을 수 없다고
그리고는 숨을 가다듬는 그를 바라보면서 다음 대사를 기다리지 

그런데 그 순간만 되면 꼭 무슨 일이 나고야 마는 거야
열 두시 종이 땡 쳐서 마법이 풀리거나
땅이 쩍 갈라지고 우윳빛 바다가 솟아나거나
악어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나타거나

2.

자명종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 때문에 깨어본 적이 있니?

내 자명종은 더이상 제가 울어야 할 시간에 울지 않아
제게 주어진 대로 삐리리릭 삐리리릭 하고 울지도 않고
녀석에게 남은 건 째깍째깍 하는 숨소리뿐

그런데 녀석의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다가 깨달았어
그게 사실은 폭탄이 타들어가는 소리였던 거야
녀석은 제 몸에다가 시한 폭탄 하나를 달아놓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녀석을 노려보니까
녀석도 머쓱했는지 스스로 뇌관을 끊어버리더군

그리고 그때 닭이 울었어
아직 세 번째의 거짓 고백이 남아 있는데도
아니구나, 아마도 마지막 고백은 이거였겠지
"나, 밥도 잘 먹고 다니고, 잠도 푹 잘 자고, 공부도 열심히 해요"

3.

알고 보니 녀석이 절망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어
단지 제게 주어진 삐리리릭 삐리리릭 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거야

자폭 시도에 실패한 뒤로 녀석은 다른 수를 쓰기 시작했어
녀석은 뭐든 닥치는대로 집어삼키고는
그것들의 소리를 제 것으로 만들기로 한 게지

한 번은 쥐 한 마리를 삶아 먹은 다음에 찍찍 하고 울더니
그저께는 모기 한 마리를 잘못 먹고 체했는지 밤새 왱왱 거리는거야

어제는 쪽쪽 소리가 나길래 눈을 떠보니
글쎄 녀석이 내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거야
제게 주어진 소리를 바꾸는 대신에
더 이상 제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될 세상을 만들기로 작정했던 게지

난 씩씩거리면서 녀석을 노려본 뒤
녀석이 방심한 사이에 재빨리 짓이겨버렸어
그러자 찍소리를 마지막으로 주위가 적막해지고
종이에는 녀석이 빨아들인 내 피와 녀석의 주검의 뒤범벅이
베이컨의 그림마냥 흐물거리고 있었지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두컴컴했어
나는 고백을 마저 들으려 다시 눈을 감았어

4.

눈을 떠보니
빗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더군

아, 거짓 고백 없는 달콤한 잠,
오늘 새벽은 정말 행복한 하룻밤이었어

—박쥐

돌아와줘, 장 아제베도!

blogin.com · 2004-06-01

그래. 내가 그 친구를 이렇게까지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어. 난 네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 친구 핑계를 댔던 거야. 눈물이 나면 죽은 그 친구에 대한 부채감이라는 말도 안되는 구실을 갖다 붙이고 말야. 사실은 네 생각 때문에 운 거였는데도.

장 아제베도, 널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네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간 사람은 전혜린 하나로 족하다구. 아, 물론 지금 이 말은 순전히 날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한편으로는 속절없이 이 줄글을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져 있을 독자들을 위해서기도 하고. 물론 그들을 위해서라면 네게 이런 웃기는 형식의 공개 편지를 쓰면 안된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어. 그치만 이제 겨우 깨지기 시작한 껍질을 도로 붙여서 원래 상태로 돌려놓긴 싫었어. 깨진 틈을 헐겁게 잇거나 어줍잖게 가리기도 싫었고. 표정 관리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구.

알아, 널 사랑하는 게 지금 네가 내 곁에 없기 때문이라는 거. 근데 어쩌란 말야. 기어코 네 글을 보고 말았고, 지금 밖에 비가 오고 있고, 이미 취해버렸는걸. 아, 물론, 이렇게 되리라는 것쯤은 지난 주부터 예상하고 있었어. 사실은 그 친구의 기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어. 예년처럼, 6월 5일을 며칠 앞두고, 그 친구를 아꼈던 네가 예년처럼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계산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던 거지. 젠장.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사악할 줄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죽은 그 친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내가 갔어야 했던 길을 대신해서 가버린, 그것도 무척이나 허망하게 떨어져버린, 몇 번 만나보지도 않은 내게조차 눈이랑 입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인상을 또렷하게 남긴 친구한테 말이야.

그래. 장 아제베도, 내가 널 갑자기 미친듯이 그리워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니? 내가 모르는 날 나 아닌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 난 내가 자면서 아주 서슬퍼런 잠꼬대를 한다는 걸 민박집에서 같이 묵었던 여행객들한테서 들었어. 그 다음부터 난 엠티를 가더라도 절대로 자지 않으려 애썼지. 비록 성공한 적은 없지만. 내가 잘 때 머리를 무서운 기세로 긁어댄다는 것도 술먹고 친구 집에 가서 잔 다음날에서야 알았어. 무섭지 않니? 내가 자면서 공포 영화를 찍는다는 거 말고. 그 사실을 내가 모르는데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거.

오늘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스트레스성 안면 발진"이라는 단어를 보게 됐어. 순간 아차 싶었어. 이곳에 와서 종종 두피 세포 하나하나가 융숭하고 뺨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었거든. 내게 그게 느껴질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내 얼굴이 빨간 두드러기로 뒤덮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정말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라구. 그래, 생각해 보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화장실에 들러서 거울을 보고 기겁한 일이 한 번 있었구나. 그땐 일시적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날 슬금슬금 피해갔을 거고, 나는 하루종일 모르고 지냈겠지.

장 아제베도, 넌 내가 모르고 있는 날 얼만큼이나 알고 있니?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거니? 내가 방심한 사이에 풀어놓은 또 다른 나를 네가 재빨리 낚아채서 네 안의 어딘가에다가 나 몰래 꽁꽁 숨겨뒀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널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어. 그게 어떤 거였는지 꼭 봐야겠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너의 폭로쯤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도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뭣보다 내 그 추악한 모습을 참아낸 비법을 전수받아야겠거든.
 
넌 내가 겉으로만 순수하고 순진하는 척할 뿐 사실은 더없이 냉혹하고 퇴락한 애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도 너의 조소와 동정을 섞은 그 시선을 생각하면 발진이 일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시선쯤이야 감내할 수 있어, 널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박쥐

딴짓, 에필로그

blogin.com · 2004-05-31

연 한 달째 계속되는 딴짓. 이젠 지겨워서라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수업도 끝났겠다, 시험까지는 한 달 남았겠다, 계절은 후덥지근하지도 않고 오싹하지도 않은 게 딱 초여름이겠다, 며칠 정도 "자학하지 않으면서 놀"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내일까지는 (지금까지 포스트로 올린 이런 비슷한 내용의 각서만 해도 벌써 몇 갠지, 원).

어제 선배 언니집에 저녁 먹으러 갔다가 몸과 맘의 양식을 얻어왔다. 선배가 직접 담근 김치, 팔도비빔면, 말린 미역, 그리고 전경린, 은희경, 권지예의 소설들. 덕분에, 거의 퇴화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혀의 돌기들이 되살아나고, 상당 기간 녹슬어 있었던 뇌에서 문학 텍스트 독해(혹은 해독)를 관장하는 영역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이기는 했지만 어쨌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혀가 맛의 자극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동안 맛을 너무 잊고 살았던 게다. 매운맛이건, 소설 속에서 재현되는 "인생의 쓴맛"이건 간에.

점심으로 비빔면을 먹고서 미역냉국을 만들기 위해 다시마 국물이 우러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권지예의 소설집 <꿈꾸는 마리오네뜨>를 읽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파리의 풍경들이나 그와 비슷한 정도로 체화된 유학 생활의 경험들이 여기 저기에서 튀어나오니 꽤나 반갑다. 개중에는 쓸만한 정도들도 더러 있어서, 가히 재불 유학생용 <론리 플래닛>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이국, 그것도 파리라는, 세계인이 하나되어 동경해 마지 않는 도시, 그곳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직접 산 체험이 "소재 발굴"의 측면에서 작가를 유리한 곳에 위치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참신한" 소재를 구하기 위해 새벽 우시장에 몇 달을 들락거리거나 도서관에서 먼지 뒤집어쓴 자료들과 씨름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냥 여기서 유학생이라는 지극히 불안정한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겪은 고단하고 지난한 일들을 그대로 풀어내면, 그것만으로도 한국 독자들의 이국에 대한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니까. "옥시덴탈리즘"에 호소한다고나 할까.

사실 제일 맘에 안 들었던 건 문체였다. 너무 성글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들을 엮어가는 방식도 어딘지 모르게 서툴러 보인다. 내가 너무 순수주의자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은 작가가 사실은 했을지도 모를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의 가시적인 깊이를 한층 낮추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기준은 매우 상대적이다. 이를테면 허수경--모국어를 쓰지 않는 생활을 권지예보다 오래했으면 오래했을-- 의 단편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조각난 문장들은 결코 불완전하지 않다). 

반면에 은희경의 문장들은 뻔한 소재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다. 문제는 그런 문장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만큼 너무 뻔한 얘기들이 전부라는 데 있다. 어느 정도까지냐면,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몇몇 기시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예전에 그 소설들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내 기억력 탓이겠으나, 달리 말하면 그만큼 얘기들이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뜻도 되겠다.

어쨌든, 저 두 소설집은,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딴짓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난독증 치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행스럽고도 고맙게도, 만사 제쳐두고 몰두하게 만들만큼 재미있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남아있는 전경린의 소설 두 권과 또 하나의 권지예 장편 소설을 시험 이후로 미루고 딴짓을 이쯤에서 잠시 멈춰두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이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