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또는 품위 관념 활용의 몇 가지 예

blogin.com · 2011-12-29

"네 품위(dignité)는 어디로 간 거니? 난 네가 선생들하고만 자는 줄 알았는데." 로우 예의 ‹러브 앤 브루즈 Love and Bruises ›에서 노동계급 출신 프랑스 남자와 사랑에 빠진 인텔리 여주인공에게 그녀와 같은 중국 국적의 옛 애인이 한 말. 이 말을 들으면서, 거 참, 요새 중국에서는 품위나 정조 등등에 관한 유교 관념이 그냥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재활용되고 있나 보군, 새롭네, 하고 생각했다.

이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막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신한, 용례들이 떠올랐는데, 하필 다 로메르 영화의 대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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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네게 충실했어. 내 침대에서 잔 건 오직 너 뿐이야. 그 사람하고는 호텔로 가곤 했거든."
-- ‹비행사의 아내 La femme de l'aviateur› 의 여주인공이 다른 사람(옛 애인)과의 관계를 추궁하는 현재

애인에게 한 말.

2.
"난 너랑 있을 땐 바람 피운다는 생각이 안 들어. 너랑은 브누아랑 하지 않았던 일을 하니까. 그런데 뤽상부르 공원에 오니까 불편해. 브누아랑 내가 사는 라탱 지구가 바로 옆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와 이 공원에 자주 왔고, 그런 만큼 지금 여기에서 너와는 그와 했던 걸 반복할 수밖에 없으니까. 너와 있는 날 보고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걸 브누아에게 들킬까봐 두렵다기 보다는, 내가 자기랑 했던 걸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하고 있다고, 내가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브누아가 여길 것이 싫어."
-- ‹ 파리의 랑데부 Rendez-vous de Paris › 중 두 번째 스케치,  ‹공중 벤치의 연인› 중, 동거중인 애인(브누아)을 두고 남주인공과 몰래 사귀는 여주인공이 한 말. 나중에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브누아가 바람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네 품에 안길 줄 알았니? 나는 절망에 빠져 있는데 너는 네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너는 나한테 브누아의 교대자-대리자였어. 브누아가 없다면 너도 더 이상 필요 없어" 하고 말하며 떠난다.

3.
"내가 널 떠난 건 너를 위해서였어. 네게 돌아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생겨서 원래 사귀던 사람을 떠나게 되는 경우, 대부분은 예전의 연인을 그리워하게 마련이거든. 내가 레아를 떠난 뒤 바로 널 택했다면 아마 레아를 그리워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너를 일단 한 번 택한 뒤에, 다시 한 번 레아를 택했고, 그럼으로써 너를 그리움의 대상, 즉 돌아가야 할 대상인 '예전 연인'으로 만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네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차라리 그냥, 단순하게, 레아랑 나를 저울 위에 놓고 비교해 보니 레아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하지 그러니?"
-- ‹친구의 친구 L'ami de mon amie› 중, 말 그대로 연인의 친구-친구의 연인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의 기로에 선 두 남녀 주인공의 대화

유교 관념이라고는 했지만, 품위, 존엄성 (dignitas)이나 정조, 충실 (fides) 같은 관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는 대부분 존중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일부일처제란 것이 가부장제(그리고 맑스에 따르면 성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형태인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는 대부분 남성에 의해 전유되어 상당히 기만적이고 여성억압적인 방식으로 작동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것이 사실. 그러다가 성해방 물결 이후에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됐다고는 하나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고, 이제는 그 물결마저 고리타분하거나 뻔한 것으로 치부되는 마당이니 더더욱 그러하고.

품위나 존엄성은 그렇다 치고, 배우자에의 충성도는 내 생각에 에로스 분배의 문제다. 나 한 사람한테 내가 가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에너지를 집중하기도 힘든 마당에, 그걸 나 아닌 다른 한 사람의 타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그걸 제 3자에게 또 나눈다? 에너지가 넘치는 경우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 속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 그런데 각 개인에게 배당된 에너지량이 같지 않고 또 서로 상대방에게 필요로 하고 요구할 수 있는 양 또한 다르니, 이것이 문제.  그래서 사람들은 규범이니 가치니 하는 걸 만들어 놓고 (니체), 그에 맞춰 규준을 세우고, 이에 따르는 일종의 "분배 법칙"을 준수하도록 만든 것일 게다. 이 모든 것이 애당초 고에너지 보유자에게 맞게 구성되었다는 것 (또 니체)이 또 문제지만 (니체는 문제라고 안 보겠지만). 그리고 사실 법칙 자체는 또 가치 기준과는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칸트-아감벤).

어쨌든, 이런 관념들이, 한갓 관념--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함축도 변하고 종전의 의미가 퇴색되었음에도 여전히 무시못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로메르 식으로 응용 변주해 볼 수도 있겠다. 신조어를 만들지 않는 이상 기존의 개념을 변환하거나 역전하는 것 또한 창조의 한 방법이겠기에. 물론 창조자가 아닌 수용자로서 이를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사고의 전환과 열린 자세가 필요하겠다. 이를테면 집에서 안 자고 호텔에서 잔 걸 두고 충실이니 정절을 운운하는 걸 이해하려면 말이다.

어쨌든 결론은
Rohmer forever


사실 이는, 로메르 세계의 좀더 근본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는 문제다. 다소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에로스와 로고스의 갈등이 그것이다.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욕망의 언어화/지성화 작업? 플라톤의 ‹향연› 같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해변의 폴린›에서는 주인공들이 사랑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아리엘 동발이 "나는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싶어" 등등의 대사를 읊는).

부연하면 이렇다. 충동-욕망들은 보통 이성-로고스에 의해 부인되거나 억압된다. 그런데 로메르 영화, 특히 대부분이 남성 지식인인 Contes moraux 연작의 주인공들은, 로고스를, 자신들이 가진 가장 원색적이고 도착적인 욕망들을 아주 유려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아주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정당화할 기제로서 삼곤 한다. 사실 다른 것도 아닌 로고스가 다름 아닌 욕망에 의해 도구화되어 단순한 언어적 표현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발화자에 대한 모든 도덕적 판단은 지연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다. 욕망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들의 말은 수행적 효과를 전혀 지니지 않는,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텅 빈 기표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로메르는 욕망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즉 현실화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욕망이기를 그친다는 점.

‹클레르의 무릎›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위 사진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로메르 추모 특집호 표지로, 바로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따온 것. 괜히 이 장면을 딴 게 아니다). 클레르라는 젊은 여성에 대한 남주인공의 욕망은 그녀의 무릎으로 대체/전화/수렴되고(순전하고 단순한 페티시), 바로 그 무릎으로 인해, 그러니까 그녀의 사랑을 얻음으로써가 아니라 무릎이라는 대리물을 쓰다듬으로써 해소된다. 이를 두고 그는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욕망의 경제는 종교적 감성과 지적이고 언어적인 지성 사이의 갈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 그는 늘, 독실한 가톨릭으로서 위에 열거한 고전적이고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당위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사명과, 바로 이 당위적 상황을 어떻게든 합리화, 적어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근성 사이의 불일치를 고민하고 둘 사이의 조화를 꿈꿨던 것 같다. 이 이상 역시 현실화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으나.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여전히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유다 :  Rohmer forever...

—박쥐

11/12/13 또는 13/12/11

blogin.com · 2011-12-13

별다른 뜻은 없고, 수비학에 대한 남다른 호감 (완곡하게 말하자면 그렇단 거고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병적인 숫자 강박)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이 미미하게나마 "기념비"적인 날을 기념하고 싶었다 (거기에 또 하나 덧붙이면, 이 역사적인 공간, 앙리 푸앵카레 연구원 도서관에 설치되어 있는 맥에서 한글 입력이 가능한지를 확인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사실, 그 어느 날짜건, 규칙이나 의미를 찾자면 못 찾을 것도 없겠다만 (그런 의미에서 요전에 적었던 12/12/12 프로젝트는, 어차피 애당초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하긴 했지만, 실패한다 해도 그리 섭섭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보다 오늘, 2011년 12월 13일은, 내가 최근 겪은 중 가장 변덕스러운 기상으로 기록될 것 같다. 아침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다가, 점심 시간 즈음에는 또 맑게 개어 간신히 제 색깔을 유지한 하늘이 보이더니, 불과 한 시간 정도 지난 지금 이 시각에는 소나기가 들이쳐 창문이 들썩대고 있다. 그런데 또 방금 이 문장을 마칠 무렵에는 다시 조용해졌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라는 신호렷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이제서야 생각이 났는데, 12월 13일은 내 성명축일이다. 즉 루치아 성녀의 축일.

냉담자이고 정서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가까움에도 이 이름에 애착이 간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내 성명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면 (정확하게는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가 의뢰한 작명가의 합작품이지만), 루치아 혹은 루시아라는 이름 (한국 카톨릭에서는 이를 '본명'이라 부른다)을 고른 건 엄마였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내가 듣기에도 나쁘지 않다.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이후로는 다이아몬드 하늘이 연상되는 이름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루치아라는 여인에게는 아주 기구한, 또는,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기이하기까지 한, 사연이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신앙에 눈을 뜨고 스스로를 신에게 바치리라 맹세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강제로 한 남자(이 남자가 이교도라는 설도 있다)와 결혼하게 되고, 신방에서 '정절'을 지키려다 신랑한테 고발을 당해 옥에 갇힌다. 그리고는 고문을 당하다 목에 거대한 칼을 맞고 순교. 화형에 처해졌으나 불길에도 육신이 끄떡없자 집행관이 창으로 눈알을 찍어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이 성녀의 표상에는 눈알 두 개가 담긴 잔이나 칼이 등장한다 (깃털이 나오는 그림들도 있는데 이건 뭔지 모르겠다).

이 사실을 구글링을 통해 알려 준 친구는, "어머니의 실수"라 했다. 나는 차라리 간지(ruse)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위의 그림은 16세기 브뤼게에서 활동한 화가 그룹이 그린 것. 이들에게는 "루치아 성녀 전설의 명인들"의 이름이 붙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브뤼게에 간 것은 2년 전 겨울 이맘 때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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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앨리스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blogin.com · 2011-12-03

앨리스 하니 최고의 앨리스 영화가 생각난다. 체코 감독 Jan Švankmajer 의 1989년작 ' target='_son'>http://www.imdb.fr/title/tt0095715/combined> [앨리스]. 원제는 Něco z Alenky, "something about Alice"라는 뜻이란다.

같은 나라 출신인 밀로스 포르만 (그는 [아마데우스]를 만든 작가이기도 하지만 배우로서의 경력도 있다. 올해 프랑스 감독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Les bien-aimés 에 출연했다. 그것도 카트린 드뇌브의 상대역으로!)이 뷰뉴엘과 디즈니를 합쳐놓은 결과물이라 했다는데, 과연 그렇다. 소녀 배우와 잠깐 나오는 동물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 (인물이라기보다는 피조물에 가깝겠지만)들을 갖가지 재료 (톱밥, 양말, 틀니, 플라스틱 안구...)를 합한 인형들로 만들어 스톱 모션으로 찍었다.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팀 버튼이 컴퓨터 그래픽의 향연에다가 심지어 3차원으로 만든 앨리스에 비교한다면 월등히 우위다. 컴퓨터를 이용한 흔적은 당연히 없고 오로지 사람의 손길에 의지했으니 기술적인 면에서는 다소 아날로그적인 [크리스마스의 악몽], 그보다는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에 가깝겠는데, 이 둘에 비해서도 단연 돋보인다. 장면 하나 하나가 기상천외하고 기발한데 그것들을 합친 전체 또한 훌륭하다 .

단지 기법면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루이스 캐롤의 원작에 더없이 충실하다. 버튼의 경우, 원작에서 느껴지는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페도필리의 암시? 난 잘 모르겠다만)를 이 시대에 맞게 변주, 앨리스를 사춘기에서 성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걸로 설정하고 그녀에게 어떤 주체적인 여성으로의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나름 근대적인 재해석을 제시하려 한 의도는 그럴 듯했으나, 무리가 따르고 어색하며 소화가 안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캐롤의 이상한 나라가 시대적 배경을 초월, 상상력이 자유롭게 유희하는 초현실적 시공간에 가깝다고 볼 때, 스반크마예의 작품은 바로 이 나라를 놀랍도록 잘 재현하고 있다. 바로 이 "초현실성"에 주목할 때, 포르만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어쩌면 당시 체코의 상황이 은연 중 반영되어 있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함에 양해를.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전인가 후인가에 따라서도 얘기가 상당히 달라지리라).

또 다른 예 : 앨리스를 3인칭 시점의 화자로 설정하고 중간 중간 이야기를 진행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집어 넣은 내레이션 기법은 또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그보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바로 그 목소리를 보이스 오프로 넣지 않고 이야기하는 입을 클로즈업한 샷과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카메라가 유독 신체의 특정 부위를 주목하는 걸 볼 수 있는 뷰뉴엘의 [황금시대]나 [안달루시아의 개]가 떠오른다.이 또한 "소녀"의 "입"을 향한 노골적인 성적 암시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초현실주의의 계승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양자가 상호배타적인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상보적인 관계에 있지만 말이다.    

캐롤에 충실하다고는 했지만, 그저 충실하기만 한 해석에 머문 것은 아니다. 캐롤의 앨리스가 상당 부분 언어의 논리적(통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측면에 기대어 있다면, 스반크마예의 앨리스는 이미지가 작용하는 고유한 방식에 집중한다. 이 이미지들은, 캐롤이 만든 그 수많은 언어적 유희까지 대체하면서, 원작을 읽으면서 연상하게 되는 이미지들(상당 부분 원작의 삽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마저도 뛰어 넘는다.

사진 출처는 ' target='_son'>http://videodromodvd.blogsp ... /2010/12/alice.html> 여기. 단 한 번의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건질 수 있는 다른 훌륭한 샷도 많지만 책 읽는 앨리스가 포함된 이걸로 선정. 카드 나라의 왕정 재판에서 피고석에 앉은 모습이다. 앨리스는 무엇을 읽고 있을까?

···
(언제나처럼 유튜브에서) 맛보기, 그리고 앨리스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에 대한 답


헉, 심지어 완본으로 올라와 있네. 그것도 영어 더빙판으로.

http://www.youtube.com/v/iu ... fr_FR>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iu ... M?version=3&hl=fr_FR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0" height="315"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재판 장면은 1:20 가량부터 나온다. 저 책은 집사 토끼가 앨리스에게 읽고 외우라며 건넨 책.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다 들어선 곳은 피고석. 하트 여왕은 앨리스에게 타르트를 훔쳐 먹은 죄를 물어 참수형을 내린다. 앨리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옆에서 왕이 그래도 법치주의에 입각해서 제대로 판결을 내리자고 설득한다. 그리고 저 파란 표지의 책(이라기보다는 공책) 중 한 부분을 펴주며 소리내어 읽으라고 한다.

거기에는 "나는 내 잘못을 시인하며 이에 사과한다"고 적혀 있다. 앨리스가 이를 소리내어 읽자 왕은 사과의 말을 참작하여 처벌을 감하자 여왕을 설득한다. 이에 앨리스는 다시 잘못을 부인한다. 그러자 여왕은 기다렸다는 듯 참수형을 내리고, 왕은 할 수 없다는 듯 여왕의 판결을 반복한다. 집행관인 토끼가 가위를 들고 형을 집행하려 하자 앨리스는 "안돼!"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런데 흔들리는 고개는 앨리스에서 토끼로 오버랩되고, 이는 토끼에서 다시 다른 등장인물들로 차례로 이어진다. 그러다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오, 이것은, 다소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아닌가. 그러나 앨리스는 여기에서 요제프 K.가 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법의 본질--텅 빈 형식--을 꿰뚫고 그것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가지고 놀기.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