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25일 금요일

69년, 68의 그들은 젊었다

blogin.com · 2005-11-25



필립 가렐(Philippe Garrel)의 Les amants réguliers (영어로 하면 Regular Lovers 쯤 될까? 우리말로는 뭐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는 68세대의, 68세대에 대한, 68세대에 의한 영화다. 68에 대해, 그때/거기에 있었던 이들에 대해 지금/여기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은 지난 40년 동안 끊임없이 이런 의문을 던져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산 젊은이였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감독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젊디 젊은 아들(루이 가렐, 〈몽상가들〉에 나온 그 미소년)과 그 또래 친구들의 입을 빌려 '그' 시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시대란, ''혁명''의 빛나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이 끝난 후 다시 돌아온 남루한 일상, 이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삶까지를 포함한다. 사실 혁명의 현장, 그러니까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이라 해서 대단할 것은 없다. 물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비장한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언제 끝날 지 모를 대치 상태는 아직 어린 그들에게 긴장뿐 아니라 지루함의 연속이기도 했으리라. 경찰에 쫓겨 숨이 턱에 닿도록 달아나고, 모르는 사람 집의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서 '전사'로서의 면모보다는 한 나약한 인간, 아니, 겁에 질린 어린 아이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혁명'이 끝난 후, 그들에게는 채 이루지 못한 신념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다른 위안 거리를 찾는다. 아편이라든지, 애인이라든지.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이 위안이 될 리 만무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혁명에 가담했다가, 혁명 후에는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서 유산 상속자로 친구들을 먹여 살리다시피하는 앙투안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서 살다가, 그러면서 아편과 여자 친구인 릴리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다가, 릴리가 미국으로 떠난 뒤 쓸쓸히 죽는다(사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68에 대한 감독 자신의 자기 고백인 한편으로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젊음'에 대한 예찬으로 읽혔다. 그가 아들과 아들 또래들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확실히 경이감이 어려 있다. 두려울 것이 없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한 젊음.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젊음의 특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나 끝없는 방황 같은 것들은 젊음의 천형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가렐에게는, 젊음의 그 천형마저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쩌면 이 68세대 감독은 그러한 '젊음'을 통해 실패한, 혹은 미완의 혁명에 대한 하나의 해명을 제공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스스로 진 책임을 버거워 하는 것 역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는 죄를 덮어 씌우거나 면하거나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그래도 당시에 너무 어렸거나 철이 없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그 때 가졌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땐 그랬지"라는 후렴구를 포함하는,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후일담"으로 일관하는 이들에 비하면 가렐은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한가. 그의 변명은 고귀하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보너스 혹은 사족

http://www.cducinema.com/me ... eguliers_bavf_352.rm width=352 height=288 type=audio/x-pn-realaudio-plugin controls="ImageWindow" backgroundcolor="black" center="true" console="cons">
 http://www.cducinema.com/me ... eguliers_bavf_352.rm width=352 height=32 type=audio/x-pn-realaudio-plugin controls="ControlPanel" console="cons" autostart="false" prefecht="true"> 



- 영화를 보는 내내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떠올렸다. 전자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외모가 후자의 주인공과 너무 닮아서였다. 두 사람이 동일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모두 각각 3시간, 4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는 점도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겠다. 아,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2003년 여름인가, 당시 아트선재에서 열렸던 으스타슈&가렐 특별전에서 두 감독의 영화를 마구 섞어서 본 후로, 아직까지도 두 사람을 헷갈려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가렐의 베니스 영화제 기자 회견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감독 본인이 〈엄마와 창녀〉를 "본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두 영화 사이에 다른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 사실 내가 〈엄마와 창녀〉를 연상했던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시놉이나 배우, 특히 루이 가렐만으로 충분히 〈몽상가들〉을 연상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거늘. 감독 자신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베르톨루치의 작년작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는 얘기까지 한 만큼. 실제로 영화 안에서 여자 주인공이 69년 당시에 나온 베르톨루치의 영화 하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68 시위를 재현하기 위해 경찰 제복이나 경찰차 등등의 도구들도 〈몽상가들〉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하니, 말 다했다.

- 영화를 보고 난 뒤 예고편을 접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에서의 주연과 조연의 관계와 비중이 완전히 역전된 예고편이라니. 위의 동영상을 보면 카메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젊은 남자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저 4분짜리 예고편은,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긴 하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있다고, 다시 말해 예고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관객을 동원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저런 불친절한 예고편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평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썩 괜찮은 뮤직 비디오 한 편을 덤으로 얻게 된 셈이니까. 리듬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즐거워 하고 있는 저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입으로는 한숨이 나오는데 어깨가 절로 들썩인달까. 이런 식의 "작가적 고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 이 영화에는 "시의성" 있는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경찰에게 쫓기다 한 건물로 들어가 어떤 집의 현관문을 두드린 프랑수아. 집주인은 프랑수아에게 자동차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과 한패냐고 묻는다. 프랑수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집주인이 말한다. "숨겨 달라고 할 것 같았으면 불은 지르지 말았어야지요."

그렇긴 해도 68년 당시에는 "긴급 사태"가 선포되는 일은 없었는데, 40년 전도 아닌 50년 전의 "전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감각이라니.

—박쥐

2005년 11월 16일 수요일

서른 즈음

blogin.com · 2005-11-16

최근 이곳에서 일어난, 그리고 규모는 약해졌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소요" 사태는 내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렇게 멀리 있다. 그 동안은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가 날 힘들게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 거리가 "안전 거리"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논문 심사를 마친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직 논문 등록이 남아 있다. 계획서를 본 교수는 "진지하다", 그리고 "하나의 베이스(une base)다" 하고 말했다. "더 깊게 공부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베이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도 못 잤다. 너무 초보적이라는 뜻일까? 나름대로 기초나 근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일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마디 마디 곱씹고 또 곱씹는 천형을 타고 난 나 같은 이에게 외국어는 형벌이다. 논문을 쓰면서 그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얼마나 웃고 울었던가. 그런 걸 보면 외국어가 축복이 되기도 하는구나. 사소한 말들이 기쁨을 주기도 하니까. 교수가 무심코 "다 잘 될 테니 걱정 말아라"라는 말을 던졌을 때 긴장이 해소되면서 몸이 한 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환희,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를 맛보기도 했었던 걸 보면.


어쨌든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러고 보니, 한달 반만 지나면 우리 나이로 서른, 이 새로운 시작을 나이 서른에 맞게 되는 거구나. 늦었다거나 이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재미없는 생각들에 시간을 낭비할 틈 없이, 재미있게, 가수 아녜스 빌의 노래 제목(je n'ai pas le temps d'avoir 30 ans)처럼 "서른을 맞을 시간이 없이" 살고 싶을 뿐. 그렇게, 바쁘게. 

more...
... or less


대학 동기들과 꾸린 게시판에 올린 글 중 일부를 옮겨 왔다. 오랜 만에 적다 보니 자연스레 튀어 나오게 된 근황이나 그 밖의 다른 이야기들이 이곳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중복"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친구는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이번 학기의 첫 수업을 들었다. 얼마 전 다녀 온 콜로키움을 빼면 정말 처음이다. 계절이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었는데 이제서야 기지개를 켜고 있다니, 하고 한심해 하는 한편으로,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 큰 동기를 부여할 지도 모른다고, 늘 그렇게 해오지 않았느냐고 자위하고 있다.

게다가 오귀스트 콩트가 살았던 집, 그가 썼던 서재에서 듣는 데카르트 기하학 강의라니, 동기가 유발되지 않을 리 없다. 교수, 그리고 세 명의 학생들과 한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대고 듣는 수업이 청강생인 데다가 그 학교 학생도 아닌 내게 심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콩트의 서재에서라면야. 심지어 오늘은 일찍 도착한 나머지 서재에 꽂힌 그의 저서 초판본들까지 구경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난 촌스럽게도 이런 걸 좋아한다. 욘사마가 앉았던 까페 자리에 앉아 그가 마신 차를 주문해 들면서 행복해 한다는 일본 아줌마들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콩트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좋아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심사 위원이었던 교수가 "논문을 쓰기로 했다니 기쁘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또 한 번의 카타르시스. 그녀가 심사 후 "박사 논문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니 들어가기 전에 잘 생각해 봐라" 하고 얘기했을 때 나는 또 그 말뜻을 헤아리느라 밤잠을 설쳤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서른 타령은 이것으로 끝.

—박쥐

2005년 10월 21일 금요일

Me and you and...

blogin.com · 2005-10-21

난 포스팅을 할 때마다 글자 색깔을 고르는 일에 꽤 신경을 쓰곤 한다. 사진이나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색을 선별한답시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는 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워낙 감각이 없는 터라서 결과에 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 포스트에서만큼은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자신도 있다 : 분홍이 아닌 다른 색깔로 이 영화,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Miranda July, 2004)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감독 자신이 분한 주인공 크리스틴은 비디오/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요양원 노인들을 위해 운전 봉사를 하기도 하는데, 그곳서 사귄 할아버지와 함께 백화점 구두 매장에 갔다가 매장 직원인 리처드를 만난다. 리처드는 한달 전부터 부인과 별거에 들어간 뒤 아들 둘과 살고 있는데,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부인과의 "이별"을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왼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던 탓이다. 그것도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크리스틴은 "발에 맞지 않는 구두 때문에 고생하기에 당신은 너무 고귀한 사람"이라며 혹하게 만들어 결국 예정에 없던 신발을 구매하게 만든 리처드에게 호감을 느껴 그 이후에도 계속 그가 있는 매장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겠다시피, 해피엔드.

물론 두 주인공 간의 우연한 만남-갈등-갈등 해소가 전부는 아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리처드의 두 아들들, 리처드의 직장 동료, 리처드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10대 소녀들, 이웃집 소녀, 크리스틴의 친구인 할아버지와 그의 애인 등등. 심지어 이웃집 소녀가 어항 가게에서 산 금붕어까지. 크리스틴을 별 볼일 없는 풋내기 작가로 생각하고 냉대했던 미술관 큐레이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주인공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웃집 소녀와 더불어 내면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를 포함, 이 모든 조연들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발한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외롭고 섬세하고 상처입기 쉬운 영혼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상처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도록 면역력을 키우는 것. 그렇지만 그들은 항체를 만들만한 힘조차 없이 한없이 약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입은 상처는 서로서로 보듬는 것이다. ))〈〉((, 이렇게 말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 거창한 인류애나 쓸데없는 동정이나 연민, 혹은 가족주의/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말끔하게 싹 걷어낸,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런데 그 시선은 무턱대고 따뜻하지 않다. 감독 역시 그런 그들을 냉정하거나 우월감 혹은 동정심에 젖어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큰 매력이다. 그래서 소박하게 착하기만 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이 착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내 미적 감각을 신뢰할 수 없긴 하지만. 어여쁜 감독 언니로 인해 호감도가 상승했음을 부인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74년생(!)인 그녀는 팔방미인, 이 단어의 모든 내포/외연을 스스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정받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단편집 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한 소설가인가 하면, 영화는 또 영화대로, 이 첫 작품으로 꺈느, 선댄스를 비롯, 상도 여러 개 받았으니. 그 뿐인가? 그녀와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틴 사이에는 한 치의 거리도 없을 것임에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녀는 성격마저 좋은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니, 세상이 불공평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인물 리스트에 그녀를 추가할 수밖에.

))<>((
forever



1. 음악도 좋다. 특히 코디 체스트넛의 노래. http://elginpark.com/meandy ... usite1.html>여기 에 가면 들을 수 있다.

2. 위의 그림은 영화 홈피에 소개된 공식 포스터 중 하난데, 최종적으로는 선택되지 않은 것 같다. 난 시중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이게 맘에 든다. 샛분홍에 딱 저 이모티콘과 "포에버"만 찍혀 있는 영화 포스터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3. 줄라이의 http://meandyou.typepad.com/>블로그 에 가니 그녀가 시사회를 위해 파리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난 그 사진에서 배경으로 쓰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다른 극장에서 볼까 하다가 그곳으로 간 거였는데. 그렇다. 이것은 자랑이다. 그 누구도 자랑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4. 줄라이가 시나리오를 쓴 다음 영화의 제목은 "Are You the Favorite Person of Anybody ?"란다. 긴 제목을 좋아하나 보다. 어쨌든 제목 예쁘다. 이번 것도 그랬고.

—박쥐

2005년 2월 23일 수요일

왜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blogin.com · 2005-02-23


오늘따라 이곳 바람이 유난히 매섭다 했습니다. 아침부터 눈발이 제법 오랫동안 흩날리길래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살얼음을 조심스레 밟아가며 힘겹게 집에 와서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미뤄둔 숙제를 마친 뒤에 열겠다고 다짐했었던 포도주 한 병을 따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배우로서 좋아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팬이었다면 그 절망감과 안타까움을 어찌 달랠 수 있었겠습니까. 팬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데.

당신이 재능있고 촉망받는 여배우였다는 사실보다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참 아프게 합니다. 당신이 유서에 남긴 말들, 일에 대한 열정과 욕심,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 하나 하나가 가슴 곳곳을 마구 후벼댑니다.

왜냐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부디 지금 계신 그곳에선 행복하시길.

—박쥐

2005년 2월 22일 화요일

푸앵카레, 합리주의, 개입

blogin.com · 2005-02-22

푸앵카레가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과 더불어 드레퓌스를 모함한 쪽에서 제출한 자료들이 증거로서 불충분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푸앵카레들에 따르면, 反드레퓌스파들의 주장은 주장의 근거로서 제시된 자료가 필적학적으로 볼 때 위조된 것임에 분명할 뿐 아니라 통계학을 부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점에서 논증상으로도 오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푸앵카레를 졸라처럼 반유대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당대 지식인 그룹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그가 이 사건에 개입했던 것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과학자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자각에서가 아니라 과학의 몰이해 및 오용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다분히 과학주의적인, 그러니까 과학에 관한 한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의 문제와 한 인간으로서의 과학자를 사회 내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늘 산뜻하게 연결되지는 않는 듯하다. 과학에 대해 상아탑 속에서 오로지 저 밖의 진리와만 교통하는, 즉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그 어떤 것과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상을 가진, 그러니까 아주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과학관을 지닌 과학자라고 해서 사회와는 무조건 담을 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 대해 아주 급진적인 입장을 가진,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연구 활동은 다른 모든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실천이다"라고 주장하는 구성론자/과학사회학자라고 해서 늘 정치적으로 진보 혹은 좌파에 속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과학에 관한 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프랑스 인식론자 그룹만 봐도 그렇다. 바슐라르의 경우, 과학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늘 잊지 않았지만 사회 현실을 향해서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킨 축에 속했었던 반면, 코를 씻고 맡아 봐도 도무지 사람 냄새라고는 나지 않는 가장 추상적인 학문인 수학과 논리학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던 장 카바이예스는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일하다가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나치에 의해 총살을 당했을 만큼 열렬한 참여론자였다.

내 경우, 과학에 관한 한 한때는 파이어아벤트를 추종할 만큼 급진적인 입장으로까지 갔다가 프랑스 인식론에 경도되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이들의 과학에 대한 "합리적 신학"에 대체로 동감하는 편이다. 이성에 대한 믿음은 과학 활동의 원동력으로서나 사회의 변혁을 추진하는 힘으로서나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거기에서 "합리주의적 개입/참여(engagement rationaliste: 바슐라르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의 개념이 나온다.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理性에 合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과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合理적이다. 이성의 한계 언저리에서 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박쥐

2005년 2월 14일 월요일

우박

blogin.com · 2005-02-14



또도독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린 우박 알갱이들이 지붕 위를 또르르 굴러내려 쌓이니 저리 되더라. 저 위를 걸으면 자갈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날까? 내 흙투성이 발밑에 자갈들이 제 몸을 부비댈 때 내는, 그 뽀득뽀득 하는 소리가?

—박쥐

2005년 2월 9일 수요일

말과 소리

blogin.com · 2005-02-09

아마 조지 버나드 쇼였을 것이다, 영어의 무규칙적 발음 체계에 관해 특유의 신랄한 어조와 번득이는 재치를 십분 발휘해 비웃었던 사람은. "ghoti"라는 단어가 뜻하는, 아니 소리내는 말은 무엇일까? 정답은 fish 다. tough나 laugh에서 gh가 [f] 발음이 나고, women에서 o가 [i] 발음이 나고, contemplation, concentration 등에서 ti가 [sh], 그러니까 적분 기호처럼 생긴 발음 기호로 나는 소리를 낸다는 데에 착안하면 이 답이 나온다.

불어는 그래도 이런 식의 발음상의 예외가 영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다. 발음을 제대로 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적어도 특정한 하나의 단위 음절에 대해서는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소리가 있다는 점에서는 영어에 비해 훨씬 규칙적이다...

... 라는 것이 내가 예전에 가졌던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리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네들이 외국의 고유 명사를 들여와서 자기네 식으로 바꿔 부르는 데에는 어떤 규칙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절실하게 깨달았다.

한 컨퍼런스에 갔을 때다. 이날은 누벨 바그 출신의, 이제는 노장 반열에 든 감독 앙드레 테시네(André Techiné)가 초청됐다 (사실 이 감독의 이름도 테키네인지 테시네인지 헷갈렸었다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됐다). 논의가 진행되던 중 계속해서 이름이 브레슈임직한 사람이 거명됐다. 테시네는 브레슈티앙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브레슈적인 거리 두기/낯설게 하기는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등등. 중반 쯤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게 브레슈가 아니라 브레히트였음을.

이런 식의 고유 명사 제멋대로 바꿔 부르기가 발음 상의 규칙 이탈/무규칙 현상과 결합되면 외국인들은 말 그대로 환장할 수밖에 없다. 특히 나같이 아직까지 불어를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닌 데다가 음성보다는 문자로서의 불어에 보다 친숙한 사람에게는. 문제는 뭐냐 하면, 같은 알파벳 문화권 내에 있어 표기 방식을 바꿀 필요 없이 원문자 그대로 들여오면 되는 명사들의 경우, 언어 사이의 장벽을 넘으면 너무도 낯선 이름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힐베르트가 영어에서 힐버트가 되고 불어에서는 일베르가 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어에서는 아리스토틀이지만 불어에서는 아리스토트가 되듯이.

 
차라리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를 벙드르디라고 바꾸듯이 바꿨으면 속이 편하겠다. 로빈슨이 로뱅송으로 바뀐 것은 그래도 애교에 속한다. 마이켈슨은 미셸손, 미켈란젤로는 미켈 앙주(Michel-Ange, 내가 사는 거리 이름인데, 사실 이 이름을 발음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미셸 앙주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뮌헨은 뮈니크, 베를린은 베를렝, 흄은 윰(처음에는 융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 홉스는 옵스, 등등 도대체 내 눈에는 아노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얘길 눈크 언니에게 했더니, 그녀는 맞장구를 치며 '캉트'와 '아이데게'의 예를 추가해 주었다. 알다시피, 혹은 짐작하다시피, 전자는 칸트고 후자는 하이데거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주제의 대화/토론을 꽤 자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이런 주제는 보통 "그렇다면 한국어는 어떤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이 질문은 두 가지 다른 종류로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 : 하나는 발음과 그 발음을 표기하는 체계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외래어를 수용하고 표기하는 방식에 관한 것. 전자에 대한 나의 답은 이러하다 : 한국어의 경우, 말그대로 "읽는대로 소리나는" 언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그런 만큼 오히려 발음을 정교하고 정확하게 할라치면 상당히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음은 후자에 대한 답 :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박쥐

2005년 2월 6일 일요일

또, 다시, 이제는, 더 이상

blogin.com · 2005-02-06



또. 또 다시. 그러면서도 원망하고, 또 후회하고.

이제는, 정말로 내 삶을 찾아야 할 때.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더 이상은.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