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68의 그들은 젊었다

blogin.com · 2005-11-25



필립 가렐(Philippe Garrel)의 Les amants réguliers (영어로 하면 Regular Lovers 쯤 될까? 우리말로는 뭐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는 68세대의, 68세대에 대한, 68세대에 의한 영화다. 68에 대해, 그때/거기에 있었던 이들에 대해 지금/여기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은 지난 40년 동안 끊임없이 이런 의문을 던져왔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산 젊은이였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감독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젊디 젊은 아들(루이 가렐, 〈몽상가들〉에 나온 그 미소년)과 그 또래 친구들의 입을 빌려 '그' 시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시대란, ''혁명''의 빛나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이 끝난 후 다시 돌아온 남루한 일상, 이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삶까지를 포함한다. 사실 혁명의 현장, 그러니까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이라 해서 대단할 것은 없다. 물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비장한 각오로 무장하고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언제 끝날 지 모를 대치 상태는 아직 어린 그들에게 긴장뿐 아니라 지루함의 연속이기도 했으리라. 경찰에 쫓겨 숨이 턱에 닿도록 달아나고, 모르는 사람 집의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그들에게서 '전사'로서의 면모보다는 한 나약한 인간, 아니, 겁에 질린 어린 아이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혁명'이 끝난 후, 그들에게는 채 이루지 못한 신념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다른 위안 거리를 찾는다. 아편이라든지, 애인이라든지.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이 위안이 될 리 만무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는 혁명에 가담했다가, 혁명 후에는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서 유산 상속자로 친구들을 먹여 살리다시피하는 앙투안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서 살다가, 그러면서 아편과 여자 친구인 릴리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다가, 릴리가 미국으로 떠난 뒤 쓸쓸히 죽는다(사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내게는 그 모든 것이 68에 대한 감독 자신의 자기 고백인 한편으로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젊음'에 대한 예찬으로 읽혔다. 그가 아들과 아들 또래들에게 보내는 시선에는 확실히 경이감이 어려 있다. 두려울 것이 없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한 젊음.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과 그 신념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젊음의 특권이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나 끝없는 방황 같은 것들은 젊음의 천형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젊지 않은 가렐에게는, 젊음의 그 천형마저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어쩌면 이 68세대 감독은 그러한 '젊음'을 통해 실패한, 혹은 미완의 혁명에 대한 하나의 해명을 제공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스스로 진 책임을 버거워 하는 것 역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는 죄를 덮어 씌우거나 면하거나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그래도 당시에 너무 어렸거나 철이 없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며 그 때 가졌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땐 그랬지"라는 후렴구를 포함하는,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후일담"으로 일관하는 이들에 비하면 가렐은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한가. 그의 변명은 고귀하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보너스 혹은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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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는 내내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떠올렸다. 전자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외모가 후자의 주인공과 너무 닮아서였다. 두 사람이 동일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 모두 각각 3시간, 4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는 점도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겠다. 아,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2003년 여름인가, 당시 아트선재에서 열렸던 으스타슈&가렐 특별전에서 두 감독의 영화를 마구 섞어서 본 후로, 아직까지도 두 사람을 헷갈려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가렐의 베니스 영화제 기자 회견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감독 본인이 〈엄마와 창녀〉를 "본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두 영화 사이에 다른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 사실 내가 〈엄마와 창녀〉를 연상했던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시놉이나 배우, 특히 루이 가렐만으로 충분히 〈몽상가들〉을 연상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거늘. 감독 자신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베르톨루치의 작년작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는 얘기까지 한 만큼. 실제로 영화 안에서 여자 주인공이 69년 당시에 나온 베르톨루치의 영화 하나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68 시위를 재현하기 위해 경찰 제복이나 경찰차 등등의 도구들도 〈몽상가들〉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하니, 말 다했다.

- 영화를 보고 난 뒤 예고편을 접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에서의 주연과 조연의 관계와 비중이 완전히 역전된 예고편이라니. 위의 동영상을 보면 카메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젊은 남자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저 4분짜리 예고편은,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긴 하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있다고, 다시 말해 예고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관객을 동원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저런 불친절한 예고편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평할 이유는 없다. 덕분에 썩 괜찮은 뮤직 비디오 한 편을 덤으로 얻게 된 셈이니까. 리듬에 몸을 온전히 맡긴 채 즐거워 하고 있는 저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입으로는 한숨이 나오는데 어깨가 절로 들썩인달까. 이런 식의 "작가적 고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 이 영화에는 "시의성" 있는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경찰에게 쫓기다 한 건물로 들어가 어떤 집의 현관문을 두드린 프랑수아. 집주인은 프랑수아에게 자동차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과 한패냐고 묻는다. 프랑수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집주인이 말한다. "숨겨 달라고 할 것 같았으면 불은 지르지 말았어야지요."

그렇긴 해도 68년 당시에는 "긴급 사태"가 선포되는 일은 없었는데, 40년 전도 아닌 50년 전의 "전시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감각이라니.

—박쥐

서른 즈음

blogin.com · 2005-11-16

최근 이곳에서 일어난, 그리고 규모는 약해졌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소요" 사태는 내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렇게 멀리 있다. 그 동안은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가 날 힘들게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 거리가 "안전 거리"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논문 심사를 마친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직 논문 등록이 남아 있다. 계획서를 본 교수는 "진지하다", 그리고 "하나의 베이스(une base)다" 하고 말했다. "더 깊게 공부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베이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도 못 잤다. 너무 초보적이라는 뜻일까? 나름대로 기초나 근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일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마디 마디 곱씹고 또 곱씹는 천형을 타고 난 나 같은 이에게 외국어는 형벌이다. 논문을 쓰면서 그들의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얼마나 웃고 울었던가. 그런 걸 보면 외국어가 축복이 되기도 하는구나. 사소한 말들이 기쁨을 주기도 하니까. 교수가 무심코 "다 잘 될 테니 걱정 말아라"라는 말을 던졌을 때 긴장이 해소되면서 몸이 한 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환희,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를 맛보기도 했었던 걸 보면.


어쨌든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러고 보니, 한달 반만 지나면 우리 나이로 서른, 이 새로운 시작을 나이 서른에 맞게 되는 거구나. 늦었다거나 이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재미없는 생각들에 시간을 낭비할 틈 없이, 재미있게, 가수 아녜스 빌의 노래 제목(je n'ai pas le temps d'avoir 30 ans)처럼 "서른을 맞을 시간이 없이" 살고 싶을 뿐. 그렇게, 바쁘게. 

more...
... or less


대학 동기들과 꾸린 게시판에 올린 글 중 일부를 옮겨 왔다. 오랜 만에 적다 보니 자연스레 튀어 나오게 된 근황이나 그 밖의 다른 이야기들이 이곳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를 주지 않을까 싶어서. "중복"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친구는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이번 학기의 첫 수업을 들었다. 얼마 전 다녀 온 콜로키움을 빼면 정말 처음이다. 계절이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었는데 이제서야 기지개를 켜고 있다니, 하고 한심해 하는 한편으로,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 큰 동기를 부여할 지도 모른다고, 늘 그렇게 해오지 않았느냐고 자위하고 있다.

게다가 오귀스트 콩트가 살았던 집, 그가 썼던 서재에서 듣는 데카르트 기하학 강의라니, 동기가 유발되지 않을 리 없다. 교수, 그리고 세 명의 학생들과 한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대고 듣는 수업이 청강생인 데다가 그 학교 학생도 아닌 내게 심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콩트의 서재에서라면야. 심지어 오늘은 일찍 도착한 나머지 서재에 꽂힌 그의 저서 초판본들까지 구경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난 촌스럽게도 이런 걸 좋아한다. 욘사마가 앉았던 까페 자리에 앉아 그가 마신 차를 주문해 들면서 행복해 한다는 일본 아줌마들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콩트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좋아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죽하랴.

심사 위원이었던 교수가 "논문을 쓰기로 했다니 기쁘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또 한 번의 카타르시스. 그녀가 심사 후 "박사 논문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니 들어가기 전에 잘 생각해 봐라" 하고 얘기했을 때 나는 또 그 말뜻을 헤아리느라 밤잠을 설쳤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서른 타령은 이것으로 끝.

—박쥐

Me and you and...

blogin.com · 2005-10-21

난 포스팅을 할 때마다 글자 색깔을 고르는 일에 꽤 신경을 쓰곤 한다. 사진이나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색을 선별한답시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는 게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워낙 감각이 없는 터라서 결과에 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 포스트에서만큼은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자신도 있다 : 분홍이 아닌 다른 색깔로 이 영화, 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 (Miranda July, 2004)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감독 자신이 분한 주인공 크리스틴은 비디오/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요양원 노인들을 위해 운전 봉사를 하기도 하는데, 그곳서 사귄 할아버지와 함께 백화점 구두 매장에 갔다가 매장 직원인 리처드를 만난다. 리처드는 한달 전부터 부인과 별거에 들어간 뒤 아들 둘과 살고 있는데,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부인과의 "이별"을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왼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던 탓이다. 그것도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크리스틴은 "발에 맞지 않는 구두 때문에 고생하기에 당신은 너무 고귀한 사람"이라며 혹하게 만들어 결국 예정에 없던 신발을 구매하게 만든 리처드에게 호감을 느껴 그 이후에도 계속 그가 있는 매장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겠다시피, 해피엔드.

물론 두 주인공 간의 우연한 만남-갈등-갈등 해소가 전부는 아니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리처드의 두 아들들, 리처드의 직장 동료, 리처드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10대 소녀들, 이웃집 소녀, 크리스틴의 친구인 할아버지와 그의 애인 등등. 심지어 이웃집 소녀가 어항 가게에서 산 금붕어까지. 크리스틴을 별 볼일 없는 풋내기 작가로 생각하고 냉대했던 미술관 큐레이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주인공이나 다른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이웃집 소녀와 더불어 내면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를 포함, 이 모든 조연들은, 주인공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발한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외롭고 섬세하고 상처입기 쉬운 영혼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상처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도록 면역력을 키우는 것. 그렇지만 그들은 항체를 만들만한 힘조차 없이 한없이 약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입은 상처는 서로서로 보듬는 것이다. ))〈〉((, 이렇게 말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 거창한 인류애나 쓸데없는 동정이나 연민, 혹은 가족주의/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말끔하게 싹 걷어낸,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런데 그 시선은 무턱대고 따뜻하지 않다. 감독 역시 그런 그들을 냉정하거나 우월감 혹은 동정심에 젖어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여리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큰 매력이다. 그래서 소박하게 착하기만 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이 착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내 미적 감각을 신뢰할 수 없긴 하지만. 어여쁜 감독 언니로 인해 호감도가 상승했음을 부인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74년생(!)인 그녀는 팔방미인, 이 단어의 모든 내포/외연을 스스로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정받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단편집 출간을 앞두고 있기도 한 소설가인가 하면, 영화는 또 영화대로, 이 첫 작품으로 꺈느, 선댄스를 비롯, 상도 여러 개 받았으니. 그 뿐인가? 그녀와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틴 사이에는 한 치의 거리도 없을 것임에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녀는 성격마저 좋은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니, 세상이 불공평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인물 리스트에 그녀를 추가할 수밖에.

))<>((
forever



1. 음악도 좋다. 특히 코디 체스트넛의 노래. http://elginpark.com/meandy ... usite1.html>여기 에 가면 들을 수 있다.

2. 위의 그림은 영화 홈피에 소개된 공식 포스터 중 하난데, 최종적으로는 선택되지 않은 것 같다. 난 시중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이게 맘에 든다. 샛분홍에 딱 저 이모티콘과 "포에버"만 찍혀 있는 영화 포스터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3. 줄라이의 http://meandyou.typepad.com/>블로그 에 가니 그녀가 시사회를 위해 파리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난 그 사진에서 배경으로 쓰인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다른 극장에서 볼까 하다가 그곳으로 간 거였는데. 그렇다. 이것은 자랑이다. 그 누구도 자랑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4. 줄라이가 시나리오를 쓴 다음 영화의 제목은 "Are You the Favorite Person of Anybody ?"란다. 긴 제목을 좋아하나 보다. 어쨌든 제목 예쁘다. 이번 것도 그랬고.

—박쥐

별 네 형제

blogin.com · 2005-09-14

http://antwrp.gsfc.nasa.gov ... /ap050913.html> face=바탕>오늘의 천문 사진 에서 보고,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길래, 가져 오다.

9월 6일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에서 찍힌 사진. 달, 목성, 금성, 그리고 처녀 자리의 별 중 하나인 스피카(사진에서 초승달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가 나란히. 오른쪽으로는 비행기가, 아래로는 엄마와 아이들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 "저 모든 것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고 했던 어느 수학자의 말은 수정돼야 한다. 저런 풍경을 보면서 어찌 감히 "딴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저런 곳에서만큼은, '세계'고 '우주'고 '기원'이고 '생성'이고 모든 문명어린(!) 생각일랑 집어 치우고는 그저 바라만 보는 게, 어렵사리 나란히 외출한 별님네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사진을 제대로 보시려면


이곳으로 직접 가보시길 :

http://antwrp.gsfc.nasa.gov ... wilson_big.jpg> face=바탕>http://antwrp.gsfc.nasa.gov ... g.jpg

—박쥐

시간

blogin.com · 2005-08-31


팔월이 다 갔다. 시간은 참 잘도 흐른다.
 

태양이 제가 가진 연료를 모조리 태워버리기까지의 시간도 시간이고, (그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지구라는 행성이 생겨나면서부터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쓰기까지 걸린 (지금까지 나온 가장 신빙성있는 추정치를 따른다면) 46억년이라는 시간도 시간이고, 도올이 어느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박사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걸렸다는 단 사흘이라는 시간도 시간이고, "힘없는 책갈피"가 기형도의 "종이를 떨어뜨리"기까지 걸린 "아주 오랜 세월"도["질투는 나의 힘"의 첫머리],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그의 짧은 생도[마지막 머리] 시간이고, 집에 불이 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창밖으로 던진 가난하고 젊은 엄마와 결국은 숨지고 만 그 아이, 이 이민자 모자가 파리에서 보냈던 그 남루한 시간도 시간이고, 내가 대책도 주책도 없이 멍하니 흘려보낸 시간도 시간이다.

이 모두가 흐른다. 흐르고 흘러 넘실댄다. 끝내는 흘러 넘친다. 그런 뒤에도 계속해서 흐른다.
 

여기에서 시간이 무어냐고 묻지도, 도대체 (명색이 철학도라는, 심지어 "과학"철학을 한다는 사람이) 시간 개념을 그렇게 막 써도 되냐고 나무라지도 말라. 우리 모두는, 聖아우구스티누스만큼이나, 시간이 뭔지 알고 있다. 다만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혹은 구차한) 질문이 나오면 막막해지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분명한 건, 내게는 이상한 나라의 폴이 가지고 있었던, 그 시간을 멈추게 하는 요요도, 나를 제외한 이 모든 세계를 빛의 그것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여서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할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다.

... 자, 알았으면 이제, 이 창을 닫고 다시 MS 워드로 돌아가라는 존재의 부름에 응하라.

 

그래도...


지구가 돌고, 그래서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주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 그래봤자, 이내, 저 눈아린 풍경이 "또 하루 멀어져"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게 되지만. 아, 정말이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이쯤 되면 "시간 없다면서 저 위에 올린 사진들은 뭐고, 또 지금의 이 글은 뭐냐"라는 물음이 나올 법하다. 이 물음은 부당하지 않다. 다음은 질문의 정당성과는 상관 없는 답이다.

1. 나도 뭔가를 "쓸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스스로 상기하기 위해.
2.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라는 신호를 한 번쯤은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귀뚜라미 우는 계절이 올 무렵이고 하니.
3.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물에 빠지거나 불길에 숨이 막히거나 째깍째깍 하고 타들어가다가 결국에는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서.
4. 사진--몇 주 전 어느날 저녁, 3.과 같은 이유로 생 루이 섬 인근을 산보하다가 찍은--이 맘에 들어서. 혼자 보기 아까워서.

—박쥐

이런 곳에 다녀왔다

blogin.com · 2005-07-30



도시 곳곳에서 아찔한 "중세의 매혹"을 느낄 수 있는 곳. 잔잔한 종소리, 그리고 아련한 갈매기 우는 소리가 인간의 소음에 지친 귀를 감싸 안는 곳. 잔 다르크의 마지막 숨결, 그리고 그녀가 남긴 재가 흑사병에 희생된 사람들의 넋과 더불어 남아 있는 곳. 모네에게 "인상"을 준, 그리고 내가 본 중 가장 큰 성당이 있는 곳. 그 곳, 루앙.

Merci à 미영!

그리고 여기에도


디에프의 바다. 눈이 시리게 푸른 바다가 아니어도, 눈부시게 흰 모래 사장이 없어도 좋았다. 파도가 자갈들을 간질이자 참다 못한 자갈들이 데굴데굴 굴렀다. 하늘에선 갈매기가 고고하게 날고 있었다. 결코 떼지어 몰려 다니는 법이 없는 저 갈매기들, 저들이야말로 조나단 리빙스턴의 후예가 아닐런지.

—박쥐

몇 가지 변화들

blogin.com · 2005-07-19

동생 부부와 그들의 친구와 함께 있었던 1주일을 포함해서 엄마와 보낸 2주일 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엄마가 도착한 첫날 밤, 나는 매트리스를 올려 놓은 반 2층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 굴러 떨어졌다. 덕분에 양 팔뚝에 지중해빛 멍이 들었다. 다음날 런던에서 테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때마침 런던에 도착한 동생 부부로부터 전화로 전해 들었다. 그들이 런던 공항에 도착하기 2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루에 로댕 미술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한꺼번에 도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던 나는 소식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 전에도 엄마와 싸우면서 울고 있었다. 내가 무심코 동성애 관련 발언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는 나더러 "네가 그런 생각도 하는 앤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쉴새없이 싸우고 또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싸움의 원인은 대부분 각자의 산책/여행 패턴의 차이였다. 나는 길을 가다가 곧잘 헤매고, 헤매면 헤매는대로, 아니 헤매기는 하되 낯설고 새로운, 때로는 음침한 골목길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하곤 하는 반면, 엄마는 일단 길을 나섰으면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해야만 한다든지 하는, 뭐 그런 차이. 취향이라기보다는 입장의 차이였을 수도 있다. 파리는 처음인 그들과 파리에서 2년째 산 나, 누나/시누이/딸 얼굴도 보고 구경도 할 겸 해서 온 그들과 시험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도 못한 채 각종 논문에 대한 부담을 잔뜩 짊어진 채 동생/올케/엄마를 귀찮게만 생각하는 나.

동생 부부와 그들의 친구는 그저께, 엄마는 어제 떠났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며. 아빠가 보내온 메일에도 "수고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내가 "수고"한 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일제히 "수고했다"는 말을 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쩐지 가족들 사이에서 오갈 만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미안하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한해 남짓 떨어져 사는 동안, 우리 "가족"은 그렇게 "수고했다"라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2주 동안 바라마지 않았던 대로, 다시, 늘 그랬던 것처럼, 혼자가 되었다. 변한 것은 없다. 몇 가지는 빼놓고. 엄마가 가지고 온 음식물들이 냉장고를 꽉꽉 채우고 있고, 그 안에 김치가 넘쳐나고 있다. 그 동안 못견디게 그리워 했던 기형도와 백석 전집--엄마는 이 두 책을 비행기 안에서 읽으며 "왜 이 아이는 시를 읽어도 꼭 이런 시만 읽을까" 하며 한숨을 쉬었다고 했다--도 되찾았다. 엄마의 조언 덕에, 이 작은 방--아빠의 표현에 따르면, "'좁다'라는 표현도 부족한 좁은 방"--이 예전보다 좀더 넓어졌고, 디오티마는 더 이상 위로 가지를 뻗는 '고문'을 당하지 않고 제 본성에 따라 자라게 되었으며, 행주가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그리고 동생 부부 덕에 새 노트북과 아이포드가 생겼다. 시바와 하품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 덕에, 또 똑지와 그녀의 동생 덕에, 갖고 싶었던 씨디, 담배--내가 좋아하는 레종, 그리고 하품이 선물한, 하품을 꼭 닮아 가늘고 새하얀 독일 담배--, 그리고 맛있는 비타민도 생겼다.

그러고 보니 변한 게 많다. 이제 내가 변할 차례다.

—박쥐

Ma chère Diotima

blogin.com · 2005-07-04



Une fleur... ni du mal ni du bien...mais "par-delà bien et mal"

녀석이 봉오리 두어개를 달고 있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 정도로 꽃을 애타게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다른 봉오리들은 꽃을 피우지 않은채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고, 단 하나만이 살아남아 저리 꽃을 피웠다. 그렇게 해서 그토록 기다리던 꽃을 보고야 말았지만, 그 꽃은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심지어 혐오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보통보다 큼지막한 저 망울에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봉오리들이 세상을 보기도 전에 스러져 갔던 게 다 저걸 살리고 또 저렇게 살찌우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 너야말로 진정한 "악의 꽃"이 아니었더냐.

하. 그런데 아니었다. "악의 꽃"이 지고 난 뒤의 어느날 아침,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새순이 돋고 있었다. 디오티마를 덮고 있는, 내 실수로 스러져 간 히파티아의 숨결이 남아있는 바로 그 흙에서. 나는 왜 그렇게 성급하고 안일하게 그 꽃에게 "악의 이름"을 부여했던가. 무릇, 善도 惡도 모두 사람이 지어낸 바인 것을. 자연의 이치에 견주어 본다면 한없이 하잘 것 없는.

more...



디오티마가 이만큼 자랐다. 한 프레임 안에 잡아내기 힘들 정도로.

그렇다면 나는? 자란 것도, 변한 것도 없는 듯하다. 덜 주관적인 평가는, 곧 있으면 올 엄마나 동생 부부에게 맡길 수밖에. 그런데, 그래도 좀 착한 딸/누나/시누이 노릇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 시간을 뺏기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원망을 듣는 일이 없게끔 각본을 짤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는 걸 보니, 별로 성숙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예전보다 훨씬 간교/간사해진 것 같긴 하다.

* 안부를 묻고 소식을 궁금해 해준 분들께 감사를, 새로운 포스트를 기다린 분들께 미안함을 전합니다.
 
저는 "밥은 먹고 다"닙니다. 그런데 글쓰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네요. 뭐, 포스팅할 시간조차 없이 바쁜 건 아닙니다. 사실 그만큼 바빠야 "마땅하고 옳은 일"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말보다 불어가 더 익숙해지는 경지에 도달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한국말도 불어도 잘 안 되는, 두 언어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상태에 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하겠지요.
 
이 미칠 듯한 더위가 좀 가시고, 지금 날 묶고 죄고 또 옭아매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서 좀 헤어나왔다 싶으면, 그땐 이곳도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수 있겠지요. 아, 그렇다고 블로그를 닫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쉰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블로그가 지금의 무책임하고 불친절한 성격을 당분간은 유지한다는 뜻이지요 (말은 이렇게 해놓고 일주일만에 열혈 포스팅 모드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좀 말려 주시길. "네가 지금 이럴 때냐?" 하면서요).

—박쥐

어머니날

blogin.com · 2005-05-30



엄마가 오신단다. 이제 슬슬 "착한 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롤링백 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일단 집에서 피우는 담배의 양을 줄이는 일부터.

나는 누군가가 엄마에 대해 물을 때면 늘 "아까운 여자"라고 한 마디로 압축해서 대답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를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단순한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녀들이 제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능한 모든 전략들을 구사해 가면서 '살아남아' 온 역사들을 왜곡하고 축소할 소지를 다분히,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안고 있지 않은가? 이 땅의 모든 딸들이 어머니의 불행한 삶을 보고 자란 나머지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을 인생의 유일한 신조로 삼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모든 사고의 근저에는 단순화 및 일반화 논리와 환원주의, 달리 말하면(나는 분명히 "달리 말하면"이라고 말한다) 지적으로 게으른 태도가 숨어 있다. 아니면, 한 사람의 삶을 세밀하고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고도 그/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만이. 물론, 어쩌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앎'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생각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한 기획이었겠지만. 문제는 그 기획이 쉽게 포기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고, 어슴푸레한 너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 이 욕망이 인간에게 내재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인간의 그 어느 정신적 활동이, 아니, 그 어느 인간사가 가능했겠는가.

오늘은 이곳의 어머니날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보내는 메일에다가 "엄마가 오시면 내 살림살이가 한층 나아질 거라는 생각을 하니 즐거웠다"고 썼다. 그리고 "서른이 다 된 나이에, 그것도 어머니날이랍시고 보내는 메일에 이렇게밖에 못 쓰다니, 저 아직 한참 어리지요?" 라고 덧붙였다. 정말이지 어려도 한참 어리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나를 두고 '어려서 과보호를 받고 자라서 그렇다'라고 말하겠는가?

(그 어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근황
안 보느니만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 이왕 얘기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김에, 내 근황을 소개한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긴 하지만 도저히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글줄이나마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오늘 오후부터 내린 비로 인해 며칠 동안 살인적이었던 날씨가 그 살의를 조금이나마 거둔 덕분이다.

히파티아와 디오티마를 기억하는가? 히파티아는 죽었다. 디오티마는 기형으로 자라고 있다. 꽃은 피어나지 않고 줄기만 길게 뻗어오르고 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초록손"은 내게 유전되지 않은 듯하다. 그 어떤 난초든 간에 그들의 손에 맡겨지면 거기에 꽃이 피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는데. 생명있는 것으로 하여금 딱 제게 주어진 생만큼 살도록 하는 일이 이리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도대체 얼마 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내게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질 수 있을까?

—박쥐

blogin.com · 2005-05-04



바탕 화면과 테마와 템플릿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윈도우가 세상 밖을 향해 열려 있는 창임을 이제야 알겠다. 맘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활짝 열어젖힐 수도 있다는 것도. 문제는 그 창이 늘 그 자리에서 열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이제는 좀 다가가서 열어볼까 하는 마음에 손을 뻗으면, 창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라이프니츠가 옳았다. 세상으로 열린 창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유사-세상을 만들어서 그 세상을 향해 유사-창을 낸 것일 뿐. 사람들도 참, 창 뚫을 데가 없어서 세상을 만들다니.

── 사실 바다도 저렇게 창 밖으로 내다 볼 때나 좋지. 막상 들어가 보라지. 귀에 물이라도 고이면 얼마나 죽을 맛인데. 벌써부터, 아니 아직까지도 들린다. 바닷가에서 득시글대던 갯강구가 줄지어 귓구멍으로 들어와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 그런 걸 보면 이솝 우화에서 제 키보다 훨씬 높은 가지에 달린 포도를 보면서 "신 포도"라며 자위했던 그 여우는 이 유사-세상에서 살아가는/살아남는 법을 간파했던 셈이다. 아, 이 유사-세상에서 유사-창을 통해 받는 위안.
 

—박쥐

허방

blogin.com · 2005-05-03



그러면서 문득 길의 몸을 본 것 같다.
더듬거리며 그 몸을 찾아나설 때가 다시 오고 있음을 안다.
 더 멀리 가야 한다.
 더 큰 고통과 축복의 몸들에게로.
 여전히 내 언어는 불화의 쪽에 있지만,
 내 속에서 오래도록 나를 불러온 허방으로 두려움없이 가야겠다.
 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다.

-2003년 초가을 강원도에서
김선우
 (두 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의 "시인의 말" 중에서)





포스팅이 늦어진 까닭은 특별히 바빠서였다기보다는 계속해서 "언어와의 불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언제는 말과 사이좋게 지내본 적이 있었더냐. 내게 있어 언어란 녀석이 제 기능을 발휘한 적이 있었더냐. 그 기능이 세상과 나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었든 혹은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상념들에 순서와 질서를 부여해서 어느 정도 유의미한 사유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든 간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언어와의 불화는 계속되고 있다. 이 글도, 모니터 위에 새겨진 이 문자 하나 하나, 획 하나 하나가 모두, 내 사유가 언어와 벌인 투쟁의 흔적이요 타협의 산물이다. 언어와 사유의 관계에 관한 소박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라고 타박해도 어쩔 수 없다. 어쩌겠는가, 지금 내 "생각"이 딱 그런 것을.

일 년 전, 나는 어느 시인의 말을 빌어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했었다. 그래 놓고는, 지난 일 년 동안, 주어진 길을 부러 가지 않은 채 서성댔다. 그렇다고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떨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본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살아야겠다"고 했고, 이제는 또 "내 속에서 오래도록 나를 불러온 허방으로 두려움없이 가야겠다"고 말하려 한다. "~(하)겠다"라는 종결 어미를 포함하는 발화는 늘 나를 거치기만 하면 그 수행성을 잃곤 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해 본다, 내 속에서 오래도록 나를 불러온 허방으로 두려움없이 가야겠다, 라고.

몰라서 찾아보니 "허방"은 '움푹 팬 땅'이라는 뜻이란다. 生을 사랑하는 연습을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디플라데니아를 들였는데, 그네들에게는 들어온 첫날부터 허방이 생겼다. 분갈이를 한답시고 원래는 붙어있었던 두 녀석들을 떼어놓은 탓이다. 첫날에 당장이라도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았던 봉오리들이 시들시들해졌다. 이파리들도 마찬가지. 그래도 "죽은 나무에 꽃을 피우는" 심정으로 나름대로 지극히 보살핀 정성이 조금은 통했는지, 디오티마라 이름붙인 녀석은 싹을 틔웠다. 히파티아라 부르는 녀석은, 허방이 더 깊게 패였던 모양인지, 제게 붙여준 이름이 암시하는 운명에 순응하기로 한 모양인지, 여전히 맥을 못추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애초부터 그네들을 통해 내 허방을 메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박쥐

새 - 인상

blogin.com · 2005-04-21



1. 새 시계

아침에 새가 째깍째깍 하고 울었다

지금도 옆에서 째깍대며
쪼아댄다 조여댄다

그리고 어느덧
타들어 가고 있다

2. 비둘기의 정사

퍼덕이며 사랑을 나누는 비둘기를 보았다
도심의 빌딩 밑 처마 아래
그 안타깝고 아득한 곳에서 

서로를 탐하는 거친 날갯짓
부리로 서로를 쪼는 뾰족한 입맞춤
상처를 안기고 다시 상처난 자리를 보듬는 애무
그들의 날개는 하늘을 날 때보다 자유로웠다
그들의 부리는 먹이를 먹고 새끼를 먹일 때보다 처절했다

11년 전 어느 더운날
꼬리를 맞대고 왱왱대며 춤을 추던 잠자리 한 쌍도
그렇게 자유로웠을까
7년 전 어느 여름날 아침
무표정하게 교미하던 강아지 한 쌍도
그렇게 처절했을까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어느 여름날
너도, 또 나도,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우리도 그렇게 처절할 수 있었을까

—박쥐

안드레아 드월킨

blogin.com · 2005-04-13



강가를 따라 뻗은 차도를 지나 걸으며 문득 든 "그래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 그 생각에, 아니 뜬금없는 '살아야겠다'라는 결심보다 '그래도'가 갖는 무게에 흠칫 놀라서 서둘러 돌아와 앉은 저녁, 안드레아 드월킨의 부고를 듣고 http://books.guardian.co.uk ... 457408,00.html> face=바탕 color=#333399>가디언紙의 기사 하나 http://www.andreadworkin.net/memorial/> face=바탕 color=#330099>추모 홈페이지 의 글들을 읽으며 눈물을 훔치다.

살아야겠다.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니, 칸트 선생 말대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이러니, 어찌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쥐

미라보 다리

blogin.com · 2005-04-08


 문득 미라보 다리 생각이 나서
 두 정거장 앞에서 내려 역사를 나서니 
 마침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 여전히 세느강은 흐르고 
 

 강물이 다리 아래로 줄줄 흐르고
빗살들이 쿡쿡 찔러대는데도
 아무런 시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날선 결심이 든 것도 아니다

 어느새 몸에 칭칭 감긴 빗살이 
 혀를 낼름거리며 말했다 
 이래도 안 아플테냐
 좀 아파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 기세에 외투며 머리카락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축 늘어졌건만
 정작 나는 아프지가 않다 
 아프고 싶은데
 차라리 몸이라도 아팠으면 좋겠는데
 아파야 정신이 든다면 정말 아파야 하는데
 이 몸뚱아리는 아플 줄도 모른다
 

—박쥐

세계는 우화다

blogin.com · 2005-03-31



평소 다른 책에서 익히 보아 오던 바와는 사뭇 다른, 둥글둥글하고 어찌 보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기마저 어려 있는 듯한 모습이다. 중년 남성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기처럼 조막만하고 통통한 손에 들고 있는 책에는 Mundus est fabula, 세계는 우화다, 라고 쓰여 있다. 이거야말로 믿기 힘들다. 정녕, 서구 근대 철학의, 합리주의의, 기계론의, 그 무엇보다도 데카르트주의의 창시자(사실상 이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 말고 다른 어떤 수식어가 필요하단 말인가)께서 그런 말을 남겼단 말인가.

철학이건 과학이건 이렇게 공부하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어진다. 표준적인 철학사/과학사 서술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것들이라면 뭐든지. 카르테지앙이 아닌 데카르트, "비판철학"에 앞서 '음수'나 우주 생성론을 연구하던 '과학자' 칸트,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자작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른 시인 맥스웰 등등. 

어쨌든, 제아무리 생뚱맞은 세계-우화-데카르트라는 조합으로 이루어진 미궁이라 해도, 제대로 맞는 길은 아닐 지라도 적어도 갈 만한 길로 인도할 실이 없지는 않을 거다. 문제는 아리아드네를 설득하는 일. 뭐, 못할 것도 없다. 세계가 정말로 우화라면, 그리고/혹은 이 모든 것이 우화로써 설명될 수만 있다면 (사실 이 둘 사이에는 '그리고/혹은'으로 묶일 수 없는 엄청난 존재론적 간극이 자리하고 있거늘).

그림은 1647년경 장-바티스트 비닉스(Jean-Baptiste Weenix)가 그린 것으로, 지금은 유트레히트 미술관에 걸려 있다. 사진 출처는 http://www.math-inf.uni-gre ... bjekte.html>여기 다.

—박쥐

루시드 폴의 신보

blogin.com · 2005-03-23



루시드 폴의 신보 소식을 접하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 가 본 http://www.mulgogi.net> style="BACKGROUND-COLOR: #ffffff" face=바탕 color=#000099>홈피에서 그가 스위스 로잔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 물론 지금은, 그리고 적어도 며칠 동안은, 콘서트 때문에 한국에 가 있겠지만.

루시드 폴이 아닌 조윤석은 그 외지에서 꿋꿋하게, 그러면서도 즐겁게 버텨가고 있는 듯하다. 공연도 안 보러 가고, 여행도 안 다닌단다. 그리고 시를 읽는단다. 그렇게, 그 많은 끼를 다 숨겨놓은 채 음악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듯한 공부만 하고 있단다. 숨길 만한 끼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공식적으로는 공부밖에 없는 나도 안 하고 있는 공부를...!

그의 음반을 전부 다 들어본 것은 아니지만, 들어본 미선이 1.5집이나 영화 <버스, 정류장>의 음악들은 전부 다 맘에 쏙 들었다. '이제 소리 없이 시간의 바늘은 자꾸만 내 허리를 베어와'로 시작하는 "송시"의 가사는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번 앨범 수록곡 "오, 사랑"도 가사가 참 좋다.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http://mulgogi.net/images/love.swf width=500 height=2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PLAY="false" LOOP="false"> 


—박쥐

신성 모독

blogin.com · 2005-03-1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마리테 프랑수아 지르보사의 광고에 대해 법원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신성 모독죄"라는 건데, 돌려 말하면 프랑스 가톨릭 주교회의 반발이 그만큼 거셌고 이들의 파워와 압력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거셌다는(혹은 여전히 거세다는) 얘기다. 이제 보니 이 주교님들, 한국의 유림 할아버지들 못지 않으시다. 설령 레오나르도의 후손이 자신의 조상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거나 조상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소송을 걸었다 해도 이보다 더 코미디일 수는 없을 듯.

저 광고 사진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모두 여성으로 재현하고, 원작 중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남자 모델로, 그것도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어쩌면 젠더를 비튼 이 발칙한 상상이 주교님들을 화를 더 돋궜는 지도. 그런데 주교님들, 그 "신성"이라는 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단 말입니까? 아무리 땅에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지만, 겨우 저 정도로 모독을 받을 만큼 떨어졌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주교님들이 그 사실을 몸소 증거해 주시는군요.

—박쥐

봄날 새벽

blogin.com · 2005-03-13



남들은 그것도 일이냐고 핀잔을 줄 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일이라면 일이었던 일 하나를 끝내고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봄내음을 맡았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온 도시 안에서 가장 음습한 공기로 가득찬 그곳에 봄이 가장 먼저 찾아들었을 줄을. 밖으로 나와 마신, 여전히 차가운 밤공기에서 포근함이 느껴졌다. 지하철 문틈으로 살살 들어온 봄바람은 어느새 나를 그렇게 에워 싸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또 일이 생겨 있다. 역시,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던 게다. 아니다. 봄날은 왔는데, 아직은 새벽인 게다.
 

—박쥐

Liseuse 5

blogin.com · 2005-03-03

Jean Hélion, Lecture pour la fin des choses, 1979
Galerie' target='_son'>http://www.artnet.com/galer ... trigano.html>Galerie Patrice Trigano 홈페이지 에서 가져오다.

퐁피두에서 열린 장 엘리옹의 회고전을 보고 맘에 든 나머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찾아가 발견. 나의 "책 읽는 여인의 초상 콜렉션"에 합류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도다.

참고로 나는 이 사람의 이른바 구상 시기 작품들--엘리옹은 초기(1930년대)에는 추상 미술의 선두 대열에 섰다가 점차 구상/순수 회화로 돌아선, 그러니까 현대 미술사의 흐름에 역행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이 참 좋았다. 심지어 여성의 성기를 의도적으로 형상화한 것임에 분명한, 그래서 평범한 여성 관객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도 여성의 성기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작가의 호박 페티쉬마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물론, "그렇다면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호박만큼이나 줄기차게 등장하는 바게트는 남근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그것마저도 사랑하겠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없지만. 나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에이,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너무 재미가 없어지잖아." 

—박쥐

왜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blogin.com · 2005-02-23


오늘따라 이곳 바람이 유난히 매섭다 했습니다. 아침부터 눈발이 제법 오랫동안 흩날리길래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살얼음을 조심스레 밟아가며 힘겹게 집에 와서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미뤄둔 숙제를 마친 뒤에 열겠다고 다짐했었던 포도주 한 병을 따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팬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배우로서 좋아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팬이었다면 그 절망감과 안타까움을 어찌 달랠 수 있었겠습니까. 팬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데.

당신이 재능있고 촉망받는 여배우였다는 사실보다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참 아프게 합니다. 당신이 유서에 남긴 말들, 일에 대한 열정과 욕심,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 하나 하나가 가슴 곳곳을 마구 후벼댑니다.

왜냐고는 묻지 않겠습니다. 부디 지금 계신 그곳에선 행복하시길.

—박쥐

푸앵카레, 합리주의, 개입

blogin.com · 2005-02-22

푸앵카레가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 그는 동료 과학자들과 더불어 드레퓌스를 모함한 쪽에서 제출한 자료들이 증거로서 불충분함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푸앵카레들에 따르면, 反드레퓌스파들의 주장은 주장의 근거로서 제시된 자료가 필적학적으로 볼 때 위조된 것임에 분명할 뿐 아니라 통계학을 부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점에서 논증상으로도 오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푸앵카레를 졸라처럼 반유대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당대 지식인 그룹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그가 이 사건에 개입했던 것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과학자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자각에서가 아니라 과학의 몰이해 및 오용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다분히 과학주의적인, 그러니까 과학에 관한 한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의 문제와 한 인간으로서의 과학자를 사회 내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늘 산뜻하게 연결되지는 않는 듯하다. 과학에 대해 상아탑 속에서 오로지 저 밖의 진리와만 교통하는, 즉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그 어떤 것과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상을 가진, 그러니까 아주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과학관을 지닌 과학자라고 해서 사회와는 무조건 담을 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 대해 아주 급진적인 입장을 가진,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연구 활동은 다른 모든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실천이다"라고 주장하는 구성론자/과학사회학자라고 해서 늘 정치적으로 진보 혹은 좌파에 속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과학에 관한 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프랑스 인식론자 그룹만 봐도 그렇다. 바슐라르의 경우, 과학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늘 잊지 않았지만 사회 현실을 향해서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킨 축에 속했었던 반면, 코를 씻고 맡아 봐도 도무지 사람 냄새라고는 나지 않는 가장 추상적인 학문인 수학과 논리학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던 장 카바이예스는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일하다가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나치에 의해 총살을 당했을 만큼 열렬한 참여론자였다.

내 경우, 과학에 관한 한 한때는 파이어아벤트를 추종할 만큼 급진적인 입장으로까지 갔다가 프랑스 인식론에 경도되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이들의 과학에 대한 "합리적 신학"에 대체로 동감하는 편이다. 이성에 대한 믿음은 과학 활동의 원동력으로서나 사회의 변혁을 추진하는 힘으로서나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거기에서 "합리주의적 개입/참여(engagement rationaliste: 바슐라르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의 개념이 나온다.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理性에 合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과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合理적이다. 이성의 한계 언저리에서 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박쥐

우박

blogin.com · 2005-02-14



또도독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린 우박 알갱이들이 지붕 위를 또르르 굴러내려 쌓이니 저리 되더라. 저 위를 걸으면 자갈 밟을 때 나는 소리가 날까? 내 흙투성이 발밑에 자갈들이 제 몸을 부비댈 때 내는, 그 뽀득뽀득 하는 소리가?

—박쥐

말과 소리

blogin.com · 2005-02-09

아마 조지 버나드 쇼였을 것이다, 영어의 무규칙적 발음 체계에 관해 특유의 신랄한 어조와 번득이는 재치를 십분 발휘해 비웃었던 사람은. "ghoti"라는 단어가 뜻하는, 아니 소리내는 말은 무엇일까? 정답은 fish 다. tough나 laugh에서 gh가 [f] 발음이 나고, women에서 o가 [i] 발음이 나고, contemplation, concentration 등에서 ti가 [sh], 그러니까 적분 기호처럼 생긴 발음 기호로 나는 소리를 낸다는 데에 착안하면 이 답이 나온다.

불어는 그래도 이런 식의 발음상의 예외가 영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다. 발음을 제대로 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적어도 특정한 하나의 단위 음절에 대해서는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소리가 있다는 점에서는 영어에 비해 훨씬 규칙적이다...

... 라는 것이 내가 예전에 가졌던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리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네들이 외국의 고유 명사를 들여와서 자기네 식으로 바꿔 부르는 데에는 어떤 규칙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절실하게 깨달았다.

한 컨퍼런스에 갔을 때다. 이날은 누벨 바그 출신의, 이제는 노장 반열에 든 감독 앙드레 테시네(André Techiné)가 초청됐다 (사실 이 감독의 이름도 테키네인지 테시네인지 헷갈렸었다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됐다). 논의가 진행되던 중 계속해서 이름이 브레슈임직한 사람이 거명됐다. 테시네는 브레슈티앙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브레슈적인 거리 두기/낯설게 하기는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등등. 중반 쯤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게 브레슈가 아니라 브레히트였음을.

이런 식의 고유 명사 제멋대로 바꿔 부르기가 발음 상의 규칙 이탈/무규칙 현상과 결합되면 외국인들은 말 그대로 환장할 수밖에 없다. 특히 나같이 아직까지 불어를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닌 데다가 음성보다는 문자로서의 불어에 보다 친숙한 사람에게는. 문제는 뭐냐 하면, 같은 알파벳 문화권 내에 있어 표기 방식을 바꿀 필요 없이 원문자 그대로 들여오면 되는 명사들의 경우, 언어 사이의 장벽을 넘으면 너무도 낯선 이름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힐베르트가 영어에서 힐버트가 되고 불어에서는 일베르가 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영어에서는 아리스토틀이지만 불어에서는 아리스토트가 되듯이.

 
차라리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를 벙드르디라고 바꾸듯이 바꿨으면 속이 편하겠다. 로빈슨이 로뱅송으로 바뀐 것은 그래도 애교에 속한다. 마이켈슨은 미셸손, 미켈란젤로는 미켈 앙주(Michel-Ange, 내가 사는 거리 이름인데, 사실 이 이름을 발음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미셸 앙주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뮌헨은 뮈니크, 베를린은 베를렝, 흄은 윰(처음에는 융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 홉스는 옵스, 등등 도대체 내 눈에는 아노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얘길 눈크 언니에게 했더니, 그녀는 맞장구를 치며 '캉트'와 '아이데게'의 예를 추가해 주었다. 알다시피, 혹은 짐작하다시피, 전자는 칸트고 후자는 하이데거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주제의 대화/토론을 꽤 자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이런 주제는 보통 "그렇다면 한국어는 어떤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이 질문은 두 가지 다른 종류로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 : 하나는 발음과 그 발음을 표기하는 체계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외래어를 수용하고 표기하는 방식에 관한 것. 전자에 대한 나의 답은 이러하다 : 한국어의 경우, 말그대로 "읽는대로 소리나는" 언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그런 만큼 오히려 발음을 정교하고 정확하게 할라치면 상당히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음은 후자에 대한 답 :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박쥐

또, 다시, 이제는, 더 이상

blogin.com · 2005-02-06



또. 또 다시. 그러면서도 원망하고, 또 후회하고.

이제는, 정말로 내 삶을 찾아야 할 때.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더 이상은.

—박쥐

마야 데런의 거울

blogin.com · 2005-01-29

퐁피두 시네마에서 마야 데런(Maya Deren)의 예술 세계를 그린 다큐멘터리 《마야 데런의 거울속 In the Mirror of Maya Deren (2002)》을 봤다. 추위가 유난히 맹렬했던 지난 주 금요일에. 사실은 볼 생각이 아니었던, 보려던 다른 영화를, 영화관을 못 찾아서 보지 못하는 바람에 꿩대신 닭으로 삼아 본 영화였는데, 이 영화와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본 《클린》은 꿩 이상의 닭이 되고도 남았다.

 

그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나로서는, 키예프 공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가족을 따라 뉴욕으로 망명한 뒤 선구적인 실험 영화 감독--루이 브뉘엘과 동급으로 취급되는--이자 탁월한 인류학자--아이티의 신화와 전통 의식인 부두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로 이름을 날린 이 멋진 여성에게 그저 감탄하고 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저렇게 아름답고 열정적이고 재주많고 똑똑한 언니를 여지껏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중간에 잠깐씩 비춰진 그녀의 작품들 역시 그러한 감탄과 통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사실, 만약 그녀가 "마야"라는 예명에 그 이상 잘 어울릴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외모를 갖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로 감탄하거나 통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각종 영화 및 기타 예술 이론들에 깊이 천착한 듯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그러한 이국적인--동/서양 어디에도 속한 것 같지 않은-- 외모를 천박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이질감이 들지 않게 담아내는 솜씨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나르시시즘이다. "작가"들이 은근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기 합리화 경향이나 자기애 성향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조차도 무릎을 그저 꿇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거다. 어떻게 하면 카메라를 통해 사람 몸의 움직임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였는데, 그러자니 그 누구보다 '몸'을 '몸'으로 잘 표현할 줄 아는 그녀 자신을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서 고다르의 "카메라는 여자들을 좋아한다"는 말은 데런에게로 와서 참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명제가 된다.
 

흑.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한지. 그리고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세상엔 왜 이리도 많은지.

사진은 MoMA' target='_son'>http://www.moma.org/collect ... _media_016.html>MoMA 에서 가져왔다.

—박쥐

다락방 뉴스

blogin.com · 2005-01-29

첫 번째 소식입니다. 하늘과 가까운 다락방을 동굴로 삼은지 1년 1개월째를 맞고 있는 박쥐가 사흘 전 무사히 파리에 도착해 현재 한 호텔에 머물고 있는 벼리, 토리, 토토, 엘렌을 찾아가 "누룽지 동동주는 완전히 식당에서 주는 누룽지 사탕 맛이었어", "나한테 전화를 해줬음 좋겠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들 처음엔 그렇지.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류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어서 빨리 좋은 보금자리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요즘 박쥐가 몸담고 있는 업계는 상대성이론 발표 100주년을 맞아 떠들썩합니다. 저러다가 아인슈타인 서거 100주년 때는 뭘 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올해를 맞아 상대성이론의 "특허권"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논의가 프랑스에서 상당히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에서 유독 열의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 당사자 중에, 이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마지막 "보편적 과학자"라는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푸앵카레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박쥐의 경우,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네들의 은근한 국수주의/애국주의가 재미있기도 하고 뭐 그런 입장이라네요.

마지막으로 날씨입니다. 몇 주전 체감 기온이 뚜욱 떨어진 뒤로 좀처럼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그래도 눈다운 눈이 내렸습니다. 물론 쌓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게 어디겠습니까. 많은 걸 바래선 안되겠지요. 다행히 눈이 내리던 시점에 눈이 즐거워할 만한 장소에 있었던 박쥐는 파리에 예쁘게 눈이 내리는, 흔치만은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내리던 눈이 박쥐의 눈 속으로 들어가서 눈에서 흘렀는지 하늘에서 흘렀는지 모를 눈물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는군요. 

—박쥐

파업의 계절

blogin.com · 2005-01-22

이곳 저곳이 파업으로 들끓고 있다. 그저께는 수업을 들으러 갔더니 강의실 문이 굳게 닫혀 있고 건물 전체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더니, 어제는 리포트를 내러 갔더니 사무실 문은 열리지 않고 대신 문앞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교통이 마비된 관계로 사무실 문을 닫습니다."

"사회 운동(mouvement social)"과 "파업(grève)"이 주는 어감의 차이는 크다. 사회 운동은 지하철 운행에 불가피하게 차질이 빚어지게 된 이유(raison)가 되지만, 파업은 비정상 운행의 원인(cause)이 된다. 전자는 유목적성, 그리고 그 목적의 정당성을 가진 행동으로 인정되는 반면, 후자는 노동자들이 일하기 싫어서 꾀를 부리는, 그러면서도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치부되곤 한다.

교통이 마비된 거랑 자기네들 일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람, 하고 중얼거리면서 돌아서다가 문득 작년에 있었던 연구원들의 파업이 생각났다. 나는 사건이라면 사건이랄 만한 이 일에 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대부분이 국립 연구기관에 소속돼 있는 프랑스의 연구직 종사자들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단 행동에 나섰다는 사실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던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과학이 경제적 지원의 부족으로 인해 영미권의 그것에 비해 뒤쳐지고 있다"는 이들의 문제 의식이 제 3세계 출신 이방인인 나에게는 다소 문제적으로 느껴졌던 것. 그러니까, 인생의 대부분을 실험실에서 보냈을 법한 백발의 연구원들이 가운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의 학생들과 손을 맞붙잡고 레오 페레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과, 한 젊은 과학자가 "재능있는 학생들은 월급이나 기타 등등의 면에서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미국으로 떠나고 있어요. 이공계로 진출하는 프랑스 학생의 숫자는 점점 줄어가고 있고, 그 빈자리를 아시아나 그밖의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채워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미국에 비해 지금보다도 더 훨씬 뒤지게 될지도 몰라요" 하고 인터뷰하는 장면은,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쉽게 오버랩될 만한 것들이 아니다.

과학자와 같은, 분류하기가 상당히 애매한 "지식 노동자" 부류들은 어떤 방식으로 파업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한 연구자가 파업에 동참했는데 그 기간이 아주 중요한 학회와 겹쳤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학회에 참석해야 할까 아니면 불참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여기


2007년 11월 21일에 다시 살리다. 살렸다고는 하나 원래 살아있던 것을 살린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박쥐

學하는 이의 임무

blogin.com · 2005-01-16



"모른다", "알 수 없다"라고 말하기란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이 말은 오직 죽을 힘을 다해, 온 힘을 다 바쳐서 연구한 뒤에야 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모든 學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學하는 이의 가장 값진 임무다.

--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중에서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단지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여기에서부터 지적 태도와 연관된다)보다는 오히려 그 사실을 깨닫기(여기까지는 지적 능력 -- 타고난 '재능'보다는 스스로 갈고닦거나 쌓아올린 '내공'에 가까운 의미에서의--과 연관된다)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왜 모르겠는지, 어떤 점에서 모르겠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제대로 모를   때에만 비로소 깨달음, 제대로 된 앎을 얻을 수 있다. 

사실 모름을 받아들이는 것과 모름을 깨닫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름을 제대로 깨달은 경우에 있어서는, 오직 그 경우에 있어서만 그러하다. 모름지기 모름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모름을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한 자기 반성은 철저한 자기 인식 끝에 온다고.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여지껏 그걸, 그것도 몰랐었다, 나는. 근데 왜 하필 지금 그 사실을  깨달은 거냐구. 리포트 제출 기한을 하루 넘긴, 자체적(!)으로 정한 기한을 2일 남겨둔 이 시점에.

—박쥐

힘을 내요, 별톨 커플!

blogin.com · 2005-01-14



나는 "애완동물"이라는 개념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보들레르에게서나 고양이를 부탁해, 캣츠, 심지어 고양이대학살 등에서의 고양이가 갖는, 아니 사람들이 고양이에게 부여한 상징적 의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고양이를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었다. 결국엔 실패했지만.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고양이 사진을 볼 때면 내 눈은 슈렉2 의 장화 신은 고양이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그것이 된다. 그리고 여전히 개보다는 고양이를 덜 싫어한다.

출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별톨 커플. 냥이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하다. 나로선 저들의 냥이 사랑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심지어 돕지는 못할 망정 "냥이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하고 궁시렁거리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쨌든, 힘들 내, 별톨 커플. 그리고 토토, 에리카, 엘렌과 그녀의 형제 자매들도.

—박쥐

이웃집 남자

blogin.com · 2005-01-07

나는 아직도 그의 얼굴을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꽤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설거지를 할 때 휘파람을 분다든지, 2주에 한 번꼴로 남자 친구를 초대해서 같이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동네 술집에 다녀오곤 한다든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냄새가 기가 막힌 요리를 만들 줄 안다든지, 주말의 대부분을 집에서 혼자 보낸다든지, 뭐 그런,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어쩌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을, 그런, 내밀하다면 내밀한 사실들.
 
그 역시 나에 대해서 꽤 많은 걸 알고 있었으리라. 내 짐작이 맞다면, 그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내 방의 1/4가량을 볼 수 있다. 늘 음악을 틀어 놓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음악들에서 도무지 취향의 일관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상당히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싸구려 전화기를 가졌다는 것,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여간해서는 창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 등.

공기가 유난히 차갑고 맑았던 그날 밤, 나는 별을 보려고 창문 밖으로 몸을 길게 내밀었다. 비가 그친 뒤여서 그랬을까? 그믐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까? 별이 그렇게 또렷하게 빛나는 광경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오래전에 받아둔 천문학 잡지에 실린 겨울철 별자리표를 끄집어냈다.

창이 남으로 뚫려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내게 있어서만큼은 북두칠성보다도 더 확실한 별자리 지표였던 터여서 그랬는지, 오리온 자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베텔게우스, 리겔, 그리고 그 옆의 시리우스가 보였다. 어릴 적 읽은 "별을 훔친 마법사"라는 미국 동화가 생각났다. 오랜 동안의 연구 끝에 별을 훔쳐다가 병 안에 가두는 비법을 알아낸 그가 제일 먼저 건드린 것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 세 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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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게 무슨 별이에요?
- 시리우스에요.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
- 저건요?
- 어디 보자, 쌍둥이 자리네요. 보통은 잘 안 보이는데.
- 그럼 이건요?


서쪽 방향으로 눈을 돌리려던 찰나, 시리우스보다 더 밝은 빛이 내 이마를 스쳤다. 차라리 불꽃이었을까. 이마를 뚫고 들어와 온몸을 태운 한 줄기 불꽃. 그때, 아주 오래전 그때의, 그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처럼. "아무리 당시의 외국어 표기법을 감안한다 해도, '키쓰'는 시어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키스가 날카로울 수가 있을까?", "날카로운 것은 첫 키스인가 아니면 추억인가?" 따위의 하찮은 문법적 의문을 단 한숨에 날려 버렸던. 키쓰가 날카로울 수 있음을, 아니, 날카로운 것이 진정한 "키쓰"임을 깨닫게 해줬던.

눈을 떠보니 그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오래전 그때처럼. 창문을 타고 지붕을 넘어서. 이렇듯 가뿐하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 6~7년이라는 시간도 사실은 이렇게 가뿐히 넘을 수 있는 것이었거늘, 왜 몇십만 광년이라는 시간과 거리를 지나서 예까지 온 별빛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렇지만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질문 보따리를 풀지 않았다. 언제 왔느냐고,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 "키쓰"가 무슨 의미였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결코.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박쥐

다니엘 쉬크의 생 루이 섬

blogin.com · 2005-01-05

얼마 전에 파리' target='_son'>http://www.mep-fr.org/actu/ds.htm>파리 MEP에서 보고 온 다니엘 쉬크(Chic가 아니라 Schick)의 작품들. 그의 "작품 무대"는 시테 섬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섬, 일 생 루이다. 카메라 렌즈, 자전거 백 미러를 통해 그가 들여다 본 세상은 저렇듯 애처롭고, 애틋하고, 애잔하다. 차가운 살결같은 세상, 그 세상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길, 그 세상을 향해 내미는 차가운 손길. 저 백 미러에는, 어쩌면,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라는 말이 조그맣게 쓰여 있을지도. 차가운 눈길과 손길이라고 저 차디찬 세상을 어루만지지 못할쏘냐.

아. 이렇게 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면...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백야"인지. 근데도 왜 이리 깨질 못하고 있느냔 말이다. 제발 좀 깰 때, 깰 데서 깨라구! 그리고 늘 깨어 있으라구!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