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30일 금요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blogin.com · 2004-04-30

정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런데 할 수가 없다. 이공계 위기론을 얘기하면서 교수가 "요즘 라보(여기서는 연구실/실험실을 "랩"이라고 하지 않고 "라보라투아 laboratoire"를 줄여 "라보"라고 한다. 이런 식의 줄임말들--사전에 절대 나오지 않는, 심지어 "은어/속어" 사전에도 나올까 말까 한, 학생들/교수들/연구원들 사이의 은어들--을 익히는 데에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들을 봐라. 동양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순수한 프랑스 애들은 이공계에 가려 하지 않는다. 이게 다 국가적 지원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냐" 하고 말했을 때, 그리고 한 학생이 "맞아요. 내가 있던 라보에도 일본, 중국, 한국에서 온 애들이 득시글했어요" 하고 맞장구쳤을 때, 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더라도 하고 싶은만큼 하지는 못한다. 교수가 소논문 주제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했을 때, 난 오래 전부터 고민해 왔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뉴턴/라이프니츠 - 무한소를 중심으로 한 무한 및 연속성 개념 - 근대적 시,공간 및 운동 개념 - 자연의 수학화가 그것이었다. 사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자료도 꽤 많이 찾아 모았었고, 그리고 이곳에 와서 수업 등등을 통해 그 중요성과 심각성에 확신을 얻기도 했던 터였다. 그런데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결국 다른 주제를 택해야 했다.

심지어, 하고 싶었던대로는 고사하고, 하고자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을 내뱉기도 한다. 교수가 17, 18, 19 세기 과학사의 특징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을 때, 난 너무도 간단하게 "글쎄요, 특별한 차이는 잘 모르겠는데, 보통 사람들은 17세기 과학 혁명기의 수학/물리학에서의 성과들을 18세기에 정립/확립해 나갔다면, 19세기에는 그러한 성과들을 수학/물리학이 아닌 다른 학문들과 다른 산업에 적용했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잘..."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교수는 "그래요, 보통 그렇게들 얘기하는데, 아니죠. 거기에 의문을 가지는 게 당연해요." 하고 말해주었다. 아! 내가 원래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는데. 평소엔 그런 식으로 확 싸잡아서 말하는 걸 제일 경계하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었는데. 질문 자체가 무리가 있었음을, 과학사에 대한 접근에서만큼은 그렇게 거시적이고 일반적인 시대 구분이 무익함을 좀더 강조하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말했어야 했는데, 난 그만 그런 식의 통상적인 구분만을 길게 풀어 놓고 만 것이다.

내가 모국어로 말하고 쓸 때도 말보다는 글을 더 편안하게 느끼고, 그래서 전화 통화보다는 채팅을, 채팅보다는 이메일 주고 받기를, 이메일보다는 어디에든 혼자 끄적이는 일을 선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 와서 살다보니 그 말과 글 사이의 간극이 더 커졌고, 그 간극은 날로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말과 글을 포함하는 언어와 사고 사이에도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혹은 거리를 걸으면서, 수업을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그 모든 생각들을 어떻게든 담아두고, 그것들을 집에 들어오자마자 포스팅하려 애썼던 것은 이를 막아 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블로깅 중독은, 이러저러한 고립무원의, 언어도단의, 유구무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고, 어쩌면 생존 전략이었다. 

정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내 머릿 속을 스치고는 그냥 새처럼 달아나버리는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 싶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프랑스 과학사/인식론에 대해서, 이곳에 와서 (재)발견한, 과학혁명기 이후 18세기의 놀랍도록 풍부한 과학사적/철학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콩트나 헤겔의 과학철학사적 가치에 대해, 프랑스 칸트 철학 연구의 특수성에 관해, 앙리 푸앵카레, 피에르 뒤엠, 장 투생 드장티, 자크 메를로-퐁티 등 숨은 보석같은 과학철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헌책 시장, (헌)책방, 라디오, 보험, 도서관, 음악, 영화, 음식 등 살면서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행복하게 부딪치게 되는 것들에 관해서도.

그런데 이렇게 멍석이 깔려 있는데도, 도대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예전엔 말을 제대로 못하는 거나 생각을 맘껏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순전히 성격 탓이라고 나름대로 자위했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말" 때문이 아니었던 거다.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하고 사고를 논리적으로 하지 못한 탓이었던 거다. 애꿎은 연장 탓만 하는 실력 없는 목수처럼. 철학도로서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설명을 못하겠어" 하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니.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다.

—박쥐

2004년 4월 28일 수요일

그가 피를 부른 이유

blogin.com · 2004-04-28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은 피로 붉게 도색된 영화다. 나는 사람의 피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피투성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감독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피를 가장 잘 형상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이 연구했음에 틀림 없다. 영화의 모든 장치가, 심지어 배우들까지도, 오로지 피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쓰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색 대비다. 핏빛의 피사체는 배경이 초록색일 때 가장 돋보인다는 것이 중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배운 정설이고 또 광학에서도 입증된 사실인데, 이 영화를 보니 그 정설/사실이 비로소 진실처럼 느껴진다. 그 진실은 "징그러운"과 "싱그러운"라는, 각각 적색과 녹색에 대해 흔히 붙는 형용사 사이의 차이에 있다. "님"과 "남"이 겨우 점 하나 차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엄청난 간극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초록빛 냇물이 찢긴 아킬레스건에서 흘러나온 피로 검푸르게 물드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아주 밝은 청록색으로 물들인 신하균의 손끝에서는 붉은 핏줄기가 쉴새없이 뿜어져 나온다.

물론 영화에서 피를 비추는 방식에 관한 한 정석이라 할 만한 것은 따로 있고, 박찬욱도 이를 무시하지 않는다. 핏빛으로 긴장감이나 공포감을 조성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새하얀 천을 피로 적시는 것일 게다. 물론 B급 영화 매니아라는 박찬욱 감독은 피가 철철 흘러 넘치는 영화들을 싫증날 만큼 봤을 터이고, 그런만큼 그러한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다 썼을 리 만무하다. 기억나는 것은 배를 움켜쥔 신하균의 손가락 사이로 핏방울이 새어나와 하얀 운동화 위로 뚝 떨어지는 장면 정도.

그런데 영화에서 피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시각적 효과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피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미묘한 대비들 때문이기도 했다. 피와 물, 피와 오줌 또는 다른 배설물 등등이 그것이다. 영화 속 남자들--신하균, 송강호, 장기 브로커, 짜장면 배달부--은 대부분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반면, 여자들은 물에 빠지거나--송강호의 딸, 신하균의 누나-- 피가 아닌 다른 체액(오줌)을 쏟아내고--배두나-- 죽는다. 그런가 하면 송강호에게 강제 해고를 당한 뒤 가족과 한꺼번에 자살한 노동자의 입가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토사물이 묻어 있다. 여자-물과 관련해서라면 또 다른 정교한, 어쩌면 진부할 지도 모를 분석이 필요하겠으나, 그녀들의 물이나 노동자의 비소섞인 토사물이 피만큼이나 진한 것만은 틀림없다. 이쯤 되면, 전자가 후자에 "대비"된다기보다 후자 덕에 전자가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왜 피일까? 나는 혁명이라는, 이제는 너무 낡았거나 아니면 너무 흔해진 말을 떠올렸다. 혁명이 피를 필요로 하던 시대는 지났다고들 한다. 이 말은 (1) 더 이상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2) 혁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언뜻 보면 박찬욱은 (1)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혁명"을 운운하는 배두나는 그다지 결연하지 않은 자세로, 아니 시시껄렁한 태도로 "재벌 해체, 미군 축출"를 침뱉듯이 말하면서 "찌라시"나 뿌리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혁명적 무정부주의 그룹"은 외견상 공공의 적을 처단하는 테러리스트라기보다는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을 대변하는 조폭에 가깝다. 그런 만큼 '혁명'은 이제 사어에 가까운 말이 됐고, 또 '피'와는 아주 멀어지게 된 것이다.

혁명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면, 그것은 (2)에 한해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의 혁명은 너무나 흔해빠진 말이 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에서처럼, 피를 흘리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흘린 피를 유의미하게 만들 유일한 통로인 "혁명"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피는 그저 죽어가는 자가 마지막으로 쏟아낸 배설물일 따름이다. 그/그녀가, 비록 입으로 혁명을 말하지 않았을 지 몰라도, 자신의 온 삶과 온 몸으로, 혁명이 당위적임을, 필요함을, 절실함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찬욱은 단순히 피튀기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이, 그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자신의 "약자에 대한 감수성"에 알량한 자기 만족을 느끼거나 혁명에 얽힌 트라우마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하려는 이들과 차별화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식으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박찬욱의 "순수했을" 지도 모를 의도를 오도하려는 것은, 그가 그저 뒷걸음치다가 우연히 똥을 밟듯이 저 모든 것을 쏟아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어떤 막연한 추측 혹은 기대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화 전체를 도배하고 있는, 사람 몸에서 흘러나온 그 많은 찐득찐득한 액체들이 내 가슴 속에 이토록 진하게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쥐

2004년 4월 24일 토요일

2004년, 4.19의 의미 : "위마니떼" 창간 100주년

blogin.com · 2004-04-24

또(!) 며칠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어제 오랜만에 외출했었다. 오후 느즈막히 집을 나서면서, "아뿔싸, 이번에도 놓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평지가 실리는 <르몽드> 금요일판을 사려면 좀더 서둘렀어야 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김화영 선생이 <세계의 문학>에 미셸 투르니에를 인터뷰하고 실은 기사를 본 이후부터, 투르니에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빼놓지 않고 본다는 금요일자 <르몽드>는 내게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제 그 대상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게 됐는데도 여지껏 단 한 번도 손에 넣어보질 못했으니, 완전히 에우리디케를 눈앞에 두고 놓쳐버린 오르페우스 꼴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대부인 장 조레스(Jean Jaurès)가 창간한 <위마니떼l'Humanité> 100주년 기념호가 잡지/신문 판매대를 장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창간 100주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기념일이 지났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었다. 값이 다소 비싸긴 했지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덜컥 집어 들었다. 가게를 나서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 1유로에도 벌벌 떠는 주제에, 그런 과욕을 부리다니. 그치만 사실 과욕을 부릴 만도 했다. 내가 원래 이런 식의 "이벤트"에 다소 약한 데다가 책에 대한 욕심도 좀 있는 것이 사실이나,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기념호가 웬만한 현대사 책만큼의 구실을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약칭/애칭으로 "위마"라고도 불리는 이 잡지에 대해 아주 좋은 인상만을 가지고 있다. 첫인상은, 아이러니칼하게도 광고(맨 위의 그림)에서 비롯됐다. 카피가 정말 걸작이다. 이상 세계에는 <위마니떼>가 존재하지 않을 거란다. 두 번째 인상은 홈페이지( ' target='_son'>http://www.humanite.fr>http://www.humanite.fr )에서 왔다. 다른 언론 사이트들이 최신 기사를 제외한 모든 기사를 유료로 제공하는 반면, <위마니테>의 모든 기사는 공짜다. 지난 세월이 얼마인데, 그리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창간 당시의 정신을 이렇게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 때문에 운영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참으로 놀랍고 애틋하기 그지 없다. 다음의 인상을 받은 것은 에릭 로메르의 신작 <삼중 간첩>에 나온 한 장면에서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침에 길을 나서다 신문을 코에 박은 채로 걸어가는 이웃과 마주친다. 그 장면에서 선거에서 공산당이 승리했음을 알리는 신문이 클로즈업되는데, 바로 그 신문이 <위마니떼>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아내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라는 것, 알고 있었어. 아침에 보니 그가 <위마니떼>를 읽고 있더군."

100주년 기념호를 들여다 보려는데 날짜에 시선이 머물고 말았다. 창간 기념일이 4월 19일이었던 것이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그래, 4월은 그런 달이었지. 진달래가 피고, 썩은 땅이 라일락을 피워내고, 4.3이 있고, 4.19가 있는. 그러면서 메이데이와 5.18을 맞을 준비를 시작하게 되는. 때와 장소를 달리했던 그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어쩌면 그리고 절묘한 순서로 일어났는지. 4월을 지내면서 겨우내 잊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 둘씩 불러내다 보면, 어느새 5월. 그런 의미에서, 제비가 한 마리 온다고 해서 봄인 것은 아니라는 말, 맞다. 다만 거기에는 한 마디가 덧붙여져야 한다. 4월이 와야 봄인 것이다.

"언론"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학부 때 꽈내에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신문을 만든답시고 있는 고민 없는 고민 다 만들어내서 하던 시절, 그 고민의 대부분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모든 언론에 있어 최우선의 과제는 진실이나 사실에 대한 전달이겠으나, 그건 어찌 보면 기본적으로 성실성 혹은 양심의 문제다. 기본/근본 바탕이라는 얘기다. 그보다 매달려 싸워야 할 문제는 어떤 사실을 선택하는가, 선택된 바를 어떻게 전달하는가다. <조선>을 비롯한 일부 언론들의 문제는 전자의 조건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겠으나, 사실 후자에 의해 전자가 제한되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어쩌면 그것은 언론의 근본적인 한계다. 그런 면에서 전자와 후자가 산뜻하게 구분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그 한계를 우리 모두 인정한다고 할 때, 바람직한 언론의 태도는 바로 그 한계 지점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사회주의 신문"임을 표방하고 나선 <위마니떼>가 창간사에서 "사실성"과 "진실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특정 자본에의 의존도를 최소화하겠노라고 천명한 것은 전혀 자기 모순적이지 않다.

4.19가 지난지 이미 며칠이 지나버린 지금, 이제라도 그 의미를 되새기고 또 새로이 하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게 바로 기념일을 챙기는, 챙겨야 할 진정한 이유인 듯. 심지어 "남"의 기념일 까지도. 특히 그 "남"이 추구했던, 아니 그칠 새 없이 추구하고 있는 바가, "휴머니티"같이 시간과 공간과 이념을 초월한 어떤 것일 경우에는 더더욱.

—박쥐

2004년 4월 23일 금요일

많은 이들의 가슴을 무너지게 한 그 노래

blogin.com · 2004-04-23

오랜만에 웹진 <가슴> 사이트에 들렀다가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가 "스위트피"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 앨범을 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앨범에 대한 <가슴>의' target='_son'>http://www.gaseum.co.kr/110 ... x=373><가슴>의 평론가 김학연의 평가 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애정어린 핀잔이랄까. 나야, 김민규에게 어떤 음악적 기대를 갖기에는 델리스파이스의 음악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좋아하는 아티스트에게 사정없이 칼을 휘둘러야 하는 이의 심정을 헤아릴 턱이 없다. 그렇긴 해도, 그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첫 번째 트랙 "침묵"이 꽤나 심금을 울리는 걸 보면, 평자가 그 한 곡을 선택하기까지 거쳤을 고뇌가 내게 어느 정도 전해진 것 같기도 하다.


스위트피,' target='_son'>http://www.gaseum.co.kr/110 ... 5%E8%B1%E2>스위트피, "침묵, <스위트피 2집 : 하늘에 피는 꽃>


나머지 곡에 대해서는 거의 혹평 일색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구절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잊혀지는 것>에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무너지게 했던 김창기의 목소리"가 그것. 동물원의 김창기와 김광석이 불렀고 이번 앨범에서 김민규가 리메이크해서 수록한 노래. 평자는 '김민규가 부른 이 노래가 좋게 들리는 것은 순전히 원곡이 좋아서'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터다. 그런데 내 눈에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무너지게 했던"이라는 그 말 외에 다른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그 노래에 가슴이 무너진 많은 이들 중 하나였으므로. 


스위트피,' target='_son'>http://www.gaseum.co.kr/300 ... p;Form.y=5>스위트피, "잊혀지는 것", <하늘에 피는 꽃>



내친 김에 원곡들도.



김광석,' target='_son'>http://kangdagu1.hihome.com/m/ithyu.asf>김광석, "잊혀지는 것", <다시 부르기 2>
동물원,' target='_son'>http://www.gaseum.co.kr/300 ... amp;Form.y=3>동물원, "잊혀지는 것", <동물원 1집>


이리하여, 벌써 가슴이 세번 무너졌다. 지금도 계속 무너지고 있다.

—박쥐

2004년 4월 21일 수요일

"파리의 하늘 아래"서 듣는 에디뜨 피아프

blogin.com · 2004-04-21

눈을 뜨면
펼쳐지는 하늘
나는 말하지
"아, 끝내준다
어쩌면 저리도 파란지"

눈을 뜨면
 다가오는 너의 눈동자
나는 말하지
"아, 황홀하다
어쩌면 저리도 푸른지"



-- 에디뜨 피아프,
" 너의' target='_son'>http://www.leviolonmagique. ... es/plusbleu.wma>너의 눈동자보다 푸른(Plus bleu que tes yeux) " 중에서



제목만 보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중 솔직하디 솔직한 한 연시를 떠올릴 법도 하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대충 "장미는 당신의 입술보다 붉고, 꾀꼬리의 노래는 당신의 목소리보다 아름답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노래를 들어본즉슨, 역시 피아프는 피아프였다. 제목은 단지 생략된 어구였을 뿐, 그녀는 "너의 눈동자보다 푸른 건 상상할 수 없어, 너의 머리카락보다 금빛으로 빛나는 건 상상할 수 없어, 빛난다 해도 네 것만큼 부드럽지는 않을 거야" 하고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녀가 "눈에 뭔가가 씌지 않은" 채로 사랑 노래를 불렀을 리가.

아직까지도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보다 한참 젊은 애인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만큼 간절하고 애절하고 절실하면서도 행복에 겨워하는 눈빛은 본 적이 없다. 둘 사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봤더라도, 모자 관계로 착각하거나 함부로 "여자가 돈이 많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피아프가 읊조리는 말에는 뭔가 독특한 느낌이 묻어난다. 하늘이 푸른 건 sensationnel 한 거고, 너의 눈동자가 파란 건 merveilleux 하단다. 내 느낌이 정확하다고 하긴 어려우나, 사실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저 두 형용사의 위치가 뒤바뀌어야 맞다. 하늘이 푸른 걸 두고 장엄하다고 말할 순 있지만 눈동자가 푸른 걸 두고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듯이, "섹시한"이라는 형용사를 사람이 아닌 자연의 대상에 갖다 붙이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일상 언어의 규칙을 파괴한다 해도 "시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문제되지 않는" 것 이상이다. 하늘, 너의 눈동자, 푸른, 파란 등등의 관계가 너무나도 멋지게 도착/전도돼 있다.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면 그렇게 되나 보다.

작년은 피아프가 죽은지 40년이 되는 해였고, 이를 기념해서 파리 시청에서 특별전을 열었었다. 거기서 프랑스인들의 피아프에 대한 애정을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러한 애정에는 1940년대 점령기에 대한 그네들의 집단적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점령은 그네들에게 큰 충격이었는데, 피아프는 밤마다 무대에서 노래로 그 충격을 달래는 역할을 맡았고 또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전후 세대인 데다가 이방인이기까지 한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이 그와 같을 수는 없을 터이나, 어쨌든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그녀가 더더욱 빛나 보였다. 이는 내가 "조국과 청춘"이나 "꽃다지"의 연가를 유독 좋아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가사가 진부하고 유치하더라도 그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결코 코웃음칠 수 없는 노래들. 사실 피아프 정도면 굳이 그렇게 애써서 "사주는 식"으로 읽을 필요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어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을 올린 지 몇 시간 후에 다시 읽고, 또 그보다 조금 지나서 또 읽는다. 마지막에 가서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왜 내가 "센세이셔널"을 "센슈얼"로 해석했던 걸까? 어차피, 하늘이 파란 걸 두고 "센세이셔널하다"고 하는 것 역시 아주 자연스럽다고는 볼 수 없으니, 위에서 하늘이랑 눈동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적어놓은 게 아주 틀린 건 아니긴 하다.

고질적인 병, 즉 과도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을 여지껏 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우울해 하다가, "왜 하필 성적인 메타포로 이해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니 살며시 유쾌해진다. 오해에 대한 변명(apologie)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해에 대한 해명(eclaircissement)이다. 그 오해에 이유가 있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 target='_son'>http://www.leviolonmagique. ... siques/plusbleu.wma>

—박쥐

2004년 4월 20일 화요일

첫손님들께, 곱지만은 않은 인사

blogin.com · 2004-04-20

몽실, 그리고 을,

먼 길 와줘서 고마워요. 근데, 이거 참, 은근히 무서운 "압박"이네요. 이젠 "보는 눈"도 있으니 체면도 좀 차려 가면서 "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처음 블로그 하고 사람들과 공유해 나가기 시작했을 때, 당신들도 그랬나요 (참! 을님은 제가 존칭이나 경어를 생략하더라도, 몽실은 내가 필요 이상으로 높임말을 쓰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워낙 말놓는 게 자연스러운 데서 살아 보니, 그렇잖아도 한국에서 호칭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했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얘네들 말버릇을 재빨리 내면화해버렸거든요. 근데 그 버릇을 번역하려니 영 어색하기 짝이 없네요. 어쨌든 부디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시길) ? 뭔가가 눈에 들어오거나 머리를 스치기만 하면, 곧 그걸 어떻게 포스트化할까 하는 궁리를 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온종일 그 궁리만 하다가 하루를 그냥 보내버렸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불안해 죽겠어요. 중독의 기미가 보인단 말입니다.

집에 와서 블로그를 열어 두 분이 다녀간 흔적을 보고는 불안감이 더해졌어요. 사실 누구나 글을 쓰고 그 글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놓은 다음에는 긴장감이나 불안감이 들게 마련이죠. 제 경우, 반작용이라도 좋으니 어떤 반응이 오기를 고대하게 돼요. 그런 걸 보면,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그에 대한 답을 해주길 기다리는 것만큼 스릴 넘치는 일도 없을 거예요 (글쓰기에 이미 프로인 당신들은 이미 이 단계를 넘은지 너무도 오래일 수도 있겠군요). 그리하여 마침내 "독자"의 따뜻한 한 마디를 들었을 때의 그 기쁨이란! 그러고 보니 몽실이 전에 했던 얘기가 생각나는군요. 기자 노릇 하면서 "이기자, 기사 잘 봤어요" 혹은 "기사 잘 보고 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 제일 기쁘다고 했었죠, 아마? 그래서 더 불안하단 말입니다. 여기에 재미 붙으면 정말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다구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이 인사를 두 사람 블로그에의 답방 형식으로 할까 하다가, 두 분도 지금보다 더 중독되면 안되지 않을까 싶어서, 외람된 줄 알지만, 여기다가 이렇게 인사 올렸습니다. 이렇게 건방지고 뻔뻔한 인사를 받아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명석한 데다가 관대하기까지 한 두 분은 제 반어적 표현들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추신. 몽실의 안부게시판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리고 몽실은 나랑 같이 신문 일을 해봐서 더더욱 잘 알겠지만, 저는 리플의 형식적 요건인 단문에 익숙치 않아요. 리플에 대한 답을 이 글로 대신하는 것까지도 이해해 주신다면, 답례로 제가 한국 들어갈 때 프랑스 담배를 선물하도록 하지요. 뭐, 고마우시기야 하겠지만, 사양하셔도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금연 열풍이 불고 있고, 몽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담배를 끊었다지요? *^^* 그런데 을님은? ^^;).

—박쥐

익숙함, 적응되지 않은

blogin.com · 2004-04-20

며칠 전 동네 앞에 잠깐 나갔을 때,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문앞을 나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마치 "우리 동네"처럼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졌거든. 내가 "이곳"에 살고 있고 있구나, 또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 "나"(였)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어. 예전까지는 집밖에만 나서면 전시회에 온 기분이었거든. 분명히 아주 오래 전에 꿈에 그리던 풍경들이긴 한데, 정작 그것들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질 땐 아주 비참하더라구. 꿈속에서만 보던 때보다 훨씬 더. 그림들이 선명해질수록 그 안에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니까. 그런데, 며칠 전 그때, 그 풍경들이 처음으로 익숙하게 느껴졌던 거야. 그것도, 사진에서 보아오던 파리보다는, 내가 들어가도 될 만한, 담배 사러 나온 후줄근한 동네 총각이나 찬거리 사러 나와 이웃들과 수다떠는 아줌마가 등장하는, "우리 동네"에 가까운 그림으로 말이야.

오늘도 그랬어, 그 동네에서 좀 멀리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온갖 것들이 다 정겹게 느껴지다니. 일주일만에 밖에 나간 탓도 있겠지. 비록 오늘도 역시 도서관에 들어가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대체 이 기이한 느낌의 정체는 뭘까? 이방인을 은근하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소외시키는 이 나라에서 "우리 동네"의 향취를 다 느끼다니. 

그렇다고 내가 여기에 "적응"을 했다고 하긴 힘들어. 물론, 이곳에 온지 이제 곧 7개월이 될 테니, 적응할 때도 되긴 했지. 하지만 7개월은 나 같은 인간이 이국에서 적응하기에 결코 충분한 시간이 아니야. 난 한국에서조차 부적응아였고, 그래서 엄청나게 고생했고 또 여러 사람 고생시켰잖아. 물건 사러 가는 일조차 두려운 건 여전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늘 노심초사하고.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하다가,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에 깨달았어, 사실은 익숙해진 게 아니라 나태해진 거라는 사실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의 풍경을 한가로이 감상하는 일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 사치였는데. 사실은 동네를 산책할 시간에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래도 따라갈까 말까인데.

이곳에 와서 받은 가장 큰 철학적 가르침 중 하나가 나태함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경계야. 바슐라르가 "일상적 인식"을 공격했던 이유도, 그것이 "과학적 인식"에 비해 모자라거나 열등해서가 아니라 가장 얻기 쉬운 일상에서의 경험에 안주하고 자기 변화에의 노력을 게을리한다는 점에서였지. 덕분에 거의 교조적/독단적으로까지 치달았던 내 사회구성주의적 입장도 꽤 많이 치료됐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배움을 내 삶에 연결시키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던 거지, 철학도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이젠 정말 일어나야겠어. 그리고 움직여야지. 이 동네에 더 정들기 전에.

—박쥐

서점에서 눈이 부시다

blogin.com · 2004-04-20


갈리마르 출판사의 상상 총서(collection l'Imaginaire)는 타이포그라픽 아트와 북 디자인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예전에는 이 책들이 이 정도로 아름다운 줄은 몰랐었다. 이 책들의 디자인 면에서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어제 서점에 가서였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다가 계산대로 향하려던 찰나, 갑자기 눈이 부셨다. 눈을 부비고 자세히 봤다. 한 널찍한 진열대 위에 눈이 쌓인 듯했다. 하나같이 새하얀 바탕 위에 오로지 저자, 책 제목, 출판사 및 총서명만을 새긴 표지의 책들을 그렇게 모아두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단순성의 미학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을 정도로.

사실 그것들이 그저 단순한 데서 그쳤다면 날 그렇게까지 사로잡지는 못했으리라. 내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타이포그라피의 기교 때문이었다. 보르헤스의 <알레프> 정도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으나, 그냥 넘어가면 아쉬워할 만한 디자인들도 상당수 된다. '눈'이라는 글자를 통해 눈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바타이유의 <눈의 역사>도 그 중 하나겠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꾸미고 있는 것은 장작 나무들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천재의 일기> 표지에서는 달리의 수염이나 사물이나 사태를 뒤틀고 꼬는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그림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 순). 이렇게 書와 畵가 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문자는 대상을 드러냄에서만큼은 그림과 같은 다른 재현 수단보다 더 큰 한계를 갖는다. 칼리그람이나 타이포그라피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문자의 시도를 잘 보여준다. 어쨌든, 그러한 시도의 효과는 어느 정도 입증된 셈이다. 나 역시 거기에 넘어가서 한 권을 집고야 말았으니.

—박쥐

2004년 4월 18일 일요일

중독

blogin.com · 2004-04-18


세상에. 벌써 일주일이 지나갔다. "부활을 축하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도서관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린 지난 일요일부터였으니, 꼬박 7일이다. 이 기나긴 "황금 연휴"동안, 딱 두 번 수퍼마켓이랑 빨래방에 가기 위해 동네 앞에 잠깐 나갔다 온 걸 제외하면, 이 골방에 그야말로 "짱박혀" 있었다.

그냥 방에 처박혀 있었으면 말도 안 한다. 굳이 도서관에 가지 않더라도, 좁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면서, 간만에 여유롭고 차분한 마음으로, 그 동안 못다한 공부를 했으면 될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는.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15일의 총선을 핑계로 내세울 수도 있으리라. 물론 내가 뭇 "총선폐인"님네들 못지 않게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나 관심이 지극했다고 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건넛집 불구경 하듯이 무심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열망"과 "관심"의 이유나 종류가 좀 달랐을 뿐이다. 우선 (1) 나 역시 민노당이 선전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았었으나, 그것이 순수히 노동자의 (의회주의적) 정치세력화에 대한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노라고 당당히 말할 처지는 못 된다. 그런가 하면, (2) 한나라당의 패배를 바랐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나 자신의 타고난, 혹은 철들면서 갈고 닦은 좌파적 정치적 성향 때문이다. 또 (3) 3.12 탄핵가결에 대해서는 분노했으나, 탄핵 이후에 벌어진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서는, 직접 그 안에 뛰어들거나 가까이서 지켜보지 못해서인지, 피부로 와닿을 정도의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다.

이 커다란 이슈들에 대해 이토록 시큰둥했던 주제에, 총선 때문에 바깥 출입을 삼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순전히 핑계다, 그것도 아주 가증스러운. 난 그저 공부가 하기 싫었고, 바깥 날씨는 미칠듯이 화창하거나 참을 수 없이 무거웠고, 지금은 방학이었을 뿐이다. 오직 그 뿐이다. 어쩌면 그뿐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오로지 인터넷만을 통해 한국 사회를 관찰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는 경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깨달음이었다. 사실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이내 거기에 중독됐고, 끝내는 폐인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디씨인"에서 매초 단위로 올라오는 리플들에 때로는 넋을 잃었고 때로는 기막히거나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부연하자면, 그 인간들 중에는 글솜씨나 안목이나 재치나 지식의 면에서 아까운 인물들도 상당수 되는 듯하나, 그와는 별도로 군사문화나 가부장 의식에 찌든 축이 대체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블로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활발한, 그러면서도 진지한, 동시에 따뜻한 커뮤니케이션에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시시각각으로 올라오는 <오마이뉴스> 및 <프레시안>의 기사나 토론방에도 수없이 들락거렸다. 심지어 난생 처음으로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서 그 수많은 "뻘글"들과 "악플"들을 모조리 읽어 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햏자"들의 온갖 은어와 어투가 입이며 손가락에 들러붙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난 어지간해서는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는 인간이다. 적어도 옛날엔 그랬다. 물론 가끔가다 강박 증세를 보인 적은 있다. 때로는 입으로 뭔가를 집어넣어 씹어서 삼키거나 도로 내뿜는 데에, 때로는 내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하나라도 버려두지 않으려는 데에, 때로는 특정한 사물을 수중에 넣는 데에, 집착하고 또 집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뭔가를 진정으로/진심으로 좋아해서 미쳐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걸려든 것 같다.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차다. 이 정도면 정신이 확 들만도 한데. 윤동주의 "서시"는 "참회록"보다 나중에 쓰여졌음에 틀림없다. 거울 속에서 추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기에,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고 또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을 거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밤"이다.

—박쥐

2004년 4월 17일 토요일

다시, 새로이

blogin.com · 2004-04-17

그래, 다시 시작이다.

아주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이 넓디넓은, 그것도 끝없이 넓어만 가는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처음 발을 내딛던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머물 곳을 찾아다녔었고,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사실 내가 원했던 것이 "나만의 공간"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멀리 오지 않아도 됐을 거다. "나만의 일기장"이니, "마이 홈피"니 해서, 웬만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마다 가입 즉시 제공되는 인터넷상의 개인 공간이야 흔하디 흔하니까. 문제는 그것들을 "나만의" 것으로만 간직하고 있기에는 입이며 손가락이 너무나 근질거리게 됐다는 거다. 이제는 그것들이 "나만의 것"임을, 나와는 다른 수많은 "너"--혹은 내 안의 수많은 나?--로부터 확인받고 싶어졌다는 말이다.

이제는 너무나 아득해져 버린 PC 통신 시절만 해도, 아니, "블로그"라는 새로운 형태의 인터넷 매체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공간을 꿈꾸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번 홈피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으나 좌절했더랬고, 동호회나 커뮤니티 역시 나에게는 버거운 "공동체 의식"을 강요--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거늘--했기에 얼마 못가 혼자 떨어져 나와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나같이 소심한, 그렇다고 해서 실력을 연마해서 스스로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을만큼의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닌 이들에게 블로그는 둘도 없을 기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찾아들게 된 블로그. 사실 이곳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에 한 곳을 찾아내 그곳 한 귀퉁이에 닻을 내렸더랬다. 한동안 나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혼자서 모니터를 면전에 두고서는, 원없이 토해댔다. 두 달 전쯤에 그 동네에 화마가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베르사유 궁의 화장실에다 대고 하나,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공중 변소에 대고 하나, 토하면 더러워지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그냥 계속 눌러앉아 있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지인과 그 지인의, 그리고 또 그 지인의 블로그들을 찾아다니게 되면서, 보다 깔끔하고 세련된 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그러면 그 수많은 '나'들이 이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나'의 토악질하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참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이토록 처절하게 나만의, 그러면서도 나만의 것만은 아닌 어떤 "곳"을 찾아 헤맨 이유는, 우선 아래와 같은 내 배움 및 삶의 목표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이고, 한편으로는 그 목표 역시 나눔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들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어느 천재적인 작업이라 하더라도 그 창조자가 딛고 선 역사와 사회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모든 작업들은 바로 그 사회를 넘어서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 그것을 넘어서려는 간절하고도 안타까운 의지. 나는 그것들에서, 끊임없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해 다시 내려오곤 하는, 자신이 짊어진 짐을 계속해서 위로 들어올리고자 하는 나약한 인간을 보고, 인간에 대한, 결코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숭고로서의 애정을 느낀다.

—박쥐

덧없는, 더없는 : 사빈느 바이스의 파리

blogin.com · 2004-04-17

04/04/2004, 일요일

덧없는, 더없는 : 사빈느 바이스의 파리 PM 08:55 (서울 5.5˚C) 

파리는 확실히 "사진발을 잘 받는" 도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면 뭐든지 카메라를 들이대어 넣고픈 욕망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을 일일 정도로. 그런데, 그런만큼, 파리를 사진으로 담아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 에펠탑이나 개선문이나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한 몇몇 관광 "증명" 사진이 파리의 "증명" 사진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은 파리를 대표/재현한다고 하기 어렵다. 그것들을 찍은 사진--골목길이나 지하철이나 기타 등등--의 경우, "이거 파리에서 찍은 거야"라는 부연 설명이 없는 한, 파리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세느 강변 일대의 헌책 노점상들을 사진으로 담아냈을 경우, 보는 사람에게 "파리 세느 강변에는 주말마다 이런 노점상들이 줄을 지어 선다"는 "전제"를 동의시켜야 비로소 그 사진은 파리의 사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징"들은, 모든 종류의 재현물들이 그러하듯이, 그것들이 품고 있는/드러내려고 하는 수많은 다양한 요소들을 전부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사실, 뭐, 그러한 재현의 한계야, 굳이 그 재현의 대상이 파리여서가 아니라,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아니, 인간의 "봄"--카메라 렌즈 역시 인간의 눈을 모방한, 인간의 눈을 연장한 도구가 아니더냐--이라는 것 자체가 가진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다.


그런데 어떤 사진들에는, 인간의 "봄", 재현, 그리고 대상 간의 관계를 비트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하다. 흔히 사람들은, 파리가 기념비적 건물로 채워진 박물관 같은 도시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진가로 로베르 드와노와 으젠느 앗제를 든다. 나 역시, 드와노가 "파리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앗제가 "파리에도, 지배 계층의 철저한 계획과 노동 착취로 만들어진,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죽은 '기념물'뿐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로 살아가는 터전, 사람들이 살아 숨쉬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동서(공간)고금(시간)을 초월해서 그 동일성과 가치를 인정받는--이는 "고전"의 기준이기도 하고 "문화 유산"의 기준이기도 하다--  것들이 아닌,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기는 고사하고 그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래서 인간의 눈에 들어오기 힘들거나, 들어왔다 해도, 아주 희미한,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밖에는 지속되지 못하는 잔상으로 남는 것이 고작인 것들을, 용케도 잡아냈다.


파리에 살면서 나는, 드와노와 앗제가 "퍼스펙티브"를 그렇게 미분화/정교화할 수 있었던 것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들이 파리에 있었고 그들의 피사체가 파리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파리지엥/파리지엔느들은 뭐가 그리들 바쁜지 늘 무서운 속도로 걷는다. 그런 한편으로, 점심 시간, 퇴근 시간, 휴일 같은 때 까페나 공원은 늘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까페나 공원에서 사람들은 거리를 지나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들의 "관찰"은 열렬한 호기심이나 탐구욕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생각없이 틀어놓은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것과 비슷한, "덧없는" 눈길에 가깝다. 덧없는 것들에 대한 덧없는 눈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의 가장 무해한,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정당한 적용이다. 드와노와 앗제의 시선은 그러한 관찰자 시점을 아주 정확하게 반영한다.

바이스의 "파리"를 본 것은, 오늘, 예의 일요일과 다름 없이,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랜만에 햇빛 쏟아지는 거리를 정처없이 헤매던 중에 마주친, 한 가게 앞에서였다. 무심히 이런 저런 엽서들에 눈길을 주고 있던 차에, 한 사진("2CV A PARIS", 1957)에 시선이 내리꽂혔다.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한 남자. 우산을 쓴 채로 뛰어가고 있는. 뒤로는, 사진의 제목을 장식하기도 한, 2CV가 보인다. 저 "순간"을 어떻게 포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같은 순간에 작가가 까페에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리고 저 흐릿한 풍경을 저토록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역시 흐릿한 "촬영 환경"--비맺힌 유리창, 어두운 실내 등등--에 있었던 덕분이리라. 그런 면에서 사빈느 바이스의 이 사진은, 촛점이 또렷하게 박힌 드와노의 사진보다 훨씬, 그리고 "빛이 많이 들어간" 앗제의 사진보다도 더, 이 흐릿하고 덧없는 도시를 정확히 재현한다 (참고로 6개월 지내본 바에 의하면, 파리에는 볕이 드는 날보다 들지 않는 날이 훠얼~씬 많다).

또 다른 사진 하나("Paris", 1953). 위 사진의 "양각화"라고나 할까. 지는 해를 향해 뛰는 여자. 역시 빛보다 어둠이 더 진하다. 덧없다. 그렇지만 역시 덧없는 것에 대한 덧없는, 그래서 더없이 정확한 시선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이것이 파리다!" 하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메모> 글을 좀더 다듬으려면 다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 사르트르의 "까페 인간", 보들레르의 "산책자", 사진 미학(바르트, 손탁), 사진 이론, 사진사, 포토 저널리즘(사빈느 바이스에 대해 좀더 알기 위해), 자동차 2CV, etc.




옛글을 퍼다나르고 붙이는 기분, 꽤나 묘하다. 생각 같아서는, 미진하기 짝이 없는 글 말미에 붙여놓은 궁색한 변명일랑 싹 빼버리고는, 오늘을 미뤄둔 숙제하는 날로 잡은 셈치고 이것저것 기워넣고 싶으나, 또 한 번 미뤄두기로 한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어설프면 어설픈대로. 나중에 보면서 낄낄댈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물론, 막상 그날이 오면, 얼굴이 화끈거릴지도 모르겠으나.

또 하나. 앞서 올린 사진의 "양각화"라고 표현했던 작품은 몇 가지 이유에서 업로드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우연찮게 재발견하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로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몇 시간을 고군분투했건만. 역시 그림판이나 애크로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포토샵이 이렇게 미치도록 그리웠던 적은 없었고, 하다못해 페인트샵마저 아쉽게 느껴졌다. 이 역시 다음 기회에.

—박쥐

페르낭 크노프의 여자들, 그리고 나

blogin.com · 2004-04-17

31/03/2004, 수요일
1. 담배 피우는 여자 

 http://artmagick.com/painti ... inting4383.aspx>

http://artmagick.com/painti ... nopff/khnopff48>
그림 : 페르낭 크노프, , 1912 ( from artmagick.com )

* 대충 비오그라피를 훑어본 바에 의하면, 18세기 후반 고전주의(들라크루아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및 영국의 프리-라파엘리즘과 궤를 같이 했던 작가. 부러 그 이상 자세히 찾아보지 않았다. 그림을 처음 본 순간 '탁'하고 닥쳐온 인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다만, 이 작가가 브루게 출신이라는 점은 내게 중요하다. 브루게는 내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였으니까.

* 이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인상과는 전혀 딴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liseuse, 즉 뭔가를 읽는 여자들을 그린 작품들에 유독 집착하게 됐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재현의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가 역전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화가가, 보통 여성을 대상화하는, 즉 대상인 여성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방식에 한계가 있었음을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직감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손에 쥔 대신에 담배를 "꼬나물은" 이 여인에게서는, 그와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느낌을 받았다. liseuse들이 성스럽고 신비롭게 그려졌다면, 이 fumeuse, 즉 담배 피우는 여자는 상당히 저돌적이다. 그렇지만 둘 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주도권을 쥔 자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권력(전자는 지식-권력, 후자는 문화-권력)을 넘보는 "요주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 이곳에서 난 담배와 권력 간의 관계를 아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한국에서 담배가 가부장의 권력 독점을 상징했다면, 프랑스에서 담배는 상당히 反자본주의적인 동시에 半자본주의적이다. 정부는 언제든지 맘먹은대로 가격을 올린다. 사람들은 길에서 나같이 가난한 유학생에게조차 담배를 구걸한다. 덕분에 맘만 먹으면 순간적으로나마 권력 관계가 역전되는 경험도 가능하다. 이것도 너무나 일반화되고 보편화되고 세련화되기까지 한 이네들 "구걸 문화"의 단편이라면 단편이겠다.

2. Time to Unlock the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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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ock my door upon myself,
And bar them out; but who shall wall
Self from myself, most loathed of all?...
Myself, arch-traitor to myself;
My hollowest friend, my deadliest foe,
My clog whatever road I go
- Christina Rossetti,

"Who Shall Deliver Me"

* 이 시는 저 왼쪽 프로필 사진 속의 그림(Khnopff, I lock my door upon myself", 1891)에 대한, 다소 긴, 그렇지만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은 설명이다. 알고보니, 크노프는 이맘때쯤 "상징주의" 사조에 속하는 인물이고,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상징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시인 중 한 명이었단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아래의 글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영 틀린 것 같지도 않다. 그네들이 주요한 주제로 다뤘다는 여성적 우울, 고독, 혹은 신경증 또한 그네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위협으로 작용했었겠고, 그런 면에서 "히스테리"가 그네들의 "근대"라는 기획에 있어 눈에 박힌, 아주 성가시기 짝이 없는, 경우에 따라서는 실명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그런만큼 위험한 에너지를 지닌, 그런 가시로 그려지고 있는 거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 어쨌든, 위의 그림과 시는 요즘의 내 상황에 대한 적나라한, 그래서 절절한 표현이다. 아, 이제 문을 열 때도 됐는데. 사실 내가 문을 안 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문을 잠근 것도 아닌데. 다만 문이 잠겨 있을 뿐인데.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근데,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문을 잠근 거라, 이거지? 그렇담 내가 문을 열려고만 하면 문이 열린다는 뜻이렷다? 그래. 내일 해가 뜨거들랑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크노프에 관해서는 한 번 더 얘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더랬다. 신기하게도, 저 글들을 올리고 난 뒤, 나는 크노프와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첫째는, 인터넷을 통해,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브뤼셀에서 크노프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었고, 둘째는, 헌책 시장에 갔다가 크노프의 화집을 발견한 것이었다. 확실히, 그 시대--벨 에포크--의 남성 화가들에 의한 여성(그리고/또는 섹슈얼리티, 우울의 정서, 히스테리)의 재현은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클림트/쉴레//크노프/로세티 등등. 더불어 국가 간 스타일의 차이도.

2.는 프로필 사진에 대한 변명/설명이자 곧 내 프로필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저 위의 담배 피우는 여인의 초상 중 도도해 보이는 눈빛과 미소와 곧게 뻗은 목을 뺀 모든 것은 요즘의 내 모습과 지독하게 닮아 있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