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며칠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어제 오랜만에 외출했었다. 오후 느즈막히 집을 나서면서, "아뿔싸, 이번에도 놓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평지가 실리는 <르몽드> 금요일판을 사려면 좀더 서둘렀어야 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김화영 선생이 <세계의 문학>에 미셸 투르니에를 인터뷰하고 실은 기사를 본 이후부터, 투르니에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빼놓지 않고 본다는 금요일자 <르몽드>는 내게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제 그 대상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게 됐는데도 여지껏 단 한 번도 손에 넣어보질 못했으니, 완전히 에우리디케를 눈앞에 두고 놓쳐버린 오르페우스 꼴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대부인 장 조레스(Jean Jaurès)가 창간한 <위마니떼l'Humanité> 100주년 기념호가 잡지/신문 판매대를 장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창간 100주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기념일이 지났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었다. 값이 다소 비싸긴 했지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덜컥 집어 들었다. 가게를 나서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 1유로에도 벌벌 떠는 주제에, 그런 과욕을 부리다니. 그치만 사실 과욕을 부릴 만도 했다. 내가 원래 이런 식의 "이벤트"에 다소 약한 데다가 책에 대한 욕심도 좀 있는 것이 사실이나,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기념호가 웬만한 현대사 책만큼의 구실을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약칭/애칭으로 "위마"라고도 불리는 이 잡지에 대해 아주 좋은 인상만을 가지고 있다. 첫인상은, 아이러니칼하게도 광고(맨 위의 그림)에서 비롯됐다. 카피가 정말 걸작이다. 이상 세계에는 <위마니떼>가 존재하지 않을 거란다. 두 번째 인상은 홈페이지( ' target='_son'>http://www.humanite.fr>http://www.humanite.fr )에서 왔다. 다른 언론 사이트들이 최신 기사를 제외한 모든 기사를 유료로 제공하는 반면, <위마니테>의 모든 기사는 공짜다. 지난 세월이 얼마인데, 그리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창간 당시의 정신을 이렇게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 때문에 운영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참으로 놀랍고 애틋하기 그지 없다. 다음의 인상을 받은 것은 에릭 로메르의 신작 <삼중 간첩>에 나온 한 장면에서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침에 길을 나서다 신문을 코에 박은 채로 걸어가는 이웃과 마주친다. 그 장면에서 선거에서 공산당이 승리했음을 알리는 신문이 클로즈업되는데, 바로 그 신문이 <위마니떼>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아내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라는 것, 알고 있었어. 아침에 보니 그가 <위마니떼>를 읽고 있더군."
100주년 기념호를 들여다 보려는데 날짜에 시선이 머물고 말았다. 창간 기념일이 4월 19일이었던 것이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그래, 4월은 그런 달이었지. 진달래가 피고, 썩은 땅이 라일락을 피워내고, 4.3이 있고, 4.19가 있는. 그러면서 메이데이와 5.18을 맞을 준비를 시작하게 되는. 때와 장소를 달리했던 그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어쩌면 그리고 절묘한 순서로 일어났는지. 4월을 지내면서 겨우내 잊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 둘씩 불러내다 보면, 어느새 5월. 그런 의미에서, 제비가 한 마리 온다고 해서 봄인 것은 아니라는 말, 맞다. 다만 거기에는 한 마디가 덧붙여져야 한다. 4월이 와야 봄인 것이다.
"언론"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학부 때 꽈내에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신문을 만든답시고 있는 고민 없는 고민 다 만들어내서 하던 시절, 그 고민의 대부분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모든 언론에 있어 최우선의 과제는 진실이나 사실에 대한 전달이겠으나, 그건 어찌 보면 기본적으로 성실성 혹은 양심의 문제다. 기본/근본 바탕이라는 얘기다. 그보다 매달려 싸워야 할 문제는 어떤 사실을 선택하는가, 선택된 바를 어떻게 전달하는가다. <조선>을 비롯한 일부 언론들의 문제는 전자의 조건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겠으나, 사실 후자에 의해 전자가 제한되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어쩌면 그것은 언론의 근본적인 한계다. 그런 면에서 전자와 후자가 산뜻하게 구분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그 한계를 우리 모두 인정한다고 할 때, 바람직한 언론의 태도는 바로 그 한계 지점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사회주의 신문"임을 표방하고 나선 <위마니떼>가 창간사에서 "사실성"과 "진실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특정 자본에의 의존도를 최소화하겠노라고 천명한 것은 전혀 자기 모순적이지 않다.
4.19가 지난지 이미 며칠이 지나버린 지금, 이제라도 그 의미를 되새기고 또 새로이 하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게 바로 기념일을 챙기는, 챙겨야 할 진정한 이유인 듯. 심지어 "남"의 기념일 까지도. 특히 그 "남"이 추구했던, 아니 그칠 새 없이 추구하고 있는 바가, "휴머니티"같이 시간과 공간과 이념을 초월한 어떤 것일 경우에는 더더욱.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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