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in.com · 2011-07-26
1.
오늘은 푸앵카레 데이였다. 잘 나가는 연구자들 중 상당수가 한자리에 모여 종일 푸앵카레에 대해 논한. 그중에는 마이클 프리드만같은 대가도 있었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마땅히 기억해야 할, 머잖아 아마도 기억하게 될, 포트투갈의 신진 학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명색이 푸앵카레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는 자로서, 그 자리를 빛내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그들이 내뿜는 열기에 가냘프고 미약하게나마 기운을 더하거나, 적어도 그 열기를 몸으로 느끼고 그것을 앞으로의 내 공부에 토양으로 삼았어야 했을 나는, 인터넷으로 런던의 호텔을 찾아 헤매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그러고도 아직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올해 회갑을 맞으실 엄마, 그리고 엄마와 동행해서 오실 이모를 위해, 딸이자 조카로서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 생각하며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논문 쓰는 딸내미한테 미안한 마음과 부담을 잔뜩 안고 계신 엄마에게,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싫은 소리 안 하고 또 섭섭하게 해 드리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었고. 뭐 그렇게 거창하게 도리나 의무를 운운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계획을 잘 세워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수합한 뒤 그 안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터 내 요구 사항은 놀랍도록 까다로워졌고, 그러는 도중에 예약가능한 호텔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어만 갔으며, 그럴수록, 너무 비싸지도 않으면서 시설은 깔끔하고, 무엇보다 욕조가 갖추어져 있으며 아침 식사도 제공되고 시내 안전한 곳에 위치한 등등의 조건을 만족하는 이상적인 호텔을 찾으려는 희망은 무서운 집착으로 돌변했다. 내가 이렇게 하루를 소비했고, 그러고도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엄마와 이모는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2.
한동안 이 블로그를 등한시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일단 말을 시작하면 주로 1.과 유사한 이야기들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침울한 내용(내용이라 할 만한 게 있었다면!)과 자기 비하로 일관하면서 일말의 자기반성조차 없는,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모두 지치게 하는 페시미즘으로 가득한, 그리고 비문 아니면 추한 문장투성이의 줄글이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그런데 이제 와서 지금의 이 고백을 빙자한 작태는 무슨 의식인가? 평소 같으면 일기장에다가도 적지 않았을, 이런 날 것 그대로의 감정 토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 솔직하지 않았다. 내 맘 아니면 머리 안을 맴도는 온갖 추한 생각들이 문자화되면서 구체화되거나 심지어 실체화될까봐 겁이 났다. 그렇게 엄격한 검열을 통과해서 기록된 것들조차 누군가에게 발각될까 두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것은 무슨 오만이며 용기인가?
3.
갑자기 1.이나 2. 같은 독설을 내뱉게 된 것은 페이스북에 대한 반향인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하다가 얼마 전부터 페이스북을 하게 되었는데, 최근 메일을 자주 주고받은 한 학부 친구는 페이스북 세상에서의 내가 메일 주고받는 나에 비해 명랑하고 발랄한 인상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일을 통해서는 그 친구와 논문, 지도 교수와의 관계, 진로, 연애 등등의 제법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눴으니까. 페이스북에도 그 친구를 포함, 다른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는 어쩐지 맑고 밝고 기분 좋고 가벼워야 할 것 같다. 물론 맑고 밝으면서 진지할 수 있고, 가볍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소통의 방식이 다양화되는 건 그 자체로 결코 나쁠 것 없고, 더구나 나 같은 분열증 환자에게는 다행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4.
한 이탈리아 작가의 희곡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히파티아는 이런 대사를 읊는다. 소통되지 않는 사유는 부패한다고. 처음에는 신피타고라스/신플라톤주의자였던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사이거나 아니면 기막힌 아이러니의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가끔 이 말이야말로 진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1.이나 2., 아니 3.은 물론이고 지금의 4.와 같이, 애당초 유통 기한을 넘겨 부패한 상태에 있는 사유라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이렇게 수 개의 바이트로 체화(embody)되는 순간, 즉 언어화되는 순간, 그리하여 언젠가 다른 사유와 만나 교류를 시작하는 순간, 변모/태, 즉 다른 모습으로 화(metamorphosis)하리라. 지금 내가 여기에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미천하고 보잘것 없을지언정 머리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체의 여과 없이 그대로 적어 내려가는 것은 모험심이자 실험 정신에서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는 변화에 대한 기대. 이전까지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 원동력이 되었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환기해 현재의 이 상태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변화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외우는 주문.
요컨대, 1.에서 4.까지의 모든 문장들(지금의 이 문장을 포함해서)의 의미치는 "수리수리 마수리"나 "아브라카브라"의 그것과 같다 (이는 정확히, 모든 기하학의 공리에 대해 참과 거짓을 논하는 게 넌센스라는 푸앵카레의 주장에 대해 러셀이 반박한 내용과 일치한다. 푸앵카레의 논지에 따르면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명제는 넌센스라는 점에서 "아브라카브라"와 같다는 것이 러셀의 반박 내용이었다. 푸앵카레는 이에 응답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했다). 그 자신 의미를 갖지 않되, 그로부터 모든 새로운 의미들, 나아가 세계가 생성되게끔 하는...
이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께
가끔 들어올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주인인 제가 이렇게 방기해 놨음에도 조회수가 꾸준히 늘고 있어서 말이지요. 우연히 들어오신 분도 있겠지만, 절 잊지 않으시고 신경써주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생각할 때마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일분 일초를 아끼며 밤을 새가며 논문을 쓸 때도 있지만, 또 어쩔 때는 아무런 진척도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영화관에 앉아 있을 때도 있으니, 시간이 없어 블로깅을 못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사실 "논문 쓰느라 바쁘다"라는 것은 공식적인, 그러니까 사실(is)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당위(ought)에 대한 표현인 거고, 비공식적인, 그러니까 보다 진솔한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제 글이나 생각에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블로그와 멀어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가끔 강렬한 글쓰기 욕구를 느낄 때가 있긴 한데, 막상 펜을 들고 시작해면 얼마 가지 못해요. 그 칼보다 강하다는 펜이 제 손에서는 너무도 쉽게 힘을 잃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너진 기획들도 꽤 여럿이지요.
왜 책이나 영화도 예전보다 더 많이 봤으면 봤지 결코 덜 보지는 않는데 그에 대한 감응력은 한없이 무뎌지는 걸까요? 예전에는 뭘 잘 모르고 이런 저런 소리를 잘도 지껄였다면, 지금은 그때보다 많은 걸 알게 된 만큼 좀더 신중해졌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할 거구요. 그런데, 그런 한편으로, 머리 속에 경험이나 지식의 양이 축적되면 될수록 저는 겸손해지기보다는 소심해지고 둔해지는 데다가, 무엇보다 제 목소리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우리말로 생각하고 또 쓰는 (재활) 훈련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페이스북을 시작했지만, 길게 호흡하는 글은 가장 최근까지 제게 우리말 훈련의 장이 되어 주었던 이 공간에 계속해서 담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여러분께 계속 많은 성원을 부탁드...리지는 차마 못하겠습니다. 오시는 걸음걸음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는 고맙고 미안하겠지요. 그 걸음들이 헛되지 않도록 저 또한 제 걸음을 걸어가겠습니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