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3일 금요일

논문, 논문, 논문... 아직도!




"잔느는 결국 논문 끝냈다니?"
"그게... 끝내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할머니, 잔느 언니는 왜 늘 논문만 써요?"
"그건 아무도 모른단다."



"파티 하시나 봐요?"
"아뇨. 제가 집에 처박혀서 논문을 끝내려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필요한 식량을 구비하는 거랍니다."
"아, 논문 쓰세요? 저도 젊었을 때 하나 썼어요. 
고생물학으로요. 그런데 잘 안 풀려서..."

 
Tiphaine Rivière, Carnets de thésard, Seuil, 2015
 그리고 다시 보는 카프카의 "계단"생각
 

2017년 8월 7일 월요일

생일


퐁피두 센터가 우리랑 동갑이라고 동갑인 ㅎ에게 전했더니 ㅎ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했다. 이만큼이나 살았는데도 모르는 것 투성이.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어릴 때부터 그랬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리다 막상 기다리던 날이 오면 그 기쁨도 잠시, 그 이후의 허무와 권태를 견디기 힘들었다. 공부에 있어서도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해서라기보다는, 말하자면, 완성태 공포증이랄까. 결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미치더라도 지속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차라리 결과에 대한 기대와 희망적 사고가 보장되는 과정에 계속해서 안주해 왔던 것이다. 과정중심주의나 완벽주의는 명목상일 뿐, 실제로는 미루기즘(procrastination)을 실천하며 그에 대한 자책과 그에 따른 피학적 쾌를 즐겨왔던 것이다. 

모든 가능은 현실을 지향한다. 또는 현실화에의 경향성을 지닌다. 현실화된 바가 바로 최선의 가능인 것이다.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의, 잠재된 채 언젠가 발현되길 기다리는, 은폐된 채 탈은폐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은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을 뿐. 다만 이미 현실로 드러난 바로써 변화를 이루고 또 다른 현실을 일구어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에는 얼마든지 여지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여지다.

어젯밤에는 달이 유난히 밝았다. 꽉 들어찬 보름달이었다. 예전에는 초승달을 좋아했다. 보름이 되면 아쉬웠고 그믐이면 절망스러웠다. 이제는 이 도식도 바뀔 것 같다. 나이 들면 취향도 변하지 않는가.

2017년 7월 25일 화요일

Ressemblances partout 어디나 닮은꼴

1. 
<악의 꽃>의 마지막 시 : <여행>, "오, 죽음이여, 늙은 선장이여, 이제 닻을 올릴 시간" 산보객의 마지막 여행 : 죽음. 그의 목적 : 새로움. "새로움을 찾기 위해 미지의 심연으로."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에 독립적인 특성이다. 집단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분리될 수 없는 가상의 기원에 바로 새로움이 있다. 그것은 허위의식의 정수다. 이 새로움의 가상은 동일자의 반복의 가상에 반영된다. 거울이 다른 거울에 반사되는 것처럼. 
--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2. 
내가 아주 오래 전에 얻고서 스스로 흡족해 마지 않는 깨달음이 있으니, 그것은 관찰한 기간이 짧을수록 사람들은 서로 닮은 것처럼 보이며, 급기야 순간적으로[한 순간에 이르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와 똑같이 소중한 다른 깨달음이 있으니, 그것은 감정의 강도가 클 경우에는 유사성이 더더욱 커져 마침내 동일성에 일치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  발레리, <테스트 선생> 중 "테스트 선생의 몇 가지 생각"


누구에게서나 닮은꼴을 발견하는 ㅎ. ㅎ이 보기에 누구는 모 유명배우를 닮았고, 옆에서 누구누구가 모 가수를 닮았다 하면 바로 맞장구 친다. 그런 ㅎ을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고 가끔 놀리기도 한다. "ㅎ씨 눈에는 다 닮았죠? 안 닮은 사람이 없죠?" 내가 보기에도 ㅎ의 유사성 판단은 겨우 "발가락이 닮았다" 수준일 때도 있긴 하다. 

Sandro Botticelli 035.jpg그러나 ㅎ에게는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 선례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스완의 사랑>의 주인공 샤를르 스완. 스완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지오토,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주로 자신의 전문인 르네상스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닮은꼴을 발견하곤 한다. 화자네 집 부얶데기 하녀는 지오토가 그린 카리타스를 닮았고, 스완 자신의 마부 레미는 리조의 흉상을 연상시키고, 한 지인은 텡토레가 그린 초상의 인물과 닮았고 등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데트. 처음에는 그녀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다소 피곤해 하기까지 하던 그는 어느날 그녀에게서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보티첼리의 제포라를 발견하게 되고, 순간 사랑에 빠진다.

실은 내게도 닮은꼴을 발견하는 재능 혹은 경향이 있다. ㅎ과 스완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 데서 이미 알 수 있겠듯.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ㅅ은 나와 오래 알고 가까이 지낸 ㅅ 언니를 닮았고, ㅅ 선배는 자신이 공부하는 철학자를 닮았고, 그러고 보니 또 다른 ㅅ 선배도 자신이 공부하던 철학자를 닮았고, ㅈ의 여자친구 ㅇ은 <파리의 미국인>에서 진 켈리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프랑스 여배우 레슬리 카롱을 닮았고, 전에 본 수퍼마켓 계산대 점원은 프랑스 여배우 시몬느 시뇨레를 닮았고, 오즈의 <꽁치의 맛>에서 며느리 역할로 나온 일본 여배우는 아이유를 닮았고, 필립 가렐의 <정기적 연인>에 나왔고 <질투>에도 나온 한 배우는 트뤼포의 페르소나 장-피에르 레오를 닮았다. 그리고, 이건 나만의 발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우 중 하나는 그레이스 켈리와 그녀를 그린 영화에 출연한 니콜 키드만.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예고편을 보면서 니콜 키드만은 그레이스 켈리 역할을 맡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가 하면, 말이 나와서 말인데, 닮은꼴 전문가 ㅎ 또한 외모상으로 내게 누군가를 연상케 했으니, 그것은 자크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에 나오는 한 여배우. 양갈래 머리를 하고 신나게 춤추다 뱃사람을 만나 떠나가는. 영화배우가 아니고 말하자면 무명의 뮤지컬 배우고 그리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닌 그녀가 내 인상에 각인되었다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ㅎ 덕분이다.

근거? 없다. 유사성이란 게 본래 그렇지 않은가. 유사성에 대한 판단은 직관적, 즉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지, 논증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 판단의 내용 분석하자면 한도 끝도 없거나 (무한 분석 가능성), 아니면 아예 분석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분석 대상과 분석 행위 혹은 주체의 비분리성 혹은 상호의존성).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유사성 판단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바, "유사성과 차이의 그물망"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그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을 도입한 맥락을 돌이켜 보면, 결국 유사성이야말로 모든 개념화 및 의미 작용과 언어 게임의 기저에 있는 것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 유사성에 기초한 유비 추리(analogy)는, 비록 반드시 진리에로 인도하는 확실한 원리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경우 발견술(heuristics)로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푸코의 <말과 사물>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모두 유사성을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두 텍스트를 이런 식으로 연결하다니, 이 역시 유사성 판단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일례). 

푸코에게 유사성은 르네상스까지 전통적, 그러니까 전근대적 사유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 사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푸코는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을 든다. 우리가 아는 그 어느 존재론적 범주나 분류적 질서로도 포괄하기 힘들어 보이는 사물, 아니, 어디 사물 뿐인가,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대상들, 개념, 관념 나아가 어떤 사실이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각기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있는 동시에 하나로 어울리고 어우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가장 작은 것(microcosmos)에서부터 가장 거대한 것(macrocosmos)에 이르기까지  가장 본래적인 의미(최소한 가장 어원에 가깝다는 의미에서)에서의 코스모스의 구현. 여기에서 상호 유사 혹은 유비 관계는 서로 다른 물리적 시공간의 존재들을 연결함으로써 넥수스로서의 우주를 발견하는 방식이요,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일종의 우주론적 원리로서 기능한다. 이것이 고전시대로 넘어가서는 차이와 분류의 에피스테메로 전환된다. 벨라스케스의 <하녀들>에서 그 징후가 나타난 바, 표상 체계가 사물로부터 독립하여 더 이상 외부 세계로부터 지시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순수 차이를 근간으로 하는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유사성이 갖는 위상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차용한 "유사한 것들만이 차이를 가진다"와 "차이들만이 유사하다"라는 두 명제 (<차이와 반복> 2장, p. 153). 전자는 유사성을 제일 원리로 보고 후자는 차이가 먼저라 본다. 반복도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좀더 써보고 싶으나 그러려면 <차이와 반복>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힘들겠으므로 다음으로 미루거나 적임자에게 맡기기로 한다. 

서두의 두 인용문은 유사성-동일성에 대한 서로 상반된 접근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동일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은 상품 본연의 가치와 무관하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허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동일성이야말로 관찰자가 아마도 관찰 대상과의 합치를 꿈꾸느라 만들어낸 궁극의 환상이라고 말한다. 동일성이든 차이든 결국 어느 하나는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니 당장 주저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본질론이나 이분법의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하염없이 동일성을 추구하되, 그런 한편으로 끊임없이 차이를 발견하고 없으면 발명이라도 하고자 하는 모순된 욕망이 저항감을 유발하기 때문 아닐까. 적어도 내겐 그렇다. 

2017년 5월 5일 금요일

어떤 유비 추리, 그리고 결론

아빠 동갑내기가 먼저 대통령이 되더니,

엄마 동갑내기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이번에는 내 동갑내기가 대통령이 되려는 참이다. 


이는 모두 *사실*이다. 즉 모두 참인 전제들이다. 무의미하고 무익할지언정.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1. 동생 동갑내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2. 이모 동갑내기가 대통령이 된다.

3.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4. 논문이나 써라... 제발!

2017년 4월 29일 토요일

어떤 유비


또 하나 유사한 것은 밤에 생각이 난다는 점. 그러나 순간의 충동에 양보하면 그 즉시 후회하게 마련이라는 점 또한.

이제 조금 있으면 70일. 한 5년 전부터 간헐적으로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를 여러 번, 스스로도 미덥지 못해 "취미가 금연"이라는 자학적 농담까지 하고 다니던 중, 그래도 작년 가을부터 미약하게나마 성과를 보기 시작했다. 중간에 1주일 정도의 휴지기를 두어 번 가지고, 또 일종의 "포상"의 의미에서 한두 대의 예외를 두긴 했지만. 기침과 가래, 소화 장애 등 생리적인 증상에서부터, 전반적인 우울 및 불안, 체중 증가, 다소간의 퇴행성 행동--구강기 유아마냥 자꾸 입에 무언가 물고 싶은 욕구가 강해져 실제로 빨대를 물고 있는다든지, 어쩌다 얻어 피울 상대를 만나는 등의 기회가 생길라치면 강한 충동이 이는 나머지 그 상대를 집요하게 조르고 보챈다든지 하는 강박적이고 유아적인 행태를 보인다든지--등 다양한 종류의 금단 현상을 거쳐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듯하다. 장이 계속해서 거북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게 15년만(!) 계속하면 비흡연자와 똑같은 조건으로 초기화된단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노화가 진행될 것을 생각하면 초기상태로 복원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가차 없는 불가역성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이 정도의 예외가 허용되는 것이 어딘가. 

가만히 돌이켜 보면,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위의 사례처럼 돌이킬 수 없고 돌이켜서는 안 되는 일이 더 많지만.  

2017년 3월 6일 월요일

일요일 늦은 오후, 72번 버스

1. 
일요일 늦은 오후. 이 시간대 72번 버스는 늘 붐빈다. 센느 강변을 따라 시내 중심 관광 요지를 지나는 덕에 관광객들도 많고, 휴일을 맞아 나들이를 다녀오는 16구의 부유한 노인들이나 (이들은 일반적으로 지하철보단 버스를 선호하는 편), 유모차를 앞세운 가족들도 많다 (이들에게도 역시 버스가 더 편할 터). 자리가 없어 뒷문 쪽에 서 있자니 앞으로는 노약자석, 뒤로는 유모차 전용 공간이어서 그야말로 2세대 사이에 낀 꼴이었다.   
그러나 이 사이의 공간은 얼마나 아늑하며 편안한가. 혼자 외출했다 귀가하는 듯한 할머니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고, 집채 만한 유모차를 끄는 엄마는 힘겨워 보였다. 나는 과연 기력이 쇠해 버스에서 서 있는 게 힘들어져 염치고 자존심이고 따질 새 없이 자리가 날라치면 재빨리 가서 앉게 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내 아기를 위해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배려받기보다는 배려를 하는 일이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 이라 적으려다, 문득, 나 또한 많은 배려를 받고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도 그렇게 낯선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가며 나와 동생을 이리저리 실어 날랐겠지. 단지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을 남이 내게 베푼 것보다 오래 그리고 많이 기억하고 있을 뿐.
 ...이라고 6년 전의 나는 적었다. 그 사이에도 같은 장면은 여러 번 반복됐고, 나는 여전히 2세대 사이에 낀 채 그대로...인가, 과연? 휴일에 혼자 외출했다 쓸쓸하게 귀가하는 할머니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어쩌면 누군가는 바로 나를 보면서 나이와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는지도 모른다. 

2.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짐을 한껏 지고서 같은 버스를 타려 국영 라디오 방송국 앞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중. 마침 방송국에서 공연이 끝났는지 관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내가 선 정류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머리가 하얀 어르신들. 공연을 관람한 뒤 아마도 16구나 교외 주택가이자 역시나 부촌에 속하는 불론뉴-비양쿠르로 귀가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날따라 하필 꽉꽉 채운 배낭에 카트까지 들고 있던 나. 머리는 복잡해지고 가슴은 쿵쾅대기 시작했다. 과연 탈 수 있을 것인가, 탄다고 하더라도 저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거북이등 효과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 배낭은 벗어야 할 텐데, 그러면 카트랑 다른 가방은 또 어떻게 매니지할 것인가... 등등을 생각하다, 문득, 내게도 최소한 이동의 자유와 대중 교통을 이용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내겐 우선권이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이렇게 배려와 양보만 할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성을 거슬러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사람들이 모여든 버스 입구 앞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오자 우선 한 마담에게 양보를 했다. 그 뒤의 다른 마담이 내게 양보를 하여 안심하고 스텝을 밟으려는 찰나,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게 양보를 한 마담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곳에서부터 집앞 정류장까지는 대여섯 정거장 정도. 다른 옵션을 몇 가지 생각하다가 그냥 집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자전거 타고 다니거나 조깅할 경우에는 단숨에 뛰기도 할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그때는 짐 때문에 걸음 속도도 나지 않고 얼마 가지 않아 지쳐가던 차. 한 정거장 지났을까. 뒷차 도착까지 불과 1-2여분이 남아 있었다. 한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자니 우아하고 지적인 풍모의 두 마담이 다가왔다. 역시 공연을 마치고 나온 기색이었다. 예정된 시간에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한결 여유로운 버스 안 풍경에 안도하며 티켓을 수리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탄 두 마담은 지갑을 뒤지는가 싶더니 그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버스 안이나 동네 수퍼마켓에서 저런 뭐랄까, 얌체에서부터 안하무인까지의 모습들을 가끔 보는데, 그럴 때마다 생경하다. 나라고 무임승차를 전혀 안해 본 건 아니지만, 그리 붐비지도 않는 버스에 기사가 엄연히 감시하고 있는 조건에서라면, 나같은 소심한 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배짱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실천하기 힘든 행동을 저렇게 고상해 보이는 분들이 하다니. 한편으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시민의식 운운할 것도 없이, 국적, 출신, 성별, 주거지 등등 이른바 사회적 지표라는 것의 지표로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3.

일요일인 오늘 오후.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에 가려 했으나, 옷을 얇게 입고 나온 데다 비도 한두 방울 떨어지고 해서, 일정을 급히 변경,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하게 되었다. 날이 궂은 탓에 보통 때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가족 단위의 산보객들이 제법 보였고, 그 중에서도 유독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는, 재생산 욕구가 채 걷히지 않은 내 의식이 지각에 미친 효과도 없지 않겠지만, 프랑스에서 그만큼 아이들을 확실히 많이들 낳았고 또 여전히 낳고 있다는 사실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공원마다 거리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걸 볼 때면, 저출산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의 사례를 생각한다. 인구정책은 근대 국가의 대표적인 생정치 장치 중 하나다.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가장 치밀한 진단과 예측, 동시에 기존의 윤리학과 가치 기준을 끊임없이 재고하고 경계하는, 늘 깨어있는 사유를 요하는 부문. 그 뿐인가. 프랑스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장기간에 걸쳐 다양하고 체계적인 시책을 펼쳐 오늘의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지만, 이것이 단지 행정적으로 정책적 차원으로만 설명될 것은 아니겠다. 사회 전반의 망딸리떼, 즉 심성 혹은 의식의 수준, 즉 정책이나 그 밖의 사회적 규범 수준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면서 그에 완전히 환원되지도 않는 사회심리학적 심급이 있고, 이것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 주요한 인자 중 하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비슷한 수준의 선진국이면서 경제 사정에서는 오히려 좀더 나은 편인 데다,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장려책을 실시해 왔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4.

아이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마주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져 마침내 스쳐 지날 찰나, 그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Vive la République, 즉 공화국 만세. 집에 와서 뉴스를 보고야 알았다. 오늘 트로카데로에서 우파 정당인 Les Républicains, 즉 공화(국)당의 대선 후보 프랑수아 피용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피용은 극우인 마린 르펜에 대적할 사실상 유일한 대항마로 거의 당선이 확실시까지 되던 후보다. 그런데 최근 부인인 페넬로프--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서 온 이름!--에게 보좌관 업무를 맡기고 보수를 그것도 꽤 고액으로 지급했으나 사실 그녀의 업무는 허구였다는 의혹이 제기돼 법정 출두 명령까지 받은 상태. 이러한 이른바 "페넬로프게이트"로 참모들도 떠나고 사퇴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그가 주중에 갑자기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긴급 기자 회견을 열자 모두 사퇴 발표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후보로서의 행보를 끝까지 할 것이며 법은 거스를지언정 민중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등의 발언으로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그런가 하면 침묵하던 페넬로페는, 일종의 "일요신문"인 Journal du dimanche 오늘자 인터뷰에서, "남편을 위해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밝히면서, 그 예로, 남편이 참석하는 행사에 동행하고, 연설문을 읽고 코멘트하는 등등을 들었다. 그야말로 비선 비서이자 참모의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여성들이 담당해 온 가사 노동--페넬로페의 바느질!--의 가치화 및 경제 기여도 재평가와 유사한 맥락에서, 배우자로서 관행적으로 비서나 참모의 역할을 대신함에도 보수는 물론이거니와 상징적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차원--
--말하자면 페넬로페가 바느질이나 충절로써 오딧세우스 신화에 기여한 바를 인정하자는 취지?--이었다는 해석으로 쉴드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으나, 이는 아무래도 과도한 해석이겠다. 설령 이 해석을 따른다 해도, 더욱이 실제로도 정치인 중에 배우자를 그런 명목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도 하니,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비서나 참모로 채용하고 규정에 따라 보수를 지급하지 않은 책임은 물을 수밖에 없다.  

트로카데로 집회 사진을 보니, 모두가 단체로 맞춘 꼭 같은 규격의 삼색기를 들고 일제히 흔드는 모양이, 요새 서울시청앞에서 열린다는 태극기 집회의 그것을 빼다 박았다. 심지어 참가 인원을 제멋대로 부풀리는 것도 닮았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아니 세태 판단이나 대세론까지 갈 것도 없이, 합리적 동물로서 최소한의 사고력과 판단력만 발휘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에, 오답을 답이라 우기면서 정신승리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프랑스혁명이나 68혁명, 그리고 광주나 87년 항쟁 같은 역사가 결국 이걸 위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결국 역사는 현재에서 성찰하고 긴장하고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의 교훈.

2017년 3월 2일 목요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전집 출간

입수(!) 기념해서 올려보는 다른 이야기


육체의 사용 (또는 몸쓰기몸의 쓰임새이른바 " 쓰는 ",  육체노동을 가리키는 말로부터 출발) 끝으로호모 사케르 연작이 완간되면서 아감벤이 97년부터 20 가까이 펼친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개인적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2007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호모 사케르 1권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10년의 세월동안 웅장한 지적 여정에  명의 관객으로 나름대로 참여해 왔으니비록 소극적이고 소심할 뿐더러 게으르기까지 하여 참여는커녕 관찰자로서도 적격이었나 싶을 만큼 불량한 관객이었지만

관객으로서뿐 아니라 독자로서도 불량하여 1 이후로 연이어 나온 책들은 외면했다. 2012 이탈리아 여행  피렌체에서 지배와 영광 이탈리어판을 사온 것을 제외하면아감벤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실 책이 예뻤고 (그에 비하면 쇠이유에서 나오는 불역판은 미적 우수성에서 현저히 떨어진다), 여행 당시 불타오른 이탈리아에 대한 열정이 이탈리아어 학습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이유 (그러나  역시 오래 가진 않았다 열정이란 것이 사실 마담 보바리에게서처럼 도피성에 가까웠기에). 그런데 작년에 불역판 전집이 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전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전작들의 확보를 보류하고심지어  논문의 완성마저(!) 보류해 왔던 ...이라 말하면 스스로 비참해지니전건만 말한 걸로 해두자.

전집은 구했지만 당장 읽기는 힘들 것이므로 얼마  우연히 읽은 최근작 명령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본다 책은 아감벤이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엽편 에세이  하나분량상 책보다는 아티클에 가깝고 실제로 세미나 발표문이나 강연문을 전문 그대로 옮긴 경우가 많다대표적인 예로 장치란 무엇인가 있다  모아서 논문집이나 선집으로 내면 딱인 텍스트들이다이것이 이탈리아 출판계의 규범인지 아니면 프랑스로 건너 오면서 귤이 탱자가  사례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없는 출판 행태그러나 텍스트 자체만으로 보면  가치나 중요성은 상당하다오히려  간명성 때문에 주장과 논증의 명료성이 확보되는 측면이 있다다음은 책을 읽으며 했던  가지 단상.

  • 주제는 명령이다. 혹은 계율이나 계명. 10계명 때의 계명 말이다. 명령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 그런데 고고학이 뭔가. 아르케에 대한 탐구 아닌가. 서양철학의 시원에 있었던 바로 아르케. 만물을 시작하고(commencer) 호령(!)하는(commander) 원리를 탐구하면서 모든 지적 모험이 시작됐고, 이후의 모든 모험은 이러한 원리에 대한 탐구를 따르게 되었다.  
  • 푸코는 아르케를 재개념화하면서 고고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아르케는 시원이자 명령자라는 속성 때문에 만물에 대해 시간적으로도 우선해 있다고 생각돼 왔다. 그러나 푸코는 현재에서 출발한다. 현재가 고고학적 문제의 출발점인 동시에 명령자 (le présent au commencement/commandment).  
  • "태초에 빛이 있었다" 창세기의 첫구절을 보자. 아감벤은 희랍어 문법상 "태초" "명령"으로 바꿔도 무난하다고 말한다. 빛이 있으라 명령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편이 하늘이 있으라 명하매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기고 등등의 뒷구절과도 좀더 맞아 떨어지고.  
  • 희랍인에게는 의지라는 개념이 없었다. 레미 브라그가 그들에게 개인이나 반성적 혹은 인식적 주체 개념이 없었다고 말한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되는 말이다. 대신에 잠재태-완성태 개념이 있었다. 그렇다면 근대는 잠재태가 개인-주체의 의지로 이행으로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다
  • 명령의 문법 혹은 논리. 아감벤은 여기에서 오스틴의 수행성 개념을 상당 부분 참조하되, 명령의 논리가 그것만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평서문의 참과 거짓을 따지는 것으로 한정된 기존의 논리학은 존재(esti : être) 존재론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명령의 논리학은 존재의 존재론이 아니라, 그렇다고 생성(devenir) 존재론(보통 전통적 존재론에 대항해서 나온 니체나 베르그손의 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쓰인 표현) 아닌, 당위 혹은 의무(esto : devoir être) 존재론에 의거한다.
  • 칸트 윤리학에서 당위-의무는 의지와 동일시된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표어 : devoir pouvoir vouloir. 원하는 바를 있어야만 한다. 하고 싶은 것을 있고 그래야만 한다. 뭔가 해방감을 주는 것도 같지만 사실 괜히 의무론적 윤리학이 아니다. 유명한 정언 명령 "네가 욕망하는 바를 보편 의지와 일치하도록 하라"에서 보듯 의지란 결국 보편의지에 다름 아니다.  
  • 명령에 대한 아감벤의 고고학적 단상은, 나도 그랬지만 아감벤의 독자라면 더더욱 그랬겠듯, 필경사 바틀비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모든 법의 형식과 명령의 논리마저 무화시키는 것이 바틀비의 j'aimerais mieux pas/I'd rather not 이다. 해야 하는 것도, 있는 것도, 원하는 것도 아닌 무언가를 우리는 과연 " " 있는가?



2017년 3월 1일 수요일

배웅

떠난 이는 공항을 좋아한다 했다. 헤테로토피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의 지대. 아무 곳도 아닌 곳. 어디에나 갈 수 있으면서 아무 곳도 아닌 곳. 아무 곳도 아니기에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곳. 어디를 떠나와서 어디로 가든, 얼만큼 머물렀고 머무를지 간에, 누구에게나, 인생이 전환되고 때로는 초기화되는 순간. 

떠난 이가 남긴 음악을 듣는다. 함께 한 나날들이 선율에 실려 뇌리로 들어와 가슴께로 흐른다. 어떤 음악은 무척 가냘프고 구슬퍼, 듣다가 참, 이런 음악을 다 들었구나, 슬며시 웃다가, 문득, 언젠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눈이 떠올라, 그래, 그런 여린 면이 있었지,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떠난 이가 주고 간 물건들로 주변을 채운다. 원래 주인의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은 가느다란 초록빛 파일럿 펜. 여고생도 아니고 이런 펜을, 하며 슬며시 웃으려다, 문득, 언젠가 종이 여백에 능숙한 솜씨로 삽화를 그려넣던 모습이 떠올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가, 문득, 서로 알면서 모른척하고, 그러면서 설렘과 아픔을 주고받던 기억이 겹쳐지며 마음이 어두워지다가도, 이내, 그땐 우리 모두 어렸지, 하며 다시 미소를.

떠난 이와 함께 한 시간들이 뇌리를 수놓는다. 드문드문 박힌 별처럼. 가늘고 길다란 거미줄로 얽혀 있던 우리. 가늘고 길어 금방이라도 끊길 듯 아슬아슬해 보이고 때론 존재조차 의심스러웠을지라도 우리에게, 적어도 내게, 그것은 한없는 추락으로부터 구제한 구명줄과도 같았다. 서로가 서로의 질량으로 끌어당겨 휘고 비틀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해진 우리의 공간. 그 때문에 어쩌면 각자 가던 길이 굽어지고 멀어지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외려 더 아름답지 않을지. 함께였다는 이유 하나로.

2017년 2월 24일 금요일

맥북 수난이대

맥북프로를 샀던 것이 2010년 여름이었으니 벌써 칠년이 다 돼간다. 그 전에는 아이북을 썼다. 2005년 여름부터 2010년 여름까지, 그렇게 딱 5년 동안이었다. 5년 내내 가끔 팬이 돌기는 해도 대체로 멀쩡하고 속을 썩이는 일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애플 사용자는 소수였다. 주변의 컴덕들 사이에서는 반애플 정서도 제법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적잖은 비아냥을 감수하면서까지 맥의 전도사(이자 스티브 잡스의 팬)를 자처하는 걸로 지인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한 편이었다. 2010년이었던가, 잡스가 운명했을 때 내게 소식을 전하며 안부를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부턴가 주변에서 맥북 시리즈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지인들에서부터 도서관이나 학회장에서 보는 학자들, 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청중까지. 애플이 이렇듯 이 시장을 석권하게 된 사실은 나같은 탐미주의자 그리고/혹은 스노브들을 현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미적인 우수성만으로는 설명되기 힘들고,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다. 아이폰의 보급으로 애플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학생 및 교육자들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백 투 스쿨" 행사가 상당한 파급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내 가설이다. 딱 그 용도, 즉 수업이나 세미나에 참석하고 논문을 쓰고 하는 등등의 이른바 학술적 용도에 맞으면서, 안정적이고 또 맥 특유의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를 갖춘 사실도 고려해야겠지만. 이렇게만 놓고 보면, 혹은 결과적으로 보자면, 나름대로 선구자이자 트렌드 세터였던 셈인데, 사실 그보다는, 어쩌다 아이북을 쓰게 되고 그 뒤로 쭉 이어온 경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물론 "앺등이" 특유의 페티쉬즘과 스노비즘 성향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심지어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대놓고 드러내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대에 앞서(!) 5년 간 고이고이 아껴 쓰던 아이북. 국립도서관 지하 연구관에서였다. 팬소리가 윙 하고 나더니 제멋대로 종료. 그리고 부팅 불가. 하늘이 노래졌다. 그리고 수차례 재시동 시도. 그 지하 연구관이 또 어떤 곳인가. 절대 정숙이 요구되며 일체의 소음도 불허하는 곳 아닌가. 환경도 환경이고 몇 번 시도해도 안되길래 결국 포기. 그리고는 도서관을 나서 파리 동쪽과 북쪽으로 오가며 주변의 같은 기종 사용자를 비롯 컴덕(이지만 반애플 정서의 소유자였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자구책을 모색했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 이 에피소드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 바로 다음날, 덥썩 교체를 결정하고는, 오페라의 애플스토어에서 즉석 구매. 백투스쿨로 할인가에다가 그과 더불어 아이팟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로부터 5년 전 아이북 구입시에도 아이팟을 받았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지 6년째 되어가던 작년. 초반부터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최초의 사태가 일어난 것은 3월 30일 새벽. 아마도 운영 체제인 앨 캐피탄을 업데이트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고, 정확히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한데, 아마도 유튭으로 동영상을 돌리려던 찰나였던 것 같다. 그 전에도 동영상을 돌릴라치면 팬 소리가 나서, 내가 겁이 난 나머지 강제로 종료하는 일이 더러 있긴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열어 두었던 논문 작성용 앱인 스크리브너에서부터 모든 앱들이 일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플 컴퓨터 사용자라면 누구나 아는 공포의 무지개빛 비치볼 회전 (사실 애플 사용자라고 누구나 안다면 과장이다. 정상적인 사용자라면 그다지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애플 좋다는 게 뭔가)! 너무나 놀라서 작업들을 중요하지 않은 순서대로 하나 하나 종료를 해나갔다. 스크리브너의 차례가 오기 전에 사태가 종식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나 결국은 실패. 강제종료를 한 뒤 수차례 재시동 시도. 복구 모드 및 안전 모드로 시도. 역시나 수차례. 

나름대로 평소 백업에 신경을 쓴다고는 하나 이런 사태가 벌어질 즈음이면 하필 며칠간 경계를 늦춘 상태였다든지, 설사 그랬다고 해도 그 며칠동안 별 성과가 없었다면 크게 애석할 일도 없으련만 하필, 그 전에는 계속 안 풀리던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오랜만에 생산성을 고취하고 있는 시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저 사태는 그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부팅이 안 되어 사태 이전은 물론이요 그 이후의 전개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모든 역사를 무화시켜 버리는 특이점의 사건이었달까. 메타포로 더 적당한 것은 블랙홀 이론이겠다. 지난 10년의 역사, 그리고 향후 최소한 10년 후의 역사를 빨아들인 사건의 지평선. 논문을 그만두라는 계시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한 사건.

일단은 운영 체제를 재설치하면 되겠는데 (걸핏하면 윈도우를 재설치해야 하는 아이비엠 컴퓨터와는 달리 맥에서는 드문 일. 운영 체제를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처음에는 그래도 복구 디스크를 찾아서 복구 모드로 시동이 되더니 시동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마저도 불가능해지나 싶었다. 구입 당시 들어있던 설치 씨디롬으로도 하드웨어 테스트도 해보고, 심지어 아마도 개발자용으로 만들어졌을 벌바팀 모드로도 시동해서 파일 시스템 체크도 하고 (내가 아무리 라텍 사용자라 그 옛날 도스를 방불케 하는 사용 환경을 전적으로 낯설어 하는 건 아니라 해도 갑자기 터미널에서 fsck, cd.. 등의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어찌 당황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드디스크 테스트를 해보니 문제가 있어 포맷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포맷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역시 맥 쓰면서는 좀처럼 해보기 힘든 일). 다행히 논문을 포함한 각종 데이타들은 비교적 안전히 보관돼 있는 걸로 보였다. 그래서 그 데이타들을 통째로 복사해서 외장 디스크에 옮기고, 하드 디스크를 포맷한 뒤, 운영 체제를 새로 설치하고 외장 디스크의 복사본을 원래 자리로 되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오, 결코 간단치 않았다. 일단 외장 디스크부터 포맷해야 했다. 거기에는 주로 하드 디스크 공간 확보를 위해 따로 저장해 둔 파일들이 있었다. 논문 자료들도 있지만 지난 10년간 누군가로부터 받거나 내가 따로 모아둔 영화, 음악, 그리고 그밖의 각종 음성 및 영상자료들. 뭐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구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10년의 역사가 아쉬웠다. 무엇보다도,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찬란했을 시절의 사진들. 잠시 그 영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눈물을 머금고 삭제를 눌렀다.

그리하여 외장 디스크 포맷. 여기에 복원용 디스크 생성. 그리고는 하드 디스크 포맷. 그리고 구입당시 받았던 시디롬으로 역시 당시의 운영 체제인 스노우라이언 설치. 아니, 일단은 외장 디스크를 시동 디스크로 설정하고 거기에서 다시 시작했던가? 다행인 것은 애플에서 한두 해 전부터 운영 체제를 무료로 공개, 앱스토어에서 최신 버전 다운로드가 가능해졌다는 사실. 그러나 불행인 것은 집에서 인터넷 연결이 시원치 않아 그 정도 용량의 데이터 전송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타임머신을 타고 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현 시점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내 집만 유일하게 5년 전 그 상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달까.

그리하여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고는, 아침 일찍 유선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국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새 것과 다름 없는 하드 디스크를 새로이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앨 캐피탄부터 시작해서 다른 앱들, 기본 설치에서부터 스크리브너를 포함, 유료 앱들까지 다...는 아니고 정말 필요불가결한 것들만 선별, 이른바 간단 설치를 수행했다. 그렇게 하는 데만 해도 만 하루가 넘게 걸렸다. 그래도 비교적 단시간 안에 5년 간 이 컴퓨터가 초기 상태에서 가장 최근의 상태까지 걸어온 진화의 과정을 재연한, 말하자면 압축적 근대화의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 정상화한지 불과 일주일 후인 4월 7일. 다시 비치볼이 돌기 시작하고 모든 앱들이 일제히 무응답하는 일이 발생. 다행히 지난 사태 이후로 타임머신 기능을 활성화시킨 상태였기에 이번에는 비교적 수월할 줄 알았으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다시 안전 모드로 시동하고, 디스크 검사를 하고, 오닉스라는 디스크 관리 앱으로 검사 및 복구를 수행한 끝에 간신히 복구 성공. 대체 근본적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앨캐피탄의 한 버전(10.11)에서 파일 시스템 상의 논리적 오류가 발생하게 된 것 같다는 것이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무선 인터넷 연결상의 문제는 앨캡 전반에 걸쳐 있는 것 같고. 

그 이후로 한 6개월 간, 제발 이 논문이 끝날 때까지만 버텨주길 빌며 살얼음 걷듯 조심스레 다룬 탓에 비교적 탈없이 잘 쓰고 있었으나... 논문은 끝나지 않았고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 사태의 결과라기보다는 궁극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급기야는 10월 13일 밤, 맙소사, 반년 전과 똑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경험의 힘일까, 줄잡아 하루 정도의 시간은 버리게 생겼지만, 그래도 복구가 가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이전 사태의 영향으로 백업 또한 예전보다는 자주 해두곤 했기 때문에 여파 또한 전보다 더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다음날, 파리로 출장을 와있던 동생이 마침 시간이 나서 저녁을 같이 보내게 되었고, 이때 지난 밤 사태에 관해 들은 동생은, 그렇게 불안해서 어떻게 쓰겠느냐며 구입을 제안했다. 6년 전 아이북 사태 때 새로 구입할 것을 제안한 것도 동생이었다. 그래서 그 길로 바로 라데팡스 애플스토어에 가서 맥북에어를 구입했다. 일체의 사전 조사 없이, 복권 당첨자라면 모를까, 요새 누가 할까 싶은 무모한 소비 행위였지만, 그렇게 비합리적이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시간과 타이밍이 문제였기에. 물론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날 새 맥북에어를 들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망가진 맥북프로를 복구하는 일이었다. 이전과 똑같이 지난한 과정 (복구 모드 후 운영시스템 재설치)을 거쳐 사태 직전까지의 데이타를 온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데이타와 설정을 다시 맥북에어로 옮길 수 있었다. 몇몇 중요한 앱들을 새로 등록을 하고 시리얼키를 입력하는 등의 또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긴 했지만. 

그리하여 맥북프로와 맥북에어를 양손에 거느리는 2원 체제를 갖추게 된지도 어언 4개월여. 새로운 운영체제인 시에라를 설치했다 몇몇 앱과의 호환성 문제로 다시 앨캡으로 다운그레이드한다든지 등의 몇 번의 부침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듯하다. 여전히 문제는 논문이다.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로맨스 이후

이른바 "로맨스 영화"(로맨틱 코미디, 멜로드라마, etc.)들이 가족 및 사랑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거나 (재)생산하는 방식에 관하여. 

편의상 이 부류의 영화들을 로맨스로 통칭하자. 이성애 중심의 가족 및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이 짝을 얻고 안정과 평화를 (되)찾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결말로 가는 플롯 구성이 기존 이 부류 영화들의 규칙 중 하나였다. 로맨스는 부부의 생리학이든 연애론이든 간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고 앞으로도 뭔가 새로운 게 나올까 싶고, 새롭건 진부하건 간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을, 보편적이고 영원한 테마틱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장르"를 넘어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들에 어떤 하나의 범주와 그에 준하는 속성을 부여하기란 어렵고, 이런 범주화가 과연 유의미한지 또는 유효한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에스에프나 호러 같은 대표적인 "장르물"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이 장르야 이미 존재 이유에서부터 내적 기준에 이르기까지 그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고, 장르의 하위 개념으로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장르라는 개념 자체가 거기에서부터 나왔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로맨스" 부류는 같은 하나의 장르로 규정되기에는 너무 보편적이며 또 그 변주 또한 너무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어드저스트먼트 뷰로>나 <소스 코드> 같은 버젓한 에스에프 영화들도 로맨스 코드를 버젓하게 갖추고 있는 바, 이런 영화들까지 로맨스로 치자면 도대체 로맨스가 아닌 것이 있겠느냔 말이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크로넨버그의 <플라이>를 상영하는 극장 매표소 앞에서, 너무 무섭지 않느냐며 주저하는 한 관객에게 직원이 '사랑 이야기'라며 안심시키는 것도 봤다.

이런 위험과 부담을 무릅쓰고, 대신 이러한 시도의 한계--성급한 일반화, 피상적 분석, etc.--를 숙지한 채로, 일반화 논의를 밀고 나가보자. 

로맨스의 상당수는,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서 "그들은 아이를 많이 많이 낳고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 좀 더 나간다면 셰익스피어 희극이나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기원을 둔, 소위 "로맨틱 코미디"이거나, 아니면, 두 주인공이 둘 다 죽거나 아니면 한 사람만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남겨진 채로 불행한 여생을 보내는 걸로 끝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혹은 [폭풍의 언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장미 혹은 신파가 넘치는 멜로 드라마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쨌든 이 모든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 나아가 본질은, 두 영혼의 조합 혹은 합일 여부에 있었을 터다. 나머지는, 매우 거칠게 말해서, 부차적 요소나 극적인 장치에 불과했고.  

이 구도가 복잡해지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아마도, 이른바 "근대적 주체"가 등장하고, 근대 산업화 및 도시화 이후로 이 주체가 더욱더 개인화되고 분자화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두 영혼의 합일 여부에 앞 각 영혼의 개별성과 특이성이 부각되고, 이들 앞에는 이제 "주체"로 거듭나고 자아(정체성)을 실현해야 할 과제가 놓이게 된다. "또 다른 반쪽"이나 "영혼의 쌍둥이", 즉 타자와의 조화나 합일은 더 이상 당위이거나 목표가 아니고, 기껏해야 이 과제를 실현키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러면서, 역으로, 타자와의 조화나 합일의 당위성을 지적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일이 지배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식 가족 및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다. 이제, (악인을 제외한)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안정과 평화와 행복을 찾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일정하고 규격화된 메세지-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신성하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등등-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2004년작인 [500일의 썸머]<500>까지만 해도 그랬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는 "탐이 그 동안의 연애사에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우연들에 전 우주적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하고 끝을 맺으려다 "그러나..."를 덧붙인다. 탐이 또 다시, 저 보편적이고 냉엄한 진리를 거스르고,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소한 우연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 내레이터는 말을 잇지 못하고, 탐은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보낸다. 관객에게 자신이 받은 큐피드/우연의 여신의 가호를 관객에게 전수라도 할 기세다. 이렇듯, "사람은 결국 혼자다. 혼자인 것 맞는데..."하고 말꼬리를 흘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덧붙이고, 거기에 뭔가 더불어 사는 삶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이것이 로맨스의 논리 구조였다. 그 중 어떤 논증들은 진부하거나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어떤 결론들은 기만적이기까지 했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2010년대에 나온 로맨스들은 이러한 전통 서사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인다. 특히, [블루 발렌타인], [벨빌 도쿄], [비기너스] 등, 2010년을 전후로 해서 나온 30대 이성애 커플들의 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그렇다.  

[블루 발렌타인]은, 아이, 강아지, 일 등등에 치여 살던 30대 부부가 마침내 파경을 맞게 되는 약 48시간의 일과가 이야기의 주축이다. 두 사람 모두 가족에 관한 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남편은 엄마 없이 자랐고, 아내는 애정이 식은 부모(아빠는 가부장) 밑에서 자랐다. 처음에 그들이 꾸린 가정은 이에 대한 보상 기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48시간 동안, 몇몇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이 벌어지고, 이 갈등은 그때까지 쌓인 앙금을 표면화하여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아이에겐 부모가 필요하다"는 남편에게 부인은 "원수지간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만큼 아이에게 비극적인 건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뒤돌아 혼자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춘다. 

이 영화에서는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의 과거, 그리고 맞벌이 부부로 사는 현재, 이 두 시간대가 별다른 구분 없이 맞물린 채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라고는 하지만 그 시간차는 겨우 5-6년 정도.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들의 외모상의 변화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근과거"의 재현은 배우를 바꾸거나 배우에게 코스튬을 입히거나 시대를 반영한 세트를 꾸미는 사극/역사물과는 다른 테크닉을 요한다. 이를테면, 딱히 플래시백임을 보여주는 장치 없이 과거 시퀀스들이 현재의 곳곳에 랜덤하게 끼어들면, 보는 사람은 뭐가 현재고 뭐가 과거인지 혼동하게 되고, 플롯을 시간 순서대로 그리고/또는 인과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애를 먹게 될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경우가 그러했고, 2011년경 나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그러했다 (후자는 로맨스와 거리가 멀지만. 멀어도 한참 멀지만. 그런데, 또, 그렇게 먼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본격 첩보물 영화에도 로맨스 코드는 당연히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별다른 장치 없이도 그런 혼란의 소지를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젊고, 첫 만남에 설레고, 임신이나 결혼이라는 변화가 마냥 두렵기만 한 20대의 그들과, 30대로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강아지를 키우고 일터에 나가는 등등의 일상에 치인 현재의 그들, 이 둘 사이의 간극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테제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벨빌 도쿄]의 주인공은 영화평론가와 영화관 프로그래머인 파리지엥 부부. "벨빌 도쿄"라는 제목은, 극 중 남편이 도쿄 영화제 출장이라는 핑계를 대고 파리에 사는 애인의 집에 며칠 묶던 중에 동양 사람들 (주로 중국인들)이 많은 파리 북동쪽 벨빌의 한 가게에 들어가 아내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신 중인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내는 황당해 하다가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돌아온다. 아내는 또 괴로워하다가 또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남편이 (생각보다 훨씬) 이중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도쿄에 있는 줄 알았던 남편을 파리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 뒤를 쫓다가 애인에 집까지 당도...) 먼저 스스로 떠난다 . 이 영화 역시 주인공이 혼자 뒤돌아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비기너스]는 30대 후반의 미혼 남성인 주인공의 시점을 취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웃음을 잃었다가 파티에서 만난 발랄한 프랑스 아가씨를 만나 애도를 끝낸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두 영화는 다르다 하겠다. 우선, 굳이 하위장르를 따져 세분하자면, 내가 개인적으로 "연애입문 및 성장담"이라 부르는 장르(플로베르의 [감성교육]과 발자크의 [골짜기 백합]에서부터 트뤼포의 두아넬 연작이 이에 속한다. 베르테르도?)에 속한다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희극과 비극의 이분법 구도에서는 희극에 가깝다. 감독도 일러스트레이터 출신이고, 또 주인공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인 만큼, 발랄한 일러스트 컷도 많고 아기자기한 데코도 많고. 그럼에도 영화는 별로 밝지 않다. 주인공이 어둡기 때문이다. 단지 부친상을 당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의 현재를 장식하는 주변 인물들이 밝을수록, 주인공의 회상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70이 넘어 커밍아웃을 하고 젊은 게이들과 정력적인 정치 및 사교 활동을 펼칠수록, 그의 어두운 면모는 더더욱 부각되며, 이는 프랑스 아가씨가 짐을 싸들고 집으로 같이 살러 왔을 때 이 아가씨가 지닌 어둠의 포스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위의 영화들이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셋 다 열린 결말이라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결말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일 게고, 관객은 자신의 인생관이나 연애관이나 현재의 심리 상태에 비추어 결말에 대해 각자 다른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블루 발렌타인]과 [도쿄 벨빌]의 경우, 영화가 이혼 법정에서 끝나지 않은 이상, '언해피'하지는 않은 엔딩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 주인공이 뒤돌아서는 마지막 장면들은, 오, 쓸쓸하기 짝이 없다. [비기너스] 같은 경우, 아가씨는 떠나고 주인공은 아가씨를 찾아 뉴욕까지 가서 결국 두 사람이 재상봉하고 있는 만큼, 남녀 주인공 둘이 벽을 깨고 서로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행복한 미래를 암시하는 여지를 비교적 충분히 남겨놓고 있는데, 그럼에도, 관점의 주관성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열린 결말"은, 이 결말이야말로,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시인의 명제는 유효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섬에 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그러한 보편 정서를 반영, 자기애 가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유아론적인 인물이 점차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아 가고 마침내 결말에 가서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에 당도하는 과정을 그려왔다. 그런데 위의 세 영화들은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 첫 명제를 반복하고 거기에 커다란 마침표를 찍는 데에 그친다. 관계에 대해 희망이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회의론을 재고할 최소한의 계기조차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섬"에 가고픈 열망이 집단의식 차원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아니면 영화가 재현하거나 생산하려는 가족 및 사랑 이데올로기가 변했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아님 둘 다이거나.
...라는 것이 2011년 가을 무렵 이 글을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비슷한 주제--30대 이성애 커플의 삶과 사랑--의 영화들을 보며 "어떤 경향"을 읽어내려는 의도에서. 이런 성격의 글이 시기를 놓치면 아무 소용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냥 버리지는 못하고 어쩌지도 못하고 그렇게 방치한 채로 몇 달을 보내던 중, 아니, 보내는 내내, 그 사이에 나온 다른 영화들을 보며, 관계 불가능성 가설을 검증하고 보완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이 가설을 철회하거나 대대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관계의 원천적 불가능성보다는 관계의 재개념화를 포착했어야 했다.
...라는 것이 2012년 초, 정확히 이맘 때, 처음에 시작했던 글을 끝맺어 보려 다시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려 5년이 지났다. 하필 30대의 마지막과 겹쳐 버린 그 5년이라는 세월 동안,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은 극단적 회의론과 대책없고 위험천만한 낭만주의를 정신없이 오갔고, 그렇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끝에, 결국에는 다시, 원천적 불가능론으로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무릎 위에서 재롱 부리는 손주를 같이 바라보고, 밤에 늦게 들어오면 얄밉기는 해도 밥은 먹여주고, 밸런타인에는 초콜릿도 주고, 전기가 나가면 퓨즈를 갈아줄 누군가와 더불어 예순 네살을 맞이(Beatles, "When I'm Sixty-Four" : 나의 결혼관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여전히 최고의 청혼가라 생각하는 노래)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생각하니 다소 슬프긴 하지만, 이까짓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기분 쯤이야, 진리에 바친 삶을 위해서라면야 (vitam imprendere vero)!

2017년 2월 20일 월요일

이번에는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에 페르디낭 알키에(Ferdinand Alquié) 만한 적격자도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권위자로 드높은 명성을 지닌 철학사가로서 그가 가진 권위도 권위지만, 무엇보다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본 이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1956년 한 강연에서 이 문제를 다뤘고, 강연문은 "Qu'est-ce que comprendre un philosophe ?"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05년에 재출간된 이 책을 나는 작년 여름에 뽕삐두 센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당시 책을 읽으며 적은 노트를 최근에 우연히 발견했다. 알키에가 본문에서 말르브랑슈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는 바, 철학이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낯설음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Unheimlichkeit !?!?), 철학사는 낯설음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 기록을 옮겨 본다. 
데카르트나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유클리드 정리와 같은 비인격적/비인칭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한 심리학적 대상으로서 분석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그가 의심이 많은 체질이거나 성장 환경 때문에 의심이 많아졌다든지, 그래서 사람에 대한 신용과 불신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고 그것이 방법으로서의 회의에 영향을 미쳤다든지 하는 전기적, 심리적 인과 분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철학은 철학적 진리를 말하거나 추구한다. 철학적 진리는 비인칭 진리는 아니지만 보편 진리이다. 철학자와 그의 철학은 인격적/개인적 보편성을 담보한다. 혹은 주관적 보편성. 과학적 진리의 보편성도 아니고 심리학에서처럼 한 개인에게 한정된 개인적 진리도 아닌. 철학적 진리가 개인적이라면, 즉 칸트나 데카르트 개인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특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적 진리는 보편적이고, 이는 특수한 의미에서 그러한데, 그 진리를 주창한 철학자와 연결돼 있다는 의미에서다.

철학자는 세상을 의문에 부친다.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모든 철학자는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노라 불평한다. 실제로 이해받지 못했다 느낀 듯하다. 이는 동시대인들과 교환한 서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는 외롭다. 그는 보편 진리를 발견했음에도 그 진리를 공유하지 못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 있다.

1630년, 영원진리를 발견한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수학적 증명보다 더 자명하게 밝힐 방법을 찾았노라며 메르센느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덧붙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수학적 진리보다 더 자명한데 설득이 불가하다니. 보편적이고 확실함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진리라니. 서구철학은 어찌 보면 몰이해에서 나왔다. 소크라테스 같은 현자가 이해받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이었듯. 그러나 어떤 사실이나 가치가 자명함에도 이해불가한 경우가 드문 곳은 아니라며 알키에는 예를 든다. 창조자가 피조물에 비해 우월하다. 과학을 만드는 정신이 그가 만든 산물인 과학에 비해 우월하다. 알키에에 따르면 이것은 매우 자명한 진리임에도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자명한가?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주체의 소외, 상품의 물신화 등등을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알키에는 또 철학과 역사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한다. 특히 철학(자)을 역사 안에 위치시키려는 철학사 방법에 반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헤겔 : 철학을 독살하고 감금하는 역사. 모든 철학, 사유가 역사의 한 순간이요 그 시대의 산물이고 표현이라는 것이 헤겔의 주장. 칸트가 어떻게 과학이 가능한지를 물었다면 헤겔은 어떻게 칸트의 물음이 가능했는지를 묻는다는 것이다 (이 도식으로 보면 헤겔은 푸코의 고고학의 선구자가 되는 셈). 맑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모든 철학과 사유를 단지 (스쳐가는?) 역사의 한 순간으로 만든다는 것이 알키에 비판의 주요 논지다. 모든 철학자들이 고독하지만 그는 그가 주장하는 진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하고 호소한다. 동시대인들에게. 혹은 역사에. 그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와의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대화의 중요성 -- 변증법이 아니라. 플라톤은 물론, 고전시대 말르브랑슈와 베이컨 등까지. 대화란 늘 나와 닮은 누군가, 나와 동등하고 유사한 의식 주체를 상정한다. 그리하여 정신의 평등한 공화정이 성립된다. 그러나 헤겔에게는 그와 같은 유사자가 없다. 각 철학자가 역사와 환경의 산물이라면 철학자들 사이에 유사성이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겔이나 맑스가 전제하는 진보사관에 따르면 후대 철학자가 선대 철학자보다 우월하다. 후대만이 선대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단지 그뿐은 아니고 전제상 시대와 환경이 다른 철학자의 질문과 답변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답변보다 질문을, 문제를 중시하는 것도 이 같은 접근의 특징 (이 지점 또한 알키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선대의 질문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버클리에게나 우리에게나 중요하고 사실상 답이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체계?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철학자의 체계를 이해하거나 재구성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실제로 철학사의 가장 고전적인 정의 중 하나다. 한 철학을 이루는 요소들은 그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그것이 전체 내에서의 위치,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라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체계가 철학의 전부는 아니라고 알키에는 강조한다 (이처럼 알키에는 게루나 뷔유맹 등의 이른바 구조주의적 철학사에도 반대하는 듯하다). 데카르트는 체계의 구축을 목표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진리 추구였다. 칸트와 버클리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체계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방법으로서 불완전하다. 심리적 방법, 수학적 방법, 역사적 방법 등 많은 방법이 그러하듯. 무엇보다 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이다. 체계적 접근은 자명하지 않은 요소들을 자명한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다. 또한, 체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라이프니츠의 체계와 칸트의 체계는 엄연히 다르다. 체계적 접근은 각 철학자들의 특수성을 사상한다. 각자 자신의 환경과 교류하고 그에 반응하며 그러한 점에서 열려 있는 고유한 개성을.

그리하여 철학자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알키에가 제시하는 것은 과정/절차démarche를 통한 접근. 생성적 접근. 체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 각 철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한 체계에 이르기까지, 주관적 인식에서 보편적 언명으로 이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이야말로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의 창조 테제. 그리고 칸트의 경우에는 부정량에 관한 소고에서 보인, 감각적인 것의 개념으로의 환원불가능성 테제. 이로부터 <판단력비판>에 이르기까지 이 감각과 지성의 이분법의 도식은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과정이란 일정한 테마-주제들 사이에 논리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르브랑슈, 파스칼, 흄, 칸트 등은 너무도 다르지만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자연에서 법칙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문제-주제로 삼았다는 점.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인데 충분히 구속적이며 보편적인 법칙의 존재를 의문에 부쳤다는 점. 각자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이 법칙의 필연성 자체가 우연성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즉 자연-대상이 존재론적으로 불충분하다는 것. 그 부족분을 말르브상슈는 신에게서 찾으려 했고 흄은 대상이 아니라 주관에서 찾으려 했다. 이들이 각자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밟은 절차는 각각 다르다. 이 절차들은 그것을 직접 밟은 철학자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개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에 그만큼 의미도 한정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절차는 바로 그가 직접 밟았다는 사실에 의해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각 절차들은 특수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보편적이다. 동시대인들이건 후대인이건 간에 그들과 닮은 사람들에 의해 거의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노트가 새삼 눈에 띈 것은, 마침, 푸앵카레를 한 명의 엄연한 철학자로서 보고, 그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서 접근하기 위한 여러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던 때문. 그런데 아직도 "모색"이라니!?!?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그렇지만 논문의 주제 자체가 "모색"에 대한 탐구요, 따라서 논문 전체 방향도 모색의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고 있는 만큼, 논문 또한 모색에 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주객일치라고 보면 되겠다. 방법론과 기타에 지나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나머지 주객전도가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으나. 

어쨌든 온갖 시행착오와 좌충우돌 끝에 기껏 체계로 규정하고 체계의 진화를 추적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알키에가 제시하는 방향과 그리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익숙함"은 위 인용문 마지막 문단에서 전하는 바, 법칙 필연성의 우연성 논제에서 왔다. 이 논제를 푸앵카레 규약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 내 주장인데 이 논제가 실은 17세기에 이미...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는 물론 고대에서도 유사한 전례가 나올 것이다. 이것이 철학사의 힘이자 한계다. 이 익숙함에서 다시 낯설음을 이끌어내고 새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점, 선, 면의 몸짓들. 클레 전의 인상

2016년 여름, 퐁피두 센터 파울 클레 L'ironie à l'œuvre 전
Merci, encore, à ㄴ 언니, 그리고 동행한 ㅎ

Bilderbogen (그림 종이/그림판) . 1937. 부분.
점, 선, 그리고 면, 이 가장 간단한 재료들만으로 가장 역동적인 몸짓을.
 
abstractes Ballet (추상 발레).1937. 부분.
선은 면이 되고, 면은 춤이 되고, 선에 기댄 면이 다시 선을 받쳐주고,
모두가 한 데로 어우러져 하나의 몸짓을. 

Duell (대결). 1938.
그러나 선은 때로 날을 세워 면을 찌르고, 
찔린 면은 피 한 점 한 점 흘리며 쓰러지며 최후의 몸짓을.

Tänze vor Angst (불안의 춤). 1938.

모든 칼은 춤이 되고 또 모든 춤은 칼이 되어 버린 참상을 딛고,
너의 선과 나의 면이 만나 다시 하나의 몸짓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