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와 무한 (2) 유한의 무한 도전 : 세계와 정신의 한계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16일)*

 서론 : 역설,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무한 개념의 기원과 분류 : 물리적 무한과 수학적 무한, 가무한과 실무한

역설의 보고(寶庫)로서의 무한

물리적 무한과 그 역설

그리스의 유한 우주와 그 역설

근대 무한 우주의 도입

밤하늘은 왜 검은가? 올베르스의 역설 칸트의 이율배반

수학적 무한과 그 역설

연속과 무한 : 제논의 역설

무한은 얼마나 작은가? 미분의 도입과 무한소 무한을 셀 수 있는가? 힐베르트의 무한 호텔 무한은 얼마나 큰가? 칸토어의 역설

결론 : 무한과 한계, 그리고 역설의 가치


별첨(인용구)

1° 모순율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위배를 거두어야 할 필요가 우리로 하여금 수학적 연속을 발명하도록 강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념의 모든 것이 정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또 정신에 이러한 기회를 부여한 것이 경험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앙리 푸앵카레,『과학과 가설』 (1902)

2° 잠재적 존재와 현실적 존재가 있으며, 추가에 의한 무한과 분할에 의한 무한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크기도 현실적으로 무한하지 않고 크기는 분할에 의해 무한하다고 말했다 (분할불가능한 선이 있다는 주장은 쉽게 반박된다). 그러므로 크기는 잠재적으로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크 기가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을, 잠재적인 조각 작품이 언젠가 현실적인 조각 작품이 되는 것처럼 크기가 언젠가 현실적으로 무한해지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여러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무한하다는 말은 특정한 날이나 경기가 있다는 말과 뜻이 같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별할 수 있다. 올림픽 경기는 거행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 거행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있을 수도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3° 17세기 혁명에서 비롯된 변화는 코스모스의 해체와 공간의 기하학화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 어졌다. a) 변화와 부패의 영역의 중심인 무겁고 불투명한 지구가 있고, 그 “윗편”에 무게도 없고 부패하지 않으면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위치한 천 상계가 “올라선” 것이 [코스모스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무제한의, 나아가 무한의 우주, 모든 부분 들을 [일괄적으로] 지배하는 법칙들, 그리고 같은 존재론적 수준에 위치한 요소들의 동일성에 의해 서만 통일된 우주가 그것이다. b) 아리스토텔레스 공간관, 즉 세계 안의 장소들의 차등화된 총체였 던 공간이 등질적이고 필연적으로 무한한 연장체 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구조상 우주의 실제 공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될 것이었다. – 알렉상드르 코이레, 『닫힌 세계에 서 무한 우주로 (From Closed World to Infinite Universe)』 (1957)

4° 앞의 것들[무한한 선, 물체의 분할, 별들의 수...] 을 우리는 무한하다고 하기보다는 부정(不定)하다 고했다. 이는 무한이라는 용어를 단지 신에게만 쓰고자 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단지 신에게 있어서만 어떠한 한계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떠한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반면에 우리는 다른 것들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와 같이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그것들이 한계를 갖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발견할 수는 없고 단지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 데카르트, 『철학원리』 (1644)

5°모든 사물들이 공유하는 성질들이 있고, 그 성질들에 대한 앎은 우리의 정신을 자연의 가장 큰 경이로움으로 이끈다. 그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경이로움은 모든 사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무한, 즉 무한대와 무한소이다. 어떤 공간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큰 공간을 상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것보다 더 큰 공간도 상상할 수 있다. 이 상상은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공간에 도달함 없이 무한히 계속된다. 반대로 어떤 공간이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 작은 공간을 생각할 수 있고, 그 생각은 더 이상 분할불가능한 공간에 도달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된다. 시간도 마찬 가지다. 우리의 한계를 깨닫자. 우리는 한 사물이지 모든 사물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는 무에서 발생하는 최초 원리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우리 존재의 작음은 우리의 눈앞에서 무한을 감춘다. [...] 이 무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6° 무한한 공간 전체에 정말로 태양들이 있다면, 그 태양들이 대략 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분포 하든지 아니면 은하수-시스템들에 속해서 분포하든지 간에, 태양들의 개수는 무한대일 테고, 따라서 온 하늘이 태양에 못지 않게 많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서 뻗어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직선 각각이 반드시 어떤 항성과 만날 것이고, 따라서 하늘의 모든 지점이 우리를 향해 항성의빛,곧태양의빛을보낼것이기때문이다. –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 1832

7° 별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면, 밤하늘의 배경은 은하수처럼균일하게밝을 것이다.왜냐하면밤하 늘의배경전체에별이없는지점이단하나도없 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망원경 들이 무수한 방향에서 포착하는 허공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보이지 않는 배경까지의 거리가 어 마어마하게 멀어서 거기에서 출발한 광선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일 성싶다 – 애드거 앨런 포, 『유레카 : 산문시』 (1848)

8° [모든 사물은] 분할가능하거나 분할가능하지 않 거나 둘 중 하나다. 분할가능한 것은 분할가능하지 않는 것으로 분할되거나 계속해서 분할되거나 둘 중하나다.마지막경우가연속에해당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9° 시간이 어떻게 영혼과 관계하는지, 왜 시간이 땅과 바다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연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만일 영혼이 없다면 시간이 존재할까,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이 셀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어지는 것 혹은 셀 수 있는 것인 수도 명백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는 능력을 가진 영혼이나 영혼 속의 정신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영혼 속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면 시간의 바탕만 존재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0° 사유되지 않는 것은 순전한 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사유만을 사유할 수 있으며, 사물에 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언어란 오직 우리의 사유를 표현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유 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명은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의 짧은 일화에 지나지 않고 –시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이 일화에서조차 의식적 사유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으며 오직 한 순간만 지속할 뿐임을 지질학의 역사는 보여준다. 사유란 기나긴 밤의 한 가운데 내리치는 번개일 뿐이다. 그러나 이 번개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 앙리푸앵카레, 『과학의 가치』 (1905)


참고문헌과 동영상

- 존 D.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 : 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 해나무, 2011
-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전대호 옮김, 『밤을 가로질러 : 밤, 잠, 꿈, 욕망, 어둠에 대하여』, 해나무,  2015
- EBS 지식채널 e “왜 밤하늘은 어두울까”
- 제프 데코프스키 Jeff Dekofsky, “무한 호텔 역설The Infinite Hotel Paradox” on YouTube
- EBS 다큐프라임 “넘버스 2부 – 천국의 사다리,∞”
- 카오스재단, [카오스 술술과학] “도대체 무한이란 무엇일까” 1 & 2 (무한의 신비 & 무한을 세는 법)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6강

무와 무한 (1) 무에서 유로 : 우주와 그 기원에 관한 사유 (2019년 11월 2일)*

서론 : 근본적 물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생성론 (cosmogonie : cosmos+gonos) cf. as- tron+nomos, cosmos+logos, etc.

플라톤 : ‘그럼직한 설명(eikos logos)’으로서의 우 주(생성)론

우주론의 역사와 철학 

우주론의 특수성

우주론의발전단계 : 고대-고전-현대?과학적우 주론은 아인슈타인 이후?

A. 그륀바움 (Adolf Gru ̈nbaum, 1913-2018)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 : 근원적 실존 문제 (Primordial Existential Question)

PEQ의원형:라이프니츠,자연과은총의원리 (1714)

베르그손의 비판 : 잘못 제기된 문제

그륀바움 : PEQ의 두 전제(무의 자발성과 우연성)

에 대한 비판 우주론적 신존재 증명

어떻게 무에서 유가 나오는가? ‘무로부터의 창조’와 현대우주론

그리스 철학에서 무/허공의 도입 : 원자론의 이론 적 요구

플라톤 : 데미우르고스의 신화 ; 아리스토텔레스 : 영원우주론

사물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물음으로서의 PEQ cf. 사물의 기원적 생성(1697)

빅뱅의 이전 혹은 기원에 대한 물음

결론 : 종교, 과학 그리고 철학 

최근 종교-과학 담론의 경향


별첨(인용구)

1° 반성을 할 줄 아는 모든 인간은 세계의 기원이 라는 문제에 몰두해 왔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묻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 앙리 푸앵카레 (1854-1912), 『우주생성론 강의』, 1911

2° 언제나 있는 반면 생겨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제나 생겨나되 결코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성적 설명과 함께 하는 사유를 통해 헌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있는 것인 반면, 비이성적인 감각을 동반하는 판단을 통해 의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일뿐 진짜로는 결코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은 모두 필연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원인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실로 하늘 전체를 놓고 보자면, – 혹은 그 것이 세계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그렇게 불렀을때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이라면, 우리로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죠. – 어쨌건 그것에 관해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무엇에 관해서든 맨 처음 탐구하도록 제기되는 물음, 즉 그것이 생성의 시초라고는 일절 갖지 않은 채 항상 있어 왔는지, 아니면 어떤 시초에서 출발하여 생겨났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고 만질 수 있으며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요.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감각될 수 있으 니, 감각될 수 있는 것들은 감각을 동반한 의견에 의해 파악되는 것들로서, 생겨나고 태어난 것으로 서 밝혀진 것입니다.

사실상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성에 맞 는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는모상에관해서도,또본에관해서도다음을구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명이란 무엇인가를 해명 하는 것으로서 바로 그 무엇과 동류이니까요. [...] 그러니까 존재가 생성에 관계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리는 믿음에 관계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소크라테스! 여러 가지 점에서, 또 여러 가지 문제들, 예컨대 신들이라든가 우주의 생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그 자체로 일관되며 완벽하게 엄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놀라지마세요. 오히려 정말 우리가 누구 못지 않게 그럼직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 플라톤, 『티마이오스』, 27d- 29d

3° 1917년과 1925년 사이 불과 몇 년만의 일이었다. 한 천재물리학자, 그리고 한 천문학자에 의해 다루어진 거대한 망원경이 우주에 대한 관념과 시각을 자연철학에 들여왔다. 이 만남에서 현대 우주론이 탄생했다. – 자크 메를로퐁티, 『20세기 우주론』, 1965

4°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한 물리학자로서 논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대(大)원리를 이용해서 형이상학으로 올라서야 한다. 그 원리의 내용은 어느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는생기거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사물에 대해 충분히 알기만 하면 왜 그것이 저러하지않고 이러한지를 규정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고, 그와 다른 방식으로는[즉 사물이 이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일단 제시되면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무엇인가 있는 것보다 단순하고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들이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들이 왜 달리 있지 않고 이렇게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1714

5° 도대체 우주가 왜 있는가? [우연적인]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살아 있는 존재도, 별도, 원자도, 심지어 시간과 공간조차도. 이러한 [”전무(Null)”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워 보일 수 있다. – 데릭 파핏(D. Parfit), ”The puzzle of reality. Why does the universe exist?”, 1998

6° 그런데 이 질문은 다음을 전제한다. 실재가 허공(vide)을 채우고 있고, 존재의 기저에는 무가 있으며, 당위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어야 하고, 따라서 왜 사실상으로는 무엇인가가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이 질문은 순전한 환영이다. 왜나하면 절대적 무의 관념은 둥근 사각형과 다를 바 없는 의미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의 부재는 다른 어떤 것의 현존이다 (다만 이 현존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관심이 있거나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편을 선호할 뿐이다). 그런 만큼 어떤 것의 제거는 다른 것으로의 대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업은 양면적일진대 우리는 어느 한 면만을 보려 한다. 모든 것의 폐기는 자기 파괴적이요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그것은 유사관념이요 표상의 환영이 다. – 베르그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1935

7°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진보는 존재에 의한 존재의 존재에 대한 고려, 그리고 가장 최초의 혹은 초월적 기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이루어졌다. 발전하고 진화하기 위해서 세계는 우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무로부터 존재로 화(化)해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되어야 했다. 본질에 의해 존재하는 최초의 존재에 의해. – 베네딕트16세, 교황청 주관 학술대회 ‘우주와 생명의 진화에 관한 과학적 통찰’ 기조 발언, 2008


참고문헌

- 김혜숙, 『칸트: 경계의 철학, 철학의 경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1.
- 플라톤,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 Adolf Grünbaum (2013) “Science and the im- probability of god” (초판에는 같은 글이 ‘Why is there a universe at all, rather than just nothing’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in C. Meister and P. Co- pan (ed), Routledge Companion to Philosophy of Religion, 2nd edition (New York: Routledge).
- 짐 홀트,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역사를 관통하 고 지식의 근원을 통찰하는 궁극의 수수께끼』, 우 진하 옮김, 21세기북스, 2013.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무와 무한 : 피조물의 창조적 역습 (이화인문아카데미, 2019년 11월)* 5강

Madame la Présidente, Madame et Messieurs les membres du jury

Madame la Présidente, Madame et Messieurs les membres du jury,

Je voudrais d’abord remercier les membres du jury pour avoir accepté de lire ma thèse et de participer à sa soutenance, ainsi que mon directeur de thèse, Monsieur Szczeciniarz, pour son accompagnement et son encouragement qui m’ont permis de mener ce travail à bon terme.

Mes remerciements vont également à ma famille et mes amis pour leur présence aujourd’hui, mais aussi pendant mes années de thèse. Pendant des années bien longues, je dois préciser, puisqu’il m’a fallu un temps bien considérable pour arriver jusqu’ici.

La thèse que j’ai l’honneur de présenter devant vous s’intitule «Du monde mécanique à l’univers physique. Pour une histoire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autour de Leçons sur les hypothèses cosmogoniques de Henri Poincaré (1911)».

Je viens de vous parler du temps. S’il a fallu tant de temps pour terminer cette thèse, ce ne serait pas seulement par l’ampleur et la difficulté du sujet que j’avais choisi, mais aussi par la nature même de ce sujet. Mon sujet, vous l’auriez remarqué, est double, Poincaré et la cosmologie, qui réunit deux thématiques qui ne sont pas très favorables à la gestion du temps. Dans un premier temps, j’avais à faire face au temps astronomique, voire cosmologique, au point d’ignorer un peu le temps à l’échelle humaine. La faute serait aussi, au moins en partie, à Poincaré lui-même, qui ne s’effrayait pas de parler du temps infini, et s’intéressait bien peu au passage du temps à court terme au point d’oublier parfois de dater ses écrits, au dam des historiens.

Le choix de ce sujet tient à des rencontres personnelles ainsi que textuelles. La première rencontre avec la première phrase des Leçons était comme un coup de foudre. «Le problème de l’origine du Monde a de tout temps préoccupé tous les hommes qui réfléchissent ; il est impossible de contempler l’Univers étoilé sans se demander comment il s’est formé.»

Longtemps je me suis intéressée au problème de l’origine du monde. Comme tout le monde peut-être, pas plus, tout simplement parce qu’il est impossible de faire autrement en présence du ciel étoilé devant ses yeux, nous vient de dire Poincaré.

Après avoir fait des études en physique et en philosophie à Séoul, je voulais continuer d’étudier la philosophie des sciences, mais dans une autre direction et dans une autre tradition que le courant analytique ou anglo-saxon dominant à l’époque en Corée. Pour mon mémoire de master en philosophie, je me suis préoccupée de l’analyse du langage utilisé en mathématiques. Mon analyse portait entre autres sur l’argument de l’indispensabilité des mathématiques dans les sciences, conçu et développé par Quine et Putnam en faveur du platonisme à l’égard du statut ontologique des objets mathématiques.

Je crois avoir croisé les livres de Poincaré en traduction coréenne dans mes égarements à la bibliothèque. Mais à ce moment-là son nom ne me disait pas grand-chose, en tout cas beaucoup moins que ceux de Bachelard, Canguilhem ou Foucault. J’avais une admiration profonde pour ces héros de l’épistémologie française ; j’adorais son approche versée en histoire, son intérêt au concret, ainsi que son style littéraire. C’est ce qui m’a amenée à entamer des études en France.

Ce n’était qu’en France que j’ai découvert les Leçons de Poincaré. C’était un pur hasard que j’ai été conduite aux Leçons en version numérisée sur le site Gallica.fr. Pour le mémoire de DEA, je cherchais un peu maladroitement sur le catalogue de la BNF, sans même savoir qu’il existait une «science» qui a pour objet spécialement la naissance du monde et qu’il y avait un mot qui désigne cette science qu’est la cosmogonie. Le livre de Poincaré a retenu mon attention, d’abord par son titre où paraissait le nouveau mot que je venais d’apprendre, et, surtout, par son auteur, que je commençais à connaitre à peine et de qui je ne m’attendais pas à un livre de cosmogonie d’après le peu que je savais de lui

Mon objectif était de contribuer à une histoire de la cosmologie dans la lignée de Koyré (qui a couvert de Copernic jusqu’à Newton) et Merleau-Ponty, Jacques (de Laplace à Eddington en passant par Einstein), en construisant deux objets que j’ai nommés «monde mécanique» et «univers physique». D’un autre côté, j’avais l’intention de montrer que Leçons, assez connu et souvent cité encore aujourd’hui, sans pour autant avoir fait l’objet d’un travail approfondi, mérite une attention pour l’histoire des sciences, plus précisément de la cosmologie, ainsi que pour les études poincaréennes.

Mon travail a procédé en deux temps. Dans un premier temps, l’histoire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de Descartes jusqu’aux cosmogonistes au tournant du vingtième siècle, cités dans les Leçons, en passant par Kant, Laplace, Comte et Cournot. Dans un deuxième temps, une étude systématique sur l’œuvre de Poincaré. Puisque Leçons est l’un de ses derniers ouvrages, il m’a fallu parcourir toute son œuvre. L’immensité de cette œuvre oblige, j’ai dû me borner à une de ses parties. Je me suis concentrée sur la partie philosophique de cette œuvre, écrite à diverses occasions et recueillie par les propres soins de son auteur dans les livres comme La science et l’hypothèse.

Dans ma tentative d’une étude systématique de son œuvre, je crois avoir trouvé une réponse possible à cette question difficile, celle de savoir s’il y a un système philosophique ou une philosophie tout court. C’est une philosophie qui se caractérise par la systématicité qui n’est pas dogmatique ni statique, mais prend en compte la diversité et la dynamique des sciences.

Je voulais montrer également qu’elle ne manquait pas d’éléments cosmologiques. Les pistes, trois thèmes-problèmes récurrents dans ces écrits se trouvent aussi «ouverts», pour ne pas dire «dirigés», vers l’univers : le mécanisme, la loi/le principe et l’espace. Si elle n’aboutit pas à une théorie ou un modèle rationnel de l’univers, elle n’en a pas moins de place dans l’histoire de la cosmologie. Quelque part entre la fin de la cosmologie classique et la veille de la nouvelle cosmologie mise en place par Einstein en 1917.

Au cours du travail, j’ai connu plusieurs changements de problématique et de méthode, dont certains étaient plus ou moins radicaux. Tout au début, j’avais l’intention de rapprocher Poincaré de la cosmologie moderne et de le promouvoir, pour ainsi dire, au rang des «précurseurs» des théories de l’univers telles qu’on les connait aujourd’hui. Pourtant, il m’est arrivé de me persuader progressivement que Poincaré faisait partie de la science de l’univers à l’âge du positivisme, comme le dit le titre de l’ouvrage de Merleau-Ponty de 1983. Cette science, si elle n’a pas abouti à une cosmologie proprement dite, sinon la non ou la quasi cosmologie comme Merleau-Ponty caractérisait, avec un goût de formule qu’il avait, constitue un moment non moins significatif de l’histoire de la cosmologie.

Avec cette nouvelle perspective venait le besoin d’une nouvelle méthode. La méthode me préoccupait tout au long du travail, et le résultat en est les «discours préliminaires» qui précèdent chacune de deux parties principales de la thèse. Après plusieurs expérimentations et inversions du plan de thèse, j’ai fini par choisir l’archéologie comme méthode, faisant référence à Foucault. J’ai essayé de suivre les consignes données par l’auteur de L’archéologie du savoir. Privilégier la contemporanéité et la simultanéité de théories hétérogènes, au lieu de chercher à en établir l’homogénéité et la continuité dans le temps, tout en assumant leur discontinuité voire leur rupture à travers de différentes époques, afin de relever leur condition de possibilité, à la fois a priori et historique.

Ce qui m’a amenée à une sorte d’archives de la cosmologie à l’âge classique. Ces archives ont été réunies dans la première partie de la thèse et enrichies dans la deuxième partie, avec l’œuvre de Poincaré. Tout ceci revenait à faire les archives des Leçons de Poincaré qui est aussi, d’une certaine manière, une sorte d’archives des hypothèses cosmogoniques, plus démodées que prometteuses, plus «périmées» que «sanctionnées» au sens bachelardien de ces termes.

En somme, ces archives ne nous renseignent pas grand-chose sur l’origine du monde, pas plus qu’elles n’enseignent la science de l’origine du monde. Sur ce point, je dois rectifier ce que j’ai écrit dans la thèse. J’ai dit, à la page 60, que l’intérêt pour l’histoire s’encadrait strictement autour de l’enseignement chez Poincaré. Mais, en fin de compte, ce ne serait pas tout à fait le cas. Son exposé n’est pas tout à fait pédagogique : en le lisant, on n’a pas le sentiment d’être enseigné ou renseigné, on se sent plutôt interrogé et intrigué ; on a un peu du mal à suivre ses idées, parfois plus associées par analogie qu’elles soient enchainées logiquement. Il ne nous apprend pas tant sur l’origine du monde, mais nous incite à réfléchir sur cette question elle-même en tant que problème cosmologique, l’esprit qui l’aborde et la quête à la solution. Bref, c’est une leçon de philosophie que Poincaré nous a laissée dans ses dernières leçons.

Les premières phrases que j’ai citées tout à l’heure et qui me poursuivaient pendant tout ce temps s’accompagnaient d’une autre phrase non moins mémorable dans La valeur de la science : «La pensée n’est qu’un éclair au milieu d’une longue nuit. Mais c’est cet éclair qui est tout.» En fin de compte, les lois de la nature dans le ciel étoilé et les lois des morales dans mon cœur ne sont pas si séparées comme chez Kant, pas plus que la raison et le cœur comme chez Pascal, si c’est le cœur qui touche et incite la raison à réfléchir.

Poincaré terminait ses Leçons par un point d’interrogation. Je pourrais terminer autant, même plus : pas par un point d’interrogation, mais plusieurs, avec quelques pistes de travail à venir. D’abord un travail archivistique autour des Leçons, que ce soit relatif au cours même de 1910–1911 à la Sorbonne ou à l’édition chez Hermann, avec l’ajout des matériaux comme les procès-verbaux du conseil de l’université ou le contrat avec l’éditeur pour ce qui concerne la seconde édition. Une étude comparative plus approfondie serait envisageable aussi, entre Poincaré et d’autres auteurs, notamment Bergson et Mach. La connexion entre Poincaré et Bergson me parait d’autant plus intéressante et significative qu’il y a plus de points communs et comptables qu’on le croit, alors qu’elle est relativement peu étudiée, en tout cas moins que la confrontation entre Bergson et Einstein, ou encore beaucoup moins que le rapport Einstein et Poincaré.

Après bien des années d’études, j’ai fini par apprendre qu’une thèse de doctorat est, de par sa nature même, un travail en cours, toujours en construction, une ébauche du travail à venir. Raison de plus, une seconde édition est prévue pour cette thèse, exactement comme les Leçons de Poincaré d’ailleurs, même si ce n’est pas pour la même raison : elle s’impose, pas par le «succès» dans les librairies comme c’était le cas des Leçons, mais par un second dépôt après la soutenance, désormais obligatoire, d’après les nouveaux règlements du doctorat. J’aurai donc la possibilité de tenter une seconde chance et de donner une deuxième vie à cette thèse, possibilité dont Poincaré ne pouvait pas tirer le profit au maximum. Tous vos commentaires, critiques et suggestions, me seront donc extrêmement utiles.

Je vous remercie de votre attention.


Texte de présentation lu le 7 juillet 2018

Ressemblances partout 어디나 닮은꼴

1. 
<악의 꽃>의 마지막 시 : <여행>, "오, 죽음이여, 늙은 선장이여, 이제 닻을 올릴 시간" 산보객의 마지막 여행 : 죽음. 그의 목적 : 새로움. "새로움을 찾기 위해 미지의 심연으로."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에 독립적인 특성이다. 집단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분리될 수 없는 가상의 기원에 바로 새로움이 있다. 그것은 허위의식의 정수다. 이 새로움의 가상은 동일자의 반복의 가상에 반영된다. 거울이 다른 거울에 반사되는 것처럼. 
--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2. 
내가 아주 오래 전에 얻고서 스스로 흡족해 마지 않는 깨달음이 있으니, 그것은 관찰한 기간이 짧을수록 사람들은 서로 닮은 것처럼 보이며, 급기야 순간적으로[한 순간에 이르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와 똑같이 소중한 다른 깨달음이 있으니, 그것은 감정의 강도가 클 경우에는 유사성이 더더욱 커져 마침내 동일성에 일치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  발레리, <테스트 선생> 중 "테스트 선생의 몇 가지 생각"


누구에게서나 닮은꼴을 발견하는 ㅎ. ㅎ이 보기에 누구는 모 유명배우를 닮았고, 옆에서 누구누구가 모 가수를 닮았다 하면 바로 맞장구 친다. 그런 ㅎ을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고 가끔 놀리기도 한다. "ㅎ씨 눈에는 다 닮았죠? 안 닮은 사람이 없죠?" 내가 보기에도 ㅎ의 유사성 판단은 겨우 "발가락이 닮았다" 수준일 때도 있긴 하다. 

Sandro Botticelli 035.jpg그러나 ㅎ에게는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 선례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스완의 사랑>의 주인공 샤를르 스완. 스완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지오토,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주로 자신의 전문인 르네상스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닮은꼴을 발견하곤 한다. 화자네 집 부얶데기 하녀는 지오토가 그린 카리타스를 닮았고, 스완 자신의 마부 레미는 리조의 흉상을 연상시키고, 한 지인은 텡토레가 그린 초상의 인물과 닮았고 등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데트. 처음에는 그녀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다소 피곤해 하기까지 하던 그는 어느날 그녀에게서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보티첼리의 제포라를 발견하게 되고, 순간 사랑에 빠진다.

실은 내게도 닮은꼴을 발견하는 재능 혹은 경향이 있다. ㅎ과 스완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 데서 이미 알 수 있겠듯.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ㅅ은 나와 오래 알고 가까이 지낸 ㅅ 언니를 닮았고, ㅅ 선배는 자신이 공부하는 철학자를 닮았고, 그러고 보니 또 다른 ㅅ 선배도 자신이 공부하던 철학자를 닮았고, ㅈ의 여자친구 ㅇ은 <파리의 미국인>에서 진 켈리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프랑스 여배우 레슬리 카롱을 닮았고, 전에 본 수퍼마켓 계산대 점원은 프랑스 여배우 시몬느 시뇨레를 닮았고, 오즈의 <꽁치의 맛>에서 며느리 역할로 나온 일본 여배우는 아이유를 닮았고, 필립 가렐의 <정기적 연인>에 나왔고 <질투>에도 나온 한 배우는 트뤼포의 페르소나 장-피에르 레오를 닮았다. 그리고, 이건 나만의 발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우 중 하나는 그레이스 켈리와 그녀를 그린 영화에 출연한 니콜 키드만.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예고편을 보면서 니콜 키드만은 그레이스 켈리 역할을 맡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가 하면, 말이 나와서 말인데, 닮은꼴 전문가 ㅎ 또한 외모상으로 내게 누군가를 연상케 했으니, 그것은 자크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에 나오는 한 여배우. 양갈래 머리를 하고 신나게 춤추다 뱃사람을 만나 떠나가는. 영화배우가 아니고 말하자면 무명의 뮤지컬 배우고 그리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닌 그녀가 내 인상에 각인되었다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ㅎ 덕분이다.

근거? 없다. 유사성이란 게 본래 그렇지 않은가. 유사성에 대한 판단은 직관적, 즉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지, 논증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 판단의 내용 분석하자면 한도 끝도 없거나 (무한 분석 가능성), 아니면 아예 분석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분석 대상과 분석 행위 혹은 주체의 비분리성 혹은 상호의존성).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유사성 판단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바, "유사성과 차이의 그물망"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그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을 도입한 맥락을 돌이켜 보면, 결국 유사성이야말로 모든 개념화 및 의미 작용과 언어 게임의 기저에 있는 것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 유사성에 기초한 유비 추리(analogy)는, 비록 반드시 진리에로 인도하는 확실한 원리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경우 발견술(heuristics)로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푸코의 <말과 사물>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모두 유사성을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두 텍스트를 이런 식으로 연결하다니, 이 역시 유사성 판단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일례). 

푸코에게 유사성은 르네상스까지 전통적, 그러니까 전근대적 사유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 사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푸코는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을 든다. 우리가 아는 그 어느 존재론적 범주나 분류적 질서로도 포괄하기 힘들어 보이는 사물, 아니, 어디 사물 뿐인가,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대상들, 개념, 관념 나아가 어떤 사실이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각기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있는 동시에 하나로 어울리고 어우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가장 작은 것(microcosmos)에서부터 가장 거대한 것(macrocosmos)에 이르기까지  가장 본래적인 의미(최소한 가장 어원에 가깝다는 의미에서)에서의 코스모스의 구현. 여기에서 상호 유사 혹은 유비 관계는 서로 다른 물리적 시공간의 존재들을 연결함으로써 넥수스로서의 우주를 발견하는 방식이요,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일종의 우주론적 원리로서 기능한다. 이것이 고전시대로 넘어가서는 차이와 분류의 에피스테메로 전환된다. 벨라스케스의 <하녀들>에서 그 징후가 나타난 바, 표상 체계가 사물로부터 독립하여 더 이상 외부 세계로부터 지시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순수 차이를 근간으로 하는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유사성이 갖는 위상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차용한 "유사한 것들만이 차이를 가진다"와 "차이들만이 유사하다"라는 두 명제 (<차이와 반복> 2장, p. 153). 전자는 유사성을 제일 원리로 보고 후자는 차이가 먼저라 본다. 반복도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좀더 써보고 싶으나 그러려면 <차이와 반복>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힘들겠으므로 다음으로 미루거나 적임자에게 맡기기로 한다. 

서두의 두 인용문은 유사성-동일성에 대한 서로 상반된 접근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동일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은 상품 본연의 가치와 무관하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허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동일성이야말로 관찰자가 아마도 관찰 대상과의 합치를 꿈꾸느라 만들어낸 궁극의 환상이라고 말한다. 동일성이든 차이든 결국 어느 하나는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니 당장 주저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본질론이나 이분법의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하염없이 동일성을 추구하되, 그런 한편으로 끊임없이 차이를 발견하고 없으면 발명이라도 하고자 하는 모순된 욕망이 저항감을 유발하기 때문 아닐까. 적어도 내겐 그렇다. 

탈진리 시대에 사실을 논한다는 것은

언제부턴가 너도 나도 "팩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각 언론사마다 "팩트 체크"에 특종 보도 이상의 열의를 보이고, 토론에서는 이론이나 논리로 무장하고 있어도 상대방이 구체적인 "팩트"를 들이대면 반박하기 힘들어졌다. 정확하게는, 팩트"라" 말하기 시작했다 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검증하는 일이나 사실로 반박하는 일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의 개념과 위상이 바뀌면서 그것이 주장과 갖는 역학 관계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팩트 폭력"이나 "팩트리어트"란 신조어가 시사하는 바, 영단어 "팩트"로의 대체는 이 현상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Phil Venditti/FlickrCC BY
이러한 언어 현상에는 영어 패권주의와 사대주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 중 하나는 과거 권력층과 언론이 독점했던 이것을 이제는 누구나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체크, 즉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의 검증과 확인이야 누구에게나, 특히 언론에는 필수적인 직업윤리에 해당하겠으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사실과 정보가 민주화되면서 그 필요성이 한층 더 부각되고 강제성이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사실에 대한 증거들은 한낱 조작된 것이거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론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아폴로 11호의 달착륙도 마찬가지. 이를 사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착륙 장면을 촬영한 화면이나 성조기 같은 것들은 조작된 증거이고, 이는 미국의 세계 지배 음모, 군수산업 비리 등등 다른 가설과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이 음모론의 구조다.

반대로 사실이 아닌 허구를 사실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할 이론과 논거를 들이대는 경우가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 그러했고, 한국의 현대사에 숱하게 등장한 조작 사건들이 그러했다. 한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리하여 그가 유죄라는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는 물적이든 심적이든 증거를 제시한다. 증거가 부족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드는 것이니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반박하는 증거가 나오면 애드혹 가설을 만든다. 고문 당하다가 죽은 사람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을 정도로 심각한 심장질환자로 돌변한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이론과 가설은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요새 말로 "정신승리"(최신 유행어이고 민간 용어인 줄 알았더니 mental attainment 라는 심리학 용어로도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그것이 정신의 힘이자 한계다. 

이런 걸 보면 이론이 아닌 경험이 지닌 힘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왜 푸앵카레 같은 수학자들이, 그리고 오늘날 초끈이론이니 퀀텀 룹 이론이니 하는 가장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을 구상하는 이론물리학자들이, 아니 그런 부류일수록 더더욱, 실험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 . 포퍼의 반증론이 거기에서 나왔다. 아무리 수학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믿 이론도, 그리고 제아무리 많은 경험을 수렴해서 설명하고 포괄하는 이론도, 반박하는 실험 사실 하나에 무너진다. 

그러나 다시,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실이 지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과학적/과학철학적)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실재인 것인가? 저기 어딘가에 있으면서 주어질 때에는 거기에 있던 그대로 주어지는? 소여data가 온전히 주관에 독립적이며 있는 그대로 주어진다는 믿음은 사실 신화에 가깝다 ("소여의 신화"). 목성, 전자, 뉴트리노, 중력파 등등에 관한 사실들이 그 자체로서 실재를 가감 없이 기술한다는 믿음. 그 믿음의 근거를 따지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기껏해야 소극적 논변, 즉, 인식 주체인 우리에 독립해 있는 세계의 존재도 그렇거니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옹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사실은 어쩌면 물신과도 같다. 여기에서, 맥락이 좀 다르긴 하지만, 브뤼노 라투르가 사실fait에 물신fétiche를 결합해 창안한 패티쉬 (faitiche)라는 개념이 유용하겠다 (쓰고 보니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처럼 음성적으로는 거의 유사하나 문자적으로 의미가 달라지니 이것도 참 재미있다). 있는 그대로 주어져 있지도, 그렇다고 구성된 것도 아닌, 그 경계에 있으며 그 경계, 나아가 경계가 구축하는 세계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사실을 말한다. 한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세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근거이자 원리가 되기도 한다. 패티쉬의 고유하고 역설적인 존재 양식을 스텐게르스는 우리로 인해 존재하는 동시에 우리를 존재케 하는 것이라 풀어 설명한다 ("뉴트리노의 역설적 존재 양태", Isabelle Stengers, Cosmopolitique I, p. 29). 이렇게 되면 사실-패티쉬는 사실 우리가 아는 사실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오한 어떤 것을 지칭하게 되는데... 어쨌든, 사실이라 해서 무조건적으로 신봉할 것이 아니고 객관성과 중립성을 절로 담보하는 것도 아닌 만큼, 사실만능주의는 사태를 너무 단순히 파악한 결과라 하겠다.


Ron Mader/Flickr CC BY
브렉시트에 이어 미국 대선에 이르기까지, 2016년은 "탈진리post-truth"라는 이름 하에 사실과 진리라는 철학의 가장 전통적인 화두가 가장 시사적인 방식으로 재발굴되고 재조명된 해였다.  믿기지 않는 '팩트'에 기댄 선전과 선동이 정말로 믿기지 않는 또 다른 '팩트'를 생산하는 현실. 내가 믿고 싶은 바대로 사실을 보고, 아니 지어내고, 그것은 대체(적으)로 옳은 것(alt-right)으로 간주되는 대체 사실(alternatif fact)이 된다. 그러한 사실의 인식적 가치는 더 이상 진리치에 있지 않고 의미치에 있다. 사실 판단보다 가치 판단이, 사실보다 관념과 신념이, 사실의 진리보다 이성의 진리 (진리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한 라이프니츠 이래 전통적인 구분법을 아렌트는 <진리와 정치>에서 이렇게 비틀고 있다. 즉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와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진리의 이항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회의 이항 대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학보다 수사학이, 로고스보다 독사나 파토스가, 진리치보다는 의미치가 우선시된다. 물론 이 이분법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며, 앞에서 적었듯 '사실'이라는 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님을, 니체 이후 소위 탈근대 시대를 사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관념에 근거해서 재단된 사실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며, 현실과 괴리되고 현실에 근거한 정당성이 부족한 관념일수록 강경화되고 독단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다름 아닌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Quiproquo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의 일. 도서관에 있는데 ㅎ으로부터 문자 메세지가 왔다. "도서관에서 당신을 본 것 같아요. 이따가 나가는 길에 볼까요?"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이 내게는 특이하고 심지어 범상찮은 사건으로 여겨졌으니, 그 이유는 이러하다. 국립도서관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사흘째. 게다가 처음 이틀은 전화기를 잊고 나왔다가 그날은 용케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ㅎ은 나를 어떻게 본 걸까? 그 날은 조금 늦은 탓에 지하 "연구관"이 아닌 지상 "학습관"에 자리를 잡았거늘. ㅎ도 평소와는 달리 지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상의 복도를 지나는 나를 지하에서 보았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나와 착각했다는 말인가?

다른 누군가를 나로 착각했다는 말은 예전에도 다른 지인들로부터 제법 들은 적이 있다. 날 닮은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 누굴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하 연구관을 지나던 중, 한 동양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마르고 아담하고 얼굴과 눈코입이 동글동글한. 순간, 저 사람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느낌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을 때의 느낌에 가까웠다. 분명 내가 한 말은 맞는데,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읽고 녹음한 것 같은, 사람들은 내게서 이런 목소리를 듣겠구나, 하는. 이 경우도 그랬다. 사람들 눈에 비친 나는 저런 모습이구나, 그런데 저 모습이 내겐 참 낯설구나, 하는. 거울에 비친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아상과 사람들 눈에 비친 사회적이고 공적인 자아상 사이의 간극. 가장 내밀한 방식의 타자화 혹은 자기소외의 경험.

ㅎ과 해후하여 사연을 들어본즉슨, 과연 다른 누군가를 나로 오인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좀더 통통한 것 같았어요."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치마를 입은 누군가를 인지한 후, ㅎ은 다음과 같이 추론했을 것이다. 지각의 내용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일단 그 누군가가 ㅈ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지각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을 추가한다 : 과거에도 ㅈ과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 ㅈ은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에 자주 출입하곤 한다 ; ㅈ도 치마를 자주 입곤 한다 ... 그리하여 가설은 확증되고 결론 : 그 누군가는 ㅈ이고, 따라서 ㅈ은 현재 도서관에 있다. 전제도 모두 참이고 결론도 참인 논증.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귀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이 참인 것은 각 전제와 무관하게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당화된 참 믿음"임에도 "지식"이 아닌 게티어 반례와 유사하거나, 아니면 귀납의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 과거에 ㅈ이 도서관 출입이 잦았다 해서 오늘도 도서관에 왔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치마도 마찬가지. ㅈ이 치마 착용 빈도가 평균보다 높은지 의문이고, 또 그렇다 해도 반드시 현재에 치마를 착용하리란 보장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귀납 이전에 이를 뒷받침하는, 예정조화나 연속성 같은 배후의 원리가 실재하며, 실제로 유효히 작동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실제로 ㅈ이 도서관에 와 있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오랜 만이긴 했지만. 그리고 치마를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이번에는 평소대로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로 갔다. 머리가 긴 한 동양 여학생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혹시 어제 ㅎ와 나로 오인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와 닮은꼴이라는 혐의(!)를 두었던 인물과는 다르고, 이 여학생의 경우 사실 머리가 긴 걸 제외하면 큰 유사점이 보이지는 않았음에도. 

ㅎ와는 다른 볼일로 휴게실에서 만나기로 해둔 터였다. 약속 시간이 되어 자리를 나서는 순간, 아까의 그 머리 긴 여학생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시 보니 ㅂ이 아닌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이고 또 ㅎ와도 친분이 있는. 너무 재미있어서 ㅎ을 만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녀는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훤칠하고 마른 체형인 ㅂ과 나는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다.

ㅎ이 ㅈ과 착각한 누군가를 ㅈ은 또 ㅂ으로 착각하는 키프로쿠오(quiproquo)의 상황. 가장 먼저 떠오른 예는 <피가로의 결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문학사상 우위의 라이트모티브였겠다. 누구보다 셰익스피어. ㄱ으로 가장한 ㄴ이 ㄷ을 유혹하고 ㄷ은 ㄱ이라고 생각하고 ㄴ과 사랑에 빠지고, ㄹ이라고 생각하고서 죽였는데 알고 보니 ㅁ이었고 등등. 아마도 개인성, 주체성, 정체성 등등의 개념이 본격 등장한 17세기 이전, 특히 르네상스에 두드러진 현상? 셰익스피어는 과도기에 해당하겠고. 그런데 그럼 보마르셰는? 이 시대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전례없는 정체성 혼란의 시대. 그 어느 시대보다 개인주의적인 한편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민족, 종교 등등의 집단 정체성에 개인이 종속되고 잠식되고 전유되곤 하는 시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사이보그 정체성과 현실적 정체성 사이의 경계가 갈수록 불분명해지고 분열을 촉진하는 시대. 이 모든 것이 개인/개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임을, 주체란 것은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늘 끊임없는 주체화 과정 속에 있는 것임을 증거라는 사례라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되면 키프로쿠오는 누군가를, 무엇을 인식하는 행위, 나아가 들뢰즈가 "이것은 사과, 저것은 책상, 안녕 테아이테토스"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재현적/표상적 사유 이전의, 가장 근본적인 사태가 된다.  

인식론적 맥락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위에서 ㅎ의 사례는 우선 인지/지각의 문제와 결부된다. 지각의 불투명성, 비중립성, 이론의존성. 그러나 그보다 게티어 반례와의 유사성에 주목해 보면 이렇다. 반례인 것은 "정당화된 참 믿음"이 지식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상적 인식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다른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 미덕/가치 인식론 (virtue epistemology)이다. 논리적 진리 조건과 인지/심리적 조건에 인식에 가치 기준을 추가하는 것이다. 어니스트 소자는 이른바 AAA 인식론을 내세운다(이 문제를 매우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글 : "Getting It Right"). 어떤 앎이 진정한 앎이려면 그것이 참이고 왜 참인지를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정확하고(accurate), 요령있고(adroit), 적당한(apt) 등의 기준에도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 기준 외의 인식적 가치 기준. 이에 따르면 위의 ㅎ의 경우, 정황상, 추론이 적당하긴 했지만, 정확하지 않았고, 또 요령껏 획득됐다 보기 힘드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당장 반문이 떠오른다. 저 가치기준의 기준은? 어떤 것이 정확하고 요령있고 적당한 것인가? 나만 해도 ㅎ의 사례에서 어떤 지점이 어떤 이유에서 정확치 않았고 또 요령없는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았으니까. 논점선취의 오류의 위험.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라는 결론을 선전제 해놓고 이 결론에 맞추어서 기준을 도입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결국... 인간 인식의 근본적 한계? 그보다는 지식 이론의 한계. 무엇이 진정한 앎인가를 묻다가 결국 물음으로 끝난 사례.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대표적인 선례로는 일찍이 <테아이테토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