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7일 일요일

Quiproquo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의 일. 도서관에 있는데 ㅎ으로부터 문자 메세지가 왔다. "도서관에서 당신을 본 것 같아요. 이따가 나가는 길에 볼까요?"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이 내게는 특이하고 심지어 범상찮은 사건으로 여겨졌으니, 그 이유는 이러하다. 국립도서관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사흘째. 게다가 처음 이틀은 전화기를 잊고 나왔다가 그날은 용케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ㅎ은 나를 어떻게 본 걸까? 그 날은 조금 늦은 탓에 지하 "연구관"이 아닌 지상 "학습관"에 자리를 잡았거늘. ㅎ도 평소와는 달리 지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상의 복도를 지나는 나를 지하에서 보았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나와 착각했다는 말인가?

다른 누군가를 나로 착각했다는 말은 예전에도 다른 지인들로부터 제법 들은 적이 있다. 날 닮은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 누굴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하 연구관을 지나던 중, 한 동양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마르고 아담하고 얼굴과 눈코입이 동글동글한. 순간, 저 사람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느낌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을 때의 느낌에 가까웠다. 분명 내가 한 말은 맞는데,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읽고 녹음한 것 같은, 사람들은 내게서 이런 목소리를 듣겠구나, 하는. 이 경우도 그랬다. 사람들 눈에 비친 나는 저런 모습이구나, 그런데 저 모습이 내겐 참 낯설구나, 하는. 거울에 비친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아상과 사람들 눈에 비친 사회적이고 공적인 자아상 사이의 간극. 가장 내밀한 방식의 타자화 혹은 자기소외의 경험.

ㅎ과 해후하여 사연을 들어본즉슨, 과연 다른 누군가를 나로 오인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좀더 통통한 것 같았어요."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치마를 입은 누군가를 인지한 후, ㅎ은 다음과 같이 추론했을 것이다. 지각의 내용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일단 그 누군가가 ㅈ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지각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을 추가한다 : 과거에도 ㅈ과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 ㅈ은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에 자주 출입하곤 한다 ; ㅈ도 치마를 자주 입곤 한다 ... 그리하여 가설은 확증되고 결론 : 그 누군가는 ㅈ이고, 따라서 ㅈ은 현재 도서관에 있다. 전제도 모두 참이고 결론도 참인 논증.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귀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이 참인 것은 각 전제와 무관하게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당화된 참 믿음"임에도 "지식"이 아닌 게티어 반례와 유사하거나, 아니면 귀납의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 과거에 ㅈ이 도서관 출입이 잦았다 해서 오늘도 도서관에 왔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치마도 마찬가지. ㅈ이 치마 착용 빈도가 평균보다 높은지 의문이고, 또 그렇다 해도 반드시 현재에 치마를 착용하리란 보장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귀납 이전에 이를 뒷받침하는, 예정조화나 연속성 같은 배후의 원리가 실재하며, 실제로 유효히 작동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실제로 ㅈ이 도서관에 와 있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오랜 만이긴 했지만. 그리고 치마를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이번에는 평소대로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로 갔다. 머리가 긴 한 동양 여학생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혹시 어제 ㅎ와 나로 오인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와 닮은꼴이라는 혐의(!)를 두었던 인물과는 다르고, 이 여학생의 경우 사실 머리가 긴 걸 제외하면 큰 유사점이 보이지는 않았음에도. 

ㅎ와는 다른 볼일로 휴게실에서 만나기로 해둔 터였다. 약속 시간이 되어 자리를 나서는 순간, 아까의 그 머리 긴 여학생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시 보니 ㅂ이 아닌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이고 또 ㅎ와도 친분이 있는. 너무 재미있어서 ㅎ을 만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녀는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훤칠하고 마른 체형인 ㅂ과 나는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다.

ㅎ이 ㅈ과 착각한 누군가를 ㅈ은 또 ㅂ으로 착각하는 키프로쿠오(quiproquo)의 상황. 가장 먼저 떠오른 예는 <피가로의 결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문학사상 우위의 라이트모티브였겠다. 누구보다 셰익스피어. ㄱ으로 가장한 ㄴ이 ㄷ을 유혹하고 ㄷ은 ㄱ이라고 생각하고 ㄴ과 사랑에 빠지고, ㄹ이라고 생각하고서 죽였는데 알고 보니 ㅁ이었고 등등. 아마도 개인성, 주체성, 정체성 등등의 개념이 본격 등장한 17세기 이전, 특히 르네상스에 두드러진 현상? 셰익스피어는 과도기에 해당하겠고. 그런데 그럼 보마르셰는? 이 시대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전례없는 정체성 혼란의 시대. 그 어느 시대보다 개인주의적인 한편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민족, 종교 등등의 집단 정체성에 개인이 종속되고 잠식되고 전유되곤 하는 시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사이보그 정체성과 현실적 정체성 사이의 경계가 갈수록 불분명해지고 분열을 촉진하는 시대. 이 모든 것이 개인/개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임을, 주체란 것은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늘 끊임없는 주체화 과정 속에 있는 것임을 증거라는 사례라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되면 키프로쿠오는 누군가를, 무엇을 인식하는 행위, 나아가 들뢰즈가 "이것은 사과, 저것은 책상, 안녕 테아이테토스"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재현적/표상적 사유 이전의, 가장 근본적인 사태가 된다.  

인식론적 맥락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위에서 ㅎ의 사례는 우선 인지/지각의 문제와 결부된다. 지각의 불투명성, 비중립성, 이론의존성. 그러나 그보다 게티어 반례와의 유사성에 주목해 보면 이렇다. 반례인 것은 "정당화된 참 믿음"이 지식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상적 인식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다른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 미덕/가치 인식론 (virtue epistemology)이다. 논리적 진리 조건과 인지/심리적 조건에 인식에 가치 기준을 추가하는 것이다. 어니스트 소자는 이른바 AAA 인식론을 내세운다(이 문제를 매우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글 : "Getting It Right"). 어떤 앎이 진정한 앎이려면 그것이 참이고 왜 참인지를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정확하고(accurate), 요령있고(adroit), 적당한(apt) 등의 기준에도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 기준 외의 인식적 가치 기준. 이에 따르면 위의 ㅎ의 경우, 정황상, 추론이 적당하긴 했지만, 정확하지 않았고, 또 요령껏 획득됐다 보기 힘드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당장 반문이 떠오른다. 저 가치기준의 기준은? 어떤 것이 정확하고 요령있고 적당한 것인가? 나만 해도 ㅎ의 사례에서 어떤 지점이 어떤 이유에서 정확치 않았고 또 요령없는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았으니까. 논점선취의 오류의 위험.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라는 결론을 선전제 해놓고 이 결론에 맞추어서 기준을 도입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결국... 인간 인식의 근본적 한계? 그보다는 지식 이론의 한계. 무엇이 진정한 앎인가를 묻다가 결국 물음으로 끝난 사례.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대표적인 선례로는 일찍이 <테아이테토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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