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0일 토요일

이 글의 제목은 무엇인가

"예술작품으로서의 제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던 ㅅ. 그에게 "제목이 소재나 주제나 형식이나 질료 등등과 마찬가지로 한 예술작품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는 주장은 알겠다. 그러나 제목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의 위상을 갖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나 <LHOQ> 은 각각이 지시하는 작품이 존재할 때 비로소 '제목'으로서 성립한다. 작품과 독립된 상태에서 그것은 단지 평범한 문장 혹은 단어일 뿐,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제목은 작품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으나 작품은 제목에 대해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성을 갖는다. 작품과 제목을 동일시하게 되면 범주적 혼동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불쾌해 했고, 나는 뜻밖의 반응에 몹시 당황했다. 이 말을 그다지 정연하지 않게 해서였을까. 아니면 둘다 불콰한 상태여서였을까. 나중에 그는 피곤하고 지친 상태여서 그랬노라며 사과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이후 경험한 몇 가지 유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보자면 나의 토론 태도, 아니 대화상대자로서의 태도 일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시에는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더 그랬으리라. 어쨌든 그 이후로 ㅅ과는 제법 좋은 관계로 남아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논문을 마쳤고, 좋은 평가를 받아 소속 대학에서 주는 "올해의 논문"상까지 받았다. 물론 같은 주장과 제목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 내가 제목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그렇다고 제목이 유일한 것은 물론 아니고 수많은 강박의 대상 중 하나라는 것. 그러한 대상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사소하고 부질없는. 그러나 제목에 한해서만큼은 꼭 그렇게 사소하고 부질없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무규칙적이고 감각적/직관적인 글쓰기 스타일상, 그 뒤에 나올 내용 및 본문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하기도 한 것이 바로 제목 선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유가 제멋대로 뻗지 않도록 단속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기도 하고.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제목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도 한다. 본문을 쓰다가 보면 논의가 처음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난관이 심각한 나머지 전면 수정하거나 아예 폐기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이거늘, 처음의 그 생각, 아니 제목을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 하나로 어떻게든 무리수를 두고 오기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예외가 아니다. 논문 전체의 제목이야 그렇다 치자. 그리고 각 장과 절에서부터 단락까지 제목을 세세하게 정해두고, 즉 목차를 세세히 짜두고, 그에 맞추어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야 오히려 가장 교과서적인, 즉 가장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논문작성법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그 목차는 어디까지나 지침서로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내용(matière)이 채워지고 완성이 된 후에야 비로소 확정될 목차(table des matières)를 가늠토록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인데, 내게는 이 예상목차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 들어가는 본문의 실질적인 내용은 대부분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도무지 꼭 맞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웠다 다시 쓰고, 이리 넣었다 저리 넣어도 보다가, 그러다 보면 또 내용이 안 맞아서 다시 지우고, 또 쓰고. 몇 년째 같은 상태인 이런 나를 두고 지인이 페넬로페에 비유한 적이 있데, 정말 그렇다. 베를 짜다가 다시 전부 풀었다가 다시 짜고 풀고 하기만 벌써 몇 번째 반복인지. 차이라면 페넬로페의 베짜기 놀이는 끝이 정해져 있지만, 나의 경우는 끝을 내가 내지 않는 한 정말 영원히 무한반복될 위험이 있다는 점.

내게 제목과 목차는 칸트의 초월적 이념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  우주에 관한 그 어느 언명도 이념의 기준에서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의 이율배반편). 우주에 한계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설정되는 한계는 내가 가진 우주의 한계에 대한 이념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시작이 있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그 시작의 이전을, 경계가 있다고 하면 그 경계의 바깥을, 물을 것이다. 반면에 한계가 없고 무한하다고 하면 그것은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영원히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다. 내가 내 경험과 한계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에 내 경험을 꿰맞추려 한다는 사실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를 그저 규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칸트는 가르치고 있거늘.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 이념들이 실제로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 사실이 있기에 과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심정...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글쓰기 방식 때문에 제목에 대한 이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태도, 말하자면 제목중심주의/만능주의/물신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의 이 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는 "제목"이라는 간명한 '제목'을 붙였으나, 불현듯 어릴 적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이 떠올라 이를 패러디를 하고픈 의지가 생겼고, 이로써 이 글 또한 저 책에 이은 자기지시, 자기모순의 사례로 추가하고 이 주제에 대해 약술하려던 것이 원래의 의도였으나... 여기에서 멈추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 글이 그야말로 제목과는 무관한 사례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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