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7일 금요일

탈진리 시대에 사실을 논한다는 것은

언제부턴가 너도 나도 "팩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각 언론사마다 "팩트 체크"에 특종 보도 이상의 열의를 보이고, 토론에서는 이론이나 논리로 무장하고 있어도 상대방이 구체적인 "팩트"를 들이대면 반박하기 힘들어졌다. 정확하게는, 팩트"라" 말하기 시작했다 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검증하는 일이나 사실로 반박하는 일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의 개념과 위상이 바뀌면서 그것이 주장과 갖는 역학 관계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팩트 폭력"이나 "팩트리어트"란 신조어가 시사하는 바, 영단어 "팩트"로의 대체는 이 현상을 일정 부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Phil Venditti/FlickrCC BY
이러한 언어 현상에는 영어 패권주의와 사대주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 중 하나는 과거 권력층과 언론이 독점했던 이것을 이제는 누구나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체크, 즉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의 검증과 확인이야 누구에게나, 특히 언론에는 필수적인 직업윤리에 해당하겠으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사실과 정보가 민주화되면서 그 필요성이 한층 더 부각되고 강제성이 대두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사실에 대한 증거들은 한낱 조작된 것이거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론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아폴로 11호의 달착륙도 마찬가지. 이를 사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 착륙 장면을 촬영한 화면이나 성조기 같은 것들은 조작된 증거이고, 이는 미국의 세계 지배 음모, 군수산업 비리 등등 다른 가설과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이 음모론의 구조다.

반대로 사실이 아닌 허구를 사실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할 이론과 논거를 들이대는 경우가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 그러했고, 한국의 현대사에 숱하게 등장한 조작 사건들이 그러했다. 한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리하여 그가 유죄라는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는 물적이든 심적이든 증거를 제시한다. 증거가 부족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드는 것이니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반박하는 증거가 나오면 애드혹 가설을 만든다. 고문 당하다가 죽은 사람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을 정도로 심각한 심장질환자로 돌변한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이론과 가설은 원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요새 말로 "정신승리"(최신 유행어이고 민간 용어인 줄 알았더니 mental attainment 라는 심리학 용어로도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그것이 정신의 힘이자 한계다. 

이런 걸 보면 이론이 아닌 경험이 지닌 힘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왜 푸앵카레 같은 수학자들이, 그리고 오늘날 초끈이론이니 퀀텀 룹 이론이니 하는 가장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을 구상하는 이론물리학자들이, 아니 그런 부류일수록 더더욱, 실험과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 . 포퍼의 반증론이 거기에서 나왔다. 아무리 수학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믿 이론도, 그리고 제아무리 많은 경험을 수렴해서 설명하고 포괄하는 이론도, 반박하는 실험 사실 하나에 무너진다. 

그러나 다시,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실이 지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과학적/과학철학적)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실재인 것인가? 저기 어딘가에 있으면서 주어질 때에는 거기에 있던 그대로 주어지는? 소여data가 온전히 주관에 독립적이며 있는 그대로 주어진다는 믿음은 사실 신화에 가깝다 ("소여의 신화"). 목성, 전자, 뉴트리노, 중력파 등등에 관한 사실들이 그 자체로서 실재를 가감 없이 기술한다는 믿음. 그 믿음의 근거를 따지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기껏해야 소극적 논변, 즉, 인식 주체인 우리에 독립해 있는 세계의 존재도 그렇거니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옹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사실은 어쩌면 물신과도 같다. 여기에서, 맥락이 좀 다르긴 하지만, 브뤼노 라투르가 사실fait에 물신fétiche를 결합해 창안한 패티쉬 (faitiche)라는 개념이 유용하겠다 (쓰고 보니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처럼 음성적으로는 거의 유사하나 문자적으로 의미가 달라지니 이것도 참 재미있다). 있는 그대로 주어져 있지도, 그렇다고 구성된 것도 아닌, 그 경계에 있으며 그 경계, 나아가 경계가 구축하는 세계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사실을 말한다. 한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세계를 구축하도록 하는 근거이자 원리가 되기도 한다. 패티쉬의 고유하고 역설적인 존재 양식을 스텐게르스는 우리로 인해 존재하는 동시에 우리를 존재케 하는 것이라 풀어 설명한다 ("뉴트리노의 역설적 존재 양태", Isabelle Stengers, Cosmopolitique I, p. 29). 이렇게 되면 사실-패티쉬는 사실 우리가 아는 사실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오한 어떤 것을 지칭하게 되는데... 어쨌든, 사실이라 해서 무조건적으로 신봉할 것이 아니고 객관성과 중립성을 절로 담보하는 것도 아닌 만큼, 사실만능주의는 사태를 너무 단순히 파악한 결과라 하겠다.


Ron Mader/Flickr CC BY
브렉시트에 이어 미국 대선에 이르기까지, 2016년은 "탈진리post-truth"라는 이름 하에 사실과 진리라는 철학의 가장 전통적인 화두가 가장 시사적인 방식으로 재발굴되고 재조명된 해였다.  믿기지 않는 '팩트'에 기댄 선전과 선동이 정말로 믿기지 않는 또 다른 '팩트'를 생산하는 현실. 내가 믿고 싶은 바대로 사실을 보고, 아니 지어내고, 그것은 대체(적으)로 옳은 것(alt-right)으로 간주되는 대체 사실(alternatif fact)이 된다. 그러한 사실의 인식적 가치는 더 이상 진리치에 있지 않고 의미치에 있다. 사실 판단보다 가치 판단이, 사실보다 관념과 신념이, 사실의 진리보다 이성의 진리 (진리의 두 가지 종류에 대한 라이프니츠 이래 전통적인 구분법을 아렌트는 <진리와 정치>에서 이렇게 비틀고 있다. 즉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진리와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진리의 이항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회의 이항 대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성보다 감성이, 논리학보다 수사학이, 로고스보다 독사나 파토스가, 진리치보다는 의미치가 우선시된다. 물론 이 이분법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며, 앞에서 적었듯 '사실'이라는 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님을, 니체 이후 소위 탈근대 시대를 사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관념에 근거해서 재단된 사실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며, 현실과 괴리되고 현실에 근거한 정당성이 부족한 관념일수록 강경화되고 독단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다름 아닌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