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8일 일요일

베토벤의 유머



Che fa, che fa il mio bene?
Perchè, perché non viene?
Vedermi vuole languir 
Così, così, così!
Oh come è lento nel corso il sole!
Ogni momento mi sembra un dì,
Che fa, che fa il mio bene?
Perchè, perché non viene?
Vedermi vuole languir 
Così, così, così!
- L'Amante Impaziente, Op. 82/3, 4

"님은 뭐하시나, 왜 안 오시나, 내가 병나는 걸 보고 싶으신가, 아, 해는 얼마나 긴지, 매 순간이 온종일 같네..." 이런 애교와 앙탈로 점철된 가곡을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목소리로 듣고 있자면, 그것만으로도 참 신선하고 의외여서, 거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니 오래 살고 볼일이네, 하다가, 아참, 이게 베토벤 가곡 음반이었지, "아델라이데"와 "이히 리베 디히"가 들어 있는, 하고 상기하고는 이내, 세상에, 거참, 이게 그 베토벤 맞나, "아델라이데"와 "이히 리베 디히"와, "비창"과, 그래, "엘리제를 위하여"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 천상의 4중주를 만든 그 베토벤이 맞는지 반문하고는, 이내, 그래 맞긴 맞는데, 그렇다면 거참, 별 일이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인데.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제법 복잡한 오류추리 및 추론을 거치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껏 살은 이유와 앞으로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이 노래가 찾게 해준 셈.

문제의 노래, "참을성 없는 연인" 은 주로 "아델라이데"를 들으려 구했던 앨범 Beethoven: An Die Ferne Geliebte; Brahms: Vier Ernste Gesänge (Dietrich Fischer-Dieskau, Jörg Demus) 에 수록돼 있다. 당시 비엔나에 머물며 그곳 왕실의 궁정악장 살리에리(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저주받은 경쟁자로 그려진 바로 그 살리에리)에게 사사하고 있던 청년 베토벤의 초기 작품. 즉 베토벤이 아직까지는 현재 우리가 아는 베토벤이 아니던 시절에 습작으로, 아니 거의 장난 삼아 만든 곡. 도대체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고 장난기 가득한 이탈리아식 보드빌에 대한 파스티슈랄까. 도대체 장난과는 거리가 멀고 숨쉬는 것 같이 아주 간단한 일에조차 진지하고 장중하게 임했을 것 같은 인물이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이런 가벼운 면모도 간직하고 있었구나, 하고 웃자니, 사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 이후에도, 작곡가로서 완숙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가볍고 산뜻한 작품들을 남기지 않았으리란 법이 있나. 

당장 생각나는 예는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Waldstein", Piano Sonata #21 In C, Op. 53). 내게는 무엇보다 로메르가 각본을 쓰고 고다르가 만든 초기 단편 <남자애들 이름이 죄다 파트릭 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에 쓰인 곡으로 기억되는데, 그래선지 들을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실제로 같이 사는 여주인공 둘이 거의 동시에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는 같은 사람인 줄 모르고 "어떻게 만난 남자애들마다 이름이 죄다 파트릭이냐?"하고 깔깔대는데, 그러나 사실 문제의 파트릭은 신분을 속인 채 이 여학생 저 여학생에게 접근하는 사기꾼이었고, 실명 또한 속였을 가능성, 즉 실제 이름도 파트릭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한 등등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누벨바그 초기의 가벼움과 자유로움과, 무엇보다 장난기가 묻어나서. 이후 로메르와 고다르 둘다 공통적으로 베토벤 음악을 즐겨 쓰곤 한 것을 생각하면 그 전조격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천상의 4중주 중에도 못잖게 발랄한 작품이 있으니, 그것은 7번 (in F Major, Op. 59). 그런데 내가 이 곡을 들으며 역시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것은 역시나 거의 전적으로 고다르 덕분 혹은 탓이다. 1964년작 <결혼한 여자 Une femme mariée>에서 저 명곡을 창조적이거나 신성모독에 가깝게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추격 시퀀스에서. 그것도 부부 사이에서 벌어진. 그것도 집안에서, 응접실과 발코니와 침실을 오가며. 애들처럼, 아니 애들보다 더 유아적으로 말이다. 이 장면을 또 고다르는 마치 히치콕의 <이창>처럼 건너편 건물에서 들여다 보듯하게 찍었다. 그뿐이랴. 문제의 7번 4중주도 그냥 있는 그대로 튼 게 아니라(만약 그랬다면 고다르가 아니었을 것), 극중 주인공들이 들어놓은 엘피에서 흘러나오는 히스테릭한 웃음소리와 겹쳐 놓았다.

어쨌든, 요컨대, 그리고 반복컨대, 어떤 이들에게는 자명하고 사소할지라도 내게는 이렇게 진기하고 재미있는 사실들이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래서 오래 살고 볼일이라고들 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이 글의 제목은 무엇인가

"예술작품으로서의 제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던 ㅅ. 그에게 "제목이 소재나 주제나 형식이나 질료 등등과 마찬가지로 한 예술작품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는 주장은 알겠다. 그러나 제목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의 위상을 갖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나 <LHOQ> 은 각각이 지시하는 작품이 존재할 때 비로소 '제목'으로서 성립한다. 작품과 독립된 상태에서 그것은 단지 평범한 문장 혹은 단어일 뿐,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제목은 작품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으나 작품은 제목에 대해 독립적이며 무엇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성을 갖는다. 작품과 제목을 동일시하게 되면 범주적 혼동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불쾌해 했고, 나는 뜻밖의 반응에 몹시 당황했다. 이 말을 그다지 정연하지 않게 해서였을까. 아니면 둘다 불콰한 상태여서였을까. 나중에 그는 피곤하고 지친 상태여서 그랬노라며 사과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이후 경험한 몇 가지 유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보자면 나의 토론 태도, 아니 대화상대자로서의 태도 일반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시에는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더 그랬으리라. 어쨌든 그 이후로 ㅅ과는 제법 좋은 관계로 남아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논문을 마쳤고, 좋은 평가를 받아 소속 대학에서 주는 "올해의 논문"상까지 받았다. 물론 같은 주장과 제목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 내가 제목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그렇다고 제목이 유일한 것은 물론 아니고 수많은 강박의 대상 중 하나라는 것. 그러한 대상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사소하고 부질없는. 그러나 제목에 한해서만큼은 꼭 그렇게 사소하고 부질없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 무규칙적이고 감각적/직관적인 글쓰기 스타일상, 그 뒤에 나올 내용 및 본문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하기도 한 것이 바로 제목 선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유가 제멋대로 뻗지 않도록 단속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기도 하고.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제목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도 한다. 본문을 쓰다가 보면 논의가 처음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난관이 심각한 나머지 전면 수정하거나 아예 폐기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이거늘, 처음의 그 생각, 아니 제목을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 하나로 어떻게든 무리수를 두고 오기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예외가 아니다. 논문 전체의 제목이야 그렇다 치자. 그리고 각 장과 절에서부터 단락까지 제목을 세세하게 정해두고, 즉 목차를 세세히 짜두고, 그에 맞추어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야 오히려 가장 교과서적인, 즉 가장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논문작성법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그 목차는 어디까지나 지침서로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내용(matière)이 채워지고 완성이 된 후에야 비로소 확정될 목차(table des matières)를 가늠토록 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인데, 내게는 이 예상목차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 들어가는 본문의 실질적인 내용은 대부분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도무지 꼭 맞지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웠다 다시 쓰고, 이리 넣었다 저리 넣어도 보다가, 그러다 보면 또 내용이 안 맞아서 다시 지우고, 또 쓰고. 몇 년째 같은 상태인 이런 나를 두고 지인이 페넬로페에 비유한 적이 있데, 정말 그렇다. 베를 짜다가 다시 전부 풀었다가 다시 짜고 풀고 하기만 벌써 몇 번째 반복인지. 차이라면 페넬로페의 베짜기 놀이는 끝이 정해져 있지만, 나의 경우는 끝을 내가 내지 않는 한 정말 영원히 무한반복될 위험이 있다는 점.

내게 제목과 목차는 칸트의 초월적 이념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  우주에 관한 그 어느 언명도 이념의 기준에서는 너무 작거나 너무 크다(<순수이성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의 이율배반편). 우주에 한계가 있다고 하면 거기에서 설정되는 한계는 내가 가진 우주의 한계에 대한 이념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시작이 있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그 시작의 이전을, 경계가 있다고 하면 그 경계의 바깥을, 물을 것이다. 반면에 한계가 없고 무한하다고 하면 그것은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영원히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는다. 내가 내 경험과 한계에 도무지 맞지 않는 이상을 세우고 그 이상에 내 경험을 꿰맞추려 한다는 사실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를 그저 규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칸트는 가르치고 있거늘. 그런데 내 경우에는 이 이념들이 실제로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 사실이 있기에 과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심정...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화되고 체질화된 글쓰기 방식 때문에 제목에 대한 이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태도, 말하자면 제목중심주의/만능주의/물신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의 이 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는 "제목"이라는 간명한 '제목'을 붙였으나, 불현듯 어릴 적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제목'이 떠올라 이를 패러디를 하고픈 의지가 생겼고, 이로써 이 글 또한 저 책에 이은 자기지시, 자기모순의 사례로 추가하고 이 주제에 대해 약술하려던 것이 원래의 의도였으나... 여기에서 멈추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 글이 그야말로 제목과는 무관한 사례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2015년 6월 9일 화요일

眷然, mot orphéen

권연(眷然). 명사. 사모하여 뒤돌아보는 것. 파생어로는 동사 "권연하다"가 있다. 

애플에서 제공하는 사전을 찾다 우연히 닿게 된 말. 예뻐서 자꾸 읊조리고 또 뜻을 생각해 보게 되는 말. 불어로는 뭐라 번역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문득, 혹은 또 다시, 생각난 것이 오르페우스. 그렇담 faire comme Orphée ? 이건 좀 심심하니 좀더 용기를 내서, orphéer 는 어떨까. J'orphée, tu orphées, il/elle orphée, nous orphéons, vous orphéez, ils/elles orphéent... 

그런데 그러고 보니 오르페(Orphée)는 푸앵카레(Poincaré)와 각운이 얼추. 이를테면

Arrête avec ton Orphée, 
Reprends ton Poincaré !

그건 그런데 권연의 역어는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2015년 6월 7일 일요일

Quiproquo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의 일. 도서관에 있는데 ㅎ으로부터 문자 메세지가 왔다. "도서관에서 당신을 본 것 같아요. 이따가 나가는 길에 볼까요?"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이 내게는 특이하고 심지어 범상찮은 사건으로 여겨졌으니, 그 이유는 이러하다. 국립도서관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지 이제 겨우 사흘째. 게다가 처음 이틀은 전화기를 잊고 나왔다가 그날은 용케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ㅎ은 나를 어떻게 본 걸까? 그 날은 조금 늦은 탓에 지하 "연구관"이 아닌 지상 "학습관"에 자리를 잡았거늘. ㅎ도 평소와는 달리 지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상의 복도를 지나는 나를 지하에서 보았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나와 착각했다는 말인가?

다른 누군가를 나로 착각했다는 말은 예전에도 다른 지인들로부터 제법 들은 적이 있다. 날 닮은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 누굴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하 연구관을 지나던 중, 한 동양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마르고 아담하고 얼굴과 눈코입이 동글동글한. 순간, 저 사람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느낌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을 때의 느낌에 가까웠다. 분명 내가 한 말은 맞는데,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읽고 녹음한 것 같은, 사람들은 내게서 이런 목소리를 듣겠구나, 하는. 이 경우도 그랬다. 사람들 눈에 비친 나는 저런 모습이구나, 그런데 저 모습이 내겐 참 낯설구나, 하는. 거울에 비친 개인적이고 사적인 자아상과 사람들 눈에 비친 사회적이고 공적인 자아상 사이의 간극. 가장 내밀한 방식의 타자화 혹은 자기소외의 경험.

ㅎ과 해후하여 사연을 들어본즉슨, 과연 다른 누군가를 나로 오인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좀더 통통한 것 같았어요."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치마를 입은 누군가를 인지한 후, ㅎ은 다음과 같이 추론했을 것이다. 지각의 내용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일단 그 누군가가 ㅈ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지각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을 추가한다 : 과거에도 ㅈ과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 근처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 ㅈ은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에 자주 출입하곤 한다 ; ㅈ도 치마를 자주 입곤 한다 ... 그리하여 가설은 확증되고 결론 : 그 누군가는 ㅈ이고, 따라서 ㅈ은 현재 도서관에 있다. 전제도 모두 참이고 결론도 참인 논증.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귀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이 참인 것은 각 전제와 무관하게 우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당화된 참 믿음"임에도 "지식"이 아닌 게티어 반례와 유사하거나, 아니면 귀납의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 과거에 ㅈ이 도서관 출입이 잦았다 해서 오늘도 도서관에 왔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치마도 마찬가지. ㅈ이 치마 착용 빈도가 평균보다 높은지 의문이고, 또 그렇다 해도 반드시 현재에 치마를 착용하리란 보장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귀납 이전에 이를 뒷받침하는, 예정조화나 연속성 같은 배후의 원리가 실재하며, 실제로 유효히 작동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실제로 ㅈ이 도서관에 와 있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오랜 만이긴 했지만. 그리고 치마를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이번에는 평소대로 지하 연구관 과학기술실로 갔다. 머리가 긴 한 동양 여학생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혹시 어제 ㅎ와 나로 오인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와 닮은꼴이라는 혐의(!)를 두었던 인물과는 다르고, 이 여학생의 경우 사실 머리가 긴 걸 제외하면 큰 유사점이 보이지는 않았음에도. 

ㅎ와는 다른 볼일로 휴게실에서 만나기로 해둔 터였다. 약속 시간이 되어 자리를 나서는 순간, 아까의 그 머리 긴 여학생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시 보니 ㅂ이 아닌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이고 또 ㅎ와도 친분이 있는. 너무 재미있어서 ㅎ을 만나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녀는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훤칠하고 마른 체형인 ㅂ과 나는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다.

ㅎ이 ㅈ과 착각한 누군가를 ㅈ은 또 ㅂ으로 착각하는 키프로쿠오(quiproquo)의 상황. 가장 먼저 떠오른 예는 <피가로의 결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문학사상 우위의 라이트모티브였겠다. 누구보다 셰익스피어. ㄱ으로 가장한 ㄴ이 ㄷ을 유혹하고 ㄷ은 ㄱ이라고 생각하고 ㄴ과 사랑에 빠지고, ㄹ이라고 생각하고서 죽였는데 알고 보니 ㅁ이었고 등등. 아마도 개인성, 주체성, 정체성 등등의 개념이 본격 등장한 17세기 이전, 특히 르네상스에 두드러진 현상? 셰익스피어는 과도기에 해당하겠고. 그런데 그럼 보마르셰는? 이 시대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전례없는 정체성 혼란의 시대. 그 어느 시대보다 개인주의적인 한편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민족, 종교 등등의 집단 정체성에 개인이 종속되고 잠식되고 전유되곤 하는 시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사이보그 정체성과 현실적 정체성 사이의 경계가 갈수록 불분명해지고 분열을 촉진하는 시대. 이 모든 것이 개인/개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임을, 주체란 것은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늘 끊임없는 주체화 과정 속에 있는 것임을 증거라는 사례라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되면 키프로쿠오는 누군가를, 무엇을 인식하는 행위, 나아가 들뢰즈가 "이것은 사과, 저것은 책상, 안녕 테아이테토스"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재현적/표상적 사유 이전의, 가장 근본적인 사태가 된다.  

인식론적 맥락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위에서 ㅎ의 사례는 우선 인지/지각의 문제와 결부된다. 지각의 불투명성, 비중립성, 이론의존성. 그러나 그보다 게티어 반례와의 유사성에 주목해 보면 이렇다. 반례인 것은 "정당화된 참 믿음"이 지식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상적 인식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다른 조건을 추가해야 한다.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 미덕/가치 인식론 (virtue epistemology)이다. 논리적 진리 조건과 인지/심리적 조건에 인식에 가치 기준을 추가하는 것이다. 어니스트 소자는 이른바 AAA 인식론을 내세운다(이 문제를 매우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글 : "Getting It Right"). 어떤 앎이 진정한 앎이려면 그것이 참이고 왜 참인지를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정확하고(accurate), 요령있고(adroit), 적당한(apt) 등의 기준에도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 기준 외의 인식적 가치 기준. 이에 따르면 위의 ㅎ의 경우, 정황상, 추론이 적당하긴 했지만, 정확하지 않았고, 또 요령껏 획득됐다 보기 힘드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당장 반문이 떠오른다. 저 가치기준의 기준은? 어떤 것이 정확하고 요령있고 적당한 것인가? 나만 해도 ㅎ의 사례에서 어떤 지점이 어떤 이유에서 정확치 않았고 또 요령없는 것이었는지 확실치 않았으니까. 논점선취의 오류의 위험.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라는 결론을 선전제 해놓고 이 결론에 맞추어서 기준을 도입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결국... 인간 인식의 근본적 한계? 그보다는 지식 이론의 한계. 무엇이 진정한 앎인가를 묻다가 결국 물음으로 끝난 사례.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대표적인 선례로는 일찍이 <테아이테토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