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파리에의 헌사. 진부하지만 진정을 담아

파리에서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확히는 12년 1개월 반.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의 삼 분의 일을 보낸 것이다. 그것도 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 삼십 대를 온전히. 물론 힘들고 아프고 방황하고 절망하고 좌절한 나날이 더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았지만. 인생이란 게 그렇듯.  

한 도시에 이 만큼 살았으면 어디든 최소한 한 번쯤은 흔적을 남겼음은 당연하다. 대부분은 파리 서부에 있는 16구에서 살았다. 흔히 부르주아 동네라 불리는. 산 햇수가 햇수이니만큼 이제는 고향 같이 느껴지지만, 개인적으로 농담 삼아 "파리 텍사스"라 부를 정도로 이념적으로는 보수적이고 문화적으로는 불모지다. 그런 만큼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 나아가 내 "젊음"의 상당 부분을 보내고, 파리에서의 삶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곳은 학교와 도서관이 있는 남동쪽, 그리고 미술관과 영화관이 몰려 있는 중심부였다.

오자마자 처음으로 둥지를 틀었던 곳은 지난 11월 13일 바타클랑과 더불어 테러 공격을 당한 카페와 식당이 있던 페데브르와 볼테르 가 등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바타클랑. 아, 바라클랑.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이맘 때.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기다리고 있던 ㅅ 언니와 욜라텡고 콘서트를 보러 간 곳이 바로 바타클랑이었다. 스탠딩 콘서트는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일찍 가서 외투를 무대 가장자리에 걸쳐 놓고 연주자들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운 자리에서 공연을 본 것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한국에서 ㅅ 언니가 보낸 안부 메시지를 보니 서서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들어가기 전에 근처 빨래방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샌드위치를 먹었던 것, 입구에서 들어서니 바로 객석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 뒤편에 바가 하나 있던 것, 나와서 레퓌블리크 광장까지 밤거리를 걸어가 지하철을 탔던 것 등등. 


이번에 테러 사건이 일어난 곳은 파리 중동부에 위치한 10~11구. 부유한 은퇴자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서부의 전통적 부르주아 동네와는 달리, 자유로운 영혼과 의식을 가진 젊은층이 많이 살아 흔히 보보, 즉 부르주아 보헤미안 동네라 불린다. 전통적 구분에 따르자면 부르주아 지식인 정도에 가깝겠지만, 좌파 성향이되 극좌를 지지하지는 않고,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리는 혜택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즉 급진적 "혁명"을 부르짖지는 않아도 그 대안이나 차선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경제 사회적 불평등 해소,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이민 정책 등의 좌파적 의제들에 호응하는 면모들을 볼 때, 예전 파리 좌안의 이른바 샴페인 좌파와는 계급적으로 혹은 세대적으로 다르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조사에서 드러나는 인구사회학적 사실 못잖게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이 갖는 역사적 지정학적 문화적 상징성이다. 이곳 주민과 더불어 이곳에서 일하거나 이곳을 거쳐가는 이들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활기찬 거리의 풍경은 파리 텍사스 주민의 눈에는 다소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다. 다양한 문화와 취향과 출신 지역 및 배경 등등이 자유로이 공존하는, 21세기 파리가 가진 고유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 파리 시장인 안느 이달고가 사건 직후 바타클랑에서 말했듯 우리가 좋아하는 파리. 

현재도 현재지만 역사 또한 남다르다. 파리가 워낙 오래 된 도시인 데다가, 그야말로 국민/국가 차원에서 역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프랑스의 수도인만큼, 도대체 "역사적"이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이 공간의 역사는 확실히 남다르다. 바스티유, 레퓌블리크, 불르바르 볼테르에서 생마르탱 운하, 나시옹, 그리고 좀더 북쪽으로는 벨빌에서 페르라쉐즈로 이어지는 지선은, 한때 혁명을 꿈꾼 적 없는 사람도 꿈을 꾸게 한다. 게다가 그 사이에는 테러 이전의 <샤를리 엡도> 사옥 또한 자리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새로 쓰여지는 역사. 그리고 새로 쓰인지 불과 1년도 채 안 돼 다시 쓰여진 역사. 바타클랑, 크리옹, 콩투아 볼테르 같은 이름과 더불어.

이렇게 오래 살고 구석구석 안 다닌 데가 없어도 아직껏 "파리지엔느"라 자칭하자면 머뭇거리게 된다. 이 도시에 대한 애정에서만큼은, 이 도시가 일군 역사와 예술과 학문과 삶의 양식 및 태도에 대해서도 그렇고,  뭇 파리지앵 못지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토착민"들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하고 은밀한 경계심, 거기에서 느껴지는 소외감과 위축감, 이런 것들은 참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는 파리의 문제라기보단 내 문제에 기인한 바 크겠다. 어디 파리에서뿐이겠는가. 타자의식과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한 것이었다. 심지어 나고 자란 땅에서도 그리했으니, 어딜 가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거기에 파리가 갖는 특수성이 있다. 고향에 왔는데 모든 것이 낯선 기분, 익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낯섦, Unheimlichkeit를 느끼게 해주는 도시로 파리만한 한 데가 또 있을까. 물론 파리가 내게 주는 정서는 프로이트가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 느낀 것과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20~30년대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같은 "파리의 미국인"들이 느낀 것과도 다르고. 나름 파리지앵인 한 친구는 내게 말했었다. 너나 나 같은 외계인이 살기에 파리만큼 적당한 도시가 없다고. 크리스테바의 말마따나 "프랑스만큼 외국인이 철저한 이방인으로 머물 수 있는 곳도 없다"(« nulle part on n’est plus étranger qu’en France », Etrangers à nous-même, 1988)면, 그러한 프랑스의 중심은 단연 파리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동양인 여성이라는 영원한 타자로서 수많은 익명적 군중의 하나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특권이다. 타자에게 대체로 개방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요새는 "관광객")로서일 뿐, "동일자"로의 진입에 있어서는 사뭇 폐쇄적인 프랑스 공화국에서, 파리의 그 수많은 좁은 길들--오, 내가 더없이 사랑하는--, 그리고 그 길들을 가득 채운 군중의 물결은 이방인에게는 공화국의 저 신성한 "공적 공간" 내부에 놓인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이자 은신처다.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이 든다 해도 그것이 실존적 위협이 되지는 않고, 오히려 그 위치를 생산적으로 이용해서, 이를테면 벤야민의 산보객처럼, 성찰적이고 비판적 사유를 가능케 하는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조건을 이 도시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번 테러 사건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충격을 안겼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익명적 군중을 향한 무차별적 공격이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나일 수 있었다(Ça aurait pu être moi)"라는 말로 집약되는. 파리가 익명적 개인에게 제공해 온 군중 내의 그 아늑한 은신처가 위협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이 "초현실적 상황"은 출신, 종교, 계급 등등의 갈등과 현실 사회의 모순이 무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았다. 모두가 잠정적 공격의 대상일 가능성,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 폭력에 대한 분노 앞에서 평등해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물론, 파리. 우리가 좋아하는 파리. 그리하여 모두가 파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도 이제, 이제서야 비로소, "파리지엔느"임을 자각하고 또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일요일, 꽃과 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 지난번 샤를리 추모집회 때처럼 혼자서. 마침 집에 있는 소국 화분에 꽃이 피어 몇 송이를 따다가 조그만 부케를 만들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초도 샀다. 그리고는 바스티유로 갔다. 원래는 리샤르 르누아르 가를 지나 바타클랑까지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가는 길목 어딘가 초와 꽃과 쪽지가 소규모로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희생자 중 누군가의 흔적이 얽힌 곳일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거기에다 꽃을 놓고 초에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