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5일 화요일

Ressemblances partout 어디나 닮은꼴

1. 
<악의 꽃>의 마지막 시 : <여행>, "오, 죽음이여, 늙은 선장이여, 이제 닻을 올릴 시간" 산보객의 마지막 여행 : 죽음. 그의 목적 : 새로움. "새로움을 찾기 위해 미지의 심연으로."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에 독립적인 특성이다. 집단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분리될 수 없는 가상의 기원에 바로 새로움이 있다. 그것은 허위의식의 정수다. 이 새로움의 가상은 동일자의 반복의 가상에 반영된다. 거울이 다른 거울에 반사되는 것처럼. 
--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2. 
내가 아주 오래 전에 얻고서 스스로 흡족해 마지 않는 깨달음이 있으니, 그것은 관찰한 기간이 짧을수록 사람들은 서로 닮은 것처럼 보이며, 급기야 순간적으로[한 순간에 이르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와 똑같이 소중한 다른 깨달음이 있으니, 그것은 감정의 강도가 클 경우에는 유사성이 더더욱 커져 마침내 동일성에 일치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  발레리, <테스트 선생> 중 "테스트 선생의 몇 가지 생각"


누구에게서나 닮은꼴을 발견하는 ㅎ. ㅎ이 보기에 누구는 모 유명배우를 닮았고, 옆에서 누구누구가 모 가수를 닮았다 하면 바로 맞장구 친다. 그런 ㅎ을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고 가끔 놀리기도 한다. "ㅎ씨 눈에는 다 닮았죠? 안 닮은 사람이 없죠?" 내가 보기에도 ㅎ의 유사성 판단은 겨우 "발가락이 닮았다" 수준일 때도 있긴 하다. 

Sandro Botticelli 035.jpg그러나 ㅎ에게는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 선례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스완의 사랑>의 주인공 샤를르 스완. 스완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지오토,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주로 자신의 전문인 르네상스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닮은꼴을 발견하곤 한다. 화자네 집 부얶데기 하녀는 지오토가 그린 카리타스를 닮았고, 스완 자신의 마부 레미는 리조의 흉상을 연상시키고, 한 지인은 텡토레가 그린 초상의 인물과 닮았고 등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데트. 처음에는 그녀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다소 피곤해 하기까지 하던 그는 어느날 그녀에게서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보티첼리의 제포라를 발견하게 되고, 순간 사랑에 빠진다.

실은 내게도 닮은꼴을 발견하는 재능 혹은 경향이 있다. ㅎ과 스완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 데서 이미 알 수 있겠듯.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ㅅ은 나와 오래 알고 가까이 지낸 ㅅ 언니를 닮았고, ㅅ 선배는 자신이 공부하는 철학자를 닮았고, 그러고 보니 또 다른 ㅅ 선배도 자신이 공부하던 철학자를 닮았고, ㅈ의 여자친구 ㅇ은 <파리의 미국인>에서 진 켈리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프랑스 여배우 레슬리 카롱을 닮았고, 전에 본 수퍼마켓 계산대 점원은 프랑스 여배우 시몬느 시뇨레를 닮았고, 오즈의 <꽁치의 맛>에서 며느리 역할로 나온 일본 여배우는 아이유를 닮았고, 필립 가렐의 <정기적 연인>에 나왔고 <질투>에도 나온 한 배우는 트뤼포의 페르소나 장-피에르 레오를 닮았다. 그리고, 이건 나만의 발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우 중 하나는 그레이스 켈리와 그녀를 그린 영화에 출연한 니콜 키드만.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예고편을 보면서 니콜 키드만은 그레이스 켈리 역할을 맡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가 하면, 말이 나와서 말인데, 닮은꼴 전문가 ㅎ 또한 외모상으로 내게 누군가를 연상케 했으니, 그것은 자크 드미의 <로슈포르의 숙녀들>에 나오는 한 여배우. 양갈래 머리를 하고 신나게 춤추다 뱃사람을 만나 떠나가는. 영화배우가 아니고 말하자면 무명의 뮤지컬 배우고 그리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닌 그녀가 내 인상에 각인되었다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ㅎ 덕분이다.

근거? 없다. 유사성이란 게 본래 그렇지 않은가. 유사성에 대한 판단은 직관적, 즉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지, 논증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 판단의 내용 분석하자면 한도 끝도 없거나 (무한 분석 가능성), 아니면 아예 분석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분석 대상과 분석 행위 혹은 주체의 비분리성 혹은 상호의존성).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유사성 판단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바, "유사성과 차이의 그물망"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그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을 도입한 맥락을 돌이켜 보면, 결국 유사성이야말로 모든 개념화 및 의미 작용과 언어 게임의 기저에 있는 것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 유사성에 기초한 유비 추리(analogy)는, 비록 반드시 진리에로 인도하는 확실한 원리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경우 발견술(heuristics)로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푸코의 <말과 사물>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모두 유사성을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두 텍스트를 이런 식으로 연결하다니, 이 역시 유사성 판단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일례). 

푸코에게 유사성은 르네상스까지 전통적, 그러니까 전근대적 사유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 사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푸코는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을 든다. 우리가 아는 그 어느 존재론적 범주나 분류적 질서로도 포괄하기 힘들어 보이는 사물, 아니, 어디 사물 뿐인가,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대상들, 개념, 관념 나아가 어떤 사실이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각기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있는 동시에 하나로 어울리고 어우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가장 작은 것(microcosmos)에서부터 가장 거대한 것(macrocosmos)에 이르기까지  가장 본래적인 의미(최소한 가장 어원에 가깝다는 의미에서)에서의 코스모스의 구현. 여기에서 상호 유사 혹은 유비 관계는 서로 다른 물리적 시공간의 존재들을 연결함으로써 넥수스로서의 우주를 발견하는 방식이요,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본다면 일종의 우주론적 원리로서 기능한다. 이것이 고전시대로 넘어가서는 차이와 분류의 에피스테메로 전환된다. 벨라스케스의 <하녀들>에서 그 징후가 나타난 바, 표상 체계가 사물로부터 독립하여 더 이상 외부 세계로부터 지시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순수 차이를 근간으로 하는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유사성이 갖는 위상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차용한 "유사한 것들만이 차이를 가진다"와 "차이들만이 유사하다"라는 두 명제 (<차이와 반복> 2장, p. 153). 전자는 유사성을 제일 원리로 보고 후자는 차이가 먼저라 본다. 반복도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좀더 써보고 싶으나 그러려면 <차이와 반복>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힘들겠으므로 다음으로 미루거나 적임자에게 맡기기로 한다. 

서두의 두 인용문은 유사성-동일성에 대한 서로 상반된 접근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동일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은 상품 본연의 가치와 무관하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허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동일성이야말로 관찰자가 아마도 관찰 대상과의 합치를 꿈꾸느라 만들어낸 궁극의 환상이라고 말한다. 동일성이든 차이든 결국 어느 하나는 본질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니 당장 주저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본질론이나 이분법의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하염없이 동일성을 추구하되, 그런 한편으로 끊임없이 차이를 발견하고 없으면 발명이라도 하고자 하는 모순된 욕망이 저항감을 유발하기 때문 아닐까. 적어도 내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