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2일 화요일

인생 최고 흑역사, 계단 인사말... 그리고 흑역사는 계속된다?


- 이전 포스트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에 이어진 글. 그렇지만 실은 그 글 앞에 쓰여진 글.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쓴 바로 그날 하루 전에 써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계단 인사말이 되겠다.

3 juil. 2019 à 21:50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책이나 다른 글들로 접했던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또 이렇게 앞에 모시고 발표까지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발표 기회를 주신 학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아울러 발제문을 사전에 준비하지 못하고, 또, 발표 형식 면에서도,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는 (그것도 객석과 공유하지도 않고 혼자서만) 유럽 인문학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점에 대해서도, 양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게는 이 자리가 몇 가지 점에서 감회가 더더욱 새롭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년 전인 2008년 바로 이 자리에서 세계철학자대회가 열렸고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저는 처음으로 모국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계셨던 몇몇 선생님들을 이 자리에서 다시 뵙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분석철학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택한 주제가 바로 아돌프 그륀바움의 유신론적 우주론 비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손을 놓고 있었던 이 주제를 소환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지난해, 논문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륀바움의 별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10년 동안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발전하거나 달라진 논의는 없는지 확인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오늘 발표는 차후 이 주제에 대해 보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한 시론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제 김상욱 선생님 발표에서 나왔던 "우주는 심심하다"라는 명언, 기억하실 겁니다. 우주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어떤 의도 없이 생겨나 또 운행되고 있다. 또 그 안의 운동도 특정한 의미 없이 진행된다. 우주에 대한 과학자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고 여기 계신 철학자 여러분도 아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중요한 학회 발표를 앞두고도 준비가 미진한 상황에서 세상이 내일 멸망했으면, 아니 아예 소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혹시 해본 적 없으신지요? (그런 생각 해본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 있는데 누구라고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세상이 소멸해서 없어진 상황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해보게 되는 상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나, 지구나 태양을 포함한 천체들이, 개별적으로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을 포괄하고 포함하는 총체로서의 우주 전체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사실 상상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주가 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 가능하다. 우주가 없었거나 앞으로 없어지는 일이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이러한 일들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기독교-유대교의 도그마를 거쳐서, 가능할 뿐 아니라 당위적인 사실이 되었고, 이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로 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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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인사말을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마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하고, 발표문을 준비하지 못했더라도 발표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에 내리리라고는, 그리하여 이름하여 "서울역 회군"의 역사를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 어제 자정이 마감이라던 그 글은? 아직 못 썼다... 그리고 학회지 담당인 편집이사님께 메일로 슬쩍 마감 연장 여부를 물어봤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회 대표 계정으로 문의했던 것임을 조금 전에야 알았다. 이쯤 되면 이 학회하고는, 아니 이 학계와는 도통 연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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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1일 월요일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 이전 포스트 Scarph : PauvRe, Haute, Solitaire et melAnColique: 인생 최고 흑역사와 후일담 에 이어진 글.
- 이번에도 아스테릭스(*) 각주는 사후 추가.


4 JUIL. 2019 15:39

인생 최고의 흑역사를 기록하다.

5일 전에 쓰던 그 발표문, 결국 끝내지 못했다. 게다가 발표마저도 펑크를 내고서 연구실로 와서 앉은 지금. 처참하지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비관적이지는 않다.

원인? 시간은 넉넉했다. 그렇지만 이래저래 또 집중을 하지 못한 채로 몇 주를 흘려 보냈다. 여기저기 발표한다고 광고는 다 해놓고. 당장 8월과 9월 발표*가 예정되어 있는데 그건 다 어쩌려고? 다른 발표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건 다 해도 이것만큼은 놓치면 안 되고 제일 잘해야 했거늘.

비극적인 결말을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 지난 목요일, 그러니까 1주일 전. 23일 발표문 마감을 넘긴 후 그래도 3~4일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목요일은 이모 생일이었다. 그전에, 이번에도 내 쪽에서 먼저 자진해서 제안을 해놓고서 바로, 후회는 아니고 뭐랄까, 불길한 예감 같은 게 있었다. 이상적으로라면, 아니 예상했고 충분히 또 가능한 각본대로라면, 지난 목요일까지는 발표문에 이어 번역 발제문까지 다 마쳐놓은 상태에서 홀가분하게 저녁을 보내고 파티를 즐길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무리하게 일정을 잡아 놓으면 그 일정에 맞추려 스스로에 동기를 부여하기보다는 일은 일대로 못하고 신의는 신의대로 저버리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지 않은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으면서도 그리고 나중에 이내 후회를 했으면서도 취소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거대하고 중요한 일을 취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후로 이어진 내 행동 하나 하나가 오늘의 이 비극적 결과에 대한 복선이요 그 결과로 이어지도록 한 계기로 작용했다. 지난 목요일까지는 그 전날까지 밤을 새고 매진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금요일 내내 멍하니 있다 오후가 되어서야 목요일까지 냈어야 할 발제문을 완성해서 보내고, 주말에는 넋 놓고 <마농의 샘>과 남북미 정상회담을 지켜 보았고, 중간중간에는 단체 대화방에서 누군가의 이름과 메세지를 보고는 착잡한 기분과 회한과 망상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한 것은 아마 이번 월요일이었을 것이다. 그냥 지난 목요일 미완성본으로라도 보냈더라면? 그보다 이번 학회에서 아예 흔적을 지웠으니 그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드나... 그럴 거면 미리 못하겠다 하든지! 어제 메밀을 먹고서 우황청심원에 항히스타민제에 온갖 약을 먹어대는 소동을 벌인 것은 또 어떤가. 네가 어제 저녁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존 것이 과연 메밀 때문이기만 할까?

이 일은 내 커리어 상의 중대한 오점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40대가 훌쩍 넘었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내 커리어. 신의는 신의대로 못 지키고 실력은 실력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실력이란 게 있다면! 어쩌려는 건가? 어쩌자는 건가? 정말이지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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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다가 겨우 생각났다. ㄱ 재단에서의 발표였다. 이것도 준비를 많이 못한 상태에서 겨우 끝마쳤으나... 발표장까지 무사히 갔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자위하고 말 정도로 내 상태는 심각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지금. 당시 미완성으로 남긴 발표문 앞에 앉았다. 그렇게 대형사고를 친 후, 올해 안으로 완성해서 학회지에 투고하겠다고 공언하고 또 스스로도 다짐을 해두었는데, 학회지 마감기한이 바로 오늘 자정인 것이다. 정확하게는 어제까지였으나 오늘까지는 가능하다는 답변을 오늘 아침에 편집국으로부터 받았다. 아무래도 무리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에 마무리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을 안다. 어제까지 끝냈으면 좋았겠고, 원래는 토요일부터 이틀 꼬박 투자해서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며, 그 계획은 반드시 성사되어야 했으나, 또 4개월 전과 비슷하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주말을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4개월 전에 남북미 정상의 만남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조국 이슈가 있었고, 누군가는 또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다 오늘은 또 부모님 결혼기념일. 아침에 안될 줄 알면서 저녁 외식 제안을 했으나 정오를 향해 가는 지금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예약을 하고 두분만 가십사 말씀드린 참이다. 그래서 이곳 공부방 근처의 한 곳을 추천해 드렸더니 엄마가 됐다고, 동네에 생각해 둔 곳이 있다고, 어딘지는 비밀이라고 하신다.

... 그럼 이제 그건 됐고 이제 꼭 12시간 남았다. 세상이여, 12시간 후에 다시 만나세.

... 그런데 어디까지 했더라?

인생 최고 흑역사의 서막

- 다음은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인 6월 29일, 일기를 목적으로 "베어"라는 이름의 앱을 다운로드 받은 뒤 작성한 첫 엔트리다. 왜 4개월 전 일기를 이 시점에서 끄집어내는지는 차차 밝혀질 것이다.
- 아스테릭스(*)로 표시된 각주는 4개월 후의 시점에서 추가된 것이다.



#일기

29 JUIN 2019 À 18:58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일단 제목을 다는 일부터가 문제였는데, 이것 봐라, 제목 대신 태그 또는 해쉬태그를 달았더니 말끔히 해결되는구나. 제목과 주제어는 다르다. 주제어를 다 포괄하면서 그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나 단 하나의 구절이나 심지어 단 하나의 단어로 제한되는 것이 제목이다. 반면 주제어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늘리면 안 된다는 오캄 면도날 원리의 지배를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쓰던 에디터, 지금은 이름도 생각이 안 나는 바로 그 일기 앱* (지금 새로이 시작한 이 "베어"는 n번 째로 접한 앱이다)의 "폴더"에 대한 설명이 생각난다. 폴더라는 기능 혹은 특성에 대해 그 에디터의 개발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폴더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글들이고 폴더는 그 글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나는 그때까지 보편자 문제에 대한 그렇게 간명한 설명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설명 덕에 범주가 무엇인지, 보편자 문제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유명론이어야 하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어떤 텍스트나 이론이 아무리 들이파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일이 있다. 사실 많았다. 거의 대부분 그랬다. 푸앵카레의 규약 개념이 그랬고 또... 이해하는 일이 득도나 계시처럼 일시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문제다.

지금 쓰고 있는 "그륀바움의 기원적 실존 문제 비판". 발표문 마감일은 진작에 넘겼고 발표일을 4~5일 남겨둔 시점에서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중에 있다. 그야말로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고 비록 10년 전이긴 하지만 기존 발표문을 출발점으로 삼았기에 어느 정도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웬걸, 보면 볼수록 10년 전에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용감하게 했는가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2009년 9월에 발표**한 것이니 조금 있으면 꼭 10년! 준비 과정은 무척 괴로웠으나 어찌 어찌 발표를 끝낸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공중전화 박스(당시만 해도 드물지 않았다)에 쓰다 만 전화카드(이 역시 여전히 사용되던 때였다)를 발견하고 환희에 차서 파리와 피사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환상적인 이탈리아 여행. 내 생애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내 스스로도 가장 빛난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발표가 이 모든 황금기의 말하자면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었거늘, 이제사 다시 보니 내용도 별로 없고 그나마 있는 내용도 한심한 수준이었다니.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자. 일기는 이제 이 "곰"에게 맡겨도 되겠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리고 필력이 그래도 좀 되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얻은 것만으로도 일종의 성과라 해도 좋겠다. 이제 밥을 먹고 다시 그륀바움으로 돌아가자. 발표문은 어떻게든 오늘밤 안으로 끝내야 한다. 되도록 끝내서 내일 감자 수확***에도 참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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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생각이 났는데 이름이 journl 이었다. 너무도 오래 전, 아마 2004년 아이북에서 쓰던 앱일 것이다.  당시만 해도 그리 안정적인 앱은 아니어서 쓰던 도중에 날린 글도 허다했음에도 한동안은 열심히 꽤나 썼다. 백업파일도 남겨 놓았었는데 이후 아이북에서 맥북프로로, 다시 맥북프로에서 지금의 맥북에어로 기변을 거치는 과정에서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한편 문제의 앱 journl 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니 같은 이름의 iOS용 앱이 있고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 사이에 개발이 중단된 모양이다.


** 스위스 주네브(제네바)에서 열린 유럽분석철학회 발표였다. 국제 학회 발표로는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철학자대회 이후 두 번째이긴 하지만(두 번째이자 현재로서는 마지막...) 홈그라운드가 아니고 아무 연고가 없는 이국땅에서 혼자 발표를 한 것은 당시 내게는 나름대로 큰 성과였다. 그리고 그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 외사촌 ㅇ 언니의 형부가 교외에서 주말 농장을 일구는데 솜씨가 좋아 감자뿐 아니라 고구마, 무, 가지 등등 계절별로 다양한 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너무나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는데 지금껏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지난 주말인 20일에도 고구마 수확이 있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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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0일 화요일

구원의 기회

너도 나도 알아. 네가 내 인생을 구원하고 또 내가 네 인생을 구원하리란 걸. 문제는 너도 나도 인생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 그렇게 너도 나도 늙어가겠지. 서로가 아닌 다른 구원자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면서. 진정한 구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구원의 기회는 아직 남아 있어.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네게 달렸어.

2019년 2월 5일 화요일

봄꿈 (feat. Aselm Kiefer & 김종학)


Anselm Kiefer, Dormeur du val (extrait)
Anselm Kiefer, Dormeur du val (extrait)
Anselm Kiefer, Dormeur du val (extrait)
빌헬름 뮐러의 시에 프란츠 슈베르트가 곡을 붙여 만든 <겨울나그네>. 흔히 <겨울나그네>를 두고 멜로디가 낭만과 서정의 극치인 데 반해 가사를 들어보면 "찌질"하다고들 한다. 실연의 아픔을 호소하는 청년의 자기 연민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꿈꾸고 그 꿈을 집요하다 싶게 좇는 사람은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법도 하다. 게다가 그 꿈이 가망도 없고 그럴 만한 가치도 없어 보이는 것이라면.

그중에서 11번째 곡 "봄꿈(Frühlingstraum)"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자주 생각나고 또 자주 듣던 곡이다. 일종의 봄타령처럼. 5월에 화사하게 피어오른 듯한 찬란한 꽃들, 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들을 꿈꾸던 몽상가. 새벽에 수탉이 울어 눈을 뜨니 세상은 여전히 춥고 어둡고 게다가 까마귀까지 울어대고. 유리창에 낀 성에도 마치 누군가 꽃을 그려놓고서 한겨울에 꽃타령하는 몽상가를 비웃는 것만 같다. 그래도 몽상가는 여전히 꿈꾼다. 사랑을 위한 사랑을. 어여쁜 소녀를. (아마도 소녀의?) 마음과 입맞춤을. 다시 수탉이 울고 마음이 깨어난 몽상가는 홀로 앉아서 꿈을 되새기며 눈을 감는다. 그의 가슴이 뛴다. 언제쯤이면 창가에 푸른 잎이 돋을 것인가? 언제쯤이면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인가?*

안젤름 키퍼는 내가 제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현대 작가다. "좋아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은"이 좀 더 정확하겠다. 지난 20여 년 동안 두어 번 전시를 가본 것이 고작이니까. 세간의 팬덤 문화나, 꼭 대중문화가 아니더라도, 문화 및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바, 그 표현과 방식에 있어 무섭도록 가속화되고 다각화된 수용 패턴에 비추어 볼 때, 나는 그의 편입을 자처하기엔 너무도 게으른 관객인 것이다. 꼭 전시 현장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다른 매체를 통한 접근도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그 가능성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변명의 여지는 있다. 키퍼는 규모와 재료/질료와 재질과 장소적 맥락을 중시하는 구상을 추구하고, 그러한 작품의 속성상 감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작과의 직접적 접촉을 필요로 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것이다.

2015년 말에서 2016년 초까지 파리는 키퍼의 세상이었다. 작가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연을 했고, 라디오 프랑스퀼튀르에 여러 번 출연했으며, 국립도서관과 퐁피두센터에서 동시에 특별전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출연한 라디오 방송을 열심히 들었고, 국립도서관 전시는 틈만 나면 갔고, 퐁피두 전시에도, 언제나처럼 ㄴ 언니 덕분으로, 여러 번 갈 수 있었다. 2015년 11월 13일에 일어난 테러 때문에 모든 파리가 충격에 빠져 있었고 나 역시 그러했지만, 아니 내게 그 충격과 그 뒤로 이어진 불안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지만, 키퍼는 버틸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내가 논문이 늦어지는 바람에 급기야는 이런 일마저 겪는구나"라고 나약하고 비겁한 생각에 빠지는 대신에, "내가 키퍼를 보려고 논문을 늦췄다"라고 공언할 정도의 긍정과 낙관을 확보할 수 있었고, 덕분에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절박하고 절망적이기까지 당시의 상황을 버틸 수 있었다. 기나긴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봄의 꿈이었달까. 

사실 키퍼를 "꿈"으로 "엮"기에는 좀 무리...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꿈은 곧 신화이고 이상이고 관념이기도 한데 이는 독일 민족의 신화, 탈무드 신화, 연금술 등등 그의 라이트모티프요 그의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종학, <잡초> (1987)

원래는 키퍼의 작품론을 이렇듯 장황하고 어설프게 개진하려던 건 아니었다. 오래 소재로 묵혀둔 화두 중 하나가 "봄꿈" 덕분에 소환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덩달아 김종학의 작품도. 지난겨울 서소문 시립미술관에서 김종학의 <잡초>를 보고서는 키퍼의 바로 저 작품을 떠올렸었다. 김종학은 저런 "꽃그림"을 많이 그린 반면에, 키퍼의 저 작품은 그의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밝고 화사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그림의 제목은 "무도회에서 잠든 자 (Dormeur du val)", 랭보의 시**에서 따왔다. 랭보의 시는 비극이다. 햇빛이 찬란한 푸른 들판에 젊은 병사가 하나 평화롭게 누워 있는 풍경인데 알고 보니 병사는 숨을 쉬지 않고 붉은 상처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병사 또한 꿈을 꾸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역시 봄을 꿈꾸며 기다리는, "겨울나그네"의 그 마음이지 않았을까.



* 여기에서 따온 가사의 (구글 번역을 초역으로 한) 의역이자 자유로운/창조적인 해석. 가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Ich träumte von bunten Blumen,
So wie sie wohl blühen im Mai,
Ich träumte von grünen Wiesen,
Von lustigem Vogelgeschrei.


Und als die Hähne krähten,
Da ward mein Auge wach;
Da war es kalt und finster,
Es schrieen die Raben vom Dach.


Doch an den Fensterscheiben,
Wer mahlte die Blätter da?
Ihr lacht wohl über den Träumer,
Der Blumen im Winter sah?


Ich träumte von Lieb' um Liebe,
Von einer schönen Maid,
Von Herzen und von Küssen,
Von Wonn' und Seligkeit.


Und als die Hähne krähten,
Da ward mein Herze wach;
Nun sitz' ich hier alleine
Und denke dem Traume nach.


Die Augen schließ' ich wieder,
Noch schlägt das Herz so warm.
Wann grünt ihr Blätter am Fenster? 

Wann halt' ich dich, Liebchen, im Arm?

** C’est un trou de verdure où chante une rivière
Accrochant follement aux herbes des haillons
D’argent ; où le soleil, de la montagne fière,
Luit : c’est un petit val qui mousse de rayons.

Un soldat jeune, bouche ouverte, tête nue,
Et la nuque baignant dans le frais cresson bleu,
Dort ; il est étendu dans l’herbe, sous la nue,
Pâle dans son lit vert où la lumière pleut.

Les pieds dans les glaïeuls, il dort. Souriant comme
Souriait un enfant malade, il fait un somme :
Nature, berce-le chaudement : il a froid.

Les parfums ne font pas frissonner sa narine ;
Il dort dans le soleil, la main sur sa poitrine
Tranquille. Il a deux trous rouges au côté droit.

2019년 1월 31일 목요일

길 위에서


승객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새벽버스에 앉아 있다... 있었다. 이미 수개월 전에 끝냈어야 했거늘 계속해서 끝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는 정말로 끝내야 할 것 같아 붙들긴 했는데 여전히 진전이 안 되고 있는 일을 좀 해보려 철야작업을 감행했으나, 다른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고는 진이 빠져 집으로 향하는 길.


이 글만 해도 그렇다. 마치지 못할 걸 알면서 시작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정오를 향해 가는 시간, 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 있다. 집에 와서 아침만 먹고서 다시 온다는 게 늑장을 부린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지나고 또 공간도 바뀌어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지하철 안. 어제 밤까지 새면서 준비했거늘, 준비한 내용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토론에서 제대로 의견을 개진하지도 못했으며 발제문은 또 군데군데 오류와 오해와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아프게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 아무리 수년 만의 세미나 발제요 또 토론도 오랜 만이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철학박사가 그 정도라니, 부끄럽기가 한량 없다. 어떻게 논문을 완성하고 제출하고 또 심사까지 받았는지, 게다가 좋은 평가까지 받았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도대체 어떻게? 논문을 쓰기는커녕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 하다 못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집중하고 적당한 반응을 보이는 일조차 힘겨워했던 내가?


심사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와 생활이 안정되면 심리적 안정도 찾고 우울증도 나아지고, 그리하여 연구, 아니 삶 전반에 대한 의욕과 활기를 되찾으리라 기대했건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적어도 나 같이 나약한 인간에게 주저앉을 핑계로 삼기에는 충분히 높았다. 물론 현실을 탓할 수는 없고 탓해야 할 것은 오직 내 자신이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개중에는 다소 불편한 자리들도 있었건만 그래도 제법 무탈히 끝냈고, 바라던 제주도나 부산이나 일본이나 홍콩이나 포르투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춘천과 강릉도 다녀오고, 운동도 하고, 그러는 동안에 틈틈이 몇 가지 일을 가까스로나마 마쳤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기록 가치가 있는 사건은 아주 가끔씩 일어났을 뿐,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림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전에 이미, 아주 오랜 시간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러는 동안에 다시 아침. 다시 지하철을 타고 와서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끝에,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10시에 출발하는 세종행 버스 안이다. 터미널로 오는 중에 몇 문장을 이어갔거늘, 버스를 타서 다시 보니 온데 간데 없다. 어쩐지, 글이 간만에 막힘 없이 술술 풀린다 했다.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역사로도 그 무엇으로도 남지 않을 문장들. 그리고 그 시간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말과 시간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또 지배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세종으로 가는 이 버스 안에서 조금 전 깜빡 잠이 들고 깨던 그 찰나까지도, 지난 5년 내내 나를 괴롭힌 그 말들과 시간을 되살고 또 그것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질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창밖으로는 아파트, 산, 공장, 논밭이 펼쳐진다. 얼어붙은 강물이 잠깐 보인 걸 제외하면 대부분은 다소 지루한 풍경의 연속이다. 돌아온 후 처음에는 산이 많은 게 그렇게 좋았다. 가도가도 평원이 펼쳐지는 서유럽의 정경에 질려 있던 터일까. 그런데 지금은 산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그렇다고 유럽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경이와 찬탄과 호기심 등 세상에 대해, 세상을 향해 가졌던 감응이 사라지고 감성 능력 일반이 퇴화된 상태인 것이다. 예전에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했던 것들, 이를테면, 백석, 윤동주, 루시드 폴, 고다르, 특히 <미치광이 피에로>, 크리스 마커, 특히 <활주로(La jetée)>, 우디 앨런의 <맨해튼>(지금의 이 열거도 이 영화에서의 "이 시궁창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살아내어야 할 이유"를 줄줄이 나열하는 대목에 대한 참조요 오마주다), 베토벤 현악 4중주, 특히 15번과 16번,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혹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번, 특히 재클린 뒤프레와 다니엘 바렘보임의 마지막 녹음, 바흐와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곡들, <마술피리>와 <피가로의 결혼>... 철학은? 가슴을 뛰게 했던 철학이 있었던가? 이를테면 20대에 멋도 모르고 읽고 배운 니체. 바슐라르. 푸앵카레 <생성론 강의>의 첫 문장 ("세계의 기원은 온 인류가 태고부터 물어 온 질문이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지 않기란 사유하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이 말고도 분명히 있었는데. 심지어 여럿이었는데. 스카프(SCARPH), 즉 과학(SCience), 예술(ARt) 그리고 철학(PHilosophie), 이 세 가지가 없는 삶은 오류일 뿐 아니라 아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던, 이 세 가지를 존재의 근거요 이유로 삼던 시절이.

다시 두 번의 아침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몇 차례 바뀌었다. 세종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서울 안에서도 관악으로 또 신촌으로 등등. 버스를 몇 번 더 탔고, 터널을 한 번은 버스로, 다른 한 번은 도보로 건넜다. 터널에 들어선 전후로는 눈도 맞았다.그리고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집이다. 그 어느 곳도 아니며 동시에 모든 곳이기도 한 바로 그 장소. 굳이 집이 아니더라도 그렇지 않은 장소가 어디 있으랴. 내가 있고 싶은 곳은 그 어디에도 없고, 그 어디든 있고 싶지 않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 이 세상 밖이 아닌 이상("n'importe où hors de ce monde").

덕수궁 돌담길. 2018년 초.
ㅅ에게 감사.

그러니까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 아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에 있든,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는 것이다. 내 가는 곳이라면,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길이 아니더냐. 도착하면 그곳은 곧 떠날 곳이 되곤 하지 않더냐. 그러니 떠나라. 일어나서 걸어라. 뼈는 여전히 부러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