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스테릭스(*)로 표시된 각주는 4개월 후의 시점에서 추가된 것이다.
#일기
29 JUIN 2019 À 18:58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일단 제목을 다는 일부터가 문제였는데, 이것 봐라, 제목 대신 태그 또는 해쉬태그를 달았더니 말끔히 해결되는구나. 제목과 주제어는 다르다. 주제어를 다 포괄하면서 그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나 단 하나의 구절이나 심지어 단 하나의 단어로 제한되는 것이 제목이다. 반면 주제어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늘리면 안 된다는 오캄 면도날 원리의 지배를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쓰던 에디터, 지금은 이름도 생각이 안 나는 바로 그 일기 앱* (지금 새로이 시작한 이 "베어"는 n번 째로 접한 앱이다)의 "폴더"에 대한 설명이 생각난다. 폴더라는 기능 혹은 특성에 대해 그 에디터의 개발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폴더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글들이고 폴더는 그 글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나는 그때까지 보편자 문제에 대한 그렇게 간명한 설명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설명 덕에 범주가 무엇인지, 보편자 문제의 쟁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유명론이어야 하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어떤 텍스트나 이론이 아무리 들이파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일이 있다. 사실 많았다. 거의 대부분 그랬다. 푸앵카레의 규약 개념이 그랬고 또... 이해하는 일이 득도나 계시처럼 일시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문제다.
지금 쓰고 있는 "그륀바움의 기원적 실존 문제 비판". 발표문 마감일은 진작에 넘겼고 발표일을 4~5일 남겨둔 시점에서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중에 있다. 그야말로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고 비록 10년 전이긴 하지만 기존 발표문을 출발점으로 삼았기에 어느 정도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웬걸, 보면 볼수록 10년 전에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용감하게 했는가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2009년 9월에 발표**한 것이니 조금 있으면 꼭 10년! 준비 과정은 무척 괴로웠으나 어찌 어찌 발표를 끝낸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공중전화 박스(당시만 해도 드물지 않았다)에 쓰다 만 전화카드(이 역시 여전히 사용되던 때였다)를 발견하고 환희에 차서 파리와 피사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환상적인 이탈리아 여행. 내 생애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내 스스로도 가장 빛난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발표가 이 모든 황금기의 말하자면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었거늘, 이제사 다시 보니 내용도 별로 없고 그나마 있는 내용도 한심한 수준이었다니.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자. 일기는 이제 이 "곰"에게 맡겨도 되겠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리고 필력이 그래도 좀 되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얻은 것만으로도 일종의 성과라 해도 좋겠다. 이제 밥을 먹고 다시 그륀바움으로 돌아가자. 발표문은 어떻게든 오늘밤 안으로 끝내야 한다. 되도록 끝내서 내일 감자 수확***에도 참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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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생각이 났는데 이름이 journl 이었다. 너무도 오래 전, 아마 2004년 아이북에서 쓰던 앱일 것이다. 당시만 해도 그리 안정적인 앱은 아니어서 쓰던 도중에 날린 글도 허다했음에도 한동안은 열심히 꽤나 썼다. 백업파일도 남겨 놓았었는데 이후 아이북에서 맥북프로로, 다시 맥북프로에서 지금의 맥북에어로 기변을 거치는 과정에서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한편 문제의 앱 journl 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니 같은 이름의 iOS용 앱이 있고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 사이에 개발이 중단된 모양이다.
** 스위스 주네브(제네바)에서 열린 유럽분석철학회 발표였다. 국제 학회 발표로는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철학자대회 이후 두 번째이긴 하지만(두 번째이자 현재로서는 마지막...) 홈그라운드가 아니고 아무 연고가 없는 이국땅에서 혼자 발표를 한 것은 당시 내게는 나름대로 큰 성과였다. 그리고 그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 외사촌 ㅇ 언니의 형부가 교외에서 주말 농장을 일구는데 솜씨가 좋아 감자뿐 아니라 고구마, 무, 가지 등등 계절별로 다양한 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너무나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는데 지금껏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지난 주말인 20일에도 고구마 수확이 있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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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사촌 ㅇ 언니의 형부가 교외에서 주말 농장을 일구는데 솜씨가 좋아 감자뿐 아니라 고구마, 무, 가지 등등 계절별로 다양한 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너무나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는데 지금껏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지난 주말인 20일에도 고구마 수확이 있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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