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onceito - Nara Leão. 지난 여름 루시드폴 콘서트에 갔다가 들은 노래. 오랜만에 생각나서 유튜브를 뒤적이다 뜻밖에도 이런 보석을 발견. "보사노바의 뮤즈"라 불렸다는데, 그저 누구누구의 뮤즈에 머무르지만은 않았을 터. 차라리 "보사의 조안 바에즈"가 낫지 않을까. 바에즈만큼이나 청아한 목소리를 지녔음은 분명하니까.
내 느낌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브라질의 뮤직 비디오들에서는 극도의 클로즈업이 상당히 자주 쓰이는 것 같다. 베르히만을 연상시킬 정도. 윗머리도 자르고, 오로지 눈, 코, 그리고, 특히, 노래하는 입, 그리고 가끔씩 기타를 잡은 손. 그밖의 모든 것은 가식이라는 듯. 이 클립도 그렇고, 다른 몇몇 브라질 가수들의 공연 실황 클립들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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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것 (노래나 이미지가 딱히 좋진 않다. 그저 촬영 기법 및 스타일의 예로서 들고자 하는 것일 뿐)
>무의식에서 아니 손끝에서 나오는대로. 게다가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 배터리는 20%밖에 남아 있지 않고, 아이팟은 10초 간격으로 그 사실을 전하는 중이며, 게다가 이 무선 인터넷 네트워크는 불안정하기로 이름이 높고 또 명성을 확인이라도 하라는양 역 4분 간격으로 접속을 끊어놓는다. 자동 기술을 (참, 잊을 뻔했다. 아이팟의 자동 입력 기능을. 방금만 해도 자동기술을 자동차극장으로 바꿔 놓았다) 실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 도전에 취미가 있고 도전이 극한의 경험에 접근할수록 쾌를 느끼는 경우라면 더더욱.
꼭 2년 전, 10월의 마지막 사흘 동안이었다. 스위스 베른과 로잔으로 혼자 떠난 것은. 베른은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와 결혼해서 애를 키우고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솔로빈, 베소 등의 친구들과 "올림피아"라는 이름의 서클을 만들어 세미나를 하면서 살던 중, 마침내 물리학을 뒤흔든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가장 젊고 빛나는 시절을 보낸 바로 그 도시. 로잔은...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당시 그곳서 유학하고 있던 루시드폴의 "발자취"를 느껴보겠다는 명목으로 무작정 목적지로 집어넣었으나, 그보다 내 인상에 깊이 각인된 것은, 드넓은 호수, 그 뒤로 펼쳐진 알프스 산, 호숫가에서 갈매기와 오리와 백조가 한 데 어울린 광경, 생각보다 큰--이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도시 규모, 말끔하고 안정돼 보이는 공원이며 주택가, 중심의 교회를 빙 둘러싸고 골목마다 가게들이 언덕을 덮은 도심, 무엇보다, 개관 70주년을 맞아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Top Hat 을 무료 상영하던 영화관, 상영 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며 수줍게 인사했던 영화관 주인 할머니 등등이었다.
충동적이요 즉흥적으로 감행한 여행. 이런 여행을 그 이후로는 해 본 기억이 없다.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이되 사람들과 함께였거나, 아님 홀로이되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떠났거나. 그러고 보니 스위스 때도 나름 이것저것 계획을 많이 세우긴 한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좀처럼 늘지 않는 여행 실력과 도대체 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삶 전반에 관한 내 특유의 어리어리함 덕분(?)에, 유럽의 고도들은 모름지기 복잡하고 좁은 옛 골목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야 제맛, 이라는 내 원칙은 충분히 고수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갑자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해야 할--정확하게는 해놨어야 할-- 일들을, 미루고 미뤄둔 것도 모자라 닥치기로 하면서도 전혀 능률 없이 하고 있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백석의 "북관의 계집"이 떠오를 만큼 절망스러운 이 상황에.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는 말이 make sense 하는 건지, 한다 해도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 누구나 다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 의지할 대상을 구하고 싶고, 기왕 의지할 거면 그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그리하여 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는, 그런 때 말야.
나도 그랬고, 그럴 때 성당에 간 적도 있지. 일요일마다 가끔, 심지어 이번 일요일에도 그럴 하는 생각을 했었어. 가서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눈으로 꽤 볼 만한 성당 건축물이나 장식물을 즐기고, 또 귀로는 꽤 들을 만한 음악을 생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안정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기도 하더라고. 쉽게 오는 만큼 쉽게 사라지기도 해서 문제지만.
안정의 수단을 꼭 종교에서 찾을 필요는, 또 그 종교가 기독교만큼 "초월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나한테 성당은 미술관이나 영화관 가는 일이랑 똑같거든. 이렇게 심미적인 쾌를 제공하고, 이것을 다시 "전통"으로 남기는 것만으로 기독교, 적어도 천주교는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한 것이고,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내겐 존재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어. 이건 순전히 기독교가 이곳에서 오랜 역사와 권력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과정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나는 어쨌든 그 덕에 위안을 얻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만 종교에서 그 이상을 구할 수 있을까? 삶의 지침이나, 살아갈 이유, 심지어 원동력이나 동기 같은 것까지. 나 역시, 착한 행동이나 가상한 노력 등등은 언젠가 보상을 받고, 나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대가를 치루게 된다, 등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게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알다시피 신이나 혹은 다른 자연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각 인간들에게 고유한 '자유의지'란 게 있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 하난데, 이건 도대체 판결이 날 수 없는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야. 각자가 가진 신념에 따라, 혹은 입맛에 따라, 맞는 걸 선택하고 그걸 "믿고" 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오히려 아까 말한 지침, 이유, 원동력, 동기 등등은, 내 경우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 같아. 내가 의지로 부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참 이상한 일이지? 이번에 내게 이 모든 걸 선사한 건 너였어. 지난 토요일 너와의 통화 이후, 정말 거짓말처럼, 정신과 열정을 되찾았어. 내가 네게 비슷한 선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마도 지금쯤이면 넌, 발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성공적인 발표라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바야흐로 여름. 바캉스를 맞은 파리는, 원래는 '공백'을 뜻했던 '바캉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하철, 버스, 백화점, 거리, 까페, 그 어디고 할 것 없이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들을 보면서,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의 틈 안에서 또는 그들과 시선을 나란히 하면서 (그들에 대해 뭇 파리지엥들마냥 철저히 "관찰자 시점"을 취하기란 내게 언제까지나 불가능한, 또는 경계해야 할 일이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이곳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이상 완전히 외지인인 그들과는 그래도 좀 다르리라는, 야릇하고 알량한 우월감이 내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가끔 로메르를 떠올리며 혼자 웃곤 한다.
이 모든 것이 아마도 로메르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여름의 파리는 미리 준비를 하지 못했거나 동행을 찾지 못해 휴가를 떠나지 못한 한심한 사람들이나 남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처음에 세웠던 휴가 계획이 좌절되자 망연자실해 하던 [녹색광선 Le rayon vert]의 델핀을 생각해 보라). 파리지엥이 아니라 해도 여름을 파리에서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해도 잘 들지 않는 데다가 툭하면 비가 오기 일쑤고, 바다나 그 밖의 "자연"을 만끽할 만한 공간이 거의 없거나 한없이 부족하고, 아무래도 도시적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메르가 여름을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녹색광선] 외에도 [남자 수집가(?) La collectionneuse], [클레르의 무릎 Le genou de Claire], [해변의 폴린 Pauline à la plage], [여름 이야기 Conte d'été] 등이 "피서지에서 생긴 일"을 그리고 있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이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친구의 친구 L'ami de mon amie]나 [겨울 이야기 Conte d'hiver]도 빼놓을 수 없겠다.
왜 휴가지인가? 로메르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각자 고유한 삶의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이를 완강히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답답해 할 정도로. [겨울 이야기]의 펠리시는 소식이 끊겼으며 재회 가능성이 그야말로 백만 분의 1인 옛 애인--이자 딸아이의 아빠--을 5년 째 기다리고 있고, [해변의 폴린]의 폴린은 주변 어른들의 애정 행각(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녹색광선]의 델핀은 자신이 바라는 "꿈의 휴가"를 위해 계속해서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자신의 운명을 틀어쥐고 그것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그들이 적어도 휴가지에서만큼은, 아니 오직 휴가지에서만, 운명(destin)의 힘이 아닌 우연(hasard)의 힘에 이끌린다. 평상시 그들의 삶에 우연의 여신이 개입할 여지는 극히 적다. 여신으로서는 그들이 낯선 곳에 떨어져서 잠시 긴장을 늦춘 사이, 바로 그 틈을 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잡은 이상 이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쉽지 않게 잡은 만큼 더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우연의 여신들이 대부분 선하며 늘 친절만을 베푼다는 사실이다. 펠리시는 옛 애인을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델핀은 마침내 '우연'히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 최고의 휴가를 만끽한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냐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작위성은 적어도 로메르 세계 안에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가 독실한 천주교도인 동시에 파스칼의 충실한 독자였다는 사실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사실 이 둘은 차치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그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특히 파스칼은 영화에서 두 번, 희곡에서 한 번 총 세 번씩이나 직접 인용된다), 나는 이것이 작가의 자의식이 근본적으로 허구라는 속성을 지닌 영화라는 장치 안에서 여러 겹에 걸쳐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로메르 특집호)의 한 필자가 지적했듯, 작가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인물로는 [겨울 이야기]의 로익을 꼽을 수 있다. 로익은 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사서로 근무 중인, 펠리시의 표현에 따르면 너무 "앵텔로"한, 즉 먹물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물이다. 게다가 카톨릭.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나 영혼의 불멸/부활 등의 카톨릭 교리들을 "신화"로 치부하면서 믿지 않는다. 반면 펠리시는 기존의 종교가 아닌,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확고한 "믿음"(펠리시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내밀한 확신conviction intime")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로익은 말한다. "내가 신이라면 너를 특별히 귀애할 거야. 왜냐하면 너는 부당하게 [옛 애인의 소식두절이라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바로 이거다. 그(로익-로메르)는 천주교도이나 그저 소박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회의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런 그에게, 비현실적으로 비칠지언정, 그 어느 종교적 또는 지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그녀(펠리시-다른 수많은 로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들은 경이의 대상이다. 만약 실재했더라면 그녀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부당하게 고통을 당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그녀들에게, 그는 작품 내에서의 창조주라는 위치를 이용해 축복을 베푼다.
초기를 제외하고, 특히 여성이 로메르 세계의 중심에 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주체/주관으로서의 '그'와 객체/대상으로서의 '그녀'의 분리가 두드러진다. 첫 장편 [사자 자리 Signe de lion]에서부터 [오후의 사랑 L'amour, l'après-midi] 까지) 까지의 '그'들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이념/이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녀'들 못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감독이 '그'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그'녀'들에 대한 것만큼 애정에 넘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몹시 자조적이고 냉소적이다. 이들에 대한 우연의 여신의 역할 또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반면에 '그녀'들은 그런 '그'들에게서 속물의 탈을 걷어내고 남은, '순수'한 관념론자/이상주의자들의 현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로메르가 되고 싶어했던 그 무엇이다.
위의 클립, "춤추는 로메르"에서 우리는 이상주의자로서의 그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릴 수 있다(비단 이상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인간' 로메르가 가시화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카메라에 자신을 노출하는 일을 극도로 꺼렸다. 남아있는 그의 인터뷰는 서면이나 라디오 녹화가 대부분이다). [녹색광선]에서 그는 진짜 '녹색광선'을 찍고 싶어했고,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 드문 현상을 카메라에 담는 데에 성공하지만, 필름에 찍혀 나온 결과를 보고 적잖이 실망한다. 그가 쓰던 "원시적"인 장비들과 좋지 않은 필름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일. 결국 그는 최종 편집본에 초록색을 덧칠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 샷에서 다소 작위적인 초록빛 선을 보게 된 이유다.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로메르는 10년 후 [여름 이야기]를 찍으면서 다시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며칠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최후의 시도를 마친 후, 포기를 선언한 날, 마침 있었던 나이트 클럽에서의 촬영을 마친 그는 무대에 올라 미친듯이 춤을 춘다. 젊은이들 틈에서, 젊은이들이 듣는 댄스 음악에 맞춰서. 그의 면면--지극히 고전적인 예술 취향, 수줍고 조심스러운 태도 등--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가늠해 보리라. 그에게 녹색광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퐁피두 센터의 드림랜드 전에서 보고 온, ' target='_son'>http://www.juliafullerton-batten.com/> Julia Fullerton-Batten 의 틴에이지 스토리즈 연작 중 하나. 거인 소녀가 책을 찢어 종이배를 만들고 있다. 옆 어딘가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소인국 주민도 있다. 소녀가 들고 있는 책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닐까 하고 자세히 보니 다른 책이었다.
신디 셔먼 식의 "극적"인 연출과 소녀에 대한/소녀에 의한 판타지가 결합하니 저렇게 환상적인 풍경이. 앨리스를 연상한 게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잠시 앨리스가 입었던 옷이 빨간색 아니었나 하는 착각을 했을 정도. 유난히 저 또래 소녀들 이야기를 좋아한다던 하품 생각이 났다.
"가만히 귀 기울여 이 소리를 들어봐 이 작고 작은 꽃잎 하나가 커다란 세상을 품고 있구나
내 게으름 내 무관심 바쁘다는 핑계로 물 한방울 못 준 오늘 하루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대여 하지만 원망하는 눈빛 하나 없이 힘겹게 나를 보고 웃는 그대 당[신?]이 작은게 아니라
내가 한없이 작고 또 작은 걸 유난히 가무는 올해 가을을 견디고 있는 그대 이 작고 작은 꽃잎 하나에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이 한없이 작은 나의 마음 속에도 피우네 피우네"
루시드폴 4집 "레미제라블" 중, 가사로만 수록된 미완성곡. 이것은 차라리 시인가? 시인지 가사인지가 왜 중요한가, 하고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특히, 루시드폴 같이, 시를 쓰듯 가사를 쓰고, 악상과 시상이 늘 공명했음에 분명한 노래를 만드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런데 저 위의 노래/시(루시드폴 본인의 용어법에 따르면, '시가')는, 제게 맞는 멜로디, 즉 제 자리를 아직껏 만나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시인/가수는 문자들로 둥글게 말아 CD 커버에 박아두는 데에 만족해야 했던 것이리라.
이것만 봐도, 그는 참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사람 같다. 많긴 하되, 그 많은 말들을 일일이 공들여 정성스레 갈고 닦고, 그렇게 해서 정제한 말들마저도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은근하게 건네는. 그가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나직이 시를 읊조리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공연에서는 그가 앨범에서 채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할 것 같다. 그 말들을 듣고 싶다. 가수보다는 작곡가/시인로서의 그의 말들을.
사진은 물고기넷에서. ' target='_son'>http://mulgogi.net>물고기넷 ... /a>에서.
프랑스의 음유시인들
세르주 레즈바니(Serge Rézvani, alias Borris Bassiak). 그의 가사들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쉽게 가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소소한 일상의 편린들이, 그리고 거기에 기반하는, 그래서 더더욱 빛나는 진실들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조르주 브라상스, 레오 페레, 보리스 비앙, 바르바라, 세르주 갱스부르 등등과 더불어 현대 프랑스 샹송의 전통을 일군 주역 중 하나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얼마 전, 내가 즐겨듣는 France Musique 에서 그에' target='_son'>http://sites.radiofrance.fr ... 934> 그에 관한 특집 방송 을 마련했다. 잔느 모로의 "J'ai la mémoire qui flanche", 그리고 그녀가 쥘과 짐 에서 불러 유명해진 "Le tourbillon"을 비롯해서, 안나 카리나가 미치광이 피에로에서 부른 "Jamais je t'ai dit que je t'aimerais toujours", "J'ai une petite ligne de chance"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기회. 다음 주 월요일인 6월 28일이면 끝나는, 그래서 더더욱 소중한.
무엇보다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과 논리로 이상/이념을 좇는 보통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찬사. 이것이 적어도 중반기 이후, 그러니까 Contes moraux 연작 이후의 작품들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다.
-- 카이에 뒤 시네마에 소개된 "녹색 광선"에 얽힌 일화.
-- 로메르와 파스칼. 또는 플라톤, 칸트 등 로메르의 철학자 인용.
-- 로메르와 홍상수. 또는 내가 홍상수 영화에 호감을 갖게 된 이유.
영화는 세 가지 시점으로 전개된다. 먼저 히파티아의 몸종이자 기독교로 개종한 데이버스의 시점. 데이버스에게 있어 히파티아는 주인이자 우상이자 스승이자 연인이자 이교도로 그려진다. 전혀 "모호"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랄까? 따라서 맘놓고 거리를 둘 수 있는 타자, 일종의 타자의 원형 같은.
알렉산드리아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을 서술하는, 일종의 역사가적 관점. 일종의 "로마제국흥망사"를 기술하는 역사가에게, 히파티아는, 초토화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희생된 그리스적 이성을 상징한다. 좀더 시사적으로는 종교적 극단주의 및 독단론이 얼마나 반이성적이며 위험한 이데올로기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교훈을 던져주는 인물이다. 이는, 히파티아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한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취한 입장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는, 위의 두 시점을 초월하는, 우주적이며 신적이며 전지적인 시점. 영화의 처음과 끝은 우주에서 지구, 다시 지구에서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파티아의 학당 등으로 좁혀지는 샷--내가 혼자 멋대로 "조나단 리빙스턴 샷"이라 부르는. 구글맵을 연상하면 되겠다--이 등장한다. 이 샷을 역사적인 배경이나 사실--"히파티아가 죽은지 1200년 후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궤도가 (히파티아가 직관했던 바대로) 타원임을 밝혀냈다"--이 설명된다. 이로써 히파티아가 얼마나 시대의 광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그만큼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는지가 강조된다.
나는 이 셋 중 어디에도 공감하기 힘들었다. 첫번째는 진부하고, 두번째는 설득력이 부족하며, 세번째는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감독이 히파티아의 내면을 파고듦으로써 그녀를 이해시키겠다는, 그리고 스스로 이해하겠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파티아같은 신비는 곡해하고 왜곡하는 것보다는 그냥 신비인 채로 두는 편이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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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어떤 천문학사가가 장대한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외형에 인물에 대한 지나친 미화 혹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 등등을 지적한 걸 본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주인공 히파티아가 지구중심설이 아닌 지전설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이 '사실'과 상대성원리가 연결돼 있음을 코페르니쿠스에 앞서 간파하고 이에 대한 갈릴레오의 논증을 이미 확립했던 것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지전설은 천동설과 더불어 이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천체의 운동에 대한 하나의 가설로 인정되어 왔다. 영화에도 "그리스의 코페르니쿠스"라고도 불리는 아리스타코스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천동설이 코페르니쿠스, 아니 심지어 갈릴레오의 시대까지 그토록 패권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지전설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경험적 사실을 통해 뒷받침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갈릴레오는 이 사실을 상대성원리로 설명한다. 등속으로 움직이는 배 위에서 나비는 어떻게 움직일까? 어항 속 물고기는? 나비와 물고기가 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것들의 속도는 배의 속도를 더한 만큼 빨라질까? 뭍에서 보면 그렇겠지만, 선상의 관찰자에게 물고기와 나비는 배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갈릴레오는 지구인들이 지구의 운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배 위에 올라탄 선원이 배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설명했다. 정지해 있거나 등속으로 움직이는 관성계 내에서 운동은 같은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배 위의 돛대에서 공을 수직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공이 낙하하는 시간동안 배는 그만큼 이동했을 것이므로 공의 낙하 지점이 돛대으로부터 배가 이동한 거리만큼 떨어진 위치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비슷한 종류의 흔한 오류로 다음과 같은 추론이 있다 : 지구는 서에서 동으로 돌므로,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는 경우, 이 비행기는 반대 방향으로 같은 시간동안 날아간 다른 비행기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배 위의 공과 선체가 모두 같은 속력으로 움직이면서 하나의 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지구와 비행기도 그러하다. 이때 공이나 비행기는 마치 배와 지구가 멈춰있는 것처럼 운동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오류추리"가 갖는 설득력은 굉장한 것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전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으로 제시되곤 했다. 그러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전설이 재조명되면서, 특히 갈릴레오에 대한 교황청의 재판 덕에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지구의 운동"을 "실험적"으로 증명할 방법들이 고안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16~17세기에 유행한 돛대 "실험"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히파티아가 이미 이 "실험"을 고안했고 또 실제로 시행한 것처럼 그리고 있다. 뿐만인가. 히파티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거친 일련의 추론의 과정은 1200~1300년 후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등이 몇 세대에 걸쳐 전개한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공심원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를 들면 수성 및 금성의 역행 같은 이상 현상들을 "구원"하기 위해 태양중심설을 채택했는데, 여기에 갈릴레오는 지구의 운동이 경험되지 않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상대성 원리를 덧붙였으며,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수정 및 보완,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보였다. 여기에서 케플러는, 영화에서 히파티아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즉 원은 타원의 특수한 한 예에 불과하다는 것.
히파티아같은 천재라면 이 모든 추론을 혼자서 해낼 수 있지 않았겠냐고? 특히 돛대 위에서 물체를 낙하시키는 일이야 히파티아나 아니 그 이전의 누구라도 할 수 있었을 일 아니냐고?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가능케끔 할 수 있는 과학사적 맥락이다. 4세기를 산, 그것도 신플라톤주의자이자 피타고라스주의자였던 그녀가, 코페르니쿠스보다 무려 1000년이나 앞서 이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보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과거의 인물이 살았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관점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시선은 당대의 학적 맥락과 과학사적 전개를 무시하고 사후에 "진리"로 판명된 바에 그녀의 사유를 무리하게 끼워맞춘, 휘그적(whiggish) 해석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쩌면 내가 정통 사관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가 헤게모니를 획득하면서 중세의 이른바 "암흑"으로 접어들지 않았더라면 16~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걸린 1000년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 단축되었을 수도 있었을 일. 당시 로마가 그리스 문명이나 비기독교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특히 히파티아가 산 알렉산드리아가 당대 최고의 문화적이고 학문적인 중심지였음을 고려한다면, 영화가 상정하고 있는 그녀의 놀라운 과학적 성취도 또한 그렇게 과장된 것만은 아니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