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데런의 거울

blogin.com · 2005-01-29

퐁피두 시네마에서 마야 데런(Maya Deren)의 예술 세계를 그린 다큐멘터리 《마야 데런의 거울속 In the Mirror of Maya Deren (2002)》을 봤다. 추위가 유난히 맹렬했던 지난 주 금요일에. 사실은 볼 생각이 아니었던, 보려던 다른 영화를, 영화관을 못 찾아서 보지 못하는 바람에 꿩대신 닭으로 삼아 본 영화였는데, 이 영화와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본 《클린》은 꿩 이상의 닭이 되고도 남았다.

 

그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나로서는, 키예프 공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가족을 따라 뉴욕으로 망명한 뒤 선구적인 실험 영화 감독--루이 브뉘엘과 동급으로 취급되는--이자 탁월한 인류학자--아이티의 신화와 전통 의식인 부두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로 이름을 날린 이 멋진 여성에게 그저 감탄하고 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저렇게 아름답고 열정적이고 재주많고 똑똑한 언니를 여지껏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중간에 잠깐씩 비춰진 그녀의 작품들 역시 그러한 감탄과 통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사실, 만약 그녀가 "마야"라는 예명에 그 이상 잘 어울릴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외모를 갖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로 감탄하거나 통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각종 영화 및 기타 예술 이론들에 깊이 천착한 듯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그러한 이국적인--동/서양 어디에도 속한 것 같지 않은-- 외모를 천박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이질감이 들지 않게 담아내는 솜씨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나르시시즘이다. "작가"들이 은근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기 합리화 경향이나 자기애 성향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조차도 무릎을 그저 꿇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거다. 어떻게 하면 카메라를 통해 사람 몸의 움직임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였는데, 그러자니 그 누구보다 '몸'을 '몸'으로 잘 표현할 줄 아는 그녀 자신을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서 고다르의 "카메라는 여자들을 좋아한다"는 말은 데런에게로 와서 참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명제가 된다.
 

흑.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한지. 그리고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세상엔 왜 이리도 많은지.

사진은 MoMA' target='_son'>http://www.moma.org/collect ... _media_016.html>MoMA 에서 가져왔다.

—박쥐

다락방 뉴스

blogin.com · 2005-01-29

첫 번째 소식입니다. 하늘과 가까운 다락방을 동굴로 삼은지 1년 1개월째를 맞고 있는 박쥐가 사흘 전 무사히 파리에 도착해 현재 한 호텔에 머물고 있는 벼리, 토리, 토토, 엘렌을 찾아가 "누룽지 동동주는 완전히 식당에서 주는 누룽지 사탕 맛이었어", "나한테 전화를 해줬음 좋겠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들 처음엔 그렇지.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류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어서 빨리 좋은 보금자리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요즘 박쥐가 몸담고 있는 업계는 상대성이론 발표 100주년을 맞아 떠들썩합니다. 저러다가 아인슈타인 서거 100주년 때는 뭘 하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올해를 맞아 상대성이론의 "특허권"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논의가 프랑스에서 상당히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에서 유독 열의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 당사자 중에, 이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마지막 "보편적 과학자"라는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푸앵카레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박쥐의 경우,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네들의 은근한 국수주의/애국주의가 재미있기도 하고 뭐 그런 입장이라네요.

마지막으로 날씨입니다. 몇 주전 체감 기온이 뚜욱 떨어진 뒤로 좀처럼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그래도 눈다운 눈이 내렸습니다. 물론 쌓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게 어디겠습니까. 많은 걸 바래선 안되겠지요. 다행히 눈이 내리던 시점에 눈이 즐거워할 만한 장소에 있었던 박쥐는 파리에 예쁘게 눈이 내리는, 흔치만은 않은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내리던 눈이 박쥐의 눈 속으로 들어가서 눈에서 흘렀는지 하늘에서 흘렀는지 모를 눈물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는군요. 

—박쥐

파업의 계절

blogin.com · 2005-01-22

이곳 저곳이 파업으로 들끓고 있다. 그저께는 수업을 들으러 갔더니 강의실 문이 굳게 닫혀 있고 건물 전체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더니, 어제는 리포트를 내러 갔더니 사무실 문은 열리지 않고 대신 문앞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교통이 마비된 관계로 사무실 문을 닫습니다."

"사회 운동(mouvement social)"과 "파업(grève)"이 주는 어감의 차이는 크다. 사회 운동은 지하철 운행에 불가피하게 차질이 빚어지게 된 이유(raison)가 되지만, 파업은 비정상 운행의 원인(cause)이 된다. 전자는 유목적성, 그리고 그 목적의 정당성을 가진 행동으로 인정되는 반면, 후자는 노동자들이 일하기 싫어서 꾀를 부리는, 그러면서도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치부되곤 한다.

교통이 마비된 거랑 자기네들 일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람, 하고 중얼거리면서 돌아서다가 문득 작년에 있었던 연구원들의 파업이 생각났다. 나는 사건이라면 사건이랄 만한 이 일에 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대부분이 국립 연구기관에 소속돼 있는 프랑스의 연구직 종사자들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단 행동에 나섰다는 사실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던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과학이 경제적 지원의 부족으로 인해 영미권의 그것에 비해 뒤쳐지고 있다"는 이들의 문제 의식이 제 3세계 출신 이방인인 나에게는 다소 문제적으로 느껴졌던 것. 그러니까, 인생의 대부분을 실험실에서 보냈을 법한 백발의 연구원들이 가운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의 학생들과 손을 맞붙잡고 레오 페레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과, 한 젊은 과학자가 "재능있는 학생들은 월급이나 기타 등등의 면에서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미국으로 떠나고 있어요. 이공계로 진출하는 프랑스 학생의 숫자는 점점 줄어가고 있고, 그 빈자리를 아시아나 그밖의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채워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미국에 비해 지금보다도 더 훨씬 뒤지게 될지도 몰라요" 하고 인터뷰하는 장면은,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쉽게 오버랩될 만한 것들이 아니다.

과학자와 같은, 분류하기가 상당히 애매한 "지식 노동자" 부류들은 어떤 방식으로 파업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한 연구자가 파업에 동참했는데 그 기간이 아주 중요한 학회와 겹쳤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학회에 참석해야 할까 아니면 불참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여기


2007년 11월 21일에 다시 살리다. 살렸다고는 하나 원래 살아있던 것을 살린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박쥐

學하는 이의 임무

blogin.com · 2005-01-16



"모른다", "알 수 없다"라고 말하기란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이 말은 오직 죽을 힘을 다해, 온 힘을 다 바쳐서 연구한 뒤에야 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모든 學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學하는 이의 가장 값진 임무다.

--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중에서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단지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여기에서부터 지적 태도와 연관된다)보다는 오히려 그 사실을 깨닫기(여기까지는 지적 능력 -- 타고난 '재능'보다는 스스로 갈고닦거나 쌓아올린 '내공'에 가까운 의미에서의--과 연관된다)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왜 모르겠는지, 어떤 점에서 모르겠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제대로 모를   때에만 비로소 깨달음, 제대로 된 앎을 얻을 수 있다. 

사실 모름을 받아들이는 것과 모름을 깨닫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름을 제대로 깨달은 경우에 있어서는, 오직 그 경우에 있어서만 그러하다. 모름지기 모름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모름을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한 자기 반성은 철저한 자기 인식 끝에 온다고.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여지껏 그걸, 그것도 몰랐었다, 나는. 근데 왜 하필 지금 그 사실을  깨달은 거냐구. 리포트 제출 기한을 하루 넘긴, 자체적(!)으로 정한 기한을 2일 남겨둔 이 시점에.

—박쥐

힘을 내요, 별톨 커플!

blogin.com · 2005-01-14



나는 "애완동물"이라는 개념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보들레르에게서나 고양이를 부탁해, 캣츠, 심지어 고양이대학살 등에서의 고양이가 갖는, 아니 사람들이 고양이에게 부여한 상징적 의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고양이를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었다. 결국엔 실패했지만.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고양이 사진을 볼 때면 내 눈은 슈렉2 의 장화 신은 고양이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그것이 된다. 그리고 여전히 개보다는 고양이를 덜 싫어한다.

출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별톨 커플. 냥이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하다. 나로선 저들의 냥이 사랑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심지어 돕지는 못할 망정 "냥이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하고 궁시렁거리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쨌든, 힘들 내, 별톨 커플. 그리고 토토, 에리카, 엘렌과 그녀의 형제 자매들도.

—박쥐

이웃집 남자

blogin.com · 2005-01-07

나는 아직도 그의 얼굴을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꽤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설거지를 할 때 휘파람을 분다든지, 2주에 한 번꼴로 남자 친구를 초대해서 같이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동네 술집에 다녀오곤 한다든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냄새가 기가 막힌 요리를 만들 줄 안다든지, 주말의 대부분을 집에서 혼자 보낸다든지, 뭐 그런,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어쩌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을, 그런, 내밀하다면 내밀한 사실들.
 
그 역시 나에 대해서 꽤 많은 걸 알고 있었으리라. 내 짐작이 맞다면, 그는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는 내 방의 1/4가량을 볼 수 있다. 늘 음악을 틀어 놓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음악들에서 도무지 취향의 일관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상당히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싸구려 전화기를 가졌다는 것,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여간해서는 창문을 닫지 않는다는 것 등.

공기가 유난히 차갑고 맑았던 그날 밤, 나는 별을 보려고 창문 밖으로 몸을 길게 내밀었다. 비가 그친 뒤여서 그랬을까? 그믐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까? 별이 그렇게 또렷하게 빛나는 광경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오래전에 받아둔 천문학 잡지에 실린 겨울철 별자리표를 끄집어냈다.

창이 남으로 뚫려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내게 있어서만큼은 북두칠성보다도 더 확실한 별자리 지표였던 터여서 그랬는지, 오리온 자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베텔게우스, 리겔, 그리고 그 옆의 시리우스가 보였다. 어릴 적 읽은 "별을 훔친 마법사"라는 미국 동화가 생각났다. 오랜 동안의 연구 끝에 별을 훔쳐다가 병 안에 가두는 비법을 알아낸 그가 제일 먼저 건드린 것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 세 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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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게 무슨 별이에요?
- 시리우스에요.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
- 저건요?
- 어디 보자, 쌍둥이 자리네요. 보통은 잘 안 보이는데.
- 그럼 이건요?


서쪽 방향으로 눈을 돌리려던 찰나, 시리우스보다 더 밝은 빛이 내 이마를 스쳤다. 차라리 불꽃이었을까. 이마를 뚫고 들어와 온몸을 태운 한 줄기 불꽃. 그때, 아주 오래전 그때의, 그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처럼. "아무리 당시의 외국어 표기법을 감안한다 해도, '키쓰'는 시어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키스가 날카로울 수가 있을까?", "날카로운 것은 첫 키스인가 아니면 추억인가?" 따위의 하찮은 문법적 의문을 단 한숨에 날려 버렸던. 키쓰가 날카로울 수 있음을, 아니, 날카로운 것이 진정한 "키쓰"임을 깨닫게 해줬던.

눈을 떠보니 그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오래전 그때처럼. 창문을 타고 지붕을 넘어서. 이렇듯 가뿐하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 6~7년이라는 시간도 사실은 이렇게 가뿐히 넘을 수 있는 것이었거늘, 왜 몇십만 광년이라는 시간과 거리를 지나서 예까지 온 별빛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렇지만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질문 보따리를 풀지 않았다. 언제 왔느냐고,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 "키쓰"가 무슨 의미였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결코.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박쥐

다니엘 쉬크의 생 루이 섬

blogin.com · 2005-01-05

얼마 전에 파리' target='_son'>http://www.mep-fr.org/actu/ds.htm>파리 MEP에서 보고 온 다니엘 쉬크(Chic가 아니라 Schick)의 작품들. 그의 "작품 무대"는 시테 섬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섬, 일 생 루이다. 카메라 렌즈, 자전거 백 미러를 통해 그가 들여다 본 세상은 저렇듯 애처롭고, 애틋하고, 애잔하다. 차가운 살결같은 세상, 그 세상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길, 그 세상을 향해 내미는 차가운 손길. 저 백 미러에는, 어쩌면,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라는 말이 조그맣게 쓰여 있을지도. 차가운 눈길과 손길이라고 저 차디찬 세상을 어루만지지 못할쏘냐.

아. 이렇게 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면...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백야"인지. 근데도 왜 이리 깨질 못하고 있느냔 말이다. 제발 좀 깰 때, 깰 데서 깨라구! 그리고 늘 깨어 있으라구!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