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지연 작전 (코드명 배수의진)

blogin.com · 2011-11-30

늦어도 일요일까지는 끝냈어야 할 일을 아직까지 붙든 채로, 기말논문 제출 기간 때 유독 블로그 업데이트가 잦아지곤 했던 예전의 시바를 떠올려 보기도 하면서,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직면하게 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최후의 순간에 임할 준비를 하는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계기로 페이지뷰 20000 (현재 19981)을 넘겨보려는 기도에서, 벌여보는 이벤트. 민망한 건 둘째치고 이런 종류의 이벤트가 그렇듯이 알맹이가 없는 까닭에 가책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뭐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포스트들에 속이 꽉 들어차 있었던 것도 아니라 자위하며, 강행해 보는 이벤트.

없는 알맹이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미완성 습작 공개" 정도로 해두겠다. 예전에 다락방(일명 하녀방) 살 때 썼던 엽편. 굳이 장르를 규정한다면... SF 콩트?

별과 첫 키쓰

공기가 유난히 차갑고 맑았던 어느날 밤, 나는 별을 보려고 창문 밖으로 몸을 길게 내밀었다. 비가 그친 뒤여서 그랬을까? 그믐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까? 별이 그렇게 또렷하게 빛나는 광경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오래전에 받아둔 천문학 잡지에 실린 겨울철 별자리표를 끄집어냈다.

창이 남으로 뚫려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내게 있어서만큼은 북두칠성보다도 더 확실한 별자리 지표였던 터여서 그랬는지, 오리온 자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베텔게우스, 리겔, 그리고 그 옆의 시리우스가 보였다. 어릴 적 읽은 "별을 훔친 마법사"라는 미국 동화가 생각났다. 오랜 동안의 연구 끝에 별을 훔쳐다가 병 안에 가두는 비법을 알아낸 그가 제일 먼저 건드린 것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 세 별이었다.

- 저게 무슨 별이에요?
- 시리우스에요.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
- 저건요?
- 어디 보자, 쌍둥이 자리네요. 보통은 잘 안 보이는데.
- 그럼 이건요?


서쪽 방향으로 눈을 돌리려던 찰나, 시리우스보다 더 밝은 빛이 내 이마를 스쳤다. 차라리 불꽃이었을까. 이마를 뚫고 들어와 온몸을 태운 한 줄기 불꽃. 그때, 아주 오래전 그때의, 그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처럼. "아무리 당시의 외국어 표기법을 감안한다 해도, '키쓰'는 시어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키스가 날카로울 수가 있을까?", "날카로운 것은 첫 키스인가 아니면 추억인가?" 따위의 하찮은 문법적 의문을 단 한숨에 날려 버렸던. 키쓰가 날카로울 수 있음을, 아니, 날카로운 것이 진정한 "키쓰"임을 깨닫게 해줬던.

눈을 떠보니 그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오래전 그때처럼. 창문을 타고 지붕을 넘어서. 이렇듯 가뿐하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 6~7년이라는 시간도 사실은 이렇게 가뿐히 넘을 수 있는 것이었거늘, 왜 몇십만 광년이라는 시간과 거리를 지나서 예까지 온 별빛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렇지만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질문 보따리를 풀지 않았다. 언제 왔느냐고,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 "키쓰"가 무슨 의미였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결코.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2005년 1월 5일, 미켈 앙주가 하녀방에서 쓴 글을
2011년 11월이 저무는 새벽, 빌라 뒤프렌느에서 옮겨 적다

—박쥐

책 안읽는 여자는 더 위험하다

blogin.com · 2011-11-24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읽어야 "나 책 좀 읽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될지?

책으로 둘러싸인 벽을 바라보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데리다를 생각한다. 벽이란 벽은 다 책으로 채워진 지 오래고 심지어 방문과 천장 사이의 한 뼘어치 벽면마저 책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걸 본 인터뷰어가 "이 책들 다 읽은 겁니까?" 하고 묻자 데리다는 아니라고 답하고는 잠시 뒤 웃으며 덧붙인다. "그래도 몇 권은 정말 제대로 읽었지요."

데리다가 세상을 뜬 지도 7년 (당시 부고 기사를 보며 대강이나마 채웠던  한글' target='_son'>http://ko.wikipedia.org/wiki/데리다>한글 위키의 데리다 항목 은 거의 그대로다. 저서 목록 부분이 보강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책들은 정신분석의인 그의 아내가 잘 간직하고 있겠지. 그래도 향후 책들의 행방이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

제목에서는 책 안 읽는 여자 운운해 놓고 본론은 데리다에 관한 사소한 일화로 채웠네. 사진은 또 푸앵카레 관련서들이고. 뭔가 데리디앙한 것 같긴 하다.

···
Encore un effort pour être derridien

' target='_son'>http://www.guggenheim.org/n ... arch=Anna%20Gaskell> Anna Gaskell (1969- )
UNTITLED #98 (A SHORT STORY OF HAPPENSTANCE), 2003
그림 출처는 ' target='_son'>http://internationalart.wad ... /catalogue/20/0024/> 여기   

이 역시 책 읽는 여인 그림은 아니지만, 마녀야말로 위험한 식자 여성의 전형, 아니 차라리 원형 아닌가. 개스캘의 "무제" 연작 중 마녀와 더불어 라이트모티프로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 앨리스는 '이' 세상에서는 그림도 없는 따분한 책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며 하품하는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의 논리와 규칙이 무효화된 다른 세상--이상한 나라에 가서는, 왕성한 호기심과 그칠 줄 모르는 모험심을 한껏 발휘하여 그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험 분자가 된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