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in.com · 2007-03-03
이렇게 아침 일찍 나선 것이 언제였던가. 술로 밤을 지샌 다음날, 산뜻한 표정과 차림새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반대 방향으로 스쳐 지나갔던 걸 빼면 정말 오랜만에 나선 새벽길이다. 첫차는 늘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술먹은 다음날이면 그런 날대로, 어쩌다 오랜만에 나선 길이면 또 그런 길대로. 이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바삐 움직였던 그 수많은 아침들을 그냥 그렇게 흘려 보내며 살고 있었다니. 이번에는 시간대별로 출근 표정 또한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화이트칼라들의 출근하기에는 너무 이른 새벽 6시, 지하철 안 사람들은 9시경보다 한층 어두워 보인다. 단지 해가 아직 뜨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들의 피부빛이 진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6시 30분경 동역에 도착. 이렇게 출발 시간 10분 전에 여유 있게 도착한 것 역시 오랜만의 일이다.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른다. 기차 안에서 여행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점검한다. 사실 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카이브를 한 번 쓱 둘러 보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시간이 남으면 푸앵카레가의 숨결을 스껴 보는 것, 그게 전부다. 그런데 아카이브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9시 29분, 낭시역 도착. 아직 어두컴컴하다. 그래도, 지난 여름, 새벽 6시에 생장드뤼즈에 뚝 떨어졌던 때보다는 훨씬 낫다. 물론 날씨는 그때 그곳과 비교할 바 없이 나쁘지만. 비바람이 너무 거센 바람에 담배불조차 켤 수가 없다. 가지고 있던 유일한 불, 성냥마저 흠뻑 젖었다. 중심가 방향이라 씌여 있던 팻말을 보고 무조건 걷는다. 낯선 도시에서 인적 드문 곳을 헤매는 건 여전히 무섭다. 꽤 걸었는데도, 그리고 아침이 꽤 깊어졌는데도 사람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시청 옆 여행 안내소에 가서 푸앵카레 아카이브를 아느냐고 물으니 시립 아카이브를 알려준다. 시의 역사에 관한 건 거기에 다 있으니 거기로 가보란다. 물어본 내가 바보다. 그래도 인문대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는 즉시 답이 나온다. 지도를 받아 들고서 금빛이 번쩍거리는 광장을 지나 좀더 소박해 보이는 성당 앞 광장으로 나온다. 다행히 까페가 보인다. 들어가니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나올 때는 황송하게도 문까지 대신 열어준다. 그 정도면 지독히 맛없는 코코아쯤은 용서가 되고도 남는다. 중심가에서 낭시대학 인문사회대까지는 지도상과는 달리 꽤 멀게 느껴진다. 중심전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듯한 시가지가 줄곧 이어져서 그렇게 느낀 걸 수도. 프로방스에서 내가 본 도시 중 가장 '폭탄 맞은' 것 같은 축에 속했던 아를르보다 심하다. 독일과 가까운 낭시는 아마도 다른 곳들보다 호되게 전쟁을 겪었을 것이고, 그 상흔 또한 쉽게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에 도착, 일단 도서관에 들어간다. 무선 인터넷이 가능함을 알리는 표시가 여기 저기 붙어 있다. 혹시나 싶어 노트북을 켰지만 역시나 타대학 학생들에게는 닫혀 있다. 찾는 곳이 도서관 바로 건너편 건물이라는 정보를 알아낸 뒤, 학생식당으로 향한다. 식당 역시 지도에 표시된 바와는 달리 멀고 험하다. 메뉴 중 먹을 수 있는 건 홍합 밖에 없다. 그런데 감자튀김이 나오지 않는다. 새로 튀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옆에 보니 피자가 눈에 띈다. 차갑게 식은 데다가 질적인 면에서도 떨어지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홍합보다는 피자가 나을 것 같다. 그렇지만 감자튀김 기다린 시간이 아깝다. 겨우 받아든 홍합은 예상대로 식을대로 식어있고 소스도 좋지 않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도서관 건너편 건물로 들어간다. 그곳 3층이 푸앵카레 아카이브다. 그냥 도서관이고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겠거니 했는데, 웬걸, 문이 잠겨 있다. 할 수 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 연구원에게 말을 건다. 돌아보는 그를 보니 몇 달 전 파리의 한 콜로크에서 봤던 인물이다. 그는 콜로크의 청중으로서의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그의 동료에서 메일을 보내 다음 주에 오기로 되어 있었던 인물로 기억한다. 내가 다시 보낸 메일을 그의 동료는 아마도 받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그는 친절히 안내해 준 뒤 자기 연구실로 돌아간다. 훑어 보니 방대한 자료들이 구축되어 있다기보다는 그 곳 연구자들이 하나 둘씩 모은 자료들이 쌓인 문서 보관소라는 이름에 걸맞는 곳이다. 미간행 수고나 알려지지 않은 저작을 발견하리라는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아까 그 수학자는 한 번 더 와서 잘 되어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조금 뒤에는 젊은 연구자들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문서들과 단독으로 마주서는 행복에 젖어 있었던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 중 한 명도 지난 번 학회 때 봤던 인물이다. 그 역시 청중 중 한 명이었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하다. 푸앵카레의 저작 말고 물론 다른 저작들도 많다. 물론 국립도서관이나 파리의 다른 도서관에도 다 있는 것들. 그렇지만 적어도 몇 가지는, 검색어만으로는 걸리기 힘든, 그러니까 서가를 거닐면서 우연히 발견하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모르고 넘어갔을, 그런 종류의 책들이다. 그 동안 이런 종류의, 개가식 도서관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얼마나 그리워 했던가. 있다 보니 슬슬 잠이 온다. 기차 시간에 맞추느라 잠을 자지 못한 탓이다.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오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빨리 미간행 편지 하나를 컴퓨터에 옮긴다. 다른 연구원 한 명이 다가와서 잘 되어 가냐고 묻는다. 잘 모르겠다고 말하자 자료 리스트를 준다. 사실 나도 가지고 있었던 건데, 세상에, 여기까지 오면서 그것도 안 들고 왔다. 기억을 되살려 아직까지 복사하지 않은 문헌들을 골라낸다. 그리고 아주 쓸모 있어 보이는, 게다가 구하기 힘들어 보이는 문헌 목록집을 발견한다. 이것만 복사해 가도 기차삯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골라든 문헌을 들고 나가서 눈에 띄는 연구자에게 복사를 좀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난처한 기색을 보인다. 문서를 반출해도 좋겠느냐는 뜻이었는데 내가 연구실 복사기를 무단으로 쓰겠다고 얘기한 걸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아래층에 복사기가 있는 걸 봤으니 거기서 하고 오겠다고 말하니까 안심하는 눈치다. 아까 봐 둔 아래층의 복사기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다. 할 수 없이 처음 들어갔던 도서관으로 간다. 복사 카드를 보니 용케 내가 파리에서 쓰는 것 중 하나랑 비슷하게 생겨 다행이다 싶었는데, 역시나 작동이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카드를 산다. 4월 1일부터 카드 시스템이 바뀐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카드가 아까워서라도 그 전에 한 번 또 와야 하나 하고 투덜대면서 복사를 한다. 시계는 이미 세미나 시작 시간인 오후 5시가 넘어서 있다. 혹시 나 때문에 다들 세미나도 못 가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싶어서 나머지는 포기하고 돌아선다. 돌아온 내게 아까 그 연구원이 어디 가서 복사를 했느냐고 물어 본다. 도서관에서 했다 하니 바로 아래층에 있는데 왜 거길 갔느냐고 묻는다. 비밀번호 때문에 못했다고 말하니 다시 그럼 자기한테 물어보지 그랬느냐고 하면서 웃는다. 학회 때문에 낯이 익은 그 청년이 혼자 남아 있다. 세미나 안 가냐고 물어보니 안 간다면서 대뜸 어디서 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러느냐고 한다. 기회가 되면 아는 척이라도 하려던 마음이 움츠러든다. 어쨌든 그는 바깥까지 나와서 길을 가르쳐 준 뒤 사라진다. 세미나는 이미 시작돼 있었다. 내가 늘 경원시하는 주제, 특수상대성이론에 있어서 푸앵카레의 공과. 로렌츠 변환에서의 불변식을 푸앵카레가 정립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왜 푸앵카레처럼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 새로운 시공간관 및 이론에 이르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나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인데, 거기에 멈추는 것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즉, 왜 푸앵카레는 아인슈타인처럼 특수 및 일반 상대성이론, 나아가 우주방정식을 고안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는가를 묻기 보다는, 아인슈타인과 독립적으로 확립된 푸앵카레의 고유한 사고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각 요소들을 정립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오는데 또 어떤 분이 말을 건다. 알고 보니 푸앵카레 아카이브의 디렉터다. 지도 교수로부터 내가 올 지도 모른다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왠지 모를 안도감이 온몸을 감싼다. 비가 또 쏟아진다. 기차 시간까지는 1시간 반가량이 남아 있다. 식사라도 하고 싶지만 속이 엉망이다. 남은 시간 동안 시내 구경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또 하염없이 걷는다. 구멍가게-보통, 아랍인들이 많이 경영한다는 이유로 아랍가게라 불리는-조차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파리에서는 골목마다 즐비한 수퍼마켓 체인점은 단 하나도 없다. 몇몇 거리를 빼놓고는 쥐죽은 듯 조용하다. 대신 괜찮고 싼 식당들이 많은 듯하다. 속이 원망스럽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담배 가게가 보인다. 조금 전 이곳에 온 기념으로 라이터를 하나 살까 하고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친 것이 영 아쉬웠는데, 잘됐다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 간다. 좀 특이한 라이터가 있으면 큰 맘 먹고 살 생각이었는데, 웬걸,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 뿐이다. 대신 파리의 담배 가게에서의 가격보다 훨씬 싸다. 빨갛고 자그마한 걸로 하나 집어든 뒤 주인 아주머니에게 내민다. 그녀는 라이터를 받아들더니 혹시나 기름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며 직접 불을 켜서 확인한다. 오, 소도시 담배 가게 주인의 섬세함이여. 문을 연 몇몇 빵집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가장 마지막에 본 집으로 들어간다. 여행하는 곳에서마다 내가 행하는 의례다. 그리 맛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처음 보는 과자를 산다. 앞의 집들을 놓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내가 자주 범하는 실수다. 참고 참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선택한 것은 그 무엇이든 늘 가능한 선택지 중 최악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빵집이 기차역 바로 앞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차도가 너무 길어 이상하다 싶었더니 어느새 인적 드문 주차장을 걷고 있다. 아무리 가도 역이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비바람이 다시 거세지기 시작한다. 출발 시간까지는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기차를 놓치고 비를 헤치며 호텔을 찾아헤맬 자신을 상상하니 하늘이 노래진다. 비를 맞으며 뛰기 시작한다. 기차와 기차길은 보이는데 역이 보이지 않는다. 역을 가까스로 찾았는데 겨우 다다른 곳은 내가 타야 할 기차가 선 선로가 아니다. 출발 시간까지는 3분. 다시 미친 듯이 뛴다. 다행히 기차는 아직 서 있다. 표 개찰기가 보이지 않는다. 여차하면 그냥 기차를 집어탈 셈이다. 마침 철도청 직원 할아버지가 이쪽으로 다가오길래 개찰기 어딨냐고 물으니 몸소 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보더니 개찰할 필요도 없는 표란다. 어쨌든 올라타서 숨을 고른다. 온몸이 비와 땀으로 젖어 있다. 도대체 왜 기차나 비행기 같은 탈 것들과는 이다지도 인연이 없는지 한탄하던 중, 폭풍우 때문에 출발 시간이 30분 지연된다는 방송이 나온다.
집에 와서 젖은 성냥갑을 버렸다. 그걸로 그것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인연을 끊었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