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네, 당신은 멋쟁이!

blogin.com · 2004-10-31

장 피에르 주네와 오드리 토투 콤비의 신작 긴 일요일의 약혼식 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 을 봤다. 추리 소설 작가(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인지 이야기 구조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그래도 프랑스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 그렇지만 화려한 CG와 특수 효과만으로 승부하는 헐리웃 영화에선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통찰력과 세계관은 여전했다. 1차대전 당시의 전장과 20년대를 전후로 한 파리가, 그때 그곳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이렇게 말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재현됐다. 듣자하니 감독이 헐리웃 자본으로 만들면서도 프랑스의 방식과 배우를 고집했다던데, 그저 놀라울 뿐.

이 영화에서 가장 새로운 발견은 조디 포스터였다. 그녀가 어떻게 카메오로 출연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불어를 완벽하게 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20년대 초반의 프랑스 아낙 그 자체였다!), 어떻게 몇 분 안 되는 출연 분량 중 상당 부분을 그렇게 강도 높은 노출신에 할애했는지,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어쨌든 극중에서 나온 대사대로 "웃을 때마다 양볼에 가로가 생기는" 그녀는 참 멋졌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역시 기억, 그러니까 전쟁에 관한 기억, 더 넓게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네크는 전사했다"라는 역사적 사실이 마틸드의 역추적을 통해 재구성되면서 해체되다가 결국에는 거짓으로 판명된다. 마네크와 같은 참호에 있었던 다른 참전 군인들의 구술이나 편지와 같은 사적인 기록물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이 구성된다. 역사가의 임무는 끝이 없다는 교훈.

—박쥐

Before Sunset 을 기다리며

blogin.com · 200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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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서 비포 선셋 은 언제 개봉할까? 하품의 포스트를 보고 보고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렬해졌다.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 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이 세상에 전쟁이란 게 존재한다는 게 참을 수 없이 싫다"는 셀린의 단 한 마디에 감화되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이 쿨하디 쿨한 헤어짐의 방식을 언젠가 써먹은 적이 있고 앞으로도 한 번쯤은 써먹을 용의가 있다. 말 때문에 고생할 때마다 6개월동안 미국에서 어학 연수를 한 것이 고작인데도 너무나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던 셀린을 떠올리면서 한층 더 깊이 좌절하곤 했다. 
 
이제 그만. 말은 아껴 둬야지. 영화를 본 다음으로 미뤄 둬야지. 실은 그 이상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뭐, 개의치 않으련다. 9년 만에 영화 속에서 만난 그들이 되짚어 가는 기억들이 그에 대한 나의 9년 전의 기억들 역시 되살려 줄 것이므로.

그런데 왜 갑자기 오드리 햅번이냐고? 줄리 델피와 오드리 햅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렇지만 비포 선셋 에서의 저 줄리 델피를 보면서 오드리 햅번을, 그녀의 "문리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보니 창가에서 다리를 벌린 채 노래를 부르는 저 모습, 꽤나 도발적이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직접 노래를 부른 경우는 수없이 많을 터.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은 매력적인 여배우들이 저렇게 나직한 목소리로 반주가 없거나 거의 없이 부른 장면들이다. 머잖아 비포 선셋 을 보게 된다면, 그때부터 줄리 델피는 아마도 그렇게 내 기억에 남은 세 번째 배우가 될 것이다.
 
오드리 햅번에 이은 두 번째 배우는 잔느 모로. 쥘과 짐 에서 그녀가 새침하게 부르던 그 노래는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어쩜 그렇게 딱 자기 생긴대로 부를 수가 있을까. 이번에 찾아 보니 이 노래의 제목은 Le Tourbillon de la vie (삶의 소용돌이).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를 때의 표정이 정말로 압권이었는데, 아쉽게도 동영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대로, 음성으로나마.


http://pgoh.free.fr/tourbillon.ram width=286 height=45 type=audio/x-pn-realaudio-plugin NOLABELS="false" AUTOSTART="false" CONTROLS="all">
출처 : Chansons' target='_son'>http://pgoh.free.fr/french_songs.php>Chansons françaises (French Songs)
 


—박쥐

2046

blogin.com · 2004-10-24

<2046>을 보다...


1.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건

1.1 관련 기사나 비평들은 고사하고 시놉시스도 읽지 않은 채로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김모' target='_son'>http://www.film2.co.kr/movi ... .asp?mkey=34260>김모 기자(^^)가 <필름2.0>에 쓴 것 을 비롯한 몇 개의 아티클들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적어도 넷 이상의) 스토리 라인들을 대강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다.

1.2 왕가위의 스타일에 익숙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는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가 전부다. 그것들 말고도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봤어야 했다. 내가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이 맡았던 역의 이름이 "수리첸"이었고 그 이름이 이번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겠는가.

1.3 오랜만에 "정상적인" 관람 환경에서 영화를 보게 됐다는 사실에 들뜬 나머지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4 불어 자막을 해독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5 페이 왕(내겐 왕정문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의 미모 때문이다. 병원에 들어갔다는 얘길 들을 때 또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2046 열차 안에서 펑키 스타일의 머리와 복장을 한 안드로이드가 되어 우주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별과 별 사이를 떠다니고 있는 사슴 같은 눈빛과 몸짓을 보여줄 때 난 정신을 잃을 뻔했다.

1.6 엔딩 크레딧의 "LG" 마크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영화가 남긴 잔상의 한 10%가 날아갔다. 그 마크가 조금만 덜 선명하고 조금만 덜 길게 나왔더라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이나마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매트릭스 리로리드>팀이 제작했다는 CG는 안들어가느니만 못했다고 생각한다. 세트로 만든 열차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첫 화면에선 그래도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리며 즐거워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혹시 <블레이드 러너> 패러디/오마주? 그렇게 생각하니깐 LG는 또 코카콜라랑 오버랩되네).

1.7 감독의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아님 내가 그의 심중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머리가 나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든가. 홍콩 반환 50주년이 되는 해라는 시간과 <화양연화>에서 두 주인공이 만난 방이라는 공간에서 출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서 좀 너무 멀리 나갔거나 아니면 가지를 너무 많이 친 것 같다. 보는 도중에 '이거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과 '이렇게 해놓고 어떻게 끝내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스치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

2. 그래도 이 영화가 나쁘지 않았다면, 그건

2.1 호텔 옥상 때문이다. <여고괴담, 그 두 번째 이야기 : 메멘토 모리>의 학교 옥상이 생각났다.

2.2 왕가위 특유의 수려한 미장센들 때문이다. 하나씩 잘라서 스틸 컷으로 놓고 봐도 그대로 그림이 될 만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난 그가 카메라 가지고 노는 방식도 좋아한다.

2.3 음악 때문이다. 살리에리에게 천형과도 같았던 "들을 수 있는 귀"는 왕가위에게로 와서 모짜르트의 재능 부럽지 않은 축복이 되었다.

2.4 "기억"을, 그 "기억"이란 것의 속성에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프랑스 언론의 프루스트를 운운한 영화평 기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기억이나 기억의 재현물에 깔쌈하게 정리된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감독이나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관객이나 서로에게 보다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박쥐

"아일랜드로의 힘든 여행"을 마치며

blogin.com · 2004-10-23

물론 "그" 아일랜드로의 여행은 끝났지만 "이" 아일랜드로의 여행, 아니, 그보다 "이" 아일랜드에서의 유랑 생활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유랑 생활은 그 "아일랜드로의 여행"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달플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이제는, 정말로, 그 여행을 뒤로 해야 할 때. 이제는, 정말로, 그 여행을 하는 동안 발길이 닿았던 섬들 하나 하나가 판타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 이제는, 정말로, 그 섬들 사이를 한가로이 그리고 자유로이 유영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벗어나야 할 때. 이제는, 정말로, 현실 속에서는 철저히 고립된 섬 안에 처박혀 그저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

<아일랜드>를 보면서 <네멋>을 볼 때만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네멋>을 볼 때는 <아일랜드>를 볼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했던 것처럼, <네멋>의 섬은 사람들 사이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섬은 사람들 자체였다. 체인으로 간신히 연결돼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것, 그 섬에 간다는 것은 판타지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가 섬이라는 것, 그 섬들이 서로 가까이 닿기란 불가능하며 기껏해야 체인을 통해서나 연결할 수 있되 그 연결조차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네멋>은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그려진 판타지고, <아일랜드>는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을 통해 리얼리티를 지독할 만큼 생생히 그려낸 드라마다. 

그렇게 이 지구는 수십 억개의 섬들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각 섬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체인들은 각각의 섬들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비록 그것들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심지어 오로지 상상 속에서 빚어내어 이어붙인 사슬에 다름 아닐지라도.
 
저 그림 (장해라님의 작품. MBC' target='_son'>http://mmsmo.imbc.com/BbsRe ... mp;WH=&MODE=>MBC <아일랜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속의 손들. 내 섬과 당신의 섬을 연결하는 체인들. 섬 하나가 가라앉기 시작할 때 비로소 손-체인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내 섬이 아직까지 가라앉지 않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일랜드를 여행하는 내내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처음으로 또 다시(again for the first time!) 시작될 "이" 아일랜드에서의/로의 여행에서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아니, 울지 않을 거다.

—박쥐

절망

blogin.com · 2004-10-20

북관(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북관에 계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
검정치마에 받쳐입은 것은/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 아침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퍼러운 언덕길을/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 백석, "절망" 전문


제일 중요한 전공 수업이랑 세미나가 연달아 있는 화요일은 일주일 중 제일 힘든 날이다. 그만큼 "절망의 도가니탕(<아일랜드> 중 재복의 표현)"에 빠질 확률이 높은 날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랬다. 잠도 안 자고 텍스트를 읽어 갔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영어였는데도. 심지어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였고 중간에는 천문학 얘기까지 나왔는데도. 세미나도 그랬다. 내 석사 논문 주제랑 80% 맞아들어간 얘기였는데, 아마도 논문 쓰다가 한 번쯤 스쳤을 것임에 분명한 저자의 발표였는데, 영어였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끝나고 나서도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교수 앞에서 엉뚱한 얘기를 해버렸다. 사실 난 "다음에..."라는 짧디 짧은 문장을 말했던 건데, 그게 "오늘 저녁은 바빠서 안되지만 다음 주 세미나 끝나고서는 같이 식사하러 가자"는 얘기로 해석돼 버린 것. 발표자랑 연구원/교수들이 가는 자리에 도대체 네가 왜 끼어드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내가 안고 있는, 에펠탑 높이만큼 산적해 있는 문제들--그 중 꼭대기에 있는 건, 오늘 아프게 깨달은 사실인데, 불어가 아니라 물리학/철학에 대한 턱없이 부족한 전공 지식과 부끄럼을 심히 타는 성격과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기억력과 점점 더 둔탁해지고 있는 사고력이다--을 떠올리던 중, 불현듯 백석의 "절망"이 생각났다. 스무살 무렵, 문득 세상의 절망이란 절망을 혼자 다 짊어지고 있다는 게 너무나 절망스러워진 나머지, 후자의 절망만이라도 해소해 보고자 "절망"이라는 말이 붙은 온갖 것들을 찾아다녔었다. 그때 찾았던 것 중 기억나는 게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끝에서>와 백석의 "절망"이란 시다.

도대체 왜 "절망"이라는 제목을 단 걸까? 어쩌면 이 시의 포인트는 바로 거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절망"이라는 단어에 혹해서 그 단어에서 연상되는 정서들을 준비한 채로 본문에 들어갔다가 대뜸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어린 것의 손을 잡은 튼튼하고 아름다운 북관의 계집을 마주치게 되면, 마주치는 순간, 딱 고 순간만큼은 "절망"이고 뭐고 사라진다. 고 순간에는 절망할 틈이 없다. 턱 하니 숨이 놓인다. 그녀가 숨이 차서 가퍼로운 언덕길을 올라가고 그걸 바라본 후에 하루종일 서러운 건 그 다음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식민지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의 화자가 왜 서러워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에 어떤 개인사적/정치적/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숨어 있는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절망"의 정서와 그녀 사이에 놓여 있는 텅 빈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서로 자기들 멋대로 떠돈다. 춤을 춘다. 그 춤을 황홀하게 바라 보면서, 기호에서 소외돼 있던 나는 위로를 받는다.

내일은 철학 수업이 있는 날. 그래도 오늘보다는 괜찮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게다. 그렇지만 "절망"과 "북관의 계집" 사이의 시/공간 역시 거기에, 그때에, 그렇게 남아 있을 게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거기에, 그때에, 그렇게 찾아 올 게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 앞의 생에 남아 있는 나머지 화요일들을 넘기게 될 게다. 그리고, 그리고 나서 서러워 해도 늦지 않을 게다. 그럴 게다. 그리고, 그럴 거다.

사족

시 전문을 찾아 검색하다가
http://book-shop.daum.net/b ... eview_media> face=돋움 color=#000066>유종호 선생이 2001년 민음사판으로 낸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의 서평 기사 가 나오길래 훑어 봤는데, 책도 안 읽은 주제에 이런 리플을 달고 싶어졌더랬다 :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 저 시에서 북방 정서(김재홍)니 모던한 허무주의(김윤식)를 읽어내는 것도 웃기지만, 시인이 한 여인을 보고 반했는데 그 여인에게 애가 딸려 있길래 서러워 했고 그게 절망한 이유의 전부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선생님의 단순/간단/명료/명쾌한 해석이 더 웃긴 것 같은데요. 그렇게 따지자면 보들레르의 "지나가는 여인에게"도 너무 싱거운 시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로맨티시스트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셨다구요.

—박쥐

수첩을 정리하다 발견한 메모들

blogin.com · 2004-10-18

시의 지적인 갑옷은 연을 분리하는 공간 속에 그리고 종이의 여백 가운데 숨어 있고 거기에 남아 있다 -- 그 속에서 생겨난다. 시 자체를 구성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그 의미심장한 침묵.
--- 스테판 말라르메, "E. A. 포우에 관하여".<

br>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고, 어슴푸레한 너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 푸쉬킨, "어느 날 잠 못 이루는 밤에 쓴 시"(1830). 바흐친의 라블레론 중 한 챕터의 서두를 장식한 구절. 이 짧은 문장 하나에 홀

딱 반한 나머지 석사 논문의 서문에다가 재인용하기까지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지만.

<

FONT color=#663300>즐겁게 저항하자.
치열하게, 신나게 살자.
--- 서태지가 언젠가, 어디에선가 한 말.


<

FONT color=#666633>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쳐서 물고기 잡으러
--- 체리필터가 부른 "낭만고양이"라는 노래의 한 소절.


<

FONT color=#996633>For among these winters
There is one so endlessly winter
That only by wintering through it
Will your heart survive
--- 릴케의 시 중 한 구절이고, 수전 브라이슨의

Aftermath --번역서의 제목은 차마 내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겠다--에 인용됐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출처는 모른다.

That is how I know you. You are what I know.
--- Winterson, Written on the Body 중에서. 분명히 무슨 여성학 관련 논문을 읽다가 발견한 걸 텐데, 그게 뭐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박쥐

돌아와 보는 밤

blogin.com · 2004-10-16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 윤동주가 1941년에 쓴 시 "돌아와 보는 밤"의 전문.
햇살이 보내온 새 정본집 (홍장학 엮음,
<정본 윤동주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4) 에서 옮겨 쓰다.
햇살, 고마워~!!

- 사진은 어느날  저녁 내 좁은 창 사이로 들여다 본 하늘.
초승달 하나만으로 "피로롭은" 낮을 살짝이나마 묻을 수 있는 것은
하늘과 가까운 다락방 하나 차지하고 겨우 살아가는 이의 특권이다.

—박쥐

모리스 윌킨스가 죽었다

blogin.com · 2004-10-10

1.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가 지난 5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가디언>의' target='_son'>http://www.guardian.co.uk/l ... ><가디언>의 기사 ). 윌킨스는 로절린드 프랭클린과 더불어 DNA의 X선 결정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발견에 지대한 공로를 한 결정학자.

"모리스 윌킨스가 죽었다"라는 말은 "프랜시스 크릭이 죽었다"라는 말만큼 반향을 갖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과 죽음을 통해 비로소 죽은 그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의 차이.

나는 아마도 왓슨의 글을 통해 그의 이름을 접했을 것이다. 방금 다시 보니 예전' target='_son'>http://www.blogin.com/blog/ ... eyY=00218542>예전 포스트서 소개한 바 있는 왓슨과 크릭의 53년 네이처지 논문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Acknowledgements에,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이름과 나란히.

물론 그는 요절한 프랭클린과는 달리 뒤늦게나마(62년)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 있어서는, 프랭클린보다도 오히려 더 "잊혀진 인물"이다. 프랭클린의 경우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상당히 아이러니컬하고 어쩌면 정치적으로도 그다지 올바르지 못하긴 하지만, 어쨌든 과학사에 이름을 남기긴 했으니까 (내가 이렇게 얼버무리는 것은 아직까지도 어떤 것이 여성주의적으로 과학사를 서술하는 괜찮은 방법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가디언> 기사에는 윌킨스의 동료 과학자가 한 말이 인용돼 있다 : "윌킨스는 매우 중요한 과학자였지만, 과학에 혁명을 일으킨 발견에 있어 그 자신이 담당한 몫에 걸맞는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는 분자생물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현재의 분자생물학도 없었을 것이다."

저 인용문의 주어에 로절린드 프랭클린을 대입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주어로 대치될 수 있는 인물 명사를 프랭클린 외에 적어도 한 대여섯은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도대체 과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혁명적 발견에 있어 자신이 담당한 몫에 걸맞는 명성을 누리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는가, 수많은 그/그녀들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없었더라면 현재의 과학이 성립할 수 있었겠는가, 도대체 과학자들 묘사하는 술어들은 왜 늘상 다 거기서 거기인가 하고 심술을 부리려다가, 참았다. 그렇담 도대체 뭘 어떻게 쓰자는 얘기냐 하는 반문에 답할 자신이 없어서. 가련키 짝이 없다.

3.

내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이런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려는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 보니, 문득 피천득 선생과 그의 딸 서영의 일화가 떠오른다. 피선생이 영국 대사관의 파티에 초대받아 갔다오던 날, 마중나온 서영이 아버지의 손을 꼭 잡는다. 왜 그러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서영은 "아버지는 영국 대사와 악수를 했을 것이고, 영국 대사는 언젠가 엘리자베스 여왕과 악수를 했을 것이니, 내가 지금 아버지 손을 잡으면 엘리자베스 여왕과 간접적으로 악수를 한 것이 된다"라고 했다나.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젊은 시절 파리의 ENS에서 포닥 생활을 했었다. 나는 지난 학기에 ENS에서 하는 수업을 듣느라 그곳 물리학과 건물에 들락거린 적이 있다. 프랭클린과 나는 한 곳을 밟았을 것이고, 프랭클린이 밟았던 곳을 그의 동료였던 윌킨스도 분명히 밟았을 것이다. 나와 그 사이에는 고만큼의 인연이 있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고만큼의 인연.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어쩌다가 이렇게 희미하디 희미한, 아니 억지에 가까울 인연을 만들어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죽음들을 내가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기억하고 싶을 뿐. 다른 뜻은 없다.

—박쥐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blogin.com · 2004-10-08

문을 두드린다. -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없어도 상관 없어요. 뭐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단, 있으려면 제대로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없느니만 못해. 근데 그러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나라도 못 그럴 거니까. 그러니까 그냥 없는 듯 있는 걸로 칩시다. 

-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요. 이 모든 건 다 꿈이에요. 그러니까 당신은 꿈 속에서 나한테 "이건 꿈이야!" 하고 말해 주어야 해요. 그렇게 해야 비로소 이 꿈이 끝날 테니까. 그건 꿈을 깨는 마법의 주문이라구요. 그리고 그게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거구요. 필요하다면 뒤통수를 쳐줘도 좋아요. 그것까진 허락하기로 하죠. 

답이 없다. 역시 아무도 없었던 게다. 결국 이 꿈을 깰/깨뜨릴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던 게다. 아님 그 꿈이 정말로 깨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거나. 
 

* <소피의 세계>를 지은 요슈타인 가아더의 또다른 책 제목. 서점에서 이 책을 찾는데 "대략 난감"했던 기억. "저기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없어요?" 그런 방식으로 이 책을 찾기란 <이 책의 제목은 무엇입니까?>와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요>를 찾는 것만큼 어렵다.

—박쥐

날씨가 쌀쌀해졌다

blogin.com · 2004-10-02

1.
날씨가 쌀쌀해졌다. 바람도 차가워졌다. 방이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찼다. 나는 차디 차게 식은 방에서 떨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잔뜩 웅크리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렇게 바깥 세상과의 온도차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오롯한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다. 웅크리고 웅크려서 이 세상에서의 점유 공간의 면적을 줄일수록 '내 세상'은 커진다.

2.
여전히 오일러와 싸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싸움은 포기했다. 쓸데없이 첫머리에 알렉산더 포프의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라는 싯귀를 인용해 놓고는 그 "빛"의 메타포를 써먹기 위해 한 문단 전체를 본문 내용과 별 상관 없는 뉴턴에 관한 딴소리로 채웠다. 그래서인지 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3.
사실 지난 2주 정도를 고스란히 날려 보냈다. <아일랜드> 때문에. 보고, 보고, 또 보고, 본 뒤에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그러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다 참지 못해 또 보고, 그랬다. 유학생 주제에.

좋은 건 아니다. 물론 좋은 것도 있다. 퀴어 코드를 그렇게 위트있고 귀엽게 집어넣을 줄 아는 드라마 작가는 인정옥밖에 없을 거다. 가족 이데올로기나 몇몇 유명 감독들의 '작가주의(와 그것을 빙자한 같잖은 행태)'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웃을 수 있는 사람 역시. 그 어느 인물, 그 어느 대사, 그 어느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PC하지 않은 게 없다. 정신 질환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너무 심각하지 않게 다루는 점도 맘에 들고. 그런데 그것들 빼고는, 너무 아프다. 볼 때마다 아프고 보면 볼수록 아프다. 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각자 자신의 공간을 찾으려는, 혹은 새로 만들어 나가려는 그 모습들이. 보고 있다 보면 내 '섬'도 보인다. 그런데 그들과 달리 내겐 섬을 연결할 '체인'이 안 보인다.

4.
"측정"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다. 모든 물리량 측정 단위는 규약의 산물인데, 그 규약이라는 게 충분히 객관적이라는 것, 적어도 간주관적이라는 것. 이제 남은 건 이걸 10장 분량으로 늘려 쓰는 일이다. 그러면 헬름홀츠와 카시러와 프레게와의 악연도 당분간은 끝이다. 물론 프레게의 경우 그 인연을 좀더 빨리 끝낼 가능성이 높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