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씨가 쌀쌀해졌다. 바람도 차가워졌다. 방이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찼다. 나는 차디 차게 식은 방에서 떨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잔뜩 웅크리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렇게 바깥 세상과의 온도차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오롯한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다. 웅크리고 웅크려서 이 세상에서의 점유 공간의 면적을 줄일수록 '내 세상'은 커진다.
2.
여전히 오일러와 싸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싸움은 포기했다. 쓸데없이 첫머리에 알렉산더 포프의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라는 싯귀를 인용해 놓고는 그 "빛"의 메타포를 써먹기 위해 한 문단 전체를 본문 내용과 별 상관 없는 뉴턴에 관한 딴소리로 채웠다. 그래서인지 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3.
사실 지난 2주 정도를 고스란히 날려 보냈다. <아일랜드> 때문에. 보고, 보고, 또 보고, 본 뒤에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헤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그러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다 참지 못해 또 보고, 그랬다. 유학생 주제에.
좋은 건 아니다. 물론 좋은 것도 있다. 퀴어 코드를 그렇게 위트있고 귀엽게 집어넣을 줄 아는 드라마 작가는 인정옥밖에 없을 거다. 가족 이데올로기나 몇몇 유명 감독들의 '작가주의(와 그것을 빙자한 같잖은 행태)'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웃을 수 있는 사람 역시. 그 어느 인물, 그 어느 대사, 그 어느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PC하지 않은 게 없다. 정신 질환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너무 심각하지 않게 다루는 점도 맘에 들고. 그런데 그것들 빼고는, 너무 아프다. 볼 때마다 아프고 보면 볼수록 아프다. 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각자 자신의 공간을 찾으려는, 혹은 새로 만들어 나가려는 그 모습들이. 보고 있다 보면 내 '섬'도 보인다. 그런데 그들과 달리 내겐 섬을 연결할 '체인'이 안 보인다.
4.
"측정"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다. 모든 물리량 측정 단위는 규약의 산물인데, 그 규약이라는 게 충분히 객관적이라는 것, 적어도 간주관적이라는 것. 이제 남은 건 이걸 10장 분량으로 늘려 쓰는 일이다. 그러면 헬름홀츠와 카시러와 프레게와의 악연도 당분간은 끝이다. 물론 프레게의 경우 그 인연을 좀더 빨리 끝낼 가능성이 높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