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blogin.com · 2004-10-20

북관(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북관에 계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
검정치마에 받쳐입은 것은/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 아침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퍼러운 언덕길을/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 백석, "절망" 전문


제일 중요한 전공 수업이랑 세미나가 연달아 있는 화요일은 일주일 중 제일 힘든 날이다. 그만큼 "절망의 도가니탕(<아일랜드> 중 재복의 표현)"에 빠질 확률이 높은 날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랬다. 잠도 안 자고 텍스트를 읽어 갔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영어였는데도. 심지어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였고 중간에는 천문학 얘기까지 나왔는데도. 세미나도 그랬다. 내 석사 논문 주제랑 80% 맞아들어간 얘기였는데, 아마도 논문 쓰다가 한 번쯤 스쳤을 것임에 분명한 저자의 발표였는데, 영어였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끝나고 나서도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교수 앞에서 엉뚱한 얘기를 해버렸다. 사실 난 "다음에..."라는 짧디 짧은 문장을 말했던 건데, 그게 "오늘 저녁은 바빠서 안되지만 다음 주 세미나 끝나고서는 같이 식사하러 가자"는 얘기로 해석돼 버린 것. 발표자랑 연구원/교수들이 가는 자리에 도대체 네가 왜 끼어드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내가 안고 있는, 에펠탑 높이만큼 산적해 있는 문제들--그 중 꼭대기에 있는 건, 오늘 아프게 깨달은 사실인데, 불어가 아니라 물리학/철학에 대한 턱없이 부족한 전공 지식과 부끄럼을 심히 타는 성격과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기억력과 점점 더 둔탁해지고 있는 사고력이다--을 떠올리던 중, 불현듯 백석의 "절망"이 생각났다. 스무살 무렵, 문득 세상의 절망이란 절망을 혼자 다 짊어지고 있다는 게 너무나 절망스러워진 나머지, 후자의 절망만이라도 해소해 보고자 "절망"이라는 말이 붙은 온갖 것들을 찾아다녔었다. 그때 찾았던 것 중 기억나는 게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끝에서>와 백석의 "절망"이란 시다.

도대체 왜 "절망"이라는 제목을 단 걸까? 어쩌면 이 시의 포인트는 바로 거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절망"이라는 단어에 혹해서 그 단어에서 연상되는 정서들을 준비한 채로 본문에 들어갔다가 대뜸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어린 것의 손을 잡은 튼튼하고 아름다운 북관의 계집을 마주치게 되면, 마주치는 순간, 딱 고 순간만큼은 "절망"이고 뭐고 사라진다. 고 순간에는 절망할 틈이 없다. 턱 하니 숨이 놓인다. 그녀가 숨이 차서 가퍼로운 언덕길을 올라가고 그걸 바라본 후에 하루종일 서러운 건 그 다음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식민지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의 화자가 왜 서러워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에 어떤 개인사적/정치적/사회적/역사적 맥락이 숨어 있는지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절망"의 정서와 그녀 사이에 놓여 있는 텅 빈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서로 자기들 멋대로 떠돈다. 춤을 춘다. 그 춤을 황홀하게 바라 보면서, 기호에서 소외돼 있던 나는 위로를 받는다.

내일은 철학 수업이 있는 날. 그래도 오늘보다는 괜찮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게다. 그렇지만 "절망"과 "북관의 계집" 사이의 시/공간 역시 거기에, 그때에, 그렇게 남아 있을 게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거기에, 그때에, 그렇게 찾아 올 게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 앞의 생에 남아 있는 나머지 화요일들을 넘기게 될 게다. 그리고, 그리고 나서 서러워 해도 늦지 않을 게다. 그럴 게다. 그리고, 그럴 거다.

사족

시 전문을 찾아 검색하다가
http://book-shop.daum.net/b ... eview_media> face=돋움 color=#000066>유종호 선생이 2001년 민음사판으로 낸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의 서평 기사 가 나오길래 훑어 봤는데, 책도 안 읽은 주제에 이런 리플을 달고 싶어졌더랬다 :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 저 시에서 북방 정서(김재홍)니 모던한 허무주의(김윤식)를 읽어내는 것도 웃기지만, 시인이 한 여인을 보고 반했는데 그 여인에게 애가 딸려 있길래 서러워 했고 그게 절망한 이유의 전부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선생님의 단순/간단/명료/명쾌한 해석이 더 웃긴 것 같은데요. 그렇게 따지자면 보들레르의 "지나가는 여인에게"도 너무 싱거운 시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로맨티시스트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셨다구요.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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