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철학의 기준

blogin.com · 2004-11-28

"과학적 인식이 아닌 인식은 인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참인 인식이 아닌 인식은 인식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과학적 인식', '참인 인식'은 중복된 표현입니다."
 
깡길렘이 말을 이었다.

"철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따라서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

장내가 술렁였다. 방송국 스튜디오에는 장 이폴리트, 폴 리쾨르, 알랭 바디우, 미셸 푸코가 앉아 있었다. 이폴리트가 물었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철학은 學의 총체(totalité)를 추구합니다. 당대의 과학이 찾아낸 혹은 만들어낸'진리'를 다른 미학적 혹은 윤리적 가치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철학의 임무입니다."

-- 깡길렘, 리쾨르, 이폴리트, 푸코, 드레퓌스, 바디우의 1965년 라디오 대담 중에서 일부 발췌. 실은, 극적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발췌한 이가 상당 부분 재구성한 것. 심지어 "당대의 과학이 찾아낸 혹은 만들어낸 '진리'"라는 표현같은 경우, 발췌한 이가 자신의 관점을 얼마나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하게 녹여냈는지 잘 보여준다. 대담의 전문은 푸코의 <<말과 글 Dits et écrits>> Vol 1, Edn. Gallimard, 1994 에 실렸다. 참고로 이 대담에서 푸코는, 아직 새파랗게 젊은 철학자로서 대가들 앞에서 말하기를 어려워해서였는지는 몰라도, 겨우 한 마디만 했다.



깡길렘은 여기에서 "위대한 철학"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기준을 제공한다. 위대한 철학자일수록 그 이름이 명사화 혹은 형용사화되어 일상 속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된다는 것. 이 기준에 따른다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위대한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이나 "플라토닉"이라는 형용사가 일상 언어에서 쓰이는 빈도를 생각하면 그러하다. 데카르트 역시. 물론 데카르트의 경우 이 기준으로 따지자면 위대한 철학자라기보다 위대한 수학자라고 해야 하겠지만. '코기토'와 '카테지언 좌표계' 중에서 후자가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고 또 자주 쓰이니 말이다.

어쨌든 이건 결과론적 기준이고, 깡길렘이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위대한 철학의 기준은 그것이 당대의 모든 학에 대한 총체화/전체화된 관점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는가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위대한 철학"이라고 할 만한 철학을 발견하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그 누가, 저 위대한 칸트나 헤겔처럼, 동시대의 모든 학문들을 섭렵할 수 있겠는가, 과학이 이처럼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그렇지만, 위험이 있는 곳에, 그러나 구원은 자라나니.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능한 해결책들이란? 첫째, 학제간/다학문적 연구만이 살 길이다. 혼자서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는 환상, 모든 걸 다 해야만 한다는 욕심을 버려라. 둘째,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재차 삼차 물을 수 있다. 왜 꼭 위대한 철학을 해야 하는데? 왜 위대한 철학의 기준이 그거여야만 하는데? 왜 꼭 이름을 남겨야 하는데? 셋째, 진리/지식에 대한 담론의 (재)구성으로서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리~지식~과학~인식~합리성~이성' 이라는 도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가 가능할 조건에 대해 물어야 한다. 각 '~' 사이에는 무궁무진한 역사/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것들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는 일, 거기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박쥐

월동준비

blogin.com · 2004-11-22



김치가 생겼다. 그것도 절반은 내가 만든 김치. 배추 한 포기를 3시간 정도 소금물에 절여 숨을 죽인 다음에 먹기에 알맞은 크기로 썰고 고춧가루, 파, 멸치 및 까나리 액젖, 깨소금, 설탕, 뜨거운 물을 넣고 버무려 용기에 꾹꾹 눌러 담아서 제대로 만든, 내 생애 최초의 김치. 라면도 듬뿍 있고, 쌀도 제법 넉넉하다. 그러고 보니 쟁여놓은 김도 꽤 된다. 가슴 속엔 오랜만에 만난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 모두가 나로 하여금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해 줄 것들이다. 집에 오는 길에 비를 맞으며 행복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이다.

—박쥐

카우프만과 니체

blogin.com · 2004-11-12

* Eternal Sunshine... 에서 커스틴 던스트가 맡은 메리는 바트렛 명언집의 구절들을 외우고 다니는데, 그녀가 인용한 것이 포프의 시와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다. 다음은 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http://www.imdb.com/title/tt0338013/quotes 에 가보세요.

근데 이 영화, 생각해 보면 볼수록 재밌군요. 특히 철학하는 사람들은 영화의 구석구석에서 재밌는 요소들을 한 바가지 찾아낼 것 같습니다 (뭐, 문학하는 분들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전설적 로맨스에 대한 영화적 해석이라고 좋아하실 수도). 우선 기억이나 정체성과 같은 고전적인 철학 주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구요. "나는 너다", "그가 나의 아이덴티티를 훔치고 있다"와 같은 대사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철학 수업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만큼이나 자주 인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밖에도, 예를 들어 니체의 이 구절은 영화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되는데요, 전 그걸 보면서 영문판 니체전집의 편집자인 카우프만과 시나리오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어떤 관계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더랬지요. 뭐 그건 사소한 부분이고, 굳이 니체가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의 핵심어인 "망각"이 니체 전공자들의 흥미를 끌지 않았을까 해요. 한 영화 포럼을 봤더니, 실제로 니체로 논문을 쓰는 철학 강사가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가지고 니체에게 있어서의 "망각"을 설명했다고 해요. 초인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의 능동적 망각,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범인/일상인(니체가 현대인을 가리켜 부르는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요?)의 전유물인, 과거의 향수에 갇힌, 의지가 결여돼 있는 수동적 망각. 이 강사는 후자의 예로 아멜리를 들었다네요. 헉.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어요.

—박쥐

ㄱ나니?

blogin.com · 2004-11-11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 "POPE" Alexander. Eloisa to Abelard (extrait)

의 찰리 카우프만이 시나리오를 쓰고 CF 및 M/V 감독 출신인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말해서, 기억에 관한 영화다. 따지고 보면 기억을 다루지 않는 영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운다든지 집어 넣는다든지 뒤섞는다든지 해봤댔자 요즘에 와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얘기로 들릴 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코 진부하지 않다. 결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말 많고 탈 많은 인간 관계, 자아, 정체성, 유년 시절의 경험 (그 중에서도 특히 "수치"에 대한 최초의 경험) 등의 문제를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는 솜씨가 정말이지 예사롭지 않다. 공드리의 감각적 영상 속에서 카우프만식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두 사람이 만났다 해도 저 정도의 시너지 효과를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전작 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도 최고였다. 특히 미국식 액센트를 소화하기 위해 발성까지 바꿨음에 분명한 케이트 윈슬렛은 정말 놀랍다. 난 그녀에게 새파랗거나 새빨갛게 물들인 머리카락이나 주홍색 추리닝이나 90년대식 히피 복장 같은 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 주연으로 물망에 올랐다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대신해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짐 캐리도 우수어리고 간절한 눈빛을 케이지 못지 않게 잘 소화해 냈다. 어느새 몰라보게 커버린 프로도의 모습도 새로웠다. 비록 시리즈는 1편, 그 중에서도 1/3만 본 게 전부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형용사는 "나이스"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가 제목에 사용되고 또 영화 안에서 직접 인용됐는데, 영화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구절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보다는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 "ㄱ나니"는 서태지와아이들의 4집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다. 그 노래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ㄱ나지 않는다.

—박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blogin.com · 2004-11-10

발표 잘 들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후에 벌어진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오신 걸 환영해요.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상화, 근사, 모델에 관한 논문을 쓰셨더군요. 사실 제가 그 문제를 석사 논문에서 다뤘습니다만,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다 잊었긴 합니다만, 논문 쓰던 당시에는 그 셋이 개념적으로 당최 구분이 안돼서 혼났어요. 이상화(idealization)와 모델도 결국은 근사(approximation)의 한 종류 아닌가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개념적 구분이란 게 저한텐 상당히 쥐약입니다만. 특히 요즘 들어선 더 그래요. 난 파르메니데스가 맞았음 좋겠어요.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고. 그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가지가 뻗으면 도대체 구분이 되질 않는다구요. 얘기가 딴 데로 샜습니다만. 어쨌든. 그런가 하면, 질점도 근사고, 뉴턴적 세계관도 근사고, 한국 국민의 평균 키나 평균 몸무게도 근사인데, 뭐 그렇게 넓게 개념화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근데 왜 그렇게 진리값을 부여하지 못해 안달입니까? 루이스의 가능세계론은 상당히 매력적인 도구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진리론에 꿰맞추기 위해 그렇게 도입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쿤도 그래서 자기 입장 설득하느라 고생했잖아요. 인식론적 아나키즘이 뭐 그리 나쁩니까? 사람들이 아나키즘 하면 상대주의에 대해 보이는 것과 비슷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난 아나키즘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반응을 보면 기분이 나빠요. 아나키즘은 "무엇이든 다 좋다"가 아니라구요.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세요? 그들이야말로 신념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먼저 목숨까지 내걸 사람들이라구요. 흑. 그래요. 내가 이래서 요즘 아무말도 못합니다. 도대체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아요. 도대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한 마디도. 이래봬도 옛날에는 논리학을 꽤 좋아했다구요. 뇌세포 하나 하나를 총가동해서 모든 사고의 과정을 스크리닝한 다음에 답을 얻었을 때 찾아오는, 두뇌가 새하얗게 세탁되는 느낌. 나한텐 그게 정말 지상 최고의 쾌락이었다구요. 한때는. 근데 요즘엔 세계가 정지해 버렸어요. 세상은 미친 속도로 휙휙 돌아가고. 그래서 정말 있을 데가 없어요. 못 찾겠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더 드리지요. 당신에게도 이럴 때가 있었나요? 난 요즘 건망증이 너무 심해졌어요. 어쩌면 좋죠? 그렇잖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요. 이게 정신분열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 지하철에서 갑자기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날 선로로 밀어넣을지도 모르니 그때를 대비한 행동 수칙을 생각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과 비슷한 빈도로. 정신분석학에 대해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웃기죠? 이 블로그, 아무래도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의 전속이었던 이발사가 갔던 그 대나무숲이 돼가나 봐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박쥐 머리는 새대가리.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