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어/주제어 : 인과성causality 인과율principle of causality 인과causation (자연)법칙 결정론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뉴턴 흄 칸트 라플라스
논리적 선후/포함관계와 인과의 차이. 고전역학적 인과관계에서는 사실상 시간상의 순서는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는 논리학과 마찬가지. 둘 다 A이면 B이다, 즉 A->B 로 표현된다. 그러나 전자에서는 포함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면 동물이다와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논증이 논리학의 삼단논법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됨을 분석론 후서에서 보인 바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보편타당하며 만고불변의 진리 명제("모든 사람은 죽는다")인 대전제, 대전제와 항을 공유하는 소전제("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로부터 결론("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 도출될 때 이 논증을 타당하다 한다. 그러나 많은 과학적 실천들에서는 정설(thesis)보다는 가설(hypo-thesis)이 대전제로 제시된다. 이 때 가설은 진리값이 미정된, 엄밀하게 말해서는 거짓이다. 그런데 대전제가 거짓(F)인 모든 논증에서, 결론은 항상 참이다. 소전제의 진리값과 상관 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가설로부터 나온 모든 결론은 참이란 말인가? 아니다. 과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논리학이 아닌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원리, 원인에 대한 탐구다. 모든 변화(생성 및 소멸, 그리고 위치 운동을 포함)는 네 가지 원인(질료인, 형식인, 작용인/기계인, 목적인) 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물은 변화에 임함(...)에 있어 잠재태와 현실태 두 가지 양태로서 참여(...)한다. 잠재태가 현실태로 이행하되,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마치 잠재태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태(=최종 상태, 목적)이기라도 한 듯 작용하는 것, 이것이 운동의 본질(...)이다.
그리고는 중세를 지나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까지.
흄 : 비가 오는 것과 땅이 젖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거나 연속해서,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비교적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일어나는 두 사건이다.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 : 인과율은 오성이 직관이 '수집'한 경험의 다양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음에 있어서 그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칙의 하나다. 이러한 규칙들은 선험적 혹은 법칙적(apodictique) 필연성을 갖는다. 이 관계의 필연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 어느 인식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필연성의 근거는 인식 주체 안에 있다.
다시 칸트 : 인과율에는 다른 규칙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뭔가가 있다. 그리고 인과율은 늘 시간을 전제한다. 이 점이 아주 미묘하다. 비가 오기 전에 땅이 젖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땅이 젖은 사건에 대해 비가 오는 사건은 인과 관계에서 벗어난다. 그럼에도 비 이외의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과율은 가장 기초적인 사고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고 시간성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바, "과학적 인과는 시간적 선후관계와 별개"는 테제는 수정되어야 하는가?
또 다시 칸트 : 칸트는 인과율과 시간성의 관계를 논하면서 "계기Moment" 개념을 도입한다. 보통 모멘트는 순간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역학에서 모멘트는 미분적인/순간적인 양, 0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화하는 양, 달리 말하면 단지 미분적 시간에서만 성립하는 양을 일컫는다 : 관성 모멘트, 회전 모멘트 등등. 그러나 운동체의 전체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모멘트들이다.
뉴턴의 법칙 및 인과 개념은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달은 관성에 의해 매 순간 직선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지구는 매 순간 달을 자신의 인력으로 당겨 "떨어뜨린다". 이 힘의 크기는 정확히 지구가 사과를 "떨어뜨리는" 힘과 같다.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은 이 두 힘이 매 순간 합쳐진 결과다. 달의 운동의 원인은 각 순간에 작용하는 이러한 힘들이다, 법칙은 바로 이 힘들의 관계를 일컫는다. 이 관계, 그리고 특정한 한 순간에 대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 지구 및 달의 질량의 값을 알기만 하면, 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상태가 결정된다. 물론 교란이나 섭동 등등 다른 미세한 원인들을 고려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서도 말이다. 어쨌든 원칙적으로 또는 이상적으로는 그렇단 얘기다.
라플라스 : 이 이름은 이상하게도 "악마"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라플라스의 악마"). 그치만 정작 라플라스 자신은 훨씬 고상하게 "최고 지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최고 지성을 신과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나폴레옹에게 "신이란 가설은 필요없다"라고 했던 자가 바로 그다). 그의 결정론은 새로운 교설이라기보다 위에서 얘기한 뉴턴적 인과율의 번역 혹은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라플라스 자신은 오히려 이 교설을 언급하며 라이프니츠의 충분이유율을 언급한다) : 어떤 최고 지성이 있어, 우주 내 모든 원자들의 위치 및 속도와 그 사이의 법칙을 알기만 한다면, 그는 우주의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는 모든 상태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원칙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라 하겠다.
이에 대한 푸앵카레 선생의 말씀...
을 대강 짧게 말하자면...
1. 뉴턴의 법칙 개념과 라플라스의 결정론 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둘은, 그것들이 없으면 과학이 불가능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과학적 사유와 실천의 근간을 이룬다.
2. 그렇지만 이것이 원칙적이고 이상적이라는 점 역시 부인키 힘들다. 왜냐하면 첫째, 초기 조건에 대한 인식에는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 초기 조건에서의 아주 작은 차이가 그에 바탕한 상태값 계산에 있어 파국적인 효과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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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10년경 여름 휴가 때 찍은 것. 죽기 2년 전 모습이다. 그가 해안가를 거닐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정말 죽도록 궁금하다. 다음 학기 강의에 대한 구상은 아니었을지? 그 해 가을학기에 시작한 우주생성론 가설에 대한 강의 말이다.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