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며

blogin.com · 2009-11-30

관련어/주제어 : 인과성causality 인과율principle of causality 인과causation (자연)법칙 결정론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뉴턴 흄 칸트 라플라스

논리적 선후/포함관계와 인과의 차이. 고전역학적 인과관계에서는 사실상 시간상의 순서는 무의미하다. 그런 점에서는 논리학과 마찬가지. 둘 다 A이면 B이다, 즉 A->B 로 표현된다. 그러나 전자에서는 포함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이면 동물이다와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적 논증이 논리학의 삼단논법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됨을 분석론 후서에서 보인 바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보편타당하며 만고불변의 진리 명제("모든 사람은 죽는다")인 대전제, 대전제와 항을 공유하는 소전제("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로부터 결론("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 도출될 때 이 논증을 타당하다 한다. 그러나 많은 과학적 실천들에서는 정설(thesis)보다는 가설(hypo-thesis)이 대전제로 제시된다. 이 때 가설은 진리값이 미정된, 엄밀하게 말해서는 거짓이다. 그런데 대전제가 거짓(F)인 모든 논증에서, 결론은 항상 참이다. 소전제의 진리값과 상관 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가설로부터 나온 모든 결론은 참이란 말인가? 아니다. 과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논리학이 아닌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원리, 원인에 대한 탐구다. 모든 변화(생성 및 소멸, 그리고 위치 운동을 포함)는 네 가지 원인(질료인, 형식인, 작용인/기계인, 목적인) 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물은 변화에 임함(...)에 있어 잠재태와 현실태 두 가지 양태로서 참여(...)한다. 잠재태가 현실태로 이행하되,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마치 잠재태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태(=최종 상태, 목적)이기라도 한 듯 작용하는 것, 이것이 운동의 본질(...)이다.  

그리고는 중세를 지나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까지.

흄 : 비가 오는 것과 땅이 젖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거나 연속해서,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비교적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일어나는 두 사건이다.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 : 인과율은 오성이 직관이 '수집'한 경험의 다양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음에 있어서 그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칙의 하나다. 이러한 규칙들은 선험적 혹은 법칙적(apodictique) 필연성을 갖는다. 이 관계의 필연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 어느 인식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필연성의 근거는 인식 주체 안에 있다.  

다시 칸트 : 인과율에는 다른 규칙들에 대해서 근본적인 뭔가가 있다. 그리고 인과율은 늘 시간을 전제한다. 이 점이 아주 미묘하다. 비가 오기 전에 땅이 젖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땅이 젖은 사건에 대해 비가 오는 사건은 인과 관계에서 벗어난다. 그럼에도 비 이외의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인과율은 가장 기초적인 사고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고 시간성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바, "과학적 인과는 시간적 선후관계와 별개"는 테제는 수정되어야 하는가?

또 다시 칸트 : 칸트는 인과율과 시간성의 관계를 논하면서 "계기Moment" 개념을 도입한다. 보통 모멘트는 순간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역학에서 모멘트는 미분적인/순간적인 양, 0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화하는 양, 달리 말하면 단지 미분적 시간에서만 성립하는 양을 일컫는다 : 관성 모멘트, 회전 모멘트 등등. 그러나 운동체의 전체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모멘트들이다.

뉴턴의 법칙 및 인과 개념은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달은 관성에 의해 매 순간 직선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지구는 매 순간 달을 자신의 인력으로 당겨 "떨어뜨린다". 이 힘의 크기는 정확히 지구가 사과를 "떨어뜨리는" 힘과 같다.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은 이 두 힘이 매 순간 합쳐진 결과다. 달의 운동의 원인은 각 순간에 작용하는 이러한 힘들이다, 법칙은 바로 이 힘들의 관계를 일컫는다. 이 관계, 그리고 특정한 한 순간에 대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 지구 및 달의 질량의 값을 알기만 하면, 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상태가 결정된다. 물론 교란이나 섭동 등등 다른 미세한 원인들을 고려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서도 말이다. 어쨌든 원칙적으로 또는 이상적으로는 그렇단 얘기다.

라플라스 : 이 이름은 이상하게도 "악마"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라플라스의 악마"). 그치만 정작 라플라스 자신은 훨씬 고상하게 "최고 지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최고 지성을 신과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나폴레옹에게 "신이란 가설은 필요없다"라고 했던 자가 바로 그다). 그의 결정론은 새로운 교설이라기보다 위에서 얘기한 뉴턴적 인과율의 번역 혹은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라플라스 자신은 오히려 이 교설을 언급하며 라이프니츠의 충분이유율을 언급한다) : 어떤 최고 지성이 있어, 우주 내 모든 원자들의 위치 및 속도와 그 사이의 법칙을 알기만 한다면, 그는 우주의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는 모든 상태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원칙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라 하겠다.  

이에 대한 푸앵카레 선생의 말씀...

을 대강 짧게 말하자면...

1. 뉴턴의 법칙 개념과 라플라스의 결정론 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둘은, 그것들이 없으면 과학이 불가능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과학적 사유와 실천의 근간을 이룬다.

2. 그렇지만 이것이 원칙적이고 이상적이라는 점 역시 부인키 힘들다. 왜냐하면 첫째, 초기 조건에 대한 인식에는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 초기 조건에서의 아주 작은 차이가 그에 바탕한 상태값 계산에 있어 파국적인 효과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

사진은 1910년경 여름 휴가 때 찍은 것. 죽기 2년 전 모습이다. 그가 해안가를 거닐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정말 죽도록 궁금하다. 다음 학기 강의에 대한 구상은 아니었을지? 그 해 가을학기에 시작한 우주생성론 가설에 대한 강의 말이다.

—박쥐

윗집 여자

blogin.com · 2009-11-24

저 일가족이 윗집으로 이사 온 게, 가만있자, 언제였더라? 한 1년이나 2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들의 얼굴을 마주친 것은 고작 해야 한두 번 정도다.

한 번은 건물 현관문의 코드가 바뀌었을 때였다. 보통은, 컴퓨터 자판이나 카드 비밀번호처럼, 익숙해지기만 하면 굳이 기억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손의 감각에만 의지해서 누르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그 익숙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 시간도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날만큼은 유난히,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밤이 꽤 늦은 시간이라 이웃 중 누군가가 드나들길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 2층 창가로 누군가가 보였다. 한 여자가 창가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코드를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소리쳐 물었다. 그녀는 외국 억양이 섞인 발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9. 2. A. 6.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그리고 덕분에 문을 열고 들어오며 고맙다 인사하는 나를 향해 아래층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때야 나는 그녀가 내가 사는 집 바로 위층에 있었음을 알아채고 잠시 멈칫했다. 윗집이라면, 축구를 하는지 술래잡기를 하는지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은 쿵쿵거리는 아이들이 사는 그 집 아닌가. 가끔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 아이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목소리도 들리곤 했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내가 이슬을 맞으며 밖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도록 도와준 이 자상한 여인네와 동일인이란 말인가. 혼란을 숨기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담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가 계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빨리 계단으로 올라왔다.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올라가서 한마디 하리라던 이전의 다짐을 잊으려 애쓰면서.

다른 한 번은 어느 꽤 늦은 저녁이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올라오는데, 마침 내려오고 있던 윗집의 그녀와 마주쳤다. 어딘가 근사한 곳으로 외출을 하는 모양인지, 아주 화려하고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편인 것으로 짐작되는 남자와 함께였는데, 그는 풍만한 그녀에 비해 왜소하고 나약해 보였다. 너무 평범한 차림이라 더욱 그래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또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상상을 해버렸다. 자격지심 많고 열등감으로 가득 찬 나머지, 자신을 사람을 앞에서 돋보이게 해줄 동시에 어떤 치명적 약점을 지니거나 자신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해줄 만한 여성을 찾는 선진국 '원주민'이 '그'일 것이고, 외모를 무기로 선진국에서의 안정적인 삶과 신분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제3세계 출신 젊은 여성이 '그녀'일 것이라는.

언젠가부터, 외모상에서의 지나친 불균형과 비대칭성이 보이는 커플을 만날 때면 이렇게 단정하는 나쁜 습관이 생겨 버렸다. 정치적으로 불공정하며 논리적으로도 천부당만부당한 이런 추론을 거의 반사적으로 해버리고, 또 그런 후에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반복될 때마다, 외모, 국적, 인종, 성별 등의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마냥 소박하게 사고하던 어린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뭐, 그 시절이라고 마냥 순진한 생각만 하고 살았을 리는 만무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 사는 모습에는 편견을 심화시키는 측면뿐 아니라 가끔 그때까지 쌓아 올린 편견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요소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아 보여도 들어가 보면 다 저마다 특이성을 갖게 마련이다. 이론 이성에게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사람에 관해서라면 가설을 쌓아 하나의 그럴 듯한 이론을 구축할라치면 곧 반증 사례가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게 바로 사람들과 사는 맛이고 사람 삶--인생의 묘미 아닌가.

윗집 부부는 때로 부부 싸움을 처절하게 벌이는 듯했고, 또 그럴 때면, 이곳의 공용어와 낯선 이국의 언어를 섞어 쓰곤 했다. 그런가 하면,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그녀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듣는 듯한 우아한 피아노 소나타가 가끔 들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게 더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들린 것은 그들이 살면서 무심하게 퍼뜨리는 소리들이었다. 저녁 무렵의 하품하는 소리, 텔레비전으로 영화 보는 소리, 한밤중 휴대전화 진동 소리, 새벽녘 사랑을 나누는 듯한 소리, 아침이 밝고 아이들이 우당탕 학교 가는 듯한 소리 등등.

이것만으로도 벌써 그럴싸한(혹은 진부한?) 이야기 소재로 삼기에 충분했다. 젊지만 벌써 권태에 접어든, "비대칭" 부부, 별 볼 일 없는 영화로 집에서 때워야 하는 지루한 저녁 시간. 그녀의 비루한 삶에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던 애인은 이제 좀 더 대담해져서 자고 있는 배우자를 바로 옆에 둔 그녀에게 한밤에 문자 메세지를 보낸다. 그녀는 가슴이 조마조마한 가운데에서도 바로 그 긴장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며 잠에 든다. 그렇지만, 달콤한 꿈도 잠시, 새벽녘 잠이 먼저 깬 배우자는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한다. 악몽 같은 시간. 그리고 잠시 후 정신없는 아침. 배우자로서 또 학부모로서 아침의 의무를 끝낸 그녀는 오후에 있는 애인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들뜬 마음을 달래기 위해 조용한 피아노곡을 택한다...  
    
그 후로도 한참동안 나는 내 멋대로 윗집 일가족을 "해체"하는 고약한 취미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은 아직까지 구상 중.

—박쥐

Feeling like an extra

blogin.com · 2009-11-18


Dear Julie,

Do you ever feel like an extra in your life?
It seems like I'm forever stuck in the background,
watching other people say and
do all the things I feel inside.
One day I'm gonna surprise
everyone with my talents. They
will be laughing and crying and
texting me so often that I will
be annoyed.
Until then,

Sandy

from http://www.viceland.com/int ... iranda-july-136.php> Vice Magazine

Surprise!



우리 모두는 각자 삶에서 주인공이지만 그 협소한 영역을 넘어서면 엑스트라, 나아가 비가시적 존재에 불과하다. 게다가, 크기로만 따져 보건대, '내' 세계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가 지구와 달의 관계라면, 사회와 나의 관계는 태양과 지구의 관계, 혹은 은하와 태양의 관계다. 무한한 우주와 미소하기 짝이 없는 나. 무한한 공간 앞에서 나는 공포를 느낀다 (파스칼). 그렇지만 가끔 이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나는 사유를 통해 우주를 집어 삼킨다 (역시 파스칼). 이렇게 해서 우주는,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세계와 사물과 사태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미란다 줄라이가 새로운 작품을 내놓았다. 신디 셔먼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진 연작들이다. 물론 셔먼보다는 훨씬 얌전하고 귀여우며 그래서 좀 재미가 덜하지만, 다른 종류의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숨은 그림 찾기 하는 재미 같은 것 말이다.  

나도 줄라이랑 비슷한 궁리를 한 적이 있다. 영화에 나오는, 혹은 실제의 삶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저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을 "모든 사람은 각각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공허한 정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조명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외부로 난 창 없이 각자의 방법으로 우주를 표현하며 살아가는 모나드적 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거나 소통가능성을 보여주는 광경을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영화 바벨 같은 경우. 그리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요즘 프랑스 영화에 유난히 이런 예가 많다. 특히 알렝 레네의 최근 작품들.

문제는, 아무리 관점을 달리 하고 또 등장인물을 증폭시켜도 (예를 들어 펠리니처럼 극소수의 주연을 제외한 불특정 다수를 대거 투입하되 후자가 전자에 못지 않은, 아니 전자를 넘어서는 개성--이 말은 펠리니의 인물들을 묘사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괴물성"이 더 나은 표현일지도 모른다--을 발하도록 만든다든가) 거기에서 은폐되거나 소외되는 자는 늘 남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줄라이나 아니면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처럼 그런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복권시킨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샌디'의 소망은 고고하다.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극히 미미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바로 그 미미한 확률 때문에, 일단 이루어진 소망이 주는 기쁨은 배가 될 것이다 (다시 파스칼). 우리 중 일생에 한 번쯤 '샌디'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뒷배경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의 숨은 재능을 알리고,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또 문자 메세지도 잔뜩 받고 싶은 세상의 모든 '샌디'들에게 경의를. 그리고 희망을.
  

—박쥐

Composition typographique

blogin.com · 2009-11-12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쉴새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원자론자들에 따르면 이 세계는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더러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존재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단순성과 불가시성을 속성으로 갖는 원자로 이루어진 세계가 어떻게 그토록 복잡하며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다. 이를테면,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는 이를 편위(클리나멘)의 원리로 설명한다. 태초에 원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평행하게 수직 낙하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원자들이 직선으로부터 아주 조금 빗겨 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이 편위는 미소한--거의 미분적인--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외부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자 스스로의 운동력, 심지어 의지나 "주체적" 자각에 따른 것이라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원자들 간의 충돌이나 결합이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질적인 변화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원자론적 생성론의 핵심은 위와 같은 역학적/운동학적 원리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는 듯하다. 원자론의 가장 주요한 영감의 원천 중 하나는 문자와 그 조합술이다. 세계의 생성은 문자들로부터 단어가 형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루어진다. 한정된 개수의 문자로부터 형성할 수 있는 단어의 수와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문장, 문단 나아가 글, 책으로까지 넓힌다면 가능한 조합의 경우의 수는 더더욱 커진다. 세계가 무한히 지속되었거나 아니면 시초로부터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가정할 경우, 원자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미 거의 모든 가능한 충돌과 운동과 결합을 겪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선가 우발적 조합을 통해 지금의 이 세계의 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다. 철저히 확률 게임으로 이루어지는 이 과정에서 특정한 목적이나 원인은 부재하며, 신과 같은 조물주 또한 설 자리가 없다. 원자의 운동성에 대한 무리한 가정--수직 낙하나 편위--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억겁의 시간 뿐. 원숭이가 제멋대로(=랜덤하게) 타자를 두드려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완성"하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할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실 원자들이 불규칙하게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상태--고엔트로피 상태--다. 그에 비해, 세계가 질서나 안정성을 띠게끔 원자들이 배열된 상태는 매우 낮은 확률을 지닌다. 즉,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노력과 에너지를 들이지 않으면(아니면, 억겁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원자들은 곧 다시 무질서한 상태로 돌아간다. 현실적으로 볼 때, 한 번 무질서해진 원자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상태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세 가지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하여금 질서를 부여하게 하거나, 아니면 세계가 어떤 목적을 향해 "튜닝"되어 있고 원자들도 이에 복무한다고 가정하거나, 아니면, 볼츠만의 제안대로, 초월계와 현상계를 구분하고(이건 내 해석이다) 전자가 고엔트로피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반면 후자는 어떤 "요동"으로 인해 저엔트로피 상태로의 진입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거나.

옛날 책들을 보다 보면, 가끔 이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조판공 또는 인쇄공의 손때묻은 흔적들. 컴퓨터의 손을 거쳐서 나온 요새 책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때로 칼리그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뭐, 거칠게 말한다면, 인쇄공이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인해) 마땅한 집중력과 에너지를 투자하지 못한 틈을 타서 원자들이 질서에서 이탈하여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발적 조합으로부터 "이례적인(=낮은 확률의)" 사건이 일어난 한 아름다운 사례로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more...


위의 예에 반해 이것은 아주 "현대적"인 사례다. 옛 책을 스캔/복사하여 전자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겠기에 말이다. 그렇지만 스캔/복사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위와 공통적이라 하겠다. 우발적 조합이 미를 탄생시킨 사례라는 점에서도.

—박쥐

This Guy, this fabulous guy

blogin.com · 2009-11-06

http://www.youtube.com/v/ug ... der=1>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ug ... &fs=1&rel=0&border=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500" height="405">

캐나다 감독 http://www.imdb.com/name/nm0534665/> 가이 매딘(Guy Maddin) 의 2003년작 http://www.imdb.com/title/tt0366996/>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The Saddest Music in the World) 의 한 장면.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영화 속에서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경연대회가 펼쳐지는 만큼, 더군다나 비극을 구성하는 전통적인 요소들--한 여인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 또 다른 한 여인을 둘러싼 형제간의 갈등, 기억상실, 트라우마 등등--과 역사적인 요소들--1차대전, 30년대 대공황 등등--을 갖추고 있는 만큼, 눈물을 쏙 뺄만큼 슬픈 음악들이 흘러나와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눈물 쏙 뺄만큼 정신없이 웃음을 선사하는 하나의 우화다. .. 라는 것이 이 영화를 처음 본 2004년 당시 나의 생각이었는데, 이번의 느낌은 좀 다르다. 아무래도 매딘의 다른 영화를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영화의 배경은 위니페그다. 위니페그는 감독이 태어나서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캐나다 중부의 작은 도시로, 그에 따르면 눈이 많이 오고 겨울도 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곳 중 하나.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들 중 상당수가 흑백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경배하는 초기 무성영화, 특히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영화들의 영향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만의 독특한 향수나 우수어린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사에 기대지 않은 이미지 고유의 논리를 온전히 담아냄에 있어서도. 도대체 칼라로 찍은 영화들에서는 영화적 미를 제대로 살리기 힘들다고 불평했던 프랑수아 트뤼포도 이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다.

매딘이 재미있는 이유는 멜랑콜리와 공포와 유머, 아주 클래식한 고전과 데이빗 린치류의 영화적 실험 또는 실험(적) 영화, 그리고 B급 영화의 풍모를 묘하게 조화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의 대표적인 별명 중 하나가 바로 "캐나다의 데이빗 린치"인데, 내가 보기에 매딘은 린치보다는 친절하고 재미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말러의 음악을 배경으로 위니페그 왕립 발레단(!)과 찍은 우아한 뱀파이어 영화 http://www.imdb.com/title/tt0293113/> Dracula: Pages from a Virgin's Diary 나,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애틋한(!) 성장담이자 그의 가족에 관한 잔혹 동화인  http://www.imdb.com/title/tt0443455/> Brand Upon the Brain! 에서 잘 드러난다. 이자벨라 로셀리니와의 공동 작업은 또 어떤가. 그녀의 다른 작업, 특히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딘의 영화 속에서 그녀를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과장을 섞자면, 잉그리드 버그만이 펠리니나 혹은 알모도바르의 영화에 출연해서 시치미 뚝 떼고 너스레를 떠는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 절정은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자신의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매딘에게 감독을 맡겨 만든 http://www.imdb.com/title/tt0477785/> My Dad Is 100 Years Old 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단편들도 꽤 되는데 굳이 위의 뮤지컬 시퀀스를 따다 놓은 이유는... 굳이 찾자면, 옛날 영화같은 느낌이 많이 나게 하는 매딘의 특기가 어느 정도 살아나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다. 원래 내가 뮤지컬 영화도 좋아하지만, 뮤지컬이 아닌 영화에서 다소 뜬금없이 노래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좋아한다. 더군다나, 주변 인물들과 엑스트라들이 총출동하거나 그 주인공이 저기 나오는 마리아 데 메데이로스처럼 가냘프고 힘겹게 노래하면서 몸놀림도 어색할 경우는 더더욱 정감이 간다. 고달픈 삶 속에서 위로의 순간들이 있다면 그 순간들도 그렇게 가냘프고 힘겹고 어색하게 찾아들지 않는가. 비록 찰나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그 찰나마저 환각에 지나지 않을 지언정, 그래도 삶이 때론 즐거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기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매딘이 진짜 음악을 만나면?

http://www.youtube.com/v/Mw ... der=1>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Mw ... &fs=1&rel=0&border=1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width="500" height="405">



Sparklehorse, "It's a Wonderful Life"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