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또는 품위 관념 활용의 몇 가지 예

blogin.com · 2011-12-29

"네 품위(dignité)는 어디로 간 거니? 난 네가 선생들하고만 자는 줄 알았는데." 로우 예의 ‹러브 앤 브루즈 Love and Bruises ›에서 노동계급 출신 프랑스 남자와 사랑에 빠진 인텔리 여주인공에게 그녀와 같은 중국 국적의 옛 애인이 한 말. 이 말을 들으면서, 거 참, 요새 중국에서는 품위나 정조 등등에 관한 유교 관념이 그냥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재활용되고 있나 보군, 새롭네, 하고 생각했다.

이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막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신한, 용례들이 떠올랐는데, 하필 다 로메르 영화의 대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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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네게 충실했어. 내 침대에서 잔 건 오직 너 뿐이야. 그 사람하고는 호텔로 가곤 했거든."
-- ‹비행사의 아내 La femme de l'aviateur› 의 여주인공이 다른 사람(옛 애인)과의 관계를 추궁하는 현재

애인에게 한 말.

2.
"난 너랑 있을 땐 바람 피운다는 생각이 안 들어. 너랑은 브누아랑 하지 않았던 일을 하니까. 그런데 뤽상부르 공원에 오니까 불편해. 브누아랑 내가 사는 라탱 지구가 바로 옆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와 이 공원에 자주 왔고, 그런 만큼 지금 여기에서 너와는 그와 했던 걸 반복할 수밖에 없으니까. 너와 있는 날 보고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걸 브누아에게 들킬까봐 두렵다기 보다는, 내가 자기랑 했던 걸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하고 있다고, 내가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브누아가 여길 것이 싫어."
-- ‹ 파리의 랑데부 Rendez-vous de Paris › 중 두 번째 스케치,  ‹공중 벤치의 연인› 중, 동거중인 애인(브누아)을 두고 남주인공과 몰래 사귀는 여주인공이 한 말. 나중에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브누아가 바람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네 품에 안길 줄 알았니? 나는 절망에 빠져 있는데 너는 네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너는 나한테 브누아의 교대자-대리자였어. 브누아가 없다면 너도 더 이상 필요 없어" 하고 말하며 떠난다.

3.
"내가 널 떠난 건 너를 위해서였어. 네게 돌아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생겨서 원래 사귀던 사람을 떠나게 되는 경우, 대부분은 예전의 연인을 그리워하게 마련이거든. 내가 레아를 떠난 뒤 바로 널 택했다면 아마 레아를 그리워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너를 일단 한 번 택한 뒤에, 다시 한 번 레아를 택했고, 그럼으로써 너를 그리움의 대상, 즉 돌아가야 할 대상인 '예전 연인'으로 만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네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차라리 그냥, 단순하게, 레아랑 나를 저울 위에 놓고 비교해 보니 레아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하지 그러니?"
-- ‹친구의 친구 L'ami de mon amie› 중, 말 그대로 연인의 친구-친구의 연인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의 기로에 선 두 남녀 주인공의 대화

유교 관념이라고는 했지만, 품위, 존엄성 (dignitas)이나 정조, 충실 (fides) 같은 관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는 대부분 존중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일부일처제란 것이 가부장제(그리고 맑스에 따르면 성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형태인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는 대부분 남성에 의해 전유되어 상당히 기만적이고 여성억압적인 방식으로 작동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것이 사실. 그러다가 성해방 물결 이후에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됐다고는 하나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고, 이제는 그 물결마저 고리타분하거나 뻔한 것으로 치부되는 마당이니 더더욱 그러하고.

품위나 존엄성은 그렇다 치고, 배우자에의 충성도는 내 생각에 에로스 분배의 문제다. 나 한 사람한테 내가 가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에너지를 집중하기도 힘든 마당에, 그걸 나 아닌 다른 한 사람의 타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그걸 제 3자에게 또 나눈다? 에너지가 넘치는 경우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 속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 그런데 각 개인에게 배당된 에너지량이 같지 않고 또 서로 상대방에게 필요로 하고 요구할 수 있는 양 또한 다르니, 이것이 문제.  그래서 사람들은 규범이니 가치니 하는 걸 만들어 놓고 (니체), 그에 맞춰 규준을 세우고, 이에 따르는 일종의 "분배 법칙"을 준수하도록 만든 것일 게다. 이 모든 것이 애당초 고에너지 보유자에게 맞게 구성되었다는 것 (또 니체)이 또 문제지만 (니체는 문제라고 안 보겠지만). 그리고 사실 법칙 자체는 또 가치 기준과는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칸트-아감벤).

어쨌든, 이런 관념들이, 한갓 관념--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함축도 변하고 종전의 의미가 퇴색되었음에도 여전히 무시못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로메르 식으로 응용 변주해 볼 수도 있겠다. 신조어를 만들지 않는 이상 기존의 개념을 변환하거나 역전하는 것 또한 창조의 한 방법이겠기에. 물론 창조자가 아닌 수용자로서 이를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사고의 전환과 열린 자세가 필요하겠다. 이를테면 집에서 안 자고 호텔에서 잔 걸 두고 충실이니 정절을 운운하는 걸 이해하려면 말이다.

어쨌든 결론은
Rohmer forever


사실 이는, 로메르 세계의 좀더 근본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는 문제다. 다소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에로스와 로고스의 갈등이 그것이다.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욕망의 언어화/지성화 작업? 플라톤의 ‹향연› 같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해변의 폴린›에서는 주인공들이 사랑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아리엘 동발이 "나는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싶어" 등등의 대사를 읊는).

부연하면 이렇다. 충동-욕망들은 보통 이성-로고스에 의해 부인되거나 억압된다. 그런데 로메르 영화, 특히 대부분이 남성 지식인인 Contes moraux 연작의 주인공들은, 로고스를, 자신들이 가진 가장 원색적이고 도착적인 욕망들을 아주 유려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아주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정당화할 기제로서 삼곤 한다. 사실 다른 것도 아닌 로고스가 다름 아닌 욕망에 의해 도구화되어 단순한 언어적 표현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발화자에 대한 모든 도덕적 판단은 지연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다. 욕망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들의 말은 수행적 효과를 전혀 지니지 않는,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텅 빈 기표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로메르는 욕망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즉 현실화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욕망이기를 그친다는 점.

‹클레르의 무릎›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위 사진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로메르 추모 특집호 표지로, 바로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따온 것. 괜히 이 장면을 딴 게 아니다). 클레르라는 젊은 여성에 대한 남주인공의 욕망은 그녀의 무릎으로 대체/전화/수렴되고(순전하고 단순한 페티시), 바로 그 무릎으로 인해, 그러니까 그녀의 사랑을 얻음으로써가 아니라 무릎이라는 대리물을 쓰다듬으로써 해소된다. 이를 두고 그는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욕망의 경제는 종교적 감성과 지적이고 언어적인 지성 사이의 갈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 그는 늘, 독실한 가톨릭으로서 위에 열거한 고전적이고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당위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사명과, 바로 이 당위적 상황을 어떻게든 합리화, 적어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근성 사이의 불일치를 고민하고 둘 사이의 조화를 꿈꿨던 것 같다. 이 이상 역시 현실화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으나.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여전히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유다 :  Rohmer forever...

—박쥐

11/12/13 또는 13/12/11

blogin.com · 2011-12-13

별다른 뜻은 없고, 수비학에 대한 남다른 호감 (완곡하게 말하자면 그렇단 거고 좀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병적인 숫자 강박)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이 미미하게나마 "기념비"적인 날을 기념하고 싶었다 (거기에 또 하나 덧붙이면, 이 역사적인 공간, 앙리 푸앵카레 연구원 도서관에 설치되어 있는 맥에서 한글 입력이 가능한지를 확인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사실, 그 어느 날짜건, 규칙이나 의미를 찾자면 못 찾을 것도 없겠다만 (그런 의미에서 요전에 적었던 12/12/12 프로젝트는, 어차피 애당초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하긴 했지만, 실패한다 해도 그리 섭섭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보다 오늘, 2011년 12월 13일은, 내가 최근 겪은 중 가장 변덕스러운 기상으로 기록될 것 같다. 아침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다가, 점심 시간 즈음에는 또 맑게 개어 간신히 제 색깔을 유지한 하늘이 보이더니, 불과 한 시간 정도 지난 지금 이 시각에는 소나기가 들이쳐 창문이 들썩대고 있다. 그런데 또 방금 이 문장을 마칠 무렵에는 다시 조용해졌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라는 신호렷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이제서야 생각이 났는데, 12월 13일은 내 성명축일이다. 즉 루치아 성녀의 축일.

냉담자이고 정서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가까움에도 이 이름에 애착이 간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내 성명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면 (정확하게는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가 의뢰한 작명가의 합작품이지만), 루치아 혹은 루시아라는 이름 (한국 카톨릭에서는 이를 '본명'이라 부른다)을 고른 건 엄마였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내가 듣기에도 나쁘지 않다.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이후로는 다이아몬드 하늘이 연상되는 이름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루치아라는 여인에게는 아주 기구한, 또는,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기이하기까지 한, 사연이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신앙에 눈을 뜨고 스스로를 신에게 바치리라 맹세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강제로 한 남자(이 남자가 이교도라는 설도 있다)와 결혼하게 되고, 신방에서 '정절'을 지키려다 신랑한테 고발을 당해 옥에 갇힌다. 그리고는 고문을 당하다 목에 거대한 칼을 맞고 순교. 화형에 처해졌으나 불길에도 육신이 끄떡없자 집행관이 창으로 눈알을 찍어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이 성녀의 표상에는 눈알 두 개가 담긴 잔이나 칼이 등장한다 (깃털이 나오는 그림들도 있는데 이건 뭔지 모르겠다).

이 사실을 구글링을 통해 알려 준 친구는, "어머니의 실수"라 했다. 나는 차라리 간지(ruse)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위의 그림은 16세기 브뤼게에서 활동한 화가 그룹이 그린 것. 이들에게는 "루치아 성녀 전설의 명인들"의 이름이 붙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브뤼게에 간 것은 2년 전 겨울 이맘 때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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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앨리스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blogin.com · 2011-12-03

앨리스 하니 최고의 앨리스 영화가 생각난다. 체코 감독 Jan Švankmajer 의 1989년작 ' target='_son'>http://www.imdb.fr/title/tt0095715/combined> [앨리스]. 원제는 Něco z Alenky, "something about Alice"라는 뜻이란다.

같은 나라 출신인 밀로스 포르만 (그는 [아마데우스]를 만든 작가이기도 하지만 배우로서의 경력도 있다. 올해 프랑스 감독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Les bien-aimés 에 출연했다. 그것도 카트린 드뇌브의 상대역으로!)이 뷰뉴엘과 디즈니를 합쳐놓은 결과물이라 했다는데, 과연 그렇다. 소녀 배우와 잠깐 나오는 동물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 (인물이라기보다는 피조물에 가깝겠지만)들을 갖가지 재료 (톱밥, 양말, 틀니, 플라스틱 안구...)를 합한 인형들로 만들어 스톱 모션으로 찍었다.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팀 버튼이 컴퓨터 그래픽의 향연에다가 심지어 3차원으로 만든 앨리스에 비교한다면 월등히 우위다. 컴퓨터를 이용한 흔적은 당연히 없고 오로지 사람의 손길에 의지했으니 기술적인 면에서는 다소 아날로그적인 [크리스마스의 악몽], 그보다는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에 가깝겠는데, 이 둘에 비해서도 단연 돋보인다. 장면 하나 하나가 기상천외하고 기발한데 그것들을 합친 전체 또한 훌륭하다 .

단지 기법면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루이스 캐롤의 원작에 더없이 충실하다. 버튼의 경우, 원작에서 느껴지는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페도필리의 암시? 난 잘 모르겠다만)를 이 시대에 맞게 변주, 앨리스를 사춘기에서 성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걸로 설정하고 그녀에게 어떤 주체적인 여성으로의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나름 근대적인 재해석을 제시하려 한 의도는 그럴 듯했으나, 무리가 따르고 어색하며 소화가 안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캐롤의 이상한 나라가 시대적 배경을 초월, 상상력이 자유롭게 유희하는 초현실적 시공간에 가깝다고 볼 때, 스반크마예의 작품은 바로 이 나라를 놀랍도록 잘 재현하고 있다. 바로 이 "초현실성"에 주목할 때, 포르만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어쩌면 당시 체코의 상황이 은연 중 반영되어 있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함에 양해를.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전인가 후인가에 따라서도 얘기가 상당히 달라지리라).

또 다른 예 : 앨리스를 3인칭 시점의 화자로 설정하고 중간 중간 이야기를 진행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집어 넣은 내레이션 기법은 또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그보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바로 그 목소리를 보이스 오프로 넣지 않고 이야기하는 입을 클로즈업한 샷과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카메라가 유독 신체의 특정 부위를 주목하는 걸 볼 수 있는 뷰뉴엘의 [황금시대]나 [안달루시아의 개]가 떠오른다.이 또한 "소녀"의 "입"을 향한 노골적인 성적 암시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초현실주의의 계승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양자가 상호배타적인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상보적인 관계에 있지만 말이다.    

캐롤에 충실하다고는 했지만, 그저 충실하기만 한 해석에 머문 것은 아니다. 캐롤의 앨리스가 상당 부분 언어의 논리적(통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측면에 기대어 있다면, 스반크마예의 앨리스는 이미지가 작용하는 고유한 방식에 집중한다. 이 이미지들은, 캐롤이 만든 그 수많은 언어적 유희까지 대체하면서, 원작을 읽으면서 연상하게 되는 이미지들(상당 부분 원작의 삽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마저도 뛰어 넘는다.

사진 출처는 ' target='_son'>http://videodromodvd.blogsp ... /2010/12/alice.html> 여기. 단 한 번의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건질 수 있는 다른 훌륭한 샷도 많지만 책 읽는 앨리스가 포함된 이걸로 선정. 카드 나라의 왕정 재판에서 피고석에 앉은 모습이다. 앨리스는 무엇을 읽고 있을까?

···
(언제나처럼 유튜브에서) 맛보기, 그리고 앨리스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에 대한 답


헉, 심지어 완본으로 올라와 있네. 그것도 영어 더빙판으로.

http://www.youtube.com/v/iu ... fr_FR>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iu ... M?version=3&hl=fr_FR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0" height="315"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재판 장면은 1:20 가량부터 나온다. 저 책은 집사 토끼가 앨리스에게 읽고 외우라며 건넨 책.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다 들어선 곳은 피고석. 하트 여왕은 앨리스에게 타르트를 훔쳐 먹은 죄를 물어 참수형을 내린다. 앨리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옆에서 왕이 그래도 법치주의에 입각해서 제대로 판결을 내리자고 설득한다. 그리고 저 파란 표지의 책(이라기보다는 공책) 중 한 부분을 펴주며 소리내어 읽으라고 한다.

거기에는 "나는 내 잘못을 시인하며 이에 사과한다"고 적혀 있다. 앨리스가 이를 소리내어 읽자 왕은 사과의 말을 참작하여 처벌을 감하자 여왕을 설득한다. 이에 앨리스는 다시 잘못을 부인한다. 그러자 여왕은 기다렸다는 듯 참수형을 내리고, 왕은 할 수 없다는 듯 여왕의 판결을 반복한다. 집행관인 토끼가 가위를 들고 형을 집행하려 하자 앨리스는 "안돼!"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런데 흔들리는 고개는 앨리스에서 토끼로 오버랩되고, 이는 토끼에서 다시 다른 등장인물들로 차례로 이어진다. 그러다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오, 이것은, 다소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아닌가. 그러나 앨리스는 여기에서 요제프 K.가 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법의 본질--텅 빈 형식--을 꿰뚫고 그것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가지고 놀기.  

—박쥐

마감 지연 작전 (코드명 배수의진)

blogin.com · 2011-11-30

늦어도 일요일까지는 끝냈어야 할 일을 아직까지 붙든 채로, 기말논문 제출 기간 때 유독 블로그 업데이트가 잦아지곤 했던 예전의 시바를 떠올려 보기도 하면서,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직면하게 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최후의 순간에 임할 준비를 하는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계기로 페이지뷰 20000 (현재 19981)을 넘겨보려는 기도에서, 벌여보는 이벤트. 민망한 건 둘째치고 이런 종류의 이벤트가 그렇듯이 알맹이가 없는 까닭에 가책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뭐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포스트들에 속이 꽉 들어차 있었던 것도 아니라 자위하며, 강행해 보는 이벤트.

없는 알맹이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미완성 습작 공개" 정도로 해두겠다. 예전에 다락방(일명 하녀방) 살 때 썼던 엽편. 굳이 장르를 규정한다면... SF 콩트?

별과 첫 키쓰

공기가 유난히 차갑고 맑았던 어느날 밤, 나는 별을 보려고 창문 밖으로 몸을 길게 내밀었다. 비가 그친 뒤여서 그랬을까? 그믐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까? 별이 그렇게 또렷하게 빛나는 광경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오래전에 받아둔 천문학 잡지에 실린 겨울철 별자리표를 끄집어냈다.

창이 남으로 뚫려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내게 있어서만큼은 북두칠성보다도 더 확실한 별자리 지표였던 터여서 그랬는지, 오리온 자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베텔게우스, 리겔, 그리고 그 옆의 시리우스가 보였다. 어릴 적 읽은 "별을 훔친 마법사"라는 미국 동화가 생각났다. 오랜 동안의 연구 끝에 별을 훔쳐다가 병 안에 가두는 비법을 알아낸 그가 제일 먼저 건드린 것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 세 별이었다.

- 저게 무슨 별이에요?
- 시리우스에요.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
- 저건요?
- 어디 보자, 쌍둥이 자리네요. 보통은 잘 안 보이는데.
- 그럼 이건요?


서쪽 방향으로 눈을 돌리려던 찰나, 시리우스보다 더 밝은 빛이 내 이마를 스쳤다. 차라리 불꽃이었을까. 이마를 뚫고 들어와 온몸을 태운 한 줄기 불꽃. 그때, 아주 오래전 그때의, 그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처럼. "아무리 당시의 외국어 표기법을 감안한다 해도, '키쓰'는 시어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 아닌가?", "어떻게 키스가 날카로울 수가 있을까?", "날카로운 것은 첫 키스인가 아니면 추억인가?" 따위의 하찮은 문법적 의문을 단 한숨에 날려 버렸던. 키쓰가 날카로울 수 있음을, 아니, 날카로운 것이 진정한 "키쓰"임을 깨닫게 해줬던.

눈을 떠보니 그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오래전 그때처럼. 창문을 타고 지붕을 넘어서. 이렇듯 가뿐하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 6~7년이라는 시간도 사실은 이렇게 가뿐히 넘을 수 있는 것이었거늘, 왜 몇십만 광년이라는 시간과 거리를 지나서 예까지 온 별빛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렇지만 나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질문 보따리를 풀지 않았다. 언제 왔느냐고,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 "키쓰"가 무슨 의미였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결코. 이것으로 충분하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2005년 1월 5일, 미켈 앙주가 하녀방에서 쓴 글을
2011년 11월이 저무는 새벽, 빌라 뒤프렌느에서 옮겨 적다

—박쥐

책 안읽는 여자는 더 위험하다

blogin.com · 2011-11-24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읽어야 "나 책 좀 읽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될지?

책으로 둘러싸인 벽을 바라보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데리다를 생각한다. 벽이란 벽은 다 책으로 채워진 지 오래고 심지어 방문과 천장 사이의 한 뼘어치 벽면마저 책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걸 본 인터뷰어가 "이 책들 다 읽은 겁니까?" 하고 묻자 데리다는 아니라고 답하고는 잠시 뒤 웃으며 덧붙인다. "그래도 몇 권은 정말 제대로 읽었지요."

데리다가 세상을 뜬 지도 7년 (당시 부고 기사를 보며 대강이나마 채웠던  한글' target='_son'>http://ko.wikipedia.org/wiki/데리다>한글 위키의 데리다 항목 은 거의 그대로다. 저서 목록 부분이 보강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책들은 정신분석의인 그의 아내가 잘 간직하고 있겠지. 그래도 향후 책들의 행방이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

제목에서는 책 안 읽는 여자 운운해 놓고 본론은 데리다에 관한 사소한 일화로 채웠네. 사진은 또 푸앵카레 관련서들이고. 뭔가 데리디앙한 것 같긴 하다.

···
Encore un effort pour être derridien

' target='_son'>http://www.guggenheim.org/n ... arch=Anna%20Gaskell> Anna Gaskell (1969- )
UNTITLED #98 (A SHORT STORY OF HAPPENSTANCE), 2003
그림 출처는 ' target='_son'>http://internationalart.wad ... /catalogue/20/0024/> 여기   

이 역시 책 읽는 여인 그림은 아니지만, 마녀야말로 위험한 식자 여성의 전형, 아니 차라리 원형 아닌가. 개스캘의 "무제" 연작 중 마녀와 더불어 라이트모티프로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 앨리스는 '이' 세상에서는 그림도 없는 따분한 책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며 하품하는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의 논리와 규칙이 무효화된 다른 세상--이상한 나라에 가서는, 왕성한 호기심과 그칠 줄 모르는 모험심을 한껏 발휘하여 그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험 분자가 된다.

—박쥐

허튼 상상

blogin.com · 2011-09-23

2012년 12월 12일생의 아이를 낳는 상상. 121212처럼 뭔가 의미심장한--모종의 규칙성을 지닌-- 주민등록번호로 시작하는 생년월일은 인류가 예수의 추정된 탄생연도와 지구의 공전 및 자전 주기를 기준으로 연대를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고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변치 않는 한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므로. 그러려면 2월에는 임신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임신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논문은 당연히 그 전까지 끝나 있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야말로 이 해는 내 미천한 생애에서 기적의 해(annus mirabilis)이거나 적어도 완벽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푸앵카레 100주기를 맞아 그를 주제로 한 논문을 제출, 그에 관한 연구에 기여(!)하는 한편으로, 생물학적/인구학적 재생산에도 참여함으로써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다... 상상인데 뭔들 못하랴.

—박쥐

7월 31일

blogin.com · 2011-07-31

오늘은 당신의 생일

당신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져가지만
당신의 생일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처음 생일을 알려주셨을 때
"그럼 사자자리시겠네요" 하고 저는 말했지요
당신과 내가 같은 별자리라는 사소하디 사소한 사실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아차 싶기도 했습니다 혹시나 제 속마음을 들켰을까봐서요

이 얘길 전해들은 당신의 친구는 말했다지요
"Does she believe in horoscope?"
그 친구는 어쩌면 기막혀 하는 어조를 담았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전해주신 그 말이 제게는 참으로 경쾌하게 들렸습니다
덕분에 제 말이 숨겨둔 속마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한결 가볍고 산뜻해졌으니까요

얼마 전, 불현듯 이 일화가 생각났고,
며칠 후면 당신의 생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당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음을 상기했습니다

당신의 생일을 기억할 때마다 이 일화를 같이 떠올리는 건지,
아니면 이 일화 때문에 당신의 생일을 기억하게 된 건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자꾸만 희미해지는데
내 가슴에 오롯하니 박힌 당신의 생일은 점점 더 뚜렷해집니다

—박쥐

푸앵카레 데이... 기념 랩소디?

blogin.com · 2011-07-26

1.

오늘은 푸앵카레 데이였다. 잘 나가는 연구자들 중 상당수가 한자리에 모여 종일 푸앵카레에 대해 논한. 그중에는 마이클 프리드만같은 대가도 있었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마땅히 기억해야 할, 머잖아 아마도 기억하게 될, 포트투갈의 신진 학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명색이 푸앵카레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는 자로서, 그 자리를 빛내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그들이 내뿜는 열기에 가냘프고 미약하게나마 기운을 더하거나, 적어도 그 열기를 몸으로 느끼고 그것을 앞으로의 내 공부에 토양으로 삼았어야 했을 나는, 인터넷으로 런던의 호텔을 찾아 헤매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그러고도 아직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올해 회갑을 맞으실 엄마, 그리고 엄마와 동행해서 오실 이모를 위해, 딸이자 조카로서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 생각하며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논문 쓰는 딸내미한테 미안한 마음과 부담을 잔뜩 안고 계신 엄마에게,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싫은 소리 안 하고 또 섭섭하게 해 드리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었고. 뭐 그렇게 거창하게 도리나 의무를 운운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계획을 잘 세워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수합한 뒤 그 안에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터 내 요구 사항은 놀랍도록 까다로워졌고, 그러는 도중에 예약가능한 호텔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어만 갔으며, 그럴수록, 너무 비싸지도 않으면서 시설은 깔끔하고, 무엇보다 욕조가 갖추어져 있으며 아침 식사도 제공되고 시내 안전한 곳에 위치한 등등의 조건을 만족하는 이상적인 호텔을 찾으려는 희망은 무서운 집착으로 돌변했다. 내가 이렇게 하루를 소비했고, 그러고도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엄마와 이모는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2.

한동안 이 블로그를 등한시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일단 말을 시작하면 주로 1.과 유사한 이야기들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침울한 내용(내용이라 할 만한 게 있었다면!)과 자기 비하로 일관하면서 일말의 자기반성조차 없는,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모두 지치게 하는 페시미즘으로 가득한, 그리고 비문 아니면 추한 문장투성이의 줄글이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그런데 이제 와서 지금의 이 고백을 빙자한 작태는 무슨 의식인가? 평소 같으면 일기장에다가도 적지 않았을, 이런 날 것 그대로의 감정 토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밀한 일기를 쓸 때조차 솔직하지 않았다. 내 맘 아니면 머리 안을 맴도는 온갖 추한 생각들이 문자화되면서 구체화되거나 심지어 실체화될까봐 겁이 났다. 그렇게 엄격한 검열을 통과해서 기록된 것들조차 누군가에게 발각될까 두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것은 무슨 오만이며 용기인가?

3.

갑자기 1.이나 2. 같은 독설을 내뱉게 된 것은 페이스북에 대한 반향인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하다가 얼마 전부터 페이스북을 하게 되었는데, 최근 메일을 자주 주고받은 한 학부 친구는 페이스북 세상에서의 내가 메일 주고받는 나에 비해 명랑하고 발랄한 인상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일을 통해서는 그 친구와 논문, 지도 교수와의 관계, 진로, 연애 등등의 제법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눴으니까. 페이스북에도 그 친구를 포함, 다른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는 어쩐지 맑고 밝고 기분 좋고 가벼워야 할 것 같다. 물론 맑고 밝으면서 진지할 수 있고, 가볍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렇게 소통의 방식이 다양화되는 건 그 자체로 결코 나쁠 것 없고, 더구나 나 같은 분열증 환자에게는 다행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4.

한 이탈리아 작가의 희곡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히파티아는 이런 대사를 읊는다. 소통되지 않는 사유는 부패한다고. 처음에는 신피타고라스/신플라톤주의자였던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사이거나 아니면 기막힌 아이러니의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가끔 이 말이야말로 진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1.이나 2., 아니 3.은 물론이고 지금의 4.와 같이, 애당초 유통 기한을 넘겨 부패한 상태에 있는 사유라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 이렇게 수 개의 바이트로 체화(embody)되는 순간, 즉 언어화되는 순간, 그리하여 언젠가 다른 사유와 만나 교류를 시작하는 순간, 변모/태, 즉 다른 모습으로 화(metamorphosis)하리라. 지금 내가 여기에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미천하고 보잘것 없을지언정 머리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일체의 여과 없이 그대로 적어 내려가는 것은 모험심이자 실험 정신에서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는 변화에 대한 기대. 이전까지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 원동력이 되었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환기해 현재의 이 상태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변화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외우는 주문.

요컨대, 1.에서 4.까지의 모든 문장들(지금의 이 문장을 포함해서)의 의미치는 "수리수리 마수리"나 "아브라카브라"의 그것과 같다 (이는 정확히, 모든 기하학의 공리에 대해 참과 거짓을 논하는 게 넌센스라는 푸앵카레의 주장에 대해 러셀이 반박한 내용과 일치한다. 푸앵카레의 논지에 따르면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명제는 넌센스라는 점에서 "아브라카브라"와 같다는 것이 러셀의 반박 내용이었다. 푸앵카레는 이에 응답할 가치가 없다고 응수했다). 그 자신 의미를 갖지 않되, 그로부터 모든 새로운 의미들, 나아가 세계가 생성되게끔 하는...

이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께

가끔 들어올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주인인 제가 이렇게 방기해 놨음에도 조회수가 꾸준히 늘고 있어서 말이지요. 우연히 들어오신 분도 있겠지만, 절 잊지 않으시고 신경써주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생각할 때마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일분 일초를 아끼며 밤을 새가며 논문을 쓸 때도 있지만, 또 어쩔 때는 아무런 진척도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영화관에 앉아 있을 때도 있으니, 시간이 없어 블로깅을 못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사실 "논문 쓰느라 바쁘다"라는 것은 공식적인, 그러니까 사실(is)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당위(ought)에 대한 표현인 거고, 비공식적인, 그러니까 보다 진솔한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제 글이나 생각에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블로그와 멀어진 가장 큰 이유입니다. 가끔 강렬한 글쓰기 욕구를 느낄 때가 있긴 한데, 막상 펜을 들고 시작해면 얼마 가지 못해요. 그 칼보다 강하다는 펜이 제 손에서는 너무도 쉽게 힘을 잃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너진 기획들도 꽤 여럿이지요.

왜 책이나 영화도 예전보다 더 많이 봤으면 봤지 결코 덜 보지는 않는데 그에 대한 감응력은 한없이 무뎌지는 걸까요? 예전에는 뭘 잘 모르고 이런 저런 소리를 잘도 지껄였다면, 지금은 그때보다 많은 걸 알게 된 만큼 좀더 신중해졌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할 거구요. 그런데, 그런 한편으로, 머리 속에 경험이나 지식의 양이 축적되면 될수록 저는 겸손해지기보다는 소심해지고 둔해지는 데다가, 무엇보다 제 목소리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우리말로 생각하고 또 쓰는 (재활) 훈련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페이스북을 시작했지만, 길게 호흡하는 글은 가장 최근까지 제게 우리말 훈련의 장이 되어 주었던 이 공간에 계속해서 담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여러분께 계속 많은 성원을 부탁드...리지는 차마 못하겠습니다. 오시는 걸음걸음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는 고맙고 미안하겠지요. 그 걸음들이 헛되지 않도록 저 또한 제 걸음을 걸어가겠습니다.

—박쥐

이번에는 브로콜리너마저 풍

blogin.com · 2011-03-27



또는, 그들의 1집 수록곡 "말"에 대한 답가.

···
언제나와 같이 주의사항 : 사실, 브로콜리의 곡과는 별로 상관없고, 간혹 감성이나 아이디어에서 유사성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며, 역시 브로콜리와는 별개로, 과잉되고 혼란스러우며 정련되지 않은 심상들로 가득하여 읽기에 그다지 쾌적/유쾌하지 않을 수 있음.

왜 말들은 꽃처럼 피어나서는 가시가 되어 박힐까

무심코 흩뿌린 것도
고개 돌리면 쑥하니 자라 있고
베이면 제법 아프게 생겼고

딴에는 고르고 또 고르고
갈고 닦고 또 갈고 닦으며
때론 달래고 얼러 쓰다듬어도 주고
이 정도면 됐겠다 싶어 용기를 내려다가도
아니 아직 안돼, 조금만 더
망설이기를 수십 번

그러다 마침내
진심을 제법, 그러나 간절히 담아
고이 보낸 것들도 다시 돌이켜 들여다보면
어느새 강아지풀 솜털같은 것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바람 타고 날아가 닿는 순간에는
꼭 그렇게 생채기를 내고야 말더란 말이지

—박쥐

Une apparition

blogin.com · 2011-02-04

트뤼포의 [도둑맞은 키스]를 뒤늦게서야, 그것도 유튜브에서 봤다. 혹자는 내게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물이라 했는데, 글쎄,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나더러 굳이 이 영화를 어떤 특정한 장르로서 규정하고 또 그에 준한 평가 술어들을 부여하라 한다면... 무리를 무릅쓰고 "감성교육(éducation sentimentale)-연애입문(initiation d'amour)"이라는 범주를 끌어들이겠다 ("누벨바그"? 글쎄다). 소위 [로맨틱 코미디]를 헐리웃에서 제인 오스틴을 참조하고 소위 "여성적" 취향을 고려해서 그 문법을 만들고 바로 그럼으로써 그 "여성적 취향"을 재생산하는 규칙을 따르는 장르라 친다면, 이 영화는 [베르테르의 슬픔],  [골짜기의 백합], [감성교육]을 시조로 하는, 그러니까 주로 남성인 주인공이 성숙한 여인을 만나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인생을 배우는 성장담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도둑맞은 키스]를 포함, 상당수의 "두아넬 시리즈"가 이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트뤼포, 그의 페르소나인 앙투안 두아넬-장 피에르 레오(이 셋을 어찌 분리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레오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의 트리아드는 정점에 이른다. 특히 앙투안이 거울을 보며 처음에는 자신을 둘러싼 두 여인의 이름을, 그러다가 자신의 이름을 수차례 반복해서 부르는 장면. 처음에는 나직하던 목소리가 나중에 가서는 악에 받친, "외침"이 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여기에서 장-피에르 레오는 배우이자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 그가 배우다우면서도 가장 인간적으로 보인, 흔치 않은 경우였달까.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에센스, 즉 진수이자 정수이자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이것이 트뤼포가 의도한 바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본질이란 바로 파비안느-마담 모르소프-델핀 세리그(아, 이제부터 이 셋을 분리해서 말하기 힘들 것 같다)다.

두아넬은 그녀에 대해 "그녀는 한 명의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나타남'(une apparition)이다"고 말한다. 출현. 현현. 이것은 어쩌면 그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인 첫 만남의 순간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즉 나타나는 것은 어떤 하나의 존재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그 순간, 그녀를 포함해서 만물이 만들어내는 우주적 어울림의 상태(agencement !)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 순간에만 지속되고 곧 사라지는. [골짜기의 백합]에서의 유명한 첫만남 장면에서  "여왕처럼 가버리는" 마담 모르소프가 그렇고, 보들레르의 "지나가는 여인"이 그렇다.

그런데 델핀 세리그의 출현-출연에는 19세기 여인들의 '덧없는(éphémère)' 그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느니, 그것은 바로 그녀의 "존재감"이었다. 배우이자 여성으로서의 델핀 세리그에게서 나오는 존재감.

"당신은 내가 그저 한 명의 여자가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죠. 맞아요. 나는 특별해요. 모든 여자들은 특별해요."

이 대사를 델핀 세리그에게 맡긴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델핀은 참, 그냥 여배우로 남는 것만으로도 훌륭했을 텐데, 여성 운동까지 저렇게 적극적으로 하고, 참 대단해."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델핀 세리그에 대해 한 말이다. 그녀는 보부아르와 더불어 "347명의 창녀 선언"--프랑스의 여성 인사들이 본인의 낙태 경험을 밝히고 낙태 합법화를 촉구한 공동 성명서--에 동참했고, 보부아르를 기념한 여성 미디어 센터를 창립하는 등 아주 열렬하고 또 실천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여성주의자였다. 이런 그녀가, 순수하고 수줍고 앳된 앙투안 두아넬 앞에서, 그 첼로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저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라. 이 점에 있어서는 정말 트뤼포의 센스를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한 명의 여자가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무엇"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툭 하고 앞에 던져진. 그 어떤 말로도 규정되지 않는, 그래서 "특별한", "독보적인", "예외적인" 등의 수식어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러고서는 스쳐 지나가는. 그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오직 그럼으로써만, "영원"으로 남을.

more...

그녀는 내가 본 출연작들에서 정말 다 근사했다. 심지어 뷰뉴엘의 [은하수]에 단 몇 초 등장했을 때조차도. 그렇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질 때조차 여운을 진하게 남기고 주변의 모든 것을 잔잔하게 흔들어놓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말하길, 그녀가 올 때면 보지 않고도 한 50미터 앞에서부터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고. 전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그야말로 특별한 향수를 썼기에.

고혹적인 벨기에 뱀파이어 영화, [빨간 입술]에서는 또 어떤가. 저 사진만 봐도, 앞으로 그녀 이상의 바토리 공작 부인이 나올까 의심스러워질 것이다. 이런 B급 영화 세팅에서 이토록 우아한 결과물이 나온 것은 상당 부분 그녀의 덕이었다. 물론 연출도 나름 괜찮았지만 ([사이코]를 충실히 복습하는 듯한 샤워 시퀀스라든지). 이런 뱀파이어물이 또 나왔으면. 델핀 세리그는 비록 가고 없으나.

이 영화에서 그녀는 아주 인상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혹자는 내게 뱀파이어인데 죽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뱀파이어가 "실제"로 불사하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델핀 세리그이기 때문에. 그녀라면, 또 어느 순간, "나타날" 것 같다.

꽤 잘 만든 이 영화의 편집 축약본이 여기에 있다. 자동재생이니 주의하시라 :

http://www.youtube.com/watc ... youtube_gdata_player

—박쥐

이집트 소식을 라디오로 들으며

blogin.com · 2011-01-29

튀니지를 시작으로 해서 정말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적어도 "아랍 세계" 내에서? 현재 이집트에서는 벌써 몇 사람이 분신했고, 집회가 계속 이어지다가 오늘은 그 규모가 최대에 달한 상태라고 한다. 정부에서 시위의 파급을 저지하기 위해 며칠 째 전화와 인터넷을 끊어놓고 또 경찰은 진압의 강도를 점점 더 높이고 있는데도.

내 비록, 운동도 안 했고, 학부시절 그 흔했던 사회과학 학회 같은 것도 해본 적 없고, 그 이후로도 지금껏 정치에 무관심하게 지내왔지만, 그래도 "혁명"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는 걸 느낀다. 게다가, "민중"이란 말이 붙으면 더더욱. 동구권 몰락 이후 혁명이 실패한 데다가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해졌으며, "민중"이란 이름 하에 억압받는 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심지어 이뤄내기까지 하는 일은 그저 향수를 자극할 뿐이거나 너무도 요원해진 시대, "민중"의 아우라가 여전히, 아직도, 아니 한결 더 선연하고 강력한 어떤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저 두 나라의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21세기적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얼마 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가장 중요한 동기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사회+경제적이었다는 점. 무엇보다 고학력 청년들의 심각한 실업률이 가장 큰 문제**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즉 정치적 문제의식으로 발전한 경우.

그런데 이것이 결국 넓은 의미에서의 자유에 대한 요구였다면, 그 중에는 (신)자유주의적인 것도 포함돼 있지 않았을까, 만일 튀니지의 독재자 벤 알리가 박정희식 개발 독재에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등등의 생각을 혼자 해봤었는데... 역시 나이브한 생각일 뿐. 그들이 시장에서의 "자유" 증대가 곧 자국 경제의 성장 및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했을 리 만무하고, 70년대 한국과 지금의 튀니지 및 알제리의 상황은 달라도 한참 달라 비교가 불가능할 뿐더러 무의미한데, 이 차이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통신수단의 차이에 기반하는 바가 클 것 같다. 요즘 세상에서는 아무리 빅 브라더라 해도 그 많은 이동 통신 메세지-sms, twitter,...-들을 전부 감시하기란 불가능하겠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군대의 역할. 양쪽 나라 모두, 정권의 하수로 낙인찍인 경찰권력과 대조적으로 군부에 대한 민중들의 호감도가 높았다고 하니. 군부 세력이 독재 정권을 끌어내린 뒤 바로 권력을 민중에게 이양했다는, 모든 혁명 중 가장 평화적이었고, 그래서 가장 "시적"이었다는 포르투갈의 쿠데타 생각이 났다. 튀니지의 경우 군인의 역할이 그 정도로 컸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러한 경찰권력과 군대의 대조적인 면모는, 무수한 군부 쿠데타를 겪은 나라에서 자란 나로서는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시, 포르투갈의 경우 예외가 되겠지만, 정치, 경제, 역사 등의 고전적 팩터 만큼이나 시대의 차이에 기반하는 바가 없지 않겠다. 냉전 시대 이후, 내전을 겪거나 남북한처럼 "휴전" 상태거나 미국(!)이 아닌 나라들에서는, 군대가 갖는 권력이 상징적으로나 적어도 표면상으로 약화됐을 거고, 또 다른 한편으로 "통치성", 통치 권력의 성격이 과거에 비해 보다 구체적이고, "미시적"이며, "삶-정치"적인 것으로 변했고.***  

튀니지도 그렇고, 이집트 또한 앞으로 어찌될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저 두 나라 민중들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존경스럽다.

* ** ***


* 흔히 이슬람 또는 무슬림 국가로 치부돼서 나는 이들 국가도 중동만큼이나 정교가 통합돼 있거나 아니면 무슬림 세력이 판을 치는 나라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벤 알리는 종교의 자유도 억압했다고. 나 또한 이슬람=무슬림 독재=여성억압 을 한통속으로 몰아 버리는 이슬라모포비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여기에서 나는 "문제(problème)"를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들뢰즈가 쓰는 적극적인, 특이성(singularité)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려 한다. 해결(solution)을 기다리는, 따라서 해결된 어떤 안정적 상태에 대해 소극적이고 후차적인 개념이 아니라, 해결-해소 상태로 이행하기 위한, 모든 변화가능성의 조건 같은 것으로서.

들뢰즈, 사실 잘 모른다. 그래도 그가 로트만과 시몽동에게서 발견한 뒤 칸트의 이념에 적용한 이 문제 개념만큼은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

*** 푸코도 사실 잘 모른다. 특히 미시권력이니 비오폴리티크니 통치성(gouvermentalité) 등등의 후기 정치철학은 정말 모른다. 그렇지만 초기의  "인식론자(épistémologue)", 혹은 용감한 철학사가/사상사가/역사가 로서의 푸코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가로서의 그도.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