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품위(dignité)는 어디로 간 거니? 난 네가 선생들하고만 자는 줄 알았는데." 로우 예의 ‹러브 앤 브루즈 Love and Bruises ›에서 노동계급 출신 프랑스 남자와 사랑에 빠진 인텔리 여주인공에게 그녀와 같은 중국 국적의 옛 애인이 한 말. 이 말을 들으면서, 거 참, 요새 중국에서는 품위나 정조 등등에 관한 유교 관념이 그냥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재활용되고 있나 보군, 새롭네, 하고 생각했다.
이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막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신한, 용례들이 떠올랐는데, 하필 다 로메르 영화의 대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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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네게 충실했어. 내 침대에서 잔 건 오직 너 뿐이야. 그 사람하고는 호텔로 가곤 했거든."
-- ‹비행사의 아내 La femme de l'aviateur› 의 여주인공이 다른 사람(옛 애인)과의 관계를 추궁하는 현재
애인에게 한 말.
2.
"난 너랑 있을 땐 바람 피운다는 생각이 안 들어. 너랑은 브누아랑 하지 않았던 일을 하니까. 그런데 뤽상부르 공원에 오니까 불편해. 브누아랑 내가 사는 라탱 지구가 바로 옆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와 이 공원에 자주 왔고, 그런 만큼 지금 여기에서 너와는 그와 했던 걸 반복할 수밖에 없으니까. 너와 있는 날 보고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걸 브누아에게 들킬까봐 두렵다기 보다는, 내가 자기랑 했던 걸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하고 있다고, 내가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브누아가 여길 것이 싫어."
-- ‹ 파리의 랑데부 Rendez-vous de Paris › 중 두 번째 스케치, ‹공중 벤치의 연인› 중, 동거중인 애인(브누아)을 두고 남주인공과 몰래 사귀는 여주인공이 한 말. 나중에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브누아가 바람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네 품에 안길 줄 알았니? 나는 절망에 빠져 있는데 너는 네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너는 나한테 브누아의 교대자-대리자였어. 브누아가 없다면 너도 더 이상 필요 없어" 하고 말하며 떠난다.
3.
"내가 널 떠난 건 너를 위해서였어. 네게 돌아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생겨서 원래 사귀던 사람을 떠나게 되는 경우, 대부분은 예전의 연인을 그리워하게 마련이거든. 내가 레아를 떠난 뒤 바로 널 택했다면 아마 레아를 그리워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너를 일단 한 번 택한 뒤에, 다시 한 번 레아를 택했고, 그럼으로써 너를 그리움의 대상, 즉 돌아가야 할 대상인 '예전 연인'으로 만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네게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차라리 그냥, 단순하게, 레아랑 나를 저울 위에 놓고 비교해 보니 레아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하지 그러니?"
-- ‹친구의 친구 L'ami de mon amie› 중, 말 그대로 연인의 친구-친구의 연인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의 기로에 선 두 남녀 주인공의 대화
유교 관념이라고는 했지만, 품위, 존엄성 (dignitas)이나 정조, 충실 (fides) 같은 관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는 대부분 존중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일부일처제란 것이 가부장제(그리고 맑스에 따르면 성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형태인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는 대부분 남성에 의해 전유되어 상당히 기만적이고 여성억압적인 방식으로 작동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것이 사실. 그러다가 성해방 물결 이후에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됐다고는 하나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고, 이제는 그 물결마저 고리타분하거나 뻔한 것으로 치부되는 마당이니 더더욱 그러하고.
품위나 존엄성은 그렇다 치고, 배우자에의 충성도는 내 생각에 에로스 분배의 문제다. 나 한 사람한테 내가 가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에너지를 집중하기도 힘든 마당에, 그걸 나 아닌 다른 한 사람의 타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그걸 제 3자에게 또 나눈다? 에너지가 넘치는 경우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 속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 그런데 각 개인에게 배당된 에너지량이 같지 않고 또 서로 상대방에게 필요로 하고 요구할 수 있는 양 또한 다르니, 이것이 문제. 그래서 사람들은 규범이니 가치니 하는 걸 만들어 놓고 (니체), 그에 맞춰 규준을 세우고, 이에 따르는 일종의 "분배 법칙"을 준수하도록 만든 것일 게다. 이 모든 것이 애당초 고에너지 보유자에게 맞게 구성되었다는 것 (또 니체)이 또 문제지만 (니체는 문제라고 안 보겠지만). 그리고 사실 법칙 자체는 또 가치 기준과는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칸트-아감벤).
어쨌든, 이런 관념들이, 한갓 관념--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함축도 변하고 종전의 의미가 퇴색되었음에도 여전히 무시못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로메르 식으로 응용 변주해 볼 수도 있겠다. 신조어를 만들지 않는 이상 기존의 개념을 변환하거나 역전하는 것 또한 창조의 한 방법이겠기에. 물론 창조자가 아닌 수용자로서 이를 받아들이려면 상당한 사고의 전환과 열린 자세가 필요하겠다. 이를테면 집에서 안 자고 호텔에서 잔 걸 두고 충실이니 정절을 운운하는 걸 이해하려면 말이다.
어쨌든 결론은
사실 이는, 로메르 세계의 좀더 근본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는 문제다. 다소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에로스와 로고스의 갈등이 그것이다. 혹은 사랑이라는 감정-욕망의 언어화/지성화 작업? 플라톤의 ‹향연› 같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해변의 폴린›에서는 주인공들이 사랑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아리엘 동발이 "나는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싶어" 등등의 대사를 읊는).
부연하면 이렇다. 충동-욕망들은 보통 이성-로고스에 의해 부인되거나 억압된다. 그런데 로메르 영화, 특히 대부분이 남성 지식인인 Contes moraux 연작의 주인공들은, 로고스를, 자신들이 가진 가장 원색적이고 도착적인 욕망들을 아주 유려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아주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정당화할 기제로서 삼곤 한다. 사실 다른 것도 아닌 로고스가 다름 아닌 욕망에 의해 도구화되어 단순한 언어적 표현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발화자에 대한 모든 도덕적 판단은 지연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다. 욕망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들의 말은 수행적 효과를 전혀 지니지 않는,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텅 빈 기표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로메르는 욕망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즉 현실화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욕망이기를 그친다는 점.
‹클레르의 무릎›이 이를 잘 보여준다 (위 사진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로메르 추모 특집호 표지로, 바로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따온 것. 괜히 이 장면을 딴 게 아니다). 클레르라는 젊은 여성에 대한 남주인공의 욕망은 그녀의 무릎으로 대체/전화/수렴되고(순전하고 단순한 페티시), 바로 그 무릎으로 인해, 그러니까 그녀의 사랑을 얻음으로써가 아니라 무릎이라는 대리물을 쓰다듬으로써 해소된다. 이를 두고 그는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욕망의 경제는 종교적 감성과 지적이고 언어적인 지성 사이의 갈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 그는 늘, 독실한 가톨릭으로서 위에 열거한 고전적이고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당위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사명과, 바로 이 당위적 상황을 어떻게든 합리화, 적어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근성 사이의 불일치를 고민하고 둘 사이의 조화를 꿈꿨던 것 같다. 이 이상 역시 현실화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으나.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여전히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유다 : Rohmer forever...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