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소녀의 조용한 일갈


삼청동, 2019년 9월
iPhone 6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 블로그다. 블로그를 방치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언어, 그리고 사유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언어와 사유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호의존적임을.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사유란 자기모순이요 실현은 물론이고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할 말도 쓸 말도 없다는 건 생각이 없다는 것. 그러면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연구한다고 감히 나서 왔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른 이유는 아이폰 6로 바꾼 후 마땅한 블로깅 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번에 큰맘 먹고 3유로가 넘는 전용 앱을 마련했다 (올케 ㅎ에게 감사).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다른 이유나 핑계나 찾고 뭐고 할 것 없이 무조건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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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에 앞서, 혹은 그와 더불어, 읽자.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지만 뭐든 제대로 읽은지가 너무도 오래 되었다. 

위의 사진은 지난 9월의 볕 좋은 어느날, 엄마와 삼청동 수제비를 먹고 나오는 길에 찍은 것이다. 보고는 요전 블로그에서 성황리(?)에 진행하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콜렉션이 생각나는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위험한 여자”인지 너무도 오래. 다시 위험해지라, 소녀는 내게 그렇게 일갈하고 있었다.

호퍼를 논하면서

blogin.com · 2013-01-12

그가 그려낸 무수한 책읽는 여인의 초상을 언급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관련 주제에 관한 코너까지 마련되어 있는 이 공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지금껏 호퍼의 작품이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다음은 이번 회고전에서 본 작품 두 개.
먼저 Hotel Room. 1931년.  

그런데

호텔방의 그녀가 읽고 있는 것은 분명히 책이 아니다. 편지도 아니다. 편지라면 세로로 긴 종이였을 것이다. 난 전보라고 생각했다. 호텔방에 들어와 짐을 막 풀자마자 도착한 전보. 그런데 어느 평에서 보니 형태로 보았을 때 기차 시간표라고 한다. 그녀는 도착한 게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가 하면 다음 그림의 주인공은 떠나고 있거나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Compartment C, Car 193. 1938년.

—박쥐

Mary Cassatt au Louvre

blogin.com · 2012-08-29

... par Edgar Degas (ca. 1880)



난 이 버전이 더 좋더라.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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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페레(Féret)라는 프랑스 감독의 마담 솔라리오를 보고는 문득, 그때 그 시절, 벨에포크 생각이 나서.
그런데 실은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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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베르트 모리조, 정확하게는 마네가 1872년에 그린 모리조였다. 여배우가 모리조를 너무 닮아 있어서.

[원본 이미지 링크 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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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렁치렁한 갈색머리에, 새하얀 얼굴에, 깊은 눈동자에, 호리호리하면서도 적당히 육감적인 몸매에.. 그렇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벨에포크적인 외모라 생각했다. 부족한 연기력-거의 국어책 읽는 수준-을 보완한, 아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연기라고 봐도 좋았던, 배경과 역할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미모. "그녀는 그저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라는 문장에 완벽히 어울리는.

그런데, 아뿔싸, 감독의 딸래미였다지. 그래도, 최소한 외양 면에서는, 그다지 편파적인 선택은 아니었다고 해주고 싶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극중 마담 솔라리오는, 비록 친아비는 아니긴 하나, 어쨌든 의붓아버지인 사람의 폭력에 희생되고, 그로 인해 온갖 가족사적 개인사적 비극을 겪지 않는가. 게다가 친동생과... 코폴라 부녀는 건설적이기라도 하지, 이 부녀관계는 좀 걱정된다. 작가-여배우도 참 복잡한 관계도식이거늘.

—박쥐

오랜 만에, 책읽는 여인상

blogin.com · 2012-06-10


조엘 피터 위트킨의 2011년 作. 이 사람의 회고전이 파리 국립도서관의 리슐리외 분관에서 3월부터 열리고 있다. 7월까지. 국립도서관 소식지에 실린 이 작품이 맘에 꽤나 들어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 중. 그렇게 생각만 하다 놓친 전시가 올해 들어서만 벌써 몇 개째 되지만. 그리고 짧고 부족하게나마 감상도 써보리라. 하이브리드를 키워드로 해서. 이렇게 생각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않은 계획이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면 화질이 좀더 좋은 사본을 다시 올려 보리라던 약속은 그래도 어떻게 지켰네. 사진은 위트킨의 또 다른 전시가 열린 ' target='_son'>http://www.baudoin-lebon.co ... 7/joel-peter-witkin> 갈레리 보두앙 르봉 에서.

' target='_son'>http://estampe.hypotheses.org/387> 여기 에 가면 더 좋은 사진 열람 가능. 판화 전문 블로그라 그런지 웹에 올린 사진인데도 확실히 질이 다르다.

more...

이 작품의 제목은 Interrupted Reading. 1999년 작.

흠. 요샌 어째 노쇠한 육체에 자꾸 눈이 가고,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돈다.

문득 든 생각 (어휘 및 개념 사용에 문제가 있으나 양해를). 위트킨의 작품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한다 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사진이나 판화임을 감안하면 의외다. 그의 작업이 사진이든 판화든 단순히 "찍어내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판화는, 시대가 기술적 복제를 허용하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복제를 본성, 최소한 매체/매질 차원의 본질적 요소로 가져 오지 않았는가. 장르를 막론하고, 기술 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작품, 그러니까 "원본" 제작에 있어서 복제 기술에 대한 의존도마저도 나날이 높아져 가는 이 시대에, 오로지 하나의 판본으로만 존재하는 판화. 하이브리드보다 이 지점을 좀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듯.

—박쥐

앨리스는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blogin.com · 2011-12-03

앨리스 하니 최고의 앨리스 영화가 생각난다. 체코 감독 Jan Švankmajer 의 1989년작 ' target='_son'>http://www.imdb.fr/title/tt0095715/combined> [앨리스]. 원제는 Něco z Alenky, "something about Alice"라는 뜻이란다.

같은 나라 출신인 밀로스 포르만 (그는 [아마데우스]를 만든 작가이기도 하지만 배우로서의 경력도 있다. 올해 프랑스 감독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Les bien-aimés 에 출연했다. 그것도 카트린 드뇌브의 상대역으로!)이 뷰뉴엘과 디즈니를 합쳐놓은 결과물이라 했다는데, 과연 그렇다. 소녀 배우와 잠깐 나오는 동물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 (인물이라기보다는 피조물에 가깝겠지만)들을 갖가지 재료 (톱밥, 양말, 틀니, 플라스틱 안구...)를 합한 인형들로 만들어 스톱 모션으로 찍었다.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팀 버튼이 컴퓨터 그래픽의 향연에다가 심지어 3차원으로 만든 앨리스에 비교한다면 월등히 우위다. 컴퓨터를 이용한 흔적은 당연히 없고 오로지 사람의 손길에 의지했으니 기술적인 면에서는 다소 아날로그적인 [크리스마스의 악몽], 그보다는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에 가깝겠는데, 이 둘에 비해서도 단연 돋보인다. 장면 하나 하나가 기상천외하고 기발한데 그것들을 합친 전체 또한 훌륭하다 .

단지 기법면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루이스 캐롤의 원작에 더없이 충실하다. 버튼의 경우, 원작에서 느껴지는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페도필리의 암시? 난 잘 모르겠다만)를 이 시대에 맞게 변주, 앨리스를 사춘기에서 성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걸로 설정하고 그녀에게 어떤 주체적인 여성으로의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나름 근대적인 재해석을 제시하려 한 의도는 그럴 듯했으나, 무리가 따르고 어색하며 소화가 안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캐롤의 이상한 나라가 시대적 배경을 초월, 상상력이 자유롭게 유희하는 초현실적 시공간에 가깝다고 볼 때, 스반크마예의 작품은 바로 이 나라를 놀랍도록 잘 재현하고 있다. 바로 이 "초현실성"에 주목할 때, 포르만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어쩌면 당시 체코의 상황이 은연 중 반영되어 있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함에 양해를.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 전인가 후인가에 따라서도 얘기가 상당히 달라지리라).

또 다른 예 : 앨리스를 3인칭 시점의 화자로 설정하고 중간 중간 이야기를 진행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집어 넣은 내레이션 기법은 또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그보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바로 그 목소리를 보이스 오프로 넣지 않고 이야기하는 입을 클로즈업한 샷과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카메라가 유독 신체의 특정 부위를 주목하는 걸 볼 수 있는 뷰뉴엘의 [황금시대]나 [안달루시아의 개]가 떠오른다.이 또한 "소녀"의 "입"을 향한 노골적인 성적 암시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초현실주의의 계승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양자가 상호배타적인 것은 결코 아니고 오히려 상보적인 관계에 있지만 말이다.    

캐롤에 충실하다고는 했지만, 그저 충실하기만 한 해석에 머문 것은 아니다. 캐롤의 앨리스가 상당 부분 언어의 논리적(통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측면에 기대어 있다면, 스반크마예의 앨리스는 이미지가 작용하는 고유한 방식에 집중한다. 이 이미지들은, 캐롤이 만든 그 수많은 언어적 유희까지 대체하면서, 원작을 읽으면서 연상하게 되는 이미지들(상당 부분 원작의 삽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마저도 뛰어 넘는다.

사진 출처는 ' target='_son'>http://videodromodvd.blogsp ... /2010/12/alice.html> 여기. 단 한 번의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건질 수 있는 다른 훌륭한 샷도 많지만 책 읽는 앨리스가 포함된 이걸로 선정. 카드 나라의 왕정 재판에서 피고석에 앉은 모습이다. 앨리스는 무엇을 읽고 있을까?

···
(언제나처럼 유튜브에서) 맛보기, 그리고 앨리스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에 대한 답


헉, 심지어 완본으로 올라와 있네. 그것도 영어 더빙판으로.

http://www.youtube.com/v/iu ... fr_FR>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http://www.youtube.com/v/iu ... M?version=3&hl=fr_FR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0" height="315"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

재판 장면은 1:20 가량부터 나온다. 저 책은 집사 토끼가 앨리스에게 읽고 외우라며 건넨 책.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다 들어선 곳은 피고석. 하트 여왕은 앨리스에게 타르트를 훔쳐 먹은 죄를 물어 참수형을 내린다. 앨리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옆에서 왕이 그래도 법치주의에 입각해서 제대로 판결을 내리자고 설득한다. 그리고 저 파란 표지의 책(이라기보다는 공책) 중 한 부분을 펴주며 소리내어 읽으라고 한다.

거기에는 "나는 내 잘못을 시인하며 이에 사과한다"고 적혀 있다. 앨리스가 이를 소리내어 읽자 왕은 사과의 말을 참작하여 처벌을 감하자 여왕을 설득한다. 이에 앨리스는 다시 잘못을 부인한다. 그러자 여왕은 기다렸다는 듯 참수형을 내리고, 왕은 할 수 없다는 듯 여왕의 판결을 반복한다. 집행관인 토끼가 가위를 들고 형을 집행하려 하자 앨리스는 "안돼!"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런데 흔들리는 고개는 앨리스에서 토끼로 오버랩되고, 이는 토끼에서 다시 다른 등장인물들로 차례로 이어진다. 그러다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오, 이것은, 다소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아닌가. 그러나 앨리스는 여기에서 요제프 K.가 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법의 본질--텅 빈 형식--을 꿰뚫고 그것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가지고 놀기.  

—박쥐

책 안읽는 여자는 더 위험하다

blogin.com · 2011-11-24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읽어야 "나 책 좀 읽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될지?

책으로 둘러싸인 벽을 바라보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데리다를 생각한다. 벽이란 벽은 다 책으로 채워진 지 오래고 심지어 방문과 천장 사이의 한 뼘어치 벽면마저 책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걸 본 인터뷰어가 "이 책들 다 읽은 겁니까?" 하고 묻자 데리다는 아니라고 답하고는 잠시 뒤 웃으며 덧붙인다. "그래도 몇 권은 정말 제대로 읽었지요."

데리다가 세상을 뜬 지도 7년 (당시 부고 기사를 보며 대강이나마 채웠던  한글' target='_son'>http://ko.wikipedia.org/wiki/데리다>한글 위키의 데리다 항목 은 거의 그대로다. 저서 목록 부분이 보강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책들은 정신분석의인 그의 아내가 잘 간직하고 있겠지. 그래도 향후 책들의 행방이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

제목에서는 책 안 읽는 여자 운운해 놓고 본론은 데리다에 관한 사소한 일화로 채웠네. 사진은 또 푸앵카레 관련서들이고. 뭔가 데리디앙한 것 같긴 하다.

···
Encore un effort pour être derridien

' target='_son'>http://www.guggenheim.org/n ... arch=Anna%20Gaskell> Anna Gaskell (1969- )
UNTITLED #98 (A SHORT STORY OF HAPPENSTANCE), 2003
그림 출처는 ' target='_son'>http://internationalart.wad ... /catalogue/20/0024/> 여기   

이 역시 책 읽는 여인 그림은 아니지만, 마녀야말로 위험한 식자 여성의 전형, 아니 차라리 원형 아닌가. 개스캘의 "무제" 연작 중 마녀와 더불어 라이트모티프로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마찬가지. 앨리스는 '이' 세상에서는 그림도 없는 따분한 책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며 하품하는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의 논리와 규칙이 무효화된 다른 세상--이상한 나라에 가서는, 왕성한 호기심과 그칠 줄 모르는 모험심을 한껏 발휘하여 그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험 분자가 된다.

—박쥐

책을 찢어 종이배를 만드는 거인 소녀

blogin.com · 2010-08-03



퐁피두 센터의 드림랜드 전에서 보고 온, ' target='_son'>http://www.juliafullerton-batten.com/> Julia Fullerton-Batten 의 틴에이지 스토리즈 연작 중 하나. 거인 소녀가 책을 찢어 종이배를 만들고 있다. 옆 어딘가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소인국 주민도 있다. 소녀가 들고 있는 책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닐까 하고 자세히 보니 다른 책이었다.

신디 셔먼 식의 "극적"인 연출과 소녀에 대한/소녀에 의한 판타지가 결합하니 저렇게 환상적인 풍경이. 앨리스를 연상한 게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잠시 앨리스가 입었던 옷이 빨간색 아니었나 하는 착각을 했을 정도. 유난히 저 또래 소녀들 이야기를 좋아한다던 하품 생각이 났다.

—박쥐

히파티아

blogin.com · 2010-01-18

'책읽는 여자'들을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사실 요즘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지냈다), 최근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 target='_son'>http://www.agorathemovie.com/> 아고라 (Agora) 를 보고 다시 생각이 났다.

영화는 세 가지 시점으로 전개된다. 먼저 히파티아의 몸종이자 기독교로 개종한 데이버스의 시점. 데이버스에게 있어 히파티아는 주인이자 우상이자 스승이자 연인이자 이교도로 그려진다. 전혀 "모호"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랄까? 따라서 맘놓고 거리를 둘 수 있는 타자, 일종의 타자의 원형 같은.

알렉산드리아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갈등을 서술하는, 일종의 역사가적 관점. 일종의 "로마제국흥망사"를 기술하는 역사가에게, 히파티아는, 초토화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희생된 그리스적 이성을 상징한다. 좀더 시사적으로는 종교적 극단주의 및 독단론이 얼마나 반이성적이며 위험한 이데올로기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교훈을 던져주는 인물이다. 이는, 히파티아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한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취한 입장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는, 위의 두 시점을 초월하는, 우주적이며 신적이며 전지적인 시점. 영화의 처음과 끝은 우주에서 지구, 다시 지구에서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파티아의 학당 등으로 좁혀지는 샷--내가 혼자 멋대로 "조나단 리빙스턴 샷"이라 부르는. 구글맵을 연상하면 되겠다--이 등장한다. 이 샷을 역사적인 배경이나 사실--"히파티아가 죽은지 1200년 후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궤도가 (히파티아가 직관했던 바대로) 타원임을 밝혀냈다"--이 설명된다. 이로써 히파티아가 얼마나 시대의 광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그만큼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는지가 강조된다.  

나는 이 셋 중 어디에도 공감하기 힘들었다. 첫번째는 진부하고, 두번째는 설득력이 부족하며, 세번째는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감독이 히파티아의 내면을 파고듦으로써 그녀를 이해시키겠다는, 그리고 스스로 이해하겠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은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파티아같은 신비는 곡해하고 왜곡하는 것보다는 그냥 신비인 채로 두는 편이 나으니까.

more...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어떤 천문학사가가 장대한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외형에 인물에 대한 지나친 미화 혹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 등등을 지적한 걸 본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주인공 히파티아가 지구중심설이 아닌 지전설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이 '사실'과 상대성원리가 연결돼 있음을 코페르니쿠스에 앞서 간파하고 이에 대한 갈릴레오의 논증을 이미 확립했던 것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지전설은 천동설과 더불어 이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천체의 운동에 대한 하나의 가설로 인정되어 왔다. 영화에도 "그리스의 코페르니쿠스"라고도 불리는 아리스타코스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천동설이 코페르니쿠스, 아니 심지어 갈릴레오의 시대까지 그토록 패권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지전설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경험적 사실을 통해 뒷받침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갈릴레오는 이 사실을 상대성원리로 설명한다. 등속으로 움직이는 배 위에서 나비는 어떻게 움직일까? 어항 속 물고기는? 나비와 물고기가 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것들의 속도는 배의 속도를 더한 만큼 빨라질까? 뭍에서 보면 그렇겠지만, 선상의 관찰자에게 물고기와 나비는 배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갈릴레오는 지구인들이 지구의 운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배 위에 올라탄 선원이 배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설명했다. 정지해 있거나 등속으로 움직이는 관성계 내에서 운동은 같은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배 위의 돛대에서 공을 수직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공이 낙하하는 시간동안 배는 그만큼 이동했을 것이므로 공의 낙하 지점이 돛대으로부터 배가 이동한 거리만큼 떨어진 위치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비슷한 종류의 흔한 오류로 다음과 같은 추론이 있다 : 지구는 서에서 동으로 돌므로,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는 경우, 이 비행기는 반대 방향으로 같은 시간동안 날아간 다른 비행기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배 위의 공과 선체가 모두 같은 속력으로 움직이면서 하나의 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지구와 비행기도 그러하다. 이때 공이나 비행기는 마치 배와 지구가 멈춰있는 것처럼 운동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오류추리"가 갖는 설득력은 굉장한 것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전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으로 제시되곤 했다. 그러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전설이 재조명되면서, 특히 갈릴레오에 대한 교황청의 재판 덕에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지구의 운동"을 "실험적"으로 증명할 방법들이 고안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16~17세기에 유행한 돛대 "실험"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히파티아가 이미 이 "실험"을 고안했고 또 실제로 시행한 것처럼 그리고 있다. 뿐만인가. 히파티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거친 일련의 추론의 과정은 1200~1300년 후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등이 몇 세대에 걸쳐 전개한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공심원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를 들면 수성 및 금성의 역행 같은 이상 현상들을 "구원"하기 위해 태양중심설을 채택했는데, 여기에 갈릴레오는 지구의 운동이 경험되지 않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상대성 원리를 덧붙였으며,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수정 및 보완,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보였다. 여기에서 케플러는, 영화에서 히파티아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즉 원은 타원의 특수한 한 예에 불과하다는 것.  

히파티아같은 천재라면 이 모든 추론을 혼자서 해낼 수 있지 않았겠냐고? 특히 돛대 위에서 물체를 낙하시키는 일이야 히파티아나 아니 그 이전의 누구라도 할 수 있었을 일 아니냐고?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가능케끔 할 수 있는 과학사적 맥락이다. 4세기를 산, 그것도 신플라톤주의자이자 피타고라스주의자였던 그녀가, 코페르니쿠스보다 무려 1000년이나 앞서 이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보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과거의 인물이 살았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관점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시선은 당대의 학적 맥락과 과학사적 전개를 무시하고 사후에 "진리"로 판명된 바에 그녀의 사유를 무리하게 끼워맞춘, 휘그적(whiggish) 해석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쩌면 내가 정통 사관에 너무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가 헤게모니를 획득하면서 중세의 이른바 "암흑"으로 접어들지 않았더라면 16~17세기 과학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걸린 1000년이라는 시간이 어느 정도 단축되었을 수도 있었을 일. 당시 로마가 그리스 문명이나 비기독교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특히 히파티아가 산 알렉산드리아가 당대 최고의 문화적이고 학문적인 중심지였음을 고려한다면, 영화가 상정하고 있는 그녀의 놀라운 과학적 성취도 또한 그렇게 과장된 것만은 아니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박쥐

마리아

blogin.com · 2009-12-15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마리아의 존재는 내게 늘 의문의 대상이었다. 그에 반해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나의 같은 대상을 일컫는 세 가지 다른 이름이라 받아들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체? 그건 그저 상징일 뿐이다. 그게 다른 불필요한 가설을 만들지 않고 저 "신비"를 이해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히 유명론의 "칼날"을 들이대어 재단하기에는 마리아의 존재론적 위치는 꽤나 복잡미묘하다. "동정녀"가 뭘 뜻하는지 모르던 시절에야 "동정녀=성녀"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었다 (뭐 아주 틀린 건 아니겠다만). 그리고 노년의 사라에게 아이를 점지할 능력 정도는 당연히 갖추고 있는 신이 마리아에게 아이를 잉태케 하는 것 쯤이야 별 일도 아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노릇이다. 그러나 생명 탄생의 신비/비밀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이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를 "동정녀에게 잉태되어 나시"게 함으로써 상식과 과학 법칙으로부터 벗어난 무리한 교리를 만들어야 했는가? 

인간으로서의 속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도록 하기 위해서? 신과 인간의 결합에서 나온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다. 신과 인간의 결합에서 나온 인물들은 

—박쥐

키제트

blogin.com · 2008-09-20

뜻하지 않게 스캐너가 생긴 기념으로...



올리려 했으나,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구글링 검색 결과 나온 그림으로 대신해서 올린다.

검색 결과, 이 그림이 낭트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타마라 드 렘피카가 자신의 딸 키제트를 꽤 많이 그렸다는 사실도. 원래 그림이 내가 가진 정사각형 모양의 엽서와는 달리 길쭉한 직사각형의 판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 그림을 보면 정말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 꼬마 여자애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제목이 "핑크빛의 키제트"인데, 그림에서 핑크빛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원작에서는, 아니 좀 더 그럴듯한 복제판에서는 키제트의 옷이 분홍색을 띠고 있을지도). 작가가 이 색조를 즐겨 썼던 것 같긴 하나...(그렇지만 그녀는 더 밝은 그림들도 많이 그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책읽는 딸래미를 이토록 어둡게 그렸단 말인가.) 원경을 보면 더 암울해진다. 모나리자의 뒤태를 장식했던, 평화로운 목가 혹은 시골 풍경이 산업화된 도시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저 꼬마 여자애가 감싸는 게 아니라 압도하고 있다. 역시 책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낭트

낭트에 발길을 디딘 것은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7년 전의 일.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한 화랑에서 자신이 그린 거라며 건넨 엽서 하나 뿐. 덕분에, 처음에는 분명 조용하고 깨끗하며 어느 정도 포근하기까지 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건만, 지금은 뭔가 뿌옇고 아련한 이미지만 남아 있다. 안개에 싸인 도시에 대한 안개에 싸인 기억.

그러고 보니 작년에 본 에마뉴엘 무레의 영화 "제발 키스 한번만 해주세요 (Un baiser, s'il vous plaît)"에서 낭트가 등장했었다. 거기에서 업무차 낭트에 가게 된 여자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근사한 한 그 지역 남성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키스 한 번만 하면 안되냐고 묻는 남자에게 그녀는, 바로 그 단 한번의 키스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친구가 겪은 비극 하나를 길게 들려준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와 작별의 키스를 나누게 된다.

영화를 볼 땐 그녀가 남편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그녀의 정조 관념 때문이라기보다는, 배경인 낭트라는 도시가 사람 하나 없고, 자못 경건해 보이며, 도대체 우환이라곤 겪어보지 않은 듯한 탓도 있을 거라고 추측하면서. 그 어떤 종류의 모험(aventure)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도시.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작별의 키스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영화가 단지 침묵하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사람은 때로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가. 그곳이 안개에 싸여 있다면 더더욱 그럴 테다.

—박쥐

21세기의 읽는 여자?

blogin.com · 2007-07-09


푸훗.

퐁피두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던 중에 찍혔다. 하얀 사과가 눈에 띄어서 찍고 싶어졌단다. 머리를 앞으로 내려뜨려 달라는 둥 시선을 컴퓨터 화면에 맞추라는 둥 주문이 꽤 많았다.

어쨌든 맘에 든다. 역시 가릴수록 나은 걸까.

작가의 블로그

http://lookingrestraint.blogspot.com/

—박쥐

책읽는 여자들과 남자들로 가득한 이곳

blogin.com · 2006-10-23

보부르에서. 그러나 언제 뎅겅 하고 잘려나갈지 모르는 관계로 길게는 못 쓰겠다. 

케르테츠를 알게 된 것은 SY 언니로부터 스물 아홉 번째 생일 선물로 사진집을 받으면서였다. 후에 나는 그가 '독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래는 이 사진집의 표지에 실린 사진을 올리고 싶었으나, 올리기에 마땅한 판본을 구하지 못한 관계로, 이걸로 대신한다.

—박쥐

그림 그리는 여자가 그린 책읽는 여자

blogin.com · 2006-07-29


베르트 모리조의 1869-70년작. 남쪽 로데브라는 도시에서 그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얘길 듣고는 가고 싶어 달아오른 몸을 달래고 있는 중.

—박쥐

책읽는 익명의 중세 여인

blogin.com · 2006-07-29


2001년 루아르 지방의 한 고성에서 본 그림이다. 보고는 홀딱 반해서 사가지고 온 엽서를 찍은 건데, 화질이나 구도가 좋지 않아도 양해하시길. 원래 남의 사진기 가지고 사진을 찍는 게 남의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지 않은가.

—박쥐

그리고 위험한 여자는 숭고하다

blogin.com · 2006-05-21



로르 아들러(와 스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플라마리옹, 2006). 어쩌면 나는 이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선수를 뺏긴 기분이랄까. 내가 언젠가, 기회와 능력만 허락된다면, 써보고 싶었던 종류의 책 중 하나니까. 그렇지만 막상 책이 나오고, 그 책을 손에 넣고 나니, 마치 내가 낸 것인양 뿌듯하다. 앞질러 가면서 "용용 죽겠지?" 하다가 이내 다시 내 뒤로 돌아와서 힘내라며 등을 두들기고 있지 않은가. 내 작은 "책읽는 여자 컬렉션"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 얄밉게 구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사실은 속깊고 든든한 동지(들) 덕분이다.

책읽는 여자는 아름답다. 그리고 위험한 여자는 숭고하다.

—박쥐

Liseuse 5

blogin.com · 2005-03-03

Jean Hélion, Lecture pour la fin des choses, 1979
Galerie' target='_son'>http://www.artnet.com/galer ... trigano.html>Galerie Patrice Trigano 홈페이지 에서 가져오다.

퐁피두에서 열린 장 엘리옹의 회고전을 보고 맘에 든 나머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갤러리를 찾아가 발견. 나의 "책 읽는 여인의 초상 콜렉션"에 합류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도다.

참고로 나는 이 사람의 이른바 구상 시기 작품들--엘리옹은 초기(1930년대)에는 추상 미술의 선두 대열에 섰다가 점차 구상/순수 회화로 돌아선, 그러니까 현대 미술사의 흐름에 역행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이 참 좋았다. 심지어 여성의 성기를 의도적으로 형상화한 것임에 분명한, 그래서 평범한 여성 관객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도 여성의 성기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작가의 호박 페티쉬마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물론, "그렇다면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호박만큼이나 줄기차게 등장하는 바게트는 남근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그것마저도 사랑하겠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없지만. 나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에이,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너무 재미가 없어지잖아." 

—박쥐

Liseuse 4

blogin.com · 2004-07-25

Pablo Picasso, 1920
Oil on canvas, 1,02 m x 1,66 m
Centre Pompidou,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 "독서녀"들을 그린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 target='_son'>http://www.boekgrrls.nl>http://www.boekgrrls.nl 내의 사이트를 보려면 이곳을' target='_son'>http://www.boekgrrls.nl/BgD ... tm>이곳을 클릭~!

—박쥐

Liseuse 3

blogin.com · 2004-07-25

Camille Corot, 1845-1850
Oil on canvas. 42.5 x 32.5 cm
E. G. Buhrle Collection, Zurich

—박쥐

Liseuse 2

blogin.com · 2004-07-25

Jean-Honoré' target='_son'>http://www.nga.gov/cgi-bin/ ... 850>Jean-Honoré Fragonard, 1776
oil on canvas, 81.1 x 64.8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박쥐

Liseuse 1

blogin.com · 2004-07-25

Johannes Vermeer, 1657
Oil on canvas, 83 x 64.5 cm
Dresden, Staatliche Kunstsammlungen,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