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부재 증명과 존재 이유





Clinamen v.9
Céleste Boursier-Mougenot, 2023, Mixed materials, 70 cm × 17 m,
Production supported by the Asia Culture Center


이 블로그의 리뉴얼과 블로그인(bloggin.com) 시절 블로그의 복원은 오래된 숙원 사업이었다.  클로드 덕분에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 이를 실현하게끔 명령어 구문을 짜는 일은 물론 그 전에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까지도. 사실 이조차 정확치는 않다. '원하는 바'란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고 대개 모르고 시작했다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나중에서야 비로소 구축되게 마련. 처음에 막연하게 그리고 있었던 그 무엇인가란 아마도 이상에 가까웠겠으나 결과는 그보다는 비루한 그렇지만 어디까지나실존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현실, 이상과 현실의 접점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생성)인공지능 그리고/또는 거대언어모델에 의존하지 않고서 이렇게 자동기술/의식의 흐름만으로 한 문단을 써내려간 것, 실로 오랜만이다. 여기까지 쓰니 또 말이, 글이, 줄글이 끊긴다. 툭. 그리고 침묵. 마치 침묵으로 일관한 2년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듯이. 엄마가 가끔 쓰는 표현대로 "벙어리 말문 트이듯" 봇물이 터질 줄 알았는데. 눈이 트인 심봉사에게는 잠 자는 시간도 아까웠을 텐데. 이 대목에서 몰리뉴 문제를 떠올리고 몰리뉴의 철자법을 환기하고 관련한 논설을 이어갈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관련해서 몇 줄 아니 몇 자라도 쓸 것 같으면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직접 확인해야 하나 몸도 마음도 이에 따르지 않는다는 생각에, 접는다. 동시에 떠오르는 무수하고 다종다양한 생각들. 글쓰기는 이 공간적 사유의 습성을 그나마 어르고 달래서 --마치 데미우르고스가 형상을 수용하도록 코라-질료를 설득하듯-- 시간과 논리의 순서에 맞도록 정돈하는 거의 유일한 방책이었다. 이를 게을리했으니 사유가 정체한 것도 당연하다. 정체가 계속되는 동안 퇴보한 것도 당연하고. 

그러고 보니 수년 전, 아마도. 수십 년 전... 또 하나의 기억이 팝업창처럼 떠올랐지만 이를 줄글로 펼칠 생각을 하니 또 지난하고 아득해질 것 같아 관둔다. 그렇지만 문자가 모여서 문장이, 문장이 모여서 문단이 기계가 아닌 방식으로 "생성"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으니 (과장을 보태면) 감개무량하다. "기계가 아닌 방식"? 그것이 "자동적" 혹은 "자율적"인 방식, 심지어 "기계적"인 방식이 아니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내가 이런 방식의 "자동기술"이나 번역을 좋아했던 것도 결국은 바로 그러한 "기계적"인 면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측면을 그 누구 아니 그 무엇보다 뛰어나게 수행하는 기계가 득세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배하게 될 세상이 오고야 말았으니. 불과 몇 년 사이에. 3년 전만 해도 바로 이곳에서 바드를 시연한 결과를 옮기며 갸웃했었는데 이제는 일상의 가장 소소하고 내밀한 고민까지도 제미나이와 나누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이야기도 너무 진부해져 버렸다.

사유가 부재했던 지난 2년. 이곳의 공백은 그 부재를 증명한다. 이곳 뿐이랴. 이력서 또한 공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기간에, 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여러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다. 그 거대한 사건들 사이를 비집고 솟아났던 사소한 순간들도. 눈이 시린 푸른 하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바위틈 사이에 피어난 들꽃, 반 년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꿈에서나 이룰 사랑이나 전생의 인연의 환생인 듯 주위를 맴도는 나비...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그 찰나의, 그렇지만 찰나이기에 지고에 이를 수 있는, 그런 행복감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이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 순간과 감정을 나눌 만한 재주가 나에게는 없는데, 있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차피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끝나 있을 것이 인생인데, 하고 이내 체념하곤 했던 것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이 공백 또는 진공에 존재를 부여했던 것은 그것을 원자들이 운동할, 원자들의 운동을 가능케 할 조건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실로 부재는 역으로 존재의 이유 따라서 필연성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여 일어나라(탈리다 쿰)"(마르코 5:41)! 그대가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Before)... 뼈 아픈 후회(After) : 히스테리의 승화(?)를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들었던 "철학연습"이란 이름의 철학과 전공수업. 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수업 중 하나. 요새도 수업 준비하면서 혹은 도중에도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이 수업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그런데 오늘의 마들렌느는 당시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동학의 발제문. 이면지 활용을 위해 보관해 둔 모양이다. 황지우의 시가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국문학도가 썼나 보다. IMF 직후 대학가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뒤숭숭하던 시절, 그러나 그 수업에서는 모두가 참 순수하고 진지했다. 그런데 마들렌느가 또 다른 기억을 환기했으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잘,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  

그때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시의 모든 구절을 매일, 아니 매 순간, 사는 날이 오리란 것을. 아니 에르노가 "단순한 열정"에서 묘사한 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실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그리하여 인생의 한때를 바로 그 기다리는 일에 고스란히 바치고 그로 인해 하마터면 인생을 망칠 뻔하게 되리란 것을.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이 "내 가슴에 쿵쿵거"리다 못해 나의 모든 의식을 지배하던 그때. 문 앞에 네가 와 있는 상상이 너무도 쉽게 실제로 네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변해버리던 그때.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던 지각의 이론의존/적재성이 철저하고 처절한 경험으로 입증되던 그때. 

그 모든 것들로 멀어진 지금. 같은 발제문에 인용된 황지우의 또 다른 시가 눈에 들어온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니 부어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놓아 주는 바람뿐 ("뼈아픈 후회" 전문)

치기 어리고 날이 서 있으나 그런만큼 제법 날카로운, 청춘만이 느끼고 쓸 수 있는 감성. 그러고 보니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네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과 대조/대구를 이룬다. 한쪽은 나를 사랑하느라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쪽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결과는 같다. 결국 같은 얘기. 

이제사 드는 의문. 승화와 히스테리의 차이는 원인은 같은데 (실연, 억압된 충동, 실현되지 못한 욕망 등등) 결과가 다르다는 데 있는가? 다음 학기 수업을 이렇게 시작해 볼까?

수업을 이렇게 사적인 결산(règlement de compte)으로 수단화하면 안 되겠으나... 안될 것은 또 뭔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푸코가 스스로 광기의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쓴 것이 바로 "광기의 역사"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사실을 시인 김선우의 글에서 처음 접한 후 아직까지 "팩트체크"를 못 했으나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수업에서 다루려는 저자가 푸코를 따르고자 한 것이라면, 이런 사적인 관심과 동기가 학문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온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한편으로 이 역시 일종의 "승화"이랄 수도? 히스테리의, 히스테리에 의한, 히스테리를 위한 승화... 이 모든 것이 광기의 발로가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