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Before)... 뼈 아픈 후회(After) : 히스테리의 승화(?)를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들었던 "철학연습"이란 이름의 철학과 전공수업. 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수업 중 하나. 요새도 수업 준비하면서 혹은 도중에도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이 수업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그런데 오늘의 마들렌느는 당시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동학의 발제문. 이면지 활용을 위해 보관해 둔 모양이다. 황지우의 시가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국문학도가 썼나 보다. IMF 직후 대학가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뒤숭숭하던 시절, 그러나 그 수업에서는 모두가 참 순수하고 진지했다. 그런데 마들렌느가 또 다른 기억을 환기했으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잘,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  

그때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시의 모든 구절을 매일, 아니 매 순간, 사는 날이 오리란 것을. 아니 에르노가 "단순한 열정"에서 묘사한 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실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그리하여 인생의 한때를 바로 그 기다리는 일에 고스란히 바치고 그로 인해 하마터면 인생을 망칠 뻔하게 되리란 것을.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이 "내 가슴에 쿵쿵거"리다 못해 나의 모든 의식을 지배하던 그때. 문 앞에 네가 와 있는 상상이 너무도 쉽게 실제로 네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변해버리던 그때.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던 지각의 이론의존/적재성이 철저하고 처절한 경험으로 입증되던 그때. 

그 모든 것들로 멀어진 지금. 같은 발제문에 인용된 황지우의 또 다른 시가 눈에 들어온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니 부어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놓아 주는 바람뿐 ("뼈아픈 후회" 전문)

치기 어리고 날이 서 있으나 그런만큼 제법 날카로운, 청춘만이 느끼고 쓸 수 있는 감성. 그러고 보니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네라"(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과 대조/대구를 이룬다. 한쪽은 나를 사랑하느라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쪽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결과는 같다. 결국 같은 얘기. 

이제사 드는 의문. 승화와 히스테리의 차이는 원인은 같은데 (실연, 억압된 충동, 실현되지 못한 욕망 등등) 결과가 다르다는 데 있는가? 다음 학기 수업을 이렇게 시작해 볼까?

수업을 이렇게 사적인 결산(règlement de compte)으로 수단화하면 안 되겠으나... 안될 것은 또 뭔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푸코가 스스로 광기의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쓴 것이 바로 "광기의 역사"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사실을 시인 김선우의 글에서 처음 접한 후 아직까지 "팩트체크"를 못 했으나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수업에서 다루려는 저자가 푸코를 따르고자 한 것이라면, 이런 사적인 관심과 동기가 학문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온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한편으로 이 역시 일종의 "승화"이랄 수도? 히스테리의, 히스테리에 의한, 히스테리를 위한 승화... 이 모든 것이 광기의 발로가 아니라면!

가족이 나오는 꿈

꽃, 나비, 나무, 하늘, 바람, 별, 강물, 물고기, 강아지 등등으로 가득한 친환경적이고 도교적인 세상. 그러나 그 세상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이 있으니. 그 순간, 꽃은 숨겨두었던 가시를, 나비는 날개의 상처를 드러내고, 나무는 누군가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화살이 되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강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그 바닥 위에서 물고기는 힘겹게 파닥대고, 강아지는 어둠을 향해 컹컹 짖는다. 루시드폴 노래를 듣다 보면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는 미선이 시절부터 이미  "송연" 이나 "치질" 등 가시가 돋힌 가사들을 써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독집부터는 서정의 정서가 지배적. "사람이었네"와 앨범 <레미제라블>의 몇몇 노래들에서는 세상의 불의에 선연히 분노하는 것 같긴 했으나, 그 표현이 절대로 직접적인 일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은유의 차원에 머물 뿐이었다. 현실에의 "참여"라 해도 지극히 은밀하고 소극적이이어서, 세상을 향해 열린 창 없이 오직 자기 안에 표현된 세상을 노래하는 모나드 같은 느낌. 즉 근본적으로 내향적(introspectif)이란 얘기고 그 노래도 결국은 내성(introspectoin)이라는 얘기다. 부적응자이거나 자폐아이거나 자급자족형이어서라기보다는,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대는 태생적 이방인이어서라는 것이, 내 자신의 경우를 투사한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해석.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으로만 보자면 앞의 세 병리와 다르지는 않겠으나.

이러한 내향적 인간 특유의 현실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는 것과 처음에 말한 그림자는 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두움이다. 평소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숨겨 놓지만 가끔씩 드러나고 마는 어둠의 그림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은 그 어둠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다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꽃은 말이 없다> 앨범에 실린 "가족"이라는 노래는 그가 만든 중 최고로 어두운 것 같다. 듣다 보면 지난 세기 초, 민중의 빈곤하고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른바 사실주의 가요(chanson réaliste) 생각이 난다.

다락방에 모여 사는 가족이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무너지지 말자고 소리친다. 아이도 소리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엄마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듬성듬성 붙어 있는 천정의 벌레들/금세 울음이라도 터질 듯한 얼굴들"와 같은 묘사는 무척 사실적이고 섬뜩하다. 조르주 브라상스의 "기도(La prière)"나, 좀더 멀게는 토머스 하디의 <주드>에서 "because we are too many"라는 말을 남겨 놓고 동생들을 죽이고 스스로도 목을 맨 어린 소년이 생각나는 대목.

그 중에서도 특히 "가족들이 나오는 꿈은 늘 불안하지/온통 걱정스런 눈빛만 가득하니까"라는 구절은 들을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진다. 이 노래를 들은 뒤로 실제로 꿈에 가족이 나오면 불안해지기도 했다.

바로 그 가족이 나오는 꿈을 며칠 전에 꾸었다. 야학 모임에 가는 꿈. 개교 몇 주년이거나 기타 기념 행사였을 것이다. 할머니도 오셨다.

이게 왜 가족이 나오는 꿈이고 또 "야학"과 "할머니"가 무슨 연고인가 할 수 있겠는데,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보통은 상관 관계가 있기 힘들겠고, 하다못해 자유연상으로도 연결이 자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내 개인사의 맥락에서는 그러하니, 나의 친할머니가 바로 서울의 한 야학에서 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계셨고, 나는 바로 그 야학에서 교사로 활동을 했던 것이다.

다시 꿈에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내게 "이 분이 당신의 할머니되시는 분이다"라고 소개해주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분명 보통은 아닌 상황. 그러나 이 또한 그럴 법도 한 것이, 나는 친손녀라 해도 못 뵌지 5년이 넘은 데 반해, 야학의 제자들과 선생들은 가끔 모여서 찾아뵙고, 또 최근 "폐교" 행사에서는 다들 모였다고도 하니. 그런데 내 눈앞의 할머니는 몹시 앳된 얼굴과 표정이었다. 그저 아흔을 넘기고도 정정함을 유지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소녀였다. 그것도 사춘기 소녀. 수줍어하면서도 또 눈빛은, 걱정스럽기커녕, 천진난만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 와중에 생각했다. 다들 모이는 거면 그도 올까? 그랬더니 실제로 멀리서 걸어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교수가 됐다더니, 회색 정장을 한 말쑥한 차림. 가는 눈. 내리깐 시선.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숨에 알아 보았다. 할머니는 알아뵙지 못했는데. 그도 나를 보았는지, 알아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알아채기 전에 꿈에서 깼다.

두 사람 모두 내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인물. 최근에는 할머니 생각이 부쩍 늘었다. 어느새 아흔을 훌쩍 넘기셨는데, 빨리 가서 뵈어야 하는데. 문제의 "그"는 계속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불현듯 생각이 났다. 궁금하기도 하고 또 그리워지기도,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족(과 한때 최소한 가족만큼, 아니 가족보다 훨씬, 친밀했던, 일종의 유사가족)이 나오는 이 꿈에서 모종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걱정스런 눈빛이 가득해서가 아닌, 그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눈빛이 걱정스러우면 차라리 좋겠다. 눈빛이 아예 사라지거나, 아니면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을 것, 그것이야말로 더 걱정되고 또 걱정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래 전 두고 온, 너무 오래 비워둔 내 자리, 지나온 시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환기.

꿈의 해석

보통 chauffe-plat 라 불리는 작고 둥글고 납작한 초. 실제로 상 위에서 음식을 살짝 데우는 데에 쓰이지만, 나는 주로 향유를 피울 때 쓴다. 겨울이라 환기가 녹록치 않은 요새 특히 자주 켜곤 했다. 

꿈에서 같은 초를 켰다. 그것도 침대 위에서. 그것도 침대 위에다가. 게다가 이불이 초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언제라도, 당장이라도 불이 옮겨붙을 수 있는 상황. 아니나 다를까. 초 하나가 이불에 옮겨 붙었다. 다행히 이 불은 다른 이불(불-이불!)로 덮어 끌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처음에 켤 때부터 불안했던 마음이 극도로 초조해져 다른 초도 서둘러 입김으로 끄기 시작했다. 그런데 꺼도 꺼도 켜진 초가 계속 나왔다. 언제 켰고 또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직은 드문 드문 보이는 정도지만 그렇게 언제까지고 계속 나올 것 같았다. 입김이 모자라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른 초 하나가 이불로 타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불도 요행히 끄긴 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끌 수 있을까.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까. 

깨고 나서 생각했다. 현 상황에 대한 암시인가? 아니면 예지몽인가? 초를 하나둘 씩 끄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불길이 번지고 정말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 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만이라도 보지하는 편이 옳지 않겠는가. 분명한 것은 초를 켠, 그리하여 상황을 자초한 장본인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초 한두 개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랬다면 얼른 훅 하고 불어서 끄면 됐을 테니까. 그러나 나도 모르는 새 초는 계속해서 켜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입김만으로는 모자랄 뿐 아니라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위험 속에 구원은 자라나니"라는 싯구로 자조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하고 위태로운 상황.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떨치고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일까? 왜 그러지 못하는가? 왜 이불 밖으로 나가질 못하는가? 이제는 이불 속이 아늑하기만 한 것도 아닌데. 이불 밖 세상, 그 세상에서 헐벗은 나를 마주하고 헐벗은 그대로의 나를 내보일 것이 두려워서?

그리고 나서 다시 생각했다. 완전히 상반된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약간의 낙관주의와 희망적 사고를 첨가하면. 희망의 불씨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 꺼져 들었나 싶으면 또 어디선가 나타나 이불 밑 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는 촛불. 그 불에 타들어가도 좋겠다. 그리하여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실은 기만이요 허상에 지나지 않을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