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chauffe-plat 라 불리는 작고 둥글고 납작한 초. 실제로 상 위에서 음식을 살짝 데우는 데에 쓰이지만, 나는 주로 향유를 피울 때 쓴다. 겨울이라 환기가 녹록치 않은 요새 특히 자주 켜곤 했다.
꿈에서 같은 초를 켰다. 그것도 침대 위에서. 그것도 침대 위에다가. 게다가 이불이 초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언제라도, 당장이라도 불이 옮겨붙을 수 있는 상황. 아니나 다를까. 초 하나가 이불에 옮겨 붙었다. 다행히 이 불은 다른 이불(불-이불!)로 덮어 끌 수 있었다. 그렇잖아도 처음에 켤 때부터 불안했던 마음이 극도로 초조해져 다른 초도 서둘러 입김으로 끄기 시작했다. 그런데 꺼도 꺼도 켜진 초가 계속 나왔다. 언제 켰고 또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직은 드문 드문 보이는 정도지만 그렇게 언제까지고 계속 나올 것 같았다. 입김이 모자라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른 초 하나가 이불로 타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불도 요행히 끄긴 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끌 수 있을까.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까.
깨고 나서 생각했다. 현 상황에 대한 암시인가? 아니면 예지몽인가? 초를 하나둘 씩 끄는 것도 한계가 있다. 불길이 번지고 정말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 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만이라도 보지하는 편이 옳지 않겠는가. 분명한 것은 초를 켠, 그리하여 상황을 자초한 장본인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초 한두 개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랬다면 얼른 훅 하고 불어서 끄면 됐을 테니까. 그러나 나도 모르는 새 초는 계속해서 켜지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입김만으로는 모자랄 뿐 아니라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위험 속에 구원은 자라나니"라는 싯구로 자조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하고 위태로운 상황.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떨치고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일까? 왜 그러지 못하는가? 왜 이불 밖으로 나가질 못하는가? 이제는 이불 속이 아늑하기만 한 것도 아닌데. 이불 밖 세상, 그 세상에서 헐벗은 나를 마주하고 헐벗은 그대로의 나를 내보일 것이 두려워서?
그리고 나서 다시 생각했다. 완전히 상반된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약간의 낙관주의와 희망적 사고를 첨가하면. 희망의 불씨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 꺼져 들었나 싶으면 또 어디선가 나타나 이불 밑 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히는 촛불. 그 불에 타들어가도 좋겠다. 그리하여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면. 실은 기만이요 허상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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