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일 월요일

일요 아침 운동 단상... 그리고 4개월 후

드디어 가을.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10월 초에 이런 따뜻한 햇살이라니 아무리 인디언 섬머라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몇 시간 만에 찬바람이 불고 밤새 비가 내리더니, 어느새 거리에는 낙엽이 가득하고 청소부들은 그 낙엽을 치우느라 바쁘다. 여름을 헛되이 보낸 나 같은 자에게는 만끽할 자격이 없지만, 그렇다고 단념하기에는, 오, 너무도 아름다운, 파리의 가을.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 만큼 또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름다움과 무관하게 해가 갈수록 그 잔인함은 더해 가지만, 그래도 어쩌랴. 가로수가 물들고 거리가 낙엽으로 덮이기만 하면 나는 또 사정없이 약해져 "아, 이 광경을 보려고 나는 논문을 또 한 해 미루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포르트 오퇴이를 지나 모네의 마르모탕이 있는 포르트 뮤에트-파시까지. 목표물은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 있는 독퇴르 블랑슈 가. 코르뷔지에도 코르뷔지에지만, 얼마전에 본 아르테의 TV 영화 <독퇴르 블랑슈의 정신병동>  때문에.  19세기 중반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고급 요양원으로, 네르발에서부터 고흐에 이르는 유명인사들이 거쳐간 걸로 유명한 블랑슈의 이 "메종", 실제로 파시에 위치해 있었다길래, 그쪽에 가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집을 나와 가을이 거리에 내려앉고 공기에 가득찬 걸 보고는 선택에 다시 한 번 만족...
여기까지 적어 놓고 뒤를 마저 잇지 못한 채로 자그마치 네 달을 넘겼다. 도대체 이런 경우가 한둘이더냐. 아무리 많은, 아니 대부분의, 아니 모든, 글들이 본질적으로 미완성(inachevé)에 열린 작품(oeuvre ouverte)이며 미래에야 도래할 책(livre à venir)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이게 핑계가 될 리 만무하잖은가. 도대체 언제까지 제목에 서두만 채워진 글을, 그런 글만, 수없이 양산할 셈인가. 텍스트와 글쓰기의 본질 운운은 해석학자나 해체론자들이 할 일이고, 저자로서의 네 의무는 네 차원에서는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끝을 보는 것이다. 화룡점정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용두사미라도 좋다. 차라리 그게 낫다. 어떻게든 끝을 맺었다는 얘기고,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최소한 겸손함과 양심과 용기와 결단력 면에서는 저자를 인정할 만하단 얘기다.

이 와중에 나는 또 <영화의 역사들>의 고다르를 생각한다. 1초 안에 일어난 일을 쓰는 데에는 1시간이 걸리고, 1분의 일에는 하루를 꼬박 소일해도 모자라고, 하루 일어난 일에는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로 역사 서술은 불가능하다. 정확히 이런 급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이런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렇다. 나의 가장 중요한 장애물이 바로 그것이다.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글에 담고, 담으면서 담는 그 순간에 느끼고 생각한 바를 덧붙이고, 하다 보면 도대체 어디에서 멈출 수가 없게 된다. 일종의 자발적이자 의도치 않은 "감성교육"에 힘입어 감성이 예민해졌을 수는 있으나,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무엇보다 논문 쓰는 데에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나, 그게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가 하면, 그럴 수도 있겠는데, 이는 오직 생각의 많고 적음이 깊고 얕음과 구분된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러하다. 생각이 양적으로 증가했다면 그 상당수는 말하자면 가용하지 않은, 즉 쓸데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이들은 대부분 "인식론적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들. 그러나 고다르, 나아가 역사 서술을 내 경우와 동급으로 취급하기에 나는, 오, 아직은, 아니 이제는 더 이상,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 내 경우는 대상과 주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내 주제를, 내 깜냥을 인정하기가 나는 아직까지도 두려운 것이다.
"너 걔한테 무슨 감정 있니? 걔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니? 왜 걔한테 그렇게 못되게 구니?"
"걘 너무 오만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논문도 못 끝내고 말이야... 혹시 끝냈니?"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리고 논문 못 끝내는 게 죄니?"
"죄는 아니지. 끝낼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그렇지만 걔는 그게 아냐. 오만해서 그래. 망칠까봐 두려운 거야. 그거야말로 바보같은 거야."
-- 아르노 데플레솅 <나는 어떻게 싸웠는가... (나의 성생활)&gt Comment je me suis disputé... (ma vie sexuelle); 중 한 대화.
이 영화의 촬영 당시 데플레솅과 공동으로 각본을 쓴 에마뉴엘 부르디외(피에르의 아들)은 한창 박사논문을 마무리하던 중이었는데, 그가 핵상 앞에 붙여 놓은 메모판을 본 데플레솅이 이를 찍어다가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문제의 "걔"--주인공 폴과 그 옆에 어지러이 펼쳐져 있는 각종 자료들, 그리고 메모판을 차례로 비춘다. 그 중 한 메모 :



라이프니츠 : 확률은 가능성의 크기다. 라플라스. 해킹, <확(률의) 탄(생)> 125쪽. 셋 다 내 논문에도 등장하는 이름들.

결국 이 영화는 폴이 논문을 끝내는 걸로 끝을 맺는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 서문에서 철학책은 공상과학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혀 모르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기.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뭔가 할 말이 생기는 것이다. 자못 글이란 지식의 첩점, 지와 무지를 가르는 그 한계 지점에서, 그 지점을 오가면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글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지를 채운다는 것은 글을 내일로 미루거나 아니 쓰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흔히들 말하는 죽음이나 침묵보다 오히려 무지와의 저 위태한 관계야말로 글쓰기에는 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런 자세로 들뢰즈는 과학을 건드렸노라 말한다. 그 방식이 과학적이진 않았음을 스스로 충분히 느끼면서도.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한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얼마나 지쳤으면,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러우면, 얼마나 할 말을 못 찾겠으면. 그러면서도 혹시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고심하며 거르고 거른 끝에 남은 격려의 문구가 그것이겠다. 내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난 시간들이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을지. 알량한 고집으로 무지를 덮는 일에 급급하느라 셈하지 못한 그 날들. 이젠 정말 끝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지난 토요일에 네 달 전의 바로 그 코스를 다시 밟았다. 독퇴르 블랑슈가에 있는 코르뷔지에 재단으로 향했다. 당시, 그리고 그 후로도 얼마 간, 공사중이었던 코르뷔지에 재단은 이제 재개장을 한 상태였다. 그 동안 닫혀있던 빌라의 철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서 투명한 유리벽으로 비친 내부를 잠깐 올려다 보았다. 부자 혹은 사제 지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방문하고 나왔는지 건물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에, 조만간에, 부모님과 와서 제대로 보리라 생각했다.

나와서 프티트 생튀르로 들어갔다. 파리 남단의 동서부를 연결하던 기찻길을 고쳐서 만든 산책로다. 그 기찻길 이름을 그대로 따 "작은 허리띠"라는 이 예쁜 이름으로 불린다. 해마다 이맘때면 아직 한겨울임에도 나무향이 유난히 진하다. 연말연시를 보내고 사람들이 내다놓은 크리스마스 나무 가지들을 길에다 뿌려놓는 까닭이다.

이 숲길을 지나 마르모탕 쪽에 이르니,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커다란 가로수 사이로 유난히 가늘고 쭉 뻗은 인도. 왜 예전엔 보지 못했을까. 몇 번이나 와본 길임에도. 접근각을 조금 달리 해설까. 그저 프레임의 방향을 아주 조금 틀었을 뿐인데, 이렇게 조금만 달리 해도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구나. 세상이 다 새롭게 보이는구나. 그래서 힘껏 뛰었다. 새 세상에서. 새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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