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안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다. 다들 가방도 없이 간편한 차림. 가족 단위도 많다. 사람이 많을 거라, 더구나 레퓌블리크 역을 지나는 이 9호선은 특히 붐빌거라, 예상은 했지만, 서쪽 끝 종점에 가까운 역에서 타서 안전한 자리를 확보하면 동서를 횡단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리라는 판단은 착오였다. 일종의 도착적 효과랄까. 모두가 나와 똑같은 과정의 추론을 거쳐 똑같은 결론에 이르고 이에 따라 행동한 결과, 각각의 행동이 합해진 전체가 개별 수준과는 반대의 결과를 낳은 경우.
얼마 후 도착한 차는 이미 절반이 승객들로 들어차 있다. 포기할까 하다 겨우 들어선다. 다음 역부터는 출구가 반대편에서 열리므로 일단 안심. 그렇게 해서 원하던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몸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아까 사든 <리베라시옹>을 펼쳐서, 아니 접은 상태에서 보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 와중에도 바로 옆자리 승객은 문고판 책을 꺼내들어 읽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주로 동행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가끔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트기도 한다. 옆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며 실실 웃다가 말한다. "시덥잖은 농담으로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여자분, 쾌활한 말투로 괜찮다고 말하고 이어 묻는다. "그런데 툴루즈에서 왔다고요? 오직 집회 때문에? 거기에서도 하지 않나요?" "그렇죠. 그런데 아무래도 파리만큼의 열기는 없어서요."
평소 같으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느라 놓쳤을 이런 대화들. 귀를 열어두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반대편을 향한다. 무척 한산하다. 어쩌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관광객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은 안도와 경이가 뒤섞인 표정으로 이쪽 지하철 안을 바라본다. 9호선은 관광 중심지를 고루 지나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평소에는 관광객 비율이 높은 편. 그런 9호선이 이렇게 "현지인"들로 가득한 광경은 나로서도 실로 경이롭다. 평소에 이렇게 붐비는 지하철을 탔더라면 반대편의 한가한 풍경에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며 하필 이 시간대에 지하철을 타기로 결심한 스스로를 탓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쪽에 탄 사실이 뿌듯하다. 그리고 이쪽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 저들이 안타깝다. 저들은 꼭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차를 타야 했을까. 각자 일정이 있겠지만, 이런 이례적인, 어쩌면 역사에 남을지도 모를 이 순간, 하다못해 구경거리로서도 유례가 없을 이 사건을 눈앞에서 놓치다니, 안타까운 일이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내 위치를 생각한다. 이 간신한 자리야말로 그 위치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요 은유다.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관광객과 이쪽에서 현지인들, 딱 그 사이의 경계인이자 이방인. 비록 최소한 물리적으로는 분명히 이쪽에 속해 있긴 해도, 기껏해야 그 경계에 머물 뿐이고, 경계에 머문다고 해봤자 시선은 여전히 제한돼 있고, 그저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들과 이래저래 조합해서 그저 추측하는 정도가 전부. 그렇게 해서 구축한 관점을 통해 창문 바깥 저쪽을 바라본다.
바로 눈앞에 창문이 펼쳐져 있고, 창문 밖 저쪽은 분명히 보일만한 거리임에도,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저쪽이야말로 내가 "원래" 속해 있었던, 지금도 속해 있어야 할, 아마도 앞으로도 속해 있을 곳. 그러나 이제는 한없이 멀고 낯설게만 보인다. 이쪽에서 인생의 1/3 가량을 이쪽에서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네들의 세계관과 삶의 양식 같은 것들을 완전히 체화하고 내면화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동경과 모방의 시기는 지났다. 이쪽에 동화되려는 의지보다는 그보다는 계속해서 나를 내 출신/근본(오리진)인 저쪽으로 귀환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심이 컸다. 거기에서 전제되는 선입견, 그에 의존해서 추론을 전개하는 반사적이고 관성적 태도가 싫었다. 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출신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한 인격체이거나 궁극적으로는 세계시민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쪽에서는 이쪽대로의, 저쪽에서는 저쪽대로의, 이중소외. 그러면서 창없는 모나드에 가까워졌다. 이쪽에 서서 저쪽을 바라본다 해봤자 결국에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자신의 이미지의 투영에 불과한.
역을 하나둘 지날 때마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사람들이 내리지는 않고 계속 타기만 하는 까닭이다. 독서광 승객도 어느새 책을 내려놓았다. 현재 9호선 승차율이 급격히 상승한 상태이니 승차시 불편하더라도 양해해 달라는 운전사의 안내 방송. 정차할 때마다 입구쪽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실례합니다. 좀 들어갑시다." "자리 없어요. 다음 차 타세요. 몇 분 뒤면 올 겁니다.") 운전사는 또 안내 방송을 하고 입구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운전사의 방송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파리 중심가로 접근하면서부터는 지하철공사 직원이 나와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생라자르를 지나 그랑 불르바르에 가까워지자 다시 방송이 나온다. 레퓌블리크부터 나시옹까지는 안전상의 이유로 역이 폐쇄되었으니 그 전에 내려야 하고, 집회에 가려면 본느누벨 역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하면 된단다. 내 머릿속 지도상으로 본느누벨에서 레퓌블리크까지는 거리가 상당하지만, "좋은 소식"이라는 예쁜 이름 때문에 좋아하는 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여, 내렸으면 싶지만, 반대편 출구까지 돌파구를 만들어서 나갈 자신이 없다. 그런데 마침 이웃 아주머니 중 한 분이 동행에게 숨통을 트기 위해서라도 이번에 내리자는 제안을 해서 옳다구나 한다. 이들이 터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되겠다.
내리니 역사도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지상에 닿는 순간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두근두근하다. 가로수가 보이고, 가로수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이어서, 아, 사람들로 가득 들어찬 거리. 그랑 불르바르, 그 큰 차도를 사람들이 뒤덮고 있다. 그들을 따라 나도 거리로 들어선다. 이제서야 <리베라시옹>을 펼친다. 그리고 1면을 앞세우고 걷기 시작한다. 나도야 샤를리.
2015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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