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마땅히 그것에 도달해야 한다

blogin.com · 2013-02-23

“너는 마땅히 그것에 도달해야 한다(Du muβes erreichen)!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지금 이 현상 유지는 아닌 좀더 다른 것, 좀더 생동하는,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사색하는 것, 좀더 철학하는 것, 근원(Ursprung)의 향수를 가진 생활 태도가 필요하다. 환경이나, 모두 다 어느 퍼센트까지는 구실이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자기의 최대 한도를 다해서 살 수 있는 것이니까.... 어제 야스퍼스의 책을 조금 읽고 감동했다. 철학하는 생활 태도는 명상과 초월성의 욕망과 전달(Kommunikation)에 의해서 우리의 나날과 연결되고 그 태도가 매일매일 반복됨으로써 하나의 생활 분위기(Lebensstimmung)를 낳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이 결국 반복의 의욕과 그것을 견디는 것일 줄이야! 정말로 권태가 들어올 여지없이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기는 혼자서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필연적으로 전달이 요청되는 것이다....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의해서 24시간 통일된, 정돈된 생활을 갖는 것, 근면할 것, 그것 밖에 내가 할 최고의 것은 결국 없는 것이다. 반복(Wiederholung), 똑같은 고통스러운 작은 일, 일, 일의 똑같은 반복을 견디자. 아니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자. 거기에 네가 있다!”

전혜린, 1961. 1. 25 일기 중에서



한 철학과 교수님이 유학 시절 헤겔 정신현상학의 한 구절을 읽고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제 아무리 미천해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모두 절대정신의 품안(!)에 있는 한 고귀하며, 전체의 조화를 위해서는 빠져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존재 필연성을 갖는다는 것이 요지였던 걸로 기억된다. 선생님은 그 구절 하나로 당신의 존재이유와 자존감을 되찾았고, 이후 수업 시간에 교수한테 당당히 "it doesn't make any sense!"하며 받아칠 정도가 되었다 하셨었다. 이후 자존감 상실에 허덕일 때면 그 일화가 생각나곤 했고, 그럴 때마다 해당 구절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직 못 찾았다.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아주 시적이고 헤겔 특유의 과장법과 장엄미가 생생히 느껴지는 구절이었는데.

굳이 정신현상학이 아니더라도, 그때 선생님이 되찾은 삶의 의지나, 전혜린이 야스퍼스를 읽으며 받았던 감동, 그런 것들을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래저래 찾아다녔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방법이 틀렸었음을 깨닫는다. 사실은, 다른 데에서 변화와 전환의 계기를 찾을 것이 아니라, 반복을 바라고(volere/vouloir) 또 견뎌야(pati/pâtir) 했던 것이다. 진정한 반복,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담보하고 변화와 생성의 가능성의 장으로서의 반복. 게다가 소통! 반복과 소통, 이 두 가지야말로 요즘의 내게 결핍된 그 무엇 아니더냐. 결국은 성실과 진지의 문제다. 한때는, 밤새워 공부한 뒤 아침을 맞으며, 전혜린이 "머리가 하얗게 새는 듯"이라 묘사했던 느낌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생각하곤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부끄럽고 부끄럽다. 그러고 보니 부끄러움이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던 시절도 있었다.

—박쥐

Un essai bergsonien

blogin.com · 2013-02-12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 이맘때. 나는 아마 입학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랑 새 옷을 사러 다니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지나 3월이면, '국어와 작문'이라는 이름의 수업 시간을 맞아, 자전적 에세이를 써보라는 강사의 주문에, "애비는 건축쟁이었다. 여름이 되어도 바다에 가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글을 쓰게 될 것이었다.

인용이나 모방을 일삼는 글쓰기 습관을 갖게 된 것은,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듯싶은데, 입시를 준비한답시고 논술 훈련을 받으면서는 그나마 있었던 창조력마저 감퇴하고 말았으니. 그럼에도,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하긴 했어도, 강사로부터 "이공계생치고는 제법"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바로 그 에세이가, 오늘, 문득, 생각난 것은...

실은 Bergsonisme 을 읽던 중이었다. 들뢰즈가 쓰고 김재인이 번역한 『베르그송주의』를 읽은 것은 아마 학부 4학년, 철학과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기억에 남은 것이라곤, 왜 '베르크손'이 아닌 '베르그송'으로 표기해야 했는지를 유려한 문장으로 역설한 역자 서문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 원본인 Bergsonisme 을 읽다 보니 다른 기억들도 떠올랐다. 기억이라기보다 추억이라 해야겠다, 베르그손에 충실하려면. 아니, 추억-이미지라 해야 할까. 그냥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이미지라 해야겠다, 진정으로 베르그손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러니까 내게 떠오른 것은 베르그손의 중심 개념인 "기억"과 "지속"에 대해 당시 내가 가졌던 이미지였다. 기억이 이런 저런 몸/물질 사이에서 자유로이 유동하면서 지속하는 이미지, 『베르그송주의』는 내게 이런 이미지로 남았었다. 그리고 그 인상을 소재로 시랍시고 몇 자 끄적였던 기억. "들뢰즈가 쓰고 김재인이 번역한 『베르그송주의』를 읽는다/들뢰즈가 쓰고 김재인이 번역한 『베르그송주의』를 읽는 나는..." 운운. 아직 있을까? 다시 보면 재미있을 것도 같은데. 텍스트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로 점철된 실패작, 나아가 흉작(!)일 것임이 틀림없지만.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까 싶다만. 그때는 그래도 "시적 허용"이라는 핑계를 내세울 용기는 있었는데.

『베르그송주의』의 기억에서 대학 새내기 시절의 에세이에 대한 기억으로. 둘 사이에 모종의 연관 관계를 확립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그저 의식에 떠오르는대로. 의식까지 안 떠오르고 무의식에 머물러도 좋다. 지금 나는 의식의 흐름 기법 혹은 무의식의 자동기술을 실험하는 중이다. 감히 이런 기법들을 들먹이는 걸 보면 무지한 자 특유의 용기는 여전한 듯.

문제의 에세이는 "애비는 건축쟁이었다. 여름이 되어도 바다에 가지 않았다"라며 미당의 시구를 패러디 하는 것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바람'을 다른 무언가로 바꿨음이 분명한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간에 "나는 한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다"라는 문장을 삽입하기도 했었는데, 쓰면서는 '중산층 가정'의 정의에 대해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이 문장을 적으며 나는 아마 이런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애비'는 건축을 전공한 엔지니어다. 미술에 재능이 있으나 배를 곯기는 싫어 공대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에는 대기업 계열의 건설회사와 건축 사무소를 전전했다. 기술사 자격증을 땄지만 건축사 시험에는 실패, 그쪽 업계 용어로 "쌍술사"가 되지는 못하고, 시공 감리 전문가로 남았다. 전문직이긴 하나 의사나 변호사처럼 널리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같은 직업군에 속하는 설계사에 비한다면, 뭐랄까, 현장 노동에 가까운 직업. 그래도 전공이 전공인지라 집에는 건축 관련 서적들이 꽤 있었고, 엄마 또한 인테리어 전문가 지망생이기도 했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에는 아이 엠 페이니, 가우디니, 마리오 보타니, 김수근이니 하는 건축가의 이름들이 종종 오르곤 했다. 차를 타고 가다 이름 있는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 보이면 지적하고 논평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를 키운 팔할은 엄마, 더 정확하게는 엄마에 대한 애정 갈구와 동시에 보호 심리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정신분석의라면 나를 두고 아마 엄마로부터의 분리에 실패한 사례라 할 것이다.

엄마는, 앞서 말한대로, 인테리어 전문가를 꿈꾸며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으나, 국비장학생 시험에 실패하고는 맞선으로 만난 아빠와 결혼해서 주부로 안착했다. 엄마는 이른바 "명문여대", 아니, 그 뿐인가, "명문 여중고" 출신이었다. 이는 그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심지어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누구' 엄마이기에 앞서 '어디' 출신으로 기억되곤 했다. 그 '누구'에 해당하는 내가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축에 속해서였을까. 사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앞으로 나서기를 극도로 꺼려했던 내게, 사교적이며 이른바 '육성회의'를 비롯, 어느 모임에서나 주도적 역할을 하곤 하는 엄마의 존재는 부담이었다. 동시에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을까. 아니면, 사실은, 타인에게 엄마를 빼앗길 것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식 석상이 아닌, 사적 공간, 즉 집에서의 엄마는 내게 무한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당시 엄마의 이른바 '사교육'은 이제사 생각컨대 흠잡을 데 없었다.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피아노 교습을 강요한 걸 빼면, 공부에 관한 한 이렇다 할 강요는 없었다. 대신 나와 동생의 손을 잡고 1주일에 한 번 꼴로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사고, 동방아트홀의 이중섭 전시회에 데려가고, 명동 에스콰이어 소극장의 「올리버 트위스트」 공연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그 시절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도리어 이것이 이후의 성장에 있어 장애물로 작용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엄마와의 비분리 상태가 너무 안락하고 행복했기에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기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엄마로부터의 독립이 지연되고, 엄마에 의해 강제적으로 분리가 행사된 이후에도 이를 소화하지 못한 채 분리 이전의 원상태로 복귀하려는 퇴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  

세월이 지나 나는 엄마의 모교에 입학함으로써 분리에 다시 한번 실패한다. 하필이면 또 그녀가 다닌 가정대 건물에서 진행된 수업 시간에 과제로 제출한 자전 에세이에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다"라 적는다. 이 말을 적으며 실제로 위에 적은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하고 싶었다 해도 할 수 있었을지. 한다 해도 어디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로부터 또 몇 년인가 지난 후에, 가족사를 술회할 다른 기회가 또 있었다. 누군가가 나와 내 부모의 계급적 위치에 대해 내린 특정한 판단에 격한 반발심을 느끼고는 반박을 준비했다. 판단의 주관성과 임의성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른다. 판단이 주관적이고 임의적이며 무의미한 만큼, 반박할 여지도 그럴 가치도 사실 없었다. 반박이랍시고 내가 적은 것은 "부모님은 나를 부족함 없이 키우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가 고작이었다. "나는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였는지도 모른다.  

『베르그손주의』의 촉발로 사정없이 몰려들고 있는 추억의 물결. 까딱하다가는 이 "생명의 대양", "순수 상태의 시간"에 익사하게 생겼다. 이제 다시 '지성'을 환기시켜 '긴장'하고 지금/여기의 '공간'으로 복귀할 '시간'이다.

복귀하기 전에 잠시
Un clip bergson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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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베르그송주의』를 처음 읽던 2000년대 초 무렵,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베르그손의 기억 및 지속에 대한 꽤 그럴 듯한 해석이라 생각했었다. 스플릿 스크린으로 공간의 외재화와 분리의 기능을 보여주는 점이라든가, 화면 상단의 "순수 과거"라는 흐름의 첨점이 화면 하단의 현재와 조응하도록 함으로써 시간의 속성을 표상하고 있는 점에서. 상하단 모두 컷 없이 원테이크로 찍은 것은 '지속'에 대한 표현이겠고. 베르그손까지 안 가더라도 최소한 프루스트까지는 되겠다. 비누방울이나 노란 꽃 등등은 마들렌느의 대리물이고.

—박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