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5일 금요일

안부

언젠가부터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일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잘 지내냐"고 묻고  "잘 못 지낸다"고 답하는 것이 전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라는 걸 알면서 왜 늘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걸까요? 심지어 답이 어떻게 나올지까지 알면서 말이지요. 차라리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그러니까 날씨에 관한 언급 수준의, 알맹이 없는 언사였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을 테지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만큼 핵심을, 정곡을, 폐부를 찌르는 질문이 또 있을까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애써 덮어두려 했던 나의 현재가 있는 그대로, 나의 삶이 가장 헐벗은 상태로 환기되기 때문입니다. 언제쯤이면 의례적으로라도 "잘 지낸다"고 답할 날이 올까요.
... 라고, 2011년 여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다 나는 적었다. 이제사 보니 그때 주고받던 문답이 저 유명한 "오겡끼데스까/와따시와 겡끼데스"의 실사판이었던가? 영화만큼의 애절함은 물론 없었지만 우리는 제법 간절했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나는 어서 그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 종료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잘 지낸다는 답까지는 힘들어도 잘 지내냐는 질문만큼은 부담없이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랬던 것이 어느새부턴가 우리는 인사는 고사하고 그 어느 형태의 소식도 주고받지 않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임을 희망의 근거보다는 핑계의 사유로 삼게 된지 오래인 지금. 문득, 부른지 오래되어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그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잘 지내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