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에 페르디낭 알키에(Ferdinand Alquié) 만한 적격자도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권위자로 드높은 명성을 지닌 철학사가로서 그가 가진 권위도 권위지만, 무엇보다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본 이도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1956년 한 강연에서 이 문제를 다뤘고, 강연문은 "Qu'est-ce que comprendre un philosophe ?"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05년에 재출간된 이 책을 나는 작년 여름에 뽕삐두 센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당시 책을 읽으며 적은 노트를 최근에 우연히 발견했다. 알키에가 본문에서 말르브랑슈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는 바, 철학이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낯설음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Unheimlichkeit !?!?), 철학사는 낯설음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 기록을 옮겨 본다. 
데카르트나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유클리드 정리와 같은 비인격적/비인칭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한 심리학적 대상으로서 분석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그가 의심이 많은 체질이거나 성장 환경 때문에 의심이 많아졌다든지, 그래서 사람에 대한 신용과 불신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고 그것이 방법으로서의 회의에 영향을 미쳤다든지 하는 전기적, 심리적 인과 분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철학은 철학적 진리를 말하거나 추구한다. 철학적 진리는 비인칭 진리는 아니지만 보편 진리이다. 철학자와 그의 철학은 인격적/개인적 보편성을 담보한다. 혹은 주관적 보편성. 과학적 진리의 보편성도 아니고 심리학에서처럼 한 개인에게 한정된 개인적 진리도 아닌. 철학적 진리가 개인적이라면, 즉 칸트나 데카르트 개인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특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적 진리는 보편적이고, 이는 특수한 의미에서 그러한데, 그 진리를 주창한 철학자와 연결돼 있다는 의미에서다.

철학자는 세상을 의문에 부친다.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모든 철학자는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노라 불평한다. 실제로 이해받지 못했다 느낀 듯하다. 이는 동시대인들과 교환한 서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는 외롭다. 그는 보편 진리를 발견했음에도 그 진리를 공유하지 못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 있다.

1630년, 영원진리를 발견한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수학적 증명보다 더 자명하게 밝힐 방법을 찾았노라며 메르센느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덧붙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수학적 진리보다 더 자명한데 설득이 불가하다니. 보편적이고 확실함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진리라니. 서구철학은 어찌 보면 몰이해에서 나왔다. 소크라테스 같은 현자가 이해받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이었듯. 그러나 어떤 사실이나 가치가 자명함에도 이해불가한 경우가 드문 곳은 아니라며 알키에는 예를 든다. 창조자가 피조물에 비해 우월하다. 과학을 만드는 정신이 그가 만든 산물인 과학에 비해 우월하다. 알키에에 따르면 이것은 매우 자명한 진리임에도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자명한가?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주체의 소외, 상품의 물신화 등등을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알키에는 또 철학과 역사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한다. 특히 철학(자)을 역사 안에 위치시키려는 철학사 방법에 반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헤겔 : 철학을 독살하고 감금하는 역사. 모든 철학, 사유가 역사의 한 순간이요 그 시대의 산물이고 표현이라는 것이 헤겔의 주장. 칸트가 어떻게 과학이 가능한지를 물었다면 헤겔은 어떻게 칸트의 물음이 가능했는지를 묻는다는 것이다 (이 도식으로 보면 헤겔은 푸코의 고고학의 선구자가 되는 셈). 맑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모든 철학과 사유를 단지 (스쳐가는?) 역사의 한 순간으로 만든다는 것이 알키에 비판의 주요 논지다. 모든 철학자들이 고독하지만 그는 그가 주장하는 진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하고 호소한다. 동시대인들에게. 혹은 역사에. 그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와의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대화의 중요성 -- 변증법이 아니라. 플라톤은 물론, 고전시대 말르브랑슈와 베이컨 등까지. 대화란 늘 나와 닮은 누군가, 나와 동등하고 유사한 의식 주체를 상정한다. 그리하여 정신의 평등한 공화정이 성립된다. 그러나 헤겔에게는 그와 같은 유사자가 없다. 각 철학자가 역사와 환경의 산물이라면 철학자들 사이에 유사성이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겔이나 맑스가 전제하는 진보사관에 따르면 후대 철학자가 선대 철학자보다 우월하다. 후대만이 선대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단지 그뿐은 아니고 전제상 시대와 환경이 다른 철학자의 질문과 답변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답변보다 질문을, 문제를 중시하는 것도 이 같은 접근의 특징 (이 지점 또한 알키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선대의 질문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버클리에게나 우리에게나 중요하고 사실상 답이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체계?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철학자의 체계를 이해하거나 재구성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실제로 철학사의 가장 고전적인 정의 중 하나다. 한 철학을 이루는 요소들은 그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그것이 전체 내에서의 위치,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라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체계가 철학의 전부는 아니라고 알키에는 강조한다 (이처럼 알키에는 게루나 뷔유맹 등의 이른바 구조주의적 철학사에도 반대하는 듯하다). 데카르트는 체계의 구축을 목표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진리 추구였다. 칸트와 버클리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체계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방법으로서 불완전하다. 심리적 방법, 수학적 방법, 역사적 방법 등 많은 방법이 그러하듯. 무엇보다 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이다. 체계적 접근은 자명하지 않은 요소들을 자명한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다. 또한, 체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라이프니츠의 체계와 칸트의 체계는 엄연히 다르다. 체계적 접근은 각 철학자들의 특수성을 사상한다. 각자 자신의 환경과 교류하고 그에 반응하며 그러한 점에서 열려 있는 고유한 개성을.

그리하여 철학자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알키에가 제시하는 것은 과정/절차démarche를 통한 접근. 생성적 접근. 체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 각 철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한 체계에 이르기까지, 주관적 인식에서 보편적 언명으로 이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이야말로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의 창조 테제. 그리고 칸트의 경우에는 부정량에 관한 소고에서 보인, 감각적인 것의 개념으로의 환원불가능성 테제. 이로부터 <판단력비판>에 이르기까지 이 감각과 지성의 이분법의 도식은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과정이란 일정한 테마-주제들 사이에 논리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르브랑슈, 파스칼, 흄, 칸트 등은 너무도 다르지만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자연에서 법칙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문제-주제로 삼았다는 점.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인데 충분히 구속적이며 보편적인 법칙의 존재를 의문에 부쳤다는 점. 각자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이 법칙의 필연성 자체가 우연성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즉 자연-대상이 존재론적으로 불충분하다는 것. 그 부족분을 말르브상슈는 신에게서 찾으려 했고 흄은 대상이 아니라 주관에서 찾으려 했다. 이들이 각자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밟은 절차는 각각 다르다. 이 절차들은 그것을 직접 밟은 철학자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개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에 그만큼 의미도 한정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절차는 바로 그가 직접 밟았다는 사실에 의해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각 절차들은 특수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보편적이다. 동시대인들이건 후대인이건 간에 그들과 닮은 사람들에 의해 거의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노트가 새삼 눈에 띈 것은, 마침, 푸앵카레를 한 명의 엄연한 철학자로서 보고, 그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서 접근하기 위한 여러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던 때문. 그런데 아직도 "모색"이라니!?!?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그렇지만 논문의 주제 자체가 "모색"에 대한 탐구요, 따라서 논문 전체 방향도 모색의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고 있는 만큼, 논문 또한 모색에 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주객일치라고 보면 되겠다. 방법론과 기타에 지나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나머지 주객전도가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으나. 

어쨌든 온갖 시행착오와 좌충우돌 끝에 기껏 체계로 규정하고 체계의 진화를 추적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알키에가 제시하는 방향과 그리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익숙함"은 위 인용문 마지막 문단에서 전하는 바, 법칙 필연성의 우연성 논제에서 왔다. 이 논제를 푸앵카레 규약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 내 주장인데 이 논제가 실은 17세기에 이미...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는 물론 고대에서도 유사한 전례가 나올 것이다. 이것이 철학사의 힘이자 한계다. 이 익숙함에서 다시 낯설음을 이끌어내고 새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안부

언젠가부터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일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잘 지내냐"고 묻고  "잘 못 지낸다"고 답하는 것이 전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라는 걸 알면서 왜 늘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걸까요? 심지어 답이 어떻게 나올지까지 알면서 말이지요. 차라리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그러니까 날씨에 관한 언급 수준의, 알맹이 없는 언사였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을 테지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만큼 핵심을, 정곡을, 폐부를 찌르는 질문이 또 있을까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애써 덮어두려 했던 나의 현재가 있는 그대로, 나의 삶이 가장 헐벗은 상태로 환기되기 때문입니다. 언제쯤이면 의례적으로라도 "잘 지낸다"고 답할 날이 올까요.
... 라고, 2011년 여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다 나는 적었다. 이제사 보니 그때 주고받던 문답이 저 유명한 "오겡끼데스까/와따시와 겡끼데스"의 실사판이었던가? 영화만큼의 애절함은 물론 없었지만 우리는 제법 간절했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나는 어서 그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이 종료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잘 지낸다는 답까지는 힘들어도 잘 지내냐는 질문만큼은 부담없이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랬던 것이 어느새부턴가 우리는 인사는 고사하고 그 어느 형태의 소식도 주고받지 않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임을 희망의 근거보다는 핑계의 사유로 삼게 된지 오래인 지금. 문득, 부른지 오래되어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그 이름을 불러본다. 그리고 물어본다. 잘 지내느냐고. 

의식 흐름의 기록

혹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에 대한 모방의 시도. 결과는 물론 모방의 대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나오리라. <마장동>. <한양도 성>. <공원을 읽다>. 현재 바로 눈앞에 들어오는 한글책들. 이런 책들이 눈앞에 두고 하필이면 또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그 책들과는 전혀 무관한, 무척이나 프랑코프랑스적인 논문을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상황. 10년째. 이제 조금 있으면 정말 10년을 꼭 채우게 된다. 이곳은 ㅅ 언니가 다녔고 또 논문 심사까지 마친 곳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7년 전. 그리고 그녀는 나보다 7살 위이니, 당시 그녀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그녀가 힘든 여름을 보낸 끝에 가을에 논문을 제출하고 겨울에 심사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가 그 여름을 얼마나 치열하게 보냈는지도. 역사의 반복. 그런데 역사는 반복되는가? 푸앵카레에게서의 역사성의 의미에 대해 적다가 만 참이다. 그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을 구분한다. 반복되는 사실이 있어 그 사실이 축적되어 자료/소여가 되어야 하고, 그 가운데에서 항상적인 패턴을 발견해야 그로부터 법칙을 수립할 수 있고, 그로부터 예측을 이끌어내는 것이 과학이라면,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 않는가? 그러나 반복이라고 꼭 동일한 것이 재연되는 것이 아니고 그에 우선하고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차이라고 들뢰즈는 설파하지 않았는가? 들뢰즈에 대한 오독/모독. 결국 들뢰즈는 제쳐두기로 했다. 대신에 푸코를. 그렇지만 푸코 독해 역시 오독/모독으로 점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슈발레나 앙젤 등의 전례를 기억하자. 이들은 과학철학/과학사에서 출발, 각각 양자역학의 역사와 철학, 언어분석철학 및 인지과학의 철학에서 착실한 커리어를 쌓아왔는데 언젠가부터 푸코의 독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앙젤이 <에른느> 시리즈의 푸코 편에 실은 글에서 말하길, 70년대에 보낸 학부 시절부터 충실히 푸코를 따라왔다고. 뱅센느에서 들뢰즈의 강의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의 강의를 듣느라 주중 내내 바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푸코의 강의를 들으려면 두세 시간 전부터 가서 줄을 서야 했다니까. 그러다가 학업을 마친 후 전임강사 시절, 푸코를 초청하여 직접 만나게 되었는데, "예전에 당신 수업을 열심히 들었는데 지금은 논리학자가 되었다"고 하니 푸코가 웃더라고. 앙젤보다는 조금 세대가 앞서지만, 앙젤이 속한 프랑스의 소수파 분석철학 진영의 수장, 자크 부브레스도 최근에 푸코에 관한, 약간 안티푸코 성격을 지닌 저서인 Nietzsche contre Foucault 를 출간했는데, 그 역시 초창기부터 꾸준한 독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다른 일례로 영미권이지만 이 분야의 정통인 해킹은 또 어떤가. 그의 통계학의 역사나 정신분석학 역사 연구는 푸코의 고고학 방법론에 영감을 받은 바 크다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2003-4년 경 푸코 세미나를 열었었다. 그리고 앙젤도 이번 학기에 재직중인 사회고등과학원에서 푸코 세미나를 열었다. 나는 둘 다 가지 않았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독자...라기엔 무척 편파적이요 파편적으로 푸코를 읽긴 하지만, 어쨌든 남몰래 자칭 푸카디엔느가 되어 논문에서 어떻게든 써먹을 요량에 이르게 된 계기는 "고전시대" 때문이었다. 인문학/인간과학의 고고학. 고전시대 광기의 역사. 소위 초기의 인식론자 푸코. 그래서 나는 "지식-권력"이나 생권력 등등으로 환원되는 소위 중기나 <성의 역사> 이후의 후기는 전혀 모른다. 파레지아, 자기 통치, 자기에의 염려 등등의 개념을 양산한 70년대-80년대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도 전혀 모른다 (계속 "소위"라는 말을 붙이는 까닭은 한 사람의 학문적 인생을 시기별로 구분하는 일은 늘 한계를 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 단순한 편리상의 이유나 또 그만큼의 한계를 넘어 그의 사상의 진화를 잘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년 전, 푸코랑 전혀 무관한 한 수학사 세미나에서, 17세기 데카르트 혹은 라이프니츠를 주제로 발표한 한 미국 학자가 그랬다. "고전시대라는 말을 쓰고 싶어요. 푸코의 나라이니까요." 한편 게리 거팅은 A Short Introduction to Foucault 에서 푸코를 소개하는 서너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푸코로 너무 나가 버렸다. 더 길게 잇지 않는 것은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어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재활이다. 논리력과 집중력 재활 훈련.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그 논의를 이어가는 연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논의가 무엇이었더라? 역사. 역사의 반복.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연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역사는 어떠한가? 과학 자체는 우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데 그것의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에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 자체가 우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도 기실은 이미 푸앵카레 시대에 수정되는 중이었다. 우연의 법칙--오늘날 용어로는 통계학 법칙이 물리학에서도 중요한 방법으로 쓰이기 시작하고 또 그 자체 엄밀하고 독립적이고 고유한 방법 중 하나로 인정돼가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역시 이 부문에서도 양가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모든 종류의 "신문물"에 대해 그는 참으로 일관적으로 양가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테면 왜 열역학은 2개의 근본 법칙을 바탕으로 정립되었는가? 왜 2개이고 왜 하필 그것들인지를 연역적으로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푸앵카레는 수립과정을 카르노에서 마이어, 줄, 클라우지우스, 톰슨 등등이 2개 법칙을 어떻게 정립했고 그로부터 어떻게 열역학의 이론들이 구축되었는지 역사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열역학 강의> 서문에서 말한다...

수정, 옥희, 해원, 선희... 홍상수 영화의 여성성과 시간성

홍상수는 제목에 대한 감각, 말하자면 타이틀링 센스가 뛰어난 작가 중 하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북촌방향> 같은 제목들은 친숙하면서도 참신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돼지, 우물, 강원도, 생활 등등의 일상적인 단어들을 차용하되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아라공의 인용이고, 영화 내용과 무관하지만 (반어법이라면 모를까), 바로 저 어구를 제목에 가져다 붙인 감각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영어제목들도 듣기에 제법 그럴싸하다.

그런 만큼 홍상수 영화에서 제목이 명목상에 지나지는 않으리라 믿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제목에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부분, 아니 전부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쓰이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우연이라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수사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우연에 관해 명시적으로 천착한 <북촌방향> 외에도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우연을 라이트모티프로 쓰고 있는 작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이 지점에서만큼은 홍상수가 "우연이라 해서 요행한 것은 아니다(Le hasard n'est pas fortuit)"를 좌우명으로 삼은 로메르의 제자임은 확실하다. 우연이고 특별한 법칙이 없다 해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렇담 저 여성형의 이름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 수정>은 세기말적 퇴폐와 염세와 비관으로 가득했던 90년대 말의 첫 두 작품 이후 2000년대를 연 영화. 돌이켜보면 코미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였던 것 같다. 장르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의미에서의 전환. 냉소와 자기조롱과 희화화로. 그러나 무엇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같은 사건과 역사를 세 인물들의 상이한 시점에서 전개하는 방식의 새로움에 경탄하던 내게 당시 사람들이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들며 그때부터 이미 진부함을 언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제사 다시 생각해 보면 진부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다중시점이라는 하나의 틀로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성급하게 봉합한 비평적 태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더 주목해서 봐야 했던 것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 그 장치가 비록 진부하긴 했을지언정, 사건들과 시간이 새롭게 짜여지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홍상수 세계에서 이 영화가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정"의 표제 등장에 있지 않았을까. 수정은 처음 두 남자 각각의 버전에서는 그저 새침하고 애태우는 처녀(!)이거나 흔들리는 갈대로 그려지는데, 이 버전들은 결국 마지막 수정 버전에서 최종적으로 종합된다. 그러나 수정은 셋 중 가능한 하나의 버전을 제시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나아가 이후 역사의 전개에 있어 열쇠를 쥐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시선에서 사건이 재해석될 때, 아니 사실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질 때, 우리는 그녀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고, 아마도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부잣집 아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했고, 우연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였던 사건이 실은 그녀에 의해 교묘하게 계획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수정의 시선 및 역사 주체로서의 힘은 거의 전적으로 작가에게서 온다. 그녀는 사실 시선의 주체가 아니라, 작가의 대리물, 아니 그마저도 안되는, 여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체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뭐 이런 구조야 굳이 이 작품에, 아니 이 작가에게만 해당되겠냐마는... 어쨌든 이런 이유로 영화가 내겐 불편했고, 당시 같이 본 이들에게도 그러했고, 그들과 술 마시며 한탄했다 ("영화가 왜 이리 척척해" 하고 그 낭창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ㅅ 언니의 기억이 문득). 그리고는 한동안은 홍상수 영화로부터 멀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그의 관객이 되었다. 언젠가부터라 했지만 그 시점은 정확히 꼽을 수 있다. <해변의 여인>부터였다. 작가의 페르소나와 그 남성적이고 독단적인 시선이 영화를 지배하던 경향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그래도 좀 생기와 존재이유가 느껴지는 여성 인물의 등장 (고현정). 그때가 홍상수 영화에서도 어떤 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최소한 관객으로서의 내게는 그랬다 (이는 또 로메르적 전환이라고도 하겠다. 실로 로메르에게서도 Contes moraux 연작에서 Comédies et proverbes 연작 사이에 유사한 종류의 전환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좀더 밀고 나가면 일종의 타자의 발견이자 여성성의 (재)발견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니" 식의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찬미이거나 변명은 아니고 (그렇다 해도 참기 힘든데 그러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마저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내겐 최악의 홍상수), 실제로 작가에게도 발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는 잘 몰랐거나 관심이 없던 신세계를 발견한 자의 경이 같은 것이 적어도 내겐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영화마다 아주 미세하고 느릿한 변화가 감지되었고(이를테면 엄마라는 존재의 등장 같은 것), 그런 변화들을 추적하는 재미가 붙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인 듯해도 그 반복의 대상이 동일한 것은 아니어서 겨우 식별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담지하고 그러면서 점진적 변화를 이루는 생명체의 성장 및 진화 과정을 참관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홍상수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보는 최근의 거의 유일한 감독이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신작이 나올 때마다 꼬박 챙겨서 개봉하는 유일한 한국 감독이라는 변인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수정 이후 다시 그야말로 타이틀 롤로 등장한 인물은 <옥희의 영화>의 옥희. 이 영화는 내겐 다소 충격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찡해져왔던 것이다. 세상에, 홍상수 영화 보며 내가 가슴이 찡해오는 경험을 다 하다니.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옥희의 존재. 아니 옥희라는 행위. 배우이자 행위주체(acteur ou bien même actrice !)로서의. 영화는 이전까지 홍상수 영화에 숱하게 나왔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감독/교수/지식인 남성이 아니라 영화과 학생인 옥희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시점이라 하지만 그녀의 시점은 구심점 혹은 초점이라기보다 그녀가 영화 안에서 스스로 만드는 영화, 그리고 삶을 그리는 수많은 가능한 시선이 만나는 교차지점에 가깝다. 그 어느 전지적, 아니 하다못해 우월한 시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시선의 해체. 시선의 탈중심화.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어진다. 비록 주인공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구도나 구조 면에서는 옥희의 경우와 유사하다. 역시 영화과 여학생이 구상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전개되고 게다가 이 전지적 작가의 역할은 같은 배우(정유미)가 맡았다. 그런데 이 작가의 페르소나는 또 이자벨 위페르가 맡은 프랑스 여성 안느이다. "시간을 때우고자 시나리오를 하나 쓰기로 한다. 주인공은 얼마 전 영화제에서 본 프랑스 여성 감독으로 한다." 이방인 여성의 시선. 그리하여 시점은 단지 한 평면에서 다중화될 뿐 아니라 다(차)원화된다.

그러나 정작 <누구의 딸도 아닌...>과 <우리선희>에서는 다소 주춤한 듯 보인다. 각각의 표제인물 해원과 선희는 사실 옥희보다는 수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수정만큼 절망적이는 않았던 것은, 해원이나 선희나 수정만큼은 아니어도 어쨌든 꽤나 답답한 상황인데, 그래도 그나마, 어떤 여성적 계기(moment)들이 있어 뭐랄까, 숨통 장치 같은 역할을 해준 때문일 것이다. 제인 버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해원 엄마 역으로 등장한 김자옥. 이 역시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 홍상수 영화에, 윤여정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김자옥을 보게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민 간다는, 최소한 홍상수의 작품 세계에서는 다소 생경한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녀와 해원이 만든 모녀 관계가 내겐 참 낯설고도 신선했다. 아무리 떨어져 산다 해도 모녀가 어쩜 저렇게 서로를 어쩜 저렇게 남 대하듯 할까. 엄마가 딸한테 "얘, 넌 어쩜 그렇게 예쁘니? 미스코리아 나가보는 건 어떠니?"라질 않나, 딸은 딸대로 "멀어져 가는 엄마의 뒤태가 처녀처럼 날씬했다" 라질 않나. 근데 그래서 오히려 해원이의 해맑은 얼굴이 안돼 보이진 않았는데, 그에 반해 선희에게선 다시 안타까움이. 세 남자에 둘러싸인 선희. 그래도 마지막에 그 세 남자들이 모인 자리. 저마다 선희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서. 그러나 선희는 그 자리에 없다. 세 사람과의 관계와 시선에 얽매인 듯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그녀는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두 영화를 여성성-시간성을 두 축으로 하는 계보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최근작 <자유의 언덕>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일단 제목도 그러하고, 어쩌면 오히려 주인공이 시간에 관한 책을 읽으며 시간에 대한 사변을 늘어놓으면서도 가장 탈시간적이고 무시간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영화가 위의 시간성-여성성 계보에 속하며 그 정점을 이루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 모리는 읽고 있다는 시간에 관한 책에 관해 말한다. "결국 시간은 결국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경험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라는 것은 다 우리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이 이론에 대한 영화적 고찰이자 어쩌면 입증이다.

일본인 모리가 영어로 쓴 편지를 편지의 수신인인 권이 읽는다. 영화는 바로 권이 편지를 읽는 관점과 순서대로 진행된다. 그런데 권은 중간에 편지를 읽다가 떨어뜨리고 그 뒤로 편지의 순서는 마구 뒤섞이고 이에 따라 영화의 시간적 순서 및 서사도 뒤섞인다. 그에 따라 사건들은 반복해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화자이자 작자는 이방인 남성 모리이지만 여기에서 서사의 열쇠를 쥔 것은 독자이자 수신인인 권이다.  
 
펠리니의 <사티리콘>도 그러했다. <사티리콘>은 남겨진 중 최고의, 즉 가장 오래된 라틴문학이자 말하자면 사상 최초의 소설인데, 완본은 없고 다만 단편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남겨진 부분만 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전혀 안 되고 뭐가 뭐고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니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포스트모던하다고도 헐 수 있는 것인데. 이를 펠리니는 있는 그대로, 즉 남아있는 판본 그대로 따다가 영화화했고, 그리하여 자연히 영화도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사실 펠리니의 다른 영화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가장 오래된 예술형식인 문학과 가장 최근에 발명된 형식에 속하는 영화의 조우. 여기에서 양자를 가르는 역사의 차이, 그리고 영화 탄생 후 흐른 1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무화된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영화적 시간, 특히 현대영화에서의 시간, 이미지-시간과 (고전)문학적 혹은 서사적 시간성,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e, chronos+logos)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심리적 시간, 온전히 경험하는 가장 순수 상태의 시간(프루스트), 말하자면 지속에 가깝게 표상된다. 요컨대 베르그손적 의미에서 가장 덜 영화적인(cinématographique) 방식으로. 과장하면 가장 베르그손적으로.

<자유의 언덕>은 결말 또한 충격이었다. 몹시 비현실적이고 더더군다나 홍상수의 세계에선 더더욱 그러한, 그야말로 동화적인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극적으로 해후하여 나란히 언덕길을 걷는 두 사람 뒤로 모리의 내레이션은 거의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아이도 많이 낳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수준. 이십년 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하드코어 치정극 결말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이것은 혁명적이다. 여성적인 것의 구원? 그보다는 시간의 힘. 

Fortune Cookie Messages for the New Year

음력설을 맞아 열어본 행운의 과자에서 나온 메세지.
Demain, en étant aimable, vous ouvriez toutes les portes.
앞으로 친절해져라. 모든 문이 열릴 것이다. 친절해지는 것까진 좋다. 그렇다고 쉽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기보다는 두렵다면?
 
Un nouveau parfum pourra vous faire rêver.
새로운 향수가 당신을 꿈꾸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꿈은 충분히 꿨다. 그러니 향수는 패스.
  
Un vide sera bientôt rempli.
조만간 공백이 채워질 것이다. 아멘. 
Vous êtes doué pour mettre de l'ordre dans le désordre.
당신에게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재능이 있다. 즉 정리정돈을 잘한다는 말. 오, 내겐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말인지. 
 
Bravo ! Quel que soit le degré de difficulté de la situation, vous trouverez la solution.
브라보! 상황이 얼마나 어렵든지 간에 당신은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아멘.
 
Vous faites un tabac.
직역하면 담배를 만든다는 뜻인데, 주로 성공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즉 당신은 성공한다. 아멘.

거리에서 말걸기

"거리에서 날 따라오는 사람은 늙고 역겨운 이들 뿐이네"라 에디트 피아프는 노래했는데 이건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언젠가 아는 선배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는, 아가씨들에게 거리낌없이 수작을 걸 정도인 프랑스 할아버지들의 배포와 자신감이 놀랍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기사도 정신-궁정문화-낭만주의 등등으로 이어진,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특유의 갈랑트리의 유산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다 보기에는, 오, 그 수준이란 것이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문제는 연령이 아니라 방법에 있다. 나이와 외양이 말걸기에 적합한가는 다음 문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거느냐다. 기껏 말을 걸어놓고 묻는다는 게 "중국인이세요? 일본인? 아님 한국인?"이라면 호감은커녕 관심도 사기 힘들다. 질문 자체야 뭐 잘못된 게 아니고 이국적 외모의 소유자에 관한 한 국적이 일차적 관심사인 것도 이해하지만, 문제는, 오, 그게 클리셰가 되어버렸단 사실. 같은 궁금증도 수사와 표현을 조금만 달리 하면 그럴 듯한 변주가 가능하거늘. 이를테면, 국적을 묻는 질문인 "어디에서 왔나요?"를 살짝 변형한 형태인 "당신의 매력은 어디에서 왔죠?"라든지--실제로 누군가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대고 "그게 무슨 질문이죠?"라며 대놓고 면박을 준 것은 아직껏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쨌든지 간에 거리에서의 말걸기에는 그 발상 자체에서부터 동의하기 힘들다. 우연적 만남이 경우에 따라선 운명적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더더욱 그 본질을 가장 잘 살리는 길은... 그냥 스쳐지나가게 놔두고 또 스스로도 스쳐지나가는 것. 그럴 때 비로소 그 만남의 순간에서 영원을 체험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보들레르, 지나가는 여인에게). 비록 브라상스는 또 "사랑의 신이 거리에서 당신을 스쳐 지나갔네/ 어느날 저녁, 어디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그러나 당신은 알지 못했네/사랑의 신은 그만큼 짖궂다네"라 노래하고 있지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