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실제로 1956년 한 강연에서 이 문제를 다뤘고, 강연문은 "Qu'est-ce que comprendre un philosophe ?"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05년에 재출간된 이 책을 나는 작년 여름에 뽕삐두 센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당시 책을 읽으며 적은 노트를 최근에 우연히 발견했다. 알키에가 본문에서 말르브랑슈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는 바, 철학이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낯설음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Unheimlichkeit !?!?), 철학사는 낯설음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 기록을 옮겨 본다.
데카르트나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유클리드 정리와 같은 비인격적/비인칭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한 심리학적 대상으로서 분석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그가 의심이 많은 체질이거나 성장 환경 때문에 의심이 많아졌다든지, 그래서 사람에 대한 신용과 불신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고 그것이 방법으로서의 회의에 영향을 미쳤다든지 하는 전기적, 심리적 인과 분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철학은 철학적 진리를 말하거나 추구한다. 철학적 진리는 비인칭 진리는 아니지만 보편 진리이다. 철학자와 그의 철학은 인격적/개인적 보편성을 담보한다. 혹은 주관적 보편성. 과학적 진리의 보편성도 아니고 심리학에서처럼 한 개인에게 한정된 개인적 진리도 아닌. 철학적 진리가 개인적이라면, 즉 칸트나 데카르트 개인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특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적 진리는 보편적이고, 이는 특수한 의미에서 그러한데, 그 진리를 주창한 철학자와 연결돼 있다는 의미에서다.이 노트가 새삼 눈에 띈 것은, 마침, 푸앵카레를 한 명의 엄연한 철학자로서 보고, 그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서 접근하기 위한 여러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던 때문. 그런데 아직도 "모색"이라니!?!?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그렇지만 논문의 주제 자체가 "모색"에 대한 탐구요, 따라서 논문 전체 방향도 모색의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하고 있는 만큼, 논문 또한 모색에 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주객일치라고 보면 되겠다. 방법론과 기타에 지나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나머지 주객전도가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으나.
철학자는 세상을 의문에 부친다.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모든 철학자는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노라 불평한다. 실제로 이해받지 못했다 느낀 듯하다. 이는 동시대인들과 교환한 서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는 외롭다. 그는 보편 진리를 발견했음에도 그 진리를 공유하지 못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 있다.
1630년, 영원진리를 발견한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수학적 증명보다 더 자명하게 밝힐 방법을 찾았노라며 메르센느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덧붙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수학적 진리보다 더 자명한데 설득이 불가하다니. 보편적이고 확실함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진리라니. 서구철학은 어찌 보면 몰이해에서 나왔다. 소크라테스 같은 현자가 이해받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이었듯. 그러나 어떤 사실이나 가치가 자명함에도 이해불가한 경우가 드문 곳은 아니라며 알키에는 예를 든다. 창조자가 피조물에 비해 우월하다. 과학을 만드는 정신이 그가 만든 산물인 과학에 비해 우월하다. 알키에에 따르면 이것은 매우 자명한 진리임에도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자명한가?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주체의 소외, 상품의 물신화 등등을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알키에는 또 철학과 역사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한다. 특히 철학(자)을 역사 안에 위치시키려는 철학사 방법에 반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헤겔 : 철학을 독살하고 감금하는 역사. 모든 철학, 사유가 역사의 한 순간이요 그 시대의 산물이고 표현이라는 것이 헤겔의 주장. 칸트가 어떻게 과학이 가능한지를 물었다면 헤겔은 어떻게 칸트의 물음이 가능했는지를 묻는다는 것이다 (이 도식으로 보면 헤겔은 푸코의 고고학의 선구자가 되는 셈). 맑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모든 철학과 사유를 단지 (스쳐가는?) 역사의 한 순간으로 만든다는 것이 알키에 비판의 주요 논지다. 모든 철학자들이 고독하지만 그는 그가 주장하는 진리를 들어줄 것을 요청하고 호소한다. 동시대인들에게. 혹은 역사에. 그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와의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대화의 중요성 -- 변증법이 아니라. 플라톤은 물론, 고전시대 말르브랑슈와 베이컨 등까지. 대화란 늘 나와 닮은 누군가, 나와 동등하고 유사한 의식 주체를 상정한다. 그리하여 정신의 평등한 공화정이 성립된다. 그러나 헤겔에게는 그와 같은 유사자가 없다. 각 철학자가 역사와 환경의 산물이라면 철학자들 사이에 유사성이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겔이나 맑스가 전제하는 진보사관에 따르면 후대 철학자가 선대 철학자보다 우월하다. 후대만이 선대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단지 그뿐은 아니고 전제상 시대와 환경이 다른 철학자의 질문과 답변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답변보다 질문을, 문제를 중시하는 것도 이 같은 접근의 특징 (이 지점 또한 알키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선대의 질문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은 버클리에게나 우리에게나 중요하고 사실상 답이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체계?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철학자의 체계를 이해하거나 재구성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실제로 철학사의 가장 고전적인 정의 중 하나다. 한 철학을 이루는 요소들은 그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그것이 전체 내에서의 위치,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라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체계가 철학의 전부는 아니라고 알키에는 강조한다 (이처럼 알키에는 게루나 뷔유맹 등의 이른바 구조주의적 철학사에도 반대하는 듯하다). 데카르트는 체계의 구축을 목표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진리 추구였다. 칸트와 버클리도 마찬가지. 무엇보다 체계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방법으로서 불완전하다. 심리적 방법, 수학적 방법, 역사적 방법 등 많은 방법이 그러하듯. 무엇보다 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이다. 체계적 접근은 자명하지 않은 요소들을 자명한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다. 또한, 체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라이프니츠의 체계와 칸트의 체계는 엄연히 다르다. 체계적 접근은 각 철학자들의 특수성을 사상한다. 각자 자신의 환경과 교류하고 그에 반응하며 그러한 점에서 열려 있는 고유한 개성을.
그리하여 철학자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알키에가 제시하는 것은 과정/절차démarche를 통한 접근. 생성적 접근. 체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 각 철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하면서 한 체계에 이르기까지, 주관적 인식에서 보편적 언명으로 이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이야말로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의 창조 테제. 그리고 칸트의 경우에는 부정량에 관한 소고에서 보인, 감각적인 것의 개념으로의 환원불가능성 테제. 이로부터 <판단력비판>에 이르기까지 이 감각과 지성의 이분법의 도식은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과정이란 일정한 테마-주제들 사이에 논리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르브랑슈, 파스칼, 흄, 칸트 등은 너무도 다르지만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자연에서 법칙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문제-주제로 삼았다는 점.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인데 충분히 구속적이며 보편적인 법칙의 존재를 의문에 부쳤다는 점. 각자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이 법칙의 필연성 자체가 우연성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즉 자연-대상이 존재론적으로 불충분하다는 것. 그 부족분을 말르브상슈는 신에게서 찾으려 했고 흄은 대상이 아니라 주관에서 찾으려 했다. 이들이 각자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밟은 절차는 각각 다르다. 이 절차들은 그것을 직접 밟은 철학자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개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에 그만큼 의미도 한정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절차는 바로 그가 직접 밟았다는 사실에 의해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각 절차들은 특수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보편적이다. 동시대인들이건 후대인이건 간에 그들과 닮은 사람들에 의해 거의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쨌든 온갖 시행착오와 좌충우돌 끝에 기껏 체계로 규정하고 체계의 진화를 추적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알키에가 제시하는 방향과 그리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익숙함"은 위 인용문 마지막 문단에서 전하는 바, 법칙 필연성의 우연성 논제에서 왔다. 이 논제를 푸앵카레 규약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 내 주장인데 이 논제가 실은 17세기에 이미...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는 물론 고대에서도 유사한 전례가 나올 것이다. 이것이 철학사의 힘이자 한계다. 이 익숙함에서 다시 낯설음을 이끌어내고 새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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